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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14
    빠리,첫번째;로댕과 모네,까미유 끌로델(2)
    겨울철쭉
  2. 2007/06/19
    모네(Claude Monet)展(3)
    겨울철쭉

빠리,첫번째;로댕과 모네,까미유 끌로델

빠리, 로댕과 모네, 까미유 끌로델

 

겨우 어제 도착했기 때문에 빠리에서 이야기는 좀 더 있다가 쓰려고 했지만, 오늘 다녀온 두 곳의 이야기는 먼저 해야할 것같다. 도착한 다음날, 다녀온 곳 중 두군데 이야기. 에펠탑이나 개선문 같은 것들도 있지만 그보다, 로댕미술관과 모네미술관.

 

로댕, 클로델

 

에펠탑에서 조금 걸어가면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앵발리드 군사박물관 옆에 로댕 미술관이 있다. 수수하게 보이지만, 안쪽의 정원이 멋지다. 그리고 로댕과 까미유 클로델의 작품들이 있다.

 

나는 조각은 잘 모르지만, 로댕이 인상파 화가들이 대상 속에서 “보이는 것”을 묘사하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작업을 조각에서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대상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형상으로 창조해낸다.

 

그의 작품 중에서 미술관의 앞뜰에 전시된 “칼레의 시민들”과 “지옥의 문”은 당장 눈에 띈다. “칼레의 시민들”은, 어떤 대의(포위당한 도시의 동료 시민들을 위한)를 위해서 희생하는 “시민”들을 형상화한 작품인데, 도덕적이기도 하고 자신의 결정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비극적인 것일 때, 드러나는 숭고함을 나타낸다.



 

“지옥의 문”도 잘 알려진 작품. 이 작품을 둘러보면, 이 문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영화와 같은 동적인 영상이 없을 시기에는 정지한 것 속에서 움직임을 형상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지옥의 문”은 지옥을 들어가려고 하는, 혹은 거부하려고하는 영혼들의 끔찍한 몸짓이 가득한 문을 형상화한다. 현대에 그러한 이미지를 표현하려 했다면 아마 영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댕의 작품은 그것이 비록 정지한 것이지만 사실상 움직임을 보여준다. 조금만 주의 깊은 감상자라면 그것이 청동으로 만든 고정된 물체가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로댕이 그려내는 인물들은 생생하다. 그것은 특히 그들이 살아있는 육체의 특성, 움직이는 근육들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이 작품은 단테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생각은 근육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하는 것같다. 생각은 단지 두뇌라는 기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육체--따라서 그것이 존재하는 물질적 관계--와 근육 속에서 존재하는 데, 로댕의 작품은 그것을 형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움직이는 것을 쉽게 표현하는 지금과는 달리 정적인 표현수단을 통해서 동적인 것을 표현하려고 할 때, 그것이 얼마나 치열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같다. 현대에는 한편으로 너무 손쉽고, 그래서 그런 치열함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미술관의 한 방은 까미유 끌로델의 작품으로 채워져있다.

 

Sentiment님의 블로그에서 인용(http://blog.naver.com/insomnia0?Redirect=Log&logNo=150021674671)

 

16세의 천재 소녀 조각가. 까미유는 그렇게 로뎅과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한다.

42세의 대조각가 로뎅은,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형태는 깊이로 보아라,

주가 되는 면을 분명하게 나타내어라,

형태가 너를 향해 있는 것으로 상상하라,

모든 생명은 중심에서 나오고, 안에서 점점 밖으로 퍼져 나간다,

소묘에서 윤곽선을 보지말고, 돋을 새김을 보라,

돋을 새김이 윤곽선을 결정한다,

중요한 것은 감동하기. 사랑하기. 소망하기. 걱정하기. 살아가기이다,

예술가가 되기 전에 먼저 뜨거운 가슴을 가져라,"

 

그녀와 로댕의 관계는 영화 “까미유 끌로델”과 같은 작품을 통해서 많이 알려져있다. (나는 영화는 보지 못했다.) 작품만 보더라도, 까미유 끌로델은 훨씬 동적이고 격정적인 감정을 작품에 쏟아 붓고 형상으로 창조한다.

 

로댕의 어떤 작품에도 비할 바가 아닌 작품이 이곳 전시실에 있다. the Waltz 라는 작품. 보면서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남녀가 춤을 추는 모습을 묘사한 이 작품 속에서 그들은 살아있다. 특히 여성의 끌리는 치마는 대상에 움직임을 부여한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왈츠. 그냥 보아도 움직임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지만, 이렇게 해보자. 작품 주위에서 내가 대신 왈츠를 춰보자. (마침 MP3 플레이어에는 쇼팽의 Waltz No.1 In E Flat Major Op.18(Grande Valse Brillante)가 있었기 때문에 들으면서) 잘 모르지만 영화든 어디서든 본 듯한 왈츠 스텝을 작품주위에서 밟아보자. 그렇게 보면 작품이 정말로 춤을 추기 시작하고, 열정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사실, 까미유 끌로델의 감성은 왈츠같은 ‘춤곡’과는 어울리지 않아. 그런데 왜?)

 

까미유의 이 작품은 정지한 조각 속에서 움직임을 표현한다는 측면에서만 아니라, 사랑하는 남녀의 육체적 움직임을 작품 속에서 표현한다는 점에서도 탁월하다. 그러나 그 육체적 움직임은 단지 육체적인 사랑만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고양된 것이다. 비록 로댕이 그것을 거부하고, 그녀는 30년 동안 정신병원에 유폐되었지만, 그녀의 조각에서는 로댕의 작품들 속에서 느낄 수 없는 진실함과 치열함이 동시에 배여난다. 그래서 가슴 아프고 코끝이 찡해진 걸까.

 

클로드 모네, 빛에 대하여

 

지도를 보고 어렵게 찾아간 모네미술관.

정작 모네의 작품은 지하 한 층에 50여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서울의 모네展에서의 느낌을 좀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관람.

 

전시된 모네의 작품 중, “템즈강에 비친 런던의 영국의회”Londres le palerant Reflets sur la Temise(1899-1901, 불어를 모르니 한글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이라는 작품은 빛의 방향에 따라서 건물사이로 새어나오는 빛과 그림자, 물에 반사되는 빛을 그린다. 물에 비친 빛은 같은 흰색이라도 다른 곳에서는 다시는 불가능한 효과를 만들어낸다.(아래 그림은 전시된 것은 아닌데, 같은 것을 찾지는 못했다.연작시리즈 중 하나)


모네의 수련시리즈는 전에 국내전시를 보고 이야기한 포스트(http://blog.jinbo.net/rudnf/?pid=129)에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수련보다는 물에 비친 빛을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역시 여기서 보이는 작품들도 그렇다. 모네의 수련시리즈에서는 물에 비친 대상에 대해서 직접 보이는 대상(수련)이 비교되면서 물에 비친 대상은 모호하게, 수련은 뚜렷하게 보인다. 모네는 이 뿐 아니라, 대상이 비추어지는 각도가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서, 물에 비친 것과 직접 보이는 것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한다.

 

역시 인상적인 작품은 모네의 "장미정원". 로댕의 작품을 감상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것을 영상으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천천히 장미정원으로 걸어가자.(일본풍 다리가 있는 정원도 마찬가지다) 차츰 빛과 색채가 제각기 흔들리는 곳으로 한걸음 씩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는 형체도 없고, 다만 살아있는 색채들, 그리고 그것을 비추는 빛들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천천히 다가가면서 감상한다.)

 

모네는 형태보다 색이 우위에 있는 그림을 그리고, 점점 형태 자체는 사라져간다.(말년에 그의 시력저하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기의 몇몇 작품은 밋밋한 느낌이다. 빛을 강조해주던, 마치 빛의 ‘보색’과 같은 형태라는 양념이 사라지면서 빛이 도드라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느낌.

 

 

빠리에서 첫날, 두 개의 미술관을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가야할 곳들이 많다. 하루 정도 더 있어야할까. 이 곳이 맘에 드는 이유 중에 하나는 와인과 어울리는 치즈가 터무니없이 싸다는 점이다. 그리 좋은 것을 욕심내지 않는다면, 2003년 보르도産 와인 한 병이 우리돈 5000원 정도, 혼자 먹기는 부담되는 크기의 브리치즈 한 조각이 1500원 정도. 글을 쓰면서 혼자서 한 병을 다 비우고 기분좋게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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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Claude Monet)展

지난 주에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빛의 화가 모네展"에 다녀왔습니다.
공식홈페이지는 여기 : http://www.monet.kr
모네는 인상파화가다..라는 정도밖에 알지 못하고 무작정 간 셈인데, '빛의 화가'라는 별칭이 어울리는 작품이 많더군요.

특히 수련을 그린 작품들로 유명한 모네의 전시회 답게, 전체 전시작의 1/3 정도는 수련들이었던 것같습니다.  모네가 수련을 왜 그렸는지는 책을 찾아보면 나오겠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아무래도 그것이 물위에 떠 있기 때문이었던 것같은데, 왜냐하면 모네는 물 위에 비친 빛의 변화를 포착해내는 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더군요.

물결에 일렁이면서 반사되는 빛, 원래의 색깔을 갖고 있지만 빛나고 투명해진 대상의 색깔을 그려내는 데 말입니다. 탁한 유화 물감으로 어떻게 이렇게 투명한 색감을 나타낼 수 있는지 감탄했습니다. 특히 붉은 노을이 비친 연못의 수련과 버드나무 그림이 있었는데, 그 투명한 노을의 붉은 색이란! (아래 그림은 Waterlillies 연작 중 하나인데, 붉은 노을 색이 있는 그림의 이미지는 찾지 못하겠더군요. 그 대신에.)

<심지어 포르비예의 세느강>과 같은 작품에서는 한길 앞을 볼 수 없는 안개까지도 물 위에서 투명해지는군요.
 
이런 걸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다소 거친 듯하지만 일렁이는 붓터치 덕분일 텐데, 이 때문에 잔잔한 물을 그리고 있지만 그림의 표면은 역동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냥 무작정 평온하게 나른하지는 않죠. 또 어떤 작품들은 의도적으로 수면의 역동성을 거친 붓터치로 그린 것도 있고 말이죠.

<일어비린 시간을 찾아서>로 유명한 푸르스트는 신문에 모네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내가 언젠가 모네의 정원을 볼 수 있다면 꽃들의 정원이라기 보다는 색채의 정원이라고 해야할 것같고..
이를 테면 색이 아닌 모든 것으로 비물질화시킨 꽃들을 보게 될 것같은 느낌이 든다. (1907.6, 르 피가로)
 
이 이야기는 특히 <일본식 다리>라든가 <장미나무길> 같은 작품을 보면 너무나 잘 어울립니다. 이 색과 빛들을 보세요.ㅎ


모든 사물이 색채만 남아가는 그림들. 이와 함께 후기 작품으로 갈 수록 점점 추상성이 강해지는 데, '인상'을 회화에 표현하는 인상파의 특징을 더 극단으로 밀어부친 결과겠죠. 추상화되는 것도 그렇지만, <등나무>같은 작품은 공간을 소거하고 필요한 것만 캔버스에 담아내면서 '공중 정원'을 표현하는 독특한 효과를 만들더군요.

나름 재밌는 전시회였습니다. 특히, 지난 번 오르세미술관전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빛을 다루는 솜씨들이 탁월하다는 생각. 일찍부터 미술을 감상하는 법을 잘 배웠으면 그런 걸 훨씬 잘 느끼고 보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이제라도 하나씩 보아가는게 재미가  쏠쏠합니다.)  일상 속에서 보이는 색과 빛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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