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시간 2010/01/31 01:02

도가니

"강선생, 힘들겠지만 가보자! 끝까지 가보자구! 법정이 안되면 거리도 있고 언론도 있어! 그렇다고 저 아이들을 다시 개들에게 던져줄 수는 없잖아. 장경사가 그러더라. 판사 검사 변호사에게 과연 이사장가족의 인권과 귀머거리 애들의 인권이 같을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절대 이길 수 없다고. 그래? 좋아. 판사 검사에게 변호사에게는 아니라도 우리에게는 이사장의 인권과 귀머거리 아이의 인권은 같아. 단 일 밀리, 단 일 그램의 차별도 안돼. 난 그걸 위해 싸울 거야."

- 공지영, '도가니'중에서

 

 

 

성폭력은 정말 '무섭다'. 어쩌다 우연찮게 영화나 책자속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접하게 될때면 공포로 온몸이 뻣뻣해지고 토할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아마 나도 그동안 여자로 살아오면서 겪게된 크고 작은 경험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 몸과 마음이 먼저 반응하게 되는 게 아닐까싶다. 하여튼 꼭 필요한 자료가 아니라면 알면서 굳이 보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니 내가 살고 있는 '광주'에서 몇년간 힘겹게 싸워온 '인애학교 성폭력사건'을 소재로 한 이 소설 역시 피해가고 싶었다. 민주화의 성지라는 '광주'는 진부한지 이미 오래이며 '장애인 성폭력 사건'은 결말이 보이지않는 싸움처럼 느껴졌다.

 

안개로 뒤덮인 이 도시에서 그 아이들과 함께 살아 가면서 나는 무엇을 했을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끔 인권단체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상황을 묻곤 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진정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백마디 변명을 뒤로 하고 이 책은 나를 부끄러움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나직하게 묻는다. '함께 하기 그렇게 힘들었니?'

 

 

"우리의 귀도 네 소식을 그리워하고 있어. 혹시라도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우리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네가 보여준 헌신과 사랑을 기억하고 있어. 네가 우리를 잊었다 해도 우리는 네가 늘 그리울 거야. 건강하게 잘 지내길, 그리고 진심으로 행복하길 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선생 부인의 설정은 너무나 구태의연하다. 아내란 그런 존재일까?  '돈벌라'며 생활전선으로 끊임없이 남편을 내모는 악덕포주같은 아내 - 허나 그 아내에게 어찌 돌 던질 수 있으랴. 그녀 역시 가부장제 사회의 규범을 따르는 충실한 구성원일뿐인것을. 그런데 서유정은 농성장 침탈 순간에 서울로 내뺀 강인호에게 어쩌면 그렇게 관대할 수 있을까? 아마 나라면 쉽게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전까지 보여준 그의 활동 따위 싹 잊고 아예 '배신자'로 낙인찍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서유진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이해하고 있었다. 아마 혼자 아이 둘을 키우며 살아온 상처들속에서 끊임없이 도망가고 싶었던 수많은 순간들을 스스로 극복해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속 인물 배치도 재미있다. 두 여자의 입장이 확고하게 대립하고 그만큼 노력도 열정적인데 반해 강인호의 입장은 줄타기하듯 애매하다. 아내와 있을때는 마지못한듯하면서도 성실한 가장의 역할을, 서유정과 있을땐 참으로 인간적인 교사의 얼굴을 갖게 된다. 마치 이핑계저핑계 대며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적당히 또는 이기적으로 타협하는 우리 대부분의 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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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31 01:02 2010/01/31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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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순간 2009/09/27 22:36

아무것도 아닌

 

 

                       천장호에서

 

                                    - 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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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동안 책 한권 읽지 못했다

직장과 집만 왔다갔다 할 뿐,

집에 와선 밥먹고 잠자기 바빴다

그러고 보니 후딱 가을이고

올해도 겨우 몇개월 남았다

서른아홉,

하루는 고되고 시간은 허무하다

가끔 스스로에게도 날려보는

울림없는 돌팔매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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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7 22:36 2009/09/27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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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09/08/23 23:42

도덕경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그리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 老子, 經 중에서

 

노자의 철학이 갖는 특징은 도(道:길, 방법을 의미)를 인생사뿐만 아니라 자연에까지 연관시켜 논의했다는 것이다. 공자와 맹자의 관심은 제도와 문화 및 도덕적 주체성의 확립 즉 현세적인 인간의 삶에 있었지만 노자는 유가적 인본주의와는 달리 자연 중심주의 입장에서 인간의 삶을 이해한다. 그는 자연을 비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도'를 사유했는데 이러한 형이상학은 '생의 비참성'에 대한 감각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열망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는 창조적 생명 원리이다. 그것은 다양한 사물들을 "생산하고 양육한다."그러나 그것은 권력자의 지배욕처럼 생산물을 소유화거나 지배하지 않는다. 창조적 힘으로서의 도는 자연의 자발적 힘이다. 그러므로 도는 "생산하되 소유하지 않으며 활동하되 자랑하지 않고 성장하게 하되 지배하지 않는다.(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 또한 무위자연이라는 말은 흔히 이해하듯이 자연과 합리된 상태의 긴장 없는 안일한 평온이나 유희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자연에 합치하는 능력을 적극적인 내적 힘으로 전환하여 기존의 삶의 양식을 비판적으로 잠식해 간다는 실존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노자가 주장하는 삶의 양식은 원한의 부정 정신으로 물든 은둔이거나 투쟁이 아니라 자신의 내밀한 덕을 표출함으로써 스며들 이 세계를 침식해 가는 평화적인 삶의 양식이다.

 

 
 

노자의 철학은 장자와 결합하여 아시아 인들의 삶의 고뇌를 용해시키거나 억압통치에 저항할 때 그 정신적 근거로서 작동해 왔다. 정치 기구 내부에 들어가 귀족의 정치적 삶을 도덕화하고자 한 공자나 맹자와는 달리 정치 기구 밖에서 비판적으로 정치에 관여한다. 그는 경제적수탈, 정치적 지배수단에 의한 압제, 전쟁을 현실 정치의 위기로 지적하고 물리적 투쟁보다는 자연과 도에 대한 사유를 통해 병리학적  허영과 자기 상실을 극복하기 바란다. 그의 이상사회론은 문명에 대한 교훈을 되새기는 비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사사유를 이해하는데 더 적합할 것이다. 시원적 사회가 갖는 비폭력성과 무계급성, 무소유와 검소 및 정신적 안정성은 비록 그 기회가 사라졌지만 문명의 광포한 맹목성을 반성하게 한다. 최초의 것이 최후의 것이다. 이러한 노자의 철학은 보다 근원적이고 반성적으로 사유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전승되어 새로운 문맥에서 작용할 수 있는 창조적 가능성을 여전히 품고 있다. 그의 사유는 타인을 위하기에 앞서 타인을 위하는 태도 자체를 반성적으로 음미하게 하고 자신의 삶을 문제로서 제기하게 하는, 음미하는 삶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 이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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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논어보다 노자의 도덕경을 먼저 읽었다. 그러나 십몇년전쯤 선배들 학습모임에 우연히 몇번 끼였다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장난처럼만 느껴져 포기하고 만 기억에서 지금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그때보다야 몇구절쯤 조금 더 의미가 와닿긴 하지만 말이다.
 
小國寡民. 使有什伯人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民 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國相望, 犬之聲相聞, 民至老死, 不相往來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다. 많은 기계가 있지만 사용하지 않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생명을 소중히 여기게 하고 멀리 옮겨 다니지 않도록 한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그것을 탈 일이 없고, 무기가 있지만 그것을 벌여놓을 필요가 없다. 백성들은 결승문자를 사용하던 문명 이전의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며, 그 음식을 달게 여기고, 그 의복을 아름답게 여기며, 거처를 편안하게 여기며 풍속을 즐거워한다.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볼 정도이고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까워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내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고 하나하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순리란 무엇일까? 인위적 규제가 아닌 자연의 근본적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 존재 가능성 여부를 떠나 어떤 모습일지 내게는 상상조차 잘 되지 않는다. 내가 바랬던 세상 또한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니 비슷할 법 한데, 어쩌면 난 이미 상당히 자포자기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엔 혁명을 상상하기 쉬웠다. 힘들 때마다 우리 손으로 변화된 세상을 꿈꾸며 현실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만큼 인간과 세상에 대한 믿음이 있었는데 사실 그 것은 지나치게 협소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지금 떠오르는 건 자본주의의 거대한 구조 한 켠에서 극소수로 존재하는 일단의 운동세력이다. 예전보다 훨씬 폭넓고 다양해졌지만 결코 자본주의의 심장을 꿰뚫지 못하는 - 그저 자기만족적인, 개인이나 소수집단일뿐인. 운동을 쉬는 몇년 사이 자신은 겨우 추스렸지만, 함께 했던 이들 속에서 받은 상처는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삐딱하게 불신으로까지 자리매김했나보다. 순수한 열정보다 숨겨진 권력욕에, 변화와 혁신을 내세우며 스스로 변화하지 못하는 구태의연함에 먼저 눈길이 간다. 그러면 그렇지. 말로는 함께 살자고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이기적인 자본주의적 인간에 불과한 걸. 특별한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는 말이다.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躁勝寒, 靜勝熱. 靜天下正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 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삶은 날마다 전쟁인데 고요해질 수 있는 걸까. 성인만이 가능하겠지. 아침마다 비비적거리다 겨우 일어나 출근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렇게 살고 싶은 거였니? 하지만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조금씩 자포자기하며 남들처럼 그렇게 사는 거지. 대단한 현장활동도 아니고 구멍가게만한 직장에서 눈치보고 욕 얻어먹어가며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월급날만 기다린다. 그동안 별나지 않다고 생각해왔었는데 외모에 손톱만큼도 투자 않는 나를 주변에서 더 못 견뎌한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구닥다리 핸드폰이며 변변한 보험 하나 가입하지 않는 내 똥배짱에 동료들은 놀라고 안타까워한다. 이렇게 생겨먹은 나를 인정하라는 것, 분명히 그들의 상식에선 어려운 일이고 이런 소규모 사업장에선 딱 왕따되기 좋은 조건을 갖추게 된것이다. 이런 거였구나. 다행히 왕따는 면했지만 때때로 소외감을 느낀다. 잠깐 돌아서면 대단치도 않은 일로 씹어대는 습관성 뒷담화도 싫고 틀에 박힌 쇼핑, 남자 얘기도 재미 없다. 이런 식으로 튀고 싶지 않은데 결국은 그렇다. 그래서 좀 외로워진다.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을 뿐이다. 잠들기 전엔 출근할 자신이 없어지지만 아직은 좀 더 버텨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뭘 하며 살고 싶은 건지 대안도 없으니까 말이지.
 
맑고 고요함,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세상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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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3 23:42 2009/08/23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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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09/08/09 15:57

논어

 

"사람됨이 효제로우면서 위계 질서를 어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위계 질서를 중시하면서도 난을 일으키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군자는 근본에 힘을 써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근본이 바로 서야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효제라는 것은 바로 인을 이루는 근본인 것이다."

- 논어, '학이'중에서

 

'논어'는 공자의 어록이며, 공자의 제자들과 문인들의 대화나 행동에 대한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이자 사상가로 꼽히는 공자의 면모를 현대인들이 근거리에서 직접 파악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공자는 한나라 이후 유교가 중국의 공식 지배 이데올로기의 위치에 오른 뒤로 2천 년 동안 줄곧 성인의 위치를 차지해 왔으며 중국 문명을 뒷받침해온 주요한 이데올로기였다.

공자의 이상은 주나라 초기의 안정적인 봉건적 사회 질서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봉건적 사회 질서라는 것은 강력하고 안정적인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와 혈연적 상하 관계를 연상시키는 왕과 신하들 사이의 엄격한 위계 질서를 그 핵심 내용으로 한다. 즉 통치자는 단순히 정치 권력의 소유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자식처럼 보호해야 할 부모와 같은 권한과 책임의 소유자이며, 신하와 백성들에게 있어서 통치자는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받들어야 하는 부모와 같은 존재로서 상호 인정과 신뢰가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공자는 높은 덕성을 갖춘 통치자의 어진 정치와 그에 대한 백성들의 충심으로부터의 복종이라는 덕치를 주장했으며, 정치질서와 사회 윤리는 다 함께 효제라는 가족 윤리로부터 출발함을 역설했던 것이다. 또한 그럼 규범적이면서도 조화로운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을 '인'이라고 보았다. 인은 도덕적 규범과 행위의 규칙이 인간성의 깊숙한 곳에 내면화되어 있어서 자연스럽게 질서와 규범을 받아들이며 외적인 강제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도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적 규칙의 속박을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가리킨다.

현대적 시각에서 볼 때 '논어'는 지배 계층의 개인적 도덕성을 지나치게 중시하는가 하면 위계 질서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정치 사회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어서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노예제 사회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춘추 시대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공자의 그런 관점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논어'는 정치 사회적 불안정의 극복은 궁극적으로 사회 구성원 개인의 이기심이 절제되고 검약과 겸양의 정신이 모든 구성원들에게 내면화될 때만 진정으로 가능해질 것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고전도 그렇지만 한문은 더 어렵다. 제목은 알고 있으되 손이 가지 않는 책 - 고전, 그중에서도 한문 원전인 책은 더욱 그렇다. 더운 날을 핑계 삼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한두장씩 설렁설렁 그렇게 논어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풀이글 중심으로 읽다보니 의외로 그럭저럭 읽을만했고 많은 부분이 한번쯤 들어본 문구들이어서 아! 생각보다 현실속에 공자의 사상이 가까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실 진작에 이 책을 읽었지만 뭔가를 쓰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끊임없이 전해오는 쌍용자동차 투쟁소식과 아직 서투른 직장 업무에 대한 부담감, 일 끝난 후엔 겨우 저녁밥 해먹고 지쳐 잠들고 마는 쳇바퀴같은 일상에 조금씩 숨이 막혀왔다. 게다가 오래전 헤어짐의 기억에 우울함까지 겹쳐졌다.  책을 읽는다고 소인이 당장 군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신영복은 '논어'를 '인간관계론의 보고'라고 하며 진보진영의 모습까지 비추어보기도 했지만 말이다.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知者 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  論語 雍也

여러번 읽고 들었음에도 논어의 구절인 줄은 미처 몰랐었다. 좋아해서 써먹은 적도 있었는데 ㅜㅜ 아는 것보다도, 좋아하는 것보다도, 스스로 즐기는 것 - 그렇게 살고, 일하고 싶었었다. 하지만 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삶이 그렇게 쿨할리 없다. 그저 억지로 하는 숙제처럼 낑낑거리면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낼 뿐이지.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 論語  學

스스로 쌓은 담 때문에 나는 더 외로운 지도 모른다. 틀에 박힌 이 문구를 들여다보다 문득 깨달았다. 이제 나는 더이상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서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조금 활동은 다시 시작했지만 예전과는 달라진 것이다. 모임에서 만나는 낯선 얼굴들에 대해 나는 묻지 않는다. 그 사람이 누군지 뭐 하는 사람인지 관심도 없고 굳이 애써 인사하거나 얘기나누지 않는다. 특히나 남성이라면 더욱 더. 그저 내게 말 걸어오는 사람, 몇몇 아는 사람들과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뿐. 하기는 이미 알아왔던 몇명조차 아직 서로 어색하거나 무관심하다.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그 간격은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내 심장 깊은 곳에 위치한 인간에 대한 경계령도 쉽게 풀리진 않겠지. 먼 곳에서 찾아오는 벗 따위 결코 내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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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9 15:57 2009/08/09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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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영화 2009/06/21 12:30

The Reader 2

                 

 

 

 동영상http://serviceapi.nmv.naver.com/flash/NFPlayer.swfvid=DDE2077C4C8F80C0C028F8E7114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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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말해주듯 이 영화의 화자는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던 바로 그 어린 '남자'이다. 그녀를 만나는 동안 물론 그는 몸과 마음을 다해 그녀를 사랑했지만 몇년후에 법정 앞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그녀를 적극적으로 변호할 용기도, 완전히 모른척하고 살아갈 뻔뻔함도 갖지 못한다. 그랬다. 그는 단지 감성적이고 소심한  지식인에 불과했다. 그의 직업은 변호사이다. 도대체 그는 누구를 변호하려는 것일까? 그녀 아니면 자기 자신? 그의 내적 갈등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했고, 가석방 전날 만난 그녀를 대하는 태도에서 숨김없이 드러났다. 결국 그녀는 그날 밤 자살하고 만다. 이제 그는 그녀를 대신해 학살에서 살아난 유태인 작가에게 화해를 청하고 오랫동안 서먹하게 지내온 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는 비겁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금발 머리가 희끗희끗 변하도록 그는 마음의 벽을 쌓고 그저 자신의 삶을 살 뿐 그녀를 외면했다. 당연히 그에게도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 그녀를 이해하고 용서할 시간. 그리고 사실 누구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그녀는 유태인 학살의 피라미드 가장 아래에 있는 단순한 하수인일 뿐이었다. 정작 학살의 책임자로 법정에 세워지고 중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쉽게 용서하지 못한 것은 그만큼 순수하게만 그녀를 사랑해서일까? 혹시 지식인으로서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 아니고?!

 

사랑이 모든 것을 용서할 수는 없다. 나 역시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하지만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안다. 때때로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랑도 있음을. 중요한 것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누구나 조금씩은 불완전하고 크든 작든 실수를 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수를 인정하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자기반성과 변화이다. 적극적으로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것- 사랑한다면 더욱더 말이지. 그래서 그녀가 아쉽다.. 그러나 책 읽어주던 멋진 그 남자 - 그는 여전히 살아있으므로 기회를 갖게 되겠지.. 

 

왜 이 영화에 연연하게 되는 건지 잠시 생각해본다. 아마 나는 '그'의 모습을 통해 현실앞에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이 싫었던 모양이다. 알지만 바꾸지 못하는, 지식의 무력함 말이다. 그는 주변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말많고 해박한 이론가들일 수도 있지만 뒷전에서 무심하게 책이나 읽고 이렇게 글이나 써대는 나일 수도 있다. 예전에 종종 침묵하는 대다수 민중에 대한 갑갑함으로 좌절하곤 했는데 어쩌면 요몇년간의 내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해 무척 찔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알게 되었다. 모두가 최전선의 투사가 될 수는 없음을. 전체운동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빛깔과 모양에 맞는 다양한 역할이 필요하다. 운동은 결코 빛나는 이십대, 삼십대에 끝나지 않는다. 활동가들조차 굳이 경험과 나이에 걸맞는 '자리' 와 '역할'에 연연하는 강박관념은 한편으론 우습다. 머리가 하얗게 세져도 민중들속에 섞여 조화롭게 투쟁할 수 있는 힘, 죽을때까지 운동은 쭈욱 계속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 고개를 넘은 셈이고, 지금 내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추스리면서 내 빛깔을 찿게 될 시간. 이런 허접한 글들 또한 그 속에 존재한다. 이 엄혹한 시절의 한끝에서 그렇게 나를 변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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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1 12:30 2009/06/2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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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영화 2009/06/16 22:20

The Reader

                   

 

동영상 http://serviceapi.nmv.naver.com/flash/NFPlayer.swfvid=DDE2077C4C8F80C0C028F8E7114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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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도 책 읽어주는 남자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읽지 못하는 세계를 스스로 고민하고 해석하기 보다는 똑똑한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은 적이 많았다. 나보다 지적으로 우월한 그 누군가는 분명히 남성일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하여튼 그의 음성을 통해 사랑 뿐만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면,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나도 행복감에 빠져들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유는 너무도 많지만 치명적으로 그녀는 글을 읽지 못한다.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책을 읽어주는 남자와 듣는 여자, 영화 속 장면은 행복한데 나는 왜 이 대목에서 슬픈가? 책은 마치 또 하나의 권력처럼 느껴진다. 아름답고 연륜있는 그녀가 갖지 못한 능력, 훨씬 어린 남자는 그것을 갖고 있음으로써 그녀와 동등해지거나 오히려 우위에 서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세상의 기준에 꼭 맞게 보이지 않는 그들의 관계는 적절한 시점에 그녀가 떠남으로써 끝난듯하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덧 유태인 수용소의 충실한 감시원이 되어 교회 안에서 타죽는 수많은 사람들을 내버려둔다. 감시 - 그것이 그녀의 임무였으므로. 정작 책임자도 아니면서 스스로 책임을 인정하고 유태인 학살의 주범으로 재판 과정에서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녀, 지켜보던 남자는 소리없이 절규한다. 그녀의 잘못은 무엇인가? 무지함 또는 무관심 - 그녀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과 세상에 대해서. 그러나 그랬던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음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그녀와 법대생으로 참관하는 그, 둘 사이의 거리는 참으로 멀게 느껴진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변호사가 된 그가 보내온 테이프를 통해 마침내 그녀는 스스로 글을 읽고 쓰게 된다. 그리고 수년만의 만남임에도 아직도 정의와 그녀에 대한 감정속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뒤로 하고, 그동안 둘 사이를 이어온 소중한 책들 위에 올라서서 자살하고 만다.

 

보고 나서도 가슴이 설레듯 아리듯 잠 못 이루는 영화가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바로 이런 영화 말이다. 왜일까? 감성적인 여자들이 흔히 그러듯 내게도 결핍된 지식에 대한 열등감으로서 지적인 허영심이 존재한다. 당연히 똑똑한 남자가 멋있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잘난 척하는 꼴은 차마 못본다. 나를 넘어서는, 그러나 나를 뛰어넘지 않을 정도의 부드러운 지적 능력.. 얼마나 유치한 생각인가. 그렇게 부러우면 스스로 똑똑해지면 그만인데 말이다. 도넘게 천재수준을 원하지 않는 한 따지고 보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닌 것을ㅋ 하여튼 현실에서든 영화에서든 순진하고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여자와 지적이고 멋진 남자의 공식은 아주 질릴 지경이다. 실제로 사제간도 아닌데 언제어디서든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싶어하는 남자들과 당연하듯 질문해대는 여자들, 그 틈에서 내 어중간한 감수성과 지식은 늘 밀리게 마련이다. 그럼 나는 어느 쪽일까? 책을 읽어주는또는 듣는 - 물론 어중간하다 그러나 사실 둘 다이고 싶다. 어느 한쪽이든 일방적이지 않고 서로가 좋아하는 책을 함께 읽어 주고, 듣고 싶다. 같은 여자들끼리도 좋지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신나겠지. 아, 언젠가 나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랑하는 그와 함께 책 읽을 수 있기를.. 그때 이 영화도 다시 봐야지. 물론 그이와 같이ㅋ

 

영화속 그녀는 너무 아름답고 슬프다. 그녀는 살아서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더 많이 사랑했어야 했다. 용서는 그렇게 구해야 한다. 죽음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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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6 22:20 2009/06/16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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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09/06/07 12:08

법의 정신

'국가 구조는 자유로운데 시민은 조금도 자유롭지 않은 일이 있다. 반면 시민은 자유로운데 국가구조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국가 헌법은 법률상 자유이면서 실상 그렇지 않고, 시민은 실상 자유스러우면서 법률상 그렇지 않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나는 헌법과의 관계 속에서 정치적 자유를 형성하는 법과, 시민과의 관계 속에서 정치적 자유를 형성하는 법을 구분한다. 자유라는 말처럼 여러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의 마음에 다양한 영향을 준 말도 없다. 즉, 모든 사람은 그들 자신의 관습,기호에 가장 적합한 정체에 자유라는 이름을 적용하였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자유는 공화정에 존재하며, 군주정에서는 배척되었다고 말하여진다. 결국, 민주정에서는 인민들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대부분 행동하는 듯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정체가 가장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되었고 인민의 권력은 자유와  혼동되었다.

정치적 자유는 결코 무제한의 자유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국가에 있어서 즉 법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에 있어서 자유란 단지 그가 원하는 바를 행할 수 있고 또한 그가 원하지 않는 바를 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자유란 법이 허용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권리이다.

 

모든 국가에는 세 종류의 권력이 있다. 입법권, 만민의 법에 관한 사항을 집행하는 권력 및 시민법에 관한 사항을 집행하는 권력.....입법권과 집행권이 한 사람이나 또 한 무리의 지사(magistrate)들의 수중에 집중된다면,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재판권이 입법권과 결합된다면 시민의 생명과 자유는 자의적 권력에 노출될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이나 또는 군주, 귀족 혹은 인민과 같은 한 무리가 이 세 가지의 권력, 즉 법을 만드는 권력, 공공의 의결을 집행하는 권력 및 각 개개인의 범죄와 불화를 재판하는 권력을 행사한다면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중에서

 

 

 

몽테스키외(1689~1755)는 프랑스 정치 철학자로서 1748년 '법의 정신'을 출판하여 정치 이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그 이전에 저술된 '페르시아 인의 편지'를 통해 이슬람과 기독교를 비교하고 로마 교황청의 정책을 반추하면서 우상 파괴적인 비판 정신과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여 인간은 이미 사회에서 태거났으므로 사회 및 정부의 기원에 대한 탐구는 헛수고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는 '법의 정신'으로 이어진다. 몽테스키외는 법이 정부의 다양한 형태와 긴밀하게 연관된다는 사실과, '좋은 정부'라는 규법적인 전망 안에서 법이 자유를 이끌어 내는 경로를 밝히고자 했다. 자유를 위해서는 통치자 및 피통치자 모두를 편견으부터 해방시키고 교육을 확대하여 만인에 대한 사랑을 포함한 일반적인 덕을 함양하는 계몽이 필요하다는 것이 몽테스키외의 입장이다. 그는 또한 민중의 권력과 자유를 구분하여 자유와 민주주의 사이에 거리를 두고 있다. 즉 정치적인 절체라는 공리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법의 보호 아래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자유 개념은 이원론적인 성격을 띠면서 갈등을 빚는다. 즉 정부 권력에 의해 자유가 침해되는 사태를 제거하거나 최소화하여 개인의 독립과 자율을 보장하는 소극적 개념으로서의 자유와, 시민적 덕을 추구하는 적극적 개념으로서의 자유의 개념이 그것이다. 자유가 후자의 개념으로 나타날 때, 시민의 정치적.도덕적 의무는 적극 통제된다. 그가 자유의 본질적 전제로 제시한 '절제'라는 조건은 권력의 제한 내지 시민의 헌법적이고 사법적인 자유로 귀결된다. 즉 엘리트에 의해서 주도되는 제한적 정체를 추구한 것이다. 특히 공화정의 자유와 군주정의 강력함을 결합시킬 수 있는 연방 체제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이런 점에서 몽테스키외는 고전적 공화주의에서 근대적 자유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해 볼 수 있다.

'법의 정신'은 3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에서 법을 사물의 성질로부터 발생하는 필연적인 관계로 파악했으며 4편부터 10편까지 법이 각 정체의 성질과 원리와 관련해서 제정되고 집행되어야 함을 설파한다. 11편부터 13편까지는 정치적 자유와 관련하여 법을 고찰하고 있으며14편부터 18편까지 자연 환경이 인간의 기질과 열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며 이에 대한 입법자의 관심이 필요함을 촉구한다. 19편에서 일반 정신 및 풍습에 관해 고찰하며20편부터 22편까지 상업에 관한 제반 문제가 검토돈다. 23편에서는 부권의 역할을 강조하며 24편부터 25편까지는 종교에 관한 고찰이다. 26편부터 29편까지 인간을 지배하는 자연법, 종교의 법인 신법, 만민법, 일반적 정치법, 특수적 정법, 각 사회의 시민법, 가법등의 관계를 검토하면서 각 법의 영역이 존중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마지막 30,31편에서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귀족 지배 체제가 수립된 과정을 일별한다.

 

아마 거의 한달쯤 이 책을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방대하고 세세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시간만큼 집중이 되지 않았으며 고민도 해 보지 못한 채 일단 책을 덮는다. 현실속에서 법은 무엇인가? 때론 민중의 목을 겨누고 때론 죽지 않을만큼의 권리 정도만 보장해주고 때론 아무것도 아닐 뿐이다. 오래전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했지만 아직까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한편으론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리라' 노래까지 만들어 부르며 그때그때 새롭게 업그레이드되는 악법들에 맞선 투쟁을 해보지만 매번 좀 잠잠해졌다싶으면 날치기되기 일쑤이다. 민중의 뒤통수를 치며 끊임없이 열사들을 탄생시켜 온 법,  가끔 활용해보지만 근본적으로 법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장하는 법은 무엇인가?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법 같잖은  현실 속에서도 정작 구체적인 탐색을 하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이것 또한 나의 한계임을 인정하자. 단 자유의 정의와 법으로의 구현에 대한 의심은 남겨두기로 한다. 그리고 시대와 인물을 뛰어넘는 여성, 인종에 대한 아래의 문제적 구절도 되새겨보자.

 

 

 '군주정체에서 여성은 거의 근신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관들이 그녀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이므로, 거기서 군주정체에서 용인되는 거의 유일한 것인 자유의 정신에 젖어들기 때문이다. 각자는 자기의 입신출세를 위해 여성들의 애교와 정열을 이용한다. 그리고 그녀들의 섬약함은 자부심을 허용하지 않고 허영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므로, 사치가 항상 그녀들과 함께 번성한다.

전제국가에서는 결코 여자들이 사치를 채택하지 않지만, 그녀들 자체가  사치품이다. 극단적으로 그녀들은 노예일 수밖에 없다.

공화정체에서 여자는 법에 의해서는 자유지만, 습속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다. 사치는 추방되고, 그와 더불어 타락도 악덕도 추방된다.

그리스의 여러 도시, 즉 남성들 사이에서조차 습속의 순박함이 덕성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정해놓은 그 종교적인 생활을 하지 않고, 또 맹목적인 악덕이 제멋대로 행해지고, 남녀간의 사랑이란 한낱 형식이고 결혼생활에는 그저 단순한 교유 관계만 있던 그리스의 도시에서는 여자의 덕성. 천진성. 순결은 대단한 것이어서, 그 점에 관해 그 이상 훌륭한 정치를 행한 민족은 일찍이 없을 정도였다.'

 

'인류의 본질을 피부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환관을 만드는 아시아의 여러 민족은, 흑인이 우리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부분을 분명하게 제거하는 것이다. 피부색은 머리털의 빛깔로 판단되는데, 세계에서도 가장 뛰어난 철학자인 이집트인 사이에서는 이 머리털의 빛깔이 대단히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붉은 머리털의 인간이 눈에 띄면 모조리 죽였던 것이다.

흑인에게 지적 능력이 없다는 증거는, 그들이 문명국에서 대단히 귀중히 여기는 금목걸이보다도 유리 목걸이를 중히 여긴다는 점이다. 그들을 인간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그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교가 아니라고 의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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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7 12:08 2009/06/07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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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순간 2009/05/11 22:31

'착한소비'에 반대한다

 

오늘 한겨레 신문 경제면에 '세계 공정무역의 날'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착한 커피, 착한 옷 그리고 착한 소비 - 최근 공정거래 무역제품이 등장하면서 함께 사용되는 용어들이다. 제품 생산과정의 투명함과 공정성을 감안한다 해도 엄연히 자본주의 시장속 상품에 '착한'이라는 선악이 대조되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더군다니 '착한 소비'라니, 솔직히 기가 막히다. 그러면 그 외의  소비는 '나쁜 소비'이고 '나쁜 소비자'인가?

 

자칭 '착한 소비'는 그러나 경제적 빈곤층에겐 턱없는 일이다.  친환경이니 유기농이니 하는 것들은 값싼 원료를 사용한 저가 상품보다 한참 비싸다. 다른 것을 덜 소비하면 된다고? 결코 의지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 상품을 지불할 돈을 갖고 있는 자, 그가 결국 '착한 상품'의 주인공 즉 착한 소비자가 된다. 좋은 제품을 갖고 착하기까지 하다니,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거꾸로 말하면 불량한 제품을 구매하고 나쁜 소비자까지 되는 셈이다. 

 

나도 좋은 제품을 사고 싶다. 소위 친환경 제품들, 인간과 지구의 공존을 고려한 제품들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내 소비의 기준은 거의 '가장 값싼'  것들이다. 왜냐고? 저임금 노동자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경일도 쉬지 못하고 하루에 10시간 반을 일하지만 월급은 100만원에 불과하다. 그 돈으로 기본생계를 유지하고 대출금도 조금씩 갚아야 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태권도 학원도 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최대한 아껴쓰고 대부분은 가장 저가의 상품들만 선택하게 된다. 몰라서가 아니다. 알고도 어쩔 수 없이 감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되먹지않은(!) 윤리적 잣대에 화가 난다. 왜냐면 나보다 경제적으로 빈곤한 이들 역시 많을 테니까. 단지 그런 상품을 구매할 수 없다고 해서 '나쁜  소비자'로 몰리고 싶지는 않다. 자본주의 경제구조속에서 빈번하게 자행되는 아동, 여성등에 대한 노동착취 문제의 대안으로 제시된 세계 공정무역 또한 돈으로 도덕성까지 점수매기는 자본주의 방식까지 포기하지는 못한 걸까?     

 

'착한'이라는 표현에 반대한다. 모든 사람이 '돈'의 있음과 없음을 떠나 자유의지로 그런 상품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 때 '착한'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것이다. 그 전엔 현재의 공정거래무역제품 정도면 무난하겠다. 물론 생산부터 유통과정까지 얼마나 공정한지 자세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이름에 걸맞는 공정한 상품이길 기대하며 혹시나 조금이라도 피흘리는 노동이 있지 않기를 바란다. 더불어 경제적 부담없이 자유롭게 나와 내 아이가 노동착취 없는 상품을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이 이렇게 억울하게 욕먹기전에 빨리 오기를, 간절하게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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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1 22:31 2009/05/11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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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09/05/10 22:13

통치론

'만약 국가의 힘을 장악하고 있는 행정권이 최초의 기본법이나 공공의 긴급사태가 입법부의 소집과 활동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해하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겠다. 아무런 권한 없이 그리고 그에게 맡겨진 신탁에 반해 인민들에게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인민과 전쟁상태에 들어 가는 것이며, 인민은 그들의 권력을 행사하여 그들의 입법부를 본래대로 회복시킬 권리를 가지고 있다. 입법부를 설치한 의도는 입법부로 하여금 사전에 정해진 시기에 또는 그러한 필요가 있을 때 입법권을 행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법부가 사회에 그토록 필요한 그리고 인민의 안전과 보존이 걸려 있는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무력에 의해서 방해받을 경우, 인민은 그것을 무력에 의해서 제거할 권리가 있다. 상황과 조건을 불문하고 권한 없는 힘의 사용에 대한 진정한 치유책은 힘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권한 없이 힘을 사용하는 자는 항상 침략자로서 전쟁상태를 자초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와 같이 취급 되어 마땅하다.'

 

- 존 로크 '통치론' 중에서

 

존 로크(1632~1704)는 근대 철학의 3대 조류 가운데 하나인 경험론을 최초로 이론적으로 체계화했으며 또한 현대의 지배적인 사회 사상인 자유주의의 전통을 세운 철학자이다. '정부론'은 명예 혁명이라고 하는 정치적 대립 속에서 휘그당이 추구하는 정치적 원칙들을 정당화하는 정치 철학을 제시하는 글이며 당시 영국 시민 계급의 정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 사상은 그의 당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18세기에 모국인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던 미국인들에게 그의 저항권 사상은 미국 독립 혁명의 이념적 원리로 신봉되었다.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추구한 근대 시민사회의 구성적. 조직적 원리를 제공하였으며 진보적 사회사상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노동에 의한 소유' 이론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를 비판할 이론적 근거로 수용되었다. 로크의 기대와 달리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에 의한 소유'가 '소유에 의한 소유'로 변질된 사회이기 때문에, '노동에 의한 소유'를 살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노동하는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사회주의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론'은 두 편의 논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 1론은 '로버트 필머 및 그 추종자들의 그릇된 원칙과 근거에 대한 지적과 반박'으로서 왕권신수설을 주장한 필머를 반박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제 2론은 '시민 정부의 참된 기원, 범위 및 목적에 관한 시론'으로, 사회계약론을 기초로 하여 로크의 사회사상이 세부적으로 개진되고 있으며 현재의 번역본은 모두 2론만이 번역되어 있다.

 

'자연적으로 가족의 아버지는 감지하기 어려운 변화에 의해서 동시에 가족의 정치적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연히 오래 살기도 하였으며 또 유능하고 탁월한 후계자들을 몇대에 걸쳐 남겨놓은 경우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연, 의도적인 창안 및 기회가 영향을 마침에 따라 여러 가지 체제와 관행하에서 세습제적 왕국과 선거제적 왕국의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군주의 자격이 부권으로부터 유래하며 사실상 아버지들이 통상 통치를 담당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이 아버지가 정치적 권위를 자연적 권리로서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된다는 논변을 고려해보자. 만약 이러한 논변이 유효하다면, 그 논변은 모든 군주는 , 아니 오직 군주만이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논변을 강력히 지지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최초에 가족의 아버지가 제사장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그 집안의 지배자였다는 사실만큼이나 확실하기 때문이다.'

 

고전을 읽으면서 특히 여성과 노동에 대한 부분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는데 존 로크의 '통치론'에서 가족에 대한 내용은 놀랍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족제도, 가부장제의 모습이 부권과 군주의 비교를 통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가족과 정치사회는 비록 성격과 목적이 다르지만 가장과 군주가 구성원의 '자발적인 복종'에 의한 지배권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즉 가부장제에 의해 가족은 유지, 보호받는다는 것이다.

 

가부장은 아니지만 하여튼 나도 가장이다. 흔히 말하는 결손 가정 중 모자가정, 최근엔 한부모가정이라고 한다. 나와 아이는 법적으로 가족이고 엄마인 나는 아이를 부양할 의무를 갖는다. 그러나 나는 아이에 대한 통치권을 갖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아이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해갈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줄 뿐이며 그 과정을 통해 나라는 인간 또한 성장해갈것이다. 무한한 존경, 존중, 지원 및 복종을 받을 항구적인 권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쫌 욕심은 나지만~ㅋ  그치만 아이에게 나는 분명히 권력을 가진 존재일 것이다. 흔히 아버지가 만만한 가족에게 그러하듯 나도 밖에서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사소한 아이의 실수에 터뜨릴 때가 있다. 이유는 있으되 합당치 않은 분노에 대해 아이는 분명 스스로 약자라고 느낄 테고 나 또한 열두살 아이 앞에서 턱없이 커진 자신을 느낀다. 또한 '이 모든 게 너를 위한 거야' 라는, 사실은 자기중심적일뿐인 논리를 가끔 나도 들이대는데 그만큼 일상생활속에서 아이의 감정과 생각을 일관되게 존중해주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왕이 아닌 평등한 가장은 어렵고 험난하다. 권리만 강조하는 아이와 권력을 남용하는 엄마, 가정이라는 작은 왕국 안에서 우리 둘 다 게으른 왕이다. 가족의 재구성,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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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0 22:13 2009/05/10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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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순간 2009/05/08 21:10

분노하고 싶지만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느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시집 {거대한 뿌리}, 1974)

......................................................................................................................................................................................

 

소위 노동운동판에서 껌 좀 씹어댔지만,

먹고사는 현실 앞에선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았다

직원이래야 일곱명뿐인 개인사업장에서

기껏 입사한지 석달째인 나이 많은 막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없다

그러나 허울뿐인 근로계약서에 서명하고

받지도 않은 성평등교육용지에 이름을 적어대며

결국 나 또한 무기력한 노동자일뿐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 안되는 거잖아요'

무심한 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최대한 느릿느릿 서류를 읽고 서명을 하며

소극적인 반항 흉내를 내볼 뿐..ㅋ

 

혼자일 때,

노동자는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인간이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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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8 21:10 2009/05/08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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