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시간 2011/06/19 12:58

고도를 기다리며

에스트라공   정말 내일 또 와야 하니?

블라디미르   그래

에스트라공   그럼 내일은 튼튼한 끈을 가지고 오자.

블라디미르   그래

에스트라공   디디

블라디미르   왜?

에스트라공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블라디미르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그럼 살게 되는 거지

 

-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중에서

 

.......................................................................................................................................................................................

 

나는 이 곳에서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베케트는 '삶을 지배하는 것은 고통'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고통받고 있으므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살다보면 누구나 고통이 삶을 장악해버린 시기를 한 번쯤은 겪었으리라

하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끝끝내 살아남는 것은,

삶을 지배하는 고통을 넘어 서는 또는 고통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각자의 그 무엇을 갖고 있어서가 아닐까

기쁨이나 희망 또는 행복이나 사랑같은 자신에게만 특별하게 느껴지고 적절하게 표현이 가능한 그런 것들 말이다

 

그들은 고도를 만날 수 있을까?

아마 그들 기다림의 끝은 죽음이겠지

'고도'의 상징은

수많은 인간에게 각자 다른 의미일 것인데,

나 역시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혼란 속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이야기하면서

 

.......................................................................................................................................................................................

 

 

 

에스트라공   그만 가자

블라디미르   가면 안 되지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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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9 12:58 2011/06/19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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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11/05/01 01:37

한낮의 어둠

 

 

'넘버원은 거칠고 느리며 무뚝뚝하고 흔들리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는 가장 단단한 닻의 사슬을 가지고 있다. 나의 사슬은 지난 몇 년 동안 닳고 닳아 약해졌다.... 사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의 무오류성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패배한 이유이다.'

- 아서 쾨슬러, '한낮의 어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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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의 책 소개 문구는 충격적이었다. '어제의 혁명동지가 내 목을 달라는구나', 슬프고 우울해진다. 이른바 사상투쟁에서 나는 언제나 한걸음 물러서 있었다. 그 이유는 입장의 유보가 아니라  자세한 내용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현장에서 성장한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입장은 노동자로서의 정체성과 직관이었다. 제발로 찾아간 조직을 떠나온 것도 한참만에 다른 조직을 선택한 것도 나만의 기준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단지 정파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끊임없이 대립하고 반목하는 현장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다. 더 견딜수 없는 건 다른 척, 센 척 하지만 조그만 권력이라도 갖게 되는 순간 결국 누구나 비슷해지는 활동가들의 변화무쌍한 모습이었다. 혹시 운동조차 수컷들 권력투쟁의 연장선상이 아닌가 의심을 품기도 했다.  그 의심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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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메이데이다.  그러나 몇해 전부터인가 나는 노동절 집회에 가끔씩 얼굴만 내민다. 개인적인 사정은 둘째치고 메이데이에도 아무날 아닌척 일해야 하는 중소사업장 노동자라는 정체성은 변함 없지만, 이제 내 가슴은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는다. 듣기만 해도 가슴 뭉클했던 '동지'라는 말, 그러나 가슴이 울리지 않는다. 사라진 열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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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1 01:37 2011/05/01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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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10/09/12 21:03

슬픈 열대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내가 일생을 바쳐서 목록을 작성하고, 또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될 제도나 풍습 또는 관습들은 만약 이것들이 인간성으로 하여금 그것의 운명지어진 역할을 수행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전혀 무의미해지고 마는 어떤 창조적 과정에서의 일시적인 개화이다. 그러나 그 역할은 우리 인간에게 어떤 독립적인 위치를 배당하지는 않는다. 또한 비록 인간 자신이 저주받을지라도 그의 헛된 노력들은 하나의 보편적인 몰락 과정을 저지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 C.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중에서

 

 

구조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레비스트로스(1908~1991)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류학자이며 철학자 그리고 사상가이다.  '슬픈 열대'는 그가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상파울루 대학에 있을 때 조사한 브라질 내륙 지방의 네 원주민 부족에 대하여 15년 후에 자신의 기록과 느낌 등을 정리하여 쓴 산문 형식의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브라질 원주민에 대한 기록 뿐 아니라 서구문명의 약탈과 파괴에 대한 회의 등 그의 사상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다.  모든 사회가 서구의 방향으로 동일시될 것이라고 전제하는 발전론적 역사관을 비판아면서, 모든 문화는 그 나름대로의 질서와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문화적 상대주의를 주장한다. 동시에 인간의 심층적인 사고 구조에는 공통적인 사고 원리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의 책 속에서 '착취'는 다양한 방법으로 확인된다. 풍부한 원자재 갈취, 노동력 착취, 환경과 문화의 훼손, 전염병원균의 이식. 노예제의 철폐는 인간의 자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설탕을 얻기 위해서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따라서 노예제는 철폐되어야 했다. 당연히 노동자가 된 원주민들의 생활은 노예와 다를 바 없었고 오히려 더 비참해졌다. 금, 설탕, 커피 - 국경을 넘어선 자본의 착취는 그러나 이제 막 시작에 불과했다.

 

 그 세계의 한 귀퉁이에 나  역시 존재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집과 직장만을 전전하며 다른 사람과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조차 상실한 채. 대다수 노동자의 삶이 그렇듯.  그러나 조금 궁금하긴 하다. 가끔은 텔레비젼 너머 다양한 삶과 세상을 직접 만나보고 싶긴 하지. 그러기위해서 우선 내가 쳐놓은 울타리 밖으로 나가야 한다. 언제쯤 그런 용기가 생길까? 사람과 세상을 마주할 용기. 쉽게 상처받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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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2 21:03 2010/09/12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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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순간 2010/09/12 00:46

그 쇳물은 쓰지 마라

그 쇳물은 쓰지 마라.

- 무명씨


광온(狂溫)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못을 만들지도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 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새끼 얼굴 한번 만져 보자. 하게.

 

.....................................................................................................................................................................................

 

이렇게 가슴 저미는 시는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부끄러워지는 시는.

무엇을 한 건가?

노동운동 언저리에서의 십수년,

현장은 변하지 않았다

자본은 변하지 않았다

세계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오로지 나뿐인 것을.

삶의 나태함과 냉소로

결국 자본의 야만에 침묵하고 만것을.

- 그의 명복을 빈다

 

 

 

 

 

손이 닿자마자 바스러졌다. 10일 오전 10시, 펄펄 끓던 쇳물이 식은 자리에서 발견된 김아무개(29)씨의 다리뼈와 두개골뼈는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섭씨 1600도가 넘는 쇳물 안에서 다 타버리지 않고 남은 것만도 기적에 가까웠다. 당진경찰서 과학수사팀 소속 경찰관이 산화된 유골을 조심스레 자루에 담았다.

뼛조각을 보고 유족들이 오열했다. 김씨의 부모와 세 누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출근했다가 돌아오지 못한 아들, 동생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사고 소식을 듣고서도 주검조차 볼 수 없어 가슴이 무너지던 나흘이었다. 유족들은 그 나흘 동안 발인 날짜도 장지도 정하지 못한 채 장례식장을 눈물로 지켜왔다.

장례식장에 외롭게 비어 있던 나무관이 공장으로 들어왔다. 관에 하얀 창호지를 깔고 바스러져 가는 뼛조각을 넣었다. 숨진 김씨는 이제야 누울 곳을 얻었다. 지난 7일 새벽 1시50분께 충남 당진군의 환영철강 제강공장에서 일하다 쇳물에 떨어져 숨진 김씨의 입관식은 이렇게 진행됐다.

한 누리꾼이 김씨의 사고 소식을 듣고 ‘그 쇳물 쓰지 마라’라는 추모시를 인터넷에 올렸고, 추모시가 빠르게 퍼지면서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사고 현장인 전기로에 더는 쇳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한 청년을 집어삼켰던 시뻘건 쇳물은 나흘을 내리 식고 나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엔 허연 재처럼 철가루만 남았다. 그래도 남은 열이 뜨거워, 기자가 신은 장화 바닥이 조금씩 녹아들 정도였다. 섭씨 1600도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열기였을 터다.

김씨는 지난해 6월 회사에 입사한 새내기였다. 당진에서 태어나 2년제 대학 자동차학과를 졸업한 뒤 조그만 광고회사에 다니며 간판을 만들었다. 그러다 안정된 직장을 찾아 이 회사에 지원했다. 회사 관계자는 “당시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지만 우리 회사에 오고 싶어 이 동네로 이사까지 했다는 말에 열정이 느껴져 뽑았다”고 말했다. 1년여를 일하며 안정을 찾은 그는 여자친구와 내년쯤 결혼할 꿈을 꾸고 있었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했다.

7일 새벽, 그는 여느 때처럼 작업복 차림으로 전기로 주변에서 일하고 있었다. 4조 3교대로 24시간 돌아가는 공장에서 그는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근무하는 조였다. 한 조에 6명씩, 고철을 전기로에 넣어 녹여낸 뒤 쇳물을 다음 공정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이 회사에선 하루에 100t 분량의 고철을 7~8번 녹여내고, 또 하루에 세 번씩 20분 정도 ‘스프레이 보수작업’이라는 정리 작업도 진행한다.

이날 새벽 1시20분께, 고철을 새로 전기로에 넣기에 앞서 ‘스프레이 보수작업’이 시작됐고, 김씨는 전기로 주변 청소를 맡았다. ‘스프레이 보수작업’을 할 때면 전기로의 둥근 뚜껑이 열린다. 당시 전기로에는 쇳물 15t 정도가 남아 있었다. 새벽 1시40분, 김씨의 동료는 김씨가 전기로 입구 옆에 걸쳐 있는 철근 조각을 치우려고 파이프를 들고 애쓰는 모습을 봤다. 그다음으로 본 게 김씨가 쇳물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전기로는 당분간 가동되지 않을 예정이다. 경찰은 “쇳물은 비중이 커서 사람이 빠지면 무조건 위에 뜨기 때문에 주검과 관련이 있는 곳은 전체 쇳가루의 윗부분뿐”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동료를 잃은 슬픔에 빠진 회사는 ‘그 쇳물 쓰지 마라’라는 조시 제목대로 남은 15t의 쇳가루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다. 환영철강 이광선 관리팀장은 “조만간 회사에서 돌아가신 분을 위한 진혼제를 열어 넋을 위로하고 큰 슬픔에 빠진 동료들을 위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한해 동안 일터에서 사고성 재해로 목숨을 잃은 이는 1401명이다. 이들 중에서 30살 미만은 113명에 달한다. 아까운 청춘이 스러져간 현장에는 온종일 차가운 비가 내렸다.

당진/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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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2 00:46 2010/09/12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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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10/08/29 13:36

시민의 불복종


 '정부는 한 인간의 지성이나 양심을 상대하려는 의도는 결국 보이지 않고 오직 그의 육체, 그의 감각만을 상대하려고 한다. 정부는 뛰어난 지능이나 정직성으로 무장하지 않고 강력한 물리적 힘으로 무장하고 있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보도록 하자'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중에서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보도록 하자', 가슴이 아리는 말이다. 또한 자신과 미래에 대한 굳센 믿음이 없다면 감히 내뱉을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의지와 믿음이 내게도 있을까? 또한 내게 '내 방식'은 존재하는가? 지금은 그저 희미한 그림자만 남아있을 뿐이다. 나는 그저 숨죽이며 하루하루 세상을 살아갈 뿐이니까. 보통의 사람들처럼.

 

한때는 모든 것이 선명해 보였다. 일찌감치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의해 발생하는 여러가지 사회문제들에 대해 단호하게 투쟁할 것을 선언했고 내 삶은 그 실천의 연장선에 존재했다.  그러나 삶의 문제가 얽히면서 난 자신감을 상실했다. 이 모든 것을 엎을 수 있는, 변화시킬 수 있는 혁명의 주체는 인간이다. 그 인간에 대한 믿음을 아직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나 자신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믿지 못한다. 결국 나는 뒤늦게 인간에 대한 회의와 냉소속에서 헤매고 있는 셈이다. 희망을 품고 싶지만 혹시 환상이 아닌 건지 깊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어떤 책이든, 책을 덮는 마지막 순간조차도.

 

세계는 변화하지 않았다. 심화되는 모순과 위기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도 분명히 있겠지. 하지만 서두르지 않겠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절충이 필요하다. 사실 헷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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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9 13:36 2010/08/29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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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10/08/22 21:49

월든

 

 

 

'당신의 인생이 아무리 비천할지라도 그것을 똑바로 맞이해서 살아나가라. 그것을 피한다든가 욕하지는 마라. 그것은 당신 자신만큼 나쁘지는 않다. 당신이 가장 부유할 때 당신의 삶은 가장 빈곤하게 보인다. 흠을 잡는 사람은 천국에서도 흠을 잡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이 빈곤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하라. 당신이 비록 구빈원의 신세를 지고 있더라도 그곳에서 유쾌하고 고무적이며 멋진 시간들을 가질 수 있다. 지는 해는 부자의 저택이나 마찬가지로 양로원의 창에도 밝게 비친다. 봄이 오면 양로원 문 앞의 눈도 역시 녹는다. 인생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그런 곳에 살더라도 마치 궁전에 사는 것처럼 만족한 마음과 유쾌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중에서

 

 

 

삶에 예외는 없다. 남들이야 어떻든 나만은 안전할 것이라는 근거없는 낙관은 언젠가 꼭 깨지고야 말 착각이고 환상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왜 뒤통수를 맞는 기분일까? 진작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이지.. 왼쪽 종아리가 계속 아프다. 하루의 대부분을 서서 일해야 하는 이 직업을 선택한 순간 감내했어야 할 일이지만 점점 서글퍼지는 것을 어쩌지는 못한다. 알고 있지 않은가. 고단한 노동자의 삶을. 장시간 저임금의 열악한 노동환경속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내 육체는 이렇게 점점 병들고 시들어 갈 것이다. 수많은 선배노동자들의 삶이 그러했듯.

 

그렇다고 특별히 불행하지는 않다. 단지 늘 시간이 부족하다. 10시간 반의 노동과 8시간의 수면을 제외하고 육아와 가사노동을 최소한으로 줄여야만 신문 한장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으니까.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요가도 하고 공부도 하고 남자친구도 사귀고 사회운동도 하고 싶지만 말이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 가능해야만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경제적인 조건이 행복의 유무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없지만 돈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더욱 그렇다. 자신을 사랑하고 스스로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래서 무작정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월든호수에서의 소로우의 삶은 당시 지식인으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자급자족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 혼자서. 그는 외롭지 않았다. 그에게는 숲과 호수와 책과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만약 내게도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떨까? 예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요즘은 가끔 생각해본다. 여러가지로 두렵기는 하지만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내가 소망하는 삶의 내용과 별반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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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2 21:49 2010/08/22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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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10/08/15 21:06

나쁜 이별

 

 

독서가 훌륭한 애도 방식이었다는 것은 가장 나중에 알게 되었다. 독서를 통해 나는 억압해둔 내면의 감정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그것들을 체험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이 글의 모든 꼭지마다 한 권 이상 소개된 책들은 바로 내가 애도 작업에 도움을 받았던 것들이다. 제목으로 인용한 구절들도 애도 작업에 도움 받은 시들에서 따온  것이다. 독서 치료라는 분야가 생기기 이전부터 나는 독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내면의 감정을 표현해왔던 셈이다......책이 배달되어 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책들을 모두 꺼내놓고 맨 뒤의 작가 연보를 펼쳐서 종일토록 훑어본 것이었다. 그 훌륭한 작가들이 어떻게 문학을 공부했고, 몇 살쯤 첫 작품을 출판했고, 언제쯤 슬럼프를 겪거나 영광을 누렸는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들이 요절하거나 장수했는지, 결혼하거나 이혼했는지, 행복하거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점검했다. 그들의 삶을 개괄해보면 거기서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표준 매뉴얼 같은 걸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다. 그 때 내가 원했던 것을 손에 넣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모든 독서 행위가 나를 보살피고, 비전을 보여주고, 이끌어왔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남의 이야기, 남의 애가와 자주 접촉하면서 나의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 김형경 '좋은 이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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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는 다른 삶, 다른 이야기, 다른 생각을 통해 결국 나를 돌아보게 한다. 실연 후 내게 책 읽기가 더욱 절박했던 것 또한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나는 이유를 알지 못했고 누구에게든 물어야 했던 것이다. 왜 헤어져야 했는지, 왜 일방적인 통보여야 했는지 등등 납득할 수 없는 이별의 모든 근거를 알아야 했지만 이미 돌아선 그사람은 묵묵부답이었고 나는 오직 내 자신과 책 속에서 오랫동안 해답을 찾아 헤매였다. 프로이드와 융, 틱낫한, 각종 우울증과 상담류의 서적들을 탐닉하는 동안 스스로에 대한 각종 자해를 시도하고 상상해보았으며 사람들과 외부세계로부터의 완벽한 분리를 간절하게 꿈꾸었다. 그렇게 분노와 절망과 회한의 활화산들을 굽이굽이 넘어 현재 체념의 강에 이르렀고, 그동안에 수백권의 온갖 책들을 허겁지겁 읽어치운 것이다. 마치 밥을 먹고 반찬을 먹고 라면을 먹고 술을 먹고 새우깡을 먹듯, 정신분석학과 심리학과 불교와 소설과 시집들을 말이다. 닥치는대로 제대로 소화시키지도 못한 채 그저 꾸역꾸역 밀어넣고 토해내기를 반복했었다.

 

갑작스런 실연은 나를 변화시켰다. 이혼 후에도 변치 않은 것처럼 보였던 내 신념과 이상과 믿음은 뿌리부터 심하게 흔들렸고 세상과 사람들의 모습도 그 전과는 달랐다.  진리는 단 한 가지였다. 모든 것은'알 수 없다'는 것. 그 중에서도 사람, 그 중에서도 남자. 그렇게 4년의 시간이 지났고 삽십대 중반의 나는 어느덧 마흔에 다다랐다. 아직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물론 그때의 상황을 추측하고 짐작해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제는 부질 없는 짓, 수많은 절규와 시행착오 후에 얻은 결론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없이 높았던 이상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땅끝으로 끌어내렸고 직업을 바꾸고 사회운동의 활동수준을 최대한 낮췄다. 내 삶의 방향과 모양새는 수정되고 변화되었다. 환상을 품지 않는 것,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더욱 더 건조해져야 한다. 이 거대한 세계와 수많은 사람과 무엇보다 나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고 책읽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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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5 21:06 2010/08/15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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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영화 2010/08/08 01:35

공기인형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유행이 지난 구모델 공기인형 노조미,

그녀는

혼자 사는 중년남성의  일방적인 대화 상대와 성욕 해소의 도구이기도 하고

어린 남자애의 훔쳐보기와 자위의 대상이기도 하며

연인과 결별한 젊은 남자에게 애인 대역으로서 죽임과 살림의 과정속에 쾌감의 대상이 된다

인간처럼 밥 먹는 것을 흉내내는 노조미,

사랑하는 남자의 행위를 모방하여 그의 공기를 빼내려던 노조미,

마지막 순간에 모두에게 생일 축하 받는 것을 꿈꾸는 노조미,

그러나 섹스인형에게 마음은 필요하지 않았다

각각 다른 남성들의

각각 다른 욕망의 대상이었을 뿐..

세상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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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8 01:35 2010/08/08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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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의그림 2010/07/11 22:35

케테 콜비츠

 

 

 

때론 현실을 외면하고 싶다. 그럴수만 있다면,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비루한 현실 따위 접고 달콤한 환상의 세계를 모른척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케테의 판화는 불편하게도 다 보여준다. 실업, 궁핍, 봉기, 전쟁 등등 - 이것이 바로 내가 발딛고 있는 현실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녀는 100여점에 이르는 자화상속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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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1 22:35 2010/07/11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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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10/06/23 13:08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우리 두 사람은 같이 해야 할 삶과 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동의 삶을 살고 함께 우리 일을 해나갈 때, 그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일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내가 당신을 소유할 수 없고 당신도 나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같이 발전하고 서로 자신의 고유한 도구를 사용해야 하지만 우리가 같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아침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내 반려자이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당신은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가 당신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히려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당신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고 싶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정의 참뜻이며, 나는 당신의 진정한 친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의 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느끼는 때가 오면 언제든지 내게 알려주고, 당신  스스로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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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헬렌과 스코트가 쓴 책들을 읽고 있다. 경탄과 부러움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솟구친다.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채식주의자로서의 소박한 삶을 말뿐이 아닌 오랜 실천으로 보여준 그들의 삶은 의지박약한 내게는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의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그러나 꼼꼼하게 삶의 지침이 남겨져 있는 글들에선 그들의 고민과 노력이 엿보이며 결코 실현불가능하지 않음을 깨닫게 한다. 그들의 삶은 아름답다..

 

아마 이런 삶이야말로 젊은 시절 내가 꿈꿔왔던 '동지적인 사랑'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비록 삶의 내용은 달랐겠지만 나 역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사랑을 꿈꿔왔다. 그것이 단지 '환상'이었음은 잔인한 현실속에서 깨닫게 됐지만. 사실 뒤늦게 돌아보자면 이러한 관계맺음의 방식과 내용에 있어서 나는 편협했고 완강했으며 지금도 어느정도는 여전할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를 만나는 것 조차도 쉽지 않다.

 

하여튼 혼자이지만 큰 탈 없이 몇 년간 살아왔다. 이젠 평화로운 일상이지만 가끔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야 한다. 자질구레한 집안 일에서부터 흔들리는 내 삶의 방향, 검증되지 않는 사상의 변화에 대한 불안감까지. 이런저런 사정으로 주변의 지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다보니 더 그렇다.  좀 더 부지런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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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3 13:08 2010/06/23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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