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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민주적 다함께, 트로츠키 더럽힌다”

 

 

비민주적 다함께, 트로츠키 더럽힌다”
베트남 인민 냉소하고 무자헤딘, 바웬사 지지한 SWP의 역사
 
 
 

이 글에서 나오는 것처럼 ‘다함께’가 개량주의, 우경화로 몰아부치는, 뚜렷하게 사회주의나 혁명을 외치지 않는 많은 이들 중에는 웬만한 다함께 소속 회원들과 비교가 안 될만큼 관록 있는 활동가들이 많다.

다함께(와 그 전신 IS)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그들보다 더 투철하게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싸워 왔던 그들이, 다함께가 주문처럼 읊어 대는 그 사회주의와 혁명 이론을 몰라서 안 읊어 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함께 외에는 없다.

90여 년 전 사회주의 실험이 시도되기도 전이라면 혹 뚜렷하게 사회주의나 혁명을 외치지 않는 이들이 진짜 개량주의, 우경화로 매도되어 마땅할지도 모르겠지만,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로 끝난 후에도 아무런 치열한 분석과 반성 없이 원전과 이론만 붙잡고 교조주의적, 원리주의적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민중과 역사에 대한 가장 큰 ‘죄악’이다.

   
▲ 파병연장 반대 시위 중인 ‘다함께’ 회원들 (사진=다함께 홈페이지)
 

이러한 측면에서 그나마 완전 자유롭지만은 않은 여타 교조적 좌파 소그룹들과는 달리, 다함께는 이러한 ‘죄악’으로부터 아주 마음 편하게 벗어날 수 있는 틀을 창조하여 면죄부를 스스로 부여하고 있기에 먼지 속에 있는 책 어구들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가며 쓸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 어차피 그 대화 상대는 대중이 아니라 활동가이기 때문에.

즉, 옛 현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이 만연한 ‘국가자본주의’였다면서 그들은 수많은 좌파들을 고민하게 하는 고통에서 아주 쉽게 벗어나 ‘지금까지 사회주의는 없었다’는 방어막을 가지고 마음껏 원론을 들이대며 끊임없이 개량주의적 분자들을 창조해내며 스스로 구태의연한 운동권적 도덕률의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영국으로 유학 간 신학도

수많은 학생들이 대학교 1학년 때 어떤 정파가 주도하는 동아리, 학회, 비합 서클에 가입했는가에 따라서 똑똑하지 못 하고 고민 없이, 독립적으로 생각하지 못할 경우 자연스럽게 NL이 되고, PD가 되며, ND가 되곤 했다.

신이 이끌었다고 하지만, 주변이 온통 빨간 십자가인 나라에서는 기독교인이 되고, 주위에 이슬람 외 종교를 접할 수도 없는 나라에서는 무슬림이 되듯, 자주적이고 비판적 사고가 모자란 경우 좀처럼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관념이 진실이라고 믿으며 평생을 그 관념의 우리 안에 갇혀 살게 된다.

영국으로 유학 간 신학도 한 명이 지극히 개인적, 환경적 요인으로 선택한 한 이론과 그 이론을 따르는 외국의 한 정파가 트로츠키주의의 모든 것인 양 받아들여지고 그와의 연결이 국제주의를 실천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황당하지만, 그 정파 ‘숭상’을 자랑스럽게 외치는 ‘광신도’들을 만들어내, 그들이 만들어내는 교과서 암기문을 당당하게 올린 것을 보는 것은 매우 황당한 일이다.

   
▲ 현재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중앙위원이며 요크대 교수인 알렉스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 1950~ )
 

캘리니코스 책을 안 읽었다는 말에 놀랐다는 전지윤과 다함께 회원들이 난 더 놀랍다. 캘리니코스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자신들의 교과서 암기 테스트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필요할 뿐이다.

알고 비판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우리가 주체사상파를 비판한다고 주체사상을 다 섭렵하는 시간 낭비를 할 필요도 없고, 이명박 정권을 비판한다고 이명박의 자서전을 읽을 필요는 없다.

전지윤이 절대적 기준이라도 되는 양, 전국적 정치신문의 예까지 들며 낡은 이론을 그렇게 당당하게 되풀이할 수 있는지 솔직히 놀라웠다.

그런데, 전국적 신문이 그렇게 중요하면, 반론을 전국적 신문에 쓸 것이지 왜 인터넷 신문에 올리는지 모르겠다.

나도 <레디앙>이 아니라 그들 사이트에서 ‘자유롭고 민주적인 토론’을 마음껏 하고 싶은데, 그들 사이트에는 게시판조차 없으니 도대체 내부에서조차 ‘민주적’으로 토론은커녕 기초적인 견해조차 수집되고 있는지 궁금하고 또 궁금할 따름이다.

다함께 안에 ‘민주적인 토론’이 있나?

민주집중제의 사전적 정의가 궁금해서 써 달라고 한 것인가? 난 솔직히 다함께 자신이 그 글을 쓰면서 부끄럽지 않았는지가 매우 궁금하다. 행동이야 통일된 것 이상으로 다 똑같지만, 다함께 어느 토론회에서든 진정으로 민주적인 토론이 있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길 바란다.

이미 런던에서 만들어진 그 틀 내에서의 토론이 무슨 자유롭고 민주적인 토론인가? 전지윤의 글조차 전체가 철저하게 그 틀 안에 있다는 것은 아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묻고 싶다. 민주적으로 자유롭게 토론과 논쟁의 결과가 파업 철회라고 해도 민주집중제라고 할 수 있을지. ‘민주적 토론과 찬반 투표를 통해 파업을 철회한다’고 하면, 그건 평조합원의 의사가 아니라거나 개량주의 노조 집행부에 맞서서 파업을 선동하며 결정 실행의 통일성을 저해하는 것을 당연시 여길 것 아닌가?

그리고 테러 조직들을 잘 모르나본데, 그들의 전략 전술이 틀렸을 뿐이지, 다함께보다는 훨씬 민주적으로 토론한다. 행동의 통일이야 더 철저하니 말할 나위도 없고.

이 모든 모순은 그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상에서 비롯된다. ‘노동계급의 급진 좌파적, 혁명적 일부가 독자적으로 조직되어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 … 혁명적 조직은 (노동 계급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얼마나 잘 배워 올바른 투쟁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느냐에 따라 계급의 지지를 받으며 혁명적 대중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다 …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른다’ 등등.

전지윤을 비롯한 다함께가 앞 글에서처럼 누구나 예전에는 한 번쯤 써 보고, 읽어봤을 아주 원칙적인 말들을 논쟁에서의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근거라도 되는 양 쉽게 할 수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즉, 이 세상에 러시아 혁명 직후 수년 간 이외에는 사회주의 체제란 존재한 적이 없고, 모든 자칭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국가들은 모조리 모종의 자본주의 체제였으니, 그냥 원론적 수사를 나열하며 혁명의 전위인 양 사회주의를 선전 선동해도 반박을 받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개량주의자’들도 이 정도의 말은 지금도 언제 어디서든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다. 개량주의가 아니라 혁명주의, 우경화가 아니라 좌경화를 외쳐야 이 판에서 비판받지 않는다는 것을 몰라서 주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함부로 출세주의, 개량주의를 뒤집어 씌우지 말라! 이제 이런 사변적 원칙과 원론을 되풀이하며 외쳐댄다고 운동권적 도덕률에서 우위를 점한다고 착각하는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전지윤이 비판하는 이들이 훨씬 더 진솔하고 책임성 있는 활동가이다.

적어도 자신의 이론을 현실을 떠나 반복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을 거부하고, 이론과 현실의 괴리, 현실에서의 한계 속에서도 노동 대중에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싸우는 책임성을 가진 이들이기 때문이다.

북한 국가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은 더 이상 진보가 될 수 없다는 논리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사회주의는 수립된 적이 없다며 현실 사회주의 비판을 회피하고 순수 이론으로 숨는 주장 또한 비판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좌파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다함께는 트로츠키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다

다함께는 트로츠키의 가장 큰 가르침이자, 트로츠키 사상의 핵심 거의 모두를 거부하면서 자칭 트로츠키주의자라고 하여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트로츠키의 이름조차 더럽히고 있다.

그 중 구사회주의 체제를 모종의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트로츠키 사상에 가장 배치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국가자본주의론’의 허구성과 폐해에 대해 자세히 논의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 문제는 단순히 체제 자체를 규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체제를 자본주의로 규정함으로써, 그리고 소련을 미국 등과 같은 질의 자본주의 최고 단계의 제국주의로 규정함으로써 전 세계적 차원의 문제를 분석하고 대처하며 행동하는 데 있어서 어마어마한 오류를 낳은 중요한 문제라는 것만 강조해 둔다.

전 세계의 트로츠키주의 조직들 중 ‘국가자본주의론’을 주장하면서 트로츠키주의 조직이라고 하는 조직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외에는 몇 없다.

어이가 없는 것은 다함께의 모 조직인 영국 SWP는 소련 국가자본주의 / 소련 제국주의를 서구 자본주의 /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보다 훨씬 혐오하여, 영국 등 서구에서는 공동전선은커녕 무원칙한 대중추수주의와 말 그대로의 개량주의의 일관된 길을 걸은 반면, 소련 ‘국가 자본주의’의 붕괴와 양 제국주의가 충동할 때에는 철저하게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를 지지하거나 투쟁을 방기하는 반마르크스주의적, 반사회주의적 원칙을 견지해 왔다는 것이다.

전지윤과 다함께가 무비판적으로 ‘숭상’하는 토니 클리프와 그 분파는 한국 전쟁 당시,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가 스탈린주의적 국가사회주의 북한과 전쟁을 벌일 당시 한국전쟁을 제국주의 대리 전쟁으로 규정하며, ‘제국주의 전쟁 반대, 북한 방어(정치적 방어가 아니라!)’를 거부하고, 제 4인터내셔널 영국 지부를 포기하며 SWP를 만든다.

‘기생’의 역사

그러나, 탄압 국면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급진 계급운동보다 오른쪽에서 헤매다 고립된 그의 분파는 입당 전술에 의거, 의견그룹의 형태로 그들의 언어로 ‘스탈린주의 동전의 다른 한 면인 사민주의 개량주의 정당’인 ‘숙주’ 노동당에 ‘기생’하기 시작한다.

   
▲ 국제사회주의자 그룹과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창설자인 토니 클리프(Toni Cliff, 1917~2000)
 

그러나, 그의 분파는 노동당에 ‘기생’해서 노동당을 ‘혁명정당’으로 건강(?)하게 만들지도 못 했으며, 그로부터 뛰쳐나와서도 그 특유의 정치적 모호성으로 대중이 급격히 급진화했던 베트남전을 전후한 시기 이후로는 별다른 급진적 대중을 획득하지도 못 하고, 한국에서처럼 반전 국면에서 약간의 좌파 교수들과 청년 학생 외 노동자 계급 대중에게는 별다른 영향도 못 미치고 있다.

한국전쟁시 북한 방어를 거부한 클리프 일파는 1차 베트남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온갖 당 이론가들을 동원 ‘제국주의 대리 전쟁’이라며 제국주의 침략 전쟁 반대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전 세계를 휩쓴 반전 물결로 ‘계급이 당보다 더 왼쪽에 있게 되자’, 2차 베트남 전쟁시에는 객관적 상황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와 (스탈린주의 소련이 후원하는) 베트남 인민’ 사이의 전쟁 구도라며, ‘베트남 인민 전선에게 승리를! 미 제국주의에게 패배를’이라는 완전히 변화된 구호를 외친다. 물론 어떤 설명도 반성도 없었다.

그러나 SWP는 이렇게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인민들이 설사 잘못된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에 입각했다 하더라도 반제 / 반자본주의 투쟁에 나서고,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고통받고 있을 때 온갖 이유를 붙여 투쟁을 방기하던 것과는 정반대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시에는 미국이 직접 자금과 무기를 대고 직접 훈련시킨 무자헤딘을 지지하면서 ‘소련에게 죽음을! 무자헤딘에게 승리를!’의 구호를 별다른 고민 없이 외친다.

또한, 이들은 소위 ‘소련 국가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라면 제국주의가 직접 지원해도, 저항 주체가 봉건적이고 반여성적이며 종교 근본주의적이어도, 반유대주의와 파시즘에 가까운 단체라 해도,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노골적으로 주장해도 무조건 지지의 대상이었다. 물론 이러 저러한 ‘립서비스’는 항상 잊지 않고 덧붙였지만.

소련의 붕괴는 그들에게는 위대하고도 위대한 ‘제 2의 러시아 혁명’이었다. 국가사회주의의 붕괴는 다른 이유에서 필연이었지만, 그들에게 이 붕괴는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이기에 전혀 다른 이유에서 극찬해야 할 것이었다.

반소 시위대의 다수가 조직화된 노동자 계급이 아니었고, 더더군다나 사회주의를 외치는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 혁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평소에 ‘민중’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며 비판하던 SWP는 ‘노동 대중’이라는 희한한 명칭까지 붙여가며 반소 시위를 혁명으로 칭송하였다.

물론, 이제 노동자 자신들이 쟁취한 체제는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 자신들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은 시작될 것이라는 립 서비스는 잊지 않았지만,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때를 대비해서 ‘노동 대중은 사회주의라는 이름 하에 자본주의에서 살아 왔기에 사회주의를 잘못 알고 있으며, 혁명정당이 부재하였기 때문에’ 운운의 변명을 붙여놓기는 했지만.

극우 파시즘도 찬양한 SWP

중국 천안문 사태에 대한 과장과 왜곡 역시 러시아의 경우와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당시 중국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시위 지도부, 시위 참가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 대중의 요구는 안타깝지만 ‘더 왼쪽으로의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시장 요소 도입’, 심지어는 아예 ‘미국식 자유’와 ‘자본주의’였다.

하지만 SWP에게는 이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고, 국가에 대한 저항,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주장을 하든 노동자 계급이 얼마만큼 조직적으로 저항했는지만이 중요했다.

SWP는 예전부터 일관되게 소련과 동유럽의 국가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라면 거의 모든 종류의 운동에 대해 찬양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스탈린 시기 우크라이나 지역의 극우 파시즘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민족주의 반란도 스탈린주의에 반대했다는 것만으로 지지하였다.

자본주의 체제로의 복귀 혁명을 공개적으로 내건 바웬사의 자유노조 운동도 그 어느 반체제 운동보다도 ‘조직화된 노동자 반체제 운동’이라는 형식에 들떠 무비판적 지지의 대상이었다.

반면, 피로써 쟁취했던 수많은 반제국주의적, 반자본주의적 혁명들은 소련 국가자본주의의 확산이라며 극단적으로 폄하된다. 특히 노동자 계급 형성이 미진하여 그에 따라 노동자 계급 운동이 발전하지 못했거나 아예 노동자 계급이 거의 없는 지역에서의 혁명은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 과정’의 여부에 의해서만 판단되어 철저히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규정하여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SWP에 따르자면, 동유럽 국가들은 모두 ‘소련 제국주의의 탱크로 만들어진 국가자본주의’이며, 중국 혁명은 ‘농민과 지식인들의 농민 혁명’에 불과하며, 쿠바 혁명은 ‘마르크스도 모르는 극소수 게릴라들의 운 좋은 반란 성공’에 불과하다.

당연히 더 의심스러운, ‘노동자 계급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이집트, 리비아, 볼리비아 등지에서의 실험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지지의 대상이지만, 지식인과 농민 혹은 빈민 등의 주도로 혁명세력이 권력을 획득하고 난 뒤에는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 과정이 없거나 자본주의 소련이 뒤에서 후원하기 때문에’ 다 국가 자본주의이며 타도의 대상이다.

더군다나 세계 혁명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다 국가자본주의 국가가 되어 버리니 혁명의 운명은 사실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베트남 혁명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지지하다가도 세계 혁명이 없으므로 베트남 국가자본주의 타도가 되는 것과 같은 논리는 전 역사, 전 세계에 적용되어 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재 다함께가 미국의 약한 고리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만으로 베네수엘라를 찬양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 가소롭다. 그들의 희망과는 달리, 차베스는 사회주의를 겉으로는 외치지만,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 하며, 시장 철폐, 노동자 계급 혁명, 일당 국가 체제 등 원론적 사회주의를 확고하게 거부하고 있다.

세계혁명 아니면 다 국가자본주의

결국 분명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아 다함께는 부르주아 국가 기구를 그대로 방치했네, 노동자 계급을 혁명의 중심으로 삼지 않았네 하며 전형적인 사회주의를 거부한 베네수엘라의 중남미형 사회민주주의적 실험에 태클을 걸고, 국가자본주의 운운할 것임이 틀림없다.

구 소련과, 중국, 북한의 실질적 붕괴는 민주집중제의 결과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민주적으로 토론하고 투표를 통해 결정할’ 사안이 아닌 어마어마한 단위의 경제 영역조차 직접 생산자들의 토론과 통계와 계획만으로 완벽하게 ‘시장 체제’를 대체할 수 있다고 착각한 사회주의적 실험의 실패이지 결단코 자본주의의 축적의 위기에 의한 붕괴 따위가 아니다.

이후 논의가 지속된다면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일단 구 사회주의 국가체제는 어느 면에서도 자본주의 체제와 아무런 유사점이 없다는 것을 다시 강조한다.

현재 국가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 체제로의 이행에 대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본질적, 근본적 변화에 대한 연구만 해도 수 천 개는 넘을 것이다. 학자들은 물론, 현실 사회주의와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를 온 몸으로 체험해 온 구 사회주의 사회의 주민들은 ‘한 자본주의로부터 또 다른 자본주의로의 옆으로의 게걸음에 불과하다’고 하는 다함께와 같은 이들의 주장에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모두가 코웃음을 치고 있다.

현재 러시아에는 각종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이 있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현실과 이론이 하나도 맞는 것이 없기에 국가자본주의론에 입각한 조직은 발을 붙이지 못 하고 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분명 우리들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사회였다. 그러나 불평등과 번영, 자유가 없었다고, 현실 사회주의 사회를 모종의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진보의 발전을 가로 막는 행위이다.

부디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연구를 할 것을 부탁하는 바이다. 구 국가 사회주의 체제를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 결과 얼마나 많은 오류가 있었으며, 그 오류를 깨닫지 못 하고, 비민주적, 무비판적, 비독립적으로 런던 발(發) 교과서를 암기하는 것, 그 암기를 되풀이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지양해야 할 진보의 모습이다.

안쓰럽고 창피한 ‘다함께’

현실 사회주의 체제를 자본주의로 왜곡한 것을 두고, ‘옛 동구권 몰락에 절망하지 않아도 되게끔 클리프가 만들어 주었다’는 전지윤의 말은 자랑스럽게 할 말이 아니라 정반대로 창피하게 생각해야 할 말이다.

민족주의나 북한 국가자본주의 계급지배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이들에게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 없는 애정을 보내면서도, 자신들은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이들에게 개량주의적 사회민주주의도 모자라, 의원이 되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처럼 출세주의자, 의회주의자 딱지까지 붙여 가며 핏대를 세우는 것은 보기에 매우 안쓰러울 정도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조순,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지지했던 과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한 채, SWP의 우경화 중의 우경화적인 노선을 그대로 따라해온 채, 뒷날에 민주노동당에 들어와 민주노동당을 숙주 삼아 ‘기생’해왔으면서, 함부로 다른 이들에게 개량이네 우경화네를 남발하며 마치 민주노동당의 주인인 양, 민주노동당을 사랑하는 양 행동하는 것은 정말이지 매우 파렴치한 짓이다.

강남 지역위원회로 불법적으로 주소지를 대규모로 옮겨 접수한 그 부분은 은근슬쩍 넘겨 버렸던데, 당내 대표적인 종파적 행위인 이 정당하지 못한 행위에 대해 지적한 것을 말투만으로 비판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진정으로 날을 세워야 할 대상, 부분과 옹호하고 방어해야 하는 부분에 대한 혼동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잘 아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008년 01월 31일 (목) 15:49:53 정다신 / 러시아 사회과학 아카데미

딴소리 하기 또다른 명수, 논점 더 흐려
[정다신 비판] '국가자본주의론'은 트로츠키 정신을 계승한 것
 
 
 

내가 지난번에 이재영 동지의 ‘다함께’ 비판을 반박한 글에 대해서 이번에는 정다신씨(이하 존칭 생략)가 반박 글(“비민주적 ‘다함께’, 트로츠키 더럽힌다”)을 올렸다. 이재영이 “‘다함께’가 신당에 반대하는 진짜 이유들”이라는 글에서 ‘다함께’의 신당 비판에 대해 진정으로 반박은 하지 않고 ‘다함께’에 대한 중상과 핵심 쟁점과 무관한 지엽말단으로 도망갔듯이 정다신도 마찬가지다.

이재영의 딴소리가 레닌주의 당 이론과 민주집중제였다면, 정다신은 국가자본주의론으로 곁가지를 쳐 요령부득의 비방을 시도하고 있다. 진정한 쟁점을 회피하고 감정적 비난을 하는 것도 비슷하다.

정다신은 내용은 빈약하고 분량은 매우 긴 글을 통해 나를 비판했지만, 나는 되도록 간략히 그의 비판에 답하고자 한다.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사실도 틀리고 근거도 부실한 비방에 대해 길게 대응할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당장 다가오는 이명박의 반동에 맞선 투쟁을 준비하고, 심상정 비대위와 신당파의 우경적 개량주의 지향에 맞서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안 읽은 게 뭐가 문제냐고?

먼저, ‘관련된 책과 글을 하나도 안 읽었다면서 캘리니코스의 당 이론을 비판하는 이재영의 용기가 놀랍다’는 나의 주장에 대해 정다신은 “이명박 정권을 비판한다고 이명박의 자서전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이 무슨 동문서답인가?

나는 무언가를 비판하려면 적어도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이해해야 한다는 토론의 기본을 확인했다. 이명박의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서도 그 정책이 어떤 배경에서 제안됐고 그 정책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 정책의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그럴 때 더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는 폭로와 비판이 가능하다.

나는 신당파도 비판하기 위해서 그들의 문건, 인터뷰, 관련 기사, 전력까지 샅샅이 조사했다. 이를 통해 그들의 주장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석했다. 무언가를 잘 조사, 분석, 탐구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비판하면 그 비판은 내용이 부실하고 설득력 없는 빗나간 것이기 십상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는 누구보다 정다신 자신이다. 정다신은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충분한 조사도 이해도 없이 어디서 주워들은 대개 잘못된 정보들을 가지고 앞뒤도 안 맞는 비판을 늘어놓고 있다. 아마도 인터넷에 떠도는 근거 없고 무책임한 댓글들에 의존한 글쓰기의 폐해인 듯싶다.

이번 글에만도 수두룩한 증거가 있는데 먼저 한 가지만 지적하겠다. 정다신은 남한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역사가 “영국으로 유학간 신학도(가) … 개인적 환경적 요인으로 선택한 한 이론”에서 시작됐다고 썼는데 남한 국제사회주의자들 중에는 “영국으로 유학간 신학도”가 없다.

아마도 그는 최일붕 동지를 언급하려 한 듯한데, 최일붕 동지는 신학도가 아닌 언어학도였고 영국이 아니라 미국 유학을 했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서 토니 클리프의 국제사회주의 경향이 아니라 에르네스트 만델의 제4인터내셔널 경향을 접했다.

이것은 ‘비판하려는 상대방의 글을 하나도 안 읽어도, 잘 몰라도 비판할 수 있으며 그게 뭐 문제냐’는 그의 용기가 낳은 ‘아니면 말고’식 사례이다.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정다신의 무지

이제 그가 이번 글에서 핵심적으로 붙잡고 늘어진 국가자본주의론을 살펴보자. 그는 ‘다함께’가 ‘사회주의와 혁명’ 같은 “교조주의적, 원리주의적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민중과 역사에 대한 가장 큰 ‘죄악’”이며 국가자본주의론이 그런 ‘죄악’을 가능케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구 사회주의 체제를 모종의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트로츠키 사상에 가장 배치되는 것”이며 이 때문에 “어마어마한 오류를 낳은 중요한 문제”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국가자본주의론의 역사적 기원과 핵심 주장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역사와 실천의 검증을 이겨내지 못했고 따라서 “오류”인지 분석하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재영과 함께 ‘안 읽어도, 잘 몰라도 비판할 수 있다 학파’인 그에게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다만 “구 사회주의 국가 체제는 어느 면에서도 자본주의 체제와 아무런 유사점이 없다”고 선언한다. 또, “불평등(원문 그대로 - 아마도 ‘평등’의 오타인 듯)과 번영, 자유가 없었다고, 현실 사회주의 사회를 모종의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진보의 발전을 가로막는 행위”라고 선포할 뿐이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그에게 사회주의는 ‘평등, 자유’ 같은 가치와는 무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사회주의로부터 이런 알맹이들을 빼면 남는 것은 국유화와 계획경제 같은 껍데기다. 그리고 이런 껍데기에 집착하는 그에게 ‘구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유사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껍데기만 본다면 그는 박정희의 포항제철, 한국통신 ‘국유화’와 ‘경제 계획’이 ‘구 사회주의권’의 그것과 가지는 유사성을 해명해야 한다. 엥겔스는 사회주의를 ‘국유화’ 같은 껍데기로 규정하는 사람들에게 “비스마르크의 담배 전매도 사회주의냐”고 비웃었다.

반면, ‘자유와 평등’ 같은 알맹이의 부재 문제로 접근한다면 우리는 ‘구 사회주의권’과 자본주의 사이에 수많은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둘 모두에서 권력은 노동자, 민중에게 있지 않았고 소수 지배자들인 국가관료나 자본가들에게 있었다.

따라서 둘 모두에서 노동자, 민중은 스스로 자신들이 사회와 생산을 통제하지 못했고 소수 관료나 자본가들이 통제권을 가졌다. 둘 모두에서 관료나 자본가 지배계급과 노동자․민중 사이에 어마어마한 불평등이 존재했다. 둘 모두에서 노동자․민중은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 사이의 형식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 모두가 소수 관료나 자본가가 노동자․민중을 억압․착취하는 계급 사회라는 국가자본주의론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래서 국가자본주의론의 창시자인 토니 클리프는 이미 1948년부터 소련과 동유럽 나라들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변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진정한 해방과 자유, 평등을 추구하는 맑스주의의 진정한 정신에 입각해, 그런 사회를 모종의 ‘사회주의’라고 보는 통념을 거부했다.

단지 소련군 탱크가 밀고 들어와 소련식 국유화와 명령경제를 실시한다는 이유로 그 사회를 사회주의로 보기를 거부한 것이다.

토니 클리프는 “혁명적 정당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국가기구를 분쇄하지도 않았고,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도 없었던 그 나라들이 노동자 국가라면, 맑스주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물었다.

이것은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이라는 맑스주의의 정수에 비춰본 태도였다. 자구가 아닌 정신을 중요시하며 트로츠키의 사상을 살펴보면 그도 이런 위대한 전통에 서 있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반스탈린 투쟁에 앞장섰으며, ≪배반당한 혁명≫에서 스탈린주의에 대한 선구적인 맑스주의적 분석을 시도했고 말년에는 스탈린파 지배관료들을 타도할 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따라서 국가자본주의론은 정다신의 주장처럼 “트로츠키 사상에 가장 배치되는 것”이거나 “트로츠키의 이름조차 더럽히(는)” 것이기는커녕 트로츠키의 진정한 사회주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혁명적 패전주의

국가자본주의론 덕분에 국제사회주의자들은 양자택일을 강요받은 냉전기에 관료 지배계급이 통치하는 소련의 동구권과 사적 자본가들이 통치하는 미국의 서방 모두에 혁명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마치 레닌과 볼셰비키가 1차 대전 때 독일과 러시아 모두에 반대해 혁명적 패전주의 입장을 취했듯이 말이다.

미국, 서방 제국에 대한 반대 때문에 소련군 탱크가 헝가리․체코 민중 저항을 짓밟는 것을 지지하거나, 소련, 동방 제국에 대한 반대 때문에 미제국주의의 베트남 학살을 눈감는 양쪽의 오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전통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에서도 국제사회주의자들은 남북한 국가와 체제 중 어느 하나를 지지하지 않고 둘 모두에 혁명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남한의 시장자본주의도 북한의 국가자본주의도 우리의 대안이 아니다. 우리는 남북한 모두에서 노동자․민중의 아래로부터 변혁을 지지한다.

그래서 우리는 스탈린주의자들처럼 북한 국가를 지지하며 관료 지배자들의 탈북자 억압, 개성공단 노동자 착취에 침묵하지 않는다. 반면 일부 개량주의자들처럼 남한 국가에 충성하기 위해 친북 좌파에 대한 국가보안법 마녀사냥에 동조하지도 않는다. 예컨대 신당파의 조승수 씨는 자신을 “종남주의자”라고 했는데 솔직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런 정치와 전통을 제대로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정다신의 왜곡와 무지는 읽기가 괴롭다. 국제사회주의자들이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를 지지(했다)”거나 “1차 베트남전에서 … 제국주의 침략 전쟁 반대를 거부했다”는 주장은 악의적 왜곡이 아니라면 형편없는 무지의 발로이다.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무지에 기초한 그의 나머지 온갖 왜곡에 대해서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다. ‘안 읽어도, 잘 몰라도 비판할 수 있다 학파’다운 주장과 왜곡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왜곡과 진정한 논점

정다신의 무지와 왜곡 두 가지만 더 지적하겠다. 그는 “(다함께) 사이트에는 게시판조차 없(다)”며 “다함께 안에 ‘민주적인 토론’이 … 있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길 바란다”고 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인터넷 자유게시판이 민주주의의 척도가 됐는지 모르겠다.

나는 온라인에서 책임지지도 않는 익명의 댓글들을 민주주의라고 보지 않는다. 우리는 <맞불> 기사마다 기자별로 이메일이 공개돼 있을 뿐 아니라, 회원들은 직접 만나서 함께 활동하고 부대끼며 민주적이고 자유롭게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을 일상으로 한다.

거리와 학교, 작업장에서 공개적으로 실천하고 토론하는 것보다, 골방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방식이겠지만 말이다.

정다신은 온갖 욕설과 성인 광고, 익명의 무책임한 댓글과 중상들로 넘쳐나는 각종 자유게시판들을 지켜보면서 이것이 과연 민주주의인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길 바란다.’

정다신은 “강남지역위원회로 불법적으로 주소지를 대규모로 옮겨 접수한 그 부분은 은근슬쩍 넘겨 버렸(다)”며 나를 비판했다. ‘안 읽어도, 잘 몰라도 비판할 수 있다 학파’의 주특기가 또 발동한 것이다.

‘강남지역위 사건’이란 존재하지도 않는다. “불법” 주소지 이전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당규 위반조차 없었다. 당시에는 당규상 주소나 직장과 상관없이 원하는 지역위에 속할 수 있던 때였다. 당시 학생위원회로 조직돼 있던 ‘다함께’ 회원들은 중앙당과 협의 하에 강남 지역으로 이전했다.

‘강남지역위 사건’ 이라며 마치 대단히 부정이 있었던 것처럼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를 반복해서 명예를 훼손하고 결국 기정사실화시키는 수법은 실로 악질적이기 짝이 없다.

마지막으로, 정다신은 내가 “함부로 다른 이들에게 개량이네 우경화네를 남발”했다며 “함부로 출세주의, 개량주의를 뒤집어씌우지 말라!”고 흥분한다.

나는 ‘구 사회주의권’의 실패에 절망해 변혁의 전망을 포기하고 자본주의의 개혁을 선택한 사람들을 이해한다. 나는 자본주의 내에서 노동자들의 처지와 조건을 개선하는 개혁도 지지하며 이를 위한 개혁 지지자들과 공동 투쟁도 언제든지 환영해 왔다.

그리고 그들을 단지 ‘개량’이나 ‘우경화’라고 딱지 붙이고 비난한 바는 없다. 나는 다만 지금의 구체적 맥락에서 신당파와 심상정 비대위의 방향이 왜 문제인지를 구체적인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비판했던 것이다.

정다신은 흥분하거나 감정적 비난, 딴소리 하기에 매달릴 게 아니라 ‘다함께’가 수많은 기사와 글, 팸플릿을 통해 신당파에게 가한 비판에 대해 구체적 반박을 내놓아야 한다.

'종북주의 청산'을 위해 국가보안법의 희생자들을 공격하는 게 과연 배신적 태도가 아닌지,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없이 북한 국가와의 선긋기만 강조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 '운동권 정당', '가두집회 만능주의' 등을 비판하며 대중 투쟁․행동을 중심에 두지 말자는 것이 과연 우경화가 아닌지,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당이 문제'였다며 정규직-비정규직 단결 투쟁이 아니라 정규직 노조의 투쟁 자제와 양보를 수반하는 ‘사회연대전략’을 말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 조직 노동자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신당파의 시도가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이 추구했던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지 등에 대해 말이다.

또, 이명박의 사유화, 비정규직 확대에 맞서 민주노총이 파업과 투쟁을 준비하는 데 '민주노총당'을 부정하는 게 과연 옳은지, 이랜드노조의 처절한 매출 타격 투쟁, 태안 주민의 분노에 찬 상경 투쟁 등이 벌어지는 데 '데모당', '운동권당'을 거부하는 게 바람직한지 답해야 한다.

사족: <레디앙>은 ‘다함께’에 대한 비판 기사는 글의 질과 무관하게 홈페이지 대문에 띄우고 사진까지 몇 개 넣어서 키워주면서, 내가 보낸 반박 기사는 작게 구석에 처박아 두고 있다. 아무리 편집권은 인정하더라도 공정한 태도는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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