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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환지가 정조 측근이라 독살 아니라면

 

 

 

심환지가 정조 측근이라 독살 아니라면
 박정희가 김재규 손에 죽은 것은 뭔가?"
[인터뷰] <조선왕독살사건>의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김태희 (ew4203)
 
 
  
<조선왕 독살사건>의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남소연
이덕일

 

 

 

 

 

"노론과 그 후손들에게 정조독살설은 껄끄러운 이야기다. 그래서 독살설은 남인들이 한이 맺혀 지어낸 이야기나 소설이라고 폄하해 왔다. 비밀편지가 발견되니까 '둘은 편지를 주고받던 친한 사이다, 정조 독살 의혹이 사라졌다'는 수준 낮은 이야기를 삽시간에 퍼뜨렸다. 지금의 사태는 그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반증하는 것이다.

 
정조 독살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료적 근거를 전혀 대지 못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역사관에는 200년 전 정조를 죽인 노론 벽파의 시각, 우리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난도질했던 조선사편수회의 시각이 일정 부분 반영돼 있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과 한국고전번역원 번역대학원은 지난 9일,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정조가 노론 벽파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299통을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어찰이 공개되면서 정조의 막후정치와 독살설의 진위 여부 등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13일 오후에 만난 역사평론가 이덕일 한가람역사연구회 소장은 다소 격앙돼 있었다. 이 소장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자마자 관련 자료들을 제시하며 최근 일고 있는 '정조 독살설은 허구였다'란 일각의 주장에 반박하기 시작했다.
 
<조선왕 독살사건>으로 대중역사서의 새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이덕일 소장은 최근 언론 등에서 대서특필하고 있는 '독살설 허구'에 대해 "사료적 근거도 없는 수준 낮은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 정조 어찰 공개 기자회견 9일 서울 성균관대학교에서 김문식 단국대 교수,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등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새로 발굴한 정조 어찰 299통 중 일부를 공개하고 있다. 이 편지들은 모두 정조가 친필로 써 심환지 한 사람에게 보낸 것으로서 정조 말년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정국 동향을 파악하는 데 획기적인 가치를 지닌 자료로 평가된다.
ⓒ 연합뉴스
정조어찰

 

 
"측근이라 독살 아니라면, 박정희는 어떻게 설명하나"
 
이덕일 소장은 "정조 어찰이 발견되었다고 노론 벽파의 정조 독살 의혹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며 "둘 사이에 비밀 편지가 오갔다고 해서 심환지가 정조와 가까운 사이였거나 정조의 측근이었을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정조 어찰 발견 후 둘이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심환지가 정조독살에 가담했을 리가 없고, 따라서 정조독살설이 힘을 잃게 되었다는 보도가 많은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 
 
그는 이런 주장의 근거로 박정희와 카이사르의 예를 들었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로 정조와 심환지가 측근이었기 때문에 독살했을 리 없다면, 박정희가 김재규의 손에 죽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것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측근에게 암살됐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편지가 발견된 것만으로 정조와 심환지가 측근이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지만 측근이므로 암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독살설 허구'란 주장은 "억지 해석"이라며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노론 벽파와 조선사편수회의 후손이 역사학계 주류를 장악하고 다른 해석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마포에 위치한 한가람역사연구회 사무실에서 진행한 이덕일 소장과의 인터뷰 전문.
 
"정조 독살설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 이번 편지 발견으로 일각에선 '정조 독살설은 허구'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대한제국이 멸망한 다음 달, 일본이 76명의 조선인들에게 훈장과 돈을 준다. 76명은 대부분 노론이었다. 노론은 일제 때도 세력을 온존해 왔고, 지금도 학계, 법조계 등 한국 사회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노론과 그 후손들에게 정조독살설은 껄끄러운 이야기다. 그래서 독살설을 '남인들이 한이 맺혀 지어낸 이야기나 소설'이라고 폄하해 왔다. 비밀편지가 발견되니까 '둘은 편지를 주고받던 친한 사이다, 정조 독살 의혹이 사라졌다'는 수준 낮은 이야기를 삽시간에 퍼뜨렸다. 지금의 사태는 그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반증하는 것이다.
 
정조 독살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료적 근거를 전혀 대지 못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역사관에는 200년 전 정조를 죽인 노론 벽파의 시각, 우리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난도질했던 조선사편수회의 시각이 일정 부분 반영돼 있다."
 
  
이덕일 소장이 쓴 <조선왕독살사건>
ⓒ 다산초당
조선왕독살사건

- 정조가 보낸 편지엔 병명, 증세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다. 때문에 알려진 것과 달리 심환지가 정조의 측근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나오는 것 같다.

"정조는 재위 24년인 1800년 6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6월 14일 어의가 진찰을 해서 병세가 드러났다. 이미 알려진 병을 감출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심환지는 노론 벽파의 원칙론자이지만 대화가 되는 상대다. 노론 벽파가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데, 전부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지 않나? 서로 이익이 있으니 편지를 주고받는 핫라인을 개설한 거다.
 
편지를 보면 심환지가 어떤 부분은 정조의 뜻대로 움직이고 어떤 부분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니 측근'이라는 말이 맞으려면, 심환지는 정조가 죽자마자 몰락해야 된다. 하지만 승진을 하고 정순왕후와 함께 (정조의)24년 치세를 모두 뒤집어버린다."
 
- 그렇다면, 독살설이라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조는 사후 준비를 전혀 안했다. 그 정치지형을 그냥 가지고 가면 다 되돌릴 텐데, 꼼꼼한 정조가 왜 대비를 안 했을까? 자신이 세상을 떠나리라고는 생각도 안한 것이다. 그래서 독살설에 무게를 두는 거다. 인위적인 특정 세력이 정조를 독살한 것이라면, 수천 수백 년이 지나도 역사의 법정에 반드시 세워야 한다. 그래서 10년째 이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순조실록>에 이런 기록이 있다. 정조가 죽지도 않았는데, 정순왕후가 언서(諺書)를 내려 도승지를 갈아치우는 인사권을 행사한다. 그리고 정조의 상태를 직접 보겠다고 간다. 조선은 대비가 오면 어의는 물론 남자 신하 전원이 밖으로 나가야 한다. 정순왕후만 있는 상태에서 곡소리가 났고, 정조가 죽은 후 (정순왕후는) 바로 언서를 내려 좌상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삼는다.
 
정조를 연구할 때 풀리지 않았던 미스터리는 '정조가 왜 심환지를 내의원 제조로 계속 두었는가'였다. 비밀편지는 심환지가 왜 왕의 병 치료를 담당하는 내의원 제조로 계속 있을 수 있었는가를 밝혀주었다. 그래서 심환지의 혐의가 더 커진다. 둘이 편지를 주고받았기에 혐의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사료를 해석할 능력이 안 되거나 악의적으로 사료를 왜곡하는 것 밖에 안 된다.
 
'편지를 주고 받았으니, 독살했을 리가 없다', 그럼 박정희는 죽었을 리가 없다. 김재규하고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데 죽느냐.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암살하고, 수양제가 자신의 아버지를 암살하지 않았나. 항상 독살이라는 것은 최측근에서 나왔다."
 
"노론 벽파는 정조와 근본적으로 화해할 수 없다"
 
- 정옥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과 유봉학 한신대 교수 등 간송학파 계열 학자들은 정조와 노론의 제휴·협력설을 주장하고 있다.
"노론 벽파는 정조와 근본적으로 화해할 수 없다. 노론벽파는 사도세자를 잘 죽였다고 본다. 노론이 석고대죄를 하든지, 정조가 아버지 잘 죽었다고 하지 않는 한 양자는 화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정조가 오회연교에서 남인들을 대거 등용하겠다고 말했다. 정계 개편을 한다고 말한 거다. 그래서 노론 벽파가 급해진 것이다. 오회연교(5월 그믐날 경연에서 왕이 내린 교시) 후 한 달이 안 되어 정조가 갑자기 죽는다."
 
- 비밀 편지의 발견으로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공식 기록도 믿을 수 없는 것 아닌가란 지적이 있는데.
"정조 시대는 <정조실록> <홍재전서> <승정원일기> 정약용의 글, 문집, 외사촌이나 채제공에게 보낸 편지 등 사료가 많다. 그런 것 중 하나가 새로 나온 것이다. 다만 정적이었던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것이라 성격이 다른 것이다. 하지만, 이 사료로 인해 바뀐 사실은 하나도 없다. 편지와 <정조실록>의 내용이 다르지 않다. 이 편지는 기존의 사료를 보완해 줄 뿐이다."
 
- 박사학위 논문이 <동북항일연군>이다. 근현대사 전공인데 조선 시대에 관한 책을 많이 쓴 이유는?
"대학원 다닐 때, 노론 벽파와 조선사편수회로부터 내려오는 특정 사관에 동조하지 않으면 역사로 벌어먹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구조적 모순과 근현대사의 여러 문제의 원인을 찾다보니 조선시대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관한 책을 많이 쓰게 되었다."
 
  
<조선왕 독살사건>의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남소연
이덕일

 

- 예전 국사 교과서는 정조를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한 왕으로만 소개했다. 소설 <영원한 제국> 이후 정조를 연구한 책들이 많이 나온 것 같은데.
"예전 교과서들은 노론 벽파의 시각으로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가 별로 한 일도 없는, 영조의 부록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직도 그들의 시각이 관철된 부분이 많다. 그러다 이인화 교수가 책을 내면서 몇몇 사람들이 정조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바탕이 돼서 정조에 대한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국사교과서에 '중상학파(북학파)는 서울의 노론출신이 대부분이었다'란 부분이 있다. 하지만 (북학파인) 박제가, 이덕무 등은 노론이 아니다. 가장 크게 왜곡된 부분은 '상공업 중심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국사교과서 314쪽, 교과서 맥락으로 보면 '유수원=노론'이라고 인식하게 된다)'란 부분인데, 유수원은 노론에게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다.
 
남인이 농업 중심 개혁론을 개발했으니, 집권 세력인 노론도 한 일이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왜곡한 것이다. 청을 오랑캐로 보는 노론에서 청과 교류하자는 상공업 중심 개혁론이 나올 수가 없다. 이렇게 교과서가 노론 벽파의 시각을 담고 있으니 정조가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던 것이다."
 
"정조 붐은 지금 우리에게 이런 지도자가 필요하기 때문"
 
- 정조를 근대적 군주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사료를 찾아보면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 끝까지 토론을 했다'고 나온다. 이는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관철하려고 한 것 아닌가란 느낌을 준다. 이를 보면 다양성을 존중하는 현대사회 사고방식과는 좀 다른, 성리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으로 정조를 볼 수 있지 않나.
"(정조가) 근대적 군주였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첫째 증거는 천주교에 관대했다는 점이다. 노론은 성리학만 유일사상으로 신봉하고 그 외는 이단으로 본다. 노론 벽파가 천주교를 수사하고 처벌해야 한다고 했을 때, 정조는 '정학(正學, 성리학)이 바로서면 사학(邪學, 천주교)은 저절로 소멸한다'면서 용인한다. '천주교 별로 나쁜 것 없던데'라고 하면 난리가 날 테니 돌려 말한 거다. 정조는 서양 사상까지도 포용하며 사상의 다원화를 꾀한 인물이었다.
 
둘째는 남인 등 다른 당파 사람을 적당한 시기에 등용해 노론 일당 독재를 다당체제로 만든 점이다.
 
셋째는 신분제 완화다. 노론은 서자(庶子)를 인간으로도 안 보는데,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에 서얼을 등용하면서 신분제를 완화시켜 나간다. 지금 우리나라는 학벌로 차별한다. 정조의 신분제 완화 조치는 학벌 카르텔 사회와의 싸움이기도 했다. 현재의 학벌 카르텔 사회와 조선시대 노론 일당 체제 사회는 똑같은 사고구조를 지닌다. 요즘 정조 붐이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런 지도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정조는 문체를 정통고문(正統古文)으로 되돌리려는 '문체반정'을 시도했다. 이 대목을 접하고 개인적으로 꽤 놀랐는데, 이는 보수적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 아닌가.
"문체반정도 당시 시대의 맥락을 보고 이해해야 한다. 문체반정의 시작은 진산사건(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도 권상연과 윤지충이 부모 신주를 불태운 사건)이다. 이 사건은 노론에게 정조를 돕는 남인을 몰아낼 호재였다. 정조가 불리한 현안을 반전시키려고 제기한 것이 문체반정이다.
 
정조는 신분제의 틀을 바꾸고자 했던 사람이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를 보면 서북인(함경도, 평안도 사람)이 차별받는 것, 한 번 노비가 되면 영원히 노비로 차별받는 것, 여성의 재가를 허용하지 않는 것 등을 비판하고 있다. 그 시대 국왕이 어찌 저토록 선진적인 발상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다."

정조를 위한 변명 - 1

그림 이야기 2009/02/10 09:35 이충렬

어제(2월 9일), 정조의 비밀 편지 299통이 공개되었다.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예조판서와 우의정 등을 역임한 노론 벽파(僻派)의 거두 심환지(沈煥之.1730-1802)에게 보낸 비밀 편지다.

이 편지들 중에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자신의 건강에 심대한 이상이 있음을 여러 차례 알렸다는 내용이 있어, '심환지의 정조 독살 의혹'은 종지부를 찍어야 할 형편이 되었다. 추측과 심증에 의한 역사해석이 얼마나 위험한지가 증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러 언론에서는...

편지 내용 중, 최측근인 노론계 서영보(1757~1824)를 “호로자식(胡種子)”, 촉망받던 젊은 학자 김매순은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 학문적 정적을 비방하는 일부 유생들을 겨냥해 “오장에 숨이 반도 차지 않았고” “도처에 동전 구린내를 풍겨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는다”는 등의 비속적 표현을 썼으니...

정조는, ‘학자 군주’라기보다 능수능란 ‘고단수 정객’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어느 일간지 기자는 "200여 년 전에 부친 왕의 편지. 이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알던 18세기 ‘성인 군주’를 잃어야 할지는 모르지만..."이라고 썼다....

왼쪽에서 다섯번째 줄 아래에 '뒤죽박죽'이라는 한글이 보인다.

어제 언론의 평가에 따르면, 정조는 '욕쟁이 정치꾼'이라는 소린데... 그건 아니다....  얼마전,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해진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소개하면서 숙종과 그 시대는 다시 평가되어야 한다고 했듯이, 조선시대의 왕들은 하나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동시대에 세상에 존재하던 왕들 중에서 공부를 가장 많이 한 '학자'들이었고, 어려서부터 '제왕학'을 공부한 '전문 정치인'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학자와 정치인의 두가지 모습이 있다... 

따라서 성리학이라는 학문에 기반을 두었던 조선시대의 왕과 그들의 통치형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자와 전문 정치인 양면을 보고 평가해야지, 어느 한쪽만 보면 정당한 평가를 할 수 없다....  정조도 마찬가지다....


영조의 <연강시>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 번역

위의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정조는 설날에도 83세의 할아버지 영조 아래서 공부를 했다....  영조는 세손 정조에게 그렇게 '제왕의 길'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런 '제왕 훈련'은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상풍에 긔후 평안하오신 문안 아옵고져 바라오며 뵈완디 오래오니 섭~ 그립사와 하옵다니 어제 봉셔 보압고 든~ 반갑사와 하오며 한아바님 겨오셔도 평안하오시다 하온니 깃브와 하압나이다. 元孫"
(가을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을 알기를 바라오며 뵌 지 오래되어 섭섭하고도 그리워하였사온데 어제 봉한 편지를 보고 든든하고 반가워하였사오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 하시오니 기쁘옵나이다. 원손)

이 한글 편지는, 정조가 8살 원손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문안편지이다...  어려서 부터 한문뿐 아니라 한글 공부도 했고, 친인척에 대한 예의범절을 배웠다... 학문과 제왕학뿐 아니라 인성교육도 함께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심성은 훗날 왕이 되어서도 이어진다....


정조 어찰(왕의 편지)  출처 : <묵적> (명문당 발행)




이 편지는 위의 한글 문안 편지를 쓴 종이처럼 꽃 무늬가 찍힌 시전지에 쓴 걸로 봐서, 신하가 아니라 왕실 친인척 누군가에게 보낸 새해 선물 편지로 보인다....  정조는 신하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도장을 찍었기 때문에 친익척에게 보낸 편지라고 추정할 수 있다.


정조 <김참판에게 보내는 선물 편지> 출처 : <묵적>


               큰 곶감이 아니라 곶감이라는 부분이 눈에 띈다.


조선 시대의 왕들은 시서화에 능했다. 시는 공부를 했으니 당연히 잘 짓고, 글씨 역시 연습을 많이했으니 명필이 많다. 그림은 글씨를 쓰면서 붓과 먹에 익숙해있고 세자시절 그림의 기본을 배워 웬만한 문인화가 못지 않은 솜씨를 가진 임금이 많다. 예를 들어 영조는 세자 시절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다.


정조 <정혜공 연시 잔치의 시>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 번역


정조 <임지로 떠나는 철옹부사에게> 201.8 x 73.3cm 1799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미술사학자 고 오주석 선생의 글에 의하면, "정조는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두 살 때 글자 모양을 만들었고, 서너 살 때는 필획을 이루어 날마다 그것으로 장남을 삼았다고 한다. 심지어 여섯 살 때 쓴 글씨로 병풍을 만들었다 전하는 사람도 있다."라면서 정조의 글씨는 바르고 단정하다고 평가했다.

시(詩)와 서(書)를 봤으니 이제 화(畵), 그림을 볼 차례다.


정조 <들국화> 종이에 수묵 84.6 x 51.5cm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보물 제743호

이 작품은 고 혜곡 최순우 선생을 비롯해 많은 미술사학자들이 매우 잘그렸다고 평가한 작품이다. 일본에 살던 왕손의 소장품이었는데, 어느 재일동포가 구입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해 고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정조의 내면적 모습이 느껴지는 듯한 작품이다. 왕 혹은 왕세손이기에 가질 수 밖에 없는 쓸쓸함을 그림 속에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국화꽃 위에 메뚜기 한마리를 그려 넣었는지도....


정조 <파초> 종이에 수묵 84.6 x 51.5cm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보물 제743호

왕은 외롭고 고독하지만, 꿋꿋함과 고고함을 잃으면 안된다... 정조는 그렇게 외로운 삶을 살았고, 자신의 능력을 믿었기에, 편지에다 자신의 속마음을 나타냈고 마음에 차지 않는 신하들을 우습게 알면서 욕을 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번에 발굴된 편지들은, 왕이기에 갖고 있는 내면의 한 모습일뿐, 정조의 전체를 평가하는 잣대로 삼을 수는 없다....


정조 <묵매도> 종이에 수묵 123.5 x 62.5cm 1777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정조가 28세 께, 작은 외숙에게 그려준 작품이다. 직업 화가의 그림이 아닌 문인화로서 이정도면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정조는 이렇게 시서화에 능하고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백성들을 생각하는 정치를 하려고 한 성군이었다.

따라서 이번에 발굴된 편지들은,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왕이,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신하들에 대한 불신과 경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편지들 속에서 비속어가 보이고, 정치술이 보인다고 하여  정조가 성군이 아니었다고 단정하려는 듯한 기사는 매우 위험하다...  그 편지들은 정조의 통치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백성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아니, 그는 백성들을 어떻게 생각하며 나라를 다스린 임금이었을까?  정말로 성군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줬을까? 그 답 또한 몇 점의 그림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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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를 위한 변명 - 2

그림 이야기 2009/02/11 07:39 이충렬
정조는 백성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아니, 그는 백성들을 어떻게 생각하며 나라를 다스린 임금이었을까?  정말로 성군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줬을까? 그 답 또한 몇 점의 그림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어제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렇다면, 어떤 그림에서 임금과 백성의 관계가 설명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그림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사실, 다른 임금들에게는 그런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그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조에게는 있다. 그것도 아주 자세히 알 수 있는 여러 점의 그림이 남아있다.... 




<화성능행도 8폭 병풍> 작가미상 비단에 채색 각 폭 크기 142 x 62cm (전체 크기 142 x 496cm) 
1795 ~ 1796년 경 추정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정조와 백성들의 관계는, 너무 유명한 이 병풍 그림 속에 있다....  정조 19년인 1795년 윤 2월 9일부터 8일동안 정조의 행적과 행사의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그런 정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구체적 일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윤2월 9일 창덕궁 출발, 시흥행궁 유숙, 10일 화성행궁 도착ㆍ유숙,11일 화성 성묘 배알, 낙남헌 과거시행, 12일 현륭원 전배, 서장대 성조 및 야조, 13일 봉모당 회갑연 거행, 14일 낙남헌 양노연 거행, 득중정 어사, 15일 화성행궁 출발, 시흥행궁 유숙, 16일 시흥행궁 출발, 창덕궁 환궁.

정조는 한양으로 돌아온 후, 행사의 내용을 묘사한 도설(圖說)을 제작하고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의 머리에 첨가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이 도설작업은 윤2월 28일 의궤청의 건의로 이해 1월 연풍현감에서 파직된 김홍도가 주관자(主管者;‘專管’者)로 임명되어 그의 지휘 아래 제작되었다. 그래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밑그림 비슷한 그림이 많이 담겨있고, 이런 이유때문에 한때 8폭 병풍도 김홍도가 그렸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병품 그림은 김득신, 최득현, 이명규, 장한종, 윤석근, 허식, 이인문 등으로 모두 실력이 쟁쟁한 화원들이 그렸고, 이 병풍을 헤경궁에게 진상하자 칭찬과 포상을 받았다고 하니, 김홍도는 의궤의 도판 그림 정리 작업을 하느라 병품그림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전해지는 8폭병풍은 리움 소장품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과 궁중유물전시관(구 창덕궁)에도 거의 같은 병풍이 있으니, 어느 병풍이 진상품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리움의 경우 화가 소개를 '작자미상',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김득신 외'라고 표기한다.

# 정조의 경로사상와 구휼의식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이미지


윤2월 14일 오전, 정조가 낙남헌에서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등 능행에 수행한 노대신(老大臣) 15명과 수원부의 노인 총 384명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이다.

80세 이상의 사서인(士庶人) 노인은 무려 209명이나 되고, 99세 3명, 97세 1명 등 90세 이상 노인만도 17명이나 됐다.

군병(軍兵)과 시위의장(侍衛儀仗)이 낙남헌 주변의 사방을 둘러싼 가운데 차일을 친 낙남헌의 어좌에 정조가 앉아 있고, 그 앞 마루에 융복(戎服) 차림의 노대신과 입시관원(入侍官員)들이 앉았다. 섬돌앞 뜰에는 서인(庶人)들이 도포 차림으로 줄지어 앉았고, 담장 사이에는 곱게 차린 무희와 붉은 옷을 입은 악사가 늘어서 있다. 그리고 시위군병 밖의 길가에는 부민(府民)들이 이 아름다운 광경을 흡족한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다.

정조는 이날 '경로잔치'뿐 아니라, 화성부에 사는 홀아비와 과부, 고아, 독자 등 539명과 가난한 백성 4천813명에게 쌀과 소금을 나눠 주고, 죽을 쑤어 먹였다.

쌀을 나눠 줄 대상자는 미리 선발해 뒀다. 쌀을 나눠 주는 지역을 4곳으로 나눠 성곽 내외의 도시 지역은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서 왕이 친림한 가운데 진행됐다.

주변 지역은 승자들을 보내 산창(山倉)과 사창(社倉), 해창(海倉)으로 보내 왕을 대신해 나눠 주도록 했다.

화성행궁에서 음식물이 분배되는 동안 정조는 신풍루에 올라가 이를 지켜봤고, 백성에게 주는 죽을 직접 맛보기도 했다.

이 행사를 통해 화성부 인구의 10분의 1 정도가 혜택을 받게 됐다.

쌀과 소금은 4개 지역으로 나눠 배급됐다. 나이와 남녀에 따라 차등을 뒀으며, 이때 나눠 준 쌀이 모두 368석에 달했다.

정조는 당시 '화성 능행' 행사를 위하여 10만 3천여 냥의 재원을 조성하였는데,  그 자금의 일부를 떼어내어 제주도의 진휼곡(賑恤穀)으로 보냈고, 행사 후 남은 자금을 3도(都)와 8도에 분급하여 진휼곡으로 쓰도록 하였다.

이쯤되면 어진 임금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백성들이 다치지 않게 주의했다.


<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2월 12일 밤, 정조가 화성의 서장대(西將臺)에 갑옷을 입고 행차하여 군사조련을 실시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화면 제일 아래에 위치한 문은 동문인 창룡문(蒼龍門)이고, 중앙 좌우변의 대문은 오른쪽이 북문인 장안문(長安門), 왼쪽이 남문인 팔달문(八達門)이다.

당시 정조는 투구와 갑옷을 입고 직접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西將臺)에 올라가 군사들의 조련을 지휘했다.

무기로는 낭기(浪機)와 조총(鳥銃), 신포(信砲), 삼안총(三眼銃) 등이 동원됐으며, 여기에 참가한 군사는 모두 3천700여 명이었다.

정조는 군사훈련때 사용하는 총포에 백성들이 다치거나 피해를 입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줬다는 기록이 있고, 훈련이 끝난 뒤 수백 명의 장병들에게 궁시(弓矢)와 포목 등을 상으로 하사했다. 

따라서 정조는 공권력으로 백성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임금이 아니라,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하는 임금이었다...


# 유생들과 함께 공자에게 절했다


<알성도(謁聖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2월 11일, 정조가 화성에서의 첫 번째 공식행사로 거행했던 성묘(聖廟) 참배 장면이다. 학문을 사랑하는 정조의 유학진흥(儒學振興)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孔子)에서 주희(朱熹)에 이르는 21명의 중국 성현과 설총(薛聰)에서 박세채(朴世采)에 이르는 15명의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가장 뒤쪽의 대성전(大成殿) 위에 큰 차일을 치고 뜰에는 청금복(靑衿服)을 입은 유생(儒生)들이 시좌한 가운데 지금 섬돌 위의 오른쪽에서 정조가 4배를 올리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다. 대성전의 신문(神門) 앞에는 산선(?扇) 시위(侍衛)들이 서있고, 그 앞에 수행한 문무백관이 동서로 나뉘어 시좌하였다.

이곳에서 참배를 마친 정조는 행궁으로 돌아와 낙남헌(洛南軒)에서 문과와 무과 별시(別試)를 실시했다.

길과 산자락에는 구경나온 백성들이 매우 자유로운 동작으로 묘사되어 있다. 정조는 백성들에게 자유롭게 '임금 구경'을 할 수 있게 한 왕이라고 할 수 있다.  








# 백성들과 함께 불꽃놀이를 즐겼다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2월 14일 오후 정조가 화성행궁 안의 득중정(得中亭)에서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를 한 다음 저녁에 혜경궁을 모시고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장면이다. 기록화에서는 임금을 그리지 않기 때문에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의궤>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계단 앞 어사대(御射臺)에는 지금 혜경궁이 나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잠시 행차하여 가마를 열어 놓은 채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있지만, 임금의 어머니도 그리지 않기 때문에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매화포가 폭발하는 광경 가까이 백성들이 있으니, 백성들과 함께 한 불꽃놀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는 그렇게 백성들과 즐거움을 나누려고 했던 임금이었다....
 







# 정조는 백성들이 어려워하지 않는 임금이었다


<시흥환어행렬도 始興還御行列圖 >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윤2월 15일, 화성행궁을 출발하여 서울로 올라오면서 이제 막 시흥행궁 앞에 다다른 장대한 행렬을 묘사하였다. 처음으로 혜경궁을 모시고 함께 능행하여 무려 6,000여 명의 인원과 1,400여 필의 말이 동원된 가장 성대했던 행렬의 장관을 과시한 장면이다.

그림의 내용은 시흥행궁을 멀리 바라보면서 그 남쪽의 안양교(安養橋) 앞길에서 행렬을 잠시 멈춘 다음 정조가 직접 혜경궁에게 미음(米飮)과 다반(茶盤)을 올리는 매우 효성스러운 장면을 담은 것이다. 화면 밑에 정조가 능행을 위해 세운 시흥 행궁이 정조의 치정(治政)을 자랑하듯 거대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화면 중앙에 미음을 들기 위해 푸른 휘장으로 가린 혜경궁의 가마가 보이고, 그 바로 뒤에 산선(?扇)을 받고 있는 정조의 좌마(座馬)가 서 있다. 그리고 그린 아래 길가 빈터에 수라를 실은 수레(水刺架子)와 음식을 준비하는 막차(幕次)가 보인다.

원래 정조는 전체 그림의 용 깃발 아래에 가야하나, 어머니보다 앞서 갈 수 없다는 효심에 헤경궁 뒤에서 따라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래의 세부도를 보면, 당시 백성들은 임금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 부분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 부분도

오른쪽 아래가 수라를 실은 수레(水刺架子)와 음식을 준비하는 막차(幕次)이다.


국립중알박물관 소장 작품 부분도

정조는 모두 15차례의 화성능행 길에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려고 노력한 임금이었다. 재위 3년째에는, 상언(上言)·격쟁(擊錚)의 제도에 붙어 있던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들을 철폐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능행(陵行) 중에 그것들을 접수하도록 하였다.

그렇다. 정조는 백성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했고, 백성들은 그런 임금인 줄 알기에 편안한 자세로 그의 행차를 구경했을 것이다... 

백성들의 편안함은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조는 이번 비밀편지 발굴에서 보듯이, 신하들에게는 어렵고 무서운 임금이었는지 몰라도, 백성들과는 소통하려고 노력했고 학문과 문화를 발전시키려고 한 임금이었다... 그래서 이런 기록화도 남아있는 것이다....

알려지지 않았던 편지 299통에 너무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  그 편지들은 역사 서술을 위한 또 하나의 보조자료일뿐이다....  지금은 학계에서 그 편지들을 자세히 분석하기를 기다릴 때다....  (끝)

주 : 설명 중 일부는 수원시와 안산시의 자료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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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세계 7대 자연경관' 경쟁 치열>

 

 

신 세계 7대 자연경관' 경쟁 치열>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9.01.07 09:14 | 최종수정 2009.01.07 13:01

50대 남성, 제주지역 인기기사 자세히보기


(제네바 AP=연합뉴스) 세계 222개 내로라하는 자연경관들이 `신(新) 세계 7대 자연경관'에 선정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6일 스위스에 있는 `신 세계 7대 자연경관' 재단에 따르면 이번 경쟁에는 우리나라의 제주도를 포함해 미국의 그랜드케니언, 에베레스트산과 괴생물체가 산다는 영국 네스호, 호주 그래이트배리어리프(대산호초), 나이애가라 폭포 등 세계 유명 산봉우리, 호수, 볼거리 등이 뛰어들었다.

재단은 지난 2007년 처음 인터넷을 통해 441곳을 지명받아 각국에서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한 222곳을 1차로 선정했다.

이어 전 세계 10억명 이상이 참여하는 인터넷 투표를 거쳐 77곳으로 압축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재단은 7월7일까지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지낸 페데리코 마요르가 의장을 맡고 있는 전문가 회의를 통해 결승에 나갈 21개 후보를 정한다.

최종 7대 자연경관은 2011년까지 인터넷, 전화, 문자 메시지 등 공개투표를 통해 결정된다.

이 재단은 2007년 1억명이 참여한 투표를 통해 `인간이 만든 7대 불가사의'로 ▲ 중국 만리장성 ▲ 페루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 ▲ 브라질 거대 예수상 ▲ 멕시코 치첸이트사의 마야 유적지 ▲ 로마 콜로세움 ▲ 인도 타지마할 ▲ 요르단 고대도시 페트라를 선정했다.

`신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작업은 문화 유산 보존 및 복원을 통해 문화 다양성을 증진한다는 취지로 스위스 영화제작자 베르나르드 베버가 주도하고 있으며, 기부금과 방송중계권료 수입으로 운영된다.

한편 유네스코는 지금까지 878개 자연경관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ofcours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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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 k5300

 

 

 

※ K5300 

1.프린터 판낼의 "전원" 버튼을 눌러줍니다.

 

2. "전원" 버튼은 계속 눌러준 상태에서

    "X (취소)" 버튼을 1번 눌러준 후 "급지" 버튼을 3번 연속으로 눌러 줍니다.

 

3. 잠시 후 노즐 테스트 페이지가 나오게 되면, 바로 "X (취소)" 버튼을 눌러 취소해 줍니다.

   ※ 취소를 눌러주지 않으면 테스트 페이지가 계속 인쇄되어 나오게 됩니다.

*K5300 사용되는 잉크 카트리지
HP 18(C4936A) - 검정 잉크 카트리지
HP 18(C4937A) - 파랑 잉크 카트리지
HP 18(C4938A) - 빨강 잉크 카트리지
HP 18(C4939A) - 노랑 잉크 카트리지


*사용되는 프린터 헤드
HP 88(C9381A) - 검정,노랑 프린트헤드
HP 88(C9382A) - 빨강,파랑 프린트헤드

*자체 테스트 페이지를 인쇄하는 방법
(급지 버튼)을 누르고 있으면 프린터가 동작하는 소리가 들릴때 (급지 버튼)을 놓습니다.

*인쇄 품질 진단 페이지를 인쇄하는 방법
(전원 버튼)을 누른 상태에서 X(취소 버튼)을 7번 누르고 (급지 버튼)을 2번 누르고 (전원 버튼)을 놓습니다.

*프린트헤드를 청소하는 방법
(전원 버튼)을 누른 상태에서 X(취소 버튼)을 2번 누르고 (급지 버튼)을 1번 누르고 (전원 버튼)을 놓습니다.

 

*프린트헤드를 고급청소하는 방법
(전원 버튼)을 누른 상태에서 X(취소 버튼)을 2번 누르고 (급지 버튼)을 2번 누르고 (전원 버튼)을 놓습니다.
 이 헤드청소방식은 잉크를 펌핑을 이용한 강제적인 압력으로 밀어넣어 청소하는 방식입니다

 

*라인피드 교정하는 방법
전원 버튼)을 누른 상태에서 X(취소 버튼)을 14번 누르고 (급지 버튼)을 6번 누르고 (전원 버튼)을 놓습니다.

*프린트헤드를 정렬하는 방법
(전원 버튼)을 누른 상태에서 (급지 버튼)을 3번 누른 다음 (전원 버튼)을 놓습니다.

*노즐헤드를 왼쪽으로 이동시키기
프린터 덮게를 열고 (급지 버튼)을 3~4초 정도 눌러준다..

*K5400 네트워크 재설정 방법
렌선을 프린터 본체어서 분리한다.
ㅁ_ㅁ(네트워크 버튼)을 누른 상태에서 ㅂ(급지 버튼)을 3번 누르고 (네트워크 버튼)을 놓습니다.
전원 표시등이 몇 초간 깜박입니다.
전원 표시등이 켜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네트워크 버튼)을 눌러 네트워크 구성 페이지를 인쇄를 한다.
네트워크 설정이 재설정 되었는지 확인합니다.

 

 

 

전원 표시등 구성 페이지 버튼/표시등 취소 버튼 다시 시작 표시등 프린트 헤드 표시등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
깜박임 꺼짐 꺼짐 깜박임 꺼짐 꺼짐
그림 1: 전원 표시등과 다시 시작 표시등이 깜박입니다.
문제

장치 용지가 프린터에 걸렸습니다.

해결 방법

출력 용지함에서 용지를 모두 꺼냅니다. 걸린 용지를 찾고 제거합니다.

문제

장치 캐리지가 지연됩니다.

해결 방법

  • 위쪽 덮개를 열고 걸린 용지와 같은 장애물을 제거합니다.
  • 다시 시작 버튼을 눌러 인쇄를 계속합니다.
  • 오류가 계속 발생하면 장치를 껐다 다시 켭니다.

전원 표시등 구성 페이지 버튼/표시등 취소 버튼 다시 시작 표시등 프린트 헤드 표시등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
켜짐 꺼짐 꺼짐 깜박임 꺼짐 꺼짐
그림 2: 전원 표시등이 켜져 있고 다시 시작 표시등이 깜박입니다.
문제

프린터에 용지가 없습니다.

해결 방법

용지를 넣고 다시 시작 버튼을 누릅니다.

문제

장치가 수동 양면 인쇄 모드에 있습니다. 잉크가 마른 후 페이지를 뒤집어 다시 로드하는 동안 기다리는 중입니다.

해결 방법

장치에 용지를 다시 로드하고 다시 시작 버튼을 누릅니다.
전원 표시등 구성 페이지 버튼/표시등 취소 버튼 다시 시작 표시등 프린트 헤드 표시등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
켜짐 꺼짐 꺼짐 켜짐 꺼짐 꺼짐
그림 3: 전원 표시등과 다시 시작 표시등이 켜져 있습니다.
문제

덮개가 완전히 닫히지 않았거나 후면 액세스 패널 또는 양면 인쇄 장치가 없거나 제대로 삽입되지 않았습니다.

해결 방법

  1. 모든 덮개는 완전히 닫혀져야 합니다.
  2. 후면 액세스 패널 또는 양면 인쇄 장치가 프린터 뒷면에 제대로 삽입되었는지 확인합니다. 이 기능은 일부 모델에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전원 표시등 구성 페이지 버튼/표시등 취소 버튼 다시 시작 표시등 프린트 헤드 표시등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
깜박임 꺼짐 꺼짐 꺼짐 꺼짐 꺼짐
그림 4: 전원 표시등이 깜박입니다.
문제

장치가 켜지거나 꺼지는 중이거나 인쇄 작업을 처리하는 중입니다.

해결 방법

조치가 필요 없습니다.

잉크가 마르는 동안 프린터가 일시 정지된 것입니다. 잉크가 마르는 동안 기다립니다.
전원 표시등 구성 페이지 버튼/표시등 취소 버튼 다시 시작 표시등 프린트 헤드 표시등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
켜짐 꺼짐 꺼짐 꺼짐 깜박임 꺼짐
그림 5: 전원 표시등이 켜져 있거나 하나 이상의 프린트 헤드 표시등이 깜박입니다.
문제

하나 이상의 프린트 헤드가 부족합니다.

해결 방법

  1. 해당 프린트 헤드를 설치한 다음 인쇄해 봅니다.
  2. 해당 프린트 헤드를 설치한 후에도 오류가 계속 발생하면 다음 작업을 수행합니다.
    • 프린트 헤드 걸쇠를 확인합니다.
    • 프린트 헤드를 확인합니다.
    • 프린트 헤드를 청소합니다.
    • 프린트 헤드를 제거한 다음 프린터를 끕니다.
    • 프린터를 다시 시작하고 프린트 헤드를 다시 끼웁니다.
  3. 그래도 오류가 계속 발생하면 해당 프린트 헤드를 교체합니다.
전원 표시등 구성 페이지 버튼/표시등 취소 버튼 다시 시작 표시등 프린트 헤드 표시등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
깜박임 꺼짐 꺼짐 꺼짐 깜박임 꺼짐
그림 6: 전원 표시등과 하나 이상의 프린트 헤드 표시등이 깜박입니다.
문제

하나 이상의 프린트 헤드 표시등에 결함이 있거나 이상이 있습니다.

해결 방법

  1. 해당 프린트 헤드가 제대로 설치되었는지 확인한 다음 인쇄해 봅니다.
  2. 필요한 경우 프린트 헤드를 제거하고 다시 끼웁니다.
  3. 그래도 오류가 계속 발생하면 해당 프린트 헤드를 교체합니다.
전원 표시등 구성 페이지 버튼/표시등 취소 버튼 다시 시작 표시등 프린트 헤드 표시등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
켜짐 꺼짐 꺼짐 꺼짐 꺼짐 깜박임
그림 7: 전원 표시등이 켜져 있거나 하나 이상의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이 깜박입니다.
문제

하나 이상의 잉크 카트리지가 없습니다.

해결 방법

  1. 해당 잉크 카트리지를 설치한 다음 인쇄해 봅니다. 필요한 경우 여러 번 잉크 카트리지를 제거하고 다시 끼웁니다.
  2. 그래도 오류가 계속 발생하면 해당 잉크 카트리지를 교체합니다.
전원 표시등 구성 페이지 버튼/표시등 취소 버튼 다시 시작 표시등 프린트 헤드 표시등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
깜박임 꺼짐 꺼짐 꺼짐 꺼짐 깜박임
그림 8: 전원 표시등과 하나 이상의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이 깜박입니다.
문제

하나 이상의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에 결함이 있거나 이상이 있습니다.

해결 방법

  1. 해당 잉크 카트리지가 제대로 설치되었는지 확인한 다음 인쇄해 봅니다. 필요한 경우 여러 번 잉크 카트리지를 제거하고 다시 끼웁니다.
  2. 그래도 오류가 계속 발생하면 해당 잉크 카트리지를 교체합니다.
전원 표시등 구성 페이지 버튼/표시등 취소 버튼 다시 시작 표시등 프린트 헤드 표시등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
켜짐 꺼짐 꺼짐 꺼짐 꺼짐 켜짐
그림 9: 전원 표시등이 켜져 있거나 하나 이상의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이 켜져 있습니다.
문제

하나 이상의 잉크 카트리지에 잉크가 부족합니다.

해결 방법

잉크가 없는 경우 기존 잉크 카트리지를 새 잉크 카트리지로 교체합니다.
전원 표시등 구성 페이지 버튼/표시등 취소 버튼 다시 시작 표시등 프린트 헤드 표시등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
깜박임 켜짐 꺼짐 꺼짐 꺼짐 켜짐
그림 10: 전원 표시등이 깜박이거나 하나 이상의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이 켜져 있습니다.
문제

잉크 카트리지에 잉크가 부족합니다.

해결 방법

해당 잉크 카트리지를 교체합니다.
전원 표시등 구성 페이지 버튼/표시등 취소 버튼 다시 시작 표시등 프린트 헤드 표시등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
켜짐 켜짐 켜짐 켜짐 켜짐 켜짐
그림 11: 모든 표시등이 켜져 있습니다.
문제

복구할 수 없는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해결 방법 모든 케이블(예: 전원 코드, 네트워크 케이블 및 USB 케이블)을 뽑고 20초 정도 기다린 다음 케이블을 다시 연결합니다.
전원 표시등 구성 페이지 버튼/표시등 취소 버튼 다시 시작 표시등 프린트 헤드 표시등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
깜박임 켜짐 꺼짐 깜박임 꺼짐 켜짐
그림 12: 전원 표시등 및 다시 시작 표시등이 깜박이고 하나 이상의 잉크 카트리지 표시등이 켜져 있습니다.
문제

하나 이상의 잉크 카트리지가 만료되었습니다.

해결 방법

  1. 해당 잉크 카트리지를 교체합니다.
  2. 만료된 잉크 카트리지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전원 버튼을 누른 채 다시 시작 버튼을 세 번 누릅니다. 전원 표시등 이외의 모든 표시등이 꺼집니다. 이러한 카트리지를 사용하여 프린터가 손상되는 경우에는 무상 보증 수리를 받을 수 없습니다.
링크 표시등 작업 표시등
켜짐 꺼짐
문제

장치가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지만 네트워크를 통해 데이터를 수신하거나 전송하지 않습니다. 장치가 켜져 있으나 유휴 상태입니다.

해결 방법

조치가 필요 없습니다.
링크 표시등 작업 표시등
켜짐 깜박임
문제

장치는 네트워크를 통해 데이터를 수신하거나 전송합니다.

해결 방법

조치가 필요 없습니다.
링크 표시등 작업 표시등
켜짐 깜박임
문제

장치가 꺼져 있거나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해결 방법

장치가 꺼져 있는 경우 장치를 켭니다. 장치가 켜져 있고 네트워크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는 경우 사용 설명서에 있는 네트워크 문제 해결을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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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서구-과거와 같고도 다른 ‘한국형 신보수 정권’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지난달 25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 모습. 조희연 교수는 이명박 정부를 ‘신보수’로 규정한 뒤 이 정권이 구현하는 국가는 ‘신자유주의적 경쟁국가’라고 규정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① 변화·불변성 함께 판단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2주가 됐다. 갓 출범한 정부의 성격을 논하는 것은 다소 이를 수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보고서 등을 통해 새 정부의 국정 목표와 정책 기조는 대략적으로 드러난 상태다.

‘10년 만의 보수파 정권’ 탄생으로 학계에서도 새 정부의 구조적 성격을 어떻게 봐야 할지를 두고 논쟁이 활발하다.

주요 논점은 이명박 정부를 ‘신보수 정권’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이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박정희식 개발독재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받아들인다. 반면 박상훈 출판사 후마니타스 주간 등은 본질적으로 구보수와의 차별성이 없다는 점을 들어 ‘신보수’라는 정의에 반대한다. 일부 논자들은 ‘신보수’ 규정이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본질을 흐려놓을 수도 있다는 견해를 보인다. 선명하게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하자는 것이다.

조 교수 글에 이어 고세훈 고려대 교수, 강원택 숭실대 교수, 홍성민 동아대 교수가 견해를 밝힌다. 조 교수는 이번 글에서 새 정부를 ‘신보수’ 정권으로 규정하면서도 구보수 정권과의 동질성이 존재함을 강조했다. 시장자율주의와 개방주의가 차별성이라면 개발과 성장주의는 동질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전(前) 복지국가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했다. 1980년대 유럽과는 달리 ‘신국가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점과 대중의 진보적 요구에 기초하고 있는 점도 ‘한국형’의 특징으로 거론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가끔 농담처럼 나는 ‘세상이 변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사물은 변화·발전한다’는 점에서 볼 때 부질없는 기대임에도 말이다. 왜냐하면 변화에 대면하고 변화를 ‘해석’하는 것 자체가 그에 대응하는 내 자신의 변화 자체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는 이명박 정부의 성립이라고 하는 ‘거대한 변화’에 직면해서 그 변화를 해석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다. 돌이켜 보면, 1990년대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언제나 새 정권의 성격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다. 그 논쟁 참여자들에게는 두 가지 시각이 교차했던 것 같다. 하나는 ‘불변론적’ 시각 혹은 정서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정권의 구조적·계급적 성격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엄청난 변화를 지적하는 ‘변화 강조론’이다. 나는 이명박 정부의 성격에 대해서 ‘변화’의 측면과 ‘불변’의 측면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나는 이명박 정부를 ‘한국형’ ‘신보수 정권’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당연히 60·70년대의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구보수 정권으로 규정될 수 있다. 구보수 정권과 신보수 정권은 차별성과 연속성을 갖는다. 먼저 차별성을 보자. 구보수가 초기 산업화 단계의 개발독재였다면, 신보수는 ‘포스트-개발’ 정부이고 ‘포스트-독재’ 정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구보수를 냉전적인 반북(反北)적 보수이자 ‘안보형 보수’로 성격지을 수 있다면, 신보수는 ‘시장형 보수’ 혹은 ‘신자유주의적 보수’로 성격지을 수 있다. 특별히 보수세력 내부의 헤게모니 분파의 전환을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이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했다면 이제 이명박 정부는 시장자율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표방한다. 반대로 연속성을 보자. 무엇보다 과거 독재시대의 집권당이자 90년대 민주개혁 국면에서 반개혁에 섰던 보수정당이 집권당으로 복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나아가 신보수는 구보수의 가장 핵심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개발주의’와 ‘성장주의’를 새로운 형태로 정확히 계승하고 있다. 또한 신보수는 탈규제와 시장자율을 강조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구보수의 ‘친기업주의’와 ‘친자본적 성격’을 정확히 계승하고 있다. 단지 그 형태가 달라지고 있을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자본이 제 발로 서지 못하고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스스로를 성장시켜야 했던 ‘원시적 축적’ 단계의 친기업주의를 구보수가 구현했다면, 이제 자본이 제 발로 서서 자력으로 중소자본과 기타 사회영역을 통제하고자 하고 국가적 지원 없이도 글로벌 자본축적을 수행할 수 있는 단계의 친기업주의를 신보수는 구현하고 있다. 여기에 ‘탈규제’ ‘자율경쟁’이 핵심 담론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신보수 정권이 구현하는 국가는 ‘신자유주의적 경쟁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중도 리버럴 친미 정부의 붕괴가 좌파 정권으로 이어진 남미와 다른 경로를 보여준다.

 

이명박-박정희 신.구 정권은
개방주의-보호주의 차별성과 동시에
보수정당 재집권이란 연속성 지녀
개발성장-친기업.친자본 성격 계승도

 

 

앞서 ‘한국형’ 신보수 정권이라는 표현을 썼다. 신보수 정권 하면 80년대 영국의 대처 정부 등 서유럽의 우파 정부를 연상한다.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한국적·동아시아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80년대 이후 유럽의 신보수 정권이 60·70년대 복지국가를 비판하고 그것을 해체하고자 했다면,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포스트-복지국가적’ 신보수가 아니라 ‘전(前) 복지국가적 신보수’로서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서구의 신보수 정권은 사회민주당 정부 시대의 문제점을 ‘복지병’ ‘산업공동화’ ‘과부하 국가’ 등으로 진단·비판하면서 출현했다. 사회민주당 정부 스스로도 ‘복지 요구의 확대와 그것을 충족시킬 조세 기반 간의 괴리’라고 하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반독재 중도 리버럴 정부(참여정부) 하에서 전면적인 복지국가로 이행하지 못했다. 보수세력은 초보적인 복지 확대의 시도조차도 ‘좌파 사회주의’라고 생각하는 ‘가공의 이데올로기적 인식’에 기초해 있다. 이것은 그만큼 한국의 보수, 그 일부로서의 신보수가 경제적으로 배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민주노총 내부에서 온건파가 리더십을 가져도 아무것도 자본으로부터 양보를 쟁취할 수 없는 조건에 놓인다. 이는 신보수 정권하에서 이른바 ‘개량화’의 기반이 대단히 취약함을 의미한다.

둘째,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시장자율과 자율경쟁을 지배담론으로 하지만 ‘신국가주의’적 성격을 관성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여러 신자유주의적 국가들의 현실 모습은 개별 국가 내의 계급적·사회적 역관계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크게 유형화해 본다면, 신자유주의적 국가라고 하더라도, 북구형의 ‘신조합주의적 유형’, 영미 식의 ‘순수 시장자유주의적 유형’, 동아시아의 ‘신국가주의적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동아시아의 ‘신국가주의적 유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는 개발독재적 국가개입주의의 관성, 국가의 정책수단을 친기업적으로 활용하고 나아가 공권력에 의해 배제적 노동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본의 요구, 국가의 공적 역할에 대한 인식 부재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경부운하와 같은 친자본적인 대규모 국가프로젝트의 개발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구와 달리 복지국가 이행못한 현실 속
보수만이 아닌 진보적 기대 실리고
시장자율 구호 뒤 국가개입 관성도
‘민주화 퇴행’ 대신 ‘보수의 진화’로 봐야

 

셋째, 한국의 신보수 정권을 성립시킨 대중들의 요구가 단지 보수적 요구만을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라고 하는 중도 리버럴 정부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에 기초하여 성립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불신에는 양극화와 소득분배 악화의 극복, 사회복지 확대, 일자리의 확대 등 진보적 기대가 내포되어 있다. 여론조사를 보면, 각종 진보적 요구들이 다 이명박 정부에 투사되어 있다. 또한 서구의 신보수 정권에서는, 국가 실패가 강조되고 거기서 자연스럽게 시장의 역할 확대와 가족의 강조가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은 사회복지가 발달되지 않은 조건에서※국가가 과부하가 아니라※가족이 ‘과부하’ 상태에 있다. 97년 경제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경제적 양극화로 인하여 많은 중하층 가족은 사회의 부담을 이전보다 과도하게 떠안았고, 그 부담으로 더욱더 해체의 위기에 직면할 정도다. 이는 한국의 신보수 정권이 서구와는 다른 사회적 요구와 기반 위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신보수 정권 시대의 등장을 아시아 민주화의 일반적 경로에서 보면 ‘퇴행’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 ‘개발독재적 예외국가’를 벗어나서 “자본주의적 ‘정상’국가”로 변신해 가는 일종의 ‘보수의 진화’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진보의 투쟁에 의해서 강제되면서 보수가 응전한 결과이다. 이제 ‘진화된 보수’에 영향을 받고 응전하면서 ‘진보의 진화’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가.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조희연/성공회대 교수·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 소장

 



 
» 조희연 교수
 
조희연 교수는 1956년생으로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아시아 민주화의 복합적 갈등’에 대한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적 ‘급진민주주의론’의 정립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에서 정상성에 대한 저항으로> <계급과 빈곤> 등의 저작이 있습니다.


 
기사등록 : 2008-03-07 오후 07:29:19 기사수정 : 2008-03-07 오후 08:58:14

 

한국형도 신보수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일 뿐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새로 출범한 이명박 대통령(왼쪽) 정부 성격을 ‘신보수’라고 규정하는 쪽은 박정희 전 대통령(오른쪽) 체제와의 차별성에 그 근거를 둔다. 하지만 고세훈 교수는 박정희 체제가 ‘보수’의 가치와 거리가 멀었다는 점에서 새 정부에 붙이는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불필요한 수식어는 왜곡 우려

 

지난주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새 정권의 성격을 ‘신보수’로 규정했다. 조 교수는 이명박 정권이 시장자율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한 박정희 정권과 한 묶음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개발과 성장주의라는 동질적 측면이 있음도 지적했다.

조 교수는 또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전(前) 복지국가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봤다. 1980년대 유럽과는 달리 ‘신국가주의적 성격’을 지닌 점과 대중의 진보적 요구에 기초한 점도 ‘한국형’의 특징으로 거론했다.

이런 견해에 대해 고세훈 교수는 ‘보수가 의미하는 바’에 근거해 반론을 폈다. 구보수든, 신보수든 역사적으로 보수주의는 공동체 개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보수는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자율성을, 대내적으로는 유기체적 일체성을 전제하거나 추구한다는 설명이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박정희 정권에 보수의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박 정권은 보수 이념을 구현했다기보다는 기득권층을 새롭게 형성하고 고착화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공동체 의식도 박정희 체제를 거치면서 조각나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고 교수는 “우리는 적극적 가치로서 보수해야 할 무엇을 가져 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청산해야 할 역사적 유산들에 치여” 있다며, 새 정부를 신보수라고 일컫는 것은 진보정권으로 일컫는 것만큼 잘못된 규정이라고 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놓고 지식계가 소란하다. 세월의 변화와 연속성을 모두 담아내려니 성격 규정에 수식어가 복잡하게 달린다. 나름대로 서술적 의의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류가 지나치게 세분화되면, 분류의 이론적 의의는 사라지고, 우선 너무 복잡해서 대중적 전달력도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조희연 교수의 ‘한국형’ 신보수가 있다면, 중국형·터키형·이탈리아형 신보수가 없으란 법 없다. 그러다 보면 왜 분류를 하는지, 그런 분류작업이 학문적·실천적으로 어떤 의의가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그렇다고 현 정부에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역사적 담론들, 예컨대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 등을 수식어 없이 갖다 대기도 껄끄럽다. 무릇 이념이나 개념들은 특정의 상황적 맥락과 역사적 경험에서 태동하고 발전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출범한 정권에 대해 성격 규정을 서두르는 것 또한 걸린다. 그러나 시도 자체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식이든 분류는 필요하고, 어차피 우리는 끊임없이 분류할 테니까. 그럼에도 현 정부를 ‘한국형’ 신보수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한국형’이란 수사가 주는 부담감도 문제지만, 그것이 이미 역사성을 내재한 보수주의 혹은 신보수주의의 개념적 근간에 조금이라도 닿아 있으려면, ‘한국형’이란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일정한 형용 모순이거나 혼선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구보수든 신보수든, 역사적으로 보수주의는 공동체 개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대외적으론 공격적이든 방어적이든 국가의 자율성을 일정하게 전제하거나 추구하며, 대내적으론 유기체적 일체성을 역시 전제하거나 추구한다. 보수주의가 어떤 계급적 혹은 계층적 체제로 귀결했는지는 그 다음 문제다.

 

전통적 보수는 공동체 개념과 불가분
개인 의무·책임 중시하고 복지 기여해
‘박정희 체제=구보수’라 말하지만
되레 공동체 허물고 새 기득권층 형성

 

이 점은 오늘날 신보수가 아무리 시장자유주의를 전면에 내건다 해도 마찬가지다. 가장 공격적인 신자유주의가 왕왕 가장 국가주의적 색채를 드러내는 데서 볼 수 있다. 당연히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시장이나 시민사회와 대립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다른 국가들을 상대로 한 개념이다. 오히려 전통적 보수는 공동체를 원자화된 개인들로 분해하는 시장체제보다는 관계적 의무와 책임을 중시한다. 사실 보수주의 자체가 중세적 질서에 대한 일정한 향수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컨대 ‘소유하다’(own)란 영어단어가 ‘빚진다’(owe)라는 중세적 어원을 가진다거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이 중세 계층간의 쌍무적 책무의식에서 연원한다는 점은 보수주의의 공동체적 특징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수주의가 사민주의 못지않게 서유럽 복지국가의 태동과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국가복지는 취약하더라도 민간복지 혹은 자선의 전통이 굳건한 일본이나 미국의 경우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선진국에 시장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듯이 보여도, 그 배후엔 구보수적 토대가 엄연하다. 이러한 연속성은 시장자유주의적 요소가 강화되는 과정이 늘 심각한 내적 갈등을 동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엿보인다. 예컨대 영국의 정치사를 들여다보면, 벤저민 디즈레일리 이래 모리스 해럴드 맥밀런에 이르는 전통적 보수주의는 한때 에드워드 히스나 마거릿 대처의 신보수적 정치에 의해 뒷전에 밀리기도 했지만, 최근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에 의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심지어 대처주의가 당대적 힘으로 입증되려면 이른바 웨츠(wets)로 일컫던 구보수 진영과의 힘겨운 싸움을 치러야 했다.

 

‘보수’ 아닌 ‘청산’할 유산들만 떠안은
새 정권에 ‘신보수’란 수식어는 잘못
‘한국형’이란 말도 역사성 없이 혼선 불러
되레 역사에 무임승차하는 빌미 줄 뿐

 

우리의 신보수주의는 과거 박정희 체제를 보수체제로 암암리에 상정한다. 그러나 박정희체제는 기실 어떤 적극적 이념을 구현했다기보다는 그 동기·과정·결과가 기득권층을 새롭게 형성하고 고착화하는 데 초점을 둔 것이었다. 국가자율성이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서유럽 보수주의와는 정반대로 대외적 의존을 근간으로 한 대내적 (시민사회로부터의) 자율성이었다. 우리 국가의 대외적 자율성은 오로지 북한을 상대로만 기능해 왔다. 대내적으로도 국가는 수탈의 도구로 인식되었으니, 오늘날 한국 사회에 팽배한 반복지 의식 저변에는 반국가·반정치 의식이 깔려 있다. 우리의 공동체 의식은 오히려 박정희 체제를 거치면서 조각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미 와해된 공동체적 조건에다 신자유주의를 대세인 양 수용하면서 개인 중심의 극단적 혈연주의, 때론 가족조차 팽개치는 (이혼율, 해외입양률, 유아방기율, 낙태율, 출산율 등에서 나타난) 극단적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상태에 와 있다. 요행과 불로소득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며 정직한 노동과 노동자를 천시하고, ‘못사는’ 외국인노동자와 연변의 동족이나 북한을 경멸하는 저급한 의식상태가 거기에서 멀지 않다. 요컨대 우리는 적극적 가치로서 보수해야 할 무엇을 가져 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청산해야 할 역사적 유산들에 치여 있는 것이다. 신보수나 신자유는 모두 중세라는 장구한 세월에다,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근대적 경험과 정치적 실험들이 농축된 역사적 개념들이다. 이 정권에는 신보수는 말할 것도 없고, 때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조차 과분하고 민망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실용주의란 것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원칙이 전제되지 않는 유용성 혹은 현실과의 거리 조율이 애초에 가능하기나 한 건가. 우리의 실용주의도 실상은 성장주의라는 기만적 이데올로기에 터잡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 정치에 관한 한, 이념의 시대가 갔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것은 내 이념, 내 이해관계가 마침내 지배적으로 됐다고 흡족해하는 사람들의 오만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무릇, 음치가 합창단에 앉으면, 테너나 바리톤으로 ‘분류’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자동적으로 테너가 되고, 바리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음치를 합창석에 앉히지 말라. 음치를 벗어나게 하려면 먼저 음치임을 자각시켜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그렇다 치고, 이 정권에 신보수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수식어가 어떻든 그것을 진보정권으로 부르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규정이다. 장관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면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나. 투철한 국가의식은 애초에 언감생심이었고, 기형적인 한국적 시장체제에서 ‘성공한’ 몽롱한 얼굴들뿐, 진지하고 당당한 시장주의자의 모습조차 거기엔 없었다. 그리하여 현 정부가 자신의 별명을 그냥 ‘이명박 정부’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어떤 점에선 백번 옳고 또 잘한 일이다.

 
» 고세훈 고려대 교수
 
예명으로 언론이 갖다 붙인 고소영, 강부자 정부면 충분하다. 너무 냉소적이고 안이한가? 그래도 나는 이 정권에 신보수의 치장을 해 줌으로써 지레 면죄부를 주고, 그것이 역사에 무임승차하도록 빌미를 주는 일은 정말 내키지 않는다.

고세훈/고려대 교수

 


고세훈 교수는 1955년생으로 미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존 메이너드 케인즈, 국가복지사상의 역사, 조지 오웰의 삶과 사상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영국노동당사>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페이비언 사회주의> 등의 저서를 냈습니다.

 

계급성 뚜렷한 경제·물질주의적 우파다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이명박 정부로 상징되는 새로운 보수는 계급적 속성이 강한 경제적 우파에 물질주의의 이념이 결합되어 있다는 게 강원택 교수의 분석이다. 지난 1월 대운하 착공 계획을 발표하고 있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 당선인(왼쪽)과 대운하 건설을 반대하는 도보 순례를 벌이고 있는 종교인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③ 자기 변신한 보수

 

지난 두 주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와 고세훈 고려대 교수는 이명박 정부를 ‘신보수’로 규정할 수 있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조 교수는 새 정부가 시장자율 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점에 주목하면서 국가개입 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한 박정희 정권과 한 묶음으로 보기 힘들다고 했다. ‘신보수’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고세훈 교수는 보수는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자율성을, 대내적으로는 유기체적 일체성을 추구”한다면서 이런 기준으로 따질 때 박정희 정권이든 새 정부든 보수라고 볼 수 없다는 관점을 보였다.

강원택 교수는 ‘신보수’ 논쟁에서 비켜나 이명박 정부의 이념적 지형 분석에 치중했다. 그는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보수를 “계급적 속성을 띠는 경제적 우파와 물질주의적 가치의 결합”으로 요약했다. 구보수 세력은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했다면 새 정부는 경제적 요인과 계급적 특성을 지닌 우파적 속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보수 세력의 경우 경제적 우파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보수에서 상층계급이나 자본가와 같은 계급적 기반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했다.

강 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지향하는 또 다른 가치로 물질주의를 들었다. ‘물질주의적 우파’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는 새로운 보수의 등장과 함께 한국 사회의 갈등 지형이 경제적 가치를 둘러싼 좌우의 대결 혹은 물질주의 대 탈물질주의와 같은 한층 보편성을 띤 이념적 갈등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보수는 ‘변화를 거부하고 기존 질서나 가치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지켜야 할 가치나 대상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항상 조금씩 변화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보수라고 해도 그 속에 담고 있는 내용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보수성’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은 예전의 보수가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곧 우리나라의 보수 역시 변했다는 인식이 이 논란 속에는 깔려 있다.

2007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세력이 승리한 것은 보수파의 자기개혁, 자기변신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구보수가 지녔던 지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모습을 유권자에게 제시했기 때문에 보수 세력은 승리했다. 구보수가 대표했던 가치는 냉전 시대의 반공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있었다. 과거 냉전 시대, 권위주의 체제의 이념적 유산이 우리나라 구보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이명박의 보수는 냉전적 보수에서 벗어나 경제적 요인과 계급적 특성을 지닌 우파적 속성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냉전시대 반공이데올로기 기반으로
다양한 계층 속해 있던 구보수와 달리
이념 벗어나 경제적 우파 정책 강조
기득층 대변·친기업 등 계급속성 강화

 

이명박 정부가 강조하는 ‘실용’이라는 용어는, 노무현 정부의 과도한 이념성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이념성이 강조되었던 구보수로부터 거리두기의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 여기서 ‘실용’에 대비되는 ‘이념’은 서구 정치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경제적 가치를 토대로 한 좌파 대 우파의 균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북관계, 대미관계, 국가보안법 등 반공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이념적 갈등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명박의 새로운 보수가 강조하는 실용은 이런 과거 반공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이념적 갈등에서 벗어나, 시장 중심, 성장과 효율 추구라는 전통적인 우파 정책의 강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자기변신으로 이명박의 보수는 더는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을 지키려는 ‘꼴통’ 보수로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 때문에 과거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을 선택했던 많은 ‘진보적’ 유권자들로부터도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명박 정부를 우파로 지칭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구보수에 비해서 계급적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구보수 세력은 계급적 속성이 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지는 개인의 경제적 지위나 계급과는 무관한 개인의 가치와 신념의 문제였다. 계급이나 소득과 무관하게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한 신념을 지닌 이들이 과거의 보수 세력의 핵심 지지 기반이었다. 따라서 다양한 계급이 보수 세력 내에 공존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이념의 문제는 계급보다 세대적 요인이 더 큰 차별성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소득수준이 낮은 계층에서 보수이념 성향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곧 과거 보수 세력은 경제적 의미의 우파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의 새로운 보수는 상층계급이나 자본가와 같은 계급적 기반이 한층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보수 세력의 계급성이 강화되는 특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강부자’ 내각, ‘고·소·영’과 같은 용어는 이명박 정부의 계급적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런 용어들은 재산과 학연·지연·종교 등을 통해 형성된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을 상징하는 것이며, 이명박 정부는 조각 과정에서 이미 이들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역시 계급적으로 노동보다 자본에 대한 강한 선호를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풍요 부르짓는 물질주의가
대중지지 이끌어내 대선 승리했지만
환경·노동·인권 등엔 소홀 드러나
경제가치 둘러싼 좌-우 대결 신호탄

 

이처럼 계급적으로 비교적 편협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압승을 거둔 이유를 단지 냉전적 보수로부터의 이탈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명박의 새로운 보수가 지닌 또 다른 특성은 바로 ‘물질주의’이다. 물질주의는 인간 삶의 기본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는 경제적 풍요와 사회질서의 유지와 같은 생존과 안전의 문제를 강조한다. 삶의 질의 추구에 앞서 생존을 위한 최소 요건의 충족을 선호하는 것이다. 물질주의에서는 개발과 경제 논리가 우선시되며 법과 질서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 대운하 사업과 같은 개발 논리, 노동쟁의에 대한 엄벌과 질서와 법치의 강조 등은 이명박의 보수가 담고 있는 물질주의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2007년 대선에서 많은 유권자들이 이명박을 선택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물질주의적 호소의 위력이었다. 아파트 가진 이들은 부동산 재개발, 시장 상인들은 경기 회복, 젊은이들은 취업 등 물질주의적 메시지로 중산층과 서민, 노동자의 지지를 확보해 간 것이다. 경제적 침체가 지속되면서 물질주의에 대한 강조는 커다란 정치적 호소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탈물질주의적 가치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대운하 논란에서 드러나는 환경 문제의 경시, 각료 임명 과정에서 본 대로 성 평등 문제에 대한 취약함, 노동이나 인권 문제에 대한 소홀함 등이 이명박의 물질주의적 편향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경제적 성취와 가시적인 결과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물질주의는 이명박의 새로운 보수가 중시하는 또 다른 가치인 것이다.

결국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보수는 계급적 속성을 띠는 경제적 우파와 물질주의적 가치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이명박 정부의 이념적 지향점은 물질주의적 우파의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특성은 한국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정치적 변화의 특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과거 한국 정치의 균열이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을 둘러싼 갈등에 기반해 있었다면 이제는 서구의 경험을 고려할 때 한층 보편성을 띤 이념적 갈등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장·효율 대 분배·형평이라는 경제적 가치를 둘러싼 좌우의 이념 대결, 개발·안전 대 보존·자유라는 물질주의 대 탈물질주의 이념의 대결이 한층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갈등의 축 역시 지역이나 세대를 넘어서 사회경제적인 의미의 계층·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다.

 
» 강원택 숭실대 교수
 
과거 우리 사회의 진보가 권위주의 유산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자임하면서 정치적 신뢰를 확보해 왔다면, 이제 이명박의 보수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런 진보의 역할은 이미 그 소임을 다한 것 같다. 과연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구현하면서 좌파적 분배 정의를 강조할 우리 시대의 진보는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변화된 시대에 걸맞은 진보의 자기개혁, 자기변신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강원택/숭실대 교수

 


강원택 교수는 1961년생으로 영국 런던정경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영국 보수당의 역사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개혁과 민주주의>, <한국의 선거정치>, <한국 정치 웹 2.0에 접속하다>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보수’지만 ‘보수’일 수만은 없다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홍성민 교수는 정치권력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는 대통령과 정치사회/시민사회 그리고 정치주체와 국제정치 등 네 가지 층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진은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예방을 받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④ 변수에 따라 다르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와 고세훈 고려대 교수 그리고 강원택 숭실대 교수가 지난 세 주 이명박 정부의 ‘보수적 성격’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조 교수는 새 정부가 시장자율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내세우고 있다며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한 박정희 정권과 한 묶음으로 보기 힘들다고 봤다. ‘신보수’라는 것이다. 반면 고 교수는 보수는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자율성을, 대내적으로는 유기체적 일체성을 추구”한다며 이런 기준으로 따질 때 박정희 정권이든 새 정부든 보수라고 볼 수 없다는 시각을 보였다. 강 교수는 구보수 세력은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했다면 새 정부는 경제적 요인과 계급적 특성을 지닌 우파적 속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봤다.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우회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홍성민 동아대 교수는 이 글에서 정치권력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정치사회/시민사회-정치주체-국제정치라는 네 가지 층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의 보수적 헤게모니 안에 포섭되어 있는 점과 관료들의 정책 지향 등을 들어 현 정부를 보수정권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1990년대 이후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계급적 대립 지점이 흐려지고 있다며 이제 정권의 실무자들은 유권자들의 좋고 싫음이라는 취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 교수는 결론적으로 새 정부가 순항하기 위해서는 이런 4차원 공간에서 전개되는 변화와 접합의 동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처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다음주 조희연 교수가 그동안 제기된 반론들에 재반론을 펼친 뒤 이 주제의 논쟁을 마칠 계획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보수로 규정함에 있어서 지식인 사이에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현실의 변화가 매우 급격하여 논의의 수준이 이를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도 오늘날 한국 정치현장이 그런가 보다. 기초적인 정치학의 이론을 점검하면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차분히 따져보자.

정치권력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네 가지 수준의 층위가 있다.

첫째는 정치 지도자의 개인적인 퍼스낼리티에 주목하는 방법이다. 개인의 성장배경, 사회적 경험, 인사운영의 스타일 등이 정치권력의 전반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추적하는 경우이다. 기업가 출신답게 이명박 대통령은 실용노선을 앞장세워 국정을 운영하고 있어, 그 결과가 사뭇 궁금하다. 그러나 과거 군부독재와 같이 권력이 개인에게 독점된 상태가 아니고 보면, 대통령의 특성만으로 정치권력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뭔가 부족하다.

둘째는 정치사회-시민사회의 관계 속에서 정치권력의 성격을 찾아보는 방법이다. 우리가 정권의 성격을 보수-진보로 구분하는 수준이 바로 여기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분류가 매우 상대적이며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18세기의 진보는 시장의 자유를 주장했지만, 19세기의 진보는 국가개입을 요구한 바 있다.

 

정치가 시민사회에 끼치는 영향력
정권·관료들의 정책지향 볼 때
이명박 정부 보수라 부를 수 있지만
보수-진보 전통적 대립구도 무너져

 

또 정치권력을 보수-진보로 양분하기 위해서는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에 대하여 확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유럽에서 18세기 시민혁명 직후에 정치권력을 진보/보수로 양분하는 관례가 생기는데, 이때 귀족세력이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 반하여 시민사회를 대변하는 부르주아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이것은 정치권력이 사회 전체의 흐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 정치는 상황이 다르다. 우선 최근 10년 사이에 민주세력을 자임하고 등장한 행정부의 영향력이 시민사회의 보수세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의 보수적 헤게모니 안에 ‘실질적’으로 포섭되었다. 현재 불거지고 있는 삼성의 로비의혹이 전형적인 사례다. 따라서 정치세력이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시민사회의 문제에 개입하려는 의지가 있어도 현실적인 영향력은 매우 미미했던 것이 노무현 정권의 특징적인 사례다.

그리고 정치권력의 사회적 기원과 관료들의 이념적 기원을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두환 정권의 사회적 기원은 군부독재였지만, 당시에 실질적으로 전개된 정책은 신자유주의의 성격이었다. 당시 경제운영을 전담했던 김재익은 미국에서 통화주의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민영화 정책을 실시한 대표적인 관료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권력의 외면만을 보게 되면, 실질적인 내용을 혼동할 가능성이 있다.

 

국민의 취향·국제관계까지 고려할 때
정치권력 하나의 노선만 고집 못해
정치-시민사회-정치주체-국제정치라는
4각축 면밀히 주시하고 조율해야

 

이러한 세 가지 변수를 두고 볼 때 이명박 정부를 보수정권이라고 불러볼 만하다. 노무현 정권의 실정에 각을 세우면서 상대적으로 우경화된 노선을 주장하고 있고, 정권의 사회적 기원과 관료들의 정책지향은 과거 어느 때보다 일치도가 높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시민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통로가 많이 열려 있다. 대부분의 관료가 기득권을 가진 지배계급이고 그들의 친기업 정책은 정권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만큼 시장주의 논리에 더욱 철저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변수에 변화가 생기면 정권의 성격도 지금과는 다르게 될 것이다.

셋째는 정치사회-시민사회-정치주체로 확장하는 단계다. 보수-진보의 구분은 계급성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18세기에는 귀족-신흥 부르주아 세력의 대립이 있었고, 19세기에는 이것이 자본가-노동자의 대립구도로 성격이 변화된다. 계급과 정치의 상응관계는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지만, 1960년대에 서유럽이 이른바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노동자들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보수-진보의 전통적인 대립구도가 사라진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보면 한국의 보수-진보의 대립구도는 애초부터 계급적 기반이 매우 취약한 상태에서 출발했다. 즉, 지식인 중심의 진보는 있었지만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에 기초한 노동정치는 매우 취약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도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개인들의 소비취향이 그나마 남아 있던 계급적 기반을 흐려 놓고 있다. 비정규직 투쟁에 앞장서는 노동자들이 자식들의 교육문제에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선호하는 이중성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강남 사람처럼 살고 싶은 노동자들의 욕망을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파편화된 욕망의 흐름을 이성정치의 언어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의 압도적인 승리는 바로 이러한 감성의 정치와 깊숙이 맞물려 있다. 이제 정권의 실무자들은 옳음/그름의 논리(이념)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의 좋음/싫음(취향)까지 고려해서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정치권력이 분명한 노선을 지킬 수가 없다.

넷째로 국제정치의 영향력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의 정치권력은 미국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자율성을 갖는 것이 현실이다. 박정희 정권을 군부독재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가 추진했던 개발독재는 당시 세계은행이 제3세계에 강력히 추진했던 “발전국가모델”의 전형이다. 박 정권 말기에 미국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했던 박정희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사주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음모설도 있다. 물론 확인되지 않은 얘기지만, 그만큼 한국 정치는 미국의 영향권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권 초기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보인 도전적인 태도는 사실 매우 어리숙한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미국과의 화해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경제회복을 외치며 정권을 획득했다. 현재 국민들의 기대수준은 매우 높아져 있다. 그런데 이 정부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강행하고, 이로 인해 민중들의 경제생활을 파탄으로 몰고 갈 경우,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다. 실용이라는 구호만으로 국내정치의 요구와 국제정치의 외압을 조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군부독재보다 더한 수준으로 공권력을 남용하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 홍성민 동아대 교수
 
대통령-정치사회/시민사회-정치주체-국제정치라는 4각 축은 한국 정치를 떠받치는 높낮이가 서로 다른 기둥들이다. 이러한 4차원의 공간에서 전개되는 변화와 접합의 동학을 면밀히 주시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이명박 정부는 예상보다 빨리 좌초할 수 있다. 그런데 5년 뒤를 준비해야 할 진보세력도 이러한 4차원의 구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걱정스럽다. 홍성민/동아대 교수·정치학

 


홍성민 교수는 1963년생으로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정치적 변동의 관계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문화와 아비투스> <지식과 국제정치> 등이 있습니다.

 

한국만의 보수’는 재구성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신보수정권에서 평등, 생태, 평화, 사회연대 등의 가치는 진보의 재구성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조희연 교수는 지적했다. 사진은 보수단체들의 북핵 반대 집회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⑤ 조희연 교수의 재반론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와 고세훈 고려대 교수, 강원택 숭실대 교수, 그리고 홍성민 동아대 교수가 지난 4주 동안 이명박 정부 ‘보수성’의 실체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조 교수는 새 정부가 시장자율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내세우고 있다며,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적 성격을 지닌 구보수와는 차별성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반면 고 교수는 보수는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자율성을, 대내적으로는 유기체적 일체성을 추구”한다며, 이런 기준으로 따질 때 박정희 정권이든 새 정부든 보수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강 교수는 구보수 세력이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했다면 새 정부는 경제적 요인과 계급적 특성을 지닌 우파적 속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했다.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받아들인 것이다. 홍 교수는 정치권력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정치사회·시민사회-정치주체-국제정치라는 네 가지 층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조 교수는 이번 글에서 한국의 보수는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지배의 전통이 단절되는 등 정체성의 ‘해체적 재구성’을 겪었음을 강조했다. 서구적 기준의 보수와는 달리, 극단적 반북주의와 친미주의를 자기정체성으로 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신보수 정권에서 생태주의적·신좌파적·신계급적·새로운 국제주의적 진보성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지라는 과제가 주어진다고 밝혔다.

다음 주제는 ‘고종은 개혁 군주인가’이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가 다음주 의견을 먼저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지난달 22일 대만 총통선거에서 국민당의 마잉주 후보가 승리하였다. 이는 개발독재적 구(舊)지배와는 구별되는 ‘신보수정권’이 한국과 대만에서 출현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보수적 지배는, 필리핀이나 타이 등과 같이 과거 구독재세력이 강력한 제도적ㆍ비제도적인 영향력과 개입력을 보유하고 과거의 ‘정치적 독점’이 강고하게 유지되는 ‘신과두제’ 유형과 대비된다.

당연히 신보수정권은 개발독재적 구보수정권과 연속성 및 차별성을 갖는다. 내 글에 이어 실린 강원택 교수와 홍성민 교수의 글은 ‘차별성’을 강조하는 논의를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내 논지와 크게 대립되지 않으면서 그 ‘차별성’의 복합적 측면을 강조하는 논의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강원택 교수는 보수의 계급적 성격의 변화를 주목하면서, 이명박 정부가 과거 냉전형 보수와는 구별되는 ‘계급적 속성을 띠는 경제적 우파와 물질주의적 가치의 결합’으로 특징화될 수 있다고 표현했다. 이에 충분히 동의한다. 홍성민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복합적 성격을 논하였다. 네 가지 층위-정권 지도자의 퍼스낼리티, 정치사회ㆍ시민사회의 관계에 따른 정치권력의 성격, 정치 주체의 취향, 국제정치의 영향력-에서 보수정권의 성격을 복합적으로 보아야 함을 강조했다. 특히 그가 말하는 새로운 ‘감성의 정치’ 개념은 보수가 진보를 ‘추월’하고 있는 지점을 우리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단지 고세훈 교수의 경우는 다른 각도에서 중요한 논점을 제기하고 있다. 곧 보수의 일반적 성격과 한국 보수주의의 특수적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는 서구의 보수 개념을 근거로 하여, 보수를 “대외적으로 국가의 자율성을 추구하고 대내적으로 유기체적 일체성을 추구하는 지향”으로 규정하고 박정희 정권이나 이명박 정부를 보수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 자신의 개념규정의 근거를 가지고 이명박 정부를 규정하는 것을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서구 보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는 바로 그 측면이 오히려 한국 보수의 성격이고 현실적 모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곧 한국의 보수가 드러내는 극우적 반공주의, 일면적인 성장주의, 전통적인 보수의 국가자율적 배외주의와는 대립되는 극단적인 친미주의, 복지와 공동체적 삶에 대해 전혀 고려가 없는 천민자본주의적 지향, 동성애나 낙태 반대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탈(脫)도덕적 경제주의’ 등이 한국적 보수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3ㆍ1절과 8ㆍ15에 친미 데모를 하는 것 그 자체가 한국 뉴라이트의 성격을 드러내준다.

 

‘국가의 자율성’이라는 서구적 잣대로
‘극단적 친미’ 특수성 부정하면 곤란
개발독재서 신자유주의적 성장으로
한국 신보수 헤게모니 전환 이뤄져

 

더 많은 논의를 해야 하겠지만, “보수를 공동체 개념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라고 고 교수는 주장하는데, 이는 근대 초기에 서구 보수가 전근대적인 중세적 질서를 일정하게 이상화하면서 옹호하는 형태로 자신을 구성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국이나 많은 제3세계 국가들에서 보수는 자신들의 사회가 식민지로 전락하는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의 ‘해체적 재구성’을 불가피하게 겪었다. 전근대에서 근대식민지로 전환하는 과정, 나아가 해방 이후의 ‘내전적 과정’과 분단 및 60년대 군부독재의 출현 과정 등에서 ‘지배의 전통’이 단절되었다는 점이 보수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보수는 역설적으로 극단적 반북주의와 친미주의를 자기정체성으로 하여 존립하게 되었다. 이것이 냉전 시기의 한국 보수이다. 60년대 이후에는 개발독재 하에서 보수가 친기업적 성장주의와 반(反)노동자주의를 내면화한 근대화 추진세력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했다.(이 과정에서 한국의 보수는 자유주의-진보주의 세력의 연합에 기초해 전개되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억압했고 그래서 자유주의를 천명하지만 자유주의적 성격이 없다는 특성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개발독재의 ‘성공’적 추진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현재의 보수는 60~70년대 ‘근대화적 성장주의’를 새롭게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로 전환하면서 스스로를 재구성해가고 있다.(박정희라고 하는 보수의 역사적 자원을 부각시키면서 말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보수 블록 내의 헤게모니 분파도 전환되어 왔다. 예컨대 개발독재적 보수 블록과 현재의 신보수 블록 안에서 헤게모니 분파는 명백히 다르다. 이러한 변화들을 ‘신보수’라는 개념을 통해서 포착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수에 대한 ‘선험적인’ 서구적 기준을 설정해 놓고 한국에서 그에 부응하는 ‘보수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소비자본주의 대중의 욕망 포획
생활세계 지배하려는 보수시도 맞서
이젠 진보의 재구성 고민할 때
생태평화적 ‘평등연합’ 구성해야

 

우리가 이명박 정부의 성격 논쟁을 하는 데에는, 신보수정권 시대 ‘진보의 재구성’과 ‘진보의 풍부화’를 고민하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나는 신보수정권 하에서 진보는 대중들의 새롭고 지속되는 삶의 고통들을 주목하고 새로운 복합적 평등연합을 재구성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사회)공공성 담론이나 ‘민주주의의 사회적ㆍ급진적 확장’ 같은 담론이 중요하다. 복합적 신평등연합은 70~80년대의 반독재연합이나 90년대 민주개혁연합과는 다른 다양한 대중적 동력을 수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신평등연합은 새로운 ‘의제연합’이자 대중들의 다종다양한 새로운 ‘요구연합’이 될 것이다. 물론 성공적인 새로운 복합적 평등연합은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모인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기존의 진보그룹-그 일부인 급진적ㆍ좌파적 그룹을 포함하여-은 반독재적 진보성과 반미주의적 진보성, 초기 산업화 단계의 계급적 진보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제 신보수정권 하에서 우리는 생태주의적 진보성, 신좌파적ㆍ신사회운동적 진보성, 새로운 신자유주의적 성장드라이브가 촉발하는 신빈곤과 양극화에 대응하는 신계급적 진보성, 지구화가 촉발하는 새로운 국제주의적 진보성을 어떻게 결합시켜 낼 것인가 하는 과제 앞에 서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얼마 전 창당한 진보신당이 기존의 진보 이슈에 더하여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는 평등, 생태, 평화, 사회연대 등의 가치는 진보의 재구성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대중의 생활세계에 대한 신보수적 지배의 새로운 공세로 인해 분출되어 나오는 새로운 저항성들을 폭넓게 수렴하려는 고민이 필요하다. 예컨대 고도 대중 소비자본주의 시대 대중들의 신체와 욕망, 삶의 전 영역에 대한 국가와 자본의 새로운 포획과 거기서 배태되어 나오는 저항적 주체성, 신보수적 지배의 ‘감성의 정치’에 포획되면서 동시에 그것에서 탈주해오는 대중들의 저항적 감수성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하는 과제도 있다. 물론 성공적인 ‘우파 경제포퓰리즘’, 새로운 ‘우파 국제주의’ 전략, 신보수정권의 ‘경제 실패’가 가져올 수 있는 파시즘적 사회심리의 부상과 같이 신보수정권 하에서 나타날 수 있는 진보에 대한 위협적 상황도 예기해볼 수 있다. 다행히 경부운하 반대투쟁과 같이 새로운 주제를 중심으로 새로운 저항적 주체성들이 분출하고 있다.

 
» 조희연 교수
 
반독재 투쟁전선에서 이탈했던 대학생들이 등록금 투쟁으로 새롭게 정치화될 가능성도 나타난다. 암울했던 2007년 대선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지금, ‘진보의 게토화’가 아니라 ‘진보의 풍부화’로 가는 새로운 희망의 근거들을 나는 발견해가고 있다.

조희연/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조희연 교수는 1956년생으로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아시아 민주화의 복합적 갈등’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적 ‘급진민주주의론’정립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에서 정상성에 대한 저항으로> <계급과 빈곤> 등의 저작이 있습니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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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동물사진공모전 주요 수상자 인터뷰]<br>슈슈는 축구를 좋아해∼

 

어디선가 본 듯한… 트리밍이 부족한…

기사입력 2008-05-10 12:56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아쉬운 사진에 관한 이야기꽃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지만, 멋진 사진은 그 1%의 차이로 공모전에서 당락이 결정된다. 그렇다고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공모전은 승패가 뚜렷한 경쟁터가 아니다. 사진을 매개로 서로의 다른 시선을 나누는 축제이다. 1%가 모자라 당선작에서는 빠졌지만 여전히 가슴을 울리는 아쉬운 사진들이 많다. 그 사진들과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워보자.

‘조금만 트리밍(사진프레임 자르기)했다면’ 좋았을 사진이 많았다. 셔터를 누를 때부터 완벽한 구도로 찍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뜻대로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트리밍이다. 트리밍 역시 사진에 대한 안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사진1. 김동훈


△ 사진2. 트리밍한 김동훈씨 사진

△ 사진3. 안승인

△ 사진4. 김정수

△ 사진5. 복정님

김동훈(사진1)씨의 사진은 트리밍(사진2)을 해서 강아지의 표정을 좀더 살렸다면 당선권에 들었을 것이다. 주제보다 이를 둘러싼 배경이 90%를 차지한다. 안승인씨의 사진(사진3)도 마찬가지다. 나무를 타고 가는 개미들이 빛을 받아 극적인 빛깔마저 연출한다. 확대해서 보지 않으면 작은 개미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김정수씨(사진4)도 같은 경우다. 둥지에 날아든 두 마리의 새는 동물도감에서나 볼 듯한 희귀한 사진이다. 그러함에도 프레임에 50%를 차지하는 나무와 숲은 새의 극적인 행동을 희석시킨다. 복정님씨(사진5) 사진은 흑백이 주는 단아함이 아름답지만 흰 여백이 지나치게 많다. 물론 여백은 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경우는 방해꾼이다.

△ 사진6. 김경훈

김경훈(사진6)씨 사진은 길고양이의 처절한 눈빛이 돋보였지만 그를 둘러싼 벽들이 고양이를 숨겼다.

△ 사진7. 고한곤

고한곤(사진7)씨 사진은 심사위원들을 가장 괴롭혔다. 내용도 구도도 훌륭했다. 계단에 늘어선 강아지들만으로 충분히 재미있다. 하지만 배경에 초점이 맞고 말았다.

△ 사진8. 김기현

△ 사진9. 김철근

△ 사진10. 김낙현

△ 사진11. 황해경

△ 사진12. 임경일

△ 사진13. 김구화

△ 사진14. 최효식

△ 사진15. 박진희

△ 사진16. 송경희

△ 사진17. 전희철

△ 사진18. 최승관

△ 사진19. 이일령

△ 사진20. 변상준

어디선가 본 듯(사진8, 9, 10, 11, 12, 13)하거나 국외 여행지에서 조금 낯 익은 (사진14, 15)은 제외되었다. 과학책에서나 나올 법한 매우 훌륭한 생태사진들(사진16, 17, 18)도 있었다. 하지만 과학 사진과는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길 바랐다. 이일령(사진19)씨, 변상준(사진20)씨 사진은 보기만 해도 행복하다. 웃는 돼지 얼굴이 다른 구도였으면, 사슴을 피해 도망가는 이가 앞모습이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사진21. 최반

최반(사진21)씨의 사진은 색감과 구도,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풍경 등 모두 훌륭했다. 사진속에 이야기거리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 사진22. 조용석

△ 사진23. 김영수

△ 사진24. 권서정

△ 사진25. 강기성

△ 사진26. 강동훈

재미있는 사진(사진22, 사진23, 사진24, 사진25)도 여운을 남긴다. 조용석씨 사진은 주인공이 ‘손’ 같고, 김영수씨 사진은 앵글이 주는 희한함은 있지만 동물 표정에서 즐거움이 묻어나지 않는다. 마치 흑백사진 안에 초록색 물감이 한 방울 떨어져 있는 듯한 권서정씨 사진은 왼쪽 사람의 실루엣이 너무 크고 지루하다. 강기성님 사진은 디자인적으로 훌륭하다. 어떤 돌고래 쇼도 이토록 독특한 시각으로 재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의 감동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강동훈(사진26)씨 사진은 당선작들과 유사했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그 밖의 아쉬움

가장 귀여운 고양이 찜!


인물사진을 찍을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포즈? 표정? 동작? 그 사람을 최대한 그 사람답게 찍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접수된 고양이 사진들 중에 가장 고양이다운 사진을 독자들이 찜해 보시기 바란다.

△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박누리, 김하림, 전힘찬, 최고은, 이문형, 백동진, 김재윤 작품

* 해당 사진의 저작권과 소유권은 공모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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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동물사진공모전 주요 수상자 인터뷰]
슈슈는 축구를 좋아해∼

기사입력 2008-05-10 12:56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대상 강현희씨

슈슈는 축구를 좋아해∼


봄날, 강현희(37)씨는 자신이 기르는 개 슈슈와 함께 집 근처 공원을 찾았다. 축구광인 남편(주필환·46)도 따라나섰다. 남편이 발로 공을 차면 슈슈가 받았다. 축구에 소질이 있다는 슈슈. 펄쩍 뛰어올라 공을 문다. 김씨는 아주 짧은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캐논 S3 IS 하이엔드급 카메라를 들고 조리개 우선 모드로 찍었다. 조리개 f3.5로 고정시켰다. 날씨가 맑아서 셔터속도는 자연으로 고속이 되었다. 묘하게 가려진 얼굴이 사진의 재미를 더한다.

강씨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오로지 이들 부부에게 아들 같은 슈슈 때문이다. 만 6살이 된 ‘슈나이저 종’ 슈슈를 데려온 날부터 그저 예쁘게 찍어주고 싶은 욕심에 카메라를 샀단다. 슈슈에 대한 애정이 사진 실력을 쑥쑥 키웠다.

그는 현재 동물보호 단체인 ‘동물사랑 실천협회’에서 사진을 담당하는 상근 활동가다. 언론사에 배포하는 보도용 사진이나 홍보사진, 전단지에 들어가는 사진을 두루 그가 찍는다. 대상 수상 소식을 접한 협회 회원들은 축하 인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동물사랑 실천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3년 전 언론에 보도되었던 ‘인천 장수동 개사건’(인천 남동구청과 개주인 사이의 분쟁으로 개들이 방치된 사건) 덕분이다. 티브이를 통해 고통받는 개들을 보고 자신이 개 슈슈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졌단다. 그의 꿈은 동물사랑을 사진을 통해 실천하는 동물사진가가 되는 것이다. “슈슈와 도보로 전국 여행을 계획 중입니다. 여행 중에 찍은 슈슈 사진으로 전시회도 하고 싶어요.”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비가 찰박찰박 내리는 서울시청 앞으로 향했다. 서울시가 개를 현형법상 ‘가축’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자 1인 시위를 하고자 길을 나선 것이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금상(야생) 백승현씨

까치의 기습출연


‘까치와 청설모’

본래의 기획은 청설모 ‘원톱’ 주연이었으나 까치의 기습 출연으로 ‘짝패’ 사진이 됐다. 올해 초 남이섬에 놀러갔던 백승현(28)씨가 나뭇가지에서 빨빨거리며 뛰어다니던 청설모를 발견하고는 카메라에 담고자 멀찍이서 기다리다가 두 동물의 ‘극적인’ 만남 순간을 잡았다. 청설모 근처에 다가와 ‘무심한듯 시크하게’ 딴청을 피우는 까치를 놀란 눈으로 탐색하는 청설모의 표정이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재치롭다. 예식장의 촬영 관련 일을 하는 백씨가 일이 아닌 즐거움을 위해 사진을 찍게 된 건 3년 전 똑딱이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한 다음부터라고. 집에서는 주로 아이 사진을, 여행 가서는 재밌는 자연 사진을 찍다가 점점 재미를 붙여 다음해에는 캐논 이오스 50디로, 그 다음 해에는 캐논 이오스 30디로 카메라 기종을 격상시켜가면서 “아내에게 ‘만날 카메라만 사냐, 만날 렌즈 타령이냐’ 핀잔을 들었는데, 이번 수상으로 위신을 세웠다”고 기뻐했다.



은상(야생) 이정훈

순간 놀라던 고양이


회사원 이정훈(34)씨는 카메라 상점이 모여 있는 충무로에 자주 간다. 그 날도 카메라 때문에 충무로에 갔다가 칼국수집 앞에서 고양이를 발견했다. “칼국수집 아주머니께서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는지, 길고양이가 그 집 문앞에 앉아 있더군요. 그래서 고양이를 찍으려고 기다리는데 때마침 손님이 지나갔어요. 순간 놀라면서 자리를 피하는 고양이를 찍을 수 있었죠.” 고양이를 세 마리나 기르고 있어선지 고양이만 보면 사진을 찍게 된다는 이정훈씨에게 길고양이는 친숙한 피사체다. “길고양이들은 사람만 보면 도망을 가요. 사람들이 워낙 좋지 않게 보니까 그런 거겠죠. 그런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으면 해서 길고양이 사진을 블로그에 자주 올려요.” 사용한 카메라 기종은 미놀타 다이낙스 5D다.


은상(야생) 주기봉

방앗간에 참새가 죽친다고?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는 걸로도 모자라서, 방앗간에 아예 둥지를 틀었다. 주기봉(50)씨의 사진 속 참새 얘기다. “주말이면 재두루미와 독수리를 찍으러 철원 쪽에 가요. 한번은 철원 대마리에 갔는데 간이 방앗간 지붕 철근 파이프 안에 참새 두 마리가 있는 거예요. 사진을 찍으려고 세 시간을 지켜봤죠.” 관찰을 해 보니 참새 두 마리는 그 파이프 안으로 연신 지푸라기를 옮기며 알을 낳을 둥지 만들기에 한창인 참새 부부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얻어낸 사진이 이번 공모전 은상 수상작이다. 주기봉씨는 독수리 등 새뿐만 아니라 개를 찍는 데도 관심이 많아 지금까지 찍은 개 사진을 모아 <개판>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전도 기획하고 있다. “동물과 자연도 자세히 보면 다 표정이 있어요. 그 표정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앞으로도 계속 자연 사진을 찍고 싶어요.” 카메라 기종은 니콘 D300.


은상(비야생) 김평

그 여유로움에 반하다


방학 때마다 티베트며 쿠바·이집트 등 세계 여행을 해 온 대학생 김평(25)씨는 지난 겨울방학에 70일 일정으로 혼자 인도를 찾았다. 인도 북부 쪽 작은 마을인 푸시카르를 지나가는데 우연히 집앞에서 잠을 자는 사람과 개를 발견했다. “집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문앞에서 개와 똑같은 모습으로 잠을 자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카메라를 꺼냈어요. 촬영을 하는지도 모르고 잠을 자더라고요. 인도에는 동물들이 대부분 다 사진 속 개처럼 누워서 잠을 자거나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2년 전 이집트 여행을 갈 때부터 디에스엘아르 카메라를 챙겨가기 시작했다는 김평씨의 다음 목적지는 라오스다. 대학시절 마지막 여행지가 될 라오스에서도 이번처럼 좋은 사진을 맘껏 카메라에 담아오길 바란다. 카메라 기종은 니콘 D80.


은상(비야생) 김수연

내 유년을 상기시킨 소녀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김수연(32)씨는 지난 2월 캄보디아로 훌쩍 여행을 떠났다. 혼자 떠난 짧은 여행이었다. 사진 찍기를 즐기기에 카메라도 잊지 않고 가져갔다. “호수로 잘 알려진 작은 마을 바레이에 갔어요. 그곳 아이들이 카메라를 보고 자기를 찍어달라고 줄을 서 있는데, 유독 머리카락이 까만 여자 아이가 카메라에는 관심 없다는 듯 소를 바라보는 거예요. 아기 송아지가 엄마 소의 젖을 먹는 모습을 한참 보더니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어딘가로 걸어갔어요. 그 모습을 보고 제주도에서 자랐던 제 어린 시절이 생각났어요. 옆 동네에서 놀다가 문득 집에 가고 싶어졌던 그 모습요. 그래서 이 여자 아이의 뒷모습과 여자 아이가 바라보고 있던 소 두마리를 카메라에 담았죠.” 카메라 기종은 캐논 20D다.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 동상 노순엽

△ 동상 김욱현

△ 동상 박진우

△ 동상 이태호

동상 수상자들의 면면

강아지의 버릇을 간파했네


노순엽(39)씨 수상작(사진 1)은 신기하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참새가 놀랍다. 종로 종묘공원에서 찍었다는 노씨는 이 장면에 공을 많이 들였다. 노씨가 경영하는 회사가 종묘공원 근처라 카메라를 들고 자주 찾았다. 참새한테 먹이를 주는 할아버지를 우연히 발견하고 다가갔다. “할아버지는 두 달 동안 땅콩을 으깨서 참새한테 주었답니다. 처음에 무서워하던 참새들이 이제는 할아버지가 아니면 먹지를 않아요. 그 분과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먹이를 줘 봤는데 날아오지 않았어요.” 이런 사연은 나흘 동안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서 얻은 것이다. 취미로 카메라를 잡은 지 7년째인 그는 캐논 마크 Ⅲ으로 찍었다.


김욱현(28)씨 수상작(사진2)은 기다림의 산물이다. 지난달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들이 아버지의 몸에 올라가 잠든 순간을 포착했다. 이미 사진 취미를 시작한 지 3년이 넘은 김씨가 그 순간을 놓칠 리 없었다. 평화롭게 잠든 강아지의 표정과 무심한 듯 신문을 읽는 중년 남성의 모습이 그대로 캐논 5디에 담겼다.

김씨의 작품은 같은 날 한 장소에서 몇 시간 동안 기다린 결과물은 아니다. 동상을 받은 이번 작품은 단 몇십분 만에 포착했다. 대신 김씨는 비슷한 느낌을 기다리며 몇날 며칠을 보냈다. 수상작에 담긴 포즈를 포착하기 전에 김씨는 강아지들이 아버지의 등에 올라가는 버릇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특히 이번 수상작의 주인공 ‘앵두’는 종종 아버지의 정수리에까지 올라탔다. 그것을 염두에 둔 김씨는 지난달 매일 저녁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김씨는 “강아지가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아 인위적으로 찍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박진우(26)씨의 수상작(사진3)은 앞선 두 사람과 달리 ‘시간’보다 ‘공간’에 주목해 봐야 한다. 수의학과 대학생인 박씨는 인도 여행 때 낙타를 봤다. 전공이 수의학과인 만큼, 평소 동물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낙타와 인도인의 모습은 묘한 시각적 쾌감을 준다. 충실히 여행의 기록자가 되어준 건 애지중지하는 니콘 디40. 말 그대로 순간을 포착했고, 오래 기다리거나 다른 어려움은 없었다고 담담히 설명했다.

평소에도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는 박씨는 대학생임에도 방학 때마다 외국에서 사진을 찍는다. 최근에 다녀온 이집트의 사막과 풍광이 지금도 눈에 어른거린단다. 박씨는 “고등학교 때 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한 뒤 계속 사진을 찍어왔다”고 설명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사진에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 크고 깊다는 느낌을 줬다. 이태호씨의 사진(사진4)도 구도가 돋보이는 새 사진으로 동상을 받았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 입선 최순규

△ 입선 탁기효

△ 입선 김인철

△ 입선 허현

입선작들의 면면

“북극곰은 내 직장동료랍니다”


멧비둘기를 잡아 발 아래 호령하는 매는 생태계의 한 모습이다.(사진 1) 일상에서 쉽게 보기 힘든 장면이다. 이 사진은 생태계 조사연구 업무를 하는 사설연구소 직원 최순규(36)씨이기에 가능했다. 캐논 350디로 촬영한 그는 동물 중에서 새에 관심이 많다. 새 사진만 8년째 찍는 중이다. 입선한 사진 속 장소는 전라남도 무안 인근 섬이다. “겨울에는 먹이가 부족해서 새들은 내륙으로 많이 날아듭니다. 논길을 잘 살피면 먹이를 찾는 새를 발견하지요.” 새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이 좋은 사진으로 이어졌다.

털이 보드라운 슈가글라이더가 사람의 손 위에서 자고 있다. 평화롭다. 동물과 사람이 공존하는 풍경이 정겹다. 아홉살 딸아이에게 선물한 동물의 그 모습이 귀여워 탁기효(38)씨(사진2)는 연신 셔터를 눌렀다. 그는 아마추어 사진가가 아니다. 18살때 부터 사진기를 잡았고 사진기자 생활을 2년했으며 지금도 프리랜서 사진가로서 활동중이다.

동물원에 있는 동물만 150종 넘게 찍었다는 회사원 김인철(37)씨. 그는 일터가 촬영지였다. 용인 에버랜드 홍보팀 대리인 그는 사진(사진 3) 속의 북극곰을 찍으려고 점심을 수 없이 거르기도 했단다. 자신이 맡은 홍보업무 때문에 카메라를 잡았지만 지금은 전문가 뺨치는 실력과 열정을 가졌다. 특히 일터 동료(?)인 동물들한테 애정이 많다. “동물은 표정이 다양하고, 사람이 하지 못하는 행동도 합니다. 순간의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지요.” 오랫동안 북극곰을 관찰해서 그 생태까지도 자세히 안다. 북극곰의 이름이 ‘밍키’라고 넌지시 알려준다. 그의 동물사진에 대한 열정은 북극곰에만 머물지 않는다. 자신을 알아보는 오랑우탄도 있다며 자랑을 멈추지 않는다. 카메라 니콘 디80에 그 열정을 담았다.

허현(52)씨는 사진동호회 ‘64사진동호회’회원이다. 동호회에서 그가 주로 생태사진을 찍는다. “주로 봄·여름에 많이 찍습니다. 겨울에는 좀 힘들지요.” 지난해에는 두 달 동안 태안에서 살다시피 했다. 사진은 그에게 취미이자 돈벌이다. 천안에서 사진 입시생과 취미로 사진을 배우려는 일반인을 상대로 강의도 한다. 18살부터 카메라를 잡았다는 그는 쉰이 넘은 지금도 같은 모습으로 길을 나선다. 허씨(사진 4)가 찍은 사진도 그 길에서 만난 것이다. “사흘 동안 가지 근처에서 숨어 기다렸어요. 리모컨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번 경우는 아닙니다. 끈기로 버텼습니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 수상한 사진의 저작권과 소유권은 한겨레신문사에 있습니다


심사위원장 총평

귀환하라, 인면수심


사진은 가위질이다. 셔터를 한 번 꾹 누르는 순간, 두 번의 가위질이 작동한다. 싹둑! 시간이 잘리고, 싹둑! 공간이 잘린다. 그러므로 사진은 ‘일·꾹·이·싹·둑’의 매체다. 아무리 무딘 날(긴 노출시간)로 시간을 이겨보려 한들, 아무리 긴 날(넓은 광각렌즈)로 세상을 다 담을 듯 덤빈다 한들, 보여줄 수 있는 건 아주 짧고 좁은, 시간과 공간의 날카로운 부스러기다.

하물며 동물이라는 제한된 소재를, <한겨레>라는 제한된 매체에서, 독자를 대상으로 긁어모을 때 가위질의 한계는 이미 주어졌는지도 모르겠다. 큰 욕심을 부릴 필요가 있을까?

많은 착한 분들이 이번 공모전에 착한 사진을 보내 오셨다. 심사위원들의 못된 심보와 째진 눈을 미리 간파하지 못하신 듯하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의 착한 사진은 심심하거나 뻔한 사진을 부르는 착한 표현이기도 하다. 이곳은 가위질 경연장이므로 심심한 가위질은 걸러내야만 했다.

대상으로 선정된 강현희 님의 순간 포착은 아주 멋진 시간 가위질이다. 옷까지 갖춰 입은 골키퍼 강아지가 공을 잘 막고 난 뒤 벌러덩 넘어지지는 않았을지 궁금증을 일으킨다. 다만 공간 가위질이 아쉽다. 이 때문에 잠시 뒤로 밀려났으나 기사회생해 ‘대상’이란 기쁨을 안았다. 대상에는 그에 걸맞은 파격이 있어야 한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비야생 부문 동상으로 선정된 박진우 님의 공간 가위질은 나무랄 데가 없다. 지친 표정의 남자와 씨익 웃는 듯한 표정의 낙타가 묘하게 어우러진 시간 가위질도 훌륭했다. 다만 이국적인 장면이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부채질한다는 지적이 많아 아쉽게 동상에 머물렀다. 공간처리를 잘하기로는 김평 님(아내와 이름이 같아 얼마나 놀랐던지 …)도 뒤지지 않았다. 웅크린 채 낮잠을 자고 있는 개와 사람이 아주 닮아 흥미로울 뿐 아니라, 그들을 양쪽에 배치해 안정감을 더하고 있다. 이정훈 님의 고양이 사진은 가장 오래 논의되었다. 사람을 피해 달아나며 그를 올려다보는 길고양이의 표정은 오늘날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대변하는 듯한 절묘한 표정이었다. 과감한 공간 가위질이 촬영할 때나, 촬영 후 크로핑을 통해 이루어졌더라면 더욱 강렬한 인상을 주었을 거라고 심사위원들은 입을 모았다. 김수연 님의 사진은 캠페인 포스터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킬 만큼 깔끔하고 따뜻했다. 이는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기도 했다.

이태호 님과 주기봉 님의 참새 두 마리는 귀엽고 다정하다. 김욱현 님의 조는 강아지 사진 역시 흐뭇한 웃음을 자아낸다. 백승현 님의 청솔모와 까치 사진은 청솔모의 놀란 표정과 안정된 구도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수상자들께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동물로 향한 사진기의 시선이 동물 관찰기인 동시에 인간 관찰기가 되기를 빈다.

우리는 자주 ‘인면수심’의 세태를 개탄하고 나무란다. 회초리를 드는 것이 마치 인간된 도리이자 책무라도 되는 듯이.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자. ‘인면인심’은 바람직한가. 어쩌면 ‘인면인심’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한 폭력과 약탈의 근원이자,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는 괴물은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사람들아, 제 마음속 괴물을 짐승이라 부르지 마라. 인면수심이야말로 자연의 이치를 받아들일 줄 아는, 우리가 정녕 회복해야 할 심성일지 모르니까.

노순택/ 사진가



심사위원장 소개

주요 작업은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회적 폭력과 한국전쟁의 인과관계를 들춰보는 일이지만, 오래 전부터 동물에 관한 사진 작업도 아울렀다. 네 차례 개인전, 수십 차례의 국내외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사진집 세 권을 펴냈다. 국립현대미술관, 대림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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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동 벼룩시장은 시간과 보물창고

황학동 벼룩시장은 시간과 보물창고

기사입력 2008-04-11 18:31 기사원문보기
마음 먹으면 우주선도 만든다. 세상에 있는 건 다 있는 서울의 보물창고가 황학동 벼룩시장이다. 단돈 천원만 들고 가도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그 무엇을 건질 수 있는 곳. 세상에서 제일 비싸고 단 하나 뿐인 1억짜리 오디오를 만들 수도 있는 곳.

황학동은 살아있다.

풍경을 듣다

그 옛날도 아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란색 삼일아파트가 있던 자리에는 높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주위 청계천 방향으로는 새로운 건물들이 하나하나 생기고 있다. 아파트 옆길로 들어서면 바로 황학동 벼룩시장 입구다. 더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허름한 복장의 남자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거, 아무래도 가게 하나 사두는 게 좋지 않겠어?’

‘아, 뭣땀시 가게는 또 산댜?’

‘아, 롯데캐슬 지하에 대형 마트가 들어온다는데, 아무래도 값이 좀 오르지 않을까?’

‘조금은 그렇겠지 뭐.’

‘재개발도 제대로 될 것이고’

‘아이, 참 나, 닝기리…개발이고 나발이고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구만. 그냥 이렇게 살다 가게…’

골목 안은 조그만 철공소들이 즐비하다. 복잡하고 무질서해 보이지만 나름대로의 전문성을 갖고 있는 사업장들이다. 이 철공소들은 못 만드는 게 없는 곳이다. 설계도만 가져가면 무엇이든 다 만들어 낸다. 오프로드 마니아가 자동차 끌고 가서 극단적 광폭 타이어를 받혀 줄만한 축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뚝딱뚝딱 제대로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지금은 불법이라서 그런 작업은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대포도 만들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의 철공소 사람들은 완전 마니아들이다. 그들의 손재주는 일급 엔지니어 뺨 칠 정도로 정밀하다. 그들은 대기업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저 공작이 좋아서 이 골목에 처박혀 수십 년을 철밥 먹고 사는 것이다. 이들이 만일 공작공화국 유럽에서 태어났다면 벌써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어있을 것이다.

무질서 속의 원칙

골목을 조금 더 들어가 본다. 오래된 가구…가구? 그렇다 가구라기 보다는 우리의 생활 도구들, 절구, 맷돌, 나무 문짝, 농, 의자, 뒤주 등을 파는 고가구점이 뜨문뜨문 나온다. 그들은 고물 마니아들이다. 충청북도 제천의 어느 농가가 헐린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새벽바람 맞으며 전속력으로 달려가 이른바 ‘아도’를 찍어온다. 재수 좋을 땐 그냥 가져오기도 하는데, 불편해 보이던 고가의 문짝도 황학동 골목으로 들어오면 문화재가 된다. 그렇다고 비싼 가격을 매기는 것은 아니다. 사람 보아가면서 문화적 가치를 내세워 엄청 비싸게 받기도 하고, 오래된 고물을 이유로 헐값에 주기도 한다.


황학동 벼룩시장의 메인 골목을 들어선다. 흑백테레비, 보쉬전동드릴, 야마하 7번 아이언, 소니릴테이프재생기, 진공관전축, LP플레이어, 포르쉐미니카, 빅타 엠프, 삼성모니터, 금성라디오, 팬탁스카메라 등등 전자제품 위주의 골목이다. 사진을 찍어도 아무 말 안한다. 얼굴에 들이대지만 않으면 아무 상관 안한다. 상점에 나와있는 물건들을 보면 저기에서 소리가 제대로 나올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천만의 걱정이다. 이곳의 오디오 가게에 들어가면 세계 최고의 오디오를 만날 수도 있으며, 잠바떼기 걸치고 낮술 한 잔 한 얼굴의 사장님과 상의하면 세 마디도 못 가서 말발이 무너진다. 그들은 음향의 박사들이다. 그들은 뱅앤올룹슨이 부럽지 않다. 1억원 짜리 오디오 제대로 만들어 달라고 하면 정직하게 1억원 짜리 오디오를 조립해낼 수 있는 전문가들이다.

오호라! 가끔씩 보이는 성인 전용 비디오테이프 가게가 사람 발길을 후끈 잡는다.

곧세우마금순아/내여자친구는소,개입니다/꼴리는밤이오면/반지하제왕/살흰애추억/침대에서쉬리/입으로하는여자/오양의침묵/황홀해서새벽까지/구멍가게습격사건/박아사탕/공동경비구멍/인정상사정할수없다/나도처제가해줬으면좋겠다/샛방새댁의혀놀림/번지점프중에하다/귀신이싼다/털밑썸씽/마님은왜돌쇠에게쌀밥을먹이능가/감자캐러갔다가등에흙은왜묻혀/지금만지러갑니다/그놈은뭣이섯다…

제목 읽다가 숨 넘어가는 골목이다 ^^

성동기계공고 건너편 조그만 가게 앞 지하철 환풍구 위에 오디오 세트가 얌전히 앉아있다. 다가가 보니 마란츠다. 엠프, 카세트플레이어, 튜너, CD플레이어 등 일단 구색은 제대로다. 그 옆에는 JBL스피커가 떡허니 버티고 서 있다. 주인과 객은 흥정 중이다. 마란츠 오디오 세트가 15만원, JBL 스피커가 35만원이다. 손님은 마란츠 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JBL스피커의 앞면을 열어본다. 찢어진 곳이 없는 것이 확인되자 바로 구입한다. 스피커는 승용차도 아닌, 용달차도 아닌, 리어커로 운반된다. 손님은 오디오 조립 전문가였다. 그의 작업장도 황학동이다.

힘내라 힘!

성동기계공고 앞길에는 주방도구 판매하는 곳이 즐비하다. 조그만 식당 하나 차릴 사람들은 모두 이곳으로 간다. 망한 집 주방 싸게 사서 물청소 배관청소 배선작업 모두 새로 해서 또 다시 싸게, 패키지로 판매하는 것이다.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다. 새로운 사업을 생각하고 있으면서 어째서 울상일까? 대답은 뻔하다. 퇴직금 털어 분식집 차리는데, 이거 날리면 끝장인데…뭐 이런 근심이 가득한 것이다. 판매하는 사람들도 그다지 밝은 표정은 아니다. 그래도 힘 내라 힘! 돈 주고 물건 받을 때만이라도 서로를 격려한다.

다시 롯데캐슬앞 황학동벼룩시장 입구의 영도교를 건너간다. 동묘 가는 길이다. 이곳에는 노점이 즐비하다. 박정희대통령화보집이 길바닥에 누워있다. 트롯트가수 김연자의 LP판 김연자 노래꽃다발, 베르디 아이다, 사교를 위한 폴카 총선집, 기타와 전자올갠…1970년대와 80년대에 서라벌레코드에서 찍은 앨범들이다. 한 장에 천원.

골동품들의 가격을 물어본다. 보통 5천원에서 2만원이다.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동네 건달로 보이는 중년 세 사람이 참견을 한다.

구둣발로 도자기를 가리키며, 이 도자기는 얼마예요? 사장님~~~하더니, 얀마, 넌 저런 거 5백원에 사다 만원 받냐? 이, 순, 날…주인과는 오랜 친구인 듯 보인다. 영화 원스어폰어타임인아메리카의 앞 장면이 잠깐 오버랩 되는데, 장사를 방해하는 친구들에게 주인이 말한다. 너희들한테는 안 파니까 절루 꺼져라! 서로 놀리며 걀걀 웃는다. 주인도 웃고 친구들도 웃고 손님도 웃는다 ㅋㅋㅋ.

버룩시장은 동묘 담장까지 이어진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동대문 밖이다. 조선 시대부터 성문 밖에서 열린 난전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살아있는 풍경이요 누구도 거둘 수 없는 삶의 현장이다.

황학동 벼룩시장은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예전에 비해 많이 위축된 게 사실이다. 많은 노점이 사라졌고 사라진 노점상들의 낡은 가방 속에 있던 시대의 보물들도 사라졌다.

그러나 최근까지 동대문운동장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옛 숭인여중 자리로 옮기면서 벼룩시장은 다시 예전의 풍경을 재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먹고살기 힘들다 칭얼거리지 말고, 문화의 보고, 시간의 창고, 현물의 골목 황학동에서 당신의 좋았던 시절을 되새김해봄은 어떨까?

[글 사진 = 이영근 프리랜서 에디터]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124호(08.04.21일자)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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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vs

 

 

   
 

예술과 외설을 구별하는 기준  
예술과 외설 사이에서 - renoir 화집  
예술과 외설 사이  
외설과 예술 사이의 줄타기  
누드와 산삼  
문화예술에 있어서의 외설- 그한계는?  
외설과 법죄의 상관관계  
무제-유병용  
예술과 외설의 차이점 - (유머)  

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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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외설 사이가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만큼이나 먼 것은 아닙니다
 
 
 
  All right reserved Komericanjournal.com

 

 







 

청나라시대 유물들에 그려진 그림들

 

 

 

 

 

 

 

 

 

 

 

 

 

 

 

 

 

 

 

 

 

 

 

 

 

 

 


 

 

 
본문스크랩 예술과 외설의 차이
출처 ♡일상 한 잔에 김치 한 점♡ | 김원영
원문 http://blog.naver.com/k00sky/60033295011
 
예술과 외설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예술과 외설까지 갈것도 없이 누드화와 포르노의 구분은...
불가능죠.
흔히 농담으로 그 대상을 봤을 때 신체의 변화가 있으면 외설과 포르노
신체의 변화가 없으면 예술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신체의 변화는 각자의 판단에...)

 
 
↑ 위 그림은 "올랭피아"라는 작품입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
처음 이 작품(?)이 일반에 공개되었을 때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예술작품이 아니라 포르노 수준의 평가를 받았죠.
그러나 지금은... 이 작품을 보고 예술작품이 아니라고 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왜일까요.
 
↑ 위 그림은 김홍도 선생의 춘화도입니다.
발가벗은 남자의 모습이 익살스러우면서도 뒷 일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유명한 김홍도 선생이 그린 춘화니까
예술일까요? 외설일까요?
 
↑ 이건 명나라의 춘화입니다. 그림 한 복판에 위치한 두 남녀... 홍도씨의 춘화와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작게 그렸네요.
 
 
↑이번에는 일본의 춘화도입니다. 뭐랄까... 성기의 표현이 대담하고 감출것 없이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중일 삼국의 춘화... 참 많은 차이가...
이는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차이라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 올랭피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은 그 시대의 잣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허나 한 번 예술로 평가된 것은 시대의 잣대가 변한다 하더라도 다시금
평가의 도마위에 오르는 일은 없습니다.
 
영상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최고의 혜택을 누리는 산업이 바로 포르노 산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대중들의 포르노에 대한 눈높이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과거 선데이 서울은 원피스 수영복 사진만으로도 19금이었으나 시대가 변하니 수위가 높아졌죠.
요즘은 음모를 노출해도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물론... 그 작품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느냐에 따라 구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예술이다 아니다를 말한다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궁색합니다.
포르노를 찍은 목적이 성행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라 말한다면 금새 구분이 애매해집니다.
 
그래서...
대중의 가치에 따라 구분되어지는 것이 맞다 하겠습니다.
성행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포르노를 찍었다고 하면 그것을 예술로 받아들일 사람은
현시대에서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또 모르죠...
올랭피아가 처음에는 논란이 되었듯...
배우들의 실제 성행위로 논란이 된 "숏버스"
즐거운 사라의 마광수 교수...
 
결국... 예술과 외설의 잣대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냐 못 받아들이냐에 따라...
지금 시대엔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포르노를 예술로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예술이겠죠.
예술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이니까요...
 
고로...
예술과 외설의 차이는...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인 답으로 찾으려는 오류랍니다.

 

예술인가 외설인가 바디아트 작품모음집

 

http://mtnara.com

 

 







































 

 예술(藝術)과  외설(猥褻) *




1, 보고 나서
   눈물이 나면 예술이고
   군침이 돌면 외설이다.



2, 보고
   마음(心)에 변화가 생기면 예술이고
   몸(身)에 변화가 생기면 외설이다.

 

3, 처음부터 봐야 이해가 가면 예술 이고 
   중간부터 봐도 상관 없으면 외설이다.



4, 감정이
   상반신으로 오면 예술이고
   하반신으로 오면 외설이다.



5, 자막을 봐야 하면 예술이고
   자막이 필요 없으면 외설이다.

 

출처 :우리집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 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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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경제학 메카'였던 서울대, 왼쪽 눈 가리나

 

 

'마르크스경제학 메카'였던 서울대, 왼쪽 눈 가리나
[기고 ③] 서울대 경제학부 박사과정 정상준
정상준 (news)
 
33명의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중 유일하게 마르크스경제학을 전공한 김수행 교수가 이번 달에 퇴임합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가 그 후임이 돼, 경제학부 내에서 최소한의 학문적 균형을 이룰 수 있을지는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이에 '학문의 균형과 비판정신의 복원을 바라는 서울대 경제학부 대학원생들' 70명은 18일 학내에 "마르크스경제학 전공교수를 채용하라"는 호소문을 붙였습니다. 이들이 호소문에 공감하는 대학원생과 학부생 등의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왔습니다. <편집자주>
 
  
서울대 정문(자료 사진).
ⓒ 권우성
서울대

"(주류경제학과 마르크스경제학) 양자가 각각의 독자적인 접근법을 포기하고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상대방을 인정하고 때로는 허심탄회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질 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접근법만이 유일하게 적합한 것이라는 독단적인 태도가 젊은 계층에서 두드러지고 있다는 사실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이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앞으로도 상당히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이번에 퇴임하시는 김수행 교수께서 쓰신 글이 아닙니다. 이준구 교수께서 19년 전에 쓰신 글의 일부입니다(<경제논집>, 제28권 4호, 526쪽). 저는 경제학 연구자들의 '독단성'과 '협소한 사고'를 염려하고 경고하는 이준구 선생님의 지적에 십분 백분 공감합니다. '자신의 접근법만이 유일하게 적합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젊은 계층'이 19년여의 세월이 흘러 설마 더욱 완고해졌을까요?

 

학부 시절부터 지켜봐온 다른 선생님들도 충분히 이준구 선생님만큼 포용력 있는 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선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의 필요성에 대해 계급 간 동학으로 혹은 가치이론의 틀로 현대 자본주의 경제를 분석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 의의를 논하는 재미없는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그저 저는 대학원생이니 대학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경제학 수업에만 몰두한 요즘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안 통하는 까닭

 

"요새 유학 간 애들은 퍼포먼스가 안 좋아." '미국 대학 유학원으로 전락한 이 곳 대학원'이라는 냉소는 어지간한 석사 1년차들도 다 하는 소리이니 여기서 유학은 미국 유학을 뜻함을 재차 설명 드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어쨌든 위 '퍼포먼스' 이야기는 우리 학부 선생님들로부터 은근히 많이 듣는 소리입니다.

 

1년 동안 미·거시, 계량(경제학)을 들은 후 논문자격시험, 소위 '퀄'을 패스하지 못하면 제적까지 당하는 미국 대학원의 경제학 교육 체제에서 서울대 출신들이 우등으로 '퀄'을 통과하면서도, 정작 '퀄' 패스 이후 논문의 아이디어들을 제출하고 써나가는 데 있어서는 그리 빛을 발하지는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일부 학생들은 여기서 심지어 수학과나 통계학과 대학원 과목들까지 섭렵하고 유학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러나 저는 그런 지적들을 들을 때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미국 학계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제 또래나 선배 그룹들의 면면을 요즘 세대 이 곳 대학원생들과 비교해보면 이해가 됩니다.

 

이전 세대의 유학파들 중엔 여기서 학부를 다니던 시절 경제학 전공 수업도 대놓고 안 들어가던 이들도 수두룩했습니다. 지금 계신 일부 교수님들도 저희와 술자리를 하시다보면 겸연쩍게 자신의 그런 과거들을 폭로하곤 하시지 않습니까?

 

좌파적 사회과학 학습, 시장주의 경제학 연구에도 도움 됩니다

 

하긴 요새처럼 강의실 앞에서 이전 수업 끝나기 10여 분 전부터 줄을 서 자리를 잡으려 대기하는 대입단과학원 같은 한심한 풍경이 아니라, 담배 연기 가득한 동아리방이나 으슥한 찻집, 퀴퀴한 골방에서 제목부터 살벌한 온갖 '이념 서적'들을 읽어가며 필요 이상으로 과격한 발언들로 토론에 피를 튀기는 '오버'가 그 시절 대학의 풍경, 또래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기말고사 날에야 '자체 개강'하고도 일필휘지로 답안을 써내려가는 실력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예컨대 마르크스경제학의 악명 높은 '전형문제'(transformation problem)를 직접 풀겠다며 당찬 포부로 선형대수학 책을 꺼내 독파하던, 솔직히 지금 같으면 저부터도 한 대씩 쥐어박을 '무식한 용감함'이 그 시절 학부생들에겐 도리어 있었습니다.

 

  
서울대 앞 인문사회과학 서점 <그날이오면>에서 한 이용자가 책을 읽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덕련
인문사회과학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학부생들의 중간·기말 고사 채점이나 성적 처리를 할 기회가 많다보니 요즘 세대의 화려한 글쓰기 테크닉에 종종 놀랄 기회를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행히도 겉만 번지르르하거나 알맹이 없는 답안들이 대부분입니다.

 

아마 이들은 논술 사교육으로 범벅이 되어 대학에 들어왔다가 그저 학점 경쟁에 바로 정신없이 내몰린 탓일 겁니다.

 

물론, 그것이 요새 학부생 세대들의 한계 또는 잘못만은 아닐 것이고요.

 

즉, 어쩌면 결국 과거 이른바 또래들과의 '사회과학 학습'에서 길러진 토론 능력과 '과학적 상상력'은 경제와 사회를 분석하는 이론적 능력에 있어서는 훗날 설사 시장주의 경제학을 연구하더라도 알게 모르게 각자에게 큰 강점이자 자산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슘페터의 고백 "마르크스를 공부한 학생들이 더 우수"

 

고백컨대 대학 시절 그렇게 치열하게 토론하고, 때론 교조적이고 때론 융통성 없었을지언정 엄청나게 많은 양의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들을 읽고 변혁이론 토론을 해야 했던 경험과 그 과정에서 맞닥뜨린 고뇌들이 당사자들에게는 의도치 않은 부산물을 낳은 셈입니다.

 

논문자격시험 이후 논문의 아이디어를 잡는 힘, 교수님들께서도 말씀하시는 '퍼포먼스'의 실력 차이는 일부 천재들을 논외로 하면 결국 그런 의도하지 않은 부분들에도 크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변혁의 무기로서 학문을 중시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면 그런 역설에 치를 떨었을 노릇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음지'에서 지내던 아이들일수록 오히려 '전향'을 해도 더 성공적으로 전향하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사실 마르크스경제학에 우호적이기는커녕 무척 적대적이었던 슘페터(J. Schumpeter)마저도 일찍이 지적했던 바입니다.

 

"심지어 오늘날조차 모든 경제학 교수들은 마르크스를 자신의 모델로 사용한 학생들이 이론적 관심이 없는 학생들보다 더 우수하다는 사실에서, 하나의 이론체계에 친숙하다는 것이 얼마나 교육적 효과가 있는지, 그 장단점과 별도로, 알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정확히 연구의 과학적 핵심에 관한 한 사실상 깊은 이해를 항상 충족한 것은 아닐지라도, 사회주의자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에게조차 교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학의 역사와 방법>, 한신대출판부, 2006년, 171쪽)

 

별 대단한 발견이 아닙니다. 젊은 시절의 책읽기와 또래들과 함께한 토론, 마르크스경제학을 포함한 비판사회과학에 대한 천착이 좋든 싫든 이후 얼마나 학생들의 이론적 발전에 영향을 주는지는 교수님들도 사실은 아시는 이야기이며, 굳이 비유를 하면 멀쩡한 왼쪽 눈을 가린 채 오른쪽 눈만 치켜뜨기보다는 두 눈 다 뜨고 공부를 해야 공부도 더 잘 된다는, 당연하기 그지없는 논리일 뿐입니다.

 

'적극적 연구 지침'으로 재부상한 마르크스경제학... 도쿄대에선 전공 필수

 

더군다나 최근까지 세계 곳곳에서 빈발하는 금융위기와 불평등, 고실업의 만연은 신고전학파적인 시장 원리로만 설명·해결될 수 없으며, 교과서적인 시장 원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처방들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제3세계 빈곤 문제를 둘러싼 세계은행의 역할에 대한 논란과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들(SAPs)의 부작용은 이젠 관대한 일부 주류경제학 내용에도 포함되기 시작한, 상식 수준의 이야기입니다.

 

후진국뿐만이 아닙니다. 미국과 유럽을 위시한 선진국에서도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 각종 경제 불황의 위협과 사회복지시스템의 경쟁적인 해체로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위협받고 있는 절박한 상황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을 뿐더러, 이에 맞서 자본을 재통제하고 재규율하자는 주장들 또한, 무슨 '이념에 사로잡힌 소수'의 주장만이 아님은 도리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고용 없는 성장과 금융자본의 독주를 용인하는 신자유주의 세계 경제에서 고실업은 필연적이다. 사진은 도쿄 신쥬쿠카부키죠의 젊은 노숙자들.
ⓒ 전국백수연대
실업

마르크스경제학은 각자의 정치적 혹은 정서적 호불호, 전공 여부를 떠나 그런 논의에 있어 현재까지 가장 많은 연구 성과가 집적, 축적되어 온 경제학의 한 분야입니다. 경제학설사·경제학방법론의 용어를 감히 빌리면 마르크스경제학은 그런 전 지구적 시장주의의 독단적 지배와 그 폐해 덕분에 오히려 21세기 경제학의 '적극적 연구 지침'(positive heuristic)으로서 다시 부각된 셈입니다.

 

또한 프랑스 오를레앙 선언, 하버드 경제학부 학부생들의 주장, 캔자스 선언 등 탈자폐적 경제학 네트워크(post-autistic economics network)의 목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경제학이 진정 무엇에 대해 답변해야 하는지, 단일한 경제학만을 가르치고 배우고 이에 순응케 한 것(conformity of economics)이 설령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얼마나 지금까지 학생들의 생각과 이론을 질식시켰는지,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 등에 대한 경제학자·경제학도들의 고뇌와 질문·노력이 전 세계적인 현상이며 서로 공명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덧붙여, 이 곳은 엄연히 '연구중심대학, 대학원 중심 대학'을 지향한다는 국립서울대학교의 대학원입니다. 괜찮은 제자다 싶으면 도리어 미국 유학부터 먼저 종용하시는 일부 교수님들의 이야기는, 제자들의 앞길을 열어주고 싶은 그 분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님에도 오히려 현재 이 곳 서울대 경제학부 대학원의 정체성과 강점이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삼가 여쭙게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한때 대학원의 석박사논문 상당수가 마르크스경제학으로 쏟아지던 시절, 서울대는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마르크스경제학의 메카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마르크스경제학으로 제출된 석박사 학위논문들 중 일부는 지금 기준으로 보더라도 상당한 이론 수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서울대 경제학부의 역설적인 '강점'이자 '세계적인 경쟁력' 중 하나였습니다. 소위 '랭킹'을 따짐에 있어 솔직히 서울대보다 뒤떨어진다고 할 수 없을 도쿄대 경제학부에서 여전히 마르크스경제학이 1학년 전공, 그것도 필수과목이라는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문제는 좌파경제학 '과잉'이 아니라 '부족'

 

  
20년 전 서울대 경제학부 대학원생들은 시장주의에 비판적인 경제학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고 학문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그 결과 김수행 교수가 서울대 경제학부에 자리를 잡았다. 사진은 그 당시 상황을 보도한 서울대 <대학신문>.
ⓒ <대학신문>
마르크스경제학

물론 마르크스경제학의 과제와 가치가 과거와 같을 수는 없으며, '그때 그 시절'을 복원코자 함도 아닙니다. '안병직 교수께서 제자 대학원생들에게 공장 현장으로 투신하라고 일갈하던 시절'(이영훈·안병직,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기파랑출판사, 2007년, 48쪽)의 마르크스경제학이 더 이상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학원 다니는 것마저 부끄러워하며 힘겹게 버텨내던 세대들 일부에게는 소련이나 북한이 대안사회로 여겨졌는지는 모르나, 지금 마르크스경제학에 관심을 두거나 연구를 하는 세대들은 기존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동경은커녕 구경도 못해본, 아니 별 구경할 생각도 없는 세대입니다.

 

오히려 지금의 마르크스경제학은 그런 모종의 과거의 굴레, 즉 기존 사회주의 체제를 어떻게든 옹호해야 했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일부는 수학·통계학의 영역을, 일부는 철학·논리학의 영역을, 일부는 역사·정치학의 영역을 잠식하면서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게 발전해 온 지 오래입니다.

 

더욱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의 고삐풀린 자본주의야말로 마르크스경제학을 소위 '블루오션'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셈입니다. 심지어 서울대 주류경제학의 거장이신 조순·정운찬 두 분 선생님께서도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사회주의 사상은 어떤 형태로든지 계속 존재할 것이다, 볕이 비치는 곳에는 항상 그림자가 있다"(조순·정운찬·전성인, <경제학원론>(7판), 법문사, 2003년, 943쪽)고 이야기하시지 않습니까?

 

물론 당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거나 연구했던 많은 선배 세대들이 일부는 한국경제학계의 편견으로 인해 노동시장이 더욱 좁아지면서, 혹은 일부는 직면한 생계의 문제로 인해 학문을 지속적으로 연구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정작 한국 경제의 진보적 혁신과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의 발전에 기대만큼 기여하지 못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즉, 문제는 당시 일부 관념적이기도 했던 '좌파경제학의 과잉'이 아니라 도리어 '진정한 좌파경제학의 부족함'에 있었으며, 따라서 지금 마르크스경제학의 명맥 유지가 위협받는 위기를 스스로 자초한 면도 있음을 냉정히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와 같은 비극이 2008년 현재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과거 선배들이 왜 마르크스경제학을 중심으로 한 비판사회과학 탐구에 열중하였는가라는 그 가치를 진심으로 존중하면서 동시에 현재 발 딛고 선 경제 사회의 현실, 인민들의 살림살이에 천착하여 뛰어난 연구업적을 지속 생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졸업 이후 현실적인 진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을 탐구하는 젊은 연구자들이 평생 지고 가야 할 책임일 것입니다.

 

'미래의 노벨상' 차버린 캘리포니아주립대... 서울대, 그 전철 밟을 건가 

 

글이 길어졌습니다. 에피소드 하나로 마칠까요? 1960~70년대 미국의 진보적 경제학계를 이끌었던 하워드 셔먼(H.Sherman) 캘리포니아주립대학(UC Riverside) 경제학부 명예교수의 회고에 따르면(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Fall 2006, pp.533~535), 셔먼 교수는 1968년 당시 이미 23권의 저서를 냈던 미국공산당의 수석경제학자와 인도의 한 대학 교수를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로 영입하려다 보수적인 다른 교수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 이유들이 걸작입니다. 전자는 학부에 신임교수를 채용할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였고, 후자는 고작 제3세계의 인도 사람을 교수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류'의 편견과 선입견이 설마 1960년대 미국이나 2000년대 한국이나 마찬가지일까요?

 

특히, 당시 결국 임용에 탈락하고 만 인도인이 바로 불평등과 빈곤 연구의 대가이자 훗날 가장 이단적인 노벨경제학상 수상자(1998년)로 불리는 아마티아 센(A.Sen)입니다. 결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 경제학부 교수진들은 자신들의 보수적인 오만과 폐쇄적인 편견 덕분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교수진(faculty)에 보유할 기회를 놓친 셈입니다.

 

불필요한 독단론(dogmatism)에 사로잡혀 그들과 똑같은 오류를 범하는 서울대 경제학부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고 설마 우리 교수님들께서 그 정도로 편협하겠느냐고 자문하면서, 경제학부 졸업생이자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김수행 선생님에 이어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가 후임으로 채용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988년 학문 다양성 확보를 위한 집단행동을 통해 마르크스경제학 교수 채용을 이뤄냈던 서울대 경제학부 대학원생들. 그로부터 20년 후인 지난 18일 이들은 다시 '학문의 균형과 경제학에서 비판정신 복원을 위해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를 채용하라'며 학내에 호소문을 붙였다.
 
마르크스경제학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프레시안>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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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 성행위 조각상... 이런 게 왜 사원에 있지?

 

 

 

엽기 성행위 조각상... 이런 게 왜 사원에 있지?
[인도여행] 카주라호 동부, 서부 사원군의 조각상들
서종규 (gamguk)
 
 
  
▲ 인도 카주라호에 있는 동부, 서부 사원군의 모습과 조각상들
ⓒ 서종규
카주라호

 

카주라호에 가기도 전에 카주라호에 대한 이야기들이 시끌벅적하다. 카주라호 사원들에 가면 엽기적 성행위 조각상이 즐비하여 미성년자 관람불가니, 플레이보이 잡지보다 더 노골적이니, 심지어는 인도의 성인 간디도 성행위가 되어 있는 조각들을 보고 "모든 카주라호 사원을 다 부수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외설적이라니, 은근히 호기심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1월 19일(토) 오후 4시, 우리들은 카주라호 동부 사원군으로 갔다. 동부 사원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성행위 묘사가 들어 있는 기념품들을 들고 사라고 따라온다. 어떤 것은 열쇠고리로 성행위 동작이 가능하게 제작되어 있고, 인도에서 이미 4세기경에 쓰인 인도의 성행위 지침서인 <카마수트라>라는 책을 들고 와서 사라고 난리다.

 

동부 사원군에는 파르스바나트·산티나트·아디나트 등 3개의 자이나교 사원이 있다. '은근하게' 기대했던 성행위 조각상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오히려 불상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리고 얼굴이며 가슴이나 골반은 분명 여인의 몸인데, 정작 남자의 음경이 달린 신상들이 많아 신기했다. 

 

엽기적 성행위 조각상이 즐비하다더니...

 

  
인도 카주라호 동부 사원군의 신상들(얼굴미여 가슴이나 골반의 모습이 분명 여인의 몸인데, 정작 남자의 음경이 달려 있다)
ⓒ 서종규
카주라호

고색창연하게 멀리서도 우뚝 솟아 보이는 파르스바나트 사원(Parswanath Temple)으로 갔다.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로 치면 큰 탑 같이 보이는 이 사원은 다닥다닥 수많은 조각상들의 군집이다. 1000년경 인도의 유명한 조각가들을 다 모아 놓고 돌에 새겨 붙인 조각 전시장 같다.

 

기록에 의하면 각가지 형상들을 담은 약 900여개의 부조들이 사원 안과 벽면에 붙어 있다고 한다. 탑 안에 또 하나의 탑이 들어 있고, 사원 안뿐만 아니라 사원 밖에도 그렇게 많은 조각상들이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붙어있는 것이다.

 

대단하면서도 장중한 맛이 든다. 때로는 섬세하고, 때로는 풍만하고 농염한 여인의 모습으로 여성스러운 멋을 마음껏 드러냈다. 그리고 갖가지 동물들의 기기묘묘한 모습과 탑 위의 또 다른 작은 탑, 그 옆의 또 작은 탑의 모습들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 사원은 하나의 거대한 조각 작품이다. 

 

파르스바나트 사원 벽에 붙어 있는 부조들을 하나하나 넋을 읽고 바라보느라고 해지는 줄 몰랐다. 인도 여행 중에 본 그 많은 석상과 사원들, 그리고 많은 조각상들에 놀랐지만 이 사원에서 느끼는 장인들의 솜씨와 숨결은 거대한 감동으로 밀려왔다. 

 

  
인도 카주라호 동부 사원군 중 파르스바나트 사원의 조각상들
ⓒ 서종규
카주라호

 

  
인도 카주라호 서부 사원군의 조각상들
ⓒ 서종규
카주라호

20일(일) 오전 9시, 서부사원군으로 갔다(입장료 5$). 유네스코 문화유산이어서 그런지 입구에 총을 든 군인이 지키고 있다. 난 금속 탐지기를 통과하여 들어갔다. 어제 동부 사원군에서 받은 감동이 너무 커서 아직도 들떠 있었다.

 

어제 동부 사원군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10여개의 사원들이 곳곳에 우뚝 솟아 있었다. 우리나라로 보면 거대한 탑들이 곳곳에 늘어 서 있는 것이다. 모든 사원 외벽에  900여개의조각상들이 붙어 있다고 한다.

 

카주라호는 950년부터 1050년 사이에 달의 신 찬드라의 자손이 세웠다는 찬델라 왕조의 초기 수도가 되면서 이곳에 85개의 사원이 건축되었다고 한다. 대부분 힌두교 사원이었지만 동부지역에 몇 개의 자이나교 사원도 지었단다. 500년을 이어가던 왕조가 이슬람에  망하면서 많은 사원들이 파괴되어 현재 22개의 사원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인도 카주라호 서부 사원군의 멧돼지 조각상
ⓒ 서종규
카주라호
  
인도 카주라호 서부 사원군 중 락슈마나 사원
ⓒ 서종규
카주라호

'자세하고 적나라하고 노골적이고 엽기적인' 조각 

 

처음 들른 바라하 사원에는 비슈누의 3번째 화신으로 알려진 거대한 멧돼지 상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이 멧돼지상은 쇠와 같은 질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멧돼지 몸에는 수많은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여인상도 있으며, 특히 돼지주둥이에도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다음은 바라하 사원 앞에 있는 락슈마나 사원이다. 이 사원의 외벽은 시바와 비슈누신, 요정들과 아름다운 여인들 모습의 조각들이 붙어 있다. 이 사원이 가장 크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그만큼 관심의 대상인데 그 이유는 사원 외벽에 900여 개가 넘게 붙어 있는 조각들 중에 '미투나상'이 많기 때문이다.

 

미투나(Mithuna) 조각이란 남녀의 성행위를 표현하는 조각으로 락슈마나 사원과 칸다리야 마야데브 사원 외벽에 집중적으로 붙어 있다. 이 조각들은 여인들의 풍만하고 농염한 육체는 물론 남녀가 벌이는 성행위를 약 80여 가지 모습으로 '자세하고 적나라하고 노골적이고 엽기적으로' 조각하였다고 한다.

 

성행위 장면은 갖가지다. 여러 명이 함께 하는 장면들을 비롯하여, 서로 성기를 만져주는 장면, 뒤에서 껴안고 성기를 삽입하는 장면, 눕거나 서서 하는 갖가지 성행위 장면들이 마치 요가를 하는 동작과도 같다. 어떤 조각은 말과 성행위 하는 장면을 새겼다. 모두 남자의 성기를 드러내어 삽입하는 모양들이다.

 
  
인도 카주라호 서부 사원군의 미투나 조각상들(성행위 묘사 조각)
ⓒ 서종규
카주라호

 

  
인도 카주라호 서부 사원군에 있는 미투나조각상(성행위 묘사)
ⓒ 서종규
카주라호

왜 사원에 성행위 묘사 조각상을 걸었을까? 

 

그렇다면 왜 사원에 이런 성행위를 드러내는 미투나상을 조각하여 붙였을까? 모두 뚜렷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8세기에서 12세기까지 성행한 '탄트리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탄트리즘의 근본인 '탄트라'는 '스스로 지식을 넓히고 몸의 실천적인 수행을 통해 익히는 것'이란다. 

 

탄트리즘은 남성의 신과 성적인 에너지, 즉 우주의 생명력을 의미하는 여성의 신을 숭배하였단다. 이들은 '차크라 푸자'라는 숭배 의식을 통하여 한밤중에 같은 수의 남녀가 둥글게 둘러앉아 성교 의례를 거행하였다고 한다. 남녀가 성교를 하여 그 절정의 상태에서 자아의식과 우주의식이 하나 되고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브라만 계층의 사람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장소였다고 한다. 브라만 계층은 인도의 네 계층 중 가장 높은 계층으로 성직자들인데 이러한 성행위의 조각상들을 보고도 흥분하거나 주의가 산만해지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훈련하였던 장소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껴안고 성행위를 벌이는 조각상들을 찾으려면 많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많은 미투나상이 있지만 직접적인 성행위를 벌이고 있는 상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사원 내외벽에 붙어 있는 900여개의 조각상들 중에서 성행위 장면을 묘사한 조각은 약 5%도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성행위를 하는 조각들을 찾으려고 사원 전체를 샅샅이 뒤지다 보면 어느새 사원 외벽에 붙어 있는 조각들을 다 훑어보는 것이다.

 

조각상은 성행위보다는 풍만하고 농염한 여인들 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인들의 젖가슴이나 엉덩이·종아리 등은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할 정도로 육감적이다. 그 풍만한 육체에 장신구들과 속옷을 걸치고 있는 표현은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사원의 내벽과 외벽에는 미투나상이 많지만, 코끼리나 말을 비롯한 동물들도 많다. 동부 사원군에서 보았듯이 사원 외벽에는 또 다른 작은 탑 조각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기상천외한 모양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전쟁과 사원을 건축하는 장면도 형상화되어 있다.

 

  
카주라호 서부 사원군의 전쟁에 나가는 코끼리탄 왕 조각상
ⓒ 서종규
카주라호
  
인도 카주라호 서부 사원군의 코끼리 타고 하는 전쟁 조각상들
ⓒ 서종규
카주라호

성행위 조각상은 많이 훼손돼

 

이 조각들은 성행위 장면을 묘사한 미투나상을 비롯하여, 춤추는 여인, 코끼리를 타고 전쟁에 나가는 왕, 코끼리를 타고 싸우는 장면, 창과 방패를 들고 행진하는 장면, 말을 타고 싸우는 장면, 전쟁을 격려하기 위하여 음악을 울리는 군악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군인 등 현실의 삶을 그대로 표현했다.

 

아쉬운 것은 많은 조각상들이 훼손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미투나상이 많이 훼손되었다. 그 중에서도 성행위를 드러내는 조각들의 손상이 심하다. 혹 간디의 말에 따라 몇 사람들이 파괴하였는지도 모른다. 파괴된 조각상을 보면서 조상들이 남겨 놓은 문화재 하나, 대대로 이어온 강산, 그 위에 있는 돌 하나까지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 같다.

 

락슈마나 사원과 칸다리야 마야데브 사원을 제외한 다른 사원들도 여전히 많은 부조들이 붙어 있다. 이 두 사원에서 성행위를 표현한 미투나상을 찾다가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버렸다. 그래서 모두 비슷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다른 사원들은 빙 한 바퀴 돌고 또 다른 사원을 찾아야만 했다. 그 사원들에는 미투나상이 있기는 하였지만 성행위 장면이 직접 드러나는 조각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사원 안에 또 사원을 세우는 건축 기법에, 그 안에 숭배하는 신을 모셔 놓고, 그 안과 밖에 미술시간에 배웠던 부조와 환조의 기법을 사용하여 찬란한 조각 예술의 꽃을 피운 카주라호의 사원군은 인도가 가지고 있는 세계 문화유산 중에서도 백미이다. 인도 여행에서 가장 볼 만한 곳을 추천하라면 단연 카주라호 사원군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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