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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2006.2월 &quot;68운동&quot;

 

출처: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6년 2월호

1) 이희영, 「한국 80년대 세대의 초상화: 독일 68세대와의 비교」, 이해영 엮음, 󰡔1980년대 혁명의 시대󰡕, 새로운세상, 1999년

 

[68운동]

양솔규(redstar@jinbo.net)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그의 유명한 저서 󰡔반체제운동󰡕 에서 “이제껏 세계혁명은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1848년에, 그리고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 둘 다 역사적인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둘 다 세계를 바꿔 놓았다”고 쓰고 있다. 1968년 혁명에 대한 웬만한 책들의 서평에는 거의 월러스틴의 언급을 빠뜨리지 않고 쓰고 있다. 본 서평도 어쩔 수 없이 월러스틴의 언급을 인용하고 말았는데 거기에는 한국 사회의 지적 변화를 언급해야 할 것 같아서이다. 월러스틴의 평 중 가장 중요한 언급은 1968년 혁명이 ‘세계’혁명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두 혁명‘만’이 세계를 ‘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두 혁명 외의 다른 혁명들은 세계를 바꿔놓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잉글리트 길혀-홀타이,『68운동』, 2006.1, 들녘코키토, 12,000원

사실 1980년대 운동권에게 있어서는 1968년 혁명은 거의 금기시되거나 애초 관심 밖이었던 것 같다. 내 자신이 그 세대가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으나 그 시대는 소위 ‘혁명의 시대’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1968년 혁명과는 달리 80년대 꿈꾸던 혁명은 레닌의 혁명, 전위정당의 혁명을 뜻했다. 또는 대중조직의 성장을 담보해야만 하는 시기였다. 한마디로 ‘정치적으로 바빴고’ 바빴기에 빠른 길을 원했다. 68혁명과 같은 패배한 길보다는 ‘승리’가 필요했고, 그 염원은 서유럽보다는 러시아로 시선을 향하게 했다.

 

60, 70년대 젊은이들에게는 정확히 1968년의 영향이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유추해보자면 박정희의 쿠데타와 유신의 치하에 있었고, 좌파는 한국전쟁으로 소멸되었으며, 대학가는 여전히 80년대에 비해 느슨했다고나 할까? 대학가 밖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었고, 공화국은 도로 닦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68세대의 문화적 유산이 흘러들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전위예술의 소문이, 다른 한편으로는 비틀즈와 밥 딜런, 존 바에즈의 노랫소리가 말이다. 그렇다고 현해탄 건너편 일본의 좌파들이 나리타 공항에 상륙한 1968년의 세계적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있을 때 한국의 60, 70년대 젊은이들은 라디오나 듣거나 대학로 학림다방에 죽때리며 띵가띵가나 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섭섭해 할 지도 모르겠다. 대신 한국의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쟁터였다. 베트남 전쟁에 총알받이와 살육자로 떠나야 했던 청년실업자들, 청년 노동자들이 있었다. 김수영은 이렇게 썼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이 혁명은 4.19혁명을 말한다. 혁명이긴 혁명이네.

80년대 젊은이들에게 그 시대는 ‘정치적으로 바쁘고’, ‘정신적으로 바쁜’ 시절이었겠지만, 60, 70년대 젊은이들에게 그 시대는 ‘경제적으로 바쁘고’, ‘육체적으로 고된’ 시절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40년의 세월이 다 되어가는 한국의 ‘지나가시는’ 세대들이나 68을 만든 외국의 ‘지나가시는’ 세대들의 젊은 시절을 논하는 것은 어쩌면 쓸데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클린턴도 힐러리도 블레어도 그 세대니.


80년대 프랑스의 5월운동에 관한 책이 번역되어 나왔으나(일월서각?) 그다지 관심을 끌었던 것 같지는 않다. 1979년 한나 아렌트의 「공화국의 위기」에 68학생운동과 관련한 표지 사진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나 어렸을 적 엄마 책꽂이에서 본 기억이니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회학에서는 신좌파의 스승들(밀즈,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관심은 80년대 이래 사라졌고 레닌이 사라진 후 ‘신사회운동’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철학도 마찬가지였고, 정치학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과 알게 모르게 연결된 1968년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는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나타났다. 1968년의 주역이었던 타리크 알리와 죠지 카치아피카스 등의 책이 출간되었다.

오랜 잠복기간을 지나 1968년에 대해 이제는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번역되기 시작한 1968년 혁명에 대한 책들은 이미 부담스러워지고 있다. 인터넷 블로그와 까페에는 1968년에 대한 기사, 논문, 책줄거리, 서평들이 꽉 차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심사는 저절로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학생운동의 쇠퇴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분명해지던 시기인 1990년대 초반, 한국 학생운동의 한 정파는 1968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이무렵, 이들의 정치학교 자료집 “조반유리(造反有理))”에는 1968년에 대한 자료들과 해설들이 알차게 들어있다. 좌파의 보다 정통적인(?) 분파들은 이 정파를 심각한 어조로 훈계 내지는 조롱, 경계하였으나 대부분의 훈장님들은 이제는 자취를 감추었다. 예전 소련에서 번역된 「철학사전」(동녘)에는 1968년 사상가들과 이 운동에 대해 과연 훈장님처럼 비난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또 다른 한국 학생운동의 정파는 독일의 ‘자유대학’ 개념을 본따 ‘제3대학’ 등을 열기도 했다.

2000년 하고도 벌써 6년이 지난 지금 세대들에게 이 사건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사실은 필자의 세대에게도 뭔가 이상하게 받아들여졌듯이 지금도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뭔가 있는 듯 하나 뭔지는 모르겠는. 어쨌든 바꾼 혁명!

1월 25일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 「68운동」은 이전의 1968년에 대한 책들에 비하면 매우 훌륭한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매우 짧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다. 이전의 책이 베트남 전쟁 등의 사건을 잘 알고 있거나, 마르쿠제, 아도르노, 밀즈 등의 사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재밌게 읽힐 수 있지만 이 책은 그렇지는 않다. 짧고 어렵지 않은 것. 그건 활동가들 취향이기도 하고, 직장인들 취향이기도 하다.

이 책을 쓴 잉그리트 길혀-홀타이는 빌레펠트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다. 독일 역사학계에서 1968년 혁명에 대한 연구를 선도적으로 하고 있는 교수라고 한다. 이 책에는 1968년의 혁명의 사상, 혁명 전야의 스케치, 혁명 와중의 사건들, 문화, 동원 과정, 그리고 운동의 붕괴와 그 영향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흔히 1968년의 세계적 사건을 각 나라별 차이점을 부각시키기도 하지만 이 책은 독일, 서유럽, 미국의 혁명과정의 공통점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1968년 혁명은 무엇보다 맑스주의 이론을 새롭게 해석했다. 교조적인 정통 맑스-레닌주의에 반기를 들었고 이러한 이론의 새로운 해석은 이후 맑스주의와 전세계 좌파의 사상적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이들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었지만 ‘구좌파’에게도 반기를 들었다. 이들이 보기에 몇 가지의 사건들 ‘프라하의 봄’, ‘헝가리 침공’은 소련 및 구좌파의 숨길 수 없는 치부로 보였으며 사회주의의 새로운 차원과 경로를 인식해야만 하는 증거로 보였다.

민주노동당이 내세우는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애매모호하지만 의미 있어 보이는 그 용어는 바로 사민주의와 현실사회주의를 동시에 넘어서고자 했던 1968년의 깨달음이라는 점에서 1968년은 멀지만 가깝기도 한 과정이기도 하다.

네이버는 물론이고, ‘도전! 골든벨’에도 심심찮게 나오는 1968년이라는 주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다못해 조카나 후배가 물어볼 때 어슴푸레 대답이라도 해줘야 할 테니까. 1980년대를 살아온 분들에게는 이 책과 함께 각주의 논문이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1)

1960년대 세대 김근태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혹 ‘미워도 다시 한번’ 김대중이 아니라, ‘미워도 다시 한번 - 비판적 지지’가 또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오빠가 돌아왔다! 하면서! 1960년대, 당시의 날카로운 시대정신과 생동감만 가져오자! 68에서 후퇴하지도 말고, 스며들고 조우하며 전복하기로 하자! 어떻게? 책을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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