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하여
(On the Nature of Capitalism)
자본주의가 소멸하리라는 소식은 (마크 트웨인의 말을 빌자면) 다소간 과장된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내부로부터 발휘되는 놀라운 부활 및 재생 능력이 있다. 비록 그 능력이란 게 기생물, 다시 말해 다른 종에 들러붙어 다른 생물로부터 양분을 섭취하고 사는 생물과 나눠갖는 종류의 능력이긴 해도 말이다. 숙주가 된 생물이 완전히, 또는 거의 완전히 빨아먹히고 나면, 기생물은 이전 숙주와 마찬가지로 제한적이라지만 연장된 시간 속에서 생명의 즙을 공급해줄 또다른 생물을 가까스로 찾아내는 경향이 있다.
1백 년 전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듯 잿더미로부터 되풀이해 솟아나는 자본주의의 기괴한, 불사조 같은 능력의 비밀을 파헤쳐낸 바 있다. 그건 바로 황폐화의 궤적을 남기는 능력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생명의 즙을 철저히 다 빨린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즐비한 무덤들로 자욱져 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같은 기생물이 아직 찾아들지 않은 [잠재적 숙주] 상태로 줄지어 있는 생물들의 집합을 “전前자본주의적 경제들”, 즉 계속해서 이뤄지는 제국주의적 팽창 아래 그 수가 제한돼 있고 꾸준히 줄어들게 될 경제들로 한정했다.
매번 이뤄지는 찾아듦의 연쇄 속에서, 잔존해 있는 “처녀지들”은 자본주의적 착취가 이뤄지는 또다른 목초지로 바뀌었고, 그리 머지않아 그같은 팽창으로 부풀었던 이윤 전망이 사그라든 결과 자본주의적으로 “확장된 재생산”에 불가결한 것들을 충족하기엔 부적합해졌다. 이런 경향을 염두에 두면서(1백여 년 전의 자본주의적 팽창이 대체로 영토적인 것으로 내포적이기보단 외연적이고, 종적이기보단 횡적이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경향인데),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의 지속에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고 내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구상의 모든 “처녀지들”이 일단 정복돼서 자본주의적 순환의 쳇바퀴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나면 착취에 필요한 새로운 땅이 없어진 결과 시스템 붕괴의 조짐이 일고 마침내는 그렇게 내몰릴 거라고 말이다. 그 기생물은 먹잇감으로 삼을 숙주가 없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되는 셈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이미 지구적 차원으로 오지랖을 넓혔거나, 어쨌든 간에 그와 근접한―룩셈부르크에겐 그런 전망을 하기엔 여전히 다소 먼 경지였던―수준에 이르렀다. 그럼 이제 룩셈부르크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걸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반 세기 남짓한 세월 동안 자본주의는 그 전까진 알지도, 상상도 못했던 기예로 전에 없던 새로운 “처녀지들”을, 기존 것들에 자신의 게걸스러움을 제약받지 않고서도 만들어낼 줄 알게 됐다. “부가가치”와 이윤, 축적의 주요 원천인 “생산자사회”에서 “소비자사회”로의 전환, 그리고 자본과 노동의 결합에서 상품과 고객의 결합으로의 전환이 이뤄짐으로써 가능해진 이 새로운 기예는 생리적 기능들[혹은 생명 과정 일반]의 점진적인 상품화, 시장을 매개로 한 잇따르는 필요의 충족, 이윤합리적 경제의 조절장치인 욕망이 필요를 대신하는 상황 속에 개재해 있다.
현재의 위기는 인위적으로 창출된 “처녀지”가 그 지력을 다 소진해버린 데서 비롯됐다. 이 처녀지는 “신용카드 문화”가 아닌 “저축장부 문화”에 밀착돼 있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 바꿔 말해 신용으로 살면서 대출을 받고 이자를 내고 사는 등 벌지 않은 돈을 쓰는 건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같은 특정한 “처녀지”를 상대로 한 착취는 대체로 끝이 났고 이젠 은행가들의 성찬 뒤에 남은 부스러기들을 치우는 일이 정치가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이 일은 은행가들이 져야 할 책임의 영역에서 떨어져나와 “정치적 문제”의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뒤늦게서야 경제적 이슈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한 말을 인용하면) “정치적 의지”의 문제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연구개발(RD) 부서들에선 새로운 “처녀지들”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춘 강도 높은 노동이 지금도 진행중에 있으리라고 누구든 능히 짐작해볼 수가 있겠다. 기생물로 살아가야 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상, 기대수명은 어느 쪽이든 공정하게 제한돼 있다는 저주 또한 부담이 돼기야 하겠지만서도 말이다.
자본주의는 창조적인 파괴를 통해 굴러간다. 그 파괴로 창조된 건 “새롭고 향상된” 형태의 자본주의다. 그리고 그 창조로 파괴된 건 우리 모두가 이런저런 식으로 빠져들고/매혹되[지만 자본주의의 숙주로 먹히]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생물들”의 자기부양 능력과 살림살이, 그리고 존엄함이다. 내 생각에, 자본주의의 중요한 밑천들 중 하나는 그 특유의 창의성과 그것이 내건 약속상의 변덕, 작동 방식상의 무자비함이 경제학자들의 상상(력)을 그에 대한 비판자들까지 포함해 큰 격차로 앞지른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싶다.
지그문트 바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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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하여 -> 자본주의의 본성에 대하여
자본주의는 그 내부로부터 발휘되는 놀라운 부활 및 재생 능력이 있다.
-> 자본주의는 그 자체에 놀라운 부활과 재생 능력이 있다.
비록 그 능력이란 게 기생물, 다시 말해 다른 종에 들러붙어 다른 생물로부터 양분을 섭취하고 사는 생물과 나눠갖는 종류의 능력이긴 해도 말이다.
-> 비록 그 능력이 다른 종에 속하는 생명체를 먹고 사는 생명체인 기생물의 능력과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숙주가 된 생물이 완전히, 또는 거의 완전히 빨아먹히고 나면, 기생물은 이전 숙주와 마찬가지로 제한적이라지만 연장된 시간 속에서 생명의 즙을 공급해줄 또다른 생물을 가까스로 찾아내는 경향이 있다.
-> 숙주가 완전히 또는 거의 완전히 탈진하면, 기생물은 또다른 숙주를 찾는 경향이 있고 또 그럭저럭 찾아내는데, 새로운 숙주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계속해서 기생물에게 양분을 공급하게 된다.
1백 년 전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듯 잿더미로부터 되풀이해 솟아나는 자본주의의 기괴한, 불사조 같은 능력을 파헤쳐낸 바 있다. 그건 바로 황폐화의 궤적을 남기는 능력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생명의 즙을 철저히 다 빨린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즐비한 무덤들로 자욱져 있다.
-> 백년 전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괴기스러움의 비밀을 이해했다. 반복해서 재생하는 자본주의의 불사조 같은 능력, 파괴의 흔적을 남기는 능력, 자본주의의 역사는 양분을 다 빼앗긴 생명체들의 무덤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같은 기생물이 아직 찾아들지 않은 [잠재적 숙주] 상태로 줄지어 있는 생물들의 집합을 “전前자본주의적 경제들”, 즉 계속해서 이뤄지는 제국주의적 팽창 아래 그 수가 제한돼 있고 꾸준히 줄어들게 될 경제들로 한정했다.
->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이 생명체들의 집합을 기생물의 두드러진 방문에 따라 줄을 세운 뒤 수가 제한되어 있으며 진행중인 제국주의적 팽창 아래 점점 수가 줄어들고 있는 "전자본주의적 경제"로 한정했다
님이 고치고 나니 문맥이 훨씬 더 매끄러워졌네요. 그야말로 분발해야겠군요. 비올 때 우산 쓸 거냐 우비 입을 거냐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뭐 기왕이면 다홍치마인 거니까.
더 하고 싶어도 이런 글을 번역하는건 제 적성에 안맞아서 안할래요. 들사람님이 번역한 글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되는데 여기 운영진은 이해하고 있나봐요.
너만큼 무뇌는 아닌 모양이지.
똑똑하니까 운영자를 하겠지.
운영자에게 집착은 하지만 스토커는 아닙니다.
난 진보넷이 생각이 있다면 운영자들을 바꿨으면 해. 실력이 너무 없는 것 같아. 그런데 넌 나에게 뭘 원하니.
난 실력자인데. 집구석에서 인터넷 하는 거 말곤 아무것도 안하지만. 무능한 활동가들 같으니라고.
운영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블로거에게 요구되는 것과 다른거야. 블로거는 그냥 자기 하고싶은거 하면돼. 운영자는 자기 하고싶은대로 운영하면 안돼. 여기 운영자가 몇명인지는 모르지만 광범위한 소재에 대해 쓴 글 하나하나 판단할 수 있을만큼 실력이 뛰어날까. 내가 보기엔 그냥 기술자들이야.
들사람은 기본이 안되어있는것 같아서 세부적인 것 몇개 지적해준 것 뿐이야. 문제가 보이는데 겸손한 척 하고 싶어서 그냥 넘어가야하니. 내 지적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타나겠지.
데이드림/ 다른 누구보다 님한테 기본이 안 돼 있단 소릴 들으니 굉장히 불쾌하긴 하네요. 기억하죠?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영문글 번역 갖고 님이 억지로 점철된 삽소리 연작 시연했던 거. 그치만 뭐 그건 그거고(정말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여기서 지적하는 것들만큼은 일리 있어 보이니 뭐..
아마 그건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글의 번역이 아니라 에이젠슈타인이 쓴 글 일부였을거에요. 성적지배의 기원에 관한 것인데 페미니즘 이론 중에서 가장 저급한 수준이 사회주의 페미니즘이에요. 레비스트로스나 다른 인류학자들의 책들을 조금이라도 봤으면 그런 식의 논리는 가능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때 건방지게 말한 건 사실이지만 다시 그 글 봐도 저는 똑같은 소리해요.
님은 늘, 적어도 거의 이런 식이군요. 지금 밝힌 얘기가 그때 벌어졌던 해프닝의 본질은 분명 아녔던 걸로 기억하는데. 에이젠슈타인지 레비스트로스였는지도 이젠 불분명하지만, 님이 말도 안 되는 번역상의 억지 부려가며 사람들 뜨악하게 만들었던 기억 하난 분명히 나네요.
그런데도 마치 그때 상황은 어이없게도 바로 방금 나온 따끈한 진술로 [아마도 뒤죽박죽돼선] 기정사실화돼리니..;; 그때 님의 기본도 안 된 독해술이 논의다운 논의조차 불가능하게 했었는데도 말이죠. 뭐 관련 덧글이 싸그리 다 지워지고 없으니 또 라쇼몽 내지 오! 수정 식의 알맹이 없는 진실공방만 지리하게 되풀이될라나요.ㅋ 다시 그때를 돌이켜보니, 생각만해도 후덜덜하네요. 그런 고로 다시 얘기하고 싶지가 않아요 솔직히. 그 주제에 관해서나, 그 주제를 건드린 사람하고나. 반복해 말하지만 그 주제가 뭐였는지, 주제다운 주제가 있기나 했는지도 이젠 가물가물..
그때 제가 건방지게 말한건 에이젠슈타인이 건방지게 말했기 때문이에요. 아마 그 글에서 에이젠슈타인이 슐라이어미스를 깎아내렸을거에요. 그런데 슐라이어미스는 에이젠슈타인보다 훨씬 더 여성운동에 기여를 많이 했어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들사람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못해요.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걸 항상 인정해야해요. 그런데 왜 제가 에이젠슈타인을 번역한 분이나 들사람님에게 야박하게 하는가하면 다른 운동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요. 들사람님의 사민주의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죠. 에이젠슈타인도 그렇고 그 글 번역한 분도 그렇고 들사람님도 그렇고 들사람님이 좋아하는 월옹도 그렇고 다 부족해요. 하지만 님들이 그걸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저도 인정하지 않는척 하는거에요.
뭡니까 이건 또. 그때 그 어처구니없는 소동이 다 님의 전략적인 노림수[인정하지 않는 척?]에서 비롯됐던 거란 얘긴가요. 무슨 진보넷판 식스센스 찍나요 지금. 그땐 그런 의중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더니만. 거참, 왜 그러는 거예요. 지금이라고 이해되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대체, 우리 모둔 늘 부족하고 '기본적으로 무지'하단 걸 누가 모른다고 했나요. 사민주의를 대안 사회구성의 전략으로 [적어도 한때는 그랬다고 인정해야 할지 모르나] 삼을 수 없는 태도의 원인이 완벽하지 못하고 틀릴 수 있단 걸 인정하지 못해서란 거예요 그럼 지금? 쩝, 나원참.
그러고 보니 68혁명 효과와 사민주의의 제도화 과정 간의 인과관계를 입맛대로 뒤죽박죽 뒤섞던 님의 주옥 같은 덧글들이 새삼 떠오르누만요. 거기에 신경질적이긴 했지만 기껏 댓글 달았더니, 싸그리 다 내려버리는 왕매너 시전해 주시고. 그러면서 맨날 남들한테 매너 없다고, 왜 서로 '인정' 안 하냐고 하면서. 참 여러가지로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예요.
번역을 자기 취향대로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라면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좀 자유로워지시죠.
그런데 본질과 본성은 다른거에요.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자연이고 자연에는 선도 악도 없어요. 인간이니까 그렇게 사는거에요. 하지만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 인간을 다른 것과 구분시켜주는 것을 말해요. 인간의 본성은 다른 자연적 존재들과도 나눌 수 있지만, 인간의 본질은 다른 자연적 존재들과는 다른 인간의 고유한 것이에요. 자본주의의 본성은 무엇인가하는 질문과 자본주의의 본질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다른거에요.
본성과 본질이 최소한 님한텐 아무리 다르더라도, 저한테 왜 하필 본성이 아닌 본질이란 단어를 택했는지 의문을 던지는 게 먼저 아닐지. 거기에 대한 답을 얻고 나서 님이 생각+정의하는 본질과 본성의 차이에 대해 강의했으면 더 나았을 텐데, 님은 늘 이 순서를 즐겨 뒤집네요. 왜 그런지 알고 싶어 죽겠진 않은데, 대체 왜 그러는지 원.
'네이처'는 본성, 본질 다 가능한 건데(아님 이런 용례들을 한 단어에 모두 등재해 놓고 있는 사전이 싸그리 개정돼야 하든가), 본성이란 단어를 안 쓴 건 적어도 제 언어감각으로 본성은 대개 실체(혹은 요소)론적 관점이 전제된 논의/주장에서 곧잘 쓰이곤 하는 터라, 이게 영 못마땅했던 까닭에 대신 본질이란 말을 쓰거나 선호하게 된 건데.. 뭐 본질 자체도 그런 용법으로 안 쓰이는 아니지만, 관계론적 관점하에 얼마든지 달리 정의될 수 있고 또 그러는 게 여러 모로 더 낫다고 보는지라서요. 관계론적 관점 아래서, 본질이란 말은 가령 '본질이 있냐 없냐' 따위 거짓대립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의와 용법을 획득하게 된달까요.
정리하면, 제 깜냥에 비춰 본성이란 말은 본질보다 관계론적인 관점에서 특정 조건 아래 나타나는 어떤 불변의 속성이 지속하고 또 변화하는 구도를 이해, 설명하기 부적합하다는 판단을 한 거죠. 전 님처럼 단정적으로 얘기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이런 제 생각이 그럼 좋고 아님 말구 또한 아니란 건, 뭐 읽는 분들이 판단할 수 있을 테고. 마치 모든 정리가 종결된 듯 단정하듯 나오는 님의 어투가 아무리 봐도 비호감인 건 뭐 이래서 아닐지.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요. 본성은 사물을 지배하는 법칙같은거에요. 자본의 법칙이 있죠. 그 본성은 변하지 않아요.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그런데 본질은 사물의 잠재력과 같은 것이에요. 실존과 달라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자본주의의 본질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자본주의의 essence, 즉 핵심은 무엇이냐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은 다른 생산양식과 구분되는 자본주의만의 고유함이겠죠. 자본주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본주의의 본성은 무엇인지, 본질은 무엇인지 아마 대답할 수 있을거에요.
life juices를 생명의 즙이라고 번역하는건 적절하지 못해요. life juice는 생명체를 살아있게 하는 것, 인간을 비롯한 동물의 경우에는 피를 의미해요. 하지만 숙주가 기생물에게 life juice를 공급한다고 했을 때는 양분으로 번역해야되요.
reverie 때는 들사람만 보면 온갖 욕은 다 하더구만 오늘은 왜 초면처럼 존댓말을 다 쓴대ㅋㅋㅋㅋ 닉 바꿀 때 인격도 바꾸냐ㅋㅋ
그건 그렇네요. 양분이란 말을 써놓고도 왜 그 생각을 미처 못했는지.
데이드림/ 아마 그럴지도..ㅋ
"오늘날 자본주의는 이미 지구적 차원으로 오지랖을 넓혔거나"라고 번역했는데 원래 이 문장은 Today capitalism has already reached the global dimension 이거에요. "오늘날 자본주의는 이미 전지구적 차원에 도달했다" 오지랖이 넓다는 말은 이 일 저 일에 다 참견한다는 뜻인데 적절한 번역이 아니죠. 쉽게 번역하면 되요. 남의 말투를 자기 말투로 고치는건 삼류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그리고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세계시장을 목표로 했어요. 전혀 새로운게 아녜요.
바우만 할배부터 해서, 여기서 누가 자본의 세계화(혹은 지구화) 충동을 새롭다고 했던가요? 새로워서 했거나 나온 얘기가 전혀 아니잖아요? 근데 뭐하러 사족을 다는지.
다만, 세계시장을 목표로 했다고 할 때의 "세계"를 하나의 자기완결적인 체계이자 그런 체계에 따라 작동하는 가상 공간으로서의 세계로, 지리적인 대상 내지 규모를 지칭하는 세계/지구와는 범주가 다르단 식의 접근을 해볼 순 있겠죠. 이렇게 다른 두 범주가 자본축적의 발전 과정 속에선 중첩돼 있지만 동시에 분리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데 주목하면서요.
뭐 가령 이런 얘길 한 것도 아닌데, 전혀 새롭지 않네 뭐네 하는 건 도대체 뭐하자는, 무슨 생각으로 나온 반응인 건지.
그리고 전 삼류거든요.ㅋ 그래서 종종, 적절한지를 놓고 당연히 이런저런 말이 나올 순 있겠지만, 제 정동과 판단에 따라 제 말투로 고치는 짓을 일삼네요 워낙에. 더구나 그런 지적은, 번역이 원문을 재현하는 일이라면 모르겠는데, 과연 그런 건지도 의문이고, 해서 전 소위 "원문에 충실한 번역" 따위 말을 좀체 신뢰하지 않는 편이예요. 그러니 이건 원인무효.
given the parasitic nature of capitalism을 "기생물로 살아가야 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상"으로 번역하셨는데 "자본주의의 기생적 본성을 고려하면" 이런 뜻이죠. 그런데 자본주의는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을거에요. 자본만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을거에요. 자본의 본성은 기생적인게 아니라 자본의 형성과 증식인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임금노동이죠. 바우만 같은 사람이 쓴 글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지, 정신을 더 혼란하게 할지는 제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겠죠.
글쎄, 삼류라 그런지, "자본주의의 본성을 고려하면"하고 "기생물로 살아가야 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상"이란 구절 사이에 어떤 심대한 의미상의 차이가 있는지 통 모르겠는데..;
님이 말한 자본의 형성과 증식[흔한 예로, 본원적 축적 같은 경우]이 기생적이지 않을 까닭은 또 뭐냐고 한다면, 더 나아가 숙주 형태가 어디 임노동뿐이겠냐고 한다면, 자본만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지 자본주의는 과학적으로 다뤄질 수 없으리란 얘기야말로, 정신을 혼란케 하는 님의 자의적 구분이자 주장 아닐지. 그 혼란이란 건 끽해야 님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르겠고요.
이런 글을 좋아하는건 님의 취향일테고 또 운영자의 취향이겠죠. 어쨌든 저는 번역상의 몇가지 문제를 지적했고, 이 글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면 중요한 논쟁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아, 이 모든 게 결국 "취향"의 문제였던 걸로 정리되는 건가요. 내꺼가 인정받아야 하듯, 남의꺼도 인정해줘야 하는 그런 거에 관한 문제? 그렇구나. 님은 보면, 굉장히 시비와 이치에 관해 끝장을 보려는 듯하면서도, 늘 이런 식이예요. 하여 전혀 수긍이 안 되지만, 뭐 또 내꺼만 고집하려 드는 태도 얘기가 나올 것 같으니 저도 여기서 그만.
관련한 얘기가 "취향"에 대한 상호인정 문제가 되버리고, 정작 바우만 할배 글의 옳고그름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겠단 건 어쨌든 거칠게나마 번역한 이의 입장에선 유감이네요. 거친 번역 탓인가 싶지만, 글트라도 그게 다이진 않을 테고.
그래서 말인데, 좀더 잘 읽히고 나은 번역 문장에 대한 충고, 귀담아들을 만했다는 건 십분 인정하고 또 감사드려요. 그렇다고 옵션의 문제였을 수도 있는 걸 싸잡아 문제라 할 수 있는진 여전히 갸우뚱하지만.
본성은 본디 이렇고, 본질은 원래 저렇고 하면서 잡는 각으로 보건대 '좋은' 번역 여하를 떠나 님 나름의 관점이 있다는 건 알겠고 또 님의 주장과 판단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도 알겠는데, 그게 제 기본까지 뒤흔들 정도인 건진 님도 한 번 더 생각해 봤음 좋겠네요. 자꾸 내 관점이나 이래저래 끌어오는 얘기들이 님이 붙잡고 있는 전제나 관점에 혼란을 부른다고 기분 나빠 하지 좀 말고요. 뭐, 제 기본이 워낙에 그닥 신통치 않다는 것마저 부인하려는 건 물론 아니지만 말예요.
뭔가 정말 말걸기 혹은 대화라는 걸 하고 싶다면 님 스스로도 인정하셨듯 위악적 시건방이 긍정적인 도발인지, 아님 안쓰러운 헛발인지도 이 참에 좀 숙고해 봤음 좋겠고.
인터넷에서 하는 거의 모든 대화가 상대를 바꾸진 못해요. 그럼에도 님과 대화를 원한다면 더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하려고 노력하겠죠. 하지만 그 이전에 감정이 있어요.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호의적 감정을 갖고 있고 대체로 말걸지 않아요. 보통 좋아하는 사람과는 진지한 대화보다는 장난치는걸 더 좋아해요.
거참,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말 빙빙 돌려가며 변죽 때리지 말고, 그쪽이 나한테 원하는 게 뭔지 딱 집어 얘길 해요 그러니까.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뭐가 어떻게 자유로워져얀단 건데요. 뭘 알아야 면장을 하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님이 말씀하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말씀드리죠.
"님이 말한 자본의 형성과 증식[흔한 예로, 본원적 축적 같은 경우]이 기생적이지 않을 까닭은 또 뭐냐고 한다면, 더 나아가 숙주 형태가 어디 임노동뿐이겠냐고 한다면, 자본만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지 자본주의는 과학적으로 다뤄질 수 없으리란 얘기야말로, 정신을 혼란케 하는 님의 자의적 구분이자 주장 아닐지. 그 혼란이란 건 끽해야 님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르겠고요."
자본주의는 capitalism이죠. 그런데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본>을 보면 맑스가 자본주의라는 말을 잘 쓰지 않을거에요. 자본주의적 생산, 자본주의적 생산구성체, 자본주의적 축적.. 이런 식으로 사용해요. 자본주의라는 것은 엄정한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메타포라는 말이에요. 사람들이 자본주의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은 다 달라요. 그런데 과학의 대상은 엄정해야해요. 이것은 저의 자의적 구분이나 제 머릿속에서만 일어나고 있는일이 아니라 저는 그렇게 배웠어요. 자본주의는 하나의 총체성이고 총체성이라는 것은 수많은 규정성들이 접합된 효과로 나타나요.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면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나누어야하죠. 자본주의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면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나누어야해요. 이 요소들이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지 자본주의 자체는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을거에요. 저는 그렇게 배웠어요.
네, 그렇군요.ㅋ 엄정하게 배우신 님만이 아니라 저도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자주 접한 얘기긴 한데.. 하여간 제가 못 배워서 그렇죠 뭐. 워낙에 무지하기도 하고.
위키백과에 나온 이 부분을 참조하세요.
The initial usage of the term capitalism in its modern sense has been attributed to Louis Blanc in 1850 and Pierre-Joseph Proudhon in 1861.[25] Marx and Engels referred to the capitalistic system (kapitalistisches System)[26][27] and to the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kapitalistische Produktionsform) in Das Kapital (1867).[28] The use of the word "capitalism" in reference to an economic system appears twice in Volume I of Das Kapital, p. 124 (German edition), and in Theories of Surplus Value, tome II, p. 493 (German edition). Marx did not extensively use the form capitalism, but instead those of capitalist and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which appear more than 2600 times in the trilogy Das Kapital.
맑스에게 capitalist라는 말은 "자본주의적"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자본가의"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어요. 맑스는 엄밀히 말해서 자본주의 그 자체는 과학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어요. 이것은 자본을 보면 거의 명확해요.
좀, 참조하랍시고 어디서 긁어오진 마시구요. 이렇게 보니, 자본은 오로지 님만 보신 것 같네. 하긴 뭐, 기본도 안 된 제가 본들 뭘 알겠슴까마는.
그럼 지금 저보고 자본에서 자본주의라는 말을 몇번 사용했는지 세고있으란말인가요. 이해를 돕기위한 도구의 사용은 기본중의 기본이거늘.
뻔히, 익히 아는 거 굳이 장황하니 긁어다 붙일 필요 없단 지적을 어떻게, 그럼 자본주의 몇 번 나오는지 직접 세보란 거냔 뜻으로, 다시 말해 이 따위로 대꾸할 수 있는 건지? 이렇게 멋대로 읽음 안 된다고, 좀 스스로에게 좀더 엄정해졌음 좋겠건만. 그러면서 기본 중의 기본 운운은 또 뭐며.. 참 희한하네 하여간.ㅋ
판단은 다른 분들께 맡기죠.
에이, 엄연히 아 다르고 어 다른 건데. 그건 맡기는 게 아니라 전가하는 거죠.
저는 들사람님 견해에 동의하지 않고 들사람님은 제 견해에 동의하지 않아요. 서로 의견이 상충하는데 더 얘기할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들사람님과 대화를 나눈 것이지 들사람님을 설득하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자기보고 기본이 안되어있다는데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나요.
결론적으로 들사람님에게 원하는 것은 없지만 들사람님은 제가 보기에 기본이 너무 안되어있고 공부가 부족해요. 그리고 여기 운영자들도 기본이 안되어있고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에 뭐가 뭔지 잘 몰라요. 그래서 몇가지 지적한 것 뿐이지 사실 님에게 크게 기대하는 것은 없어요. 당장 달라질 수 없는 문제이기때문에. 여기 운영자들도 마찬가지에요.
"당장 달라질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뭐 뭍은 개가 뭐 뭍은 개 나무라기 참 쉽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런가, 걔중 그나마 제일 와닿는 말이네요.ㅋ 저야 달라지는 건 고사하고 아마 계속 기본기 부실과 공부 부족에 시달릴 거 같으니, 탄탄한 기본기와 공부까지 겸비한 님께서 좌파 진영의 이론적, 실천적 도약 내지 환골탈태에 힘 좀 써 주세요 그럼. 화이팅!
일견 탄탄해 뵈는 님의 기본에 제가 뜨악해했던 게 언제, 어디서였나 되짚어 보니(이 짓거릴 지금 내가 왜 하고 있고, 또 해야 하는지 나도 오기를 넘어 똘기를 부리고 있구나 싶어 기분 참 그지 같지만), 님이 "치치"니 "붙박이별"이니 다중아뒤 덧글러 모드로 활약해주실 때였군요.
친족 체계엔 자의성/우연성과 규칙성이 공히 개재해 있다고 했다던 레비스트로스 할배의 주장에 대한 어느 영미권 저자의 잘못된 인용[사실은 오독]에 관한 포스팅. '백면서생'이라는 블로그에 있는 거요. 다행히도 여기엔 라쇼몽 놀이 안 해도 되게스리, 그 당시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군요.
에이젠슈타인의 성적 지배 운운하던 거 다 관두고(그런 얘길 어서 했는진 몰라도, 아는바, 들은 바 없고), 이때 보여준 볼 만한 독해력도 그럼 고도의 전략이고도 위악적인 시건방였다고 할 수 있겠는지. 하도 여러 아뒤로 온데 오지랖 발휘해감서 휘젓고 다녀, 이제 님도 언제 어서 뭐라 했는지 아리까한 모양입니다만..
이 대목에서 <달콤한 인생>의 이병헌 버전으로 묻죠. 말해봐요, 왜 그런 거예요? 내가 님한테 모종의 모욕감이라도 줬나요 그때?ㅋ
제가 오해를 했네요. 에이젠슈타인 글인줄 알았는데 aporia님 블로그에서 있었던 일이군요. 저는 들사람님을 한심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저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해도 모욕감을 느끼지 않아요.
어유, 그새 또 덧글 수정을 하셨네. 그러게요, 제 생각에도 구태여 님하고 왕건이는 고사하고, 이렇게나 건데기 없는 말이나 섞고 있는 제가 참, 한심하답니다. ㅎ
글고, 웃자고 덧붙인 얘기에 그렇게 죽자고 덤비시면..ㅎ; 그렇게 둔감하니,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도 자기 블로그에선 아~무 덧글도 안 달리는 게 답답한 나머지 여기 아니면 저기 어딘가에서 피차 진 빠지는 댓거리나 하고 있죠.
아, 그래서 얘긴데, 모욕감 운운해가며 태연하게 구렁이질하듯 딴청 피지 말고 대답을 해봐요. 아포리아님의 블로그에서 보여준, 읽기의 기본에서 자유로워지다 못해 아예 안드로메다로까지 날아갔던 님의 자유방만한 영문 독해도 전략적으로 짜고 쳤던 시건방이었던 건지. 그때 그 턱도 없는 만용의 민폐를 목격하고선, 님이 흘리고 다니는 얘긴 도무지 하나 같이 미덥지가 않아져놔서.ㅎ
님은 이런 식으로 늘 논점을 이렇게 흐리는 재주가 남다르던데(보면 상대방 논점도 잘 못잡고 핀트 나간 얘기로 폭주하거나. 얘길 참 못 하는 거죠), 님하고 아무도 선뜻 말을 안 섞으려는 건 이리 보면 자업자득인 거예요. 그런 줄이나 좀 알고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나 하세요. 남의 블로그에선 논점 일탈의 자유를, 님 블로그에선 심지어 덧글이 달린 포스팅에 대해서조차 내맘대로 포스팅 삭제의 자유를 만끽하는데, 생각해 보세요, 누가 님하고 말을 섞으려 들지. 이런 자유를 누릴 거면, 대화하거나 관심받고파 하질 말든가. 저만 해도 마치 숙주가 돼버린 듯, 하다 못해 백일몽은 커녕 도망치고 싶은 악몽 같구만. 그런데 대화요? 누구하고, 무슨 대화를? 그렇게 기본을 중시한다는 사람이, 대화의 기본은 어쩜 그리 우습게 여기는지 원 알다가도 모르겠음. 헛웃음 그만 유발하시구요. ㅎㅎ
여기가, 여기서 오가는 댓거리가 무슨 거국적 대화의 불을 당기는 번개탄 될 줄 아셨세요? 그리 될 턱이 있나여. 장작 자체가 물에 홈빡 젖었는데 무슨.
님하곤 누구하고라도 늘 그렇겠지만, 진작에 더 얘기할 필요가 없었는데 너무 오래 말을 섞었죠 지금까지. 그래요. 제 눈에도 님이 아무리 소위 기본과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떠들어도 끽해야 서당개 스타일로 훈장질하려 애쓰는 걸로밖엔 안 보이지만, 인정 안 하겠죠 님은. 뭐 물론, 피차가 서로의 품평을 인정 안 한대서 본인 생각이 참이 되는 걸 리도 없는 노릇일 테고.
그렇다고 "자기보고 기본 안 돼 있다는데 누가 인정하냐"는 섣부른 일반화 좀 하진 마세요. 배울 만해서 인정해야 할 땐 인정하거든요. 님은 뭘 얼마나 살았다고, 아니 얼마를 살았든, 이런 류의 일반화를 남발하는 버릇이 있던데.. 그 자체로 참도 거짓도 아닌 따위 이런 일반화 드립을 던지면 얘기에 탄력 좀 붙을 줄 아나봐요. 전혀. 근데로 계속 이러구 있으니 님하고 말 섞으련 이가 통 없진 않은지, 그래서 더 외로움에 주야로 몸부림치다 관심받고 싶어 여기저기 들쑤시는 건 아닌지, 그럴수록 님 블로그는 슬프게도 더더욱 게토화되는 건 아닌지 스스로 되새김 좀 해 보시고.
그러니 가보세요 좀 이제 그만. 저하고 더 이상 말 섞으려 들지 말고. 저도 님이 치치, 붙박이별인 줄 몰랐다가 그런 줄 알고 나선 님 근처엔 웬만함 얼씬 안 하려 들거든요. 님 말다따나, 뭐가 됐든 어떻게 "당장 달라질 수 있는 문제"가 도무지 아닐 테니. 부탁합니다. 이젠 욕지기가 나올라 그래요 자꾸.
아, 그래도, 다시 말하지만, 아포리아님의 블로그에서 보여준, 읽기의 기본에서 자유로워지다 못해 아예 안드로메다로까지 날아갔던 님의 자유방만한 영문 독해도 전략적으로 짜고 쳤던 시건방이었던 건지는 꼭 답하고 가길. 저도 뭔가 남는 건 있어야잖겠어요.^^
제가 보기에 들사람님의 영어실력은 뛰어나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강조하셔서 써봅니다. daydream님이 이상한데요. 윤문 안 됐다고 이 정도 번역이 이해가 안 된다고 기본 운운하다니. 독해 기본이 없는 걸 번역자의 탓으로 돌리는 걸로 보입니다만.
이 덧글도 테러 당할까봐 익명으로 남기게 되니 daydream님 본인 행동도 돌아봐 주셨으면..
natural limit를 본질적인 한계라고 번역하는 것은 아니라고봐요. natural limit는 한계수명과 같은 것이에요. 자본주의의 자연적 한계라는 말이죠.
Thinking along these lines는 이런 경향을 염두에 두면서가 아니라, 룩셈부르크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이런 뜻이에요.
With each successive visits는 "매번 이뤄지는 찾아듦의 연쇄 속에서"가 아니라 기생물이 방문을 거듭할때마다 남아있는 처녀지의 또 다른 부분이... 이런 식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제 영어실력은 보통이에요. 제가 봤을때 영어실력이 없다고 보면 그건 처참한거에요.
사회적 약자에 대해 사회적 보호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오히려 힘있는 자들을 편들고 있는 현실고발
【 S.O.S.&확산요망】
현재일본장기거주중(영주권.
일본공안경찰이 가담한 범죄피해[관민이 공모하여 쥐도새도 모르게 재산강탈?]를 받고 많은 증거를 가지고 호소중
국가권력을 악용하여,온갖수단을 동원하여 무마/은폐를 꾀함
일본경찰에 살해당할뻔한 일도 경험.
http://blog.naver.com/ansunduck(새로개설한 한국어블로그
http://blog.daum.net/ansund59(통제되어 현재정지 상태인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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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공무원의 실명게재와 저의 개인정보를 전부 공개하여 허위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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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의 블로그들은 통제로 표시해주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표시되지 않을 때는 Daum과 네이버서버에 문의를 부탁드립니다.
[저의 집에서는 항상 표시되고 투고가 됩니다만,가끔 외출해서 표시하면,
URL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유해사이트로 표시됩니다.]
daydream/ 님한테 불리한 질문엔 답변 안 하고 물타기나 하면서 기본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ㅉ 님은 기본 소양이 없음 예의도 없고요 일방적으로 님 하고 싶은 말을 맥락없이 퍼붓는 걸 대화라 부르지 마시죠
들사람/또 상대하는 용기가 존경스럽습니다만 정신건강을 위해 그만 하심이 어떠실지
글 잘 읽었습니다. 번역의 기본이 되어 있든 아니든, 학문하는 사람이 아닌 저 같은 사람에겐 중요하지 않고, 덕분에 그저 감사히 읽을 뿐입니다.
다만 모처럼 좋은 글에, 누가 누가 더 못났냐가 댓글들의 핵심이 되는 건 참 아쉽네요. 도를 넘은 개인적 공격들도 보이고요.
though also burdened with the curse of fairly limited life-expectancy가 어째서 "기대수명은 어느 쪽이든 공정하게 제한돼 있다는 저주 또한 부담이 돼기야 하겠지만서도 말이다."냐구요!!!
"비록 기대수명이 상당히 제한되어있다는 저주라는 부담 역시 안고있지만"이죠!!!
도대체 뭐가 고마운거에요. 이런 번역은 하지 않는게 타인에게 도움이 된단말예요.
그냥 원문만 보여주면 될 것을. 할 수 있으면 읽어들보시라고.
음.. 저는 학문하는 사람은 아니고, 또 굳이 원문을 읽는다고 더 나은 이해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라, 이렇게 대강의 요지만 알 수 있는 번역이라도 도움이 된 답니다.
당연히 엄밀한 번역이면 더 좋겠지요. 그리고 그렇지 못한 부분을 비판하는 것도 좋은 기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엄밀하지 않으면 무가치하다, 원문을 보여주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에는 반대하고요, 어쨌든 두 분의 기여가 다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엄밀한 논의를 추구하는 세계에서는 다른 판단 기준이 있겠지요. 그걸 부정하려는 건 아닙니다.
대체 들사람님은 어느 분에게 배우셨길래 "'네이처'는 본성, 본질 다 가능한 건데"라고 하시죠. <자본>1권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에 나오는 부분을 예로 들어볼께요.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천성)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기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
여기서 맑스는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변화시킨다고 해요. 그리고 노동을 통해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한다고 하는데 이 잠재력이란 자기 자신의 목적이에요.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처럼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그는 자신의 의지를 이것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나중에 각주에 헤겔을 인용해요.
"이성은 강력한 동시에 교활하다. 그것이 교활한 것은 [자기 자신은 과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여러 객체들을 그것들의 성질에 따라 상호작용하여 지치게 만들면서 오직 자신의 목적만을 실현시킨다는] 그 매개적 활동 때문이다." 헤겔 논리학
잘 읽어보면 맑스는 본질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지만 본질의 실현이란 목적의 실현이에요. 노동이라는 매개적 활동을 통해서.
본성과 본질은 다른거에요.
원문의 "fairly"를 걍 '꽤'나 '상당히'라고 하면 될 걸, 본문처럼 '수명이 제한돼 있긴 기생물이나 숙주나 다를 게 없다'는 문맥으로 번역해버린 건 변명의 여지 없는 잘못이네요. 중의적 뉘앙스로 쓰인 단어였잖나도 싶지만, 글쎄 뭐 이건 구차한 소리 같고..
해서 수정하자니 백일몽님만도 못한 독해 실력을 숨기는 것 같아 걍 냅두니, 잘못을 바로잡아주신 백일몽님에 대한 감사의 맘을 담아선 그렇게 감안해서들 읽으시길.
백일몽/ 근데, 답한 건가요? 아포리아님의 블로그에선 근데 왜 그랬는지에 대해. 이 질문 이후에 달린 것들이 그에 대한 답변입니까.
왜 제가 대답해야하죠. aporia님이 물어보시면 대답할께요.
그때 aporia님은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러면서 웃으셨는데.
에휴, 또 라쇼몽 증후군이 도지시나. 결국 대꾸 좀 하고 지켜보다 남의 블로그에서 삽소린 적당히 내는 게 좋겠단 뜻으로 몇 마디'도' 했죠, 아포리아가 분명..- -;;
님이 인정하고 기억하고픈 것만 글케 오려내니, 그 맛이 은근 중독성 있나보긴 한데..ㅎ 뭐 이러는 자유도 님한테야 부족함의 증거가 아니라 존중받지 못해 안달내야 할 개성이겠지만..ㅉ 과거지사 글케 정리해 자기 속편하자고 남들 속터지게 하는 맛이 앞으로도 달콤할지, 계속 함그래보시구랴. 당장 달라질 문제가 아닌 게 확실하니.
암튼 니미 무슨 남자 편 안 든다고 왜 여자 편이나 드냐고 대꾸하는 남하당 박영진 대표도 아니고, 대꾸하는 가락 참 매력빵점이네요.ㅎ 가뜩이나 대꾸할 맛 안 나는데 엄하게 틈틈이 라쇼몽 놀이 시전하고잡으신 거면 행여나 얼씬 마시길. 담부턴 여유 가지고, 잡티 없는 번역 해 볼 테니 관심의 퓨즈 확 내려주시고.ㅎ
근데 들사람님이 영어실력이 형편없음에도 번역을 하고 그걸 또 좋다고 운영자들은 메인에 배치하는거하고 아포리아님하고 무슨 상관인가요. 그 글에서 아포리아님이 어떤 책의 번역된 부분이 잘못된 것같다고 해서 저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왜 그 얘길 자꾸 꺼내시죠. 그러면 들사람님 형편없는 실력이 있는 걸로 바뀌나요?
세상에 잡티 없는 번역이란 말이 어디있어요? 구글에서 잡티 없는 번역 하면 쳐보세요. 들사람님 블로그만 나와요. 나머지는 전부 잡티 없는 피부라고 나와요. 잡티는 육체적인 경우에만 써요. 여러가지 자질구레한 티나 흠. 한국말도 못하면서 무슨 번역? 관심의 퓨즈를 확 내려달라고요? 퓨즈는 내리는게 아니라 갈거나 교체하는거에요.
daydream 왈, "잡티는 육체적인 경우에만 써요."
http://krdic.naver.com/search.nhn?query=%EC%9E%A1%ED%8B%B0&x=0&y=0&kind=all
"그는 흙담을 쌓기 위하여 점력이 좋은 찰흙을 골라 잡티를 걸러 내고 네모지게 벽돌을 찍었다."
한국어 실력... 예문은 읽어보지 않는 검색 실력...
피부랑 찰흙의 가까움과 피부랑 번역의 가까움은 같은 것인가요? 피부의 잡티와 찰흙의 잡티는 털어내거나 물리적 시술로 제거 가능하지만 번역의 잡티는 어떻게 제거할 수 있나요?
"잡티는 육체적인 경우에만 써요."
-> "물리적 시술로 제거 가능하"니까 "피부랑 찰흙의 가까움" 주장
말 조금씩 바꾸는 중
피부 표면이나 흙의 표면이나 둘 다 자연이잖아요. 피부에 잡티가 생기는 이유는 내부적인 요인(이를테면 노화나 유전)과 외부적인 요인(이를테면 과도한 자외선)이 있겠죠. 흙도 생명이고 자연이잖아요.
찰흙에는 이런 뜻이 있어요.
clay [klei] 점토, 찰흙, 진흙, 흙, (육체의 재료로 여겨졌던)흙, (영혼에 대하여 죽으면 흙이 되는)육체, 인체, 자질, 천성, 인격, 인품, 사기(오지)담뱃대
번역에 무슨 잡티가 있냐구요? 오역이지.
이런 식으로 번역하면서 부끄럽지도 않아요?
들사람 번역: 오늘날 자본주의는 이미 지구적 차원으로 오지랖을 넓혔거나, 어쨌든 간에 그와 근접한―룩셈부르크에겐 그런 전망을 하기엔 여전히 다소 먼 경지였던―수준에 이르렀다.
원문: Today capitalism has already reached the global dimension, or at any rate has come very close to reaching it – a feat which for Luxemburg was still a somewhat distant prospect.
다시 번역: 오늘날 자본주의는 이미 지구적 차원에 도달했거나 적어도 매우 가까운 수준에 도달함으로써, 룩셈부르크가 다소 먼 미래로 보았던 위업을 성취한 것이다.
일일이 다 지적하려면 댓글 백개로도 부족해요.
원문에 오지랖을 넓힌다는 말이 어디 있어요? 들사람님이 유치하면 바우만도 유치해져야하나요? 자기랑 똑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는게 번역인가요?
아포리아님이 남의 블로그에서 삽소린 적당히 내는게 좋겠다고 몇마디 했다고요? 어디 한번 가져와보세요. 정말로 그런 뜻으로 말한건지. 들사람님이 야비하면 아포리아님도 똑같이 야비해져야하나요?
그리고 아마 아포리아가 아니라 아포리님일거에요.
아포리아님이 아니라 아포리님이라니, 건 뭔소리예요 또?;; 블로그 쥔장 스스로 자기 아뒬 아포리아라고 하는구만. 각설하고,,
다른 데선 이런저런 소식 들려주고 계신데 이런 한가한 덧글 달고 있어도 되나 싶지만, 상황을 (적어도 개인적으론) 일단락짓자는 차원에서 마지막으로 달아봅니다. 번역이 졸속이지만 않았어도 젠장, 하고 자책하면서..ㅎ;;
내가 오역에 관한 님의 몇몇 지적을 수긍한 만큼이나 거기에 수반된 첨삭질이 꽤나 어이 없고 뜨악했던 덴 이유가 있어요. 여기서 "보통"의 실력으로 "기본"의 중요성을 줄창 강조해주시는 님이 '아포리아'님 포스팅에선 참으로 지켜 보기 고역스런 번역론을 장황하게 펼쳐가며 억지를 부렸던 또다른 덧글러 붙박이별=치치이기도 하다는 사실 때문이죠. 그 포스팅에선 누군가의 '기본없음'을 개탄하거나, 심지어 스스로 '보통'이라고 평가할 주제는 전혀 아님을 참으로 꿋꿋이 보여준 게,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님였으니까요.
그건 그래요. 내 오역이 일부 명백한데, 기본을 논할 주제가 안 됐던 백일몽님의 과거 들먹여봐야 내 오류가, 내 부실한 기본이 감춰질 수 없다는 거(그 외 대부분은 이미 언급했다시피 비 올 거라는 데 우비 안 입고 왜 우산 썼냐고 핏대인 거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고). 헌데 그렇다면 여기서 백 개 넘는 덧글로 내 번역을 이 잡듯 뜯어고친들, 그때 정말 말 같지도 않은 독해 신공 보여주셨던 님의 과거 또한 말끔히 세탁될 수 있냔 건데요. 누가 그렇다 했냐고 반문할 수 있겠죠 물론. 다만, 내 오역이 안 하느니만 못한 수준인 양 준엄하신 님은 막상 아포리아님 블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선 뭐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냐는 둥, 아예 잡아떼느니만 못한 너그러움을 발휘해 주시니 이건 대체 뭐냐는 거예요. 그런 독해 신공 보여준 이가 세심한 첨삭 열의에 불타오르는 것도 저건 뭐지 싶고.
뭐 그새 영어 실력이 상전벽해해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이란 자신감으로 충만해진 나머지, 기본이 전에 없이 중요하고 예민하게 다가온 걸 수도 있겠지만,, 그때 거기서 님이 보여줬던 모든 게 그렇게 당장 달라질 만했던 건가 해서 말이죠. 님 스스로 말했듯, 기본이란 게 그 정의상 그렇게 당장 달라질 수 있는 게 아니거니와, 더군다나 님 스스로 보통이라 자평했으니, 난 님이 나한테 해준 일부 지적의 타당성관 별개로,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요.
거듭 말하지만, 님이 뭔데 나한테 지적질이냐고 하는 게 아녜요. 생각 같진 않아도, 얘기가 그저 똥뭍은 개와 겨뭍은 개 간의 개싸움으로 기울지 말았음 좋겠단 것도 물론이고요... 그래서라도, 그럼 그때 보통이 아녔던 님과 보통을 자처하는 지금의 님을 어찌 싱크로하믄 될지 당혹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다..지만 본인은 그나마 알겄지 하는 맘으루다 스스로 대답을 해보랬던 거죠. 근데 님은 그때 그일이 여즉 그냥 그럴 수도 있는 일쯤으로 기억되는 모양이예요. 비록 이렇게 또 댓거리 중이지만, 그때 전 님이 거기서 드러낸 심신의 매너를 보면서 님하곤 앞으로 말을 섞지 말아야겠다고 맘먹게 됐단 말이죠.
아포리아님의 포스팅을 거론한 건 이래섭니다. 내가 볼 땐 왜 그걸 지금 들먹이냐고 님이 딴청 피듯 영문 몰라 할 게 아닌데, 근데 저러구 있네 싶은 거죠. 외려 난 아포리아의 블로그를, 레비스트로스를 왜 들먹이는지 자첼 영문 몰라하는 님이 희한해요. 거기서 (특히 ...님한테) 잘못 인정 안 하고 끝까지 딴청 핀 모습도 참 가관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것도 님을 상대하는 심사가 복잡하고 꼬이는 이유 중 하나랄 수 있겠네요. 뭐, 내 얘긴 이쯤하고요.
아포리아님 블로그에 있는 문제의 포스팅
http://blog.jinbo.net/aporia/142?category=2
치치=붙박이별로 달린 덧글들이 백일몽님 건데, 치치란 이름으로 달린 덧글은 모두 자진삭제됐더랬죠? 왜 그랬는지는, 글쎄요 저도 모르죠.
님 말마따나, (행여나 그럴 맘이 있다면 얘기겠지만) 판단은 다른 분들께 맡기죠.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아포리아님이 아니라 아포리님이라니, 건 뭔소리예요 또?;; 블로그 쥔장 스스로 자기 아뒬 아포리아라고 하는구만. 각설하고,,
: 그렇군요.
다른 데선 이런저런 소식 들려주고 계신데 이런 한가한 덧글 달고 있어도 되나 싶지만, 상황을 (적어도 개인적으론) 일단락짓자는 차원에서 마지막으로 달아봅니다. 번역이 졸속이지만 않았어도 젠장, 하고 자책하면서..ㅎ;;
:번역 얘기했는데 옛날 얘기 꺼낸건 들사람님이에요.
내가 오역에 관한 님의 몇몇 지적을 수긍한 만큼이나 거기에 수반된 첨삭질이 꽤나 어이 없고 뜨악했던 덴 이유가 있어요. 여기서 "보통"의 실력으로 "기본"의 중요성을 줄창 강조해주시는 님이 '아포리아'님 포스팅에선 참으로 지켜 보기 고역스런 번역론을 장황하게 펼쳐가며 억지를 부렸던 또다른 덧글러 붙박이별=치치이기도 하다는 사실 때문이죠. 그 포스팅에선 누군가의 '기본없음'을 개탄하거나, 심지어 스스로 '보통'이라고 평가할 주제는 전혀 아님을 참으로 꿋꿋이 보여준 게,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님였으니까요.
: 들사람님의 논리는 이거에요. 아포리아님 블로그에서 내가 틀렸는데도 맞다고 우겼다. 내가 틀렸다는 근거는 뭐죠. 저한테 가르쳐주시죠. 어떻게 틀렸는지.
그건 그래요. 내 오역이 일부 명백한데, 기본을 논할 주제가 안 됐던 백일몽님의 과거 들먹여봐야 내 오류가, 내 부실한 기본이 감춰질 수 없다는 거(그 외 대부분은 이미 언급했다시피 비 올 거라는 데 우비 안 입고 왜 우산 썼냐고 핏대인 거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고).
: 들사람님 오역이 일부 명백한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 아마 숱하게 나올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아포리아님 블로그에서 틀린 얘길 했다고 단정짓는건 무슨 근거인가요? 들사람님 영어실력으로 그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천만에요.
헌데 그렇다면 여기서 백 개 넘는 덧글로 내 번역을 이 잡듯 뜯어고친들, 그때 정말 말 같지도 않은 독해 신공 보여주셨던 님의 과거 또한 말끔히 세탁될 수 있냔 건데요. 누가 그렇다 했냐고 반문할 수 있겠죠 물론. 다만, 내 오역이 안 하느니만 못한 수준인 양 준엄하신 님은 막상 아포리아님 블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선 뭐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냐는 둥, 아예 잡아떼느니만 못한 너그러움을 발휘해 주시니 이건 대체 뭐냐는 거예요. 그런 독해 신공 보여준 이가 세심한 첨삭 열의에 불타오르는 것도 저건 뭐지 싶고.
:저는 들사람님 번역실력 얘기했는데 자기가 제 과거 들먹이고서 네가 내 번역을 이 잡듯 뜯어고친다고 네 과거가 세탁되냐는건 무슨 소리죠. A는 B의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B는 옛날에 A가 말한게 틀렸다고 주장한다. 무슨 근거? 그러면서 B는 내가 잘못했다고 네가 옛날에 잘못한게 아닌게 되냐고 우긴다. 이게 무슨 소리죠?
뭐 그새 영어 실력이 상전벽해해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이란 자신감으로 충만해진 나머지, 기본이 전에 없이 중요하고 예민하게 다가온 걸 수도 있겠지만,, 그때 거기서 님이 보여줬던 모든 게 그렇게 당장 달라질 만했던 건가 해서 말이죠. 님 스스로 말했듯, 기본이란 게 그 정의상 그렇게 당장 달라질 수 있는 게 아니거니와, 더군다나 님 스스로 보통이라 자평했으니, 난 님이 나한테 해준 일부 지적의 타당성관 별개로,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요.
:기본도 안된 들사람님이 어떻게 아포리아님 블로그에 있는 문장을 이해하냐구요? 들사람님이 번역을 잘못하는건 영어실력이 없기때문이에요.
거듭 말하지만, 님이 뭔데 나한테 지적질이냐고 하는 게 아녜요. 생각 같진 않아도, 얘기가 그저 똥뭍은 개와 겨뭍은 개 간의 개싸움으로 기울지 말았음 좋겠단 것도 물론이고요... 그래서라도, 그럼 그때 보통이 아녔던 님과 보통을 자처하는 지금의 님을 어찌 싱크로하믄 될지 당혹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다..지만 본인은 그나마 알겄지 하는 맘으루다 스스로 대답을 해보랬던 거죠. 근데 님은 그때 그일이 여즉 그냥 그럴 수도 있는 일쯤으로 기억되는 모양이예요. 비록 이렇게 또 댓거리 중이지만, 그때 전 님이 거기서 드러낸 심신의 매너를 보면서 님하곤 앞으로 말을 섞지 말아야겠다고 맘먹게 됐단 말이죠.
: 네가 뭔데 남한테 지적질이라뇨? 번역을 잘못했다고 지적당한게 그렇게 부끄러우세요?
아포리아님의 포스팅을 거론한 건 이래섭니다. 내가 볼 땐 왜 그걸 지금 들먹이냐고 님이 딴청 피듯 영문 몰라 할 게 아닌데, 근데 저러구 있네 싶은 거죠. 외려 난 아포리아의 블로그를, 레비스트로스를 왜 들먹이는지 자첼 영문 몰라하는 님이 희한해요. 거기서 (특히 ...님한테) 잘못 인정 안 하고 끝까지 딴청 핀 모습도 참 가관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것도 님을 상대하는 심사가 복잡하고 꼬이는 이유 중 하나랄 수 있겠네요. 뭐, 내 얘긴 이쯤하고요.
: 그러니까 들사람님이 보기에 제가 옛날에 가관이었어요. 그런데 그 얘길 왜 하냐구요? 과거에 그랬는데 왜 남의 블로그에서 지적질이냐는 얘기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아포리아님 블로그에 있는 문제의 포스팅
http://blog.jinbo.net/aporia/142?category=2
치치=붙박이별로 달린 덧글들이 백일몽님 건데, 치치란 이름으로 달린 덧글은 모두 자진삭제됐더랬죠? 왜 그랬는지는, 글쎄요 저도 모르죠.
: 스토커 때문에 그랬어요. 처음에는 저도 여기서 포포라는 고정닉쓰고 제 블로그까지 링크시켰어요. 그런데 스토커가 2009년 여름부터 계속 쫓아다녀서 신경질이 나서 삭제하고 닉도 계속 바꿨어요. 하다보니까 습관이 돼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됐어요.
님 말마따나, (행여나 그럴 맘이 있다면 얘기겠지만) 판단은 다른 분들께 맡기죠.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한번 번역해보시죠. 실력 좀 보게.
"In Structural Anthropology Levi-Strauss argues that kinship systems could not be 'the arbitrary product of a convergence of several heterogeneous institutions..., yet nevertheless function with some sort of regularity and effectiveness.'"
"No one asks how kinship systems, regarded as synchronic wholes, could be the arbitrary product of a convergence of several heterogeneous institutions (most of which are hypothetical), yet nevertheless function with some sort of regularity and effectiveness."
또 오해할까봐 거듭 말하는데 이런 문장은 정신분석에서 강한 긍정이에요.
"거듭 말하지만, 님이 뭔데 나한테 지적질이냐고 하는 게 아녜요. "
번역: 네가 뭔데 나한테 지적질이야?
들사람 번역: 현재의 위기는 인위적으로 창출된 “처녀지”가 그 지력을 다 소진해버린 데서 비롯됐다. 이 처녀지는 “신용카드 문화”가 아닌 “저축장부 문화”에 밀착돼 있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 바꿔 말해 신용으로 살면서 대출을 받고 이자를 내고 사는 등 벌지 않은 돈을 쓰는 건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The current crisis derives from the exhaustion of an artificially created “virgin land”; one built out of the millions stuck in the “culture of saving books” instead of “culture of credit cards”; in other words, out of the millions of people too shy to spend the yet-unearned money, living on credit, taking loans and paying interest.
다시 번역: 현재의 위기는 인위적으로 창조된 "처녀지"의 고갈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처녀지는 "신용카드 문화" 대신에 "금전출납부 문화"에 갇혀 있는 수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져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아직 돈도 안벌었으면서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대출을 받고, 이자를 갚기에는 너무 소심한 사람들이다.
이런 실력으로 어떻게 아포리아님의 블로그에 있는 문장들을 이해해서 제가 말도 안되는 소릴 하고 있다고 판단하실 수 있죠.
아포리아님이 인용한 대목: "In Structural Anthropology Levi-Strauss argues that kinship systems could not be 'the arbitrary product of a convergence of several heterogeneous institutions..., yet nevertheless function with some sort of regularity and effectiveness.'"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에서 아포리아님이 인용한 부분: "No one asks how kinship systems, regarded as synchronic wholes, could be the arbitrary product of a convergence of several heterogeneous institutions (most of which are hypothetical), yet nevertheless function with some sort of regularity and effectiveness."
아포리아님은 레비스트로스를 인용하면서 저자의 무식이 놀랍다고 해요. 아포리아님에 따르면 "보다시피 원문에는 'could be'라고 되어 있다. 저자는 앞의 'No one'의 'no'를 'could' 쪽으로 당겨온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원문의 뜻과 정반대가 된다. 원문은, 친족체계가 어떻게 이질적 제도들이 수렴한 자의적 산물일 수 있으면서(긍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규칙성과 실효성을 가지고 기능하느냐라는 이야기인데, 저자의 해석은, 자의적 산물일 수 없고(부정), 오히려 규칙성과 실효성을 갖는다는 식이다."
아포리아님은 이 두 문장이 서로 다른 뜻이라고 말했고, 저는 이 두 문장이 의미가 같다고 주장했어요. 제가 틀렸단 얘기죠. 들사람님이나 다른 분이 한 번 설명해보세요.
부정문에서 nevertheless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 문장 보실래요.
No one asks whether we have the money to pay the hospitals or to feed, clothe and nurture these children. Nevertheless, we can't turn them away.
아포리아님 식으로 해석해볼까요.
아무도 우리에게 이 아이들을 병원에 보내거나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양육할 돈이 있는지 묻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다.
이게 말이 되나요? 부정문에서 nevertheless는 강조 용법이에요. 아무도 우리에게 ... 하냐고 묻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이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다. 이렇게 해석해야되요.
머리 나쁜 사람들은 공부말고 더 생산적인 일을 찾는게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이로워요.
맞아 너처럼 집구석에서 놀고 먹는 것이 인류를 위하는 길이지.
네가 남자면 정신연령이 미숙한거고, 네가 여자면 넌 변태야.
인생 마감 때리기 전에 니가 인터넷에서 거품 무는게 인생 전부인 루저라는 사실이나 빨리 깨닫는 편이 좋을텐데ㅋㅋㅋ
그러면 위너는 어떤 사람들이니?
더욱이 아포리아님이 구조인류학에서 인용한 부분은 레비스트로스가 단정짓듯이 말한게 아니에요. 레비스트로스의 논리전개 중 일부일 뿐이에요. 이 대목이에요.
We shall be even more strongly inclined to follow this path after an additional observation has been made. The study of kinship problems is today broached in the same terms and seems to be in the throes of the same difficulties as was linguistics on the eve of the structuralist revolution. There is a striking analogy between certain attempts by Rivers and the old linguistics, which sought its explanatory principles first of all in history. In both cases, it is solely (or almost solely) diachronic analysis which must account for synchronic phenomena. Troubetzkoy, comparing structural linguistics and the old linguistics, defines structural linguistics as a “systematic structuralism and universalism,” which he contrasts with the individualism and “atomism” of former schools. And when he considers diachronic analysis, his perspective is a profoundly modified one: “The evolution of a phonemic system at any given moment is directed by the tendency toward a goal. ... This evolution thus has a direction, an internal logic, which historical phonemics is called upon to elucidate.” The “individualistic” and “atomistic” interpretation, founded exclusively on historical contingency, which is criticised by Troubetzkoy and Jakobson, is actually the same as that which is generally applied to kinship problems. Each detail of terminology and each special marriage rule is associated with a specific custom as either its consequence or its survival. We thus meet with a chaos of discontinuity. No one asks how kinship systems, regarded as synchronic wholes, could be the arbitrary product of a convergence of several heterogeneous institutions (most of which are hypothetical), yet nevertheless function with some sort of regularity and effectiveness.
However, a preliminary difficulty impedes the transposition of the phonemic method to the anthropological study of primitive peoples. The superficial analogy between phonemic systems and kinship systems is so strong that it immediately sets us on the wrong track. It is incorrect to equate kinship terms and linguistic phonemes from the viewpoint of their formal treatment. We know that to obtain a structural law the linguist analyses phonemes into “distinctive features,” which he can then group into one or several “pairs of oppositions.” Following an analogous method, the anthropologist might be tempted to break down analytically the kinship terms of any given system into their components. In our own kinship system, for instance, the term father has positive connotations with respect to sex, relative age, and generation; but it has a zero value on the dimension of collaterality, and it cannot express an affinal relationship. Thus, for each system, one might ask what relationships are expressed and, for each term of the system, what connotation – positive or negative – it carries regarding each of the following relationships: generation, collaterality, sex, relative age, affinity, etc. It is at this “micro-sociological” level that one might hope to discover the most general structural laws, just as the linguist discovers his at the infraphonemic level or the physicist at the infra-molecular or atomic level. One might interpret the interesting attempt of Davis and Warner in these terms.
간만에 와봤는데 생 난리가 나있네요; 들사람님, 무고하시지요? 아무튼 잘 읽고 갑니다!
아이고, 답글 참 일찍 달어 미안혀요. 글쎄 뭐, 그 생난리를 유발한 이로서 착잡할 뿐이고요.ㅋ;; 조리하기에 따라 꽤 괜찮을 법도 한데다 심지어 무척이나 고맙게도 틀리지도 않은 얘기들을, 어쩜 저렇게 맛대가리 없이 시전해주시까, 저것도 나름 능력인지 아님 남다른 무능력인지 알다가도 몰겠다 싶긴 해요. 이치나 시비를 가리는 일이 무슨 피안의 진리 따먹기도 아닌 이상에야 군밤 까먹듯 알맹이만 도려내믄 다가 아니란 것도 모를 리 없어 보이는데,, 정작 내가 그러구 살았나 싶어지기도 하고요.ㅎㅎ 뭐 요즘 좀 지내기가 빡빡해 이마저도 붙잡고 있기 버겁습니다마는..;; 저야 그렇다 치고 네오풀님야말로, 가려는 길은 잘 생기고 있는지 몰겠네요. 여즉 사는 데가 동교동 쪽이믄 저녁이나 함 같이 먹어요.
들사람님께,
논란이 간단히 끝날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생각보다 좀 길어졌네요. 제가 모르는 여러 맥락이 있겠지만, 혹시나 하는 걱정에 몇 마디 남깁니다.
제기된 오역의 문제는 들사람님이 어느정도 수긍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앞에 전개된 다툼(?)은 번역 내용과 관련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daydream 님이 제기하는 번역의 자격에 관한 문제라고 보이는데, 정식으로 출판된 번역물도 아닌데 이런 기준을 갖다 대는 것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기준의 배후에 일정한 엘리트주의적 또는 이론주의적 '지식관'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가 걱정도 듭니다.
번역은 특정한 맥락성을 갖는 텍스트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이해를 가지고 우리의 지적 맥락에 개입하는 하나의 실천 방식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텍스트의 맥락성은 본래적으로 완벽하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완전하게 번역될 수 없기 때문에, 번역은 그 한계를 태생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다고 봐요. 그렇지만, 오히려 저는 더 적극적으로 그 한계가 실천의 효과를 밑받침해준다고 이해합니다.
우리가 가지는 일반적이고 잠정적인 이해의 수준에서 문제될 수 있는 오역에 대해서 서로 문제제기하고 토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 협력의 작업이지만, 그 오역을 지적하면서 일정하게 번역의 완벽성 또는 오류 없는 완벽한 번역가능성에 근거하고 있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번역의 실천적 의미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걱정이 듭니다. 왜냐하면 완벽한 번역은 허구이고, 그러한 허구는 한편으로 우리의 맥락과의 연관성을 점차 상실하면서 텍스트를 타자화하고 본질화하는 번역행태로 표현됩니다. 이는 엘리트주의의 폐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간 우리 좌익운동 내부에서 적어도 90년대 이후 이 문제가 아주 심각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번역과 관련된 지식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번역은 분명 전문가/지식인이 하는 것이 맞지만, 이러한 엘리트주의적 번역 방식은 지식의 생산과 대중적 공유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이는 텍스트의 번역의 양쪽에 있는 언중과 사회에서 자신에 대한 그리고 타자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제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위의 번역문의 오역은 제기된 대로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그 대의가 기본적으로 전달되었다는 느낌입니다. 블로그의 독자는 여러 부류가 있겠지만, 이 정도에 만족하면서 번역문을 읽는 독자들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예술인생 드림
아이고, 이렇게 덧글 다셨는데 참 빨리도 덧글을 달게 됐네요. 제가 요즘 회사일(번역원고를 만지고 다듬는 일) 탓에 좀체 겨를이 없었습니다그려. 지금도 사실 이러구 있음 안 되는 건데..ㅜ;; 네뭐, 백일몽님하고는 예전부터 서로가 마뜩찮고 정나미 떨어져 할 일이랄까, 말하자면 개하고 고양이 쌈 마냥 꼬이고 엉킨 맥락들이 있죠. 님이 보기에 의외로 덧글질이 길어진 덴 뭐 그런 '문제외적인' 사정이 깔려 있답니다.
글쎄 뭐, 아닌 게 아니라 저도 번역이라는 행위를 어떤 한 사람의 손 안에서 '완결'돼야 하는 텍스트라기보단 일종의 하이퍼텍스트처럼 오류가 있거나 더 나은 표현이 있음 '함께' 보완해가는 일종의 되먹임 과정으로서 접근할 순 없을까 생각하는데요.. 설사 제가 백일몽님의 첨삭지도 충동을 부추기는 오류를 저질렀다손 치더라도 말이죠(글쎄, 정확히 예술인생님의 생각도 이런진 다소 조심스럽습니다만). 물론 백일몽님이야 그것도 웬만큼 기본이 돼야 가능한 일이지 니 따위가 할 말은 아니라고 하겠지만서도..ㅎ 글쎄 뭐, 아포리아의 블로그에서 본인이 보여준 과감한 가설(?)도 '충분히 용납 가능한' 거라고 여즉 스스로 믿고 또 주장하는 걸 보면, 번역 자체를 하이퍼텍스트 내지 위키피디아스럽게 다루자는 제안 또한 과연 그렇게 터무니 없을까 싶긴 하네요. 이런 번역은 실제로 가망이 없다기보단, 이런 번역이 가능해질 조건은 뭔지 탐색해보는 게 정작 필요한 게 아닌가 싶은 거죠. 그렇다고 이게 쉬 가능할 거란 얘긴 물론 아니겠지만요.
거칠게 말하면 저는 가령 모스크바 삼상회의 소식을 해괴하게 번역하거나 성경을 영어로든 한글로든 '19세기적으로' 번역하는 게 아닌 한(아니 어쩌면 바로 이런 번역이 이뤄지기에), 번역을 일단 하는 쪽이 아예 안 하는 것보다 낫다고 보는 쪽인데요. 저런 일 자체가 외려 번역의 엄밀함, 혹은 그에 기반한 형식을 추구했던 것과도 일정하게 연루됐던 듯싶어서요. 이렇듯 외국어 자체가 이미 일종의 지식권력 행세를 하는 특정 조건 내지 문맥에서 그냥 원문만 띡 하니 던져놓는 게 '차라리 아니 함만 못한 경우'보다 더 나은 거냐. 정말 그런 거냐. 글쎄요, 적어도 당근이라 단언할 일인지는 모르겠어요. 그거야말로 본의든 아니든 한글 말고 다른 언어 쫌 안다는 티 내는 것 말고 사실상 어떤 의미 내지 효과가 있는지도 말이져. 있대 봐야 외국어 잘 해서 좋겠다는 반응 말고 뭐 딱히 일을란가 싶고. 예술인생님께서도 이렇듯 번역이 모 아니면 도 식으로 갈 경우 빚어질 부정적 효과를 엘리트주의에 대한 우려로 이야길 하신 것 같은데, 그렇더라도 번역오류에 대한 백일몽님의 추상 같은 태도를 엘리트주의와 연결짓는 건 비약이지 싶어요. 그냥 하려거든 똑바로 하라는 걸 테고요. 다만 저 분은 제가 자기한테 무식한 주제에 잘난 척이라고 외려 저한테 그런 혐의를 둘 듯한데 실은 그 또한 비약이겠죠. 전 그냥 웬만함 말섞기가 싫어 그런 거니까요.ㅋ 어쨌거나 핵심은, 저처럼 기본도 안 된 주제에 일정한 오류 가능성을 무릅쓰고서라도 하려는 번역 작업의 효과 내지 미덕과 난점은 뭐며, 반면 이런 태도에 대해 백일몽님 같은 이들이 우려하는 바와 그 맹점은 뭔지 서로 견주는 일이 아닐까 싶은데...
뭐 얘기가 이렇게 펼쳐질 수 없었던 건, 익히 말씀드렸다시피 저와 백일몽 아녔음 뭐가 되도 될 얘기도 저하고 백일몽이 하게 돼 그리 된 게 아닐까 억측해 봅니다.ㅋ 설사 죄다 맞고 옳은 얘길 해도 막상 같이 하긴 부대끼는 경우가 적잖은 것처럼, 저하곤 하는 얘기마다 막히고 꼬였던 게 다른 누군가하군 훨씬 더 잘 풀릴 수 있겠지만 말이죠. 백일몽님하곤 남들하곤 다섯 번 던지면 서너 번 받거나 그 이상일 얘기도, 십수 번을 던져 한둘이나 받나 싶을 정도로 개인적으로 굉장히 지쳤더랬거든요. 스토킹에 시달려서든 아니든 그 여파까지 감당해야 할 이윤 없을 텐데도, 그에 대해 짚을 때마다 그때 그랬던 걸 어쩌란 말이냐 식으로 얼렁뚱땅하는 것도 스토킹 때메 고역스러웠겠건 아니건 간에 당최 못마땅했고요. 그러니 말 섞을 빌미를 안 주는 게 저로선 젤였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러지 못했네요. 저나 저쪽이나 왜 이 모양일까 싶지만, 뭐 요즘 제가 그런 고민까지 계속 붙잡고 있을 형편도, 주제도 못 되는 지라.
암튼 동일한 텍스트도 서로 다른 번역판본들이 '정오'의 차원을 넘어 여럿 존재하는 해석적 시차들 속에서 분화될 수 있잖겠냐고, 중요한 건 이런 번역들이 이뤄질 특정한 토양이랄까요 조건 아니겠냐고 떠벌리곤 했는데.. 왜 가령 칼 슈미트의 텍스트들 보면 우파냐 좌파냔 시차에 따라 그 의미의 결이 판이해지는 것처럼요. 정오 차원으로 돌릴 수 없는 해석적 시차들이 있다면 이에 따른 서로 다른 판본들이 있는 건 외려 자연스런 일이겠다.. 물론 기본도 안 되는 제가 감히 운운할 경지인가 싶긴 해도 말예요.^^:
뭐 아무튼 질퍽하게 오가는 불모한 덧글에 발을 담가주셔서 한편으론 고마움 아닌 고마움을 느낌서도 뭐 좀 민망할 따름입니다. 담근 보람이 좀 있었어야 할 텐데, 굳이 안 당해도 될 면박이나 당한 거 같아서 말이죠. 이 모~든 게 다, 제 얄팍하고 한심한 기본 탓이려니 여겨 주세요.ㅎ
사람들마다 똑같은 텍스트도 다르게 읽기 때문에 번역도 마찬가지로 다양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번역하신 글에 대해서는, 그 글이 일부 오역이 있다해도 제가 읽기에는 대의가 전달되었기 때문에 정식 출판물이 아닌 블로그 활동의 일환으로서의 번역으로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고, 번역하시느라 고생하셨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격'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나 소양과 자질을 평가하는 것은 블로그의 토론에서 적절치 않고, 게다가 토론의 기대 효과를 반감시키는 아주 안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아쉽게도 그 구도에 말려서 들사람 님도 약소하게나마 비슷한 오류를 범한 것 아닌가 감히 고언을 드립니다. 암튼 두 분 사이의 관계라는 맥락을 제가 모르니 이 정도의 말씀만 드립니다.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시고, 계속 건필하시길...
그건 님 생각이죠.
예술인생님 아주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저는 들사람님이 번역을 완벽하게 하지 않았다고 탓한 것이 아니라 번역을 틀리게 한 것에 대해 지적한 것입니다. 물론 nature를 본질이 아니라 본성이라고 번역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reach를 오지랖을 넓히다라고 옮긴 것이나, saving books를 저축장부라고 옮긴 것이나, millions of를 수백만의라고 옮긴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한 번역도 완벽한 것이 아니고 초벌번역 수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reach를 오지랖을 넓히다라고 번역한 것은 엄밀히 틀린 것입니다. 영토나 범위의 확장은 쓸데없이 끼어드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저축장부가 현실에 존재하나요. saving books를 구글 이미지로 보면 금전출납부 나와요. millions of는 특정한 숫자가 아니라 굉장히 많다는 뜻이에요. 이것이 완벽한 것을 요구하는 것인가요. 게다가 들사람님은 자신의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어요. 그런데 왜 이런 번역을 할까요. 첫째 원어와 번역어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 둘째, 자기가 옮기는 글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 셋째, 문맥과 상관없이 단어 하나하나를 그대로 옮기고 있기 때문. 넷째, 이해하기 쉬운 일상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단어를 창조하고 있기 때문. 저축장부가 뭐에요? 이런 것을 지적하는 것이 엘리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번역은 태어나지 말아야할 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지 않는 것이 타인에게 좋은 것입니다.
쓰고 보니 비유가 좀 끔찍하네요. 아이에겐 잘못이 없는데. 아이에 대한 책임도 없고 부모가 될 자격도 없는 사람이 아이를 낳는 것이 아이에게 나쁜 것처럼 번역할 실력이 안되는 사람이 번역을 하는 것은 독자에게 나쁜 것입니다.
대체로 독자를 우습게 보는 것은 엘리트적인 태도입니다.
번역자는 원문의 저자와 독자를 최대한 존중해야합니다.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번역해야합니다. 원문이 난해하다. 이것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이럴때 번역자는 항상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합니다. 원문은 원문 그대로 옮기고 역주에 설명을 추가해야합니다. 그러나 들사람님의 번역의 문제점은 원문과는 상관없는 본인문제입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지꼴리는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포리아님이 지적한 문제는 어떻게 이해했는지 제가 틀렸다고 저를 가르치려고 하는데 아주 밥맛입니다. 제가 원래 난폭한 성격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는데 무식함과 난폭함이 결합하면 너무 혐오스러워요.
왜 우리나라에서 좋은 번역이 드문지, 왜 좋은 책들이 번역이 안되고 있는지 잘 생각해시기바랍니다. 번역은 중노동인데 비해 대가가 형편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그런데 들사람님이 아무 대가없이 번역했으니 틀린 번역이어도 넘어가야하나요? 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지금 바우만에게 큰 실례를 하고 있습니다. 바우만은 자기 글을 한국에 있는 누군가가 번역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외국에 있는 누군가는 그 글을 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십년전에 캐나다에 있는 대학교수 글을 번역했는데 그 사람 제자가 저한테 메일을 보냈어요. 자기 스승 글을 번역해줘서 고맙다고. 그 사람이 홍기빈씨였어요. 웹은 바다입니다.
들사람님은 번역의 노고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구글 좀 찾아보면 될 것을. 원숭이도 도구를 사용하는데 부끄럽지도 않아요. 저는 그 글 전체가 아니라 그 단락 하나 번역하는데 한시간이 걸렸습니다. 제 생각에 들사람님은 한 십분만에 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