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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금일봉

주선생님과 저는

적은 생활비로 버티기 분야에서

남부럽지 않은 실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수입이

육아휴직 전보다 더 적어져서

그 실력을 더욱 마음껏 발휘 중입니다.

 

한국에서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이

딱히 거액 연봉자일리가 없고

 

육아휴직 쓰는 남자한테

정부가 장하다고 돈을 듬뿍 주지도 않습니다.

 

누군가한테 지금 육아휴직 중이라고 말했다가

"마누라가 돈 잘 버나 보네..."라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속이 좀 상했었습니다.

 

돈 걱정 없어서 육아휴직한 게 아닌데

이해 받지 못하니까 속상한 것도 있었고

 

실제로 생활비가 쪼들리기도 한 것이

좀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엊그제 서울 올라오시기 2, 3일 전에

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시더니 말씀하십니다.

 

"상구야, 너 먹고 살만은 한 거냐...?"

 

아니,

굶어죽어가면 어떻게 이런 힘찬 목소리로

통화를 하겠습니까? 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냥, "에이..그럼요..그런 것 신경 좀 쓰지 마세요..."

이러고 말았습니다.

 

근데 부모님은 이 점이 계속 걸렸던 모양입니다.

 

서울 올라오셨는데

저를 좀 측은한 눈빛으로 보십니다.

 

그런 분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건

두 장의 종이 덕분입니다.

 

현관 입구 신발장 위에

어느 월간지 구독료를 일주일 안에 내라는

고지서가 놓여 있었습니다.

 

사실, 좀 게을러서 못 냈던 데다가

우리가 깜빡하고 못 치워서 거기 있었던 건데

 

아버지께서 들어오시다가

그걸 보셨습니다.

 

눈빛이 흔들리는 걸 봤습니다.

 

게다가 제 책상 위에

상하수도 요금 고지서가 있었는데

공과금 낼 게 많아서 어떤 건 내고 어떤 건 안 내다가

빠뜨린 게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버지는 그걸 또 어떻게 발견하고

한참 동안 보셨습니다.

 

아, 이것 참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저와 주선생님이

가난한 부부의 표준형이 되는 분위기입니다.

 

"왜 이렇게 로션을 자주 발라주냐~?"

 

"아....이거요? 미루가 아토피 기운이 좀 있어서

시도때도 없이 로션을 발라줘야 되거든요.

인제 거의 괜찮아졌어요..."

 

"이렇게 많이 바르면 로션값도 많이 들겠다...

에구, 우리 미루... 할머니가 로션값이라도 줘야겠네.."

 

부모님은

내려가시면서

'금일봉'을 놓고 갔습니다.

 

로션을 한 30개는 살 수 있는 큰 돈 입니다.

 

다음에 오실 때는

온갖 고지서를 집에 뿌려놓고

미루 로션도 좀 더 비싼 걸 발라주면

훨씬 기쁜 일이 생기겠다는 사악한 마음이 잠시 생겼다가 사라졌습니다.

 

"우리 미루 내일 예방 접종 해야 되는데

접종비 생겼네..."

 

주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가부장제 안에서 사는 부모님.

성평등을 외치는 자식.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 많아서

맨날 다툼이 많지만

 

이 와중에도

그 고집스러운 내리사랑은

여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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