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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30
    데낄라~~
    파란달-1
  2. 2008/12/21
    [펌] 우리는 지는 방법을 몰랐다
    파란달-1

데낄라~~

머리털 나고 첨으로 데낄라를 묵었당

데낄라 몇잔에

내 인생이 떠오르고,

내 사랑이 떠오르고,

지난 억울함과 설움과 분노가 북받친다..

 

이유없는..

그냥 막연한 그런..

 

몇일전에 엄마가 클스마스 선물을 보냈다

택배로 온 선물은 빨간 통에 메리크리스마스라고 적혀있고

그 속에는 화장품, 속옷, 머리끈이 있었다

화장품샘플까지 박박 긁어놓은..

엄마한테 받은 최초의 클스마스 선물!!

그저 이 선물을 보내면서 엄마의 맘을 생각하니

자꾸만 슬퍼진다...

딸내미 한테 생전 첨 보내느 클스마스 선물..

이제 서른 중반을 넘어서면서 받게 된 선물...

정말 우습기도하고 슬프기도하다..ㅎㅎ

 

그리고,,,

하나가 매듭져졌다..

4년만에..

뭔가 또 권고를 한다고 하는데..

그권고를 받고 올려질 글들, 혹은 내게 보내질 글들에 대해

사실 너무너무 두렵다..

그걸 또 마주쳐야 한다는 것이...

그렇지만 필연적 경과과정이다..

이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건 우리모두를 위해서다..

 

중앙위가 있기 직전 내게 온 확인..

난 또 울기시작했다..

왜 아직도 우는지도 모르겠고..

아직도 이것에 발목잡혀 있는 내가 짜증나고,,

그렇게 또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예민해지는

나 자신한테 너무도 화가나서 울었다..

 

그치만,

이것조차 사필귀정이다..

온전히 내 몫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짊어져야 할 몫!!

그걸 절대로 피해갈 생각은 없다..

 

그치만 말이다..

그치만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와서..

이제와서.. 왜?

 

연말이라서 그럴거다..

늘 연말엔 나의 이 고질적 외로움이 커지니깐..

그래서 그럴거다..

하필 연말이라서 말이다..

 

지랄같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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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우리는 지는 방법을 몰랐다

“우리는 지는 방법을 몰랐다”

[인터뷰] 김호진 김석원 뉴코아노조 전, 현직 지도부

정문교 기자 moon1917@jinbo.net / 2008년12월19일 12시57분

지난 8월 29일 뉴코아노동조합이 434일의 파업을 접고 합의했다.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에 전면 부각시킨 뉴코아-이랜드의 투쟁이었던 만큼 수많은 말이 오갔다. 일부는 “간부들의 손배소만 취하한 나쁜 합의”라는 극단적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뉴코아노조는 “결과가 초라해 죄송하지만 결과만으로 비정규직과 함께 아픔을 나눈 것까지 묻혀서는 안 된다”는 편지를 인터넷에 올렸을 뿐이다. 긴 침묵에 들어갔다.

▲  참세상 자료사진

뉴코아노조는 434일 파업의 ‘초라한 결과’를 안고 현장에 복귀했다. 파업 지도부는 자신이 서명한 합의서 때문에 현장이 아닌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침묵 속에도 노조를 지키려 신임지도부를 뽑았지만 1,200명이 넘던 조합원은 500여명으로 줄었다.

파업이 끝나고 4개월이 지나 침묵에 잠겼던 뉴코아노조의 전.현직 지도부를 만났다. 해고자인 김호진 전 뉴코아노조 부위원장과 파업때 서울지부 직무대행이었고 지금은 뉴코아노조 수장을 맡은 김석원 위원장이 함께 했다.

“이겼다 졌다는 경계가 애매하다”

김석원 위원장은 “홈플러스가 홈에버를 인수하면서 심리적 압박이 컸다. 점거도 하고 매출제로 투쟁 등을 벌이며 회사를 압박해 타결수준을 높이려 했다. 그러나 이랜드그룹은 홈에버 매각으로 숨통이 틔였다”고 8월 말에 합의한 이유를 설명했다.

김호진 전 부위원장이 조심스레 거들었다. “마지막으로 구속됐는데 나와보니 분위기가 바꿨다. 간부들이 급격히 흔들렸다. 장기파업의 피로도 문제였지만 홈플러스 매각이 직접 원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쫓기듯 합의한 듯 싶다.”

뉴코아노조 내부 상황이 어려웠지만 먼저 합의하면서 이랜드일반노조는 물론 함께 싸웠던 분들의 심리적 타격도 컸다. 싸움은 뉴코아-이랜드일반노조의 공동투쟁이었다. 그리고 당시 진보 언론은 뉴코아노조 합의에 비판기사를 쏟아냈다.

▲  김호진 전 뉴코아노조 부위원장

“부족한 합의였지만 이랜드일반노조의 합의와 큰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끝까지 비정규직과 함께 했고 전원 복직시켰다. 다만 쫓기 듯 합의하면서 함께했던 조직들과 결과를 공유하지 못했다. 합의안에 대한 판단만이 아니라 함께했던 조직들과 의논하지 않은 비판이었다면 비판을 받아서 말을 나눴을 것이다. 패배도 준비했어야 했는데, 지는 법을 몰랐다. 이길 거라 생각했다. 의지가 너무 강했었나” 김호진 후 전 부위원장이 긴 한숨과 몇 번의 침묵 끝에 꺼낸 말이다.

434일 파업투쟁은 뉴코아노조의 첫 번째 패배다. 뉴코아노조는 지난 97년 부도 후에도 이기는 싸움을 했다. “이겼다 졌다는 경계가 애매하다. 그러나 조합원의 아픔을 생각하면 진 투쟁이다. 다만 정규직이 어렵게 투쟁했던 부분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석원 위원장이 말을 이었다.

“민주노총이 귀족노조 집합소라는 비판을 받는데 우리는 비정규직과 함께 싸우는 정규직노조의 한계를 시험한 것이다. 정규직 이기주의, 대중추수주의 흐름에서 앞서 싸운 것은 뜻있지만 정세와 여건이 파업을 힘있게 밀어주는데 한계가 있었다. 모험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안정 만을 희망하는 것은 어용노조다”

“비정규직과 함께 한 구조조정 투쟁”

많은 사람들이 뉴코아-이랜드 공동투쟁을 비정규직 투쟁으로 이야기하지만, 이들은 자기들 싸움을 정규직노조의 투쟁이라고 했다. 투쟁 초기 1,200명이 넘는 조합원들 전원이 정규직이었기 때문이다. 뉴코아노조의 투쟁이 세상에 알려진 건 2007년 6월이었지만, 06년 12월부터 투쟁은 시작됐다.

뉴코아가 지방매장부터 계산대를 줄이려고 PDA를 도입하려 하자 노조는 구조조정 시도라 판단해 전면대응했다. 그리고 계산대 업무 외주화 얘기가 나오자 2003년부터 시도했지만 답보상태였던 비정규직을 전력으로 조직했다. 회사가 계산대 업무를 외주화하자 투쟁은 불이 붙었다. 파업과 함께 매장점거에 들어갔다. 뉴코아노조는 “비정규직이 손을 놓지 않는 한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다. 정규직은 구조조정에, 비정규직은 해고에 전면적으로 저항했다.

“투쟁이 비정규직 문제로만 부각됐다. 구조조정에 맞선 정규직의 투쟁이 뜨지 않은 게 안타까웠지만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비정규직 조직이 늦어져 비정규직의 주체화라는 측면에서 한계가 분명했다. 싸우면서 한계를 극복하려 했는데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돌아보면 이를 빨리 판단했으면 투쟁이 길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김호진 전 위원장은 비정규직 주체화의 실패가 패배의 한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실제 비정규직을 대의원까지 조직하긴 했지만 전술을 판단하는 투쟁대책위원회 성원으로 조직하는 데는 실패했다.

▲  김석원 뉴코아노조 위원장

노조가 이겨도 장기파업이라면 후유증은 크다. 그런데 뉴코아노조의 434일의 파업투쟁은 패배한 투쟁이 되고 말았다.

“깝깝하다”며 김석원 위원장이 이야기했다. “파업 전 일부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했지만, 회사가 그들 일부를 관리직으로 진급시켜 열매는 회사가 가져갔다. 내부 추스르기를 위해 당분간 근로조건 개선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노조의 가장 큰 카드가 파업이지만 무파업 선언을 안 했어도 쓸 수 없다. 투쟁이 싫어서가 아니라 쓴 맛을 봤기 때문이다”

노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기 때문에 조합원 조직화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합비가 가압류돼 노조의 일상활동조차 불가능하다. 조합원도 대폭 줄었다. 무엇보다 발목을 잡는 건 ‘패배감’이다. 김석원 위원장이 인터뷰가 끝날 쯤 한 마디했다.

“뉴코아 노조는 비정규직 투쟁으로 사회를 뒤흔들었다. 일반적 정규직 노동자의 모습을 볼 때 선진적이었다. 그러나 나쁘게 이야기하면 모난 돌이 정 맞은 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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