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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

 

<도널드덕을 어떻게 읽어야하나>를 얼핏 읽었던 기억에 아리엘 도르프만을 그저 칠레의 반미 작가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책을 보면 그가 칠레 내에서 꽤 영향력있고 아옌데 시절에도 많은 역할을 해온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회고록이다.

그런데, 보통의 회고록이 자신의 일대기를 시간순으로 돌이켜 적은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이 책은 전혀 통상적이지 않다.

 

일단, 아리엘 도르프만은 자신의 역사'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즉 칠레와 그 주변국들과 미국에 대한 역사를 기록하는데에 충실하다.

제목 그대로, "나를 돌아보다"가 아니라, "남(south)을 향하며 북(north)을 바라"본다.

그는 남(칠레)과 북(미국) 사이에서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끊임없이 갈등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다가 종국에는 남에서의 삶과 투쟁을 택하게 된다. 끝없이 제기되는 남을 둘러싼 환경과 북에 의해 강제되는 상황들이 선택의 주요변수로 작용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가 기록하는 방식은 또한 통상적 회고록과 달리 매우 친절하지 못하다.

과거의 일정한 시간을 건너뛰어 현재(글쓰는 시점에서의 현재)에 대입시키는 등 시공간이 무시되어 하나의 서사 속에 공존하게 되는데,

1973. 9. 11. 칠레의 모네다 궁에서 아옌데가 죽음을 맞으며 역사속으로 물러났던 것과

2001. 9. 11. 뉴욕 무역센터가 미제국주의의 현실 속에 무너져내린 것의 교집합을 작가의 유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는 식이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서사방식은,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

아내인 안헬리까가 피노체트의 끄나풀들에게 붙잡혀 일종의 고문이 일어날 것을 상상하는 대목은, 마치 짧은 단편 하나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자, 이쯤에서 읽으며 껄끄러웠던 사소한 몇 가지.

미국의 히피에 대해, 가난을 선택해 역겨운 호사따위를 부리는 작자라고 말하는 대목은, 문화와 개인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작가의 자세라기 보다는 철저한 반미정신으로 무장한 칠레의 운동가라고 보는 편이 나을듯. 사실, 작가 조차 엘리트 부모 밑에서 등따시고 배부른 진로에 등돌리고 '칠레의 운동가'가 되는 길을 택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자신의 가족사를 설명하는 지리한 과정과 자신의 유년시절 회고의 몇몇 대목은 '뼛속부터 잘난척 거부주의자'인 내게는 조금 역겨웠던게 사실.

 

70년대 칠레의 상황을 잘 모르거나 나처럼 이해력이 약간 모자란(-_-) 독자라면 맨 뒤 옮긴이의 말 부터 시작하는 것도 팁.

 

대체로 흥미롭고 신선한 기운까지 덤으로 얹어주는 책이다.

물론 나의 읽기 방식과 해석 방식에 한해서이다.

작가의 말대로 '가장 단순한 이야기라도 독자의 수만큼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기에 자신있게 적어놓는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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