Posted on 2004/11/20 00:38
Filed Under 이미지적 인간

정~~말 오래간만에 본 영화다. 그냥 뭔가 어두워 보이는 황홀한 분위기의 포스터가 맘에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전에 포르노 배우였음을 당당하게 인정하고 터키라는 나라의 관습을 뚫고 배우가 된 시벨 케길리에 관심이 갔다.(영화의 여주인공 이름도 시벨이다...아마도 영화속의 시벨과 현실속의 시벨이 자신의 판단과 주관에 의해 움직이는 '자아'로 살아있다는 것이 같기 때문에 같은 이름을 쓴 것은 아닐까?)

 

 

영화는 터키의 보수적인 (남자의 손을 잡았다고 오빠가 여동생의 코뼈를 부러뜨리는 것이 이해되는...) 관습을 깨고 자신의 욕망과 욕구대로 살기를 바라는 20대 초반의 여성이 부인을 잃고 삶을 포기한채 알콜중독으로 살아가는 남자에게 당찬 '위장결혼'을 제안하면서 시작된다.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은 사람에 빠진다. 그것도 매우 매~~우 지독한 사랑말이다. 그들이 만난곳은 자살시도 환자들을 상담하는 정신과 병원이었으며, 시벨이 위장결혼을 성사시키는 것도 자살시도이고, 그들이 사랑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방식도 유리잔을 손으로 가루로 만들어 손을 벌겋게 물들이는 자해와 고통에 지나가는 남자한테 시비를 걸고 칼부림을 당하는 유사자살이다. 결국 사회적으로 보자면 서로가 서로를 파멸시키는...

 

그게 그들의 사랑 방식이다.

 

그들은 사랑한다. 그리고 섹스 하지 않는다. 원 나잇 스탠드를 즐기거나 힘들때 찾아가는 섹스 파트너가 있지만 섹스를 하면 실제로 '부부'가 된다고 생각하여 섹스를 하지 않는다. 그들이 비로소 섹스를 하는 것은 시벨이 사회적 관계로서의 '부부'의 역할을 하고, 차히트가 물처럼 들이키던 맥주 대신에 실제 물을 들이키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그런데 왠지 차히트가 감옥에 가기전 그들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호감) '과 감옥에서 돌아온 후의 '사랑(이라는 행위)'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전자가 '호감'이라면 후자는 '미련' 또는 '집착'이 아닌가 싶다. 차히트가 감옥에 가 있는 사이 그들사이에 흐르던 감정의 흐름은 방향과 질이 달라진 것은 아닐가?

 

'결혼'이라는 또는 '연애'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사랑'이라는 호감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것은 그런 사회적 관계로 인해 파생되는 여러가지 사건과 책임에 대한 '준수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섹스'가 그런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들 동의하는 것이 아닐런지...

 

둘은 사랑했지만...그리고 결국 섹스를 했지만 그런 '사회적 관계'에 대한 '준수의지'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사랑은 '사회적'으로 보기(보수적인 시벨의 가족들과 성공 지향적인 주류의 흐름에 있는 사촌언니의 의견처럼)에는 서로를 파멸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니 결국 시벨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준수의지'를 따라 차히트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작용한 '호감'은 '남편'에 대한 것이기라기 보다는 '가족'이라는 그리고 '딸'이라는 이전된 감정 혹은 새로 구성된 감정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그런 지독한 사적 관계를 통해 '변화'한다.

 

한때 나는 '섹스'라는 것이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 드는 생각은 '호감'을 기반으로 한 '준수 또는 유지 의지'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에 다시 한번 근거가 되어주는 영화였다. '사회적 관계'를 만드는 일은 나에게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1. 독일내 거주하는 터키 이민자들...즉 마이너리티의 이야기이다. 이미 겪고 있는 사회의 개방성에 비해 여전히 보수적인 '가족'단위 속에서의 정체성의 갈등과 고향이 '이스탄불'에서도 겪게 되는 이민자들의 정체성의 혼란

 

#2. 차히트가 이스탄불에 도착하여 탄 택시의 운전사는 독일의 '뮌헨'에서 강제추방된 '이주노동자'였다. 그에게 독일은 어떠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3. 시벨이 매우 좋아하는 사촌언니는 능력있는 호텔의 경영자이다. 잘~~ 나가는 경영자가 되기 위해 그녀는 '일' 밖에 모르는 이혼녀가 되어버렸다. 그녀의 주류적 사고와 삶을 거부하는 시벨이지만...그렇게까지 되기 위해 애쓴 그녀의 삶도 애처롭다.

 

#4. 시벨은 결국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딸'과 화목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남편'의 목소리를 들으며 짐 싸기를 포기하고 차히트는 허망한 눈으로 창밖을 아련하게 바라보며 떠난다. 시벨의 이러한 선택을 여성주의적으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이런 결말은 마초적인 걸까? 아니면 시벨의 '선택 의지'를 강조해야 하는 걸까?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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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0 00:38 2004/11/20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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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미치고 싶을 때

    Tracked from / 2005/01/03 17:20  삭제

    #1. 시벨. 그녀를 내모는 사회에 쫓긴 선택이라 하더라도 자히트와 사는 동안의 그녀는 참 아름답게 사랑했던 것 같다.

  2. Subject : 보고 싶은 영화(수정 예정)

    Tracked from / 2005/01/06 02:08  삭제

    * 이 글은 해미님의 [[미치고 싶을때] 사랑, 섹스...그리고 관계] 에 관련된 글입니다. 이 영화 꼭 봐야겠다. 그리고 그 이후 다시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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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elial 2005/01/06 0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트랙백 합니다. 아직 보지 못해서 보고 나서 다시 내용 쓸려구요. 제가 관심있는 주제라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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