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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 주위 맴돌지 말고 일단 링 위에 올라가시오

링 주위 맴돌지 말고 일단 링 위에 올라가시오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한겨레  
 
 
» 링 주위 맴돌지 말고 일단 링 위에 올라가시오
 
Q 아직도 부모님께 생활비를 의지하는 프리랜서의 삶, 그만두고 직장을 잡아야 할까요?

저는 25살. 허울만 좋은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입니다. 사실 프리랜서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제가 했던 일들은 매우 적습니다. 부모님 도움 없이는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요. 사실 3년 전만 해도 제가 그림을 직업으로 삼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했기에 디자인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겠거니 했죠. 그러다가 대학 4학년 때 일러스트공모전에서 조금은 과분한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의 그림은 좋아.” 항상 고만고만하게 보일 듯 말 듯 살아왔던 저의 삶에서 처음 받게 된 칭찬이었어요. 저는 “그림을 잘해야지. 더 인정받고 싶어”라는 생각에, 전공을 접어두고, 일러스트에 집중했죠. 그러면서 아는 선배나 교수님을 통해 작은 일러스트 작업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저는 계속 그림을 일로 삼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졸업 후에도 저의 삶은 대학생 시절과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부모님께 생활비를 의지하고 있는 제 자신이 싫어집니다. 예전에 제 그림을 좋다고 했던 사람들의 칭찬도 이젠 빈말 혹은 위로같이 들리며 제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집니다. 취업하는 동기들을 보면 나도 그림은 접고 직장을 구할까 싶고요. 저는 계속 이렇게 보이지 않는 꿈을 좇아도 되는 걸까요? 계속 꿈을 향해 꼼지락거리다 보면, 원하는 것을 잡을 수 있을까요?

 

A 길을 가다가 벽 앞에서 딱 막혀버린 그 기분. 자신이 갈망했던 스스로의 이미지와 현재의 모습이 갭이 클수록 좌절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꿈을 이루는 길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공모전 수상 하나로 잘나가는 일러스트레이터의 위치까지 스트레이트로 길이 이어지는 운 좋은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고로 ‘내가 가졌던 건 자신감이 아니라 자만감이 아니었을까’ 혹은 ‘이 정도 상황을 봤으면 답은 나왔다. 포기할 수밖에 없겠다’라며 고민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포기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은 해보지만 포기할 수 없으니까 이렇게 고민하는 거잖아요.

‘벽’의 대부분은 인간의 불안과 고민이 제멋대로 크게 쌓아 올린 것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두렵고 고민하는 만큼 그 상상 속의 벽은 커져만 가지요. 그 벽이 허물어지려면 내가 생각과 고민을 멈추고 요리조리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꿈틀꿈틀 움직여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의 길이 막혔다고 해서 좌절하기엔 매우 아까운 상황인 것 같아요. 왜냐, 아직 당신은 지금 제대로 링 위에 올라가보지도 않고 포기하려는 것이니까. 엄밀히 말해 교수님이나 선배가 준 일은 일이 아닙니다. 연고가 없는 사람이 줄 때부터 프리랜서의 일은 시작되는 거지요. 남들이 해주는 그림칭찬이 빈말인지 위로인지 가늠해본들 마찬가지로 별 의미 없어요. 프리랜서의 세계에선 ‘팔리는’ 그림만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지요. 과거의 영광과 굴욕은 이제 겨우 밑그림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상상했던 이미지와의 갭에 매이지 않고 새롭게 행동을 일으키면 움직인 만큼 그 벽의 ‘틈’이 보이기 시작하겠지요.

한편, 행동을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참 ‘쪽팔리는’ 일입니다. 양반이나 선비가 아닌 장사꾼이나 머슴마냥 이리저리 분주히 벽 주변을 훑어보면서 어디 허물 데가 없을까 왔다 갔다 해야 하니 폼이 날 수가 없지요. 내 꼴이 우스울 수도, 무시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폼이나 쪽팔림 역시도 기웃거리는 아웃사이더의 위치에선 아무 의미 없는 자의식일 뿐입니다. 프리랜서의 세계에선 일단 지금 일을 가진 현역의 ‘인사이더’가 압도적으로 강자의 위치에 서 있으니까. 지금 당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은 이미 다른 일러스트레이터가 하고 있다는 얘기겠지요? 적어도 기존의 그들보다 30%는 더 확연한 가치를 주지 못하면 기존 포지션은 꿈쩍도 안 할 겁니다. 후발주자가 일을 쟁취해내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에요. 진열장 너머로 침 흘리며 투덜댈 여유조차 없습니다. 지난 월드컵 경기 때 단 한번도 출전 못한 축구선수들을 보세요. 똑같이 훈련하고 똑같이 따라다녀도 1군 선수들 중에 누가 다치기라도 안 하면 기회조차 없지요. 하지만 거기서 낙담할 순 없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나 여기 있소’라며 치고 들어갈 준비를 늘 하고 있어야 기회를 잡으니까. 당신은 틈나는 대로 대체 불가능한 실력을 키우고, 나를 어필하고, 롤모델을 만들고, 잠재적 클라이언트의 가려운 부분을 알아내고, 당장엔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정말 작고 하찮아 보이는 일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해나가며 조금이라도 ‘인사이더’가 돼야만 합니다.


 
»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어쩌면 프리랜서 일의 본질이라 하는 것은 ‘내게 적합한 것이 뭘까’ ‘난 정말 뭘 하고 싶은 걸까’라며 적성이나 재능을 묻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지 아닌지를 떠나 내가 부탁을 받았으니 어쨌든 최선을 다한다,가 스타트라인이 아닐까요? 잡일이든 험한 일이든 어떻게든 내가 일할 수 있는 장소를 많이 만들어서 부탁받은 일은 기분 좋게 성실히 하는 것, 그러다가 ‘아 나는 이런 종류의 일을 잘할 수 있구나’를 자연스레 깨닫게 되는 것, 더 나아가서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의 개념도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확장되는 즐거움을 얻기도 하지요. 그렇게 사람들의 일 의뢰가 점점 늘게 되면 그때 가서 그중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나가는 것, 그것이 ‘꿈’이 아닌 ‘현실’의 프리랜서가 가는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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