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신차린 조선?
나원, 이런 때도 있구나 싶었다. 글쎄, <조선일보>에서 북한인권의 참상을 목청높여 성토해온 미국더러 “말로만?”이냐고 슬쩍 김빼는 소릴 했다는 거 아닌가(2005년 9월 26일자를 함 보시라). 그래서, 이걸 무슨 “좃선”의 지속력 감퇴 징후 따위로 읽자? 물론, 아니다.
조선일보의 후장에 날려온 깊숙한 똥침, 애초 ‘개과천선’ 따위의 도덕적 요청관 하등 관계없었음이다. 어디까지나 그건 조선의 너덜하고 누덕한 현실감각으론 본지가 바라 마지않는 명랑사회구현, 졸라 요원하기 때문 아녔던가? 역시나, 기사는 “탈북자를 부탁해” 삘루다 ‘맹방’ 미국의 믿음직스런 행보에 대한 공허한 기대로 조심스레 끝을 맺는다.
돌이켜 보면, 민망한 꼴림 모드였던 한미관계를 이젠 스킨십 모드로 전환하자는 데도, 관계전복 음모라던 조선 데스크 아녔던가? 그런 조선조차 이렇게 반미질을 하는 판에, 딴지에서 그냥 넘어갈 수 있겠냔 거지. 게다가 딴지가 무엇이던가. 함 걸린 건 끝장을 보구야 말겠다는 뽕빨 스피릿으로 충만한 황색찌라시 아닌가.
이에 본 기자, 북한‘인권’ 문제 제대로 주무를 실전요리법에 관해 이야기해 볼 참이다. 이거 익혀두믄 북한인권에 관한 한 막힌 좌변기물 그냥 쑥, 빠지듯 읽어본 수고에 값하리라는 게 본 기자의 주장이다. 아니면 어쩔거냐구? 아니라는데 낸들 어쩌겠나. 흑. 자 그럼, 북한‘인권’ 제대로 조지길 훼방놓는 속살들이 먼지 하나씩 벗겨보자. 우우, 가슴 설레지?
2. 속살 하나―인권, 그기 머꼬?
먼저 딴지 초기화면에 올라가 있는 글귀, 새삼 확인해 보시라. “인류의 원초적 본능인 먹고 싸는 문제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란 구절, 보이시나? 그렇다. 인권이란 딴지가 추구하는 먹고 싸는 문제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인권이 뭐 별 건가. 잘 먹고 싸는 데 어려움 없을 여건을 실질적으로 만들어내는 능력, 그게 인권인 거지. 이같은 인민덜의 인권신장 및 그 구현은 당근 그 어떤 국가의 ‘주권’보다도 우선돼야 하는 거고.
인권을 이렇게 포괄적으로 정의하는 이유? 그게 거론되는 ‘구체적 맥락’ 때문이다. 이 맥락이 결여된 ‘인권’? 아무리 고상한들 그거, 잘 먹고 싸는 데 커다란 어려움에 빠진 사람덜의 ‘실감’을 거세한 개념의 감옥일 뿐이다. 북조선 인민덜의 인권실상만 하더라도, 그 참혹함이란 거, 그런 상황을 초래한 구체적 전후맥락 쏙 빼놓고 얘기하면 그게 다 정치적 사기란 거고.
북한의 인권실상이 참혹하지 않다는 말 하려는 거냐고? 설마, 그럴 리가 있나. 다만 문제는 맥락을 떨궈낸 ‘인권’ 카드, 백 번 양보한들 얄팍한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이라크를 함 보라. 군산-석유자본의 후견인 미국이 이라크의 내-외적 맥락 따윈 안중에 없이 알량하게 베푼 '인권'과 자유민주주의? 인권에 목말랐던 이라크 인민덜에게 그것은, 또다른 재앙 아니었더냔 말이지.
자, 요점정리 들어가보자. 인권, 잘 먹구 잘 싸는 데 필요한 제반여건 조성에 투여되는 능력, 또는 이의 구현에 대한 요청이라 했다. 그런 만큼 ‘인권’이란 화두는 이의 구현방법과 그 형태를 둘러싼 힘겨루기를 늘상 수반하기 마련이다. 당근 정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음이다. ‘인도적 차원’ 운운하며 인권논의의 당위성을 외치는 ‘인권’, 까딱 잘못함 또다른 지배의 마수를 촉촉이 적셔줄 모이스쳐 로션되기 십상인 이유다.
‘자유북한방송’(http://www.freenk. com)에서 아무리 “독재와 기아로 고통받는 북한에 자유와 민주주의 이념을 전파”하고 “북한민주화”를 그 본령으로 삼는다 한들, 이들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꽃을 든 괴물’이란 소리를 듣는 게 다 그래서다. 탈북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방송제작에 참여하고 있다지만, 체험의 생생함이 현실인식의 타당성을 곧바로 보장해주는 건 아니다.
인권의 당위성이 구체적 맥락과 들떠버릴 때, 그 결과는 수습하기가 그야말로 대략난감이다. 매혹적 향기에 취했더니만, 허걱, 그게 살상용개스 냄새였단 걸 뒤늦게 알고 만 격이랄까. 이런 꼴 나지 않으려면, 저기 저 북조선체제가 대관절 어쩌다 파탄적인 위기에 처하게 됐는지를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 인민덜의 인권이 극단적인 한계상황에 내몰리게 된 구체적 맥락, 바로 그것이다.
3. 속살 둘―‘전쟁체제’의 궤적, 1950~1987/91
누가 그러더라.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이 명제가 한반도 지역만큼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곳,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세기, 한반도에선 남북을 막론하고 전쟁이란 변수가 양측 인민덜의 삶을 말그대로 좌지우지해 왔더랬다. 무려 50여 년이 넘도록.
이같은 조건 속에서 대한민국에선 ‘멸공-호국체제’가, 북조선엔 ‘대미항전체체’가 탄생했다. 1950년 이래로 대한민국과 북조선은 날선 군사적 긴장 속에서 ‘나라만들기’ 프로젝트를 ‘따로 또 같이’ 진행해왔던 것이다. 이러는 사이 두 체제는, 마치 샴쌍둥이마냥 어느 한 쪽을 떼놓고선 다른 한 쪽을 온전히 이야기하기 불가능한 관계가 됐다.
전쟁체제―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고, 또 그런 불안과 공포를 일상으로 살아내야 하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진, 잡설이 불필요할 터. 사실 전쟁 자체보다 더 끔찍한 건, 일상을 부대낄 서로에 대한 끝모를 불신을 삶 속에 켜켜이 체화해야 한다는 점일 게다. 서로가 잠재적 적대, 심지어 절멸의 대상이라는 것만큼 우리네 내면을 피폐케 하는 일이 또 있을까?
전쟁체제라는 조건은 ‘지상낙원’ 건설과 ‘조국근대화’란 기치 아래 두 나라 인민덜을 동원하기에 좋은 명분 또는 핑계거리였다. 이를, 북조선에서는 항일무훈에 빛나는 수령을 정점으로 한 준전시동원체제 구축에 적극 활용했다. 더구나 ‘괴뢰성’을 불가피한 태생적-지정학적 특성으로 했던 대한민국에서, 전쟁체험의 맥락을 말끔히 세탁하는 일은 국체수호에 필수적인 지상과제였을 터. 비록 그게 마치 백인이 되고픈 나머지 각을 뜨는 일조차 불사했던 마이클(잭슨)의 처연한 몸부림만큼, 부질없는 일이었더라도 말이다.
서로를 박멸/적화의 대상으로 규정하며 ‘묻지마발전’의 꼬삐를 당기기에 여념 없었던 적대적 공생관계, 이것이 나름 견고히 굴러간 건 얼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까지다. 누가 전쟁체제 아니랄까봐, 인민덜 동원 및 동기부여 방식이 서로 뺨치게 비슷했던 대한민국과 북조선.
그래도 대한민국의 경우는 그나마 나았다. 1987년 6월, “반공, 다 좆까라그래”를 외치는 인민덜의 가차없는 똥침세례 속에 준전시동원체제 아래서 대한민국 주류덜이 쏠쏠히 재미 봤던 그간의 정치경제적 틀거리들이, 비록 무늬만이라지만 그거라도 일단 아작이 났으니까.
1991년 소위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던 동구권 국가들의 연쇄몰락은, 대한민국의 반북좌파 진영에게도 충격이었겠지만, 북조선에겐 이후의 체제존립을 막막케 하는 대형사건이었다. 자력갱생 와중에 나름 구축해 뒀던 대외적 연결고리들이 죄다 뻐그러져버렸으니. 가뜩이나 인민덜의 인권신장 여지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북조선체제의 내부 상황은, 여기에다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기라 하는 천재지변형 내홍을 겪으며 그야말로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4. 속살 셋―북조선 인권 현실은 오랜 동안 저당잡혀온 한반도 인권 현실의 내부
한때 ‘마름국가’란 국제적 비아냥에도 아랑곳 없이, 은혜로운 미국의 후견 아래 비록 후줄근한 내실이나마 입지전적 신분상승의 ‘쾌거’를 이룬 대한민국. ‘인민해방’의 화신임을 자임했지만, 결국 지상낙원은 고사하고 인민덜을 끝없는 나락에 빠뜨리고 만 북조선. 비교체험 극과 극에 버금갈 만한 이 명암, 어떻게 봐야 할까.
50년에 가까운 세월, 대한민국과 북조선은 ‘적대적 공생’을 통해 체제의 존재이유를 증명해왔다. 맘이야 당장 죽여버리고 싶지만, 막상 그럴 순 없는 불구대천의 샴쌍둥이처럼. 이 기괴한 상황 아래 인민덜의 인권은, 남북을 떠나 ‘조국’과 ‘민족’이란 이름 아래 손쉽게 유예되거나 아예 몰수당하기 일쑤였다. 죽음이 두려워 오직 ‘생존’만이 지상가치가 돼야 하는 참혹한 지경조차, 체제우위의 쟁취과정서 으레히 따르기 마련인 ‘진통’ 쯤으로 간단히 봉합돼버렸다.
이쯤에서 ‘자학사관’은 그만 집어치우라는 신경질적 반응이 치고들어올 법한데, 본 기자 이 점 하나는 분명히 하고 싶다.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없는 좀비들, 그리고 배만 그저 부름 장땡 아니냔 돼지들이 잘 먹고 싸는 세상, 또는 그런 걸 용납하는 체제를 지지할 맘, 추호도 없다는 거. 적어도 이때 인권이란, 전쟁체제로 애꿎게 휘둘렸고 또 지금도 휘둘리고 있는 인민덜 모두를 위한 ‘무기’여야 한다는 얘기 되겠다.
한반도 인민덜이 겪은 고통을 두고 남북 중 어느 쪽이 더 빡쎘는지 저울질 하는 거, 참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쎔쎔이라 치부하는 것 역시 부당하고 어줍잖은 양비론이라 본 기자 주장하는 바이다. 남북간의 체제경쟁이란 거, 애당초 ‘공정’치가 못했단 거지. 순간, 정글 같은 국제정치 현실에서 웬 강아지 풀뜯어먹는 소리냔 후줄근한 충고가 들린다. 그럼, 이렇게 얘기해보자.
북한이 처한 지정학적 조건은 미국이 캡짱 먹구 있는 국제체제하의 일 국가로 자신을 온전히 위치․존속시키기엔 열라 버거운 거였다. 그런데 이게 전쟁체제 지속과 동구블럭의 몰락으로 가중된데다, 1990년대 중반 설상가상으로 자연재해마저 겹치는 바람에 북한은 대다수 인민들의 삶 자체가 파탄나는 극한의 위기상황에 봉착하고 말았다는 거다.
개정일독재니 뭐니 하며 북조선체제의 참상과 해악에 피토하는 심정, 충분히 이해는 간다. 본 기자도 김정일 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한테 “형님, 나, 박정희 팬임네다” 했을 때, 머야 저게, 지금 저게 위대한 북조선 캡짱이 할 소리란 말인가. 절라 어이 없네, 북조선, 정말 제대로 알아야 겠구만, 뭐 이런 생각이 머릴 스쳤더랬다.
그치만 이렇게 디립다 북한만 패봐야 삽질일 공산이 크으다는 거, 놓치면 안되겠다. 현실의 북조선, 결코 섬이 아니다. 근대 국제체제의 엄연한 일부일 뿐 아니라, 북조선체제가 어떻게 굴러먹느냐 역시 당근 지정학적 조건의 영향 아래 있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체제의 해악을 준열히 비판하는 일은, 미국중심의 전후 동아시아 질서(필리핀-대만-오키나와-한반도-사할린으로 이어지는 반공-자본주의 체제질서)의 해악을 비판하는 일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이게 빠지면, 이라크침공 과정서 이미 확인했다시피, 그건 비판이 아니라 얄팍한 정치적 꼼수가 될 뿐이다.
요컨대 북조선체제의 내적 파탄으로 인한 인민덜의 비참한 인권상황이라는 거, 지난 50여 년간의 반공-자본주의 체제질서가 만들어낸 ‘지정학적 블랙홀’ 효과라는 거다. 따라서 이 점을 빠뜨리거나, 심지어 의도적으로 개무시하려는 그 어떤 북한 인권상황 비판도 정치적 사기에 그치리란 거고.
5. 북조선인권 논의, 이제부터다
아무리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 하더라도, 북조선이 ‘반미제’란 명분으로 이 질서에 편승하면서 북조선 인민덜을 수령체제의 시다바리로 전락시켜왔다는 거, 도저히 묵과해선 안될 일이다. 그렇다면 동시에 이 서글픈 체제의 존속을 지속적이면서 공세적으로 북돋웠던 지정학적 조건이 미국중심의 전후 동아시아질서 자체였다는 점, 이 또한 묵과해선 곤란하다. 북한 인민덜이 먹고 싸는 데 하등 어려움이 없을 여건의 조성, 즉 인권개선은 이 두 가지를 ‘세트’로 다뤄줄 때만이 실질적인 활로를 뚫을 수 있으리란 얘기 되겠다.
체제의 시다바리 신세는 그게 어떤 나라건, 한 번이면 족하다. 북한 비판하는 탈북자덜, 은연중 미국 시다바리여도 무슨 상관이냔 생각인가 보던데, 모른 척 할 셈인가? 이번에 카트리나로 그만 뽀록나버렸다만, 미국, 자기관할루 있는 인민덜의 인권조차 ‘말로만’이지 않던가.
누구는 그러더라. ‘통일’ 내지 평화체제란 특정한 현존체제로의 산술적 통합이 아니라, 기존 권력의 소멸과 새로운 체제형성에 관한 문제라고. 이리 보면 북한인권 논의, 의외로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명제, 한반도를 무대로 구체화하는 데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아닐런지.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