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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전경버스 방화시도 30대, 경찰에 넘겨야만 했나

전경버스 방화시도 30대, 경찰에 넘겨야만 했나

만일 프락치가 아닌 촛불 참가자를 넘긴 거라면

미디어충청 www.cmedia.or.kr / 2008년06월23일 18시35분

48시간 연속 촛불집회 중인 22일 새벽 광화문에선 '경찰버스 방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현장에서 집회 참가자들에게 프락치로 의심받아 잡힌 이 사람은 논란 끝에 경찰에 넘겨졌다 한다.

이 사람에 관해 언론은 '31살의 남성이며 농기계 수리공으로 5년 가량 일했으며 현재 직장을 구하는 중'이며 경찰은 방화와 방화 미수죄 적용을 검토한다고 알리고 있다. 또 경찰에서 "집회에 자주 갔었는데 근처에서 시위를 지켜보던 어르신들이 '버스에 불이 한 번 붙어야 일이 빨리 진행된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오늘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 같아 불을 한 번 질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진술했단다.

촛불집회는 놀라움과 함께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에 대한 희망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22일 새벽 '토론 끝에 경찰 인계' 결정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이건 아닌데' '이건 뭐지' '꼭 그래야 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일이었다.

경찰에 넘겨진 30대 농기계수리공과 얘기해본 칼라TV 리포터 진중권 씨와 '광우병국민대책회의' 관계자는 '내 생각으로는 프락치는 아닌 것 같다' '프락치 가능성은 낮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한다.

단순 해프닝일 수도 있는 '방화 미수'와 '프락치 논란 끝 경찰 인계'라는 결과를 놓고 내가 했던 '이게 아닌데'의 출발은 '왜 경찰에게 넘기지?' '촛불집회에서 경찰버스에 올라가거나 끌어낸 것보다 불을 지르려 한건 정말 큰 범죄라서....' '이게 촛불 집회 비폭력 지향의 결과인가'였다.

참석 대상자가 정해져 있지 않고 확인할 수도 없는 촛불집회 같은 대규모 집회에서 프락치 논란은 있을 수 있다. 또 재수 없게 자신을 알아보는 시위대에 의해 사복 경찰이 망신을 당하고 쫓겨난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던 게 사실이다. 또 집회 분위기와 맞지 않는 과격 행동이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촛불집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반대'로 시작되었지만 의제는 확장되었고 '이명박 물러나라'를 주요하게 외치고 있다. 중,고생도, 대학생도 유모차를 몰고 나온 주부도, 초등생 손을 잡고 나온 부부도, 퇴근길에 들린 화이트칼라도 모두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하고 있다. 직업이나 재산, 정치성향을 따지지 않고 촛불을 들면 모두 시민이 된다. 설사 촛불을 든 손이 이명박을 찍었을지라도, 박사모 활동을 할지라도 촛불을 들면 모두 시민이다. 어떤 이유로 참여했을지라도 비록 노숙자이거나 이상득의 표현처럼 '일자리가 없어 길거리를 헤매는 젊은이'일지라도 촛불을 들면 '촛불파' 시민이 된다.

그런데 이런 촛불집회에서, 시민토성을 쌓고 경찰차벽위에 올라가 깃발을 흔들고 사진을 찍고 경찰차에 밧줄을 걸어 끌어내던 날, 경찰버스에 불을 지르려는 사람이 있었다. 참가자들에 의해 제지되었고 프락치로 의심 받았다. '횡설수설'하며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나, 면담해본 사람들은 '프락치는 아닌 것 같다.' 한다. 그런데 축제로 진화한다는 촛불 집회에서 '이런 사람을 경찰에 꼭 넘겨야만 했을까?'

'시민' '아고리언' '네티즌' '비폭력' '민주주의' '토론'은 50일을 넘긴 촛불을 읽는 키워드다. 아고리언과 네티즌이라는 말에선 촛불의 소통과 조직화 방식을 읽을 수 있다. 온라인에서 익명의 다양성이 소통을 이루고 오프라인으로 나왔을 때 이들 모두를 담는 키워드는 '시민'으로 표현된다. 비폭력과 민주주의, 토론은 촛불의 지향과 오프라인에서의 행동양식이다.

이런 키워드를 통해 형성된 촛불 집회의 '뭔가'를 나는 촛불의 시민권이라고 부르고 싶다. 왜냐면 광화문 네거리를 늘 상 점거하고 밤새 '이명박 물러나라'를 외쳐도 어쩌지 못하는, 이명박 정부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촛불의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광화문을 막으면 안국동으로, 서대문으로 돌아가면 되고', '차벽을 쌓으면 불법주차 차 빼 하면 되고' '그래도 안 빼면 시민토성으로 맞서면 되고' 식으로 그렇게 촛불이, 민주주의가 차벽을 언제든 넘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되 거기서 멈추는 '비폭력'이 촛불의 시민권인 듯하다.

촛불의 끝이 어디일지 모르다. 촛불의 비폭력이 어디까지일지도 모른다. 다만 촛불의 시민권은 서울중심, 고학력, 화이트칼라, 학생, 네티즌 중심으로 형상화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촛불의 의제가 확장되는 것만큼 촛불의 물결은 아래로 흘러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경찰 버스 방화 시도'와 '경찰 인계'엔 촛불의 '비폭력'과 '폭력'이 작용했다. '비폭력 집회에서 버스에 불을 붙이는 건 안 되고 그런 행위를 하는 자는 프락치이거나 촛불 참가자가 아니'기에 경찰에 인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촛불의 자유로운 참가, 정치사상의 자유와 이를 표현 하는 양식의 다양성은 '비폭력'이란 이름으로 토론과 동의 과정 없이 억눌리게 된다. 또 촛불 참가자에 대한 요건과 부정 또한 생길 수 있다.

'불을 지르려는 것'을 비폭력이란 이름으로 막는 것과 경찰에 넘기는 것은 다른 문제다.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 좀 더 토론했어야 한다. 비록 횡설수설하며 자신의 행동을 납득할 만큼 설명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프락치가 아닌 다음에야 엄연한 촛불집회 참가자이다. 그가 든 촛불 또한 소중한 거다. 신원과 진술을 확보한 상태에서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촛불을 드는 손에도 브랜드가 있나. 논리정연하지 못하고 이름 없는 촛불의 '시민권' 인정이 아쉽다.

50일을 넘긴 촛불이 외치는 '비폭력'이 지향하는 게 뭔지 성찰이 필요하다. 폭력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논의가 필요하다. 시위대에 의해 경찰에 넘겨진 '농기계 수리공 출신으로 직장을 구한다'는 그에게 촛불이 상흔을 남긴 건 아닌지. 촛불의 시민권과 폭력에 대한 논의, 집단지성이 필요하다. 될 때까지 모이는 촛불이 되기 위해, 민주주의를 위해, 낮은 곳으로 흐르는 촛불이기 위해 성찰과 반성의 집단지성을 기대한다.(임두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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