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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흔든 ‘학생인권’ 함성 | ||||||
[인권오름]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① | ||||||
새로운 청소년인권운동의 발원지, 최우주씨 사건 | ||||||
2006/6/2 | ||||||
인권운동사랑방 | ||||||
청소년인권운동사 연구를 시작하며 체벌, 두발규제, 강제자율학습, 입시경쟁교육 등 각박한 현실 속에서 한국의 청소년들은 하고픈 말도 많을 터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간주되어 사회적 의사결정의 과정에 자신의 목소리를 온전히 반영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21세기 들어 청소년들의 다양한 ‘반항’이 사회의 주목을 받았던 것도 그러한 기존 시각에 충격을 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자신의 권리를 얻어내기 위해 싸워온 역사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 청소년인권운동의 역사를 발굴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청소년인권운동사 연구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들을 역사적인 맥락 속에 배치하고 알리기로 한다. 이미 잘 알려진 사건의 경우에도 체계적인 해석을 덧붙여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자 한다. 이는 현재 청소년인권운동의 문제점 중 하나로 지적되는 운동의 단절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이다. 앞으로 청소년인권운동에 발을 들이려는 사람, 또는 이미 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한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 첫 번째로 우리는 1995년 최우주 씨 헌법소원 시도 사건을 다루고자 한다. 이 사건이야말로 199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청소년인권운동의 출발점이자 발원지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글, 한국사회를 흔들다 “저의 바램은 아주 상식적인 것입니다. 방과후의 시간을, 방학 동안의 시간을 당연히 학생들 자신의 적성에 따라 활용할 수 있도록 학생 개개인에게 돌려달라는 것입니다.”
1995년 7월 22일 하이텔 게시판에 올라온 이 한 편의 글은 이후 청소년 인권운동의 획을 긋는 사건으로 발전했다. 당시 강원도 춘천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최우주 씨는 학교의 강제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시행과 관련해 청와대, 교육부, 강원도교육청 등에 민원을 제출하며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본래 헌법소원을 내려다 절차상의 문제로 민원을 제기하게 된 최우주 씨는 ‘학교가 학생의 기본권을 짓밟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최 씨의 민원에 대해 교육청은 “보충, 자율학습의 강제성은 사실이 아니며 학생들의 기본권을 침해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면서 보충, 자율학습은 “희망학생, 희망교과에 한해 실시하게 되어 있다”는 공허한 답변만 내놓았다.
청소년인권운동사의 측면에서 최우주 씨 사건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의 참교육 운동과 함께 타오르다 쇠퇴해가던 중고등학생 운동을 ‘인권’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일으켰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최우주 씨의 헌법소원 사건을 계기로 하이텔과 나우누리 등에 <학생복지회>가 생겨나면서 인권의 측면에서 청소년문제·교육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형태의 운동이 성장해갔다. “학생인권”이 하나의 독립된 개념으로 널리 퍼져나간 것 또한 학생복지회 결성 이후부터였다. 이후의 문제제기나 운동에서 학생 인권이 전면에 나서게 된 이유도 최우주 씨의 헌법소원 시도가 끼친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전까지의 청소년운동은 비록 인권이슈를 다루고 있기는 했지만, 인권 개념을 전면으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우주 씨 사건 이후 인권개념을 중심에 둔 새로운 의미의 ‘청소년 인권운동’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다. |
민주화의 불꽃, 학교를 삼키다 | |||||||
[인권오름] 기획-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② | |||||||
87년 항쟁과 고등학생운동, 청소년인권운동의 뿌리 | |||||||
2006/6/2 | |||||||
인권운동사랑방 | |||||||
1987년 12월, 150여명의 고등학생이 명동성당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은 “노태우를 당선시킨 기성세대 각성하라!”, “군부독재 타도하여 민주교육 쟁취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19일부터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때는 바야흐로 13대 대통령선거에서 군부독재 정권과 한 몸통이나 다름없었던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12월 16일)된 직후. 당시 농성에 참여했던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회’(서고련) 학생들은 13대 대통령선거는 부정선거인 만큼, 비록 민정당이 승리했더라도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겨울 칼바람 속에서도 87년 민주항쟁의 상징이었던 명동성당으로 찾아들었다.
85년 3월 의정부시 복지중고에서는 잡부금 징수 금지, 학교장 퇴진 등을 요구하며 수업거부와 인근 야산에서의 농성이 시작됐고, 같은 해 목포여상에서는 여고생들이 학교측의 교사 탄압에 항거해 수업 거부, 등교 거부, 시험거부 등으로 맞섰다. 85년 ‘민중교육지’에 대한 정권의 대대적 탄압 이후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타오른 교육민주화 운동은 고등학생운동의 성장에도 불을 댕겼다. 이듬해인 86년 5월에는 원주고를 시작으로 원주시 몇 개 고등학교에서 자율학습을 거부하고 학생들이 집단 귀가하는 일이 잇따라 일어났고, 7월 서울의 중대부고에서는 2학년 학생 5백여 명이 두발자유화, 자율학습 폐지, 강제 보충수업 금지 등의 요구를 내걸고 운동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비록 이들의 투쟁이 연속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했지만, 엄혹한 군사정권 하에서도 민주화와 인간다움에 대한 열망은 그렇게 전국 곳곳에서 학교의 빙벽을 허물어뜨리기 시작했다.
학생회 직선제 요구는 고등학교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88년 서울 석관중학교에서는 ‘민주 돌곶이회’라는 소모임이 결성되어 간선제 학생회장 당선을 한동안 저지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또 교외에서 진행된 4.19 기념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모임을 이끌었던 권혜진 씨(88년 당시 중3)에 따르면 처음에 8명으로 시작했던 모임이 2학기에 들어서면서 60명으로까지 확대됐다고 한다. 혜진 씨는 “87년 6월 항쟁에서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자는 사회적 외침이 중학생이었던 당시에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던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시기였다.”라고 회상한다. 그는 “옆 학교인 석관고등학교에서 학생회장 직선제운동을 했기 때문에 ‘종이비행기 날리기’, ‘아침이슬 부르기’ 같은 시위도 볼 수 있었고, ‘우리도 한번 해보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고, 후배들도 만나 직선제하자고 설득하고 다녔다.”라고 설명한다. |
들불처럼 번진 청소년들의 참교육 운동 | |||||||||||||||
[인권오름] 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③ | |||||||||||||||
“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 부수고” | |||||||||||||||
2006/6/29 | |||||||||||||||
인권운동사랑방 | |||||||||||||||
꺼지지 않은 불씨 1987년 6월 항쟁의 불꽃은 한 번 타오르고 끝날 것이 아니었다. ‘고등학생운동’(*)도 그 영향을 받은 곳 중 하나였다. 청소년들은 1987년을 계기로 더욱 본격적인 자주적 학생회 운동, 교육 정상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고운의 불길은 거기에서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학생회 직선제 운동을 비롯한 1987년 직후의 운동은, 오히려 1989년부터 시작된 ‘참교육 운동’의 예고편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1980년대 학생들의 생활은 너무나 비참했다. 전두환 정권은 본고사 폐지와 내신성적 반영, 대학입학인원 확대, 전일수업제 대학 운영, 과외금지 등의 내용을 담은 교육정책을 발표했다. 내신성적 반영은 고등학생들을 더욱 성적경쟁 속으로 내몰리게 만들었다. 과외금지 이후 과외가 음성화되자 정부는 학교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전면 허용하였고, 그 결과 학생들은 강제적인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그 당시의 인사는 그런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실업계 고등학생들도 전두환 정권의 정책에 따라 뒷전으로 내몰리게 되면서 열악한 상황에 처했다. 입시경쟁 강화와 학교에서 밤 12시가 넘어서야 돌아오는 일상의 반복, 억압적인 학교 상황, 열악한 교육 등이 청소년들에게 미친 영향은, 1980년대의 자살학생 수 증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자살한 청소년들의 유서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자살했던 학생들이 남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써있었다. “친구들은 감정도 없는 사람 같고 다 똑같아 보입니다. 전혀 개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 친구들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어른들이 밉습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입니까? 저희는 쓸모없는 2차 방정식 값을 구하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을 잃었습니다. 공부 못하는 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죽어야 합니까?” 특히 1986년 서울사대부속여중 3학년 학생이 남긴 유서에 쓰인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구절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켜 같은 제목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정부는 전교조에 대한 대대적 탄압에 나서 전교조에 가입한 교사에 대한 해임.파면.면직과 함께 사법처리를 강행했으며 그 결과 1989년 9월까지 1700명이 넘는 교사가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여 전교조 교사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불만이 누적되어 있던 차에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던 ‘좋은 선생님들’에게 핍박이 가해지자 인간적인 분노까지 더해져 학생들의 운동은 대중적으로 번져갔다. 운동 속에서 학생들이 내걸었던 “선생님을 지키자!”라는 구호는 그런 분노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모두 담겨 있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히 전교조 교사를 지지하고 지킨다는 것만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 참교육의 기치에 대한 동의였고, 강제적 보충수업.자율학습, 입시경쟁 등으로 얼룩진 교육에 대한 반대였다.
특히 광고협은 최초로 결성된 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로서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광고협은 20여개 학교에서 중고생 2만여 명이 참여한 연합집회를 조직하고, 같은 날 5천여 명이 참가한 전남대 시위 등을 실행했다. 이후에도 광고협은 광주 시내 전학교 학생들의 통일된 행동으로 해직교사들의 출근 투쟁을 지원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펼쳤다. 자주적 학생회 투쟁의 결실로 생긴 학생회연합회가 발전하여 이루어진 부고협도 탄압을 뚫고 부산대에서 발대식을 치르고 전교조를 지지하는 투쟁에 나섰다. 마창고협을 비롯하여 다른 지역의 연합체들도 정부와 학교의 탄압 속에 힘겹게 참교육 운동을 해나갔다.
이후 학생들은 학교나 정부와 싸우는 과정에서 목숨을 버리기도 했다. 1991년 전남 보성고의 김철수 씨는 노태우 퇴진과 참교육 실현을 외치며 분신했다. 이런 식으로 김철수 씨를 비롯하여 심광보 씨(1990년 분신), 김수경 씨(1990년 투신) 등이 전교조와 학생들에게 가해진 탄압에 죽음으로 항거했다. 교사 김융희 씨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당시 투쟁에서 목숨을 던진 학생들”이라며, 학생들이 죽은 소식을 접했을 때 정말 분노가 들끓었다고 회상했다.
한편으로 참교육 운동 때 보여준 학생들의 동원력과 조직력은 그동안 축적되어 왔던 운동의 조직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학생들의 저항의 구심점은 1987년 6월 항쟁의 흐름 속에 조직되어 온 소모임, 동아리, 학생회 등이었다. 학교 안에 존재하던 동아리나 소모임 등에서 학생들은 사회비판적 의식을 키워가고 있었고, 또 그런 조직들의 자주적 학생회 투쟁으로 세워진 직선제 학생회에 적극적이고 의식 있는 학생들이 진출하면서 학생회 조직은 운동에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흥사단 아카데미나 KSCM(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총연맹), YMCA 등의 공개단체들도 조직적인 운동에 한몫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청소년들의 참교육 운동은 전교조에 완전히 종속된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전교조 사수와 학생자치권 운동을 동시에 전개하기도 했으며 투쟁 과정에서 자율학습 폐지 등 학생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하기도 했다. 비록 “참교육”에 대한 공감이 학생들의 대중적 투쟁을 끌어내긴 했지만 당시 학생들의 운동을 주도했던 청소년들은 학생들의 요구를 전교조 교사들을 통해 대변되기만을 바라진 않았던 것이다.
인권오름 제10호 유윤종(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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