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오늘, 슬럼과 마주친 지구-<슬럼, 지구를 뒤덮다> 마이크 데이비스

2007년 8월 20일

노동사회교육원 회보 <연대와 소통> 창간호 원고

 

 

오늘, 슬럼과 마주친 지구

 

양솔규(노동사회교육원 회원)

 

 

<슬럼, 지구를 뒤덮다>, 마이크 데이비스, 돌베개, 2007년 7월

 

창원 터널을 빠져나와 남산동으로 향하는 길에 우리를 반기는 것은 높게 치솟은 아파트들이다. 그것도 <통일>이니 <두산>이니 하는 사원기숙사가 아니라, 새로 지어진 상업적인 아파트들이다. 창원 도시가 외곽으로 확장되고 있고 주거공간은 상품이 되었다. 도시는 행복해지는 것일까?

창원을 처음 봤을 때 이 도시는 너무 ‘행복’해 보였다. 길가에 심어진 푸른 잔디와 2층 빨간 벽돌 양옥집들이 평지에 가지런히 정렬한 모습은 공업도시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차라리 미국 영화에 나오는 중산층들의 마을 모습과 흡사했다. 또한, 군데군데 있는 공원들의 잔디와 분수대, 그리고 ‘평지’는 서울이나 부산과는 질적으로 다른 행복을 계획하는 도시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슬럼”이라는 단어가 ‘창원’ 아니,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한국의 도시들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003년 UN 인간정주위원회에 따르면, 한국은 슬럼 인구수로는 세계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눈에 띄지 않는 셋방살이”가 새로운 슬럼을 형성하고 있다. 판잣집이 아니라고 슬럼이 아닌 게 아니다. 홍콩이나 도쿄, 서울과 같은 글로벌 메가도시(Mega City)에도 슬럼은 곳곳에 형성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창비, 1994)로 잘 알려진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 가 쓴 책 <슬럼, 지구를 뒤덮다>(원제: Planet of Slums)가 번역 출간되었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1946년에 태어났다. 정육점 직원, 트럭 운전수(그 유명한 팀스터 노조) 등으로 일했으며, 미국 신좌파 학생 조직인 SDS(민주사회를위한학생연맹) 등에서도 활동했다. 영국의 뉴레프트리뷰(신좌파평론) 편집진으로 일하며, 맑스주의적 환경주의, 도시사회학, 역사학 등을 공부하는 학자이다.

마이크 데이비스가 유명한 이유는, 단지 현장활동가와 연구자의 이력을 거치면서 형성된 이론과 실천의 접합 때문만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대단히 성실하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방대한 각주와 자료 목록은 그의 지적 성실함을 반영해 준다.

 

슬럼(slum)은 간단히 말하면 도시빈민 주택지구를 말한다. 우리로 치면, 달동네, 판자촌이라고 보면 되겠다. 옛날 서울의 상계동, 사당동, 봉천동 등에 거대하게 형성된 동네를 연상하면 된다. 그런데, 슬럼이 어쨌다는 것일까? 이 책의 부제는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이후 슬럼은 세계 도시의 ‘대세’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2007년 혹은 2008년은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보면 획기적인 분수령이 되는 시기이다. 바로, 전 세계 인구 중 농촌 인구보다 도시 인구가 더 많아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도 20세기는 거대한 농촌인구를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나 인도, 중국, 남미, 동남아 등 수많은 ‘남반구’의 농촌은 거대한 대지의 크기만큼이나 압도적인 세계 인구를 ‘논’과 ‘밭’에 ‘저장’하고 있었다. 캘리니코스는 데이비스를 인용하면서, 자본주의 출현 이후 1950년 전까지 진행된 첫 번째의 도시화의 물결은 북반구(서구)에 주로 해당된 반면, 현재의 2차 ‘도시화’는 남반구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20세기 전체에 걸쳐 도시화의 속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시화의 속도가 빨라진 것은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남반구를 장악하고 있던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인민들이 도시로 몰려드는 것을 두려워했고, 온갖 장치를 이용해 도시 진입을 봉쇄했다. 그러나 2차 도시화는 탈식민지 시대, 신자유주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힘들고 고된 농민들이 일자리가 많은 도시로 몰려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도시가 그들의 미래를 보장해준 것일까? 아니다. 마이크 데이비스에 의하면, “‘과잉도시화’의 추동력은 빈곤 재생산이지 일자리 공급이 아니다……도시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힘은…현저히 약화되었지만, 시골에서 사람들을 ‘밀어내는’ 전 지구적 동력들은 도시화를 지속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농촌에서 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도시로 가는 것이다. 도시화는 곧 산업화라는 등식은 ‘2차 도시화’의 물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들이 정착하는 곳은 전 세계 도시의 빈민촌, 즉 ‘슬럼’이다. 슬럼을 부르는 명칭은 나라에 따라, 도시마다 다양하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 인도 뭄바이의 ‘촐’, 터키 이스탄불의 ‘게체콘두’, 미얀마 양곤의 ‘뉴필즈’ 등이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달동네’ 라는 용어가 이에 해당될까? 빈민들이 도시 내에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곳은 더럽고, 불편하고, 토양과 식수는 오염되어 있고, 자연재해에 노출되어 있는 그런 곳밖에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빈민 지역도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하다.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 ‘가난한 자들의 저항의 사령부’가 될 지도 모르는 슬럼은 그들에게 더럽고, 위협적이다. 올림픽이나, 미인대회, 월드컵 등 국제행사를 앞두고 그들은 슬럼을 쓸어버린다. 또는 반란의 씨앗을 없앤다는 이유로, 개발 독점권을 얻기 위한 이유로 쓸어버리기도 한다. 불도저가 밀고나간 그 자리엔 중산층을 위한 주거단지가 세워진다. 한국의 88년 올림픽을 앞둔 철거는 ‘세계 슬럼 퇴거 사건사’에 2위로 기록되어 있다. 퇴거주민 수는 80만 명에 달했다. 베이징은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의 전철을 밟고 있다. 현재 진행형으로 말이다.

 

 

슬럼은 재난과 동거한다. 쓰나미가 몰려왔을 때, 빈민과 중산층은 동일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위험요소의 노출 정도와 건물의 견고함 정도는 계급에 따라 다르다. 지진도 공평하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층진(層震)이라는 신조어도 그래서 생겨났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슬럼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은 ‘화재’이다. 특히 개발업자 등이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방화를 ‘뜨거운 철거’라고 부른다. “들쥐나 고양이를 등유에 흠뻑 적신 후에 불을 붙여 말썽 많은 슬럼가에 풀어놓는” 방식이다. 방화는 개발업자에게 가장 손쉬운 해결방법이다.

 

신자유주의의 대리기구인 IMF와 세계은행이 추진하는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강요된 민영화는 제3세계의 빈민들에게 재앙으로 다가왔다. 교통의 사유화는 교통요금의 폭등을 가져왔고, 빈민들은 그나마 빠듯한 수입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교통요금에 부담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배변권(排便權) 및 물 공급과 관련한 것이다.

북경의 어느 지역의 경우 화장실 하나를 6,000명 이상이 이용하기도 한다. 콩고의 킨샤사는 하수처리 시설이 전혀 없고, 나이지리아 나이로비에는 ‘날아다니는 화장실’이나 ‘스커드 미사일’에 의존하는데 이는 배설물을 담은 비닐봉지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들은 여성들에게는 더욱 위협적인데, 배변을 위해 밤을 기다린 여성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성추행과 강간이다. 도시 배변이라는 ‘사업’을 초국적 자본과 신자유주의 기구들은 ‘성장 산업’으로 주목하고 있다. 가나의 유료 공중화장실은 90년대 후반 민영화되었고,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도시 슬럼에는 그 밖에도 매매혈(賣買血)과 아동 매춘, 아동 강제노동, 장기 판매 등이 비공식적 경제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깨끗한 물은 가장 저렴한 약이자 가장 중요한 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HO에 따르면, 2025년에 500만의 제3세계 아이들이 물을 구하지 못해 질병으로 죽어갈 것으로 예측했다. 이런 점에서 최근 한국의 운동사회 내에서 ‘물’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는 것은 시류에 적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참한 빈곤과 불평등을 가속화한 것은 80-90년대 진행된 국가의 후퇴와 공공부문 지출 축소 및 신자유주의 정책인 것은 명백하다. 농촌은 몰락하고, 실업률은 상승하며, 이에 따라 여성 및 아동들이 비공식 또는 불안정한 노동에 투입되었고, 보건 서비스는 민영화되면서 이용권을 상실했다. 중국의 국영기업이 민영화되면서 생긴 엄청난 수의 면직노동자(laid-off)와 호구에는 잡히지 않는 떠돌아다니는 민공조(民工潮)들의 수가 몇 억이다. 중국과 인도 역시 신자유주의 정책이 휩쓸고 있다. 단기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하는 길은 장기적으로는 계급적 지위를 영속화하는 길이 되었다. 이에 반IMF 폭동 또는 총파업 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베네주엘라 카라카스에서 89년 일어난 폭동, ‘카라카소(Caracazo)’ 동안 최소 400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0년대에는 거대한 제2세계(현실 사회주의 국가들)가 자본주의로 편입됨에 따라 빈곤의 규모도 급증했다. UN에 따르면 1990년대 초 이러한 국가들에서 극빈층 인구는 1,400만 명에서 1억 6,800만 명으로 높아졌다. 푸틴 정부 하 러시아의 옛 아파트단지는 슬럼 상태가 되었고, 이는 “2차 세계대전 레닌그라드가 포위당할 당시의 상황”을 환기시킨다고 한다.

이제 도시는 “성장과 번영의 중심이 된 것이 아니라, 미숙련, 무방비, 저임금의 비공식 서비스업 및 무역에 종사하는 잉여 인간의 처리장”이 되었다. 곧 수동적 프롤레타리아화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공식 부문에서 ‘활동’ 실업 상태로 존재하는 것뿐이다. ‘활동’ 실업이란 불완전고용과 위장 실업을 말한다. 그러나 증가하는 슬럼가에서 생계를 위해 온 가족이 나서면서, “‘비공식 부문’은 성장하지만 비공식 부문 내에서의 소득은 감소”하고 만다.

 

도시 슬럼은 이제 펜타곤과 전쟁 연구소 등 세계적인 공안기관들의 타깃이 되었다. 이들은 MOUT(도시화 지형에서의 군사작전) 개념을 정립하면서, 신세계질서의 가장 위협적인 곳으로 거대슬럼을 꼽는다. 도시 빈민과의 저강도 세계전쟁을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자(서구 도시)는 ‘방어’해야 할 ‘조국’의 도시들이고, 후자(제3세계 슬럼)는 ‘자유’ 세계 전체의 건강과 번영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악당들’을 지원하는 소굴”이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이러한 슬럼 분석은 다소 패배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배변권조차 보장받기 위해 목숨을 감내해야 하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도대체 저항은 어떻게 시작될 수 있고, 누가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지금 준비중인 이 책의 속편에서 슬럼 기반 투쟁의 역사와 미래를 연구할 것이라고 한다. 혹 여기에는 88년 상계동과 사당동 투쟁이 다뤄질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저자는 “인간 연대의 미래는 도시 빈민이 전지구적 자본주의 내에서의 최악의 주변성을 전투적으로 거부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물론 도시 빈민과 슬럼의 주민, 비정규노동자 및 실업자 등이 반드시 겹치는 동일한 집단은 아닐 테지만 상당부분 겹치거나, 겹쳐지는 ‘추세’라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세계 슬럼에는 획일적 주체나 일방적 경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각양각색의 무수한 저항운동이 존재”한다. 이미 지배자들은(대표적으로 랜드 연구소) 이미 이를 간파하면서 세계 빈곤의 도시화가 ‘반란의 도시화’의 원인이라고 단정한다. ‘잉여인간’, ‘활동 실업’, ‘퇴축’과 같은 저자의 매력적인 신개념 속에서 저항의 실마리보다는 비참한 파국적 결과가 더 많이 느껴지지만 말이다.

 

20세기는 맑스주의의 예언과는 달리 도시혁명이 아닌, 수많은 농촌의 인민들을 근거로 한 민족해방투쟁과 사회주의를 가져왔지만(마치 중국혁명기 구추백, 이립삼의 노선처럼), 21세기의 판도는 이와는 다를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계급적 구성도, 지정학적 구성도 달라졌기 때문이며, 마이크 데이비스에 의하면 시장 안의 진정한 유목민(비공식 경제의 빈곤한 ‘수동적 프롤레타리아트’)이 급속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제 어쩌면 지배층들이 예상하는 데로 ‘좌절과 분노’에 휩싸인 ‘비대칭 전투’가 예상 전투 지역인 카불, 라고스, 킨샤사, 마닐라, 북경, 뭄바이, 리우데자네이루, 모스크바, 방콕, 자카르타 등에서 벌어질 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전투는 시작되었을 지도!

아직 저자가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은 슬럼이라는 지정학 속에서의 전투상과 전력 분석은 저자의 차기작에 맡겨 두고, 일단, 우리는 우리가 전지구적 지정학 속에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일단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저자의 말대로 “슬럼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반빈곤 투쟁과 반신자유주의 투쟁, 반자본주의 투쟁이 신자유주의 빈곤화라는 직조 속에서 교차하고 있다. 따라서, 투쟁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으며, 또한 투쟁의 성격이 그야말로 국제주의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이 책을 통해 느껴보는 것도 굉장한 경험이 될 것이다. 마치 지구를 한바퀴 돌면서 ‘슬럼 관광’을 하게 만드는 이 책은 동시에 미래의 국제주의적 투쟁을 예행연습하는 효과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