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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질문은 생략)

 

 

A 하나 묻겠습니다. 그 ‘남들’이란 게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전 그것이 상상의 산물이 아닐까 합니다. 예로 제 주변의 ‘남들’은 죄다 외둥이입니다.환경 살짝 바꾸면 너무나 쉽게 ‘남들’의 실체도 바뀝니다. 달리 말해 명확한 실체가 없는, 임의적인 ‘남들’ 신경 쓰는 것 너무 무모합니다. 걔들이 또 언제부터 그리 내 인생에 관심이 있었다고요.

그리고 이런 식으로 남들이 원하는 대로 참고 살면 점차 자신의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습관이 생기지요. 난 이렇게 고통받고 손해 보면서 맞췄는데 왜 이걸로 충분치 않으냐 하며 더 부합하려 노력하는 아이러니. 그런데 그동안의 인고의 세월 속의 여러 고통스런 사건들을 한번 나열해 보십시오. 강압적인 엄마, 휘젓는 친구, 잘난 티브이 속 인물 등 여러 등장인물이 거쳐갔겠지만 공통적으로 한 사람이 항상 그 자리에 있었지요. 다름 아닌 나 자신. 원흉은 강요하거나 권유하거나 분위기를 조장한 ‘남들’보단 그렇게 되도록 방치한 나 자신입니다.

꼭두각시 노릇은 잘하면서 스스로 결정하는 게 불안하고 미안한 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그 계면쩍음을 만회하려는 듯 참 부지런합디다.양자택일 선택의 기로서면 이들은 주로 ‘행동지향적’이 되지요. 어떤 선택을 할 때 안 해서 후회하느니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는 입장, 이게 훨씬 더 성실하고 능동적으로 삶을 사는 것처럼 비치고 ‘일단 난 할 만큼 했다’ 해서, 죄의식에서 사해질 것을 기대하니깐요. 그런데 놓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한다는 선택은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한다는 선택을 하는 것임을. 그것은 행동하는 것과 똑같은 무게를 가지는 것이고 절대 ‘용기 없음’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닌 거죠. 일단 이 양쪽을 대등하게 인식해야 진정한 의미에서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성질 급한’ 행동파들이 있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니 늘 ‘쫓기는 느낌’이 들 수밖에요. 본인들은 합리적이라 그렇답니다. 지금 첫애가 8개월인데 진작에 둘째 고민을 하는 것도 고생할 것, 아예 한꺼번에 고생하자 식의 주변 얘기들이 한몫했겠죠? 미리 생각해서 미리 대비하고 미리 계획을 짜놓지 않으면 불안하기도 할 테고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니 적어도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큼 프로젝트는 깔끔하게 잘 해치워내야 될 테니깐요.

아아 이런 습성들의 체질화는 묘사하신 대로 ‘자학’ 캐릭터를 탄생시킵니다. 고통과 불안과 불행의 상태가 훨씬 더 익숙해져서 도리어 편안하고, 뭔가가 고통스럽고 괴롭고 힘들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내가 인생 제대로 열심히 살지 않는 것’ 같은 이상한 죄책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 항상 사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려고 무의식적으로 애쓰게 됩니다.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 그 상태가 되레 ‘정상’이니깐요.

 

-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심지어 무엇인가를 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자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꼭 남을 의식해서만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엔 분명히 그것이 존재하는 것 같아..

그래서 자꾸 피동적이 되는것인가...

일을 하면서도 집에서도,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지는 것..

그리고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너무나 불안한 것.

돈을 벌고 있지 않아도 너무나 불안한 것.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아야겠지만 현실에 안주하지도 않아야하겠지

 

------드디어 다음주엔 이사를 가고 텃밭을 만든다.. 그래 그거라도 어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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