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ary No. 225, Jan. 15, 2008
케냐: 안정된 민주주의의 모범, 또는 와해의 진원?
("Kenya: Stable Democracy or Meltdown?")
2007년 12월 27일, 케냐에서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이에 대해 케냐 외부에서는 대체로 무관심했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언론에선 케냐 내 부족들 간에 벌어진 대규모 폭력을 머릿기사로 다루며, 부족간 갈등이 아프리카에서 “분출”, 확산 일로로 치달을 위험을 언급했다. 각 부족을 대표하는 두 수장이 서로 만나 타협을 이끌어내라는 절박한 호소와 함께 말이다.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없지 싶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당장 벌어진 상황만 놓고 보면, 라일라 오딩가가 이끄는 야당 오렌지민주운동(ODM)당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반면 현직 대통령 음와이 키바키가 이끄는 집권여당 민족통일당(PNU)이 참패를 당했다는 사실은 어느 모로도 명백하다.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 부통령과 20여명이 넘는 각료들은 당선에 실패했다. 민족통일당은 예전 의석의 5분의 1에도 못미치는 42석을 확보했고, 오렌지민주운동당은 99석을 얻었다.
오딩가가 대통령에 당선되리라고 하는 게 타당해 보였다. 그러나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3일간의 개표작업 후, 키바키가 신승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키바키가 승리를 훔쳐간 것이란 반응이 곧바로 나왔다. 개표종료 직후 은밀히 이뤄진 취임선서로, 키바키는 현 상황을 둘러싸고 나라 안팎에서 공공연히 나도는 의구심들에 대한 외부 중재자들의 논평을 용납하지 않겠노라 천명했다. 여기에는 선거결과로 인한 혼란이 자신의 당선을 기정사실화함으로써 잦아들 것이라는 기대가 작용했던 듯싶다. 과연 그렇게 될까?
지금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특히 최근 5년 간 서구 언론 및 행정부들은 아프리카 지역의 그 많은 국가들과는 달리 케냐가 “안정된 민주주의”를 이뤘다며 한껏 치켜세웠다. 이런 상찬을 곧잘 받던 나라가 하나 더 있었음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바로 아이보리 코스트로, 최근 몇 년 새 기약 없는 내전의 심연으로 가라앉은 나라다. “안정된 민주주의”라고들 하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아마도 그건, 서구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면서 그곳으로부터의 투자를 전적으로 환영하는 통치행위가 이뤄진다는 뜻일 게다. 케냐는 아이보리 코스트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같은 표준을 잘 따랐던 셈이다. 아이보리 코스트는 이제 정치적 와해 상태로 접어들었는데, 케냐도 그리 될 조짐이 보이는 듯싶다.
1945년 이후 케냐에서 벌어졌던 역사를 보면, 안정된 민주주의 운운하는 류의 평가가 얼마나 피상적이고 쓰잘데기 없는지 확연해질 법하다. 케냐는 옛 영국령 식민지로, 중동부 지역에 위치한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 게릴라 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됐던 곳이었다. 이 운동단체는 ‘마우마우’단이라 불렸는데, 영국 당국에서는 이 운동을 억누르느라 오랜 세월을 보냈다. 마우마우는 케냐 내 최대 규모 부족집단인 키쿠유족을 중심으로 해 생성된 농민운동이었다. 키쿠유족에선 이 운동의 발흥과 관련해 자신들이 챙겨야 할 중요한 몫이 있다고 여긴다. 현 대통령 음와이 키바키는 키쿠유족 출신이다.
독립 후, 키쿠유족 출신으로 케냐의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조모 케냐타가 사망했다. 당시 부통령으로 그의 공석을 대신했던 칼렌진족 출신 다니엘 아랍 모이는, 아주 오랜 기간 지속된 약탈적이고 독재적인 통치체제 구축에 나섰다. 이같은 권력의 장에서 키쿠유족은 상당 정도 밀려났는데, 키쿠유족 다음으로 규모가 큰 루오족도 마찬가지였다. 루오족 지도자는 오징가 오딩가로, 라일라 오딩가의 아버지였다. 사회주의 프로그램을 내걸고 그가 벌였던 운동은 케냐 정부에게 억압의 대상이었다.
2002년이 되자 케냐 사람들은 아랍 모이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고, 그를 지지했던 서구권 인사들은 (케냐)민주주의의 외양에 품을 들일 때가 왔는가보다 했다. 일당 체제는 선거제에 자리를 내줬다. 키바키와 라일라 오딩가는 여타 사람들과 제휴하여 전국무지개연합(NRC)을 창설, 그네들 말로는 부패뿐 아니라 공직 배분의 불균형, 특정 부족한테만 돈이 흘러들어가는 상황을 끝장내는 데 전력했다. 키바키는 선거에서 승리했고, 대중의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2002년은 부시정권이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해이기도 했다. 미국은 키바키를 핵심적인 동맹 대상으로 신규 영입했다. 그에 따른 보상으로 그는, 다량의 외부자금 지원과 더불어 세계은행 및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하릴 없이 칭찬을 선사받았다. 2002~2007년에 이르는 동안 케냐에선 신자유주의적인 교범에 따라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이 이뤄졌다. 하지만 키바키는 자신이 했던 여러 약속들을 저버렸다. 농촌지역 빈곤층과 도심슬럼권 다수의 빈민들한테 경제성장의 파급효과는 일어나지 않았다. 키바키는 부패를 척결하라며 자신이 임명했던 이를 파면했다. 그리고서 전국무지개연합 소속이던 오딩가와 다른 세력들을 핍박했다.
작년 말 새로 치러진 선거를 오렌지민주운동당과 오딩가가 손쉽게 이긴 건 이래서였다. 지금 키바키가 아랍 모이를 등에 업었다는 사실은 아무런 쓰잘데기도 없었다. 오렌지민주운동당은 케냐에 여러 불평등의 골이 얼마나 터무니 없을 만큼 만연해 있는가에 무게를 싣고서, 부패에 맞설 새로운 싸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케냐 내 무슬림 공동체들에게는 그간 미국과의 이면거래(renditions, 정치적 반대자들을 미국 정부한테 넘겨 고문, 학대 등 법률적 제약에서 자유롭게 다루도록 한 양해조치를 말한다-옮긴이)를 파기하겠노라고 천명했다. 이같은 프로그램들이 유권자들에게 먹힌 건 명백했지만, 키바키에겐 먹히지 않았다. 그가 선거를 훔친 까닭이 여기 있다. 미국과 영국 정부에선 이같은 선거 절도 행위가 어떻든 먹힐 수 있도록 무척 노력중인 상황이다.
이와 같은 뻔뻔스런 행보가 폭력의 뇌관을 건드렸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부족간 분쟁이란 외관을 띠었다. 서구 언론에선 케냐 상황이 아프리카의 특수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미국에서 특정 인종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얘긴 일절 들어본 적이 없는 걸까? 아일랜드 북부 지역에서 카돌릭교도와 개신교도들 간에 벌어졌던 폭력도 아예 본 적이 없어서일까? 이들 상황에서 공통적이었던 건, 빗장을 채운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나 노니는 상층 부류들이 무신경하게 처신하는 사이, 도심 슬럼가와 농촌 지역의 가난한 이들은 서로 맹렬히 치받더라는 사실이다.
라일라 오딩가는 천사도, 혁명적인 지향을 가진 인물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선거에서 이겼던 건 신자유주의 노선과 연루된 키바키 정권의 부패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현 상황에서 오딩가에게 주어진 역할은, 이를테면 2000년 대선 당시 앨 고어가 그랬던 것처럼, 매우 제한적이다. 지금보다 더 진전된 행보를 보일 공산도 아마도 전혀 없지 싶다. 키바키는 법원에서 새로이 선거를 치르라고 하면 그리 하겠노라고 하지만, 오딩가는 법원이 자신의 수중에 있다고 한다.
안정된 민주주의라고 하는 게 이렇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원문보기http://fbc.binghamton.edu/225en.htm
케냐: 안정된 민주주의의 모범, 또는 와해의 진원?
("Kenya: Stable Democracy or Meltdown?")
2007년 12월 27일, 케냐에서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이에 대해 케냐 외부에서는 대체로 무관심했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언론에선 케냐 내 부족들 간에 벌어진 대규모 폭력을 머릿기사로 다루며, 부족간 갈등이 아프리카에서 “분출”, 확산 일로로 치달을 위험을 언급했다. 각 부족을 대표하는 두 수장이 서로 만나 타협을 이끌어내라는 절박한 호소와 함께 말이다.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없지 싶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당장 벌어진 상황만 놓고 보면, 라일라 오딩가가 이끄는 야당 오렌지민주운동(ODM)당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반면 현직 대통령 음와이 키바키가 이끄는 집권여당 민족통일당(PNU)이 참패를 당했다는 사실은 어느 모로도 명백하다.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 부통령과 20여명이 넘는 각료들은 당선에 실패했다. 민족통일당은 예전 의석의 5분의 1에도 못미치는 42석을 확보했고, 오렌지민주운동당은 99석을 얻었다.
오딩가가 대통령에 당선되리라고 하는 게 타당해 보였다. 그러나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3일간의 개표작업 후, 키바키가 신승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키바키가 승리를 훔쳐간 것이란 반응이 곧바로 나왔다. 개표종료 직후 은밀히 이뤄진 취임선서로, 키바키는 현 상황을 둘러싸고 나라 안팎에서 공공연히 나도는 의구심들에 대한 외부 중재자들의 논평을 용납하지 않겠노라 천명했다. 여기에는 선거결과로 인한 혼란이 자신의 당선을 기정사실화함으로써 잦아들 것이라는 기대가 작용했던 듯싶다. 과연 그렇게 될까?
지금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특히 최근 5년 간 서구 언론 및 행정부들은 아프리카 지역의 그 많은 국가들과는 달리 케냐가 “안정된 민주주의”를 이뤘다며 한껏 치켜세웠다. 이런 상찬을 곧잘 받던 나라가 하나 더 있었음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바로 아이보리 코스트로, 최근 몇 년 새 기약 없는 내전의 심연으로 가라앉은 나라다. “안정된 민주주의”라고들 하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아마도 그건, 서구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면서 그곳으로부터의 투자를 전적으로 환영하는 통치행위가 이뤄진다는 뜻일 게다. 케냐는 아이보리 코스트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같은 표준을 잘 따랐던 셈이다. 아이보리 코스트는 이제 정치적 와해 상태로 접어들었는데, 케냐도 그리 될 조짐이 보이는 듯싶다.
1945년 이후 케냐에서 벌어졌던 역사를 보면, 안정된 민주주의 운운하는 류의 평가가 얼마나 피상적이고 쓰잘데기 없는지 확연해질 법하다. 케냐는 옛 영국령 식민지로, 중동부 지역에 위치한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 게릴라 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됐던 곳이었다. 이 운동단체는 ‘마우마우’단이라 불렸는데, 영국 당국에서는 이 운동을 억누르느라 오랜 세월을 보냈다. 마우마우는 케냐 내 최대 규모 부족집단인 키쿠유족을 중심으로 해 생성된 농민운동이었다. 키쿠유족에선 이 운동의 발흥과 관련해 자신들이 챙겨야 할 중요한 몫이 있다고 여긴다. 현 대통령 음와이 키바키는 키쿠유족 출신이다.
독립 후, 키쿠유족 출신으로 케냐의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조모 케냐타가 사망했다. 당시 부통령으로 그의 공석을 대신했던 칼렌진족 출신 다니엘 아랍 모이는, 아주 오랜 기간 지속된 약탈적이고 독재적인 통치체제 구축에 나섰다. 이같은 권력의 장에서 키쿠유족은 상당 정도 밀려났는데, 키쿠유족 다음으로 규모가 큰 루오족도 마찬가지였다. 루오족 지도자는 오징가 오딩가로, 라일라 오딩가의 아버지였다. 사회주의 프로그램을 내걸고 그가 벌였던 운동은 케냐 정부에게 억압의 대상이었다.
2002년이 되자 케냐 사람들은 아랍 모이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고, 그를 지지했던 서구권 인사들은 (케냐)민주주의의 외양에 품을 들일 때가 왔는가보다 했다. 일당 체제는 선거제에 자리를 내줬다. 키바키와 라일라 오딩가는 여타 사람들과 제휴하여 전국무지개연합(NRC)을 창설, 그네들 말로는 부패뿐 아니라 공직 배분의 불균형, 특정 부족한테만 돈이 흘러들어가는 상황을 끝장내는 데 전력했다. 키바키는 선거에서 승리했고, 대중의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2002년은 부시정권이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해이기도 했다. 미국은 키바키를 핵심적인 동맹 대상으로 신규 영입했다. 그에 따른 보상으로 그는, 다량의 외부자금 지원과 더불어 세계은행 및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하릴 없이 칭찬을 선사받았다. 2002~2007년에 이르는 동안 케냐에선 신자유주의적인 교범에 따라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이 이뤄졌다. 하지만 키바키는 자신이 했던 여러 약속들을 저버렸다. 농촌지역 빈곤층과 도심슬럼권 다수의 빈민들한테 경제성장의 파급효과는 일어나지 않았다. 키바키는 부패를 척결하라며 자신이 임명했던 이를 파면했다. 그리고서 전국무지개연합 소속이던 오딩가와 다른 세력들을 핍박했다.
작년 말 새로 치러진 선거를 오렌지민주운동당과 오딩가가 손쉽게 이긴 건 이래서였다. 지금 키바키가 아랍 모이를 등에 업었다는 사실은 아무런 쓰잘데기도 없었다. 오렌지민주운동당은 케냐에 여러 불평등의 골이 얼마나 터무니 없을 만큼 만연해 있는가에 무게를 싣고서, 부패에 맞설 새로운 싸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케냐 내 무슬림 공동체들에게는 그간 미국과의 이면거래(renditions, 정치적 반대자들을 미국 정부한테 넘겨 고문, 학대 등 법률적 제약에서 자유롭게 다루도록 한 양해조치를 말한다-옮긴이)를 파기하겠노라고 천명했다. 이같은 프로그램들이 유권자들에게 먹힌 건 명백했지만, 키바키에겐 먹히지 않았다. 그가 선거를 훔친 까닭이 여기 있다. 미국과 영국 정부에선 이같은 선거 절도 행위가 어떻든 먹힐 수 있도록 무척 노력중인 상황이다.
이와 같은 뻔뻔스런 행보가 폭력의 뇌관을 건드렸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부족간 분쟁이란 외관을 띠었다. 서구 언론에선 케냐 상황이 아프리카의 특수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미국에서 특정 인종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얘긴 일절 들어본 적이 없는 걸까? 아일랜드 북부 지역에서 카돌릭교도와 개신교도들 간에 벌어졌던 폭력도 아예 본 적이 없어서일까? 이들 상황에서 공통적이었던 건, 빗장을 채운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나 노니는 상층 부류들이 무신경하게 처신하는 사이, 도심 슬럼가와 농촌 지역의 가난한 이들은 서로 맹렬히 치받더라는 사실이다.
라일라 오딩가는 천사도, 혁명적인 지향을 가진 인물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선거에서 이겼던 건 신자유주의 노선과 연루된 키바키 정권의 부패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현 상황에서 오딩가에게 주어진 역할은, 이를테면 2000년 대선 당시 앨 고어가 그랬던 것처럼, 매우 제한적이다. 지금보다 더 진전된 행보를 보일 공산도 아마도 전혀 없지 싶다. 키바키는 법원에서 새로이 선거를 치르라고 하면 그리 하겠노라고 하지만, 오딩가는 법원이 자신의 수중에 있다고 한다.
안정된 민주주의라고 하는 게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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