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범고래의 배신 … 조련사 살해”라는 제하의 기사가 <경향신문> 국제면에 실렸더랬다. 미국 올랜도에 위치한 해상공원 ‘시월드’ 소유인 범고래 ‘틸리쿰’이 오랫동안 자신을 돌봐준 베테랑 조련사 던 브랜초 씨를 “배신”,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경험도 제일 많고 틸리쿰과도 가장 오래 지낸 조련사였다는데, 그런 그를 틸리쿰은 물어챈 뒤 “물속에서 헤엄치며 수영장 벽에 내려쳤”다고 했다. 실은 그럴 조짐이 있었다는 듯, 앞서 열린 쇼에서도 틸리쿰이 지시를 잘 안 따르더라는 관람객 목격자의 전언도 기사는 덧붙여 놨다. 진작에 알아봤어야 했다는 것처럼 틸리쿰의 ‘어두운 과거’와 난폭함도 언급해놨던데, 워낙에 그런 종자이기라도 한 양 “요주의” 대상였다는 뉘앙스다.
결국 “아홉 살 때 시월드에 와서 고래 쇼를 본 후” 마침내 이룩한 브랜초 씨의 꿈이, “자신이 조련한 고래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 역설에 이르고 말았다는 것. 그런 ‘돌발’ 상황에, 관람객들은 “놀라”서 공연장을 즉시 빠져나갔단다.
글쎄, 기사에서 드러난 상황(내지 가치)판단의 감각이 (암묵적이긴 해도) 계속 이 모양인 한, 앞으로 조련사가 설사 떼로 죽임을 당하는 ‘폭력’이 발생한다 한들, 뭐 그리 놀랄 일일까 싶다, 나로서는.
사실, 1백여 년쯤 전만 해도 무려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인종주의와 (이성애중심적) 성차별주의로 뒤엉킨 (사냥질까지 포함하는) 치떨리는 ‘인간사육’이 자본주의적 ‘문명화 과정’ 내지 노동력 창출의 일환으로 버젓이 제도화됐던 판에, 하물며 범고래 같은 생물 종들을 사육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시피한 거야 오죽할까도 싶다마는.
그래서다. 숭악하기로 치자면 인간사육의 제도화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동물원이라는 제도화된 폭력에 대한 반응으로서, 틸리쿰의 “조련사 살해”는 ‘살아 있는’ 생물 종인 이상에야 그리 놀랄 일도, 더군다나 이상한 일도 아니겠다고 한 건. 사육당하는 걸로도 모자라 정기적으로 ‘쇼’까지 해야 하는 데 대한 스트레스와 짜증이 범고래라고 사람보다 덜할 리 있겠냐는 거지. 범고래나 사람이나 같은 포유류라지만, 포유류 아니라 조류나 양서류, 파충류라 한들 뭐가, 얼마나 다를까.
필시 그렇게 스트레스 내지 짜증만땅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틸리쿰에게, 브랜초는 그냥 브랜초가 아니라 인격화된 시월드, 아니, 시월드를 모델 삼아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수중공원 내지 동물원이란 제도였을 터.
헌데 지금 저 범고래를 다루는 방식은 이를테면 이렇다. 어떤 사람이 끝없이 소외된 생명활동으로서의 노동에 진저리를 내며 플랜테이션 소유주를 살해한 걸 놓고서, 이 사건의 본질이 워낙에 “요주의”였던 그 누군가의 남다른 덩치와 타고난 포악함에 있다고 하는 격이랄까. 생겨날 때부터 이런 유형의 노동 없이는 통 굴러갈 줄을 모르는, 자본주의적 생산 내지 권력의 놀랍도록 바보 같은 해괴함이 아니라 말이다. 물론 안타깝게도, 해결의 실마리는 곧잘, 이런 해괴함을 조직적·집단적으로 주저앉히는 쪽보다는 이의 지속에 필요한 유무형의 떡고물 획득과 심리적 진정의 기술에 매혹되는 쪽으로 (잘못)잡혀오곤 했지만 말이다.
이쯤 되면 외려 들어야 할 의문은, 그렇게 사육적 관계가 지속되는데도 범고래들의 조련사 살해가 “고작 그 정도”인 건 왜일까, 여도 무방한 거 아닌가?
그래서 말인데, 시월드 측에선 “사고 조사 및 공연 내용 검토”를 위해 범고래 쇼를 중단했다지만, “중단”해야 할 게 어디 그것만이겠나 싶은 거다. 그저 “쇼 재개”를 위한 조사니 검토는, 범고래 처지에서 보면 마치 좋았던 옛 시절을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어 하는 식민주의자의 ‘페인트’ 마냥 부질없고, 더 까놓고 말함 추악한 거 아닌가 싶어서. 한편에선 돌고래한테도 자유가 있다는 <프리 윌리>같은 영화가 만들어지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그런 돌고래를 붙잡아두고 쇼를 시키는 게 적잖은 누군가에겐 '다양성'을 존중하는 인간적 자유 본연의 위대한 오지랖으로 보일지 몰라도 말이다.
노파심에 하는 얘기지만, 브랜초 씨가 어린 시절 꿨다는 꿈을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해가며 한껏 깔아뭉개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물론, 그가 실제로 봤을 범고래 쇼 자체야, 정작 ‘타자와 만나는 법’엔 눈멀게 하는 볼거리/스펙터클에 불과했을지라도 말이다. 외려, 그의 죽음을 어쨌거나 애도하면서 던져봄직 한 질문은 이런 게 아니겠냐는 거다.
그가 설레는 맘으로 꿈꿨을 범고래와의 만남은, 어디서부터 꼬여버렸길래, 살아 있는 “유적 존재”에게 결국 폭력을 부르는 악몽이 되고 말았을까. 인간과 다른 생물 종을 막론한 ‘타자와의 만남’은, 기껏해야 폭력의 악순환에 갇힐 뿐인 자족적 “독백”을 넘어, 어떻게 호혜적인 세계로써 형성·확장될 수 있을는지.
전 그 기사를 보니까 얼마전에 봤던 'Cove'라는 다큐멘터리가 떠오르더군요. 갖힌 고래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매일 위장약을 먹어야 한다던 부분도 기억나고..
'Cove'요. 함 봐야겠군요. 네.. 상관관계가 아직 명확히 밝혀진 건 아니지만, 종종 고래들이 해안가에 떼로 올라와 죽어버리곤 하는 것도 해저 군사용 잠수함이 쏴대는 초음파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거라고도 하던데.. 이리 보면 굳히 동물원이 아녀도, 지구 자체가 자본주의적 합리성이라는, 광기어린 폭력의 쇠그물로 결박돼 있는 걸지 모르겠어요.; 뭐 굳이 낙관적으로 마무리해 보자면, 얼핏 견고해 보이는 그 사슬이란 게, 2008년부터 그런 조짐을 보이듯, 자체의 논리상 가상과 실재를 실성한 양 오락가락 하는 것이긴 하겠습니다마는.ㅎ
틸리쿰이 그 조련사에게 재롱을 부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같이 있고 싶어서 물속으로 끌고 들어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다는 증언은 틸리쿰에게 야생의 본능이 다른 돌고래들보다 더 강하게 남아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야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음...동물들도 적의를 가지고 물때와 위협을 하기위해 무는 경우는 다른던데요.
죽자살자 무는 경우와 아무리 화가나거나 무서워서 위협을 하기 위해 무는 경우는 물리면서 느끼겠던데요...동물들도 자기의 이빨이 상대에게 어느정도의 피해가 가는 정도는 다 아는 거 같아요.
아주 오래전에도 자신이 오래동안 키운 사자에게 죽임을 당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 사자는 거의 전 지구상의 동물들이 부러워할만한 복지혜택을 누리고 있었을겁니다. 반려견들이 아이들을 습격하는 경우는 종종 일어나는데 그 부모들도 사나운 개와 아이를 같이 둘 정도로 우매하지는 않을 겁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동물들의 사랑은 굉장히 격렬합니다. 개가 새끼를 낳았을 때 주인들이 새끼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이면 어미가 새끼를 물어죽입니다. 그게 새끼를 보호하는 행위입니다. 틸리쿰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신과 가장 가까이 지낸 조련사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가장 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려견들도 야생의 본능때문에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아서(야생에서는 아픈 기색을 보이면 가장 먼저 잡아먹힙니다) 주인이 손도 못써보고 죽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아프다고 꺼이꺼이 울어대서 병원에 데려가면 병명이 엄살인 경우도 있습니다. 동물은 야생동물이든 사육동물이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이고 우리의 논리를 적용하는 것은 때로는 틀린 경우도 있습니다. 꽃이나 나무에 유난히 끌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동물에 유난히 끌리는 사람이 있고 조련사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련사들 중에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동물의 손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도 있고, 설마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닥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들이 종종 벌어지고 조련사를 너무 좋아해서 수컷과 교배를 거부하는 침팬지도 있습니다.
제가 하고싶은 얘긴 이겁니다. 살인사건이 일어나도 그 사람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거짓증언에 의해 의도가 뒤바뀔 수도 있고 경찰의 짜맞추기 수사에 의해 진실이 가려질 수도 있습니다.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도 그 지경인데 말 못하는 동물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쩌면 틸리쿰은 말을 잘 안듣는 천진난만한 아이였을지도 모릅니다. 틸리쿰은 조련사와 같이 놀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건 틸리쿰의 진실이 아니라 그렇게 믿고 싶은 제 마음이겠죠. 그런거였다면 아마 조련사도 틸리쿰을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암담/ 하고 싶은 말씀이 대체 뭘까 싶었는데, 여전히 명쾌한 느낌은 아니지만 그게 뭔질 콕 집어 말씀해 주셨군요. 초간단 요약을 하자면, 제 생각이 꽤 일면적이라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는 말씀 같은데..ㅋ;
제 생각은 그렇슴다. 왜 죽였는지 모르는 경우가 잦다 해서, 그 죽음의 개연성과 '실재'와의 거리를 최대한 좁히려는 노력(내지 능력의 신장)이 무의미해지는 건 아니라고 봐요. "우리는 야생을 이해하지 못한다"셨는데, 글쎄요, 야생이 이해하기 어렵대서 그렇게 단언하는 것도 일종의 신비화란 생각입니다. 야생성이 무슨, 칸트가 따로 있다고 믿(고 싶)었던 바, '물 자체' 같은 것도 아니겠다 싶고요. 인간 종과 야생성이 아예 무관하다는 듯한 언급인 듯도 하지만, 제 생각엔 그렇지도 않을 것 같거든요. 인간을 가리켜 <야생적 별종>이라고 한 책제목/사람도 있거니와..ㅋ 물론 그렇대서 타자인 다른 생물 종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냐면 그것 역시 비약이겠습니다만. 이택광씨 같은 경우엔 "소통은 사기다"라고 일갈하셨던데, 전 이 말이 (상당수가 이 말에 발끈하듯) 소통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거꾸로 '진정 통하고' 싶다면 일견 공통적인 거라곤 없어 뵈는 '생성하는 차이' 그 자체가 우선돼야 한다는 뜻으로, 이 점을 우수이 여기는 화합과 소통이란 건 이념적 좌우를 떠나 기만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요.. 그렇다면 님께서 우린 야생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 말이, 이택광씨의 일갈과 똑같진 않아도 비슷한 맥락이겠냐. 별로 그렇진 않아 보이던데요. 다가가야 할 대상 앞에서 어쩌지 못하고, 그냥 그 주변을 서성이며 던지는 '지당한 말씀' 같은 느낌이랄까. 결국엔 추방하려던 '신'을 다시 불러내고 마는 칸트적 이성의 주문처럼요.
조련사의 죽음이 (아마도 님이 '믿고 싶다'는 바대로라면) 재롱상 과실치사가 됐든, 수중공원이나 동물원 제도 자체의 폭력 내지 억압성에 대한 공격적 반응의 산물이 됐든, 그 원인에 관한 지식과 실재의 원천적인 간극이 있대서 "우리는 야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상황을 수습할 수 있을까요? 불충분하다고 보고요. 신중한 접근이 아무리 필요하다 쳐도, 틸리쿰의 조련사 살해를 놓고서 원인미상 사건이 많다는 얘길 끌어오시는 것도 다소 뜬금없잖나 싶어 보이구요.
가장 극적인 예로, '싸이코패스'라 불리는 이들의 (연쇄)살인만 해도, 왜 하필 살해당한 그 특정인들을 죽였는지는 아예 알 수가 없다고 하죠. 둘 사이엔 정말 인과적인 상관관계가 없다면서요. 법적 처벌을 할 수 없는 것도 그네들의 광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이유없음' 때문이라고 하고요. 하지만 그렇대서 이런 살인의 개연성을 인과적으로 뚜렷이 밝히는 일반화된 설명과 살인이 일어난 실재 간의 거리를 좁혀가면서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의 교각을 "벼려내는" 일조차 불가능하진 않겠죠. 외려 그 반대 아닐까 싶은데요. 뭐 아마도, 좀체로 그렇다곤 믿고 싶지 않아 뒷걸음치지만 않는다면, "왜"에 대해 답하는 건 무모한 일이 아니겠다는 거예요. 최소한, 잠정적인 (바로 그래서 진리치로서 유효한) 진리치로서 말이죠.
본론으로 돌아와, 조련사가 틸리쿰을 용서할 일인지, 굳이 용서란 걸 한다면, 누가 누구한테다 해야 할 일인지, 아니면 이게 누가 누굴 용서하고 받고 할 차원의 일인지는 아마도 이런 개연적인 맥락들을 실재라는 물에 담가 가며 충분히 납득가능한 앎으로 벼려내는 와중에 차츰, 그리고 아마도 또렷이 드러날 테구요. 틸리쿰이 품었던 마음의 디테일은 어떤 거였을까 하는 점은 제가 보기엔,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가와는 '일정하게' 따로 다뤄도 무방하단 생각임다. 근까, "왜"하고 무관하지야 않겠지만, 그걸 모른대서 지금 밝히고자 하는 "왜"를 알 수 없는 건 아니겠다고 할까요.
이리 보자면, 제 글 또한 여러 가지 개연성을 감안해 충분히 벼린 건지는 저 스스로도 의심스럽고, 뭣보다 원천적으로 그런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이걸 "우리는 야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역시나 의심스런 명제로 의문에 부칠 정도인진 무척 회의적이네요 저는.^^ 뭣보다, 님의 규정대로라면, 님의 소망 어린 추정도 부질 없는 시도 아닐까요. 이해 못하는 대상의 속성에 대해 자의적, 자족적인 해석을 적용한 것뿐일 테니까요.
저는 다만, 인간의 논리를 '동물'에 확대 적용하는 식이 아니라, 탈인간의 논리를 통해, 좋든 싫든 인간 종인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고 또 알게 되겠느냔 질문을 던졌다고 믿고 싶은 쪽예요. 굳이 덧붙여, 스피노자 씨가 말했다는 앎의 종류에 따르자면, 그저 믿고 싶을 뿐인 앎인 제1종 지식에서 벗어나, 타자들과 잠정적 공통성을 형성하는 제2종 인식을 발판 삼아, '실체'를 이해하게 되는 제3종 인식으로 도약하려는 것이라고 할까요.ㅎ;;
글이 있어서 읽으려고 들어왔는데 제 댓글에 대한 답변이 있어서 적습니다. 미리 충분히 설명못드린 점 사과드리고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통은 사기일 수도 있지만 상대방을 이해하도록 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 크죠.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먼저 우리는 야생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현이 야생이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동성애자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사람에 대해 넌 동성애자를 이해못해 하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님에게 그런 경멸의 뜻으로 드린 말씀은 절대 아니고요, 야생이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음을 암시한 건데 제 표현이 그렇게 전달됬군요. 인간에게도 왜 야생이 없겠습니까. 전쟁은 야수성이 해방되는 공간인데요. 전쟁에 관한 참혹한 책이나 영화들, 저는 차마 못봅니다. 저도 틸리쿰이 스트레스로 조련사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이미 말씀드렸고, 그런 추측이나 시도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인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다른 가능성도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저의 작은 소망임을 말씀드린건 님의 어떤 표현들 때문이에요.
"그래서다. 숭악하기로 치자면 인간사육의 제도화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동물원이라는 제도화된 폭력에 대한 반응으로서, 틸리쿰의 “조련사 살해”는 ‘살아 있는’ 생물 종인 이상에야 그리 놀랄 일도, 더군다나 이상한 일도 아니겠다고 한 건."
"헌데 지금 저 범고래를 다루는 방식은 이를테면 이렇다. 어떤 사람이 끝없이 소외된 생명활동으로서의 노동에 진저리를 내며 플랜테이션 소유주를 살해한 걸 놓고서, 이 사건의 본질이 워낙에 “요주의”였던 그 누군가의 남다른 덩치와 타고난 포악함에 있다고 하는 격이랄까."
인간사육과 동물사육을 비교하면서 틸리쿰의 조련사 살해를 노동자의 농장주 살해와 비교해서, 하지만 틸리쿰과 조련사는 친밀한 교류관계였을 수도 있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들어 몇 자 적은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이해해주세요.
그 부분이 걸리셨군요. 근데..^^:
제가 취한 유비가 야생성에 대한 섣부른 이해를 조장할 소지가 있음을 부정하진 않아요. 다만, 조련사가 "살해"됐다는 건 둘 사이의 실재했던 친밀함으로 환원될 수 없는 맥락의 산물이란 말을 하고 싶었던 거죠. 아이티 혁명을 다룬 <블랙 자코뱅>을 봐도, 그 참혹한 자본주의적 노예제하서도 플랜테이션 농장주와 노예가 '나름 훈훈한' 친밀성이 있었단 얘기가 나오죠. 이리 보면, "살해"라는 사건은 온통 적의로 충만했던 상황의 폭발로써 일어나는 건만은 아니겠단 검다. 그 안엔 나름대로 훈훈한 관계도 있더라고 해야 실상에 더 가까운 거겠죠 어쩌면. 조련사를 살해했대서 틸리쿰을 욕할 수도 없고, 그랬다고 해서 불편해할 이유도 없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이게 범고래 세계의 자율성을 무시한 채 그저 인간계에서 벌어지는 걸 그대로 갖다붙인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든 접근법이라 해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안타까움 맘이 드는 거야, 저 자신도 그렇지만, 어찌할 수 없는 거겠지만요.;;
하지만 사자가 놀자고 어흥하고 덤벼들면 우린 죽잖아요. ㅠㅠ
저야 가늘고 길게 살아내기로 맘 먹은 인간이니ㅋ; 그럴 소지가 아예 없는 쪽으로 관계를 맺으려 들겠죠. 어느 인간 종들도 죽음을 불사해 가며 사랑한다곤 하나, 죽음을 무릅써가면서까지 사자와 친해지고 싶진 않은 거랄까요.ㅎ 적어도 우리에 가두고서 해 줄 만큼 해 줬으니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이젠 내 맘 알아주겠지 하는 식으로 관계맺진 않겠단 검다. 말씀하신 것처럼, 그쪽의 (추정컨대) 애정표현이 저한텐 말 그대로의 죽음을 뜻할지 모르는 '실존적 종차'도 무시할 수 없겠구요. 사자가 즐겨 사는 데서, 행여 죽지 않을 적당한 거리를 갖고ㅎ; 그 위용에 외경심을 갖는 정도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