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출판사에 있을 당시, '지식발전소'라는 이름의 총서 첫 권으로
<反자본주의-시장독재와 싸우는 사람들>을 진행하면서 넣었던 총서 발문.
발전소는 지금 비록 가동이 중단된 상태지만,;
발문의 의의만큼은 꼭 유토피아가 아니더라도 여러 방식으로 계속 "구현"돼야 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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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 ‘부의 미래’이자 미래의 새로운 성장동력이라고들 하는 오늘날, 우리는 때아니게도 ‘지식의 죽음’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신학의 성채를 허물었다던 그 지식이, 이제는 끝없는 부와 성장에 관한 교리문답으로 자본의 성채를 다지는 데 골몰하고 있어서만은 아닙니다. 오늘날 지식이란, 또 그것이 좇는 새로움이란, 가공할 지역적-지구적 불평등에 둔감해지려는 데서 연유한 심리적 자기위안이자 지루한 반복의 알리바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지요.
다른 한편, 이런 해악적 상황은 오랫동안 자명하니 전제돼온 지식생산 자체의 ‘위기’와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진-선-미, 또는 자연-사회-인문과학이라는 지식생산의 3분할 구도가 표방하고 실제로 확보해온 ‘깊이’와 ‘전문성’은 그 강도만큼이나, 그같은 지식생산의 사회적 조건을 오롯이 성찰케 하는 ‘시야’와 ‘감각’의 상실을 대가로 한 것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보자면 기존의 지식생산 체제에서는 끝없는 자가복제만이 거듭돼왔을 뿐, ‘생식능력’ 따위란 애당초 기대하기 힘든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분명한 건, 아카데미 전반이 진정 새로운 시대적 징후를 스스로 포착, 문제화하는 데 몹시 버거워하고, 심지어 성가셔하고 있다는 사실이겠지요.
이런 마당에 ‘인문사회과학의 위기’(나 ‘이공계 위기’)라고들 하는 상황을 전적으로 ‘자본의 공세(또는 부재)’ 탓이라고만 해야 할지는 의문입니다. 이래서는 자칫 지식생산 체제에 이미 내재해 있던 3분할 구도의 해악과 불임不姙의 문제를 은폐, 회피하기 십상이니까요. 이 문제를 우회하는 지적 위기 담론은 또다른 심리적 자기위안과 현상유지의 욕망을 ‘내부’로부터 드러낸 것뿐이라는 데 우리는 주목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식생산을 둘러싼 이같은 내-외적 위기를 새삼 들춘다거나 ‘조절’하는 데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위기가 너나 할 것 없이 전전긍긍해야 할 막다른 골목이라기보다는, 반가운 쇄신과 단절의 징후라는 데 주목하려고 합니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건, 조각날 대로 조각나버린 지적 분진粉塵의 훼방을 걷고 현실을 오롯이 이어볼 통합의 혜안이니까요.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푸덕이는 황혼녘의 날갯짓이 아니라, 이를테면 겨자씨앗에서 우주를 발견하고자 진작부터 밤낮없이 웅성여온 ‘존재의 함성’으로서 말입니다.
‘지식발전소’는 각자 선 자리에서 다채로이 이뤄지는 이런 함성을 그러모으고 또 북돋울 무한의 동력원으로서 자리잡고자 합니다. 지식발전소는 ‘깊이’와 ‘시야’를 제로섬 관계로 설정한다거나 후자를 마치 전자의 누적적인 총합으로 간주해온 앎의 방법에서 조용하면서도 결연히 탈피합니다. 하여, 그 둘이 실상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다시 말해 총체적인 앎의 방법이 지닌 두 측면일 뿐임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조각난 지식의 분진을 말끔히 털어내는 거듭남의 ‘시작’으로 나와 세상을 바꿀 지성의 무한에너지, 이제부터 지식발전소가 공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