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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의료원노조, 조직형태변경 가결

동아대의료원노조, 조직형태변경 가결

조합원 찬반투표 통해 27일 보건의료노조에서 공공연맹으로
정연우 기자 adsjyw@jinbo.net
 동아대의료원노조

보건의료노조동아대의료원지부가 27일 압도적인 찬성률을 얻어 동아대의료원노조로 조직형태변경을 가결했다.

 

동아대의료원노조는 그동안 25일부터 3일간 조직형태변경 조합원 찬반투표를 실시했으며, 이날 조합원 93.9%의 높은 찬성률을 얻는데 성공했다. 조합원 찬반투표에는 총 조합원 879명 중 703명(82.6%)이 투표에 참여했으며, 이 중 660명(93.9%)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에따라 동아대의료원노조는 민주노총공공연맹 소속으로 조직변경했으며, 오는 9월 1일 전국병원노조협의회의 공공보건산업노동조합(가칭) 창립대회와 동시에 공공보건산업노조에 가입할 예정이다.

 

이미 동아대의료원노조는 지난 6월 8일 열린 제5차 임시대위원대회를 통해 참석 대의원 만장일치로 '조직형태변경(보건의료노조 탈퇴)'를 결의한 바 있다.

 

간부명칭도 지부장에서 위원장으로 부지부장에서 부위원장 등으로 각각 변경되며 남은 임기는 승계된다.

 

앞서 전혜정 동아대의료원노조 지도위원은 지난 25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상황에서는 우리들도 미래에 다가올 구조조정에 대응할 수 없다”며 “보건노조를 탈퇴하고 지역 노동자들과 함께 현장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함께 투쟁하기 위해 찬반투표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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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일 공공보건산업노조(가칭) 창립발기인대회

전국병원노조협의회, 산별노조 전환 가결
 
9월1일 공공보건산업노조(가칭) 창립발기인대회
 
전국병원노조협의회가 압도적인 찬성률로 (가칭)공공보건산업노조로의 전환을 결의했다. 지난 18일부터 나흘 동안 8개 병원에서 진행된 조직형태 변경 투표에는 82.1%(평균)의 조합원이 참여해 85.5%의 찬성률을 기록했다. 지난 6월1일 제주지역 4개 병원노조가 이미 산별전환 투표를 마친 것을 감안하면, 병노협 소속 6,000여명 조합원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산별노조 추진에 합의한 것이다.

오는 9월1일 공공보건산업노조(가칭)가 창립발기인 대회를 열면 병·의원 등 보건산업에는 보건의료노조와 더불어 두개의 산별노조가 활약하는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특히 보건산업노조의 경우 규약에 조합원의 임원 소환제, 소수노조 할당제 도입 등을 규약에 못박을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사업장 벽 허물고 지역중심 산별로


병노협이 추진하겠다고 밝힌 산별의 모습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건강한 보건 산별”이다. 지역 중심의 산별노조를 건설하겠다는 것인데 사실 이런 조직형태는 노동계에서도 아직 낯설다. 지난 6월 산별전환을 결의한 병노협 소속 제주지역 병원노조에서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

제주지역 병원노조는 서귀포 병원 등 4개. 이들은 조직형태 변경을 통해 제주지역의료노조라는 하나의 노조로 뭉쳤다. 지난 19일 제주지역의료노조라는 이름으로 창립대의원대회를 열었다.
 
보건산업노조 역시 빠른 시일 안에 지역지부로 전환하는 것으로 목표로 하고 있다.

병노협이 “그간 보건의료노조의 경험을 반성적으로 평가하면서 기업별 체계가 유지되는 반쪽짜리 산업노조가 아닌 기업을 넘어 지역을 골간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와 미조직된 노동자의 조직화에 방점을 둔 강한 산업노조”라고 자신감을 보인 것은 이런 성과를 두고 하는 말이다.

소수노조 할당제, 소환제 등 제도 도입

조직형태가 선언한 것처럼 병노협은 “보건의료노조의 한계극복”을 얘기하고 있다. 이는 지난해 4월 보건의료노조의 산별협약 10장2조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탈퇴한 뒤 ‘대병원 이기주의’, ‘기업별 노조로 회귀’ 등 왜곡된 시선을 실천으로 바로잡겠다는 자존심도 한몫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노력이 곳곳에 배어 있다.

실제로 공공보건산업노조(가칭)의 규약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적극적으로 조직하는 동시에 노조의 관료화를 막고 소수의견을 보호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항을 명시한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대의원에 소수노조와 여성 몫을 할당하는 것과 대의원과 조합간부에 대한 조합원 소환제 등이다. 아울러 자주성과 민주성, 현장성을 노조활동의 기본 운영원칙으로 세웠다. 현장성을 강화하기 위해 현장위원을 선임하는 방안도 고려되고 있다.

병노협은 “이번 산별노조 전환을 위한 조직형태 변경투표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첫걸음”이라며 “앞으로 기업과 업종을 넘어 모든 노동자들이 단결할 수 있는 더 큰 노조로 나가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인터뷰> 현정희 병노협 집행위원장
"기업 벽 허물고 지역 중심으로"
전국병원노조협의회가 산별전환에 성공한 것은 “과거에 대한 반성”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숨은 노력이 뒷받침해준 덕이다. 목이 쉴 정도로 전국을 뛰어다니며 토론도 벌이고 수십차례 간담회도 열었다고 한다. 22일 현정희 병노협 집행위원장을 만나 그간의 과정과 앞으로 추진될 산별의 모습을 들어봤다.


- 병노협이 추진하는 산별 조직은 어떤 형태인가.
“(가칭 공공보건산업노조는) 기업단위에 묶이는 게 아니라 지역중심성을 강화할 것이다. 우선 기업단위를 해소하고 지역지부에서 조직과 교섭, 투쟁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기업별 단위가 해소된 이후에는 현장위원을 둬 간부와 대의원 역할을 함께 하도록 할 계획이다. 현장위원은 단위사업장을 자주적이고 민주적으로 만드는 중추 역할을 맡을 것이다. 현장이 살아야 기존 조합주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비정규직 문제를 산별 건설을 통해 안고 가겠다고 밝혔는데.
“중소 영세 병의원 비정규직을 조직하는 데 힘을 쏟을 계획이다. 현실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애초에 기업별 노조에서는 조직대상에 포함시킬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실제로 중소병원의 경우 노조가 만들어지면 그 족족 깨져나갔다. 대형 병·의원과 달리 조합원이 적어 병원측의 탄압에 쉽게 무너지고 또 이직률도 높아 조직하기 쉽지 않다.
10년전에 (보건산업 노동자가) 40만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새로운 직종이 생기고 있어서 60~70만에 이를 것이다. 그런데 조직노동자는 4만명에 불과하다.  결국 90% 이상의 노동자들이 미조직 상태이자 동시에 가장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고 있다. 새로 만들어지는 보건산업노조는 초점을 중소병의원의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둘 것이다. 건강한 노동운동의 흐름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투표결과를 보며 확신했다. 자신감도 얻었다.”


- 보건의료노조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4월 서울대병원을 비롯해 여러 병원이 보건의료노조를 탈퇴했는데 사실은 산별노조에 대해 대단히 실망했다. 노동자 간 차별이 단체협약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노조를 제명했다. 안팎에서 기업별노조 회귀네, 대병원 이기주의네 하며 이상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런 왜곡과 편견을 실천으로 보여주겠다고 생각했다. 겸허하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반성했다. 어쨌든 소중한 경험으로 작용했다. 탈퇴 병원들이 1년만에 건강한 산별을 세우고 빠른 시일 안에 출발할 수 있었던 요인이다.”


- 노동조합 관료화를 지적했는데, 어떻게 바꿀 생각인가.
“산별로 가겠다고 선언하면서 크게 고민한 것 중 하나가 관료화다. 100%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운동 기풍이 필요하다. 제도로만 혹은 기풍만으로는 바꿀 수 없고, 둘이 함께 가야 한다. 지도부가 관료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규약에 소환제를 도입할 생각이다. 일정수 조합원, 예를 들어 조합원의 1/4이상이 소환발의 하거나 총회를 소집하면 반드시 응하도록 하는 조항이다. 소환대상은 지역지부 간부일 수도 있고 대의원일 수도 있다.
또 소수의견을 어떻게 반영할 수 있을까도 고민했다. 큰 병원과 중소병의원의 대의원 수는 차이가 있다. 이는 큰 병원 위주의 의사결정구조로 나타났다. 이는 소수노조 할당제를 통해 해결할 생각이다. 대의원의 30%를 소수노조에 할당하는 것이다. 아울러 여성할당제도 도입할 것으로 보인다.”


- 이런 제도가 오히려 노조를 분란으로 몰아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문제가 나타날 때마다 방법을 찾을 것이다. 조합원들이 그렇게 강정적이거나 편파적이지 않다. 조합원 대중은 건강하다. 또 한두명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일정수 이상 조합원이 같이 해야 하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는 없을 것이다.
사실은 문제제기 과정에서 해결해야 한다. 소환까지 갈 정도면 이미 그 노동조합은 위기를 맞은 것이다. 위기에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제도다. 민주적 운영과 해결이 우선돼야 한다.”


- 현장을 순회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큰 병원들이 (불리한 내용이 많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했다. 지난해 10월부터 투표 때까지 6개월 이상 간담회를 가졌다. 대병원 이기주의나 기업 내 복지 문제에만 연연했다면 이런 투표결과는 안 나왔을 것이다. 전체 노동운동이 가야 할 길을 조합원들이 알고 있었던 셈이다. 기업단위 중심을 지역 중심으로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를 지도부가 얘기했고 조합원이 선택했다. 현장 간부들이 열심히 했다.”


- 앞으로 과제는.
“교섭도 논란이 될 것이다. 산별교섭이라고 중앙에서만 할 수 있다고 규정하면 안 된다. 불만과 요구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교섭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본다. 중앙은 중앙대로, 지역지부는 지역대로, 단위사업장은 단위사업장대로 교섭이 필요하면 그때그때 할 일이다.
환자들 문제도 우리의 관심사다. 병원노동자뿐 아니라 환자들도 같은 입장에서 공감할 수 있는 투쟁을 할 것이다. 현재 조합원들이 의료현실을 조사하고 있다. 진료실에 환자를 2~3명씩 대기시켜 놓는 것은 대표적인 문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환자들의 사생활과 진료권이 침해되고 동시에 노동강도도 급속하게 늘어나기 때문이다.
9월1일 산업노조 창립발기인 대회와 함께 병노협은 해소된다. 건강한 산업노조로 가기 위한 과도기적 조직이었다. 이제 소속노조 4곳이 남아 있는데 무리없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한계희 기자  gh1216@labortoday.co.kr
     
2006-07-24 오후 8:05:34  입력 ⓒ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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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의제 노동자운동, 학계로부터 듣는다② - 이상호 연구위원

2006.07.10 14:16
정치의식의 기본적 고양이 필요하다
보편의제 노동자운동, 학계로부터 듣는다② - 이상호 연구위원
강서희 기자 메일보내기
 

<프로메테우스>는 지난달 17일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분석, 시민사회적 의제와 노동자운동의 관계, 연대공동체로서 노동자운동의 방향, 보편의제 노동자운동에 대한 내용으로 제1회 프로메테우스 포럼을 개최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전국노동자회와 공동기획으로 보편의제 노동자운동에 대한 학계 전문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는 6개의 공통질문과 추가질문으로 구성됐으며, 임운택 교수(계명대 사회학과), 이상호 상임연구위원(진보정치연구소), 김유선 소장(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해영 교수(한신대 국제관계학부), 남구현 교수(한신대 사회복지학과)가 참여했다. - 편집자주 -

<공통질문1>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에 대한 진단은 분석 지점이나 결과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현재 민주노조운동의 상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민주노조운동이 위기상황 속에 지속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90년대 위기 논쟁과 달리 2004년 말부터 제기된 내용은 내부적인 요인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조직노동자의 의식이 아직 기업의 벽을 넘지 못하고, 노동자 내부의 격차와 분화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또 현장투쟁이나 공동투쟁이 실질적인 파급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나 언론의 공작도 존재하지만 대기업 조직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불신은 심각한 상황이다.

민주노조운동이 가지고 있는 구조환경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에서도 이해해야 하겠지만, 이는 너무 오래되어온 문제이다. 신자유주의시대 노동유연화와 구조조정의 압력이 노동운동 자체의 발전에 심각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겠지만, 노동운동 스스로의 주체적인 노력과 실천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위기를 돌파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이 위기 극복을 위해 일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공통질문2> 그렇다면 민주노조운동 위기의 극복 방향은 어떠해야 하나.

△ 이상호 진보정치연구소 상임연구위원
ⓒ 프로메테우스 강서희
극복방안은 세 가지로 나눠 접근할 수 있다.
일단 모든 조직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오래된 조직일수록 관성화되고 관행에 물들어 가는 게 있다. 따라서 내부민주주의를 재구축하고 조직운영에 대한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여기에는 대의원대회로 대표되고 있는 대의기구에서 실질적인 소수자들의 권한 의사 의결권을 보장하는 방안들이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첨예한 관심사항으로 떠오르고 있는 산별전환이다. 기업별 노조체계의 핵심은 종업원 의식을 재생산시키는 것이다. 노동자의식을 대체하고 상쇄시켜는 종업원 의식을 가진 기업별 노조를 넘어서 산별 전환의 조직화 과제가 중요하다. 그래서 산별전환 투표가 가능한 성사되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본격적으로 산업별 노조가 어떤 내용과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논의가 지체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세 번째는 좀 고민이 되는 지점인데, 산업, 사회, 지역의제에 대한 노동조합의 독자적인 전략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에 있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운동이 사회나 산업, 지역에 대한 개입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기업별 노조체제에서 이미 굳어져버린 종업원 의식에서 지역사회나 정치적 주체, 즉 대다수의 주체로서의 의식전환이 없었고, 현장의제가 아닌 것에 대해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민주노조운동이 독자적인 산업·지역·사회 의제를 풀기 위한 교육과 논의가 중요하다. 정치의식의 기본적인 고양이 병행이 되지 않으면 그 의제는 듣기 좋은 이야기 하는 것 밖에는 안 될 것 같다.

<추가질문1> 교육을 통한 정치의식의 고양을 이야기 하셨는데 구체적인 방안은 어떤 것이 있는가.

우리의 보통 정치의식하면 대부분 정파교육으로 한정시켰지 않았나. 이런 구조는 아니고 공식적인 정치위원회 등을 통해 민주노동운동가를 위한 정치적인 공간에서의 역할이라든지 지역의제, 산업의제, 사회의제들을 논의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야 한다. 각 사업장에 고착화 되어있는 정파조직들이 동의한 공동의 모임을 만들고 논의하면서, 노동조합의 조합원 교육과 병행해야 한다.  각 의제에 대해 초기업적인 차원에서 제기하고 논의하는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정파에서 할 수 있겠지만 공동의 과정이 없이는 지금 정파구조에 땜빵 하는 식으로 될 가능성이 많을 것 같다.

<공통질문3> ‘포괄적 사회 프로그램을 제출하는 노동자운동’이 현재 위기의 극복 방향이라는 주장에 대해 의견을 말해 달라.

노동운동이 ‘사회에 대한 포괄적 문제제기를 수행하고 대안을 제출해야 한다’는 주장은 맞는 말이다. 당위론적이 아닌 명제로서 동의한다.
그런데 문제로 우리가 늘 이야기하는 부분은 공동실천, 공동투쟁의 경험들이 사실은 각 노동조합이나 민주노조운동 진영의 집행부들이 존립근거이거나 타격이 되는 방식으로 잘못돼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괄적인 사회적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노동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정책개발이나 대안마련, 노동운동의 존재 이상을 인정하는 시민사회단체와의 공조도 중요하지만, 각 영역의 불신을 먼저 깨야 한다. 그거 해봤자 조직들이 깨지고 교육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적이 없었다고 보지 않나. 즉 실천 영역 속에서 실질적인 의제개발을 더 면밀하게 해야 한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예를 들면, 이것은 이미 명제화된 것이기 때문에 더욱 세밀한 접근들이 있어야 한다. 비정규직 문제를 당장 해결하지는 못하겠지만 정규직 노조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역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게 뭐냐, 이런 세부적인 고민들이 있어야 한다.

<추가질문2>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독일을 예로 들면, 한 기업에서의 불법적인 비정규직 채용 등이 문제가 되긴 하지만, 지역 내 노동조합간의 협의망을 구축해 채용 과정 속에서 이를 차단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이처럼 노동조합 스스로가 감시 장치를 만들어 내거나, 여러 측면에 있는 사회적 소외계층을 위해서 프로그램을 구성해 사회적 약자를 위해 한 시간 노동 임금에 대해서 기부한다거나, 제3세계에 나가있는 생산입지에서 교육시설, 사회 인프라 조성에 노동조합이 직접적으로 참가해 기업에 압력을 가한다든지 이런 것들도 항목이 될 수 있겠다.

<공통질문4> ‘포괄적 사회프로그램을 가지는 노동자운동은 노동자운동을 통해 시민사회와 노동사회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시민사회와 노동사회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며, 시민사회와 노동사회의 개편이 필요하다고 본다면 어떤 방향으로 이뤄져야 하는가.

시민사회와 노동사회가 분리되어 있는 것 같지 않다. 시민사회 영역과 노동사회 영역이 중첩되어 있는데, 기존의 민주노조운동은 중첩된 부분에서 중심이 뭐냐에 대한 논리를 따지면서 시민사회 영역에 대한 의제를 소홀해 왔고 이를 부차적인 것으로 봤던 것은 사실이다. 노동운동이 시민사회 의제를 설정해내고 노동운동의 기존 의제들하고 결합될 수 있는 지점이 무엇인가 발굴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좁혀서 이야기한다면 노동조합에서 대의원대회를 하면 연맹이라든가 숫자, 규모에 따라 다 나누어 버린다. 사실은 직업훈련생 같은 청년부분, 비정규직, 여성, 장애인 등 소수계층 이해방식이 조직논리상 무거운 주제로 다가온다. 이것은 제도로서 보완할 수밖에 없다. 시민운동에 대해 노동운동이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면 더 큰 사회적 고립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부적으로 이 지점을 더 치중하고 중장기적으로 가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어야 된다. 이것은 내부에서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스스로 실천이다. 실천을 보이지 않는 한 노동운동이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의 쇼맨십에 불과하지 않을까한다.

<추가질문3> 노동사회와 시민사회가 중첩되어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두 사회간의 연대는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공통질문6> 노동자는 노동자이면서 시민이기도 하다는 전제에 노동조합운동이 환경, 여성, 평화, 소수자 등 시민사회운동의 영역에 개입해야 하며, 노동자운동일 뿐만 아니라 시민운동이기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중첩되어 있는 건 맞는데, 제 경우에 볼 때 민주노조운동에 조합원들은 당이건 당 외곽에서 활동하건 대부분 조합원이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고민하는 거 같다. 민주노동당의 경우, 당에서 많이 활동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면 조합활동의 연장선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 부분이 계속되는 한, 노동사회란 기업별 공장에 있는 공장중심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부터 넘어서야 된다.
정치적인 의식에 대한 논의, 지속적인 자기반성과 비판 없이 시민사회 의제를 가지고 개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역효과나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정책적 영역을 지역사회 문제에서 대기업의 노동자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단순하게 지역사회에 욕을 듣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한 게 아닌가, 그런 면에서 단위 노조가 실질적으로 조합원이 각 지역단체 등에 참여해 그 속에서 조합활동에 대해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같은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게 한 뒤 스스로 설득하는 과정들이 되어야만 자신의 문제로 알아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에서는 과정이 필요한 게 아니겠나. 단지 시민사회 영역도 중요하지만 못했기 때문에 해야 된다는 것은 너무 낙관적인 판단인 것 같다.

<공통질문5> 사회안정망이 취약하지만 국가와 기업이 사회적 비용을 분담할 의사가 전혀 없고 정규직 노동자의 고임금에만 문제를 돌리고 있는 한국에서 노동조합이 먼저 독자적으로 조합 안과 밖을 향한 연대공동체운동, 나눔운동을 추진하여 국가와 기업을 압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눔운동이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조합 내에서 종업원 의식을 넘어설 수 있는 정치의식을 발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회 공공과 같은 자전적 행위로 환급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전적 행위는 결국 좀 더 나은 상태를 나눠주는 것이라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동일한 존재이며, 동일한 존재로서 똑같이 할 수 있는 것을 발굴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기업이 이야기하는 방식처럼 나누거나 기부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 더 좁혀 보면 민주노조운동에 가장 큰 딜레마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노동자 내 격차에 문제인데, 내부 분열이나 분화 격차를 줄일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는 대기업의 조직 노동자들의 사회연대성이란 차원에서의 활동이나 기금조성을 제기해야 될 때가 된 것 같다. 기금문제에 있어 연대기금의 형식으로 가자고 이야기 하는데 맞다. 그게 하나의 중요한 적립기금이고 장기적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단순히 연대기금이란 형식으로 해서 외부로 돌리는 것은 참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기업등록의 규모나 아니면 적립기금의 양에 따라서 1~5% 등 부분적이고 단계별로 쓰는 방도를 좀 넓히자.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등 정책을 개발할 수 있는 정책기금, 내부 조직전환과 관련된 조직기금, 연대기금으로 분화를 시킨다면 설득하기가 좀 낫을 것이다.

나눔운동까지는 자선이 되겠지만 공동체운동은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므로 중요하다. 구체적인 방안이 있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맞다. 특히 지역에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굉장히 큰 대기업 같은 경우에 조직노동자들로 구성된 민주노동운동 진영이 공동체운동을 발굴해내고 주도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연대공동체운동, 나눔운동을 통해 기업과 국가를 압박하는 것이 한국사회에서 얼마만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느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이 같은 대안이 조원단위에서 운영될 수 있는 걸 확인하고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목표나 경로를 갈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면 된다. 내부적으로는 스스로의 독립성이라는 조직화 부분이 있겠지만 결국 외부적으로는 노동자가 사회에 특정한 유익한 사회활동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어야 된다. 쉽고 실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부분, 확인 가능한 방법이 지역사회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 만이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없지만 자기문제하고 가장 연관될 수 있는 일은 지역사회에서의 이해당사자들 간의 교육과 중첩된 의제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대안을 만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산업별 의제라는 큰 이야기를 이야기 하는데 그럴 수도 있다. 그건 총연맹 차원이라고 한다면 대공장에서 다시 한 번 산별 연대 싸움이라도 대공장에 남아 있을 거고 대공장에 있는 조직노동자들의 역할은 바로 그런 개념일 수 있다.

<추가질문4> 노동조합이 국가정책에 개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노동조합 고유의 중요한 문제로 고용문제를 볼 수 있는데, 환경친화적이고 미래지속가능한 고용창출을 핵심으로 국가의 산업정책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이야기는 추상적이다. 고용창출에 있어 여러 가지 단어를 구사해 지속가능성이라든지 환경친화적, 생태지향적, 또 노동친화적이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어떤 단계가 있다. 그 단계에서 국가 단위에 대한 문제보다는 차라리 산별노조가 현실적으로 산업별 노조의 전환과 동시에 산업에 대한 의제를 이야기해야 한다. (환경친화적이고 미래지속가능한 고용창출이) 상징적이거나 선정적인 이야기였지 연관되어있는 프레임을 짜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과연 그게 진짜 사회적 의제로 적극적인 쟁점을 만들 수 있을지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다. 총연맹이 고민했던 과제라고 한다면 산별노조 차원에서는 조금 더 적극적인 안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과도한 기업별 체제이면서 사실은 대국가나 대자본가의 여러 가지 협상의 여론을 주도하는 것은 총연맹이라는 점이다. 연맹은 떠있는 조직이었다. 산별노조 전환을 했다고 한다면 연맹들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총연맹이 자기 위상이나 처해있는 조건에 맞지 않게 과도한 역할을 맡아 과부화되어 책임지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것을 계속 끌고 나가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 산업별의 집중점을 강화되는 방식으로 총연맹이 지원해주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산별노조가 더 튼튼하게 된 상태에서 중심을 갖고 그런 것을 이야기했을 때 실제적이 파워를 나타나는 거지 중간이 비어있는 상태에서 계속적으로 제기됐을 때는 결국 불신을 받을 뿐이다. 불신과 회의가 반복될 때에는 이거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산별노조 체계에서는 총연맹은 산하 조직의 지원시스템으로 가야 하는 게 좋다고 본다.

<추가질문5> 산별노조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산별전환이 되어도 과제는 여전히 남는 것이 아니겠나.

투표 방식에서부터 의견이 분분하다. 밑에서부터 논의가 얼마만큼 됐으며 과정상의 불안정성이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인정하긴 하지만, 밑에서의 과잉화된 자원들, 위에서의 과부화된 역할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교섭방식하고 조직방식이 사실은 잘 어울려 있으면 좋은데 지금 상황에서 조직은 좀 크게 가고 교섭은 조금 분화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산별 조직 전환하는 조직투표는 여러 가지 많이 있다 하더라도 한 조직으로 묶는다는 의미에서 51% 이상은 좋은 것이다. 일단 조직적으로 묶이는 거 자체는 동의하고, 그 내부의 규정, 규약을 어떻게 짜느냐는 또 다른 치열한 논쟁이 좀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섭은 인정하다 보니까 지부, 지역, 기업, 레벨도 정하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왜냐면 같은 공장에 있는 지부의 조직이 아니라 소속이 지부라는 것 때문이다. 우리가 이야기 하는 비정규직 간접고용 전환을 생각해보면, 참여했던 노동자들이 같은 공장에 일하는데도 소속이 딴 곳이라는 이유로 못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 내용이 자기들의 산별조직의 딜레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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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산별 노조 전환에 대한 의견 나눠

정부,산별 노조 전환에 대한 의견 나눠
 
[파이낸셜뉴스 2006-07-13 02:12]
 
정부는 12일 정부 중앙청사에서 한명숙 총리 주재로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를 열고 최근 가속화되고 있는 노동계의 산별 노조 전환 움직임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날 회의는 최근 민주노총 산하 최대 사업장인 현대차 노조를 비롯해 기아차, GM대우차, 쌍용차 등 완성차 4개사 노조가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에 가입해 기업별 노조에서 산별노조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고, 경영계가 이에 대해 ‘노조의 입김이 커져 노사관계 경색이 우려된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가운데 이뤄져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이날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노동부 장관에게 최근 산별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노동계의 움직임을 전해듣고, 산별노조 전환이 올해 임·단협과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원론적인 의견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노동부 관계자는 “산별전환은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 안건 가운데 하나였으며 정부가 이 자리에서 노동조합의 산별전환에 대한 구체적 대응 방침을 결정한 것은 아니다”면서 “노동부 장관이 최근 산별전환을 시도했거나 시도하고 있는 노동조합의 동향과 산별전환의 장점과 단점 등을 설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는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 이상수 노동부 장관, 조성준 노사정위원장, 최영기 한국노동연구원장과 청와대 윤대희 경제정책수석, 김용익 사회정책수석 등이 참석했다.

한편 산별노조 전환과 관련해 이상수 노동부 장관은 최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 “산별노조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해서도 안 되지만 이런 흐름을 회피해서도 안된다”면서 “산별노조 전환 흐름을 잘 살려 기업경쟁력을 강화시키고 근로자의 권리도 향상시키는 등 위기를 기회로 살려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 ck7024@fnnews.com 홍창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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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택상]미사일 발사 대가 남북 인민이 치른다

미사일 발사 대가 남북 인민이 치른다 
 

정 택 상 (진보정치연구소 상임연구위원)

    1. 미사일의 대가, 누가 치러야 하나?

2006.07.06

북한은 오늘 새벽 관련 국가들의 발사 중지 요구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사일을 발사하였다.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한 북한의 전략은 1994년 이후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군사적 능력의 과시와 비대칭적 억지 전략을 통해 북미 직접 협상을 이끌어내려는 전략이다. 평양 지도부의 입장에서 미국을 상대로 한 비대칭적 억지 전략이 합리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양이 협상에 관심 없는 미국을 상대로 더 큰 카드를 내보일 때마다 한반도는 요동쳐왔다. 지금도 그렇다.

북한의 ‘미사일 정치’는 ‘북한 문제’로 확대된 북미 문제를 ‘핵과 미사일’로 되돌리려는 야심찬 시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반도의 긴장고조와 남북관계의 악화라는 비용을 감수하는 것이다. 남북관계의 악화와 긴장 고조라는 비용은 평양 지도부의 입장에서는 보다 작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반도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모든 ‘인민’들에겐 결코 작지 않은 부담이다. ‘미사일 정치’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북한의 지도부가 아니다. 남북한의 인민들이 남북관계의 불가역적 발전과 한반도의 평화발전의 지연과 악화를 지불해야 한다.

북한의 미사일 정치는 동북아시아의 군비경쟁과 갈등의 확산에도 일조하고 있다.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갈등의 촉진자’로 기능하면서 ‘북한 위협’을 빌미로 한국 및 일본과의 동맹 변혁을 다그치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 정치는 미국의 주장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하는 측면이 있다. 미국 내 일부세력은 북한의 미사일 문제를 근거로 미사일방어 강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북한의 미사일 정치는 그 의도와 무관하게 동북아시아 인민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통해 적어도 남한과의 전략적 공조에 무게를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북한의 이러한 태도에는 남북관계의 ‘불가역적 전환’을 이루지 못한 노무현 정부에도 엄중한 책임이 있음을 보여준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 미사일 발사로 야기된 국제질서의 상황이 추가적으로 악화하는 방지하고, 대화를 통한 해결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군사적 수단에 대한 의지는 그 성과만큼 혹은 더 큰 부담을 한반도의 인민에게 짊어지울 것이라는 점을 평양과 서울의 지도부는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2. 북한의 대미 전략은 성공하였는가?

북한은 오늘 새벽 최소한 6기의 미사일을 발사하였다. 아직까지 북한이 몇 기의 미사일을 발사하였는지, 미사일의 제원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혀지고 있지는 않다. 북한 역시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미사일 첫 발사가 이뤄진 시작은 3시 33분이었으며, 6번째 발사는 7시 32분에 이뤄졌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6기의 미사일 중에서 스커드 미사일과 노동 미사일과 함께 대포동 2호 미사일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공위성 실험, 한 번으로 충분하다!’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북한이 미사일 정치를 가동시킨 것은 핵과 미사일 문제로 의제를 압축하여 미국을 협상에 끌어들이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 글에선 북한이 자신의 능력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기존의 협상 전략에서 이탈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미사일 발사를 자제할 것을 평양 지도부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강행하였고, 관심을 모았던 대포동 2호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대포동 2호의 실패가 과연 기술적 결함 때문인가 하는 점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미사일 능력을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북한의 ‘의도된 실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으로선 미국 본토를 실제로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드러낼 경우, 미국의 대북 군사 옵션 채택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이를 회피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 이 부분에 대해선 철저한 검증과 확인이 필요하다.

역으로 대포동 2호의 실패가 기술적 결함 때문이었다면, ‘미사일 강국’인 북한의 입장에서 체면을 구긴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도발(provocation)이긴 하지만, 직접적인 위협거리(immediate threat)는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1). 스티븐 해들리 국가안보보좌관 역시 대포동 2호 실패를 두고 북한이 미국을 직접적으로 공격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다고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즈가 지적했던 것처럼 북한의 미사일 실패는 미국 내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일단 미국으로선 북한을 제재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것도 고민거리이다. 미국의 철저한 대북 봉쇄는 봉쇄 자체의 정치적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을 뿐이다. 또한 유엔 안보리를 통한 제재 역시 ‘미사일 주권’ 사항에 적용하기가 곤란하다. 이는 북한 미사일 위협을 느끼고 있는 일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일본 역시 대북 제재를 강화하고 있으나, 제재의 규모와 범위는 매우 작다. 한국이 제재에 동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사태 전개를 의미하겠지만, 한국을 제외한 미국, 일본의 대북 봉쇄, 제재는 실효성이 별로 없다.

북한의 미사일 능력이 확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의혹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미국 내에선 이를 둘러싼 이견이 증폭되고 있다. 부시 정부는 북한의 미사일 위협이 별 것 아니며, 북한에 대한 정책 포지션을 바꿀 이유가 없음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 민주당은 북한과의 교섭을 통한 미사일 모라토리엄의 복원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내 논쟁이 어떻게 전개될 지는 예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대화 이외의 방법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북미 협상, 북일 협상을 통해서 타결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른 한편 미국이 추진해온 ‘북한문제’로의 전환과 ‘변환외교’가 변화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섣불리 단정내리기 어렵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로 압축을 하려하지만, 미국은 북한에 대한 외교적 지렛대를 포기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과 미사일로 의제를 전환시키려는 북한의 시도에 대해 미국은 강경과 무시를 배합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또한 미사일 협상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다른 북한 이슈들처럼 개별적인 협상에 머무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협상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그 시기 문제가 남는다. 미국과 일본은 당장은 북한과의 협상을 서두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입장에서는 적대적이고 악의적인 무시로 일관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당장 북한과 협상 테이블을 구성해야 할 만큼 절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통해 얻고자 했던 목표는 단시일 내에 이뤄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적어도 몇 달의 시간 추이 속에서 협상 가능성이 논의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미사일 정치의 손익 계산서는 불투명하다. 북한이 ‘신뢰’의 문제를 제외하고 미국과 일본에 더 이상 잃을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남한을 포함시킨다며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목표와 성과라는 측면에서 화제를 모은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과 일본의 가시적인 정책변화를 이끌 것인지에 대해서도 단정하기 어렵다. 또한 그러한 정책변화가 반드시 북한에게 유리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긍정하기 어렵다. 확실한 것은 북한의 미사일 정치가 북한의 지도부가 아닌 북한의 인민, 남한의 인민, 그리고 남북관계에 커다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는 점이다.
 

    3. 군사적 능력의 과시

북한 미사일 발사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적어도 6기나 미사일을 발사하였으며,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를 고루 배합하였다는 점이다. 둘째는 일본에 대한 미사일 위협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이다. 셋째는 이란과의 깊은 교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각각의 점을 고려할 때,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통해서 정치, 군사, 경제적 이익을 꾀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주목을 끄는 것은 북한이 왜 6기나 발사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미사일 실험에서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를 섞어서 대량 발사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세 가지 분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북한의 단거리, 중거리 미사일이 가지는 군사전략적 의미이다. 북한은 적어도 800여 기의 탄도미사일(ballistic missile)을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보유한 탄도미사일은 다양한 종류의 스커드 미사일과 노동 미사일이다2). 북한의 스커드 미사일은 종류에 따라 300~700킬로미터의 사정거리를 가지며, 500킬로그램에서 1톤의 탄두를 장착할 수 있다. 또한 노동미사일은 1000킬로미터의 사정거리를 가지며 700킬로그램의 탄두를 장착할 수 있다. 또한 2단계 추진체인 백두산 1호는 2200킬로미터의 사정거리를 갖는다.

이러한 북한의 미사일이 갖는 군사적 효과는 분명하다. 우선 주한미군이 장사정포를 피해서 평택 이남으로 이전한다 하더라도 유사시 군사적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북한은 일본 전역을 대상으로 미사일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미사일에 화학 탄두를 장착할 수도 있다. 따라서 북한이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 미사일을 각각 발사한 것은 각각 한국 내의 주한미군, 일본 전역, 그리고 미국 본토를 대상으로 한 군사적 시위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북한이 과연 지대함 미사일을 발사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북한이 지대함 미사일을 발사하였다면 이는 일본의 해상방위청 소속의 이지스 함대와 미 해병대 제3원정군 및 항모전단까지도 고려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관련 정보가 즉각 확인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4. 북일관계의 재편 의도

이번에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은 대포동 2호를 제외하고는 남한 내 주한미군 혹은 일본을 겨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일본에 대한 위협 효과가 더욱 컸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대포동 2호가 성공했다면 다른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었을 수 있으나, 대포동 2호가 실패한 지금 관심의 초점은 북한이 일본을 대상으로 중거리 미사일을 발사한 의도이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볼 것은 북한이 일본과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재편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북일 공동 코뮈니케(평양선언)를 뒤집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은 고이즈미 총리와의 회담에서 미사일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였지만, 그 이후 북일관계는 악화를 거듭하였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이 북일 수교를 전향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인정했던 납치 문제가 도리어 심각한 악재가 되면서 북일관계는 납치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치달았다.

일본은 핵 문제를 둘러싼 6자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납치문제와 핵문제 해결을 연계시키는 방침을 밝히거나, 북한 인권문제를 제기하여왔다. 북한은 이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해왔다. 일본은 납치문제(메구미 문제를 포함한)를 근거로 대북 압박을 지속해왔으며, 최근에는 참의원과 중의원에서 북한 인권법안이 통과되기도 하였다. 또한 대북 경제제재의 수준을 높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납치 등으로 확산된 북일 쟁점을 다시금 미사일이라는 ‘현존하는 위협’으로 이동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일본 주요 언론사의 기자들이 김영남씨 상봉 등과 관련하여 북한에 체류하고 있는 것과도 연관된다. 북한 당국자는 오늘 이들에게 ‘미사일 문제는 주권의 사항’이라고 밝혔다. 일본 아베 신조 관방장관과 누카가 방위청 장관은 전례 없는 심각한 표정으로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확인하였다. 따라서 향후 일본이 대북 강경책을 취한다 하더라도 초점은 미사일 문제에 맞춰질 가능성이 크다. 의제를 미사일로 압축함으로써 향후 북일 협상의 흐름을 전환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구석이다.
 

    5. 이란과의 반미 전선 교감?

이밖에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무기 수출이나 군사기술의 능력 제고를 위한 실험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스커드 미사일과 노동 미사일 영역에서 북한은 최첨단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상당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이는 세계 무기수출 시장에서 미국 및 유럽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국가들과의 무기거래에서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국가가 이란이다. 하지만 과거 북한이 예맨에 수출하려던 스커드 미사일이 한 때 억류되었던 적이 있음을 고려한다면, 미국은 북한의 무기 수출에 대해 확산방지구상(PSI)을 적용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될 경우 새로운 긴장이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미사일이 위협적이라고는 하나, 지금까지 북한은 주로 사정거리를 늘리는 전략을 취해왔다. 이는 미국 본토에 이르는 미사일의 보유가 대미 억지력에서 관건이라고 평양 지도부가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미사일의 위협 능력은 사정거리 및 정밀도와 함수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사정거리의 향상보다는 정밀도의 향상이 위협 능력을 배가시킨다. 북한은 미국 본토를 겨냥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의 개발과 동시에 중․단거리 미사일의 정밀도 향상을 꾀하려 했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선 미사일 실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올해 3월 북한이 동해상에 발사한 중거리 미사일 역시 기술력의 제고를 위한 실험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주목을 끄는 것은 북한과 이란의 교감 여부이다. 현재 북한에는 이란 사절단이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아마 북한으로부터 스커드 미사일을 구매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몇 년 전부터 이란과 북한의 미사일 커넥션 의혹을 제기하였으며, 북한의 미사일 개발이 이란의 자금에 의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해왔다. 또한 북한이 ‘미사일 정치’를 가동하고 결국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과 이란의 행보는 많은 관련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3). 북한이 미사일 정치를 가동한 시점이 미국이 이란에 대해 직접 대화를 하자고 밝힌 시점이라는 점,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시점이 이란이 미국 등의 최후통첩을 거부한 직후라는 점은 양자의 교감 가능성을 뒷받침한다(조성렬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연구위원). 핵개발을 통한 자위력을 추구하는 두 국가가 전략적 이익을 위해 상호 교감할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이는 이란 사절단이 북한을 방문 중이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6. 남북장관급회담, 예정대로 진행하라

북한 미사일에 관한 정확한 실상들은 아직 베일에 싸여있다. 북한이 과연 몇 기의 미사일을 발사하였으며, 각 미사일의 제원은 무엇인가 하는 가장 기초적인 것도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대포동 2호라 추정되는 미사일의 실패 원인 역시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한 이번 상황에서 미국이 미사일방어체제를 가동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에 한국이 동참하였는지 역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요격설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각국의 반응이 정리되는 상황에서 북한 역시 입장을 표명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는 오늘 오전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유감을 표명하고, 향후 남북관계가 그것의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내비쳤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한국이 미국과 일본이 꾀하는 대북 제재의 강화에 동참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실상 한국의 대북제재 동참 문제는 최근에 나온 것이 아니다.

지난 4월 외교통상부 천영우 실장이 방미를 하였을 때, 다양한 의제들이 한미 사이에 논의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도 논의되었다고 한다. 그와 더불어 관심을 끌었던 것은 한국이 북한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한국이 대북제재에 동참할 수도 있음을 시사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현재로선 확인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한국 정부 내에서 ‘피로감’을 느끼며, 대북제재를 검토하려는 목소리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함으로써, 남북관계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현 단계에서 한국 정부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북한 미사일로 불거진 국제적 갈등 상황이 추가적으로 악화되지 않도록 북한과 관련국을 설득하는 것, 나아가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대북제재 논의에 동참하지 않으며 솔직한 중재자로서 역할 하는 것, 그리고 미사일 문제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를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다음 날로 예정된 남북장관급 회담을 예정대로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직접적인 대북 접촉을 통해 북한의 진의를 탐색하고, 상황을 조정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절실한 때이다.


1) Press Briefing on North Korea Missile Launch by Tony Snow and National Security Advisor Steve Hadley.

2) CNS, CNS Special Report on North Korean Ballistic Missile Capabilities (March 22, 2006), p.3.

3) DAVID E. SANGER, “Don't Shoot. We're Not Ready.,” New York Times, June 2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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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택상]인공위성 실험, 한 번으로 충분하다 '김정일 병법'에도 안맞아…남북협력을 돌파구로

인공위성 실험, 한 번으로 충분하다
'김정일 병법'에도 안맞아…남북협력을 돌파구로
 
 
 

주목받고 있는 북한의 ‘미사일 정치’

북한의 인공위성(혹은 미사일, 이하 ‘인공위성’으로 통일) 발사 실험 준비를 둘러싸고 국제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북한의 준비 상황이 어떠한지, 연료주입을 완료했는지, 나아가 발사하고자 하는 인공위성의 제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만 분분할 뿐 확인된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미국 상원 군사위원장인 존 워너(공화당)는 6월 25일 “백악관과 접촉을 하고 있지만, 북한이 미사일에 연료주입을 끝냈는지, 북한의 의도가 뭔지 정확한 상황을 모른다”고 말하였다. 백악관 역시 정확한 사태 파악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

이를 반영하듯 미국 정부의 북한 인공위성 발사 문제에 대한 언급은 대부분이 ‘만약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다면~’하는 가정형이 대부분이다. 부시 대통령 역시 6월 26일 북한에게 미사일의 의도가 무엇인지, 또 탄두에 무엇이 탑재되어 있는지 국제사회에 설명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확실한 것은 이종석 장관이 6월 23일 언급하였던 것처럼 북한이 단순히 과장과 위협 차원에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공위성 발사를 전제로’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총련계 기관지인 조선신보는 6월 21 ‘<대포동> 소동은 미국의 자작 자연극’이라는 기사에서 북한이 준비하는 것이 탄도미사일(ICBM)이 아니라 인공위성이며, 미국의 탄도미사일 주장은 허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공위성이냐, 탄도미사일이냐 하는 것은 논쟁의 핵심이 되지 못한다. 인공위성과 탄도미사일의 차이는 매우 작기 때문에, 인공위성을 탄도미사일로 변환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다. 문제의 본질은 조선신보의 언급처럼 인공위성 발사가 “유관국들 사이에 ‘안보상의 문제’로 되는가 어떤가에 있다.”

그러므로 북한이 발사하고자 하는 것이 인공위성이든, 미사일이든 결국은 ‘미사일 정치’인 것이다. 북한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미사일 정치’가 성공할 것인지는 섣불리 결론내릴 수 없지만, 적어도 미국의 새로운 주목과 관심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북미 직접대화 여부는 아직까지 불투명하다. 만약 북미 직접대화가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다면, 평양의 지도부는 그에 대비한 퇴로를 마련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긴장 조성을 통한 협상의 전략

이종석 장관은 북한이 실제로 미사일 발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발사를 염두에 둔 준비와 발사는 엄연히 다른 문제이다. 발사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아직까지 평양의 지도부가 발사를 실제로 원하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미사일 발사를 북한의 ‘협박’ 전략으로 이해하는 편이 현실적인 것 같다.

   
▲ 98년8월 북한이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한 광명성1호의 모습. (서울=연합뉴스)
 
북한은 2002년 핵 문제가 불거진 이래 북한은 미국과의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많은 말과 행동들을 만들어냈다.

아직까지 뇌리에 생생한 ‘서울 불바다’ 발언 역시 북한의 의도적 전략의 산물이었다. 북한은 2003년 4월 북․중·미 3자 회담 직전에 “8천여 대의 폐연료봉들에 대한 재처리 작업까지 마지막 단계에서 성과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해석 논란에 휩싸인 성명을 발표한 바 있었고, 3자 회담장의 복도에선 켈리 국무부 차관보에게 “우리는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밝히기도 하였다(그 직후 공식석상에서는 부인하였다).

북한은 지금도 여전히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 전쟁에는 전면 전쟁으로”, “천백배의 보복”, “행성에서 전쟁의 근원을 송두리째 소멸해버릴 강력한 자위적 조치”를 강조하며 극단적인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

최근의 인공위성 발사 문제 역시 북한은 관심권에서 멀어진 미국을 다시금 핵 문제 협상의 장으로 이끌고, 북미 직접대화를 하기 위한 ‘협박’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북한은 극단적인 표현과 행동을 매우 효과적이고 능동적으로 구사하고 있으며, 핵 문제 등에서 결코 수동적이고 수세적인 전략을 취하고 있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 김정일 위원장은 “군사에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하고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하여 적을 기만하여야 합니다. 적을 기만하는 것은 여러 가지 꾀를 써서 적들로 하여금 아군의 기도를 알 수 없게 하고 적을 속여 넘긴다는 것을 말합니다. 머리를 써서 적을 감쪽같이 속여 넘겨야 적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불의에 타격을 안길 수 있는 유리한 기회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현재 북한이 추진하는 전략 역시 긴장 조성을 통한 협상 전략의 일환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미사일 위협과 대미 협상

약소국인 북한의 입장에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대안은 몇 가지 없다. 미국이 요구하는 개혁·개방(그것은 체제의 변환regime change을 의미한다)을 받아들이거나 미국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도록 하는 것, 이 2가지라 할 수 있다. 북한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기보다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미국에 도전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작은 나라인 이북’이 유일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도전을 하기 위해 취한 전략이 비대칭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북한으로선 상당한 군사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미국이 북한을 상당한 골칫거리로 생각하도록 하되, 미국을 분노하게 해서는 안 된다. 상당한 군사적 능력이 없으면 북한은 관심거리가 되지 않으며, 도를 넘어서면 미국은 실제로 북한을 타격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렵고 좁은 영역에서 북한은 지금까지 움직여왔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은 남한과 일본을 인질로 삼아 미국의 대북 공격의 비용cost을 높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국과의 협상을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북한은 “분렬되고 작은 나라인 이북이 미국과 군비경쟁을 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 이북은 미국이 엄청나게 값비싼 항공모함이나 이지스함을 만들 때, 단 한방에 그것들을 수장해 버릴 수 있는 상대적으로 값 싼 미싸일을 개발”하였다.

그리고 북한은 실제로 미사일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섰음을 이미 지난 98년에 보여주었다. 98년 8월 북한은 인공위성 발사를 통해서 3단계 추진로켓과 인공위성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난 7년간 북한은 지속적으로 미사일 기술을 진보시켜왔을 것이다.

북한은 아마도 한국과 일본 전역, 그리고 태평양 상의 주요한 미군 기지를 사거리 범위 안에 두는 미사일 전력을 구축하고 있을 것이다. 미사일에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느냐는 논쟁거리이긴 하지만 북한은 적어도 초보적 기술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미사일이 미국 본토에 이를 수 있느냐 역시 논쟁거리이지만, 그러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 자체가 북한의 미사일 능력이 상당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북한의 미사일 위협과 핵무기 위협은 미국과 그 동맹국인 일본 등에게는 실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군사적 능력은 미국의 대북 타격을 억지하는 수단이자 협상을 강제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미사일 발사, ‘절망감의 표현’인가

그러므로 북한이 지금 미사일 능력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은 종래의 전략에서 이탈하는 것이라 하겠다.

미사일 발사는 ‘절망감의 표현’이라는 지적이 있듯이, 현재의 북미, 남북관계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끌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북한의 미사일 능력이 실제로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미국은 대북 정책을 새롭게 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미사일 위협이 실제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정도로 발전하거나, 핵 탑재 미사일 기술의 개량에 따른 위협 범위의 확대 등이 실제로 확인된다면 미국이 참을 수 있는 도를 넘어서는 것일 수도 있다.

미국은 올해 초 발간한 4개년 국방검토QDR 2006과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에서 밝힌 것처럼, 북한의 실질적 미국 본토 공격 능력에 대하여 사활적 이익vital interest으로 규정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럴 경우 미국의 선제타격 가능성이 높아지며 핵·미사일의 협상 수단으로서의 성격은 사라질 것이다.

윌리엄 페리 전국방장관이 북한의 미사일 능력을 제거하기 위해 선제타격preemptive strike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한다. 미국의 체니 부통령이 선제타격에 반대한 논거는 그것이 효과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북한의 기술 수준이 초보적이었기 때문이다.

맨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미국은 아직까지 북한의 미사일 능력 자체에 대한 신뢰할만한 근거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북한이 실제로 그것을 보인다면 전혀 다를 것이다. 역으로 북한의 공개된 미사일 능력이 별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미국은 관심조차 두지 않고 대북 압박을 지속할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의 기존 전략에 비추어본다면, 인공위성 발사 실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 북한은 핵무기 및 미사일 능력을 실제로 입증하기보다는 능력을 감추면서 미국과 남한, 일본에게 위협 인식을 지속적으로 유포시키려 할 것이다. 그것이 핵·미사일을 협상 수단으로 삼으면서도 미국의 대북 타격을 억지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전략적 딜레마와 모순

북한은 핵과 미사일로 미국과 협상하려고 한다. 북한이 성공하려면 적어도 미국으로 하여금 첫째, 북한을 공격하는 이득보다 피해가 크다는 점, 둘째, 북한의 위협을 군사적으로 제거하는 것보다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저렴하다는 점을 납득시켜야 한다.

   
▲ 2005년 10월 10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조선노동당창건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북한군 간부들이 열병식을 사열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그러나 북한이 협상 수단으로 삼고 있는 군사적 능력은 미국의 대북 타격을 억지하는 데는 유용하겠지만, 미국을 포괄적 관계정상화로 이끄는 데는 취약하다. 군사적 수단이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이다.

북한이 핵 문제가 해결되는 그 시점까지 지금과 같은 비대칭 전략을 사용하기 위해선 경제적인 손실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자립으로 경제를 재건하기가 곤란해진 현재 상황에서 대미 압박 전략과 경제재건 전략이 맞아떨어지기 위해선 ‘단기간’ 해결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대미 전략과 경제재건 전략은 상충 관계를 피하기가 어렵다. 남북경협을 통한 북한 경제의 재건을 논의할 수 있겠지만, 부분적인 남북 경협 역시 북한의 비대칭 전략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북한이 이러한 정책적 딜레마를 어떻게 관리·통제하느냐에 따라서 북한의 대미 전략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북한의 성공 혹은 실패는 남한과 한반도 내에 살고 있는 인민 전체에게 심대한 고통을 안겨줄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갈수록 대북 관계를 관리·통제하려는 미국에 맞서 북한 역시 임계점에 가까운 극단의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미국의 대북 타격과 같은 군사적 선택의 가능성은 계속해서 높아질 것이다.

지금 국민들은 좀 더 여유롭게 사태를 관측하고 있지만, 북한의 극단적 조치가 지속될수록 국내 여론의 향배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것이 한반도 전체에 미칠 영향은 매우 부정적이다. “우리 민족끼리 평화와 통일을 위해 힘을 합쳐나가야” 할 “민족공조”가 내부로부터 와해될 것이며, 통일의 길 역시 저만치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남북협력이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향하여

평양 지도부는 여전히 남한을 ‘동반자’로 인식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남북협력과 국제협력의 선순환 고리를 형성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 연기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북한은 대남관계를 단순히 관리 차원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남한을 동반자이자 전략적 협력자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남한의 정권 교체와 그에 따른 정책 및 기조의 혼선은 불가피하지만 6·15 공동선언이 조성한 남북협력의 흐름은 남한의 어떠한 정치세력이 집권한다 한들 되돌리기 어렵다. 평양의 지도부가 남한의 특정 세력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불편한 심기는 남한 사회의 거대한 변화를 고려한다면 지나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평양이 남한의 특정 세력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수단적 인식 역시 남한의 실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판단이라 할 수 있다. 이제 평양의 지도부는 남한 사회의 역동적 변화와 잠재력을 충분히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남북협력을 전면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남북협력의 질적 발전은 북한의 군사적 수단이 채우지 못하는 미국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지름길이 된다.

군사적 수단을 통한 대미 억지력의 확보가 미국으로부터 관계 정상화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데는 효과적이지 않다. 군사적 수단은 가파른 긴장의 비탈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군사적 수단을 설혹 사용한다 하더라도, 북한 지도부는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남한과의 전략적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노력을 동시에 진행시켜야 한다.

비대칭 억지 전략과 평화협력 전략의 다소간 어려운 조합은 바로 한반도 문제가 안고 있는 복잡성과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것을 푸는 데에 남북한 지도자들의 공동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2006년 06월 27일 (화) 09:43:38 정택상/ 진보정치연구소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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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산별좌담]박유기, 임영일, 김창한

실질적 민주주의 이끌어낼 산별노조
[산별특별좌담]비정규직 노조가입 획기적으로 늘어날 것
 
 
 

6월 30일 현대자동차노조 등 금속산업연맹 13개 노조 9만명의 조합원들이 기업별노조에서 산업별노조로 전환해 현재의 금속노조와 합쳐 13만명의 거대한 금속노조를 탄생시켰다. 지난 20년 동안 회사 내의 종업원을 대변하는 기업별노조 체제가 산업 전체 노동자를 대변할 수 있는 산별노조 체제로 전환한 역사적인 사건을 맞아 <레디앙>은 7월 2일 특별좌담을 마련했다. 이날 특별좌담에서는 산별노조 전환의 역사적 의미, 노동운동과 노사관계 및 한국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전망이 논의됐다. <편집자 주>

참석자
김창한 전국금속노동조합 위원장
박유기 현대자동차노조 위원장
임영일 경남대 교수

사회 이광호 <레디앙> 편집국장

정리 박점규 현장기자

   
 ▲ 김창한 금속노조 위원장, 임영일 경남대 교수, 박유기 현대자동차노조 위원장(왼쪽부터)
 

이광호 이번 산별노조 전환은 기업별노조의 굴레를 벗고 마침내 산별노조 시대를 활짝 연 20년만의 쾌거였다. 특히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집중된 현대자동차의 가결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언론의 대대적인 반대와 회사의 방해, 노조 내 일부의 산별 반대 움직임이 있었다. 그럼에도 조합원들이 산별노조를 선택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박유기 사측이 노골적으로 개입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한 대의원이 유인물을 냈고, 회사 관리자가 이걸 배포했다. 언론에서는 노골적인 반대가 있었다. 울산은 지역방송이 특집방송을 통해서 현대 사례를 외국과 비교하며 산별노조가 되면 혼란스럽고 안 좋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도부는 확고한 의지로 밀고나갔다. 90% 이상의 조합원들이 4시간씩 교육을 받았고, 조직력이 약한 곳에 '산별특공대'라고 부르는 교육 전문가 4명을 거의 한 두 달씩 파견보내 교육했다.

"자본이 가지 말라는 곳이 우리 가야할 길"

11개 현장조직이 2번에 걸쳐 산별노조에 찬성하는 공동의 입장을 밝혔다. 또 각 현장조직들이 독자적인 선전물을 현장에 내고 조직원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게 산별노조가 대세라는 것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막판 방해공작들은 마지막 집회할 때 "혼란스러울 때는 자본이 가지 말라는 곳으로 가자, 그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고 조합원들에게 호소했다.

조합원들은 기업별노조의 위기를 세뇌가 될 정도로 들었고, 정리해고와 고용불안. 해외공장에 따른 산업공동화, 법제도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산별만이 살길이라는 것에 공감했다.

   
 ▲ 김창한 전국금속노조 위원장
 
김창한 1998년 금속산업연맹이 출범할 때 19만 8천명이었는데 2000년에는 17만 5천명, 지금은 16만명이다. 고용불안, 해외공장 등 신자유주의 세상에 맞서기 위해 조합원들은 산별노조를 선택했다. 간부와 활동가들이 헌신적으로 뛴 것이 자신있게 통과시킨 것이다.

임영일 여러 곳에 교육을 다니면서 올해 특히 간부들의 자세나 긴장감이 전과 달랐던 점을 가는 곳마다 느낄 수 있었다. 현대자동차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2007년 앞두고 올해 산별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가 가장 강했다.

이광호 이번에 투표에 붙이지 않은 노조와 실패한 노조들이 7월에 다시 투표를 할 예정인가? 가결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예정이며, 어떻게 전망하는가?

김창한 부결된 사업장에 다시 투표를 붙이기 위해서는 의기소침해져 있을 걸 지도부부터 추스려야 한다. 연맹 차원에서 분위기를 형성해줘야 한다. 10만명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13만명이 됐다. 이 결과가 큰 힘으로 작용할 거다. 현장을 정확히 이해하고 들어가면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7월 5일 쌍용자동차노조와 철강분과 노조들이 산별전환 투표를 실시하는데, 여기서도 현대자동차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산별노조를 선택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임영일 시간은 좀 늘어질 지 모르겠지만 금속은 대세의 흐름은 정해졌다. 시간이 좀 더 걸리면서 참여하는 쪽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산별로 넘어오는 큰 흐름 안에 있다고 봐야 한다.

이광호 이후 투표할 때 현대자동차노조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임영일 교육위원을 파견하면 좋겠다.

박유기 실패한 사업장은 빨리 투표를 부쳐야 할 것 같다. 요구되면 충분히 할 것이다.

이광호 이번 투표 이후 출범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나. 이 과정에서 논의돼야 하는 주요 의제들은 무엇인가.

김창한 산별전환에 성공한 노조와 금속노조, 금속산업연맹이 모여 추진기구를 구성하고 10월 경 대의원대회를 거쳐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할 것이다.

금속노조의 규약규정이 연맹의 산별노조 추진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완성도가 높지만 변화된 상황을 반영하기 위해 토론을 활성화해야 한다. 금속노조는 내가 같이 만드는 조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위해 현장토론을 충분히 해야 한다.

곁방살이에서 우리집 시대로, 비정규직 다 들어와라

이광호 이번 산별전환의 의미를 압축적으로 표현한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임영일 기업별노조는 규모가 크든 작든 남의 집 곁방살이하는 조직이지 우리 조직이 아니다. 산별노조는 곁방살이하다 나와서 자기 집을 하나 지은 것이다. 언론에서는 거대조직이 생긴다고 호들갑인데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제 초가삼간 수준이다.

이 집에 새 살림을 꾸려야 하는데 그 방식이 문제가 될 것이다. 곁방살이 하다 모여서 우리 집 지어놓고 보면 안방은 내가 들어가겠다 넌 뒷방으로 가라 이렇게 싸울 게 아니라 집을 넓혀야 한다. 그동안 조직화의 외곽에 방치되어 있던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우리 집에 다 오라고 하고 담이 좁으면 담 허물어서 넓혀야 한다. 노동운동에서 큰 고비를 넘은 것이다.

박유기 아산공장에 가니까 충남지역 한국노총 산하 노조가 현대자동차 산별전환하면 들어 오겠다고 했다. 산별노조 전환은 지금까지 차별과 차이를 양산하고 극대화시키는 기업별 조직체계와 교섭체계를 변화시켜 대공장과 중소공장,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과 차이를 완화시키는 조직체계로 변화시킨 것이다.

평등을 기치로 하는 노동운동에 걸맞게 방향을 튼 것이다. 원하청 불공정거래도 마찬가지다. 현대자동차 사장도 사석에서 얘기하면 기아, 대우사장들하고 협상에 나가는 건 이해하는데 부품업체 사장들하고 같이 나가는 건 말이 되냐고 한다.

이제 조직틀과 교섭틀을 바꾸었다. 각각이 아니라 단일노조로 금속노조가 내 노동조합이라는 소속감을 높여낸다면 해낼 수 있지 않겠냐. 막판에 조합원들에게 산별전환을 실패하고 영원히 배부른 귀족노조로 남을 건지 남한사회 산별노조를 새롭게 견인할 건지 당신들이 선택하라고 했다.

산별노조는 대공장-중소공장, 정규직-비정규직 차별과 차이 해소하는 조직

김창한 20년동안 기업별노조를 임단협 중심으로 해와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높이는 큰 계기가 됐다. 비정규, 로드맵, 한미FTA 문제 등이 정부 계획대로 되면 아이엠에프 이후 착취구조가 고착화되고 민주노조는 무력화된다.

지금까지 정신 못차리고 대응 못하다가 이제 한 번 해보자는 것이다. 운동의 새로운 변화가 모색될 것이고 그 변화는 금속 내에서뿐 아니라 다른 조직에도 전달될 것이다. 실질적으로 연대해보자고 했는데 한 조직으로 묶인 것은 단결의 강화다. 승리의 기초를 닦았다. 새로운 출발이다.

임영일 작년 가을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사람들은 한국의 산별노조에 대단히 회의적이었다. 기업별노조는 한국과 일본 뿐인데 자기들이 50∼60년대 시도하다 실패했기 때문에 자기들 경험으로 보면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기업별노조를 해산하고 산별노조로 조직을 재편한 게 아니라 기업별노조를 묶어서 상급조직 중심으로 교섭투쟁을 끌고갔고 그걸 산별운동이라고 했다. 일본 노동운동이 못한 걸 우리가 해냈다. 노동운동사 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본노동운동 극복 노동운동사상 중요한 의미

이광호 이번 산별노조 전환은 전체 민주노조 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가?

김창한 현장에서 기득권을 놓을까 주저하는데 금속의 대공장이 했다는 것이 다른 곳에도 자신감을 줄 것이다. 조합원들에게 노동운동을 주도해온 금속이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절반은 먹고 들어간 것이라고 본다.

임영일 예전에 경상대에서 주요 조직 설문조사 했는데 조직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산별노조에 대해 70∼80% 이상 동의했다. 그럼에도 산별 조직전환이 지체되는 이유를 물어보면 대부분의 경우에 노조 간부들의 적극성의 부족을 지적한다.

금속은 10여년 이상 내부에서 토론도 많이 했고 시도도 많이 했다. 그 과정이 없던 조직은 막연하게 기업별은 안되고 산별로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간부들의 자기 확신이 부족한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할 때 금속의 변화가 다른 조직의 대중들에게도 자신감을 줄뿐 아니라 노조 간부들한테는 굉장히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여러 조직에서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경쟁적 정파들 산별노조라는 운동의 원칙에 동의

이광호 개인적으로는 울산이 진보정당이나 민주노조운동에 희망이냐 질곡이냐는 고민을 한 적이 있는데 목적의식적으로 조직한 산별노조 전환은 영향은 사람들이 생각 이상으로 클 것 같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정파'들이 모두 동의돼서 함께 실천했다는 점도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박유기 현자노조 대기업 이기주의 이런 것도 있고 노조 내 조직이 난립해 권력을 향해 간다는 비판들이 있었는데 경쟁적 활동관계에 있는 조직들 사이에 운동의 원칙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대의가 있었다.

또 중심에 서있는 간부들이 현자노조를 이끌어냈다. 10년 이상 산별노조 논의해왔는데 조합원 2/3 이상이 찬성하는 결과를 만든 것에 대해 다같이 기뻐했다. 이제 기업별노조에서 뭔가 하려는 생각은 다 접고 산별노조에서 활동을 어떻게 할 건가를 고민해야 한다.

조합활동이 기업을 뛰어넘어 전국적 차원이 되지 않으면 현자노조로 쪼그라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운동적 과제는 산별적 사업 과제로 빨리 접근해 들어가는 것이다. 

비정규직 가입, 교섭하는 획기적 돌파구

이광호 비정규직 문제를 산별노조가 어떻게 기여하고 조직할 것인가에 대해 얘기해달라.

임영일 실제로 비정규직을 조직화하고 그들을 대표해 교섭하고 투쟁하는 틀이 없었다. 기업별노조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했고, 산별로 갔을 때 그 길이 열린다는 걸 알고 있다. 금속노조가 몇 년 활동했지만 비정규직에 큰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4만명 밖에 안되는 소수산별노조의 역량의 한계가 때문이다.

대기업노조가 전환해 돌파구를 열었다. 조직체계를 제대로 정비해야 한다. 비정규직 조직화가 진행되고 그들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생겼다. 교섭을 통해 그들의 이익을 지키고 신장시켜 줄 단계로 넘어갈 상황이 됐다. 획기적인 돌파구가 생기게 됐다.

자본, 비정규직 수혈한 노동운동에 두려움

김창한 그동안 금속노조는 규모나 역량의 한계도 있었지만 산별노조의 책임성 때문에 싸워왔다.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법안 반대 투쟁에 최선을 다했고, 전략지부를 선정해 재정과 역량 지원해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었고, 이를 지키기 위해 피터지게 싸웠고 전국적인 파업까지 진행했다.

중앙교섭과 사업장 단체협약을 통해 비정규직 보호 조항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이 어려웠다. 대공장의 산별노조 전환으로 그동안 일어나고 싶어도 못 일어났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어나 조직력이 획기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본다.

또 대공장노조 중에서 노동운동의 건강성을 상실한 곳이 있는데 착취받고 탄압받았던 비정규직이 민주노조 운동에 뛰어들면 새로운 건강성을 생길 것이다. 자본은 비용의 증가로 보는 게 아니라 전략적 문제로 보고 있다. 노동계급이 비정규직을 수혈해 새로운 힘을 얻고 돌파구가 열리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도 비정규직 문제를 전략적 과제로 받아안고 어떤 고통이 수반되어도 가야 한다. 간부와 활동가들이 새로운 자각을 하고 출발하면 될 것이다.

울산공장 1만명 비정규직 노조가입 급격히 늘 것

   
 ▲ 박유기 현대자동차노조 위원장
 
박유기 지금 울산 승용3공장은 비정규직이 파업하고 있다. 대체인력이 투입되면 이걸 막으니까 정규직 입장에서 보면 일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귀찮고 괴롭다. 왜냐면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따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비정규직노조는 97.5%가 산별노조 전환에 찬성했다. 이제 금속노조라는 단일노조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이 가입하게 된 것이다.

물론 울산공장에 1만명이나 되는 비정규직을 어떤 조직체계에 담아야 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이렇게 1만명의 비정규직과 2만5천명의 정규직이 자본에 맞서 같이 싸우면 저들은 비정규직을 쓸 이유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비정규직 조직가입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지금은 소수가 가입돼 있으니까 타겟이 될까 두려운 것이다. 산별노조니까 들어와야 한다고 하면 거의 다가 들어올 것이다.

더 나아가 지역 내의 고용안정센터 같은 곳을 통해 어떻게 고용안정망을 구축할 거냐를 고민해야 한다. 건설플랜트도 금속노조로 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고민도 있고, 지역단위로 비정규직을 묶어 대안과 비전을 만들어내야 한다.

결정되면 반드시 한다는 정신을 지켜야

이광호 힘이 세진 거 사실이지만 연대의 어려움을 걱정하는 시각도 있다. 

김창한 금속노조는 지난 5년 동안 피눈물나게 싸웠다. 금속노조 간부들은 한번 결정된 방침은 기필코 사수하려고 했고, 조합원들도 동의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연대의 정신을 지켜올 수 있었다. 단일노조의 근본성격이 깨지는 순간 금속노조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해왔다.

지금 연맹 조직들이 들어와서 그런 것들이 사수될 수 있을까 우려된다. 간부나 활동가들이 결심하면 분위기도 바뀔 것이다. 우리가 열 번 파업했다면 앞으로는 한 번 파업해도 된다. 금속노조는 15만이 결정하면 하는 조직이라는 것을 우리 내부와 사용자들에게 심어주면 된다.

초기에 그걸 못 잡아주면 우리 내부에 불신이 생기고 상대방도 우리를 우습게 볼 것이다. 연맹에서 전환된 노조의 간부와 활동가들이 달라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산별노조의 의미가 없다. 조직의 규모가 커지면서 풀어나갈 능력이 많아졌는데 내부적으로 조직운영에 부대끼면 안된다.

임영일 현명하게 해야 할 것 같다. 임금과 고용형태가 다른 노동자가 한 울타리에 모이는데 그걸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는 섬세한 조직체계를 잘 짜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조합 조직은 조합원들의 요구를 사용자와 교섭으로 푸는 것인데 다양한 요구들을 체계적으로 배치해서 교섭구조도 유연하게 배치할 필요가 있다.

초기에 그 틀을 잘 잡아야 원심력보다는 구심력이 강화될 것이다. 거기에 산별노조 간부와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자세가 덧붙여져야 한다.

비정규직 탄압, 산별 지역총파업으로 대응해야

박유기 내부 갈등이나 지도집행력에 대한 우려가 많다. 하지만 현장 공동화 같은 문제는 오히려 기업별노조의 역사가 장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18년 동안 기업별노조가 해왔던 현장을 다지고 조직한 경험이 축적돼왔고 소중한 자산이 될 거다. 노동조합의 권한이 현장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시켜 대공장과 중소공장을 뛰어넘는 지도집행력을 만들어가야 한다.

금속노조의 전국총파업을 조직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지부나 지역의 총파업은 스스로 배치해서 중소사업장과 비정규직 사업장에 탄압이 벌어지면 금속노조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보여주면 된다.

이광호 조직력, 투쟁력 강화가 많이 얘기되는데,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정책역량의 강화가 아닌가 싶은데.

박유기 조직과 집행체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자노조에 90명의 상근이 있고 나머지가 130명이 있다면 중앙으로 얼마 보내고 지부로 얼마 보내느냐가 고민이다. 또 조직이 이 만큼 커지면 전문역량을 채용해야 할 것이다. 연구진들 중에 현장에서 전망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정책과 교섭, 교육과 선전에 대한 기능을 중앙이 통제하면 가능하다고 본다.

조합원을 위한 사업과 동시에 전체 노동자를 위한 사업 배치해야

   
 ▲ 임영일 경남대 교수
 
임영일 한국노총 금융노조는 내용상으로 보면 기업별노조의 연합체 성격을 크게 못 벗어났다. 조직체계를 놓고 보면 금속노조가 그나마 산별노조에 걸맞는 조직체계였다. 금속노조가 15만 조합원을 위한 사업을 배치해야 하고 동시에 금속산업 내에 조직대상이 되는 150만명을 위한 사업과 괴리되지 말아야 한다.

민주노총 내 어떤 산별노조는 산별노조 체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거의 모든 역량이 조합원에게만 집중되어 전체 노동자를 대표하지 못했다. 금속노조는 최저임금을 공장 내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에게까지 적용하는 등 조금 달랐다.

조직체계와 교섭구조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다. 전체 노동자를 대표하는 조직과 배치되지 않도록 세밀하게 배치되어야 한다. 따라서 정책역량의 강화가 매우 중요하고 매 시기마다 고리를 어떻게 잡아야 하느냐의 판단이 중요하다. 일단 재정과 인력의 확충은 시작이고 그 역량을 정확히 배치하고 가동하는 게 중요하다.

김창한 정책기획역량을 강화해 조직운영의 중장기적 과제, 내부 현장의 문제, 전체 계급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결국 재정과 인력의 문제인데 이번에 대공장에서 현장의 경험을 가진 동지들이 많이 올라오면 실질적 내용들을 많이 만들어낼 수 있을 거다. 재정이 확보되면 역량도 새롭게 확보해야 한다.

이광호 조합비는 얼마나 되나

김창한 현재 4만 금속노조의 조합비는 일반, 특별회계까지 하면 80억 정도 된다. 대공장이 들어오면 의무금과 현장에 내려주는 교부금 다 포함해 4∼500억 정도 된다.

산별노조가 질적인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주체가 되야

   
 ▲ 이광호 <레디앙> 편집국장
 
이광호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후퇴했다는 견해가 많다. 산별노조가 우리 사회 질적인 민주주의를 심화 발전시키는데 핵심 주체로 나서야 될 것 같다.

박유기 무엇이 진보적이고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고 이념인지 훨씬 더 퇴색되어 가는 느낌이다. 산별노조로 전환됐다 해서 어느 날 계급적으로 되지는 않겠지만 꿈을 꾸고 이상을 갖는다는 점에 있어서 가능성이 보인다.

산별노조는 기업 내의 종업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처지와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고, 전체 계급적 차원으로 사업을 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조직속성상 조합원이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 주체의 이해관계와 전체 계급의 이해관계를 조화시키면서 끌고 나가는 게 중요하다. 이 과정이 질적이고 경제적인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교육비 등 산별노조의 요구가 사회적 의제로

임영일 실질적 민주주의, 경제적 민주주의는 후퇴됐다. 87년 이후 민주주의가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산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계급적 불평등을 해결해준 경우는 없다. 양극화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정당 체제가 진보 보수로 간다 해도, 그 토대가 뭐냐가 중요하다. 산업화된 나라의 역사적 경험과 우리의 경험을 보면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그 토대가 될 수밖에 없다.

산별노조가 제기하는 핵심적인 의제 자체가 과거와는 달라질 것이다. 90년대 중반 이후로 설문조사 하면 직접임금에 대한 조합원들의 요구가 낮아지고 이미 사회경제적 요구인 교육비 주택주거비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 이런 요구는 정부정책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기업별노조로는 이걸 사회적 의제로 등장시키기 어렵지만 산별노조는 실질적인 힘으로 제기하기 때문에 핵심적인 사회적 의제가 될 것이다. 큰 산별노조가 요구하고 사용자들이 답할 수 없으면 지방정부든 중앙정부 수준에서든 안 다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확신을 가지고 기대해보자. 가능성이 열려가고 있다.

이광호 구체적인 사안으로 산업공동화 문제, 원하청 불공정거래의 문제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임영일 산업정책 자체가 교섭의제가 될 수밖에 없다. 자본의 일방적인 논리와 결정으로 해외 이전, 구조조정이 되는 상황에서, 현자노조처럼 이렇게 하지 마라 사전에 합의해라 이렇게는 했지만 산업정책 차원에서 다뤄지지 못했다. 산별 중앙교섭 차원에서 논의할 수밖에 없다. 자본의 일방 통행으로 진행되는 구조조정과 산업공동화를 막을 수 있다.

원청·하청회사 같이 교섭 나오면 불공정거래 숨기지 못해

   
 ▲ 7월 2일 오후 5시부터 서울 여의도 <레디앙> 사무실에서 '20년 숙원 산별노조전환 의미와 전망'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다.
 

박유기 산업의 의제와 관련해 지금까지 현장에서 쟁점이 되거나 만들어진 적도 없고 기업주 주도하에 일방적으로 해외 투자 같은 게 이뤄졌다. 이게 중앙교섭에서 다뤄질 것이고 이 문제로 파업을 할 수 있으면 큰 쟁점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자연스럽게 어떤 방법으로든 개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업의 의제와 관련해 지금까지 현장에서 쟁점이 되거나 만들어진 적도 없고 기업주 주도하에 일방적으로 해외 투자 같은 게 이뤄졌다. 이게 중앙교섭에서 다뤄질 것이고 이 문제로 파업을 할 수 있으면 큰 쟁점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자연스럽게 어떤 방법으로든 개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하청 문제는 교섭구조를 통일시키면 가능하다. 원청회사는 불공정거래가 없다고 우기고 하청은 공개적으로 얘기하지 못한다. 원청사와 부품사가 동시에 교섭에 나와 원하청 불공정 거래의 투명성을 요구하면 해결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산업공동화문제 사회적 의제가 되면 승리할 수 있어

김창한 금속노조가 파업 일주일 해도 신문에 안 나지만 현대자동차 노조는 하루만 하면 난다. 대공장 들어오면 새로운 교섭력을 가질 거다. 산업공동화는 개별자본과 협의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운영원리에 대한 협상이기 때문에 새롭게 만들어볼 수 있다. 사회적 쟁점으로만 만들어놓으면 승리할 수 있다고 본다. 산업공동화는 단순히 고용문제가 아니라 내수시장 문제, 모든 산업의 기반이 되는 제조업을 죽이느냐가 쟁점화 되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

이광호 현 정권은 제조업에 대한 패배주의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동북아 유통중심, 금융중심이라는 노선과 한미 FTA 조기 체결도 이런 맥락이다. 매우 논쟁적인 주제다. 산별노조는 제조업 중심 국가론으로 이에 맞설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산별시대에 적응을 위해 정부와 자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또 언론은 산별노조를 무슨 괴물이나 나타난 것처럼 얘기하고 있는데.

산별노조 전환에 따라 노사관계로드맵 대폭 수정돼야 

임영일 노사관계로드맵은 산별노조 전환을 감안하지 않고 있다. 정부가 내년 이후에 노사관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로드맵 내용을 대폭 수정 보완할 수밖에 없다. 단체교섭과 관련해서도 산별교섭을 요구할텐데 아무 내용이 없다.

단체협약 적용률은 특별한 법제도 개선이 없어도 산별전환으로 통로가 많이 열린다. 노조는 중앙교섭과 지역, 지부교섭이라는 중층적 교섭을 해야 한다. 조합원 15만명에만 적용할 협약으로 제한하자고 할 간부는 없다. 금속노조 최저임금이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에 다 적용하는 것으로 합의했는데 적용범위를 넓힌 것은 의미가 크다.

현행법으로 보면 일반적 구속력을 우리가 요구할 수 있다. 특히 지역단위로 할 수 있다. 더 적극적으로 하자면 프랑스처럼 노사간에 맺어진 협약이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적용하는 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최저수준을 정하고 높여가면서 협약의 효력을 확장하는 정당성이 사회적으로 분명히 있다.

언론의 산별 보도를 보면 왜곡한다는 차원보다는 아예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산별노조가 무지한 기자들 교육시켜야

   
 ▲ 6월 30일 현대자동차노조 대회의실에서 개표위원들이 산별노조 전환 조합원 찬반투표를 개표하고 있다.(사진 금속산업연맹)
 

이광호 산별노조가 나서면 지금처럼 무지하게 하진 못할 거다. 기자들도 공부를 해야 할 거다.

김창한 정부가 양극화 얘기를 하는데 이걸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합의한 것을 다 적용해라 이렇게 하면 영세한 곳은 실질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박유기 언론은 무식할 정도로 얘기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죽어 없어져야 하는데 덩치가 더 큰게 나온다니까더 난리를 치고 있다. 오히려 이런 언론의 보도를 본 회사 관리자들이 더 불안해하는 것 같다. 우리 조합원들은 언론이 우리를 욕하거나 비난하는 것에 대해 많은 부분 무시하고 있다. "가진 놈들 앞잡이니까 그런다"고 생각한다. 언론이 정확히 알고 쓰고 제대로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산별노조 잘하면 민주노동당 획기적으로 강화

이광호 지금 진보정당은 아장아장 걷고 있고, 산별노조는 이제 탄생이다. 산별노조의 출범이 민주노동당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나. 

박유기 산별노조 차원에서 정치방침이 확정되면 훨씬 많은 토론이 벌어지고 정치사업의 결합력을 높여낼 것이다. 산별노조 의제 자체가 기업 단위 내에서 맴돌던 의제들을 일상적으로 제기해 조합원들의 의식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게 된다.

산별사업과 정치사업이 뗄래야 뗄 수 없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산별교섭이든 협약이든 법·제도적 보완될 수밖에 없다. 산별노조 시대에 정치위원회는 일상적으로 강화될 수밖에 없다.

김창한 산별노조는 정치세력화를 더욱 추동하는 힘이 있어서 더 잘 될 것이다. 지부가 치밀하게 사업을 짜고 현장에 파고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잘만 하면 획기적으로 강화될 것이다.

임영일 스웨덴은 중요한 산업정책 노동정책은 산별노조의 정책단위에서 결정돼 당에 전달된다. 독일도 그렇다. 당은 그걸 반영한다. 당과 노조와의 관계가 그렇게 가야 한다. 그런 전제가 산별노조다. 산별노조가 강화되고 그 위에 당이 서는 것이다.

지역정치에서도 그렇고 중앙정치에서도 그렇다. 노조 덩치가 커졌으니까 당도 커져야지 그런 게 아니다. 커진 노조의 역량을 당이 어떻게 흡수할 것인가 하는 시각으로 봐야 한다. 

이광호 오늘 오랜 시간 토론해주셔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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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운동자료/시민의신문]민주화의 불꽃, 학교를 삼키다.

사회를 흔든 ‘학생인권’ 함성
[인권오름]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①
새로운 청소년인권운동의 발원지, 최우주씨 사건
 
2006/6/2
인권운동사랑방
청소년인권운동사 연구를 시작하며

체벌, 두발규제, 강제자율학습, 입시경쟁교육 등 각박한 현실 속에서 한국의 청소년들은 하고픈 말도 많을 터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간주되어 사회적 의사결정의 과정에 자신의 목소리를 온전히 반영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21세기 들어 청소년들의 다양한 ‘반항’이 사회의 주목을 받았던 것도 그러한 기존 시각에 충격을 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자신의 권리를 얻어내기 위해 싸워온 역사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 청소년인권운동의 역사를 발굴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청소년인권운동사 연구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들을 역사적인 맥락 속에 배치하고 알리기로 한다. 이미 잘 알려진 사건의 경우에도 체계적인 해석을 덧붙여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자 한다. 이는 현재 청소년인권운동의 문제점 중 하나로 지적되는 운동의 단절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이다. 앞으로 청소년인권운동에 발을 들이려는 사람, 또는 이미 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한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 첫 번째로 우리는 1995년 최우주 씨 헌법소원 시도 사건을 다루고자 한다. 이 사건이야말로 199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청소년인권운동의 출발점이자 발원지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글, 한국사회를 흔들다

“저의 바램은 아주 상식적인 것입니다. 방과후의 시간을, 방학 동안의 시간을 당연히 학생들 자신의 적성에 따라 활용할 수 있도록 학생 개개인에게 돌려달라는 것입니다.”

최우주 씨의 헌법소원 의사 표명 이후 하이텔에 개설된 토론방에서는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인권운동사랑방

최우주 씨의 헌법소원 의사 표명 이후 하이텔에 개설된 토론방에서는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1995년 7월 22일 하이텔 게시판에 올라온 이 한 편의 글은 이후 청소년 인권운동의 획을 긋는 사건으로 발전했다. 당시 강원도 춘천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최우주 씨는 학교의 강제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시행과 관련해 청와대, 교육부, 강원도교육청 등에 민원을 제출하며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본래 헌법소원을 내려다 절차상의 문제로 민원을 제기하게 된 최우주 씨는 ‘학교가 학생의 기본권을 짓밟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최 씨의 민원에 대해 교육청은 “보충, 자율학습의 강제성은 사실이 아니며 학생들의 기본권을 침해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면서 보충, 자율학습은 “희망학생, 희망교과에 한해 실시하게 되어 있다”는 공허한 답변만 내놓았다.

교육당국의 이런 무성의한 답변과는 대조적으로 언론과 하이텔에서의 반향은 적지 않았다. 같은 달 26일에는 강원도민일보, 27일에는 중앙일보 사회면에 관련 기사가 났고, 29일에는 전교조에서 ‘강제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이 사라져야 한다’는 내용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이윽고 8월 3일 하이텔에서는 [최우주 군의 학교 문제, 함께 따라가 봅시다]라는 제목의 토론방이 개설되어 학생 인권에 관한 논의를 확산시켰다. 당시 하이텔 토론방에서는 최우주 씨의 문제제기 방법에 대한 비판과 재반박에서부터 체벌, 보충수업, 분반, 입시교육, 심지어 선거연령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청소년문제와 교육구조 전반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최 씨 본인은 몇몇 교사로부터 자퇴나 전학을 가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한때 교장으로부터 ‘민원을 취하하고 학교에 순응하든지, 혼자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을 빠지든지, 아니면 전학/자퇴를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기도 했다.

개혁도 민주화도 말뿐, 변하지 않는 학교

최우주 씨로부터 촉발된 일련의 논쟁은 95년 당시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교육과정의 획일성과 경직성 개선, 다양성과 인간성 존중이라는 교육목표를 내건 6차교육과정이 도입되었고, ‘5.31 교육 대개혁’ 방안이 정부 차원에서 발표되었다. 5.31 교육 대개혁에 담긴 ‘경쟁력 향상, 교육의 질 제고’는 교육에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도입, 경쟁교육을 한층 심화시킬 가능성과 학교 구성원들의 부담을 불필요하게 증가시킬 위험을 안고 있어 교육계 내부에서 상당한 논란거리였다. 당시 하이텔 토론방에서도 말뿐인 교육 청사진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찾아볼 수 있다. “근데.. 교육개혁이라는 게 대단히 애매하고 좀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더군요. 현재 학교에는 이렇게 할 것이다라는 말만 있고 구체적인 말도 안 나오고 있으며 선생님들께서는 교육개혁 신경쓰지 말라고 하십니다.”

한편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국 사회는 표면적으로는 민주화의 열기가 곳곳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 입장에서 볼 때 학교는 여전히 비민주적이고 전근대적인 질서를 강고하게 갖추고 있었다. 하이텔 토론방에서도 변하지 않는 학교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우리들은 20세기에 살고 있고 이젠 21세기라는 또 다른 세계로 달려나갈 것입니다…그런데 우리들의 학교라는 곳은 아직도 19세기적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그 시대 방법으로 교육을 하고 학생을 이끌고 또 학생들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으로 일고 있는 민주화 흐름과 달리 학교의 반민주적 질서가 학생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을 촉발시킨 요인이 되었던 셈이다.

또한 ‘민주화’라는 말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가고 또 금방이라도 사회가 민주화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인권’이나 ‘기본권’, ‘헌법’ 등의 개념이 좀 더 빈번하게 사용된 점도 최우주 씨가 헌법소원을 생각하게 된 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온라인, 우리들의 오아시스

하이텔 토론방은 최우주 씨 사건이 하나의 ‘반짝’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다른 청소년들이 서로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결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회에서 발언의 통로를 갖지 못하고 있던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소통하고 표명할 수 있는 매체에 목말라 있었다. 당시 활성화되기 시작한 PC통신 공간은 그런 청소년들에게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다.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하기 위해 새로운 매체인 온라인 공간에 몰려들면서 하이텔이나 나우누리 등은 사회적인 광장의 역할을 했다. 학교에서 당한 모욕적인 일, 부당한 일을 이제는 온라인 공간에서 다수와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며 문제의식이나 해결방안에 대한 고민 등도 공유할 수 있었다. 최우주 씨가 적극적으로 헌법소원까지 생각하며 민원을 냈다는 자체도 충분히 화제가 될 만한 것이었으나, 그 행동이 다른 청소년들의 의식이나 의지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준 것은 분명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등장에 힘입은 바가 컸다.

학생, 인권을 말하다

최우주 씨의 글은 청소년에게도 기본권, 인권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헌법소원이라는 방법을 선택한 것부터 청소년, 중고등학생도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의 주체임을 전제로 한 것이다. 

최 씨의 글은 다시 읽어봐도 유의미한 탁월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강제 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은 학생 자신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으로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 이렇게 부당하게 감금된다는 점에서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다, 방학 동안 강제학습 때문에 교회수련회에 참석할 수 없으므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 등 최 씨는 이 글에서 헌법의 구체적 조항을 열거하며 자신의 권리를 조목조목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시 토론에 참여했던 김한울 씨는 “헌법소원은 단순한 해결방법이 아니라 학생도 ‘인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행위였다”고 말했다. 전영민 씨 역시 “‘학생도 사람이다'라는 문제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 같다”고 해석했다.


하이텔 토론, 학생인권단체 결성으로 이어져

최우주 씨 사건은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행동이 일어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김한울 씨는 “최우주 씨가 구체적인 행동을 보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면서 “토론방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는 점점 이런 학교 문제가 하루 이틀만의 문제냐, 토론만 해서 뭐가 달라지냐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번에도 흐지부지 끝나서는 되겠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전부는 아니었겠지만 몇몇이 이런 분위기에 공감했고, 토론 종료 후에 <학생인권회복회> 결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라고 회고한다. 하이텔 토론방에서 「학생인권회복회....모집 합니다...」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던 전영민 씨는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모일 수 있고, 뭔가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품는 힘이 됐다”고 말한다. 이처럼 최우주 씨 사건은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했고, 직접적으로는 <학생인권회복회>(이후 학생복지회로 바뀜)를 탄생시키는 결실을 맺게 된다.


중고등학생 운동, 인권운동으로 부활하다

지난 3월 열린 청소년인권활동가 워크숍. 이제 청소년들이 인권의 이름으로 억압에 맞서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인권운동사랑방

지난 3월 열린 청소년인권활동가 워크숍. 이제 청소년들이 인권의 이름으로 억압에 맞서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청소년인권운동사의 측면에서 최우주 씨 사건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의 참교육 운동과 함께 타오르다 쇠퇴해가던 중고등학생 운동을 ‘인권’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일으켰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최우주 씨의 헌법소원 사건을 계기로 하이텔과 나우누리 등에 <학생복지회>가 생겨나면서 인권의 측면에서 청소년문제·교육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형태의 운동이 성장해갔다. “학생인권”이 하나의 독립된 개념으로 널리 퍼져나간 것 또한 학생복지회 결성 이후부터였다. 이후의 문제제기나 운동에서 학생 인권이 전면에 나서게 된 이유도 최우주 씨의 헌법소원 시도가 끼친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전까지의 청소년운동은 비록 인권이슈를 다루고 있기는 했지만, 인권 개념을 전면으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우주 씨 사건 이후 인권개념을 중심에 둔 새로운 의미의 ‘청소년 인권운동’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다. 

인권오름 제 2 호 유윤종(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민주화의 불꽃, 학교를 삼키다
[인권오름] 기획-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②
87년 항쟁과 고등학생운동, 청소년인권운동의 뿌리
 
200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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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150여명의 고등학생이 명동성당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은 “노태우를 당선시킨 기성세대 각성하라!”, “군부독재 타도하여 민주교육 쟁취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19일부터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농성 시작일에 대한 기억의 혼재  
* 신문 등 공식 기록상으로 농성 시작일이 19일로 되어 있지만, 농성 참가자의 증언 중에는 16일 대통령 선거 당일부터 명동성당에 모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13대 대통령선거에서 군부독재 정권과 한 몸통이나 다름없었던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12월 16일)된 직후. 당시 농성에 참여했던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회’(서고련) 학생들은 13대 대통령선거는 부정선거인 만큼, 비록 민정당이 승리했더라도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겨울 칼바람 속에서도 87년 민주항쟁의 상징이었던 명동성당으로 찾아들었다.

민주화 세력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일어설 것이라는 이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5박 6일간의 투쟁은 쓸쓸히 막을 내렸고 농성 참가자들은 제각각 흩어졌다. 그러나 이 농성은 80년대 중반부터 전사회적으로 확산됐던 민주화운동의 흐름 속에서 매우 주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87년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던 민주화의 불꽃이 미완의 불꽃으로 사그라질 위기에 처했을 무렵, 기성세대의 각성을 촉구했던 고등학생들의 외침은 그만큼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이처럼 당시 고등학생들의 운동이 좀더 조직화된 방식으로 학교의 변화를 넘어 정치의 중심으로까지 파고들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민주화라는 대격변이 열어젖힌 ‘인식과 실천의 해방구’가 그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전두환 신군부정권 하에서 강요됐던 억압적 입시체제 아래서 바로 옆 친구들과의 치열한 경쟁만을 강요했던 학교에 대한 저항의지는 그렇게 민주화의 열기와 맞물리면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학내 민주화와 인간다움을 찾아

80년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삼청교육대 설치 등 이른바 ‘사회정화’ 조치를 통해 정권의 기반을 다진 전두환 군사정권의 폭압은 교육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7.30 교육개혁조치’ 이후로 강화된 입시경쟁, 학도호국단을 통한 군대식 통제도 고등학생들의 열망과 외침을 막지는 못했다. 특히 8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는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학내 민주화와 인간다움, 비리 척결에 대한 열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청구상업학교 교사, 학생들이 서울시교위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중등 우리교육 9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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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상업학교 교사, 학생들이 서울시교위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중등 우리교육 90년 11월호)

85년 3월 의정부시 복지중고에서는 잡부금 징수 금지, 학교장 퇴진 등을 요구하며 수업거부와 인근 야산에서의 농성이 시작됐고, 같은 해 목포여상에서는 여고생들이 학교측의 교사 탄압에 항거해 수업 거부, 등교 거부, 시험거부 등으로 맞섰다. 85년 ‘민중교육지’에 대한 정권의 대대적 탄압 이후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타오른 교육민주화 운동은 고등학생운동의 성장에도 불을 댕겼다. 이듬해인 86년 5월에는 원주고를 시작으로 원주시 몇 개 고등학교에서 자율학습을 거부하고 학생들이 집단 귀가하는 일이 잇따라 일어났고, 7월 서울의 중대부고에서는 2학년 학생 5백여 명이 두발자유화, 자율학습 폐지, 강제 보충수업 금지 등의 요구를 내걸고 운동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비록 이들의 투쟁이 연속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했지만, 엄혹한 군사정권 하에서도 민주화와 인간다움에 대한 열망은 그렇게 전국 곳곳에서 학교의 빙벽을 허물어뜨리기 시작했다.

반장에서 대통령까지 직선제로

87년에 접어들면서부터 학생들의 요구는 점차 학도호국단의 자리를 대신한 학생회의 직선제 쟁취 쪽에 무게를 두기 시작한다. 학생 자신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점차 공감대를 넓혀나갔고, 대통령 직선제 쟁취의 경험은 학생회 직선제 쟁취 운동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87년 3월 진주 대아고에서, 4월에는 서초고에서 직선제 학생회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6월항쟁 이후에는 그 움직임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경기도 파주여종고, 광주 대동고, 서울 석관고, 구로고 등 전국 학교에서 폭발적인 시위가 이루어졌는데, 민주적 학생회 쟁취라는 요구를 좀더 분명히 내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백일이 넘게 장기적인 투쟁을 벌였던 파주여종고, 2천여명이 수업거부에 들어간 이래 명동 가두시위와 시교위 농성 등으로 확대됐던 정화여상 등의 사례는 당시 고등학생 운동의 역량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는 좋은 보기이다. 그 결과 88년 말 서울 1백 여교, 전국 400 여교에서 직선제를 얻어낸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 출처: 중등 우리교육 9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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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중등 우리교육 90년 11월호.

학생회 직선제 요구는 고등학교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88년 서울 석관중학교에서는 ‘민주 돌곶이회’라는 소모임이 결성되어 간선제 학생회장 당선을 한동안 저지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또 교외에서 진행된 4.19 기념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모임을 이끌었던 권혜진 씨(88년 당시 중3)에 따르면 처음에 8명으로 시작했던 모임이 2학기에 들어서면서 60명으로까지 확대됐다고 한다. 혜진 씨는 “87년 6월 항쟁에서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자는 사회적 외침이 중학생이었던 당시에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던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시기였다.”라고 회상한다. 그는 “옆 학교인 석관고등학교에서 학생회장 직선제운동을 했기 때문에 ‘종이비행기 날리기’, ‘아침이슬 부르기’ 같은 시위도 볼 수 있었고, ‘우리도 한번 해보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고, 후배들도 만나 직선제하자고 설득하고 다녔다.”라고 설명한다.

민주항쟁의 경험, 조직화에 불 댕겨

이러한 학내 운동에 기반이 된 것은 각종 소모임들이었다. 87년의 사회적 격랑을 전후하여 사회모순과 교육모순을 함께 고민했던 학생들은 학교별, 지역별로 다양한 비밀 소모임을 꾸리게 된다. 용산고의 ‘용민민투’, 석관고의 ‘석민연’, 대원고의 ‘목마름’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소모임에서는 학교문제를 고민하면서 교내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벌이는 한편, 사회 문제에 대한 토론과 학습도 이뤄졌다. 고등학생 소모임은 87년 민주항쟁의 영향을 받은 고등학생들의 자발적 참여와 함께 고등학생운동을 고민해온 기존 활동가들의 결합으로 더욱 확산되었다. 당시 KSCM(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총연맹) 활동가였던 강주성 씨는 “그때는 지역별로, 학교별로 소모임이 많았다. KSCM이나 푸른나무 이야기모임 같은 공개단체에서 활동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언더에서 소모임으로 활동하던 학생들도 많았는데, 그런 모임을 지원하는 성인활동가도 있었다”라고 말한다.

당시 개별 학교 차원을 넘어 고등학생들이 참여했던 대표적 공개단체는 흥사단과 KSCM이 있다. 흥사단 서울지부가 개최한 87년 11월 학생의 날 행사에는 1천5백여 명의 중고생이 참석하여 공식적인 대중집회의 물꼬를 텄다. 흥사단은 그 후 고등학생아카데미(고아)를 통해 고등학생들의 사회참여 활동을 지원했고, 특히 KSCM과 함께 4.19 기념행사나 학생의날 행사를 대규모로 열어 당시 학생들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KSCM은 88년 2월 ‘자율적 학생회를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는데, 이 공청회에만 4~5백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이들 공개단체들은 ‘학생회비 운영’, ‘소모임 운영’에 대한 공청회를 계속 이어가면서 고등학생 운동의 의제를 던지는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푸른나무 출판사에서 만든 <푸른나무> 무크지를 통해 모인 ‘푸른나무 이야기모임’도 있다. <푸른나무>는 당시 진보적 교사와 학생들에게 알려진 청소년 잡지로 학생회 직선제와 자율적 학생회 운영에 대한 토론, 교과서를 비판적으로 읽자는 주장 등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내용의 공개단체 활동은 9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푸른나무 이야기 모임과 KSCM을 지도했던 강주성 씨는 87년을 기준으로 전후 고등학생 운동의 차이를 ‘대중성’에서 찾는다. 주성 씨는 “고등학생 운동을 했던 사람들 중에도 학생회 직선제 구호나 공개활동에 대해 ‘정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중운동이 되려면 대중들의 요구와 정서에 맞게 내용과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야 한다. 당시 고등학생 운동으로 활발히 전개된 학생회 직선제 운동은 대중성에 기초한 활동이었다.”라고 평가했다. 한편, 고등학교에서 흥사단 활동을 한 권혜진 씨는 ‘조직화’에서 특징을 찾았다. “87년 이전은 자발적 운동의 태동기라고 생각된다. 그러던 것이 87년 6월 이후 조직적 흐름을 가지게 됐다.” 87년 이전의 고등학생운동이 산발적이고 고립적으로 이뤄졌다면, 87년 이후의 도드라진 점은 바로 대중성에 바탕을 둔 조직화가 이루어진 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 인권운동의 맹아이자 뿌리

당시 고등학생 운동은 민주화의 열기가 들불처럼 번져나갈 때 고등학생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독재정부에 대한 저항을 이어나갔다는 데 의의가 있다. 나아가 모순으로 얼룩진 사회에 파열음을 내며 조금씩 열려지고 있던 변혁의 공간에서 고등학생들은 자신들만의 운동 의제도 찾아나갔다. 민주화와 자신들의 삶 사이에 가교를 놓으면서 독자적인 운동의 세력화를 꿈꿨던 것. ‘학생자치권 보장’, ‘두발자유화’, ‘보충.자율학습 철폐’ 등의 구호는 학교의 민주화, 학생 삶의 민주화를 요구했던 것이었다. 당시 터져 나온 구호들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학생 청소년 인권운동에서 핵심적인 과제로 남아 있는 것으로서, 당시 고등학생운동이 지금의 청소년인권운동의 맹아이자 뿌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급작스런 성장만큼 한계도 존재했다. 개별 학교를 잇는 조직적 연계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적 분위기에 발맞추어 상대적으로 운동의 경험이 적은 고등학생들에게도 너무 많은 짐을 지우면서 부담을 주었던 점도 힘겨움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용산고에서 ‘용민민투’ 활동을 한 서준섭 씨는 고등학생 시절을 회상하면서 현재 인권운동을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전한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그 고등학생 운동이 제 삶의 뿌리에요. 정신적으로 성장했던 고향이라고 생각해요. 그 어린 나이에 사회랑 부딪치면서 고생도 많이 했고 시행착오도 겪었고. 지금 친구들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했던 친구들도 지금 와서 약간 회한 같은 게 있으니…. 그 나이에 움직이고 뭔가를 시작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고, 그렇게 하려면 강해야죠. 무척 강해야지 그것이 바탕이 되어 인생에 밑거름이 되고 계속 발전할 수 있고…. 청소년들이 많이 강해졌으면 좋겠어요.”

인권오름 제 6 호  전누리(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

들불처럼 번진 청소년들의 참교육 운동
[인권오름] 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③
“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 부수고”
 
2006/6/29
인권운동사랑방
꺼지지 않은 불씨

1987년 6월 항쟁의 불꽃은 한 번 타오르고 끝날 것이 아니었다. ‘고등학생운동’(*)도 그 영향을 받은 곳 중 하나였다. 청소년들은 1987년을 계기로 더욱 본격적인 자주적 학생회 운동, 교육 정상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고운의 불길은 거기에서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학생회 직선제 운동을 비롯한 1987년 직후의 운동은, 오히려 1989년부터 시작된 ‘참교육 운동’의 예고편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1980년대 학생들의 생활은 너무나 비참했다. 전두환 정권은 본고사 폐지와 내신성적 반영, 대학입학인원 확대, 전일수업제 대학 운영, 과외금지 등의 내용을 담은 교육정책을 발표했다. 내신성적 반영은 고등학생들을 더욱 성적경쟁 속으로 내몰리게 만들었다. 과외금지 이후 과외가 음성화되자 정부는 학교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전면 허용하였고, 그 결과 학생들은 강제적인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그 당시의 인사는 그런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실업계 고등학생들도 전두환 정권의 정책에 따라 뒷전으로 내몰리게 되면서 열악한 상황에 처했다. 입시경쟁 강화와 학교에서 밤 12시가 넘어서야 돌아오는 일상의 반복, 억압적인 학교 상황, 열악한 교육 등이 청소년들에게 미친 영향은, 1980년대의 자살학생 수 증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인권오름

자살한 청소년들의 유서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자살했던 학생들이 남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써있었다. “친구들은 감정도 없는 사람 같고 다 똑같아 보입니다. 전혀 개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 친구들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어른들이 밉습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입니까? 저희는 쓸모없는 2차 방정식 값을 구하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을 잃었습니다. 공부 못하는 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죽어야 합니까?” 특히 1986년 서울사대부속여중 3학년 학생이 남긴 유서에 쓰인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구절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켜 같은 제목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견딜 수 없는 현실은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사들까지 들고 일어나게 만들었다.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참교육”을 내세우며 창립식을 가졌다. “참교육”은 일그러진 교육 현실에 대한 저항의 기치였다. 전교조 창립 초기부터 활동했던 교사 김융희 씨는 당시 참교육 운동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애들을 독재체제에 적합한 인물로, 말단 병사나 노예처럼 압박하는…. 그런 현실에 대한 안티감이 (참교육 운동은) 굉장히 강했다. …학교는 애들 성장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군대교육이나 일부 교장의 사리사욕이나 기업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깐. 그런 것들이 아팠다. 완전 비교육자들이었고 비교육적인 분위기였다. 이건 교육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억압적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기에 전교조의 “참교육” 구호는 괴로운 학교생활을 경험하고 있던 청소년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1989년에 고등학생이었던 구정인 씨(미림여고 소모임 활동)는 “입시경쟁 때문에 학생들이 3일에 한 번씩 죽는 상황에서 교사들도 전교조를 통해 참교육이라는 구호를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죽이는 교육이 아니라 살리는 교육…. 교사들의 양심선언이었다. 단순히 노조운동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살리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콩나물을 키우는 교육이 아니라 콩나무를 키우는 교육이어야 한다’는 구호가 너무나 호소력 있게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라고 회상했다.

그랬기에 1989년에 시작된 ‘참교육 운동’은 교사만의, 전교조만의 운동이 아니었다. 참교육 운동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은 전교조였고 그것을 주도한 것도 전교조였지만, 참교육 운동의 주체는 비인간적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모든 교육주체들이었다. 전교조의 생각과 학생들의 생각이 완전히 일치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방향과 대의는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청소년들은 참교육 운동을 지원하는 역할뿐 아니라 스스로 참교육 운동을 만들어가는 역할을 했다.

“선생님을 지키자!”에 담긴 뜻

판화과 김준권의 1990년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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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과 김준권의 1990년도 작품 "얘들아! 얘들아!"

정부는 전교조에 대한 대대적 탄압에 나서 전교조에 가입한 교사에 대한 해임.파면.면직과 함께 사법처리를 강행했으며 그 결과 1989년 9월까지 1700명이 넘는 교사가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여 전교조 교사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불만이 누적되어 있던 차에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던 ‘좋은 선생님들’에게 핍박이 가해지자 인간적인 분노까지 더해져 학생들의 운동은 대중적으로 번져갔다. 운동 속에서 학생들이 내걸었던 “선생님을 지키자!”라는 구호는 그런 분노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모두 담겨 있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히 전교조 교사를 지지하고 지킨다는 것만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 참교육의 기치에 대한 동의였고, 강제적 보충수업.자율학습, 입시경쟁 등으로 얼룩진 교육에 대한 반대였다.

학생들의 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리본달기, ‘밤샘공부’(하교 거부), 수업시간에 전체 학생이 뒤로 돌아앉기에서부터 점거농성, 단식농성, 시위, 심지어 투신까지…. 학생들은 개별 학교 단위에서 전교조 교사들을 지키고 참교육을 실현시키기 위한 저항에 발 벗고 나섰다. 광주 광덕고와 문성고 학생 3천여 명은 이사장실 점거 농성으로, 광주 동아여중고생 4천여 명과 송원학원의 중고생 8천여 명은 운동장 농성으로 징계위원회를 무산시켰다. 서울 구로고등학교의 류호철 씨 등 2명은 “직위해제 철회” “참교육 실현”을 요구하는 시위 도중 3층에서 투신하여 참교육에 대한 절절한 열망을 보여줬다. 인천 세일고의 경우, 해직된 선생님 수업에 대리강사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 수업을 거부한 채 한 달 간 경찰과 대치하기도 했다. 전교조 학생사업국에 보고된 것만 하더라도 1989년 한 해 동안 전교조를 지지하며 투쟁에 나선 전국 학생들의 수가 250여개 학교, 47만 명을 넘어섰다.

단위 학교를 넘어선 싸움

싸움은 개별 학교 단위에서만 이루어지진 않았다. 6월 17일 연세대학교 광장에서 열린 ‘참민주교육을 위한 고등학생결의대회’를 비롯하여, ‘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광고협), ‘부산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부고협), ‘마산.창원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마창고협), 그리고 ‘나주지역고등학생연합’, ‘목포지역고등학생연합’ 등의 결성은 학교를 넘어서 지역별로 이루어진 고등학생들의 연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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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광고협은 최초로 결성된 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로서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광고협은 20여개 학교에서 중고생 2만여 명이 참여한 연합집회를 조직하고, 같은 날 5천여 명이 참가한 전남대 시위 등을 실행했다. 이후에도 광고협은 광주 시내 전학교 학생들의 통일된 행동으로 해직교사들의 출근 투쟁을 지원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펼쳤다. 자주적 학생회 투쟁의 결실로 생긴 학생회연합회가 발전하여 이루어진 부고협도 탄압을 뚫고 부산대에서 발대식을 치르고 전교조를 지지하는 투쟁에 나섰다. 마창고협을 비롯하여 다른 지역의 연합체들도 정부와 학교의 탄압 속에 힘겹게 참교육 운동을 해나갔다.

정부와 학교의 탄압으로 많은 학생들이 징계를 당함에 따라 광고협 이형준, 부고협 의장 황순주(둘은 11월22일 시작), 남서울상고 학생회장 김설준(11월23일 동참), 마창고협 부의장 전경국(11월26일 동참) 등 4명의 학생들은 평민당 중앙당사에서 구속학생 석방과 학생 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단식 투쟁을 벌여 각 지역 고협들의 연대를 실천했다. 학생들은 4인의 단식 농성을 지지하며 동조 행동에 나섰다. 광고협 집행부 26명이 전남대에서 4일간 동조단식을 했고, 전남대 5.18 광장에서 6백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지지집회를 가졌다. 부고협 70여 명은 부산대에서 이틀간 단식농성을 벌였고, 서울 평민당사를 격려 방문한 학생 2백여 명도 규탄집회를 가졌다. 전교조도 호응하여 단식투쟁 지지와 전교조 탄압 분쇄를 위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고등학생 대표자 4인은 12월 2일 ‘학생탄압 분쇄 및 참교육 실현을 위한 교사, 학생, 학부모 결의대회’를 가진 후 단식농성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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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학생들은 학교나 정부와 싸우는 과정에서 목숨을 버리기도 했다. 1991년 전남 보성고의 김철수 씨는 노태우 퇴진과 참교육 실현을 외치며 분신했다. 이런 식으로 김철수 씨를 비롯하여 심광보 씨(1990년 분신), 김수경 씨(1990년 투신) 등이 전교조와 학생들에게 가해진 탄압에 죽음으로 항거했다. 교사 김융희 씨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당시 투쟁에서 목숨을 던진 학생들”이라며, 학생들이 죽은 소식을 접했을 때 정말 분노가 들끓었다고 회상했다.

독자적인 길을 닦은 청소년들

이처럼 참교육 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전교조 교사들의 양심적인 외침과 요구가 청소년들의 요구와 맞아 떨어졌기에 가능했다. 비인간적 교육 속에서 최소한의 권리조차 누릴 수 없었던 청소년들은 그런 현실을 바꾸고자 끊임없이 싸워왔으며, 그 싸움은 전교조 창립이라는 계기로 더욱 촉발되었다. 전교조 교사와 학생들의 유대 속에 운동은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갈 수 있었고, 학생들은 전교조 교사가 우리 이야기를 대신해주고 우리 대신 희생당한다는 생각에 참교육 운동에 한층 더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신동아> 89년 9월호 기사. '충격보고'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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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89년 9월호 기사. '충격보고'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한편으로 참교육 운동 때 보여준 학생들의 동원력과 조직력은 그동안 축적되어 왔던 운동의 조직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학생들의 저항의 구심점은 1987년 6월 항쟁의 흐름 속에 조직되어 온 소모임, 동아리, 학생회 등이었다. 학교 안에 존재하던 동아리나 소모임 등에서 학생들은 사회비판적 의식을 키워가고 있었고, 또 그런 조직들의 자주적 학생회 투쟁으로 세워진 직선제 학생회에 적극적이고 의식 있는 학생들이 진출하면서 학생회 조직은 운동에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흥사단 아카데미나 KSCM(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총연맹), YMCA 등의 공개단체들도 조직적인 운동에 한몫했다.

구정인 씨는 “고1부터 탈춤반 활동을 하고 봉천놀이마당에서 청소년패였던 ‘바발패’ 패장이 되었는데, 학생의날 준비위원회 회의를 나가보니 KSCM, 흥사단, 바투 등 단체와 개별학교 소모임들이 많이 와 있었다. 이때 행사를 하고 처음 큰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라며 소모임들이 참교육 운동에서 한 역할을 증언했다. 구정인 씨는 미림여고에 재학 중이던 1988년 12월에 학내 소모임을 꾸리고 학생회 직선제 투쟁과 학생회 선거운동을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펼치다가 참교육 운동이 시작되자 그 흐름을 이어갔다. “우리 학교 교사 한 명이 전교조였는데, 이분이 징계위에 회부가 된 상태였다. …전교조가 계속 출근투쟁을 하니까 우리 소모임에서 유인물을 뿌리는 상황이 됐다.”라는 것이다. 미림여고 학생들은 이후 을지로에 있던 재단사무실 앞에서 징계위원회 개최 저지 시위를 열었는데, 그 과정에서도 소모임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부고협 1기 의장을 맡았고 단식투쟁을 하다 제적당했던 황순주 씨(1987~1989년 용인고 학생회 활동)는 1988년에 학내 시위를 벌여 직선제 학생회를 쟁취했다. 황순주 씨는 용인고 최초의 직선제 학생회장이 되었고, 이후 학생회장들의 모임을 만들어 서로 고민을 공유하였다. 그러다가 전교조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감에 따라, 1989년 8월 이 학생회장 모임은 부고협으로 전환된다. 황순주 씨는 자율학습 반대 등을 명확하게 제시하며 출마하여 1기 의장으로 당선되었다. 이는 전교조 사수 투쟁 이전부터 청소년들이 자신들만의 주체적인 활동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황순주 씨는 참교육 운동과 그 이전부터 있어온 고등학생운동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산지역 고등학생들도 이런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우리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학생을 대표하든 학생회를 대표하든 연합체 형식의 조직을 준비해서…. 당시 정권에서 전교조 교사가 학생들을 선동했다고 선전했는데, 선생님을 뺏기는 상황이었고 교육의 문제가 사회문제로 촉발되고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생들의 문제도 같이 제기하자면서 나갔던 것이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각각 주체별로 준비를 해왔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전교조 투쟁만을 위해 만든 조직이 아니었다. 교육 주체로 자주적으로 나선 것이었다. 전교조 교사를 보호하는 것은 일부분이었다.”

학생들이 전교조 지지에 그치지 않고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운동을 펼치려 했음은 여러 문건에서도 확인된다. 광고협은 “우리는 단순히 교원노조 지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교육의 주체인 학생으로서 당연히 주장해야 할 권리인 참교육과 민주교육을 목청껏 부르짖으며 학내의 비민주적 요소들을 척결하고 학내 민주화를 쟁취하려는 발전적인 싸움으로 한 차원 높은 싸움을 온몸으로 전개해야 될 것이다.”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1989년 7월 20일 발표했다. 마창고협도 같은해 9월 30일 발족선언문에서 “우리 학우들의 단결된 힘으로 우리를 입시 전쟁과 철저한 이기주의적 인간으로 내몰고 있는 사회 풍토를 개선하고 민주 시민의 예비단계로서 모든 학생회 활동들을 자율적으로 민주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 학우들의 자율적 능력을 무시하고 단지 의무와 순종적 인간만을 요구하는 관료주의적 교육자와 재단에게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여야 하며 또한 이것은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라며 그 창립목적을 밝히고 있다.

탄압받는 고등학생운동

참교육 운동을 거치면서 고등학생운동은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이전까지 정부의 탄압은 주로 기존의 대학생운동 세력 등이 중고등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참교육 운동에서 중고등학생들이 격렬하고 대중적인 힘을 보여주자 직접 학생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그 형태가 바뀌었다.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이후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을 조성하였고, 이는 사회 전반적으로 운동세력들이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 와중에 정부는 중고등학생들을 회유하는 한편 집중적인 탄압을 가했다. 정부는 학생회나 소모임 등에 대한 전면 압박에 들어갔다. 체벌과 징계를 통해 주동자들을 처단하는 한편 학생회의 독립적 예산권을 뺏는 등 학생들이 투쟁을 통해 얻어낸 학생회의 권한을 상당부분 위축시켰다. 참교육 운동에 역량을 집중한 조직들은 그러한 탄압 속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교사 김융희 씨는 당시 정부의 탄압을 이렇게 전했다. “애들 요구를 수용해서 변화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주동자에 대해서는 엄격히 탄압했다. 교사와 경찰은 물론 교장까지 나선 전방위 압박에다 굉장히 엄한 체벌과 징계도 있었다. 학생회도 제도적으로 축소시켰다. 그때는 학생회비를 따로 걷어서 학생 예산권이 독립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없어졌다. 대대적으로, 그때부터 억눌린 게 지금까지도 온 것이다. 별로 회복이 안 되었다.”

청소년들의 참교육 운동이 보여준 것

정부는 참교육 운동을 탄압하면서 “전교조가 학생을 선동한다.” “전교조가 학생을 이용해 먹는다.”와 같은 비난으로 청소년들의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투쟁을 폄하했다. 실제로 학생들이 스스로 거리로 나서는 것을 보수적인 성인들은 상당히 불안하게 느꼈기 때문에 이런 선전은 먹혀들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주체로 선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성인 집단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안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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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청소년들의 참교육 운동은 전교조에 완전히 종속된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전교조 사수와 학생자치권 운동을 동시에 전개하기도 했으며 투쟁 과정에서 자율학습 폐지 등 학생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하기도 했다. 비록 “참교육”에 대한 공감이 학생들의 대중적 투쟁을 끌어내긴 했지만 당시 학생들의 운동을 주도했던 청소년들은 학생들의 요구를 전교조 교사들을 통해 대변되기만을 바라진 않았던 것이다.

청소년들이 전개한 참교육 운동에 대해 구정인 씨는 “4.19, 5.18에 이어 고등학생이 사회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것을 현실화한 것이었다. …자기 현실을 바꾸는 것뿐 아니라 사회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90년대 중반까지도 그런 생각이 확고했다.”라고 말했다. 청소년들 스스로가 사회변혁의 주체임을 참교육의 불꽃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의 고등학생운동은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과 사회변혁.민주화의 관점이 따로 분리되지 않고 혼재해 있었던 점이 특징이다.

하지만 이오성 씨(1989년~1991년 대원고에서 활동)에 따르면, 그 당시에도 교육이나 학생들의 삶, 권리에 집중한 쪽과 정치적 이슈에 집중한 쪽의 내부적인 의견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앞서 인용된 마창고협 발족 선언문 등 당시 각종 선언문이나 성명서의 표현들도 청소년들의 권리 의식을 보여주며, KSCM이 발표한 결의문에는 “학생들에 대한 극심한 인권 탄압이 수시로 행해지고 있는 이러한 교육현실은 실로 분노할 일”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등 “인권”의 언어가 조금이나마 엿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들은 ‘민주화’라는 흐름 속에서 청소년들의 권리 찾기가 독립적인 운동으로 나아갈 기미를 보이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1980년대 고등학생운동의 흐름은 비록 대대적인 탄압과 사회운동 전반의 침체로 인해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지만, 그 당시부터 청소년들의 권리의식 성장과 청소년인권운동의 조짐은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 1980년대~1990년대 초반에는 “청소년운동”이란 말이 아닌 “고등학생운동”이란 표현을 주로 썼기에 그 현장성을 존중하여 이렇게 표기했다. 대학생들의 운동과 구별되는 의미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중학생들도 참여하긴 했으나 다수가 고등학생이었다는 점에서 고등학생운동이란 용어를 쓴 것으로 보인다. “중고등학생운동”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 참교육 운동 이전의 학생들의 저항에 관해서는 이전 기사 “민주화의 불꽃, 학교를 삼키다”를 참고하기 바란다.
 

인권오름 제10호 유윤종(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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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중기/매노]위기 앞에서 희망 살리기 - 산별노조 전환과 등록금후불제

<대안연대칼럼>
위기 앞에서 희망 살리기
 
- 산별노조 전환과 등록금후불제
 
뜨거운 여름의 한 가운데, 이 유월의 마지막 주는 역사에 기록되는 희망의 한 주가 될 것이다. 온 나라를 마비시킨 월드컵 열풍이 잦아들면서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현실로 돌아왔다. 세계 4강, 16강의 신화가 깨지자 극심한 빈부격차와 양극화, 저열한 사회복지와 심각한 고용불안, 마구잡이로 탄압받는 노동인권, 냉전수구세력이 압도하는 제도정치 등 모든 측면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40여 국가 중 꼴찌인 우리의 막막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 노중기 대안연대 운영위원, 한신대 교수
그중에서도 하이닉스-매그나칩과 코오롱, 레이크사이드CC, 세종병원, KTX 여승무원, 대구경북건설노조와 같은 장기투쟁사업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규는 우리 노동자의 처절한 현실을 웅변하고 있다. 용역깡패에게 두들겨 맞아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져도, 15만볼트 고압송전탑에서, 타워크레인에서 목숨 걸고 외쳐도, 그리고 눈비 맞으며 삼보일배로 엎드려 호소해도 부당해고 노동기본권 박탈의 현실은 요지부동이기 때문이다. 이 일들이 정녕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의 일인가?

비정규직 노동법 개악은 비정규직 관련 법안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것은 정규직을 마음껏 비정규직으로 대체하기 위한 전략적 목표 위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또 ‘노사관계 선진화방안’(로드맵)은 어떤가? 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제약하기 위한 전면적 공세 외에 그 어떤 ‘선진화’가 있는가 말이다. ‘신뢰와 존중, 참여와 협력을 통한 합리적 선진적 노사관계’라는 달콤한 말은 그 본질에 있어 노사협력주의, 어용노조주의로 민주노조를 압살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에 저항하면 ‘법과 원칙’, 곧 무자비한 탄압이 준비되어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지금 ‘희망’을 말할 수 있는가?

금주에 진행되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을 보면서 필자는 그래도 희망을 말하려고 한다. 그 하나는 교수노조가 주도하고 있는 '돈 걱정 없는 대학 만들기 1000+1000Km 대장정‘이며, 다른 하나는 금속노동자들의 산별전환 동시투표이다.

연대를 '선행실천' 하기 위한 교수들의 대장정

먼저 교수노조의 국토 대장정은 부산, 순천, 태백에서 출발하여 서울까지 2,000Km를 교수들이 걷는 프로그램이다. 작년에 1,000Km를 걸어 사립학교법을 개정한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는 지역 순회프로그램을 포함하여 거리를 배로 늘였다. 뜨거운 한여름 햇살과 장마철 장대비를 뚫고 전국에서 모인 교수들이 고행을 자처한 것에는 나름의 절박함이 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대학의 등록금은 매년 10% 이상 인상되어 이제 연 1,000만원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등록금이 없어 휴학하는 학생들이 급증하고 학기 중에는 아르바이트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 것이 지금 대학의 현실이다. 또 최근에는 의학, 법학 전문대학원제도의 도입으로 수천만원의 등록금이 없으면 의사 변호사가 될 수 있는 기회조차 뺏으려 하고 있다. 결국 노동자 서민의 아이들은 대학에서 공부할 기회조차 박탈당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매년 대학은 학생들의 등록금투쟁(이른바 등투)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점거투쟁으로 행정기능이 마비되고 학생들과 선생들이 서로 멱살잡이를 하는 모순이 되풀이되었다. 투쟁은 각 학교별로 매년 되풀이되었으나 등록금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었다. 예컨대 올해 등록금 인상이 동결되면 그 다음해에는 두 배가 올랐기 때문이었다. 또 한 학교의 대폭 인상은 다른 학교의 대폭 인상을 불러오기 때문이었다.

대장정을 통해서 교수노조가 제기한 ‘등록금 후불제’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한 노력이었다. 또 교육을 사회가 책임지는 무상교육을 현실화하는 특단의 방안이다.(자세한 내용은 교수노조 홈페이지 http://www.kpu.or.kr 참고)

교수노조의 등록금 후불제에는 희망이 숨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연대정신이다. 사실 교수들은 학생과 학부모가 납입하는 고액의 등록금에 생계를 의존하는 사람들이다. 스스로 등록금 문제를 제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교수들이 고행을 자처한 것은 더이상 교육모순을 학부모에게 전가할 수 없으며 학생들의 희생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개별 학교 간의 시장 경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신자유주의 교육체제의 모순을 더이상은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순은 결국 대학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교수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므로 후불제에는 교수와 학생, 학부모가, 그리고 전국의 대학들이 담을 허물고 문제를 함께 풀어야 한다는 연대의식이 담겨 있다. 

금속노동자들의 산별노조 전환의 결단은 교수노동자들의 등록금 후불제 투쟁과 결코 다르지 않다. 양자 모두에는 바로 이웃의 노동자, 같이 일하는 동료,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대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난 몇해 동안 모두가 노동운동의 위기, 민주노조의 위기를 설파해 왔다. 특히 국가와 자본, 그리고 수많은 언론, 학자들이 위기는 대사업장(특히 금속산업) 노동자들의 전투적인 파업투쟁과 실리주의(이기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대화하고 적정한 선에서 타협하여 국가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처방도 제시되었다.

또 민주노조에 대해서는 부패집단으로, 때로는 반민주적 권력집단으로, 노동귀족으로 왜곡하고 선동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비정규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며 차별대우 하고 있다는 비난은 결정타였다. 정도의 차이를 무시한다면 여기에는 수구 보수 여야정당, 조중동문과 친정부 개혁신문, 보수와 개혁 시민운동을 망라하는 거의 모든 사회세력들이 동참하였다. 지금도 계속되는 이런 이데올로기 공세로 말미암아 민주노조와 노동자들은 이제 ‘공공의 적’으로 내몰리고 있다.

1987년 이후 우리 민주노조운동의 골간을 형성하고 있는 민주노조들, 곧 현대차노조, 기아차노조, 대우차노조, 쌍용차노조, 대우조선노조, 한국델파이노조, 로템노조, 현대미포조선노조, 현대제철노조, 삼화금속노조, 비엔지스틸노조, 현대하이스코노조, 비엔테크노조, 일진소재산업노조, 수산중공업노조, 항공우주노조, 캐리어노조와 그 10만 조합원들은 이제 결단을 앞에 두고 있다. 그리고 이 땅의 1,500만 노동자들이 선진 노동자들의 결단을 지켜보고 있다.

개별 학교별로 진행되는 등록금 투쟁은 전망이 없다. 그것은 교수와 학생, 직원과 학부모를 서로 싸우게 만들 뿐이다. 이 경우 집단이기주의라 해도 반박하기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개별 기업별로 구성된 노조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거의 없다. 고용을 보장받기 위해 투쟁하거나, 혹은 불안한 고용 때문에 고율의 임금인상을 획득하려 해도 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욕설밖에 없다. 그것이 아니면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노동자, 하청노동자 사이에서 이전투구식의 갈등이 재연되고 그 결과는 전반적인 노동조건, 고용조건의 악화로 귀결된다. 지난 10년간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는가?

다시 이제 희망이 있는가? 산별노조 전환의 결단은 단지 규모가 큰 금속노조의 결성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더이상 ‘공공의 적’으로 몰리지 않겠다는 결단이며 동료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해방의 새로운 길을 시작하겠다는 주체 선언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중요한 연대의 정신이 담겨 있다. 그 연대정신은 개별 사업장 별로 이루어지는 임금,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은 더이상 전망이 없다는 절박한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현대차의 파업투쟁이 대우차의 ‘즐거움’이 되는 처절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인 것이다. 더 나아가 정규직의 고용불안이 비정규직노동자를 해고하고, 하청업체 동료들의 임금을 빼앗는 악순환으로 나아가는 참담한 현실에 대한 거부선언이다. 그리고 기업노조와 정규직노동자가 회사와 노사 ‘화합’ 하여 비정규노동자들을 체계적으로 착취하는 관행 아닌 관행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결단이다. 곧 위기에 내몰린 민주노조를 새로이 세우는 역사적 결단인 것이다.

물거품이 된 월드컵 16강의 꿈 대신 이런 희망의 꿈은 어떤가? 교수노동자와 학생들, 그리고 학부모인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나로 연대하는 사회, 그리하여 돈 걱정 없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함께 고용을 보장받는 한국사회의 꿈 말이다. 지금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결단이 절실히 필요하다.
 
노중기 대안연대 운영위원, 한신대 교수 
      
2006-06-27 오후 6:07:18  입력 ⓒ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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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일 인터뷰]“노동운동 위기 기업별노조 탓”

[현장-의견] “노동운동 위기 기업별노조 탓”

금속노조신문  제52호
교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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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에 만난 사람 교수선언의 주역 경남대 교수 임영일 =


“앞으로 ‘민주노조 총단결’이라는 구호는 의미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업장단위의 복수노조가 시행된다면 말이죠” 경남대에서 만난 임영일 교수의 말이다.

진보적인 학자들이 노동현안에 대해 성명을 낸 일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정부의 탄압을 규탄하거나 투쟁하고 있는 사업장의 해결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성명을 낸 일은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럼에도 이번에 발표한 ‘호소문’에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는 정부와 사용자에게 목소리를 낸 것이 아니라 조합원들에게, 그리고 탄압중단이나 해결촉구의 내용이 아니라 조직적 과제 실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산별전환 방침을 갖고 온 힘을 쏟고 있는 조합 간부들에게 힘을 주고, 조합원 여론 형성에 도움 줄 것을 찾아보자는 의견 제기로부터 시작하게 됐는데 시간의 촉박함과 조직과정의 허술함으로 인해 논란을 빚었다”며 좀더 확인과정을 거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중앙일보는 명의도용이라는 극한 표현을 썼으나 총회에서 결정했고, 메일을 보내 확인토록 한 것”이라며 “이번 주내로 재차 최종 확인작업을 거쳐 27일쯤 다시 낼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한 다음 날인 22일 111명의 진보학자들이 재차 서명한 호소문을 다시 발표했다.

‘저지투쟁’은 잘 해야 현상유지

“노동운동의 위기는 여러 측면이 다 있지만 주요한 측면이 뭐냐인데 기업별 조직체계를 두고 혁신작업의 효과를 과연 기대할 수 있느냐 그것이 가능하냐를 판단해보면 핵심은 기업별노조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라며 현 노동운동의 위기를 기업별노조로 진단했다.

그는 이어 “산별은 우리 스스로 결의함으로써 가능한 것이기에 산별전환으로 돌파구가 열리면 노동정세는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IMF 이후 노조운동은 사실 수세적, 방어적 운동을 해왔고 이를 반전시킬 계기가 바로 산별노조라는 얘기다. “방어적인 ‘저지투쟁’은 성공하더라도 ‘현상유지’이고 더 나빠지지 않을 뿐이지 더 얻거나 희망을 주는 투쟁이 아니다. 이제 저지투쟁에서 벗어나 공세적으로 노동의 요구를 걸고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비정규직 문제와 산별에 대해서도 임 교수는 단호했다. “비정규법안 저지, 노사관계로드맵 저지 투쟁은 진정성이 없는 투쟁이다. 비정규직이 50%를 넘어서게 된 건 어제오늘 갑자기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기업별 틀내에서 안주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못한 게 오늘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꼬집는다.

사회적 교섭에 대해서도 산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재의 구조속에서 진행되는 사회적 교섭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조합원들의 요구를 담은 내용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명하달식이 아니라 산별, 지역별로 진행된 내용을 모아 전국적 틀로 정리하는 것이 사회적 교섭이므로 지역, 산업단위의 교섭과 협약이 축적된 것이 있어야 전국적 협약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죠”

“기업별노조 회사 장사될때만 유효”

산별전환후 조직체계문제가 쟁점이 될 텐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금 얘기되고 있는 과도적으로 3년동안 기업지부 인정은 당분간 인정하더라도 ‘과도기’에 대한 내용은 절실히 필요하다”“지역과 기업지부를 한 틀 속에 묶고 기업지부의 재정과 인력 일부분을 지역에 반드시 파견하고, 회의 등 지역단위의 일상적인 체계와 활동을 함께 해야 이후 전망논의도 가능할 수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그는“규모가 큰 노조의 경우 솔직히 큰 일 벌어질 거 없을 거다. 근데 고용문제만 보더라도 기업별노조는 회사가 장사되는 동안만 살아남는 정도일 뿐”이라고 못박았다.

“노조없이 비정규직으로 살게 될 내 후세의 삶과 노동운동의 미래를 생각하면 ‘나 몰라라’며 할 문제가 아닌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산별전환한다고 바로 꿈같은 미래가 펼쳐지기보다는 당장은 힘들 수도 있는데 금속의 산별노조 완성은 이미 금속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노동운동의 향배를 가늠하는 시금석이고, 노사관계를 결정짓는 한판 승부”라며 금속노동자의 결단과 승리는 정말 중요하다고 마지막까지 잊지 않고 또 강조한다.
 

2006-06-28 09:4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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