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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연구 맑스21

http://nongae.gsnu.ac.kr/~issmarx/

 

 

Name   마르크스주의 연구
 
Subject   자본을 넘어서지 못한『자본론』 읽기 (지주형/랭카스터 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자본을 넘어서지 못한『자본론』 읽기

지주형(랭카스터 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이진경의 신간『자본을 넘어선 자본』(그린비, 2004)의 핵심 주장은 자본에 외부가 있다는 것이다. 즉, 자본의 논리(공리계)는 자기완결적이지 않고 외부를 항상 전제한다는 것이다. 사실 자본이 스스로 자체 생산할 수 없는 외부조건(예: 상품화된 노동력) 없이 순전히 내적 논리에 의해서만 스스로 증식할 수 없다는 것은 마르크스 이론의 가장 기본적인 틀을 이룬다. 하지만, 저자는 이 주장을 논리적으로나 효과적으로 전개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첫째, 저자는 자본의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는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 공리계의 내적 비완결성을 보여줌으로써 그 외부를 보여주려는 그의 이론적 전략은, 자본의 실재 공리계를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실패한다. 둘째, 저자는 들뢰즈-가타리의 독점적 영유와 직접적 비교에 의한 포획이라는 개념을 응용하여 절대-이윤, 상대-이윤 등의 개념을 만들고, 그로부터 노동의 ‘가치화(양화)’와 ‘가치증식’을 사실상 동일시하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이 주장은 가치실현의 근본적인 불확실성, 즉 ‘목숨을 건 도약’이라는 자본의 외부를 부인함으로써 이진경 자신이 주장하는 관점에 오히려 역행한다. 셋째, 인간의 노동 없이 자동화된 기계에 의해 생산된다는 ‘기계적 잉여가치’ 개념은 실질적으로 착취 없는 잉여가치의 개념을 허용함으로써 부르주아 경제학과 유사한 물신주의에 빠진다.

* 이 글의 전문은 편집자 머리말을 클릭하면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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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화가 넘쳐나야 평화로운 세상

누드화가 넘쳐나야 평화로운 세상
'김흥수화백의 열정의 세계전' 미술관 가는길에서 12월 31일까지
김형순 (seulsong)
 
 
  
김흥수화백 열정의 세계전 축하공연과 미술관가는길 입구 포스터(오른쪽). 배경그림은 '모린의 나상' 1977. 미국 대학교수시절 제자를 모델로한 작품
ⓒ 김형순
미술관가는길

 

하모니즘을 선포한 지 30주년 기념 '김흥수 화백의 열정적 세계'전이 12월 31일까지 종로구 경운동 미술관가는길에서 열린다. 이번 특별전은 제주현대미술관 김흥수관 개관을 축하하는 뜻도 있고, 내년 90주년전을 기리며 미리 선보이는 전시회 성격도 있다.

 

김흥수 화백(89)은 아직도 현역으로 예술가가 아니라면 발휘할 수 없는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몸 상태가 좋을 땐 하루에 5시간 이상도 작업한단다. 이게 가능한 건 수호천사처럼 그를 보필하는 부인 장수현씨(46·화가 김흥수미술관 관장)가 있기 때문이다.

 

평화와 공존의 미학, 하모니즘

 

그는 초기 리얼리즘을 추구하다 과도기 현실을 담아낼 수 없자, 추상과 구상을 하나로 묶는 하모니즘을 제창한다. 이는 음과 양은 물론이고 추상과 구상, 동양과 서양, 현실과 이상, 정신과 육체, 주체와 객체 등 서로 상반된 두 요소를 한 화면에 담는 것이다.

 

이는 원효가 제창한 화쟁사상의 핵심인 '회통(會通)'을 회화적으로 현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회통은 가장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모습이 하나로 통일되는 세상으로 도무지 소통될 수 없는 것이 소통하는 단계를 말한다.

 

이는 또한 동양에서 음이 양이고 양이 음이라는 독특한 일원론과도 통한다. 예컨대 나의 선 속에도 악이 있고 상대방의 악 속에도 선이 있다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이처럼 포용적인 평화공존사상은 없을 것이다.

 

김 화백은 이런 독보적 미학으로 세계 미술계에 충격을 준다. 이런 아이디어는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온 것이다. 식민지 체험, 해방 이후 첨예한 이념대립과 좌우익 간 진저리치는 테러와 공포 그리고 분단에서 6·25까지 그에게는 그림에서나마 그걸 씻어낼 평화와 공존의 미학이 절박했다.

 

내 예술의 모체는 여성

 

  
'나를 찾아온 천사' 유화 복합매체 102×100cm 2004. 2002년 3번째 척추수술 후 힘들 때 부인의 헌신적 노력으로 재개한 후 그가 감격하여 아내에게 바친 그림이다.
ⓒ 김형순
김흥수

 

김흥수 화백은 "내 예술의 모체는 여성", 혹은 "여체가 미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그가 늙지 않는 비결도 여성에 대한 찬미와 여성을 아끼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고, 구순의 나이에도 자신은 서 있고 아내를 의자에 앉히는 배려의 마음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

 

그에게 한국의 피카소라는 별명이 붙은 건 장수한 데다가 여자를 너무 좋아한다는 풍문 때문일까. 하긴 피카소도 이렇게 말했다.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위 '나에게 찾아온 천사'를 보면 그에게 여성은 남성을 구원하는 존재이다. 사실 이 작품은 근작으로 김 화백이 3번째 척추수술을 받은 후 붓을 들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를 일으킨 아내에 대한 사랑이 모티브다. 분명 그에게 여성은 엄청난 열정과 영감의 원천이다.

 

그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사랑법이 서툴고 촌스럽다고 나무란다. 그의 저서 <나의 체험적 여성론>에서 사랑의 행위는 세레나데를 연주하듯 해야 하고 여인의 육체는 계란을 다르듯 조심스럽게, 보석을 취급하듯 소중하게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계급 없어 누드, 평화의 상징

 

  
'두 포오즈' 유화 혼합매체 320×14cm 1981. 여인의 정신적 심경과 육체적 열정을 누드(구상)와 붉은색 계열의 오방색(추상)으로 그렸다
ⓒ 김형순
김흥수

 

'여인' '나에게 찾아온 천사' '두 포오즈'에서도 보듯 김흥수 화백의 그림에서 누드화가 없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그는 누구보다 누드화를 즐겨 그렸다. 이는 그가 창시한 평화와 공존의 미학인 하모니즘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김 화백은 누드화에 대해 모 일간지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술혼이 담긴 누드화에 대한 선구적 의지를 가진 제가 토양을 제대로 닦아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전에 비해 누드화에 대한 생각이 좋아졌어요. 누드는 그 자체가 평화입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평화롭고 안정되어야 비로소 누드화가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김 화백에게 있어 누드는 계급이 없는 평화의 상징이자 완전한 이상세계다. 누드를 아직 야하거나 상스럽게만 본다면 우리 사회가 아직도 전쟁의 피해의식 속에서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궁색하다는 뜻이리라. 그는 그래서 대한적십자사로부터 평화를 상징하는 작품을 의뢰받았을 때도 역시 누드화를 그렸다.

 

한국적인 것에 대한 애착

 

  
'추석' 유화 혼합매체 331×128cm 1969. 하늘과 땅과 조상님에게 제사를 지내는 추석을 기원하는 춤(구상)과 이를 액션페인팅 풍으로 자유분방한 색채와 무늬(추상)로 표현했다
ⓒ 김형순
김흥수

 

그의 그림소재는 위 작품 '추석'에서뿐만 아니라 '바구니를 이고 있는 여인', '강강수월래' 등에서 보듯 지극히 한국적이다. 그렇다고 서양적인 것을 배격하는 건 아니다. 그도 파리 가서 자신의 색감이 촌스러움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다만 남의 좋은 점은 수용하되 우리만의 고유한 미를 발굴하자는 제안이다.

 

그래서 그가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다. "왜 남의 것을 무턱대고 모방하느냐?", "왜 외국작가만 대우하느냐?" 한국사람이 서양 걸 아무리 잘해봐야 2등밖에 못하는 법, 한국적인 것은 한국사람이 세계 1등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가 작품을 할 때마다 문화재를 만드는 심정으로 한다는 말은 이런 점에서 납득이 간다.

 

미륵불, 그의 또 하나의 아이콘

 

  
'염(Thought)' 유화 복합매체 200×91cm 1977. 반가사유상에서 영감을 얻은 붓다의 무아지경(구상)과 불교 세계관을 그린 만다라(추상)의 이상향을 조화롭게 용해했다.
ⓒ 김형순
김흥수

 

 

1977년 하모니즘(Harmonism) 공식문서로 선언

김흥수화백은 1977년 워싱턴 IMF 미술관에서 '조형주의 선언전'을 열면서 음양조형주의(Harmonism)를 세계 최초로 발표했다. 다음은 그 내용전문이다. 올해가 김화백이 '하모니즘 회화'를 주창한 지 꼭 3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추상과 구상의 용해 - 조형주의 예술의 선언>
음과 양은 서로 상반된 극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세계 어울리게 될 때 비로소 완전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예술의 세계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추상미술의 등장 이후 세계의 화단은 구성주의와 추상주의는 서로 반목적인 상극을 이루어왔다. 사실적인 표현은 틀 속에 얽매여 있다고 볼 수 있는 반면, 추상적 표현은 우연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은 완전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음과 양이 하나로 어울려 완전을 이룩하듯 사실적인 것과 추상적인 두 작품의 세계가 하나의 작품으로써 용해된 조화를 이룩할 때 조형의 영역은 넘는 오묘한 예술세계를 전개하게 된다. 이것은 궤변이 아니라 진실인 것이다. 극에 이른 추상의 우연적 요소들이 사실 표현의 필연성과 조화를 이를 때 그것은 더욱 넓고 싶은 창조의 예술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1977년 7월 7일

 

김흥수 화백은 스스로 불교신자가 아니라고 했지만 누드화와 함께 미륵불은 또 하나의 그의 아이콘이다. 박생광 화백도 그렇지만 김 화백도 불교적인 것이 한국미의 정수임을 안다.

 

세계도 불교를 경쟁력 있는 미술아이템으로 받아들인다. 그 중 여성성이 강한 관음보살이나 미륵불이 많이 등장한다.

 

위 작품 '염'은 미륵불을 그린 것으로 그의 대표작이다. 또 한국미술의 최고봉인 반가사유상과 추상적 만다라를 하모니즘 기법으로 융화시켜 성속(聖俗)을 떠나 높은 이상향을 추구하고 있다.

 

이 작품은 하모니즘을 공식선언한 1977년 작으로 그는 이 작품을 통해 하모니즘의 본령을 보여주길 바랐는지 모른다. 그는 이렇게 최상의 종교세계와 최고의 예술세계가 만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의 독보적 미술, 세계도 인정

 

  
1993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쥬박물관에서 개최된 김흥수화백 작품전 포스터
ⓒ 김형순
김흥수

 

연지곤지 찍은 한국의 여인들이 등장하는 위 작품은 1993년 세계3대 미술관 중 하나인 러시아 에르미타쥬 미술관에서 한국인 최초로 초대전을 연 김흥수 화백의 포스터이다. 이런 전시가 가능한 건 그가 세계 최초로 하모니즘을 제창하여 독자적 길을 걸었고 모방만으론 남의 문화적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미술평론가 신항섭도 그가 없었다면 세계미술사에 우리가 뭘 내놓을 수 있었으며 한국의 서양미술사 70년은 남 좋은 일만 한 꼴이 되지 않았겠느냐고 되묻는다.

 

처음 국내에서 그의 하모니즘이 소개되었을 때 엄청난 야유와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의 예술적 위상과 가치를 차치하고라도 이런 기발한 발상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그는 후배 작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는 결국 세계에서도 인정을 받는다.

 

부부애도 하모니즘 예술처럼 꽃피다

 

  
그의 화집에 사인하는 김흥수화백과 그 옆 그의 분신처럼 그를 돕는 부인 장수현씨. 김화백은 턱수염, 우주가 그려진 팬턴트 목걸이, 중절모는 노신사의 심벌이다
ⓒ 김형순
장수현
 
김 화백은 그림 이상으로 1992년 43살이나 어린 제자 장수현씨와 결혼하여 장안에 화제를 뿌렸다. 여성을 남성의 구원자로 보는 그에게 젊은 아내는 잘 어울린다. 그의 수발 역할을 하는 장수현씨는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고 그녀의 맑은 미소가 주변을 환히 밝혔다.

 

사실 귀찮아할 법도 한데 김 화백은 사랑이라는 단어와 하트 표시가 들어간 저자서명을 손이 닮도록 써준다. 옆에서 아내가 그렇게 사인을 많이 해도 손 하나 떨지 않는다며 은근히 남편의 건강을 자랑한다. 뭐든 자기주도적으로 열정으로 사는 것이 그의 건강비법이란다.

 

결혼생활에서 싸움은 서로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라며 안 맞는 부분을 서로 맞춰가며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다고 말하는 김 화백, 그의 하모니즘처럼 그의 인생도 불협화음 같은 화음을 융화시키며 멋지게 꽃피고 있다.

  
'여인' 유화 혼합매체 240×92cm 1978. 여성의 현재, 과거, 미래를 한 화폭에 담았다. 가슴 아픈 과거의 상처를 딛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한 여인의 연대기를 그린 것이다.
ⓒ 김형순
김흥수

덧붙이는 글 | 미술관가는길 서울 종로구 경운동 63-7 이양원 빌딩 1층
전화 02)738-9199 www.gomuseum.co.kr(작가약력, 약도 등 참고) 입장무료
개간시간: 오전10시부터 오후7시까지 이메일: go-muse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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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르네상스'에 실패한 정조, 그리고 노무현

 

 

조선 르네상스'에 실패한 정조, 그리고 노무현
[주장] '자기부정'이 초래한 개혁의 좌절... 지금의 역사적 소임은 뭘까
김태희 (classic)
 
 
  
정조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MBC 드라마 <이산>. 정조는 개혁군주로 알려져있지만 그의 자기부정이 결국 개혁 실패를 낳는다.
ⓒ MBC
이산

 

"정조대왕이 좀더 오래 살았다면 …."



호학군주이자 개혁군주인 정조에게 어울리지 않은 정책이 있었다. '천주교 금단'과 '문체반정'이 그것이다.

 

개혁군주 정조, 그러나

 

천주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조는 신하들의 성화에 못 이겨 최소한의 처벌로 대처했다. 그러면서 '정(正)'을 바로 세우면 '사(邪)'는 자연 사라질 것이라 했다. 현실적으로 '척사'의 극렬한 방법을 피하고 부정(扶正, 바름을 부양한다)의 온건하면서 근원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반대의 원칙은 그대로 남는다. 이가환·정약용 등 정조가 재능을 아꼈던 남인계 인물들이 천주교 관련 혐의로 정적들의 공격에 줄곧 시달렸다. 정조가 보호하기 힘겨울 정도였다.


정치적 견제와 균형을 고려한 정조는 당시 주류적 정파였던 노론계 인물들을 겨냥해서는 '문체반정'을 내건다. 자유분방한 글쓰기를 중단하고 순정한 문장을 쓸 것을 요구했다.

 

"근자에 문풍(文風)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연암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를 내 이미 익히 보았거늘 어찌 속이거나 감출 수 있겠느냐?"


김조순은 반성문을 제출했고, 이서구는 문체를 군주가 관여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 박지원은 의연하게 대처했지만, 이덕무 등은 낙심천만이었다.

 

제왕의 자기부정, 부메랑 되어 날아오고

 

사실 천주교 신앙이나 자유분방한 문체를 초래한 서학이나 북학은 정조의 문예부흥정책에 힘입은 것이다. 사상적 개방성을 자양분으로 성장한 실학자들에게 정조는 후견인이었다. 따라서 순정한 학문을 바로 세운다는 취지의 '천주교 금단'과 '문체반정'은 문예부흥정책의 내용과 성과를 부정하는 정조의 '자기모순'이요 '자기부정'이었다.


정조는 온건하게 대처했지만, 그가 죽자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정조와는 정치적 원수 사이였던 정순왕후가 실권을 쥐고 파괴에 나섰다.


"선왕(정조)께서는 매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듣건대, 이른바 사학이 옛날과 다름이 없어서…(중략)…날로 더욱 성해지고 있다고 한다…(중략)…이와 같이 엄금한 후에도 뉘우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마땅히 역률(반역죄)로 다스릴 것이다."


정순왕후의 하교는 살육의 신호탄이었다. 정조의 명분으로 정조의 인물인 이가환·정약용 등을 제거했다. 누차 천주교와 무관함을 밝혔지만 소용없었다. 다른 실학자들도 죽거나 흩어지게 된다.

 

이 때 살육을 자행한 세력은 불과 5년 정도밖에 권력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조가 24년에 걸쳐 인내심을 갖고 차근차근 쌓았던 개혁의 성과를 파괴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5년 후 순조의 장인 김조순에 의해 파괴세력은 물러나지만 개혁시대는 부활되지 않았고 세도정치로 이어진다.


아무런 견제장치 없이 일당독재가 가능했던 세도정치도 따져보면 정조의 책임이 없지 않다. 특권적 정치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정치원칙을 스스로 깨고 장차 왕실의 외척이 될 김조순에게 적극적 정치개입을 부탁했던 것이다.


5년 만에 개혁성과는 파괴되고 부패한 세도정치로


  
노무현 대통령(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이종호
노무현 대통령

이른바 참여정부의 5년 임기가 다 되어간다.

 

정권 초기의 대북송금 특검수용은 평화통일이라는 헌법적 과제를 하위규범인 법률 위반의 문제로 전락시켰다. 열린우리당 창당은 '당내 민주화와 혁신을 통한 정당정치 발전'이라는 당면과제를 회피하는 결과가 되었다. 최근의 한미FTA논쟁은 애국적 시민과 학자들을 크게 분열시켰다.

 

이런 과정을 돌아보면, 노무현 정권 스스로 정체성을 훼손하고 자기 지지기반을 분열시키는 대장정이었다.


민주정부의 집권이 '87년 민주화 쟁취'와 '97년 외환위기'의 결과라는 역사성을 고려하면, 민주주의를 실제화하고 세계화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경제개혁이 정권의 역사적 임무였다.

 

97년 환란은 재벌들이 금융시장 개방에 편승해 단기자금 차입으로 과잉중복투자를 하다가 당한 유동성 위기였다. 정부주도의 관치금융과 재벌특혜에 의한 성장우선의 경제가 더 이상 불가능한 단계에서, 내부개혁 없는 개방이 초래한 혹독한 결과이기도 했다.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규칙과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마련하고, 정부와 공공부문이 공공성 효율성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개혁하는 것은 정권의 역사적 과제가 되었다.


노무현 정권의 자기 정체성과 역사성 부정


언론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 '시장에 맡겨야' '규제완화' 등을 만병통치의 주술처럼 반복하고 있지만, 대기업의 성과가 고용창출과 내수확대로 잘 연결되지 않는 실정이다. 시장실패도 관치폐해도 방치할 수 없는 문제이다. 노무현 정권은 언론과 시종 불화하면서도 정작 언론의 주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경제개혁을 포기한 듯하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그 상징적 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부동산시장의 동향과 약간 소유한 주식이나 펀드의 가격변동에 일희일비하면서 소수 자산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방향으로 동조하고 있다. 그로 인해 내 근로소득의 가치가 떨어지고 공동체 일각이 무너지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재벌기업의 비리와 그 엄청난 경제적 폐해는 외면하고, 당장 경제가 안 좋아질까 걱정한다.

 

부패사슬을 제거하고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여 경제주체 간 신뢰를 높이는 등 경제체제와 체질을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이건만, 단기적 성장론과 인위적 경기부양에 현혹되고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고 생각한다. 부패 위에 세운 건물은 돌연 무너진다는 경험은 잊어버렸다.


5년 전 특권과 반칙을 거부했던 우리들이 어느새 편법이나 탈법으로라도 성공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제 10년 전 환란의 책임을 져야 했던 사람들이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며 화려한 복귀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정조의 급작스런 죽음을 안타까워하여 정조독살설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정조가 스스로의 가치를 부정했던 '자기부정'의 역사적 귀추에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87년 민주화와 97년 외환위기를 통해 집권한 정권이 과연 그 역사적 소임에 충실했는지 의문이거니와, 자신의 역사적 가치를 부정한 과오가 다른 공적마저 잠식하고 역사적 후퇴를 초래할까 걱정스럽다. 기우에 그치기만 바랄 뿐이다.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에 관해서 대부분 깊은 아쉬움을 갖고 있다. 개혁과 문예부흥의 활기찬 시대와 대조적으로, 정조가 죽자(1800년) 부패한 세도정치와 피의 민란으로 얼룩진 시대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조 이후 전개된 역사에 대해서 정조에게 책임은 없는가.

덧붙이는 글 | 위 글은 다산연구소 홈페이지(www.edasan.org) <실학산책>에 실린 글입니다. 
김태희는 다산연구소 기획실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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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티시즘, 삶을 지배하다

페티시즘, 삶을 지배하다
[철학으로 수다떨기⑤] 자본주의 브레이크를 잃다
황상윤 (suoangel)
 
 

순진한 내가 페티시즘이란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을 때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제발 믿어주기 바란다. <자본론>에서 페티시즘은 '물신화' 내지는 '물신숭배'로 번역된다.

 

이성의 한 구석에서 잠자고 있는 페티시즘이란 단어를 흔들어 깨운 것은 그 이후로 십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다. 선천적인 기계치고 '컴맹'인 나는 아주 어렵게 땀을 뻘뻘 흘리며 인터넷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인터넷에 무지했던 나는 의도와는 무관하게, 실수로, 영문도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미지의 사이트에 접속하게 되었다. 괴 사이트가 내 컴퓨터 모니터를 점령하는 사태를 손써볼 엄두도 못낸 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컴맹이던 나는 정말이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정말이지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 사이트를 통해 나는 페티시즘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게 되었다. 세포 하나하나마다 일어서는 말초신경의 감각을 통해 페티시즘을 이해했다. 뇌를 통한 이성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반응하는 세포 하나하나를 통해 직접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한마디로 '환골탈퇴'한 것이다.

 

포르노와 자본주의의 공통점


페티시즘은 사회과학용어로 물신화라 번역되지만, 정신분석학에서는 성도착증으로 번역된다. 특정 물건을 통해 성적으로 흥분하는 경우를 뜻한다. 페티시즘은 포르노와 만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특정 부위만을 확대하여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포르노가 등장한 것이다.

 

하이힐 페티시, 속옷 페티시, 손가락 페티시 등 다양한 방식으로 페티시 포르노는 존재한다. 하이힐 페티시는 하이힐 신은 다리를 통해서 성적 흥분을 느낀다. 속옷 페티시는 속옷을 통해서, 손가락 페티시는 손가락을 통해서 성적 흥분에 도달한다. 그러니까 페티시즘은 특정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는 것을 말한다.

 

물신화도 마찬가지다. 포르노에서 클로즈업된 음모나 유방이 여성을 대표하듯이, 자본주에서는 상품이 그 사람을 대표한다. 자본주의는 상품 생산과 상품 판매를 통해 유지된다. 상품의 생산과 판매에서 유일한 목적은 돈이다. 대장장이가 칼을 생산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다. 생산된 칼이 일류 요리사가 요리를 하기 위해 사용되는지, 살인자가 사람의 배를 쑤시는데 사용되는지 자본주의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얼마에 팔리느냐만 중요할 뿐이다. 이 자본주의에서는 대장장이는 인간 자체로 평가되지 않는다. 대장장이가 제작한 칼이 대장장이를 대표할 뿐이다.

 

어느 날 저녁 술 한잔 마시기 위해, 솔직하게 고백해서 여러 병 마시기 위해, 단골 술집에 갈 수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술집 문이 닫혔을 수 있다. 단골집 주인이 상을 당했을 수도 있고, 병이 났을 수도 있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술집 문을 닫았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단골집 주인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편하게 술 마실 술집이 문을 열지 않은 것을 아쉬워할 뿐이다.

 

내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사실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다. 내가 술집 주인을 걱정하지 않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단골집 주인과 인간과 인간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술집이라는 상품을 매개로 해서 소비자와 판매자로 만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상품과 상품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가짜가 진짜를 대신한다

 

자본은 끝없는 이윤을 위해 계속해서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기존의 상품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상품을 계속 개발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팔리는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 팔리기 위해서는 욕망을 자극해야 한다. 자본은 새로운 상품만이 아니라 새로운 욕망도 생산해야 한다.

 

가장 손쉽게 욕망을 생산하는 것은 성상품이다. 성상품은 다양한 방식으로 매매된다. 직접적으로 성기사용권이 매매 되기도 한다. 성기사용권이 매매되지는 않지만 다양한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품도 있다. 그리고 성적 이미지라는 아주 고급한 상품도 존재한다.

 

다양한 성상품을 통해 새로운 여성이 창조된다. 이미지로 창조된다. 내가 광적으로 열광하는 송혜교도 사실 알고 보면 실제 여성 송혜교가 이니라 창조된 이미지일 뿐이다. 나는 단지 창조된 여성인 송혜교에 열광할 뿐이다.

 

남성의 욕망은 창조된 여성을 향한다. 실제 여성이 아니라 창조된 여성을 향해 발기한다. 여성은 남성이 욕망하는 창조된 이미지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어 한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의해 코를 세우고, 가슴을 키운다. 그렇게 창조된 여성이 되기를 욕망한다.

 

여성의 욕망도 다르지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구조는 다르지 않다. 여성의 욕망에서도 창조된 남성이 실제 남성을 대신한다. 남성은 여성이 욕망하는 창조된 이미지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어 한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의해 헬스클럽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몸짱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창조된 남성이 되기를 욕망한다.

 

실제 인간은 창조된 인간을 욕망하게 되며, 이를 통해 실제 인간이 창조된 인간처럼 되기를 욕망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실제 인간과 창조된 인간은 전도된다. 창조된 인간이 실제 인간의 욕망을 지배하게 된다.

 

브레이크를 잃어버린 자본주의

 

욕망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무한한 이윤 추구를 위해 상품은 없애버리고 상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상표는 이미지다. 보다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는 구찌란 가방을 사는 것이 아니라 구찌란 이미지를 사게 만들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이렇게 진짜 상품을 가짜 상품인 이미지가 대신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미지가 판매되고 있는 진짜 상품인지도 모른다. 구찌 가방을 사는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가방이 아니라 꾸찌란 이미지인지 모른다.

 

그러다 상표 생산조차 귀찮아졌다. 생산이란 것 자체가 거추장스러워졌다. 무엇인가를 생산한다는 명분보다는 보다 많은 이윤이 중요했다. 생산 자체를 생략해 버리고 자본 자체를 판매하면 보다 많은 이윤이 남게 된다. 현대 금융자본주의의 이윤추구 방식이다.

 

주주자본주의는 생산을 파괴한다. 생산을 파괴함으로써 생산에 투여될 자본을 주식 배당금으로 돌린다. 생산을 파괴함으로써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대량 정리해고도 자행한다. 그러나 자본을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본을 입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산 없이는 어떤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경제 수치가 아무리 사기를 쳐도 생산 없이는 삶의 지속은 불가능하다.

 

자본은 더 이상 생산의 절대적 요소가 아니다. 생산에서 자본의 역할은 계속 줄어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주자본주의에서 자본은 생산을 파괴하고 있다. 이윤 추구를 위해 생산조차 파괴하는 자본주의는 이미 브레이크를 잃어버렸다.

덧붙이는 글 | * 본 기사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대안정책 사이트 이스트플랫폼(http://epl.or.kr)에 공동 게재됩니다.

** 2008년 초에 민연사에서 출판 예정인 책의 내용을 연재 기사로 묶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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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같은 내 인생, 그녀가 위로하네

 

 

개같은 내 인생, 그녀가 위로하네


[한겨레] 얼음처럼 냉정하고 야심으로 가득차 있지만 직업적 열정으로 가득찬 장준혁 과장을 보면서 저런 의사 한번 만나봤으면 했다. 말썽장이 고딩이지만 때로 속 깊은 오빠같고 때로 아이처럼 해맑은 윤호를 보면서 ‘연애는 나이 순이 아니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버스에서 허벅지를 더듬던 손길에서 부부싸움한 직장 상사의 화풀이까지 감당해야 했던 날 막돼먹은 영애씨를 불러내 함께 소주 한잔을 하고 싶었다.

드라마나 영화, 또는 만화나 광고의 캐릭터는 단순한 등장인물이 아니다. 이들은 지금 내 옆에 성큼 다가와 상처입은 나를 위로하기도 하고,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뤄주며, 또 사그러들었던 열정에 불을 지펴주는 친구다.

 

 

 
2007년에도 수많은 캐릭터들이 우리를 들뜨게 했고, 눈물 흘리게 만들었으며 사는 시름을 잠시라도 잊게 해줄만큼 시원한 웃음을 선사했다. 〈Esc〉는 2007년을 마무리하는 기획 1탄으로 올해의 캐릭터들을 선정했다. 그들과 함께 했던 즐거운 시간을 곱씹어보면 올 한해도 허무하게 지나간 것만은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직업·외모 막론하고 다양한 여성에게 사랑받는
<막돼먹은 영애씨>의 김현숙


“나는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 기사에는 영애를 묘사할 때 꼭 평균 이하의 외모라고 적혀 있더라구요.” 영애씨가 현숙씨인지, 현숙씨가 영애씨인지 헷갈리는 <막돼먹은 영애씨>(이하 영애씨)의 김현숙이 인터뷰 머리에 농담처럼 말을 꺼냈다. 이 말엔 영애씨가 케이블 프로그램이라는 시청률의 태생적 한계를 가졌음에도 수많은 공중파 드라마의 여성들을 제치고 수많은 20~30대 여성들에게 ‘나 같은’ 캐릭터로 열광적인 공감을 얻은 이유의 핵심이 있다.

일방적 캐스팅 제의에 처음엔 황당

굳이 계보를 따지자면 영애는 삼순이의 사촌 동생쯤 된다. 넘쳐나는 건 살이고 부족한 건 돈, 남자, 타인(특히 남자)의 배려와 존중 …, 끝이 없다. 하지만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 가운데 가장 인간미 넘치는 삼순이였다 할지라도 그녀는 술 마시고 남자 등에 토를 해도 사랑스러운 여주인공의 카테고리 안에 남아 있었다. (늘씬한 김선아가 통통하고 귀엽게 나오네?) 하지만 영애의 외모는 엄마에게조차 “저, 응뎅이 좀 봐. 저러니 시집을 가겠냐구”라는 핀잔을 듣는, 말 그대로 대한민국 평균치다. 그러니 ‘진짜’ 이영애 같은 공주, 왕자들로 빼곡한 텔레비전에서 평균 이하로 보이는 거고, 또 “러시아 백마” 따위의 이야기를 태연하게 지껄이는 ‘막돼먹은’ 남자들에게는 ‘덩어리’로 불릴 밖에.

우리 나이로 서른 살, 영애씨와 동갑인 김현숙이 없었더라면 영애씨는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을까. 태어나기나 했을까? “<미녀는 괴로워>가 끝났을 때쯤 전화가 왔어요. 보통 캐스팅 제의라면 한번 만나자고 할 텐데, ‘김현숙씨를 모델로 쓰고 있으니까 오셔야 합니다’라고 일방적인 통보를 하는 거예요. 황당해서 소속사에 전화했죠. 나 모르게 출연 진행한 거 있냐고. 소속사도 금시초문이라데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갔다가 작가들과 처음 만나 수다를 떨면서 “10년 사귄 친구처럼 필이 확 꽂혀” 버렸다. 회사에서는 같잖은 상사에게 무시당하고, 길거리에서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에게 놀림당하고, 소개팅 나가서는 나보다 스무 살 더 먹어 보이는 남자에게 나이 많다고 외면당하는 게 어디 한두 사람의 경험이었을까.

김현숙을 <영애씨>의 모델로 추천한 건 바로 티브이엔의 송창의 대표였다. “출산드라와 <미녀는 괴로워>, 제가 엄마와 토크쇼 나왔던 것까지 다 보셨나 봐요. 그래서 작가들한테 ‘나 믿고 써라’라고 하셨다는데, 그 이후 취향 독특하다는 이야기를 엄청 들었다죠?(웃음)”

시트콤도, 다큐멘터리도, 드라마도 아니면서 또 그 셋의 혼합 변종 쇼로 자리잡은 <영애씨>의 핵심은 현실성이다. 삼순이도 결국 왕자님(현빈)을 만났다. 하지만 서른 살 먹은 여자는 안다. 누더기 입은 신데렐라의 손을 꼭 잡아주는 왕자님은 동화책과 드라마에만 등장한다는 사실을. 영애씨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눈물 콧물 흘리고 악다구니 치며 각자의 삶을 사는 동안 시종 <인간극장> 톤으로 차분하게 나오는 내레이션처럼 “드라마틱한 사건은 드라마에서나 벌어진다”는 걸 <영애씨>는 가감없이 보여준다. 영애는 시즌1에서 난데없이 ‘도련님’과의 짧은 연애로 백일몽을 꾸다가 깨어나더니 시즌2에서는 돈 천만원 떼어먹고 달아났던 첫사랑과 해후해 다시 한번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내 인생은 왜 이러냐.” 오늘도 영애는 단짝 지원이와 한잔 마신다. “저도 가끔 영애가 답답할 때가 있어요. 비참하게 차인 첫사랑과 다시 만나는 것도 그렇죠. 그래서 주변 스태프들에게 물어보니까 외로우면 그래, 다 속아 하더라구요. 미련이 남아 있다면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사랑이란 게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잖아요.”

전 세계를 아우를 듯한 그녀의 활약

김현숙은 요새 촬영 중인 영화 <어젯밤에 생긴 일>에서 “남자를 ‘떡 주무르듯’ 가지고 놀고, 자신감 넘치는 커리어우먼”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영애씨의 반대 캐릭터? 겉보기에는 그럴 수 있지만 김현숙이 연기하는 세련된 ‘모던 걸’은 알고 보면 영애씨의 또다른 얼굴일 수 있다.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이라고 해도 힘들고 외로운 순간이 있잖아요. 또 삽질했구나, 후회할 때도 많고. 그래서 영애씨가 직업과 외모를 막론하고 다양한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거 같아요.” 맞다. 비슷한 고민과 좌절을 하는 또래 여성들은 모두 영애다. 요새 일본 티브이에서도 회사에서는 잘나가는 전문직 여성이지만 집에만 오면 ‘추리닝’ 바람에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뒹굴뒹굴하는 ‘건어물녀’가 인기라니 겉 다르고(강하다, 때로는 멋져 보인다), 속 다른(여리고, 고민 많고, 게으르고, 의지박약인데다가…) 영애씨의 활약은 앞으로도 전세계를 아우르며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일러스트레이션 신예희/ 〈매거진t〉 ‘t사감의 기름진 시선’ 연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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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대처 수상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quot;

 

 

우리도 대처 수상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일과 희망·27] 노동개혁의 결과는 일자리 감소와 소득 불평등 심화
 
  2007-11-27 오전 6:39:51
 
   
 
 
  우리나라에서 노사관계의 고질적인 노사대립 문제, 특히 투쟁적인 노조 문제가 나올 때마다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분들로부터 듣는 말이 있다. "우리의 노사관계를 제대로 뜯어고치려면, 영국의 대처 수상 같은 분이 나타나서 노조를 제대로 손 좀 봐 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것도 한 번에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노조의 버릇을 잡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대처 수상이 영국의 노사관계를 개혁하면서 막강하던 노조의 힘을 뺀 것은 틀림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대처 수상의 영국 노사관계 개혁에 관해서는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 너무 많다. 문제는 그것이 마치 사실인 양, 영국의 정치경제적 맥락과 노사관계를 모르는 분들에 의해 너무 쉽게 그리고 자주 인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런 점에서 영국의 노사관계 개혁을 둘러싼 단순화된 오해를 바로 잡고 우리가 무슨 교훈을 얻을 것인가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영국의 노사관계 개혁은 1970년대말 경제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1970년대 말 영국의 전후 정치경제체제의 위기 속에서 노동당 정부에서 보수당의 대처 정부로 정권이 바뀌었다. 노사관계 개혁은 영국 체제 개혁과 함께 동시에 온 것이다. 대처 수상이 정권을 잡을 즈음에는 전후 영국의 정치경제체제는 경쟁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따라서 국가 보조금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던 민간제조업과 공공부문의 완전고용이라는 목표를 수정하고 개혁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자본주의는 이미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 독일 등에 의해 밀리기 시작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전후 호황 속에서 서유럽 자본주의국가의 전후 3대 사회적 합의라고 할 수 있는 케인즈주의 경제정책, 완전고용, 복지국가에 기초하여 일정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더구나 과거 제국주의 유산, 런던 금융시장, 그리고 경쟁력이 약화되긴 했으나 여전히 제조업과 기초기술을 갖고 있었다.
  
  영국은 포드주의의 불완전한 도입, 1970년대 2차례 석유위기를 거치면서 높은 물가인상, 임금인상, 작업장 수준으로 분권화되어 갈등적 노사관계등이 겹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많은 제조업과 공기업들이 완전고용 유지를 위해 막대한 정부 보조금을 받아가면서 유지되고 있었으나 이미 경쟁력을 잃었거나 비효율을 안고 있었다.
  
  1970년대 말 캘러헌 노동당 정부는 전후 복지국가 모델에 기반을 둔 영국의 정치경제체제가 산업경쟁력의 상실로 위기에 봉착한 가운데 노정간의 사회적 합의를 통해 임금억제 - 물가인상 억제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아래 <표-1>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79년 노동당 정부 말기에 영국노조의 조직률은 53.0%로 매우 높았고 파업건수는 현장에서의 작은 분규를 제외하더라도 2000건을 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한 노동손실일수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더구나 다른 나라들에서 2차례에 걸치는 석유파동 속에서 노사정타협을 통해 임금억제 - 물가억제를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가운데 영국에서는 높은 물가인상률과 높은 임금인상률이 상호 악순환 속에서 노사분규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 자료: 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

  대처는 한꺼번에 노조를 꺾은 것이 아니다
  
  영국의 대처 수상은 노조와 노사관계를 매우 서서히 개혁해 나갔다. 흔히 일부 언론이나 정치인 혹은 학자들조차도 영국의 대처 수상은 막강했던 노조를 한 번에 꺾은 것쯤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의 노동운동은 1970년대 초반에 에드워드 히스 보수당 정부와 대결하여 정부를 물러나게 한 적이 있고 1979년 불만의 겨울 때 공공부문 노조는 노동당 캘러헌 정부를 물러나게 하는 등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보수당의 대처 수상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자칫 노조와 전면전을 벌이다가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대처수상의 보수당 정부는 영국 노사관계의 개혁, 그리고 노조의 약화를 위해서 점진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 자료: 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

  위의 <표 -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영국 노사관계는 하루아침에 개혁된 것이 아니다. 대처 정부가 집권한 뒤에도 탄광노조의 파업이 있었던 1984년과 1985년을 제외하고도 노동조합은 상당한 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표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처정부는 단계적으로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고 노사관계를 바꾸기 위해 노동관련법을 개정해 왔다. 노동당 정부 시절 그렇게 막강하게 보였던 노동운동은 높은 실업률, 노동당 정부 아래에서 노동조합의 무분별한 파업 등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고 출범한 대처정부의 점진적 노조약화와 노사관계 개혁 조치에 대해 효과적인 저항을 할 수 없었다.
  
  대처정부의 노조 약화와 노사관계 개혁은 아래와 같은 노동법의 개정을 주요 수단으로 추진되었다. (1)민법으로의 회귀를 통해 노조에 대한 면책특권 축소와 손해배상 청구 (2)단체교섭에 대한 지원수단 축소 (3)파업과 단체교섭의 대상 축소 (4)우편투표 도입 등 파업에 대한 절차적 규제 강화 (5)파업에 따른 해고요건의 완화 (6)클로즈드숍의 불법화 (7)노조의 내부 운영에 관한 직접적 개입 (8)부당해고요건의 완화 (9)최저임금제의 폐지 등이 그것이었다.
  
  탄광노조의 무리한 파업은 오히려 대처의 노조 개혁을 도와줬다
  
  대처수상의 탄광 구조조정과 노조약화에 대항한 탄광노조의 무리한 파업은 노조운동을 더욱 약화시켰다. 영국정부는 1980년대 초 당시 국제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석탄을 생산하고 있었던 석탄 산업에 상당한 보조금을 주고 있었다. 1981년 대처 정부는 탄광노조를 비롯한 노조와의 전면적인 대결이 무리라고 판단하고 탄광노조의 파업에 부분적인 양보를 하기까지 했다.
  
  1983년 3월 국유화되어 있던 탄광을 관리하는 전국석탄위원회의 이안 맥그리거(Ian MacGregor) 의장은 전국탄광노조 지도부를 만나 석탄산업의 축소 계획, 특히 1984 - 1985년 400만 톤의 석탄 생산량을 줄이고 광부들의 일자리도 2만 개를 줄일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당시 강경 좌파였던 아서 스카길이 이끄는 탄광노조는 노동조합은 조직적인 투쟁력에 의거하여 탄광폐쇄를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에는 이미 실업자가 300만 명에 이르고 영국노총 소속 조합원수가 300만 명이나 감소하고 있었다.
  
  대처 정부는 탄광노조와 전면대결을 위한 파업대비를 위해 미리 착실한 준비를 했다. 석탄재고의 확보, 싼 외국석탄 수입경로 확보, 석탄 비수기 선택, 석탄을 연료로 하는 발전소에 석유연료 사용시설 확보, 대규모 기동경찰대 창설로 피켓팅 방지 대비 등이었다. 1984년 대처정부는 탄광노조와의 전면대결을 의식하면서 석탄산업의 구조조정을 위해 비효율적인 일부 탄광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탄광노조 지도부는 당시의 석탄산업의 구조조정의 필요성에 비해 역으로 채탄량 2배 증대, 30-40개 신규탄광 개발, 주4일 근무제, 주 100 파운드 최저임금, 연금수준 인상 등 위한 국가보조금 인상 등 무리한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 대처정부는 다른 공공부문의 파업에 대해서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 타협을 하면서 탄광노조를 고립화했다. 또한 석탄산업의 구조조정 필요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국민적 여론을 의식하지 않고 파업에 돌입한 탄광노조에 대해 영국노총을 비롯한 다른 노조들의 반응은 냉담하여 파업에 대한 연대의사나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탄광노조에서 파업찬반투표를 거치지 않고 파업에 돌입하여 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노조간부들은 불법파업에 중앙 노조기금, 지역 노조기금을 사용함에 있어서 신뢰와 신용의무를 위반했다며 고소를 당했다. 파업찬반투표를 거치지 않는 파업 때문에 5만 파운드의 벌금, 노조의 규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원은 노조 기금의 몰수를 판결했다.
  
  정부와의 대결에 거의 1년을 끈 탄광노조의 파업이 패배로 돌아간 뒤 노동운동은 자신감을 상실했다. 파업 뒤 탄광노조 노조원 수는 6만5000명으로 감소했고 석탄산업 고용 광부들은 1983년 18만7000명에서 1989년 8만5000명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탄광노조가 고용유지를 위해 보조금에 의지하던 석탄산업의 구조조정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정부의 보조금을 늘리라는 시대착오적 주장을 하면서 파업을 벌인 결과 대처정부가 노조정책에서 확고한 우위에 설 수 있게 해 준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이리하여 탄광노조의 무리한 파업이 노동운동의 자신감 상실과 약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대처정부는 노조를 약화시키기 위한 입법을 더욱 본격적으로 도입할 수 있었다.
  
▲ 자료: Waddington 2003. 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

  대처의 노동개혁은 개별 노동자들의 권리도 약화시켰다
  
  대처 정부는 노조 약화와 집단적 노사관계를 개혁했을 뿐만이 아니라 개별 근로자들의 권리도 크게 약화시켰다. 300만 명에 달하는 저임금노동자들에게 적용되고 있었던 업종별 최저임금제(wages councils)를 폐지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높은 실업률 속에 취약계층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수준을 더욱 낮출 수 있게 했다. 보수당 정부 아래에서 고임금소득자와 저임금노동자들 사이의 임금격차가 크게 확대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또한 보수당 정부는 사용자가 절차 미준수나 차별 등에 따른 부당해고라는 부담 없이 아무런 사유 없이도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는 대상자를 기존의 근속 6개월 미만의 근로자에서 2년 미만의 근로자들에게까지 연장함으로써 사실상 무제한 해고의 자유를 허용했다. 사용자의 특권을 보장하는 대신 근로자들의 고용안정을 무시하는 정책을 취한 것이다. 또 여성과 청년 노동자들에 대한 보호(갱내작업, 야간작업금지)조항이 제거되었다. 뿐만 아니라 보수당 정부는 유럽연합에서 1989년 12월 합의한 사회헌장 및 동일노동 동일임금, 집단적 정리해고, 사업의 양도, 비정규직, 노동시간 등과 관련되어 발효된 각종 법적 지침(directives)의 적용을 거부했다.
  
  이리하여 보수당 정부는 개별노동자들에 대한 보호나 권리 규정을 없애거나 유럽연합 회원국들에서 적용되는 지침들(노동자들의 사회적 권리)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경쟁과 규제 완화라는 명분 아래 사용자 편향적인 정책을 편 것이다.
  
  영국경제의 부활 속 그늘…노조가 약화된 만큼 생산력은 강화됐다?
  
  이런 노동개혁, 민영화, 복지축소를 통해 전후 정치경제체제를 개혁하면서 노동시장의 유연화, 경제구조 개혁, 해외자본의 유치 등을 통해서 영국경제가 다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 자료: USDA

  위의 <표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영국은 1970년대 다른 경쟁 국가들보다 경제성장률이 뒤쳐져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마이너스 성장에서 불구하고 1980년대 - 1990년대 동안 다른 나라가 성장률이 떨어지는 동안 영국은 1970년대 수준 혹은 그보다 약간 낮은 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음으로써 미국을 제외한 다른 경쟁 국가들보다 빨리 성장할 수 있었다. 2000년대 들어와서 영국은 성장률을 회복하여 유럽 다른 나라들보다 놓은 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평균 성장률이 2.5% 정도였다.
  
  영국경제의 비교적 높은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영국 경제에 그늘은 남아 있다. 노동에 대한 규제완화, 노조의 현저한 약화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제조업은 보수당 정부 아래에서도 쇠퇴과정을 겪어 왔다. 대처 정부 아래에서 1979년 7백 만을 웃돌았던 영국의 제조업 고용인구가 1990년에는 4백 만으로 줄어들었다. 보수당 정부하의 영국 제조업은 상당수가 공장폐쇄, 생산축소, 해외시장의 상실 등 퇴보적인 구조조정 과정을 거쳤다.
  
▲ 주: 제품수출액과 제품수입액에는 석유와 불규칙적인 제품의 수출입액은 제외되었음, 자료: 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

  뿐만 아니라 1997년 토니 블레어 총리가 집권한 뒤로도 제조업의 고용은 1백 만 개가 줄어들었다. 이리하여 제조업의 구조조정은 생산성의 높은 증가에 따른 전진적인 탈산업화의 결과가 아니라 생산성의 상대적 정체 속에 이루어진 퇴영적 탈산업화의 형태로 이루어져 제조업의 고용 인력이 대폭 감축되었다. 영국 자동차산업의 상징이었던 로버(Rover)자동차는 영국 환자(English Patient)가 되어 몰락한 것도 제조업 쇠퇴를 상징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토니 블레어(Tony Blair) 영국 총리도 2000년 12월 1일 연설에서 제조업의 낮은 생산성 문제를 제기했고, 미국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포터(Michael Porter) 교수도 영국 기업들이 기존의 비용위주 경쟁에서 부가가치, 혁신 중심의 전략으로 옮겨갈 필요성을 제기했다.
  
  제조업만을 본다면, 영국은 대처 정부에 의해 노조의 약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었으나 제조업의 부활 혹은 성공적 고도화를 낳지는 못했다. 그 결과 옆의 <표 - 6>에서 보듯이 상품무역에서 역조현상은 여전히 확대되어 2006년에는 상품무역 적자 규모가 709억 파운드(약 1400억 달러) 규모로 커졌다.
  
▲ 영국의 소득불평등도 (단위: 지니계수) 자료: 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

  영국의 소득불평등도는 1970년대 노동당 정부 시절에는 완화되었다가 대처 정부가 주도한 노조와 노사관계의 개혁의 결과 그리고 사회복지제도의 개혁의 결과 지니계수 값이 급격하게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영국에서 대처 정부가 이미 위기에 봉착한 영국의 전후 정치경제체제를 신자유주의적 개혁으로 바꾸어 놓았으나 그 이면에 소득불평등, 임금불평등이 심화되는 사회적 양극화를 가져온 것이다. 노동당 정부는 보수당 정부의 주요 정책을 이어받아 추진한 결과 소득불평등도에서는 별다른 개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되기까지 했다.
  
  대처정부와 그를 뒤이은 존 메이저 보수당 정부에 의해 영국의 집단적 노사관계는 개혁되었으나 지나치게 신자유주의로 기울어 소득불평등, 근로자의 개별적, 집단적 권리의 제한 등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아래의 표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영국에서 1990년대와 2000년대 들어 노조의 약화와 노사관계의 개혁 이후 파업건수나 파업으로 인한 노동손실일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개별 노사분규(부당해고, 동일임금, 성차별, 인종차별, 근로계약 위반, 임금보호 등)의 발생빈도를 나타내는 알선중재위원회(ACAS)에 제소하는 건수 그리고 고용심판소(Employment Tribunals)에 제소하여 처리된 개별 노사분쟁 사건 수는 1980년대 보다 2.5배 가량 늘었음을 알 수 있다.
  
▲ 자료: ACAS Annual Report and Account 각 년도s. trade union statistics - Certification Officer Annual Reports. 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 Labour Dispute in 2006. Economic and Labour Market Review Vol 1(6) 2007년 6월호. Employment Tribunals Service. Annual Report & Account. 각 년호. Department of Trade and Industry.

  이것은 집단적인 노사관계가 약화되면서 개별적 노사갈등이 해결될 수 있는 채널이 없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개별적인 노사분규로 발생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1997년 노동당 집권 후 보수적 노동개혁은 완화됐다…앞으로 5년 우리는?
  
  보수당 정부의 지나치게 편향된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은 1997년 토니 블레어가 집권한 뒤 일정하게 시정되고 있다.
  
▲자료: EIRR 2003. 12. p. 30. Department of Trade and Industry. 2007.

  특히 부활된 전국단일 최저임금제는 2006년 10월 시간당 5.35 파운드(1만700원)로 전체 노동자들의 10%인 약 240만 명에게 적용되어 저임금노동자들에게 적지 않은 혜택을 주었다. 여성 근로자의 14%가 이들 최저임금의 적용을 받고 있으며 18-21세 청년 근로자의 40%가 최저임금 적용대상이고 65세 이상의 고령근로자의 23%가 최저임금의 적용을 받고 있다. 최저임금제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들이나 보수당에서 우려하던 일자리 감소는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노조와 관련된 권리(일정한 요건 충족 시 사용자의 노조 인정 의무, 공공이나 노조의무를 위한 시간 공제, 노조활동 보호), 개별 근로자들의 권리(부당해고, 부당차별당하지 않을 권리, 남녀 동일임금, 출산유급휴가, 산후 직장복귀 권리, 정리해고 시 퇴직수당 수령 권리, 노동시간 보호, 단시간 근로자에 대한 동일 처우, 계약직 근로자들에 대한 보호)를 부활시키고 있다. 보수당 정부에 의해 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이었던 정책이 노동당 정부에 의해 부분적으로 완화되어 왔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노동당 정부가 정책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선회한 결과라기보다 유럽연합이 유럽경제통합에 따르는 사회갈등을 완화하고 사회적 통합을 촉진하기 위해 추진해 온 각종 고용과 노동관련 지침을 영국에 적용함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결론적으로 영국의 노동운동은 영국 경제가 경쟁력을 잃고 위기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당 정부 아래에서 사회적 타협에 의한 '협상을 통한 개혁'의 길을 반대하고 협소한 실리를 추구하다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보수당의 대처 수상을 맞이한다. 대처 수상이 점진적으로 노동법 개정 등을 통해 노동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투성을 앞세운 탄광노조가 탄광의 구조조정에 반대하며 시대착오적인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다가 패배함으로써 오히려 대처 수상의 노조와 노사관계의 개혁은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 이런 방식의 영국 노동개혁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시장개방과 세계화에 따른 유연화 요구를 '협상에 의한 변화'를 통해서 수용함으로써 보다 점진적이고 각 이해당사자의 손익이 일정하게 고려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과 대비가 된다.
  
  보수당 정부는 영국의 전후 정치경제체제를 노조 약화, 노동법 개정, 사회복지 축소, 민영화 등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개혁하여 1980년대 중반 아래 성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불균등 성장 속에서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와 일자리의 큰 감소, 소득불평등의 큰 증가, 임금격차의 확대, 개별적 노사분쟁의 증가 등 사회적인 그늘과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1997년 노동당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보수당 정부의 정책은 대부분 그대로 수용되었으나 지나치게 신자유주의적 요소들은 부분적으로 완화되었다.
  
  내년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양극화된 고용시스템을 개혁하는 노동개혁이 주요한 과제로 등장할 것이다. 새 집권세력이 노동개혁에 어떤 처방을 들고 나올 것인가는 집권세력의 청사진뿐만 아니라 노사 주체들의 전략이라는 변수에 의해서도 달라질 수 있다. 누가 집권하든 우리의 노동개혁 처방은 영국과 유럽의 사회모델 국가들의 중간쯤 될 것이지만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는 집권세력의 철학만큼이나 노사주체들의 전략적 선택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배규식/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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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와 북한, 다른 시선이 꿈틀대다

 

 

누드와 북한, 다른 시선이 꿈틀대다


 

 
[한겨레] 패션사진가가 찍은 누드, 전직 기자가 찍은 북한 등 경계와 거리를 허문 사진전들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11월 미술동네의 한쪽에서 사진가들이 꿈틀거린다. 세상을 늘 배회하면서 오직 타자로서 이미지를 건드려야 하는 숙명을 생각하는 그들이 자기 존재의 비애를 한껏 사진으로 풀어낸 수확물들을 내보였다. 발레리나의 누드를 찍어 논란을 빚었던 패션사진가의 몸 사진은 순수와 통속의 경계 허물기인가. 거울 같은 앵글에 실체로 찍어낸 북한 집단주의의 진실은 무엇인가. 전시의 덩치나 작품값이 아니라 장르와 미학의 맥락에서 이야깃거리를 던지는 마당들이 지금 차려졌다.

전시 화두는 순수사진 vs 상업사진?

대중적 화제의 중심에 패션사진가이자 청담동 문화의 스타일리스트로 알려진 김용호씨가 있다. 국립발레단원 김주원씨 누드사진을 찍은 그는 11월17일 시작한 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02-720-0667)의 사진전 ‘몸’(mom)에서 더욱 밀착된 시선으로 찍은 유명인사, 보통 사람들의 누드 140여 점을 내걸었다. 등장인물은 30여 명에 달한다. 예술가와 연예인, 체육인, 미술인, 오르간 연주자, DJ, 트랜스젠더 등을 찍었다. 사람 몸의 한 부분을 확대해 찍은 ‘신대륙’ 연작, 뒷모습 누드만 골라낸 ‘채집된 몸’ 연작, 악어가죽 여행가방에 몸의 부분 사진을 합성해 넣은 ‘신대륙용 여행가방’ 연작이 나와 있다.

가슴을 살짝 가린 채 수중에 자맥질했던 육체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틀어 보여주는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 선수, 남성적 관능미가 물씬 풍기는 남성 배우 알몸 상체, 쪼그린 패션디자이너가 보여주는 중년의 육체, 앵글에 괴상한 물체처럼 잡힌 신대륙 같은 인간의 엉덩이, 등짝, 오리의 물갈퀴 같은 발레리나의 맨손, 맨발의 예민하게 곧추선 굴곡선 등…. 흑백 누드사진에서 우리 육체 이면의 온갖 슬픔과 격정, 환희들이 오버랩되면서 엉킨다. 포르노나 몸짱 이미지만 강조되는 비뚤어진 육체와 달리 신대륙과 같이 경이롭고 다양한 몸의 세계를 보여주겠다면서 김씨는 말했다. “자연 속에 순환하는 육체를 보여주고 싶다. 에로틱한 상상은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른 것일 뿐이다.”

그런데 전시의 화두는 기실 좀 다른 지점에 걸치고 있는 듯하다. 인기 명사들의 누드가 에로틱한지를 따지기보다도 이른바 순수사진과 흔히 ‘꾼’으로 낮춰 부르기도 하는 상업사진과의 경계를 허물어냈는지가 사실 전시의 성패를 가르는 열쇠로 비친다. 작품들은 기존 사진 거장들의 몸 사진 유형을 조합하거나 증폭시킨 느낌으로 와닿는 것이 많다. 몸을 낯선 사물이나 자연으로 응시한 에드워드 웨스턴, 디자인 미학으로 육체를 조망한 만 레이, 육체의 선과 질감을 영기처럼 부각시킨 호소에 에이코 등의 시선과 구도가 그의 작업에 유려하게 녹아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상업사진가의 강점은 고객의 주문에 맞춰주는, 단순명쾌한 전달력, 호소력이다. 경계가 부질없다면서 굳이 예술사진의 구도를 뒤쫓는 상업사진가들의 이분법적 구태들을 김씨가 얼마나 극복해 보여줄까. 2004년 이혜영 누드 모바일 화보를 찍기도 했고, 패션사진에 관한 한 일류로 평가받는 그가 경계 허물기의 공력을 얼마나 발휘해낼까. 성기의 털을 당당히 드러내고 사지를 쩍 벌리는 모델 누드를 찍으면서 ‘뻔뻔스럽고 세련된 포르노 작가’라고 자처했던 패션사진 거장 헬무트 뉴튼의 경지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를 되짚어보는 것도 감상의 재미가 된다. 누드 파문 주역이었던 김주원씨의 또 다른 전신 누드, 유방 절제 수술을 한 여성 가슴 등을 담은 10여 점은 당사자들의 요청으로 전시에서 빠졌다. 내년 1월27일까지 전시한다.

아리랑의 일사분란함 속 다른 표정들

분단이 남한의 일상과 사회에 남긴 생채기에 천착해온 사진기자 출신의 노순택씨는 올해 국내 사진계에서 괄목할 만한 평가를 받은 작가 중 하나다. 2005년 북한을 방문했을 당시 평양의 일상과 <아리랑> 집체 공연을 찍은 사진들로 사진집 <레드 하우스>(청어람미디어)를 발간했다. 또 12월2일까지 경기도 파주 출판도시 내 열화당 사옥의 로터스 갤러리(031-955-7000)에서 자신의 근작들을 정리하는 작은 개인전을 열고 있다. 2005년 <분단의 향기>라는 사진집을 낸 그는 분단, 그리고 50여 년 전의 전쟁이 남한에 남긴 생채기를 매향리, 대추리 등의 미군기지 반대투쟁 현장에서 신문사진 같은 구도로 찍어왔다. 반면 사진찍기가 제한된 북한에서는 2000년과 2005년 방문 당시 집요한 관음적 시선으로 집단 공연 장면을 찍었다.

출품작들은 그만의 북한 바라보기 방식이 깃든 두 번째 방문 당시의 사진들이 중심이다. 독특한 연속 문양 같은 노씨의 <아리랑> 사진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보여주는 곳에서 작가가 원하는 것을 보려는 욕망이 부딪힌 산물이다. 그 결과 나온 역작이 매스게임이나 집체 움직임을 보여주는 <아리랑> 공연의 세부 모습들이다. 총검술하는 군인이나 전통 군무를 추는 소녀들이나 자세히 보면 하나같이 동작이 다르고 표정도 다르다. 일사불란한 군악대의 연주 장면도 노씨의 미세한 앵글에서는 카오스적인 춤처럼 보인다. 북한의 집단주의 질서 사이사이를 오가는 현지 사람들의 모습은 그들이 결코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까지도 보여준다. 현장 고발 혹은 풍자 스타일의 사진을 찍던 그는 2005년의 북한 작업 이후 진일보한 작가적 시선을 보여주었다. 남북 양 체제에 객관적 거리를 두고, 북한 집단주의는 아름다운 붕어빵 무늬 같은 <아리랑> 공연의 이미지로 실체화시켰다. 남한 극우단체의 드라큘라 같은 김정일 초상 사진과, 북한에만 가면 열렬 사진사로 변신하는 남한 방문객들의 디카 행태를 찍은 사진은 북한과 남한이 서로의 거울임을 드러낸다. 그와 2인전을 했던 사진가 주명덕씨는 “그의 성취는 북한 기행 사진에만 제한된 것이며, 다른 유형의 사진에서도 앵글 자체로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노씨는 내년 2~4월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유명 미술관인 쿤스트페어라인에서 파격적인 회고전 형식의 초대전을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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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리트 가든 단풍이 보고 싶어 눈물이 나요&quot;

 

 

시크리트 가든 단풍이 보고 싶어 눈물이 나요"
늦가을 단풍에 불타오르는 창덕궁과 비원
최오균 (challaok)
 
 
  
▲ 창덕궁 후원 애련지의 불타는 단풍 창덕궁 후원의 단풍은 그 어느 곳의 단풍보다도 곱고 아름답다
ⓒ 최오균
창덕궁의 단풍

 

돈화문과 삿갓 은행나무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아도 우리나라 가을은 너무나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란 물이 뚝 떨어질 것만 같은 하늘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단풍! 해마다 보는 가을풍경이지만, 이번 가을은 우리나라와 계절이 정 반대인 호주의 최남단 태즈마니아 여행에서 돌아와서인지, 인천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사방에 활활 타 오르는 울긋불긋한 단풍에 취해 정신이 아찔할 정도입니다. 남극권에 있는 태즈마니아는 지금 봄이 한창인지라 꽃들이 천지를 이루고 있는 데 반해, 서울의 거리는 활활 타오르는 마지막 늦가을 단풍으로 뒤덮여 별천지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단풍의 진수를 더 느껴보기 위해 어디 멀리 갈 것도 없이 곧 바로 창덕궁 후원을 찾았습니다. 창덕궁 후원은 비원(秘苑-Secret Garden)이라 불려온 곳으로, 문화재청이 선정한 '단풍 아름다운 유적지 7곳' 중에서 최고로 꼽는 고궁입니다. 돈화문으로 가까이 갈수록 샛노란 은행잎이 금화처럼 거리에 뚝뚝 떨어지며 휘날리고 있습니다. 찻집에 걸려 있는 붉은 고추와 강냉이도 예사롭지 않게 보입니다.

 
  
▲ 돈화문 매표소 앞의 은행나무 마치 노란 삿갓을 뒤집어 쓰고 있어 궐 밖을 주유하는 김삿갓을 연상케 한다.
ⓒ 최오균
은행나무 단풍

 

돈화문에서부터 창덕궁은 한국 최고 고궁답게 사람을 압도하고 맙니다. 고풍스런 담장 너머로 붉은 단풍이 활활 타오르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큰 덕은 백성들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중용의 돈화(敦化)사상을 지니고 있는 돈화문. 그 돈화문 매표소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는 마치 삿갓을 뒤집어 쓴 것처럼 샛노란 은행잎을 덮어 쓴 채 궁궐 밖에 표표히 서 있습니다. 이 은행나무를 볼 때마다 궐 밖에서 주유하는 방랑시인 김삿갓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카페에는 주막의 막걸리 대신 커피향이 물씬 풍겨나고 있습니다.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에 이르니 새빨간 단풍나무와 노란 단풍나무 두 그루가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진선문을 가리고 있습니다. 금천교는 돌다리 아래 비단 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물은 흐르지 않고 대신 비단보다 더 고운 단풍들이 금천교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멀리 인정전과 선정전을 비단처럼 감고 있는 단풍 숲이 기와지붕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지붕인 선정전의 짙푸른 청기와가 단풍과 어울려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편전에서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중앙에 앉아 가을 단풍을 바라보며 국사를 논의하던 임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용마루가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한다 하여 설치하지 않았다는 대조전 지붕도 결국 불에 타 버려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다 지었다는데, 그 지붕 위에도 단풍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 금천교를 장식하고 있는 단풍나무 노랗고 빨간 두 그루의 단풍나무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 최오균
금천교의 단풍

 

정조의 개혁의지와 한이 서려 있는 부용지에는 낙엽만 휘날리고...


창덕궁 단풍은 후원에 들어서자 그 진가를 더욱 발휘하고 있습니다. 후원으로 통하는 길에 들어서니 붉은 단풍이 기염을 토하며 담장 위에서 붉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얼이 빠진 듯 타오르는 단풍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뒤돌아보면 마치 불길이 하늘에서 내려와 모든 궁궐을 집어 삼킬 듯한 기세로 단풍의 물결이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때마침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단풍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부채질 하고 있습니다.


안내원의 성화에 못 이겨 겨우 발길을 돌려 고개를 넘어서니 그곳엔 또 다른 별천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만치 너른 연못과 연못 주변을 감싸고 있는 고풍스런 전각들이 울긋불긋한 단풍에 휩싸여 눈 안 깊숙이 밀려듭니다.


'하늘은 둥글고 네모나다'는 동양의 전통적 우주관에 의해 조성된 '부용지(芙蓉池)'가 정사각형 형태로 각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각형의 연못은 '땅'을 의미하며, 가운데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맞은편의 부용정은 두 다리를 연못에 담그고 사방으로 돌출된 지붕이 열십자형으로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단풍의 불길이 부용지의 물에 겁을 먹은 듯 고요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부용지와 규장각 '하늘은 둥글고 네모나다'는 우주관을 담은 부용지. 주합루의 규장각에는 정조의 개혁의지가 담겨있다.
ⓒ 최오균
부용지의 단풍

 

부용지 건너편에는 정조 즉위(1776)에 지어진 주합루(宙合樓)가 단풍에 휩싸인 채 고즈넉이 어수문(魚水門) 위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수문은 임금을 물水에, 신하들을 물고기魚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해서 담고 있다고 합니다. 반듯하게 새겨진 '宙合樓'란 편액은 정조가 친필로 새긴 것인데, 그 건물 1층은 국내외 도서를 소장한 왕립도서관 격인 규장각(奎章閣)이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이곳에서 젊은 인재들과 함께 글을 읽고 정리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산실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정조는 이곳 규장각을 도서실에서 연구소로, 연구소에서 왕의 비서실과 정책개발실로 확장하여 부친인 사도세자를 모함하여 능멸하고 권력투쟁만을 일삼는 무리 배들을 제거하여 나라의 발전을 바로잡는 개혁의 불길을 당기고자 했습니다. 정조는 이곳에서 정약용, 이승훈 같은 깬 사고를 가진 젊은 미래학자들을 불러 모아 인재를 키우며 썩어빠진 정치의 늪을 새로운 연못으로 바꾸는 개혁의 불을 당기고자 했습니다.

 

  
▲ 애련지에 타오르는 단풍 애련지에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드리워진 단풍
ⓒ 최오균
애련지의 단풍

2007년 가을, 때마침 대한민국은 정조의 아이콘이 부용지에 붉게 타오르는 단풍처럼 활활 타오르며 되살아나고 있는 듯합니다. 마치 정조가 부활을 하듯 방송과 책들은 '이산 정조대왕 신드롬'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MBC의 사극 <이산>이 절찬리에 상영 중에 있고, 이상각의 <이산 정조대왕>은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라 있습니다.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우리의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역사학자 이덕일은 비운의 임금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정약용이나 이승훈 같은 반듯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을 정승이나 판서에 기용하여 개혁을 끝까지 몰고 나갔을 것이고, 그랬다면 조선의 운명, 아니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크게 바뀌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노론의 도도한 세력에 밀려 수차례 암살을 모면하다가 마침내 정조는 갑자기 개혁의 정점에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을 두고 혹자는 독살이라고 하고, 혹자는 화병이라고도 말합니다. 어쨌든 정조는 개혁을 완수하지 못하고 한을 품은 채 부용지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사라져 가고 맙니다. 부용지에는 그런 정조의 개혁 불길이 아직도 살아 있는 듯 붉은 단풍이 수채화처럼 일렁거리고 있습니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애련지의 단풍


인재등용을 위해 과거를 실시했다는 영화당(暎花堂) 앞 매점에서 물을 한 병 사 마른 목을 축이며 낙엽 쌓인 길을 걸어갑니다. 담장 너머에는 창경원 단풍이 화려하게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애련지에 다가서니 통 돌을 깎아 세운 불로문(不老門)이 불타는 단풍 사이에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어떤 궁궐이든지 간에 궁궐은 문으로 시작되어서 문으로 끝이 납니다. 임금의 무병장수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는 불로문 사이로 낙엽이 불타고 있습니다.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연꽃을 사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 숙종은 '애련정기'에서 진흙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을 사랑하여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고 짓고 이곳을 수시로 산책하였다고 합니다. 애련지(愛蓮池)에는 붉은 단풍으로 둘러싸인 애련정의 그림자를 수채화처럼 담고 있습니다. 아, 자연이 그린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여!

 

  
▲ 꽃비처럼 휘날리는 단풍 가을 바람에 낙엽이 꽃비처럼 휘날리며 떨어지고 있다.
ⓒ 최오균
추풍낙엽

 

고궁의 청소원들이 애련지에 담긴 낙엽들을 긴 그물로 열심히 건져내지만 눈꽃처럼 떨어지는 낙엽을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대로 두어도 되련만 누구의 지시를 받고 저렇게 하릴없이 낙엽을 건져내고 있는지. 애련지 주변에 서 있는 단풍들은 붉다 못해 마치 고로 속에서 벌겋게 달아오르는 쇳물처럼 붉게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단풍의 색깔이 너무 붉어서 잠시 쳐다보는데도 금방 눈이 시려옵니다. 어쩌면 저렇게 빨갛게 달아오를 수 있는지. 이는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반도의 독특한 기후 탓이 아닐까요?


"가을이 오면, 한국의 시크리트 가든과 설악산의 단풍이 보고 싶어 눈물이 나요!"

 

  
▲ 관람정에 타오르는 단풍 배를 띄워 구경을 한다는 관람정에는 더욱 아름다운 단풍이 드리워져 있다.
ⓒ 최오균
관람정의 단풍

 

몇 해 전 미얀마를 여행 했을 때에 만난 '삐쇼'라는 미얀마 청년의 말이 생각이 납니다. 그는 한국에서 7년 동안 일을 했던 미얀마 근로자인데 해마다 가을이 오면 한국의 비원과 설악산의 단풍이 그리워 눈물이 다 날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기들 나라에서는 도저히 그런 단풍은 볼 수 없는 한국의 단풍이 그리워 안달이 날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눈물이 다 날 지경에 이르렀을까!


그런 애련지에 소슬한 바람이 불어 닥치자 낙엽은 마치 붉은 눈처럼 우수수 떨어집니다. 추풍낙엽! 그대로입니다. 쌓이고 쌓인 낙엽으로 연경당 앞의 연못은 마치 낙엽이 뒹구는 펀펀한 뜰처럼 보입니다. 바람에 빙글빙글 돌아가며 떨어지는 낙엽에 가리어 연경당 건물이 마치 신기루처럼 아른거립니다. 아, 꽃비처럼 떨어지는 낙엽이란...

 

  
▲ 옥류동으로 내려가는 오솔길 창덕궁 후원의 가장 깊 숙한 옥류동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낙엽이 수북이 이 길을 걷는자는 쌓여있어 누구나 시인이 되고 만다.
ⓒ 최오균
옥류동 오솔길

 

점점 더 은밀해지는 비밀의 정원, 관람지에 배를 띄우고...

 

옥류천으로 가기 위해 애련지를 벗어나 몇 걸음을 숲 속을 향해 걸어가니 노란 배추 속 같은 단풍이 선연하게 나타납니다. 옥류천으로 가는 관람지(觀纜池) 부근에는 점점 더 은밀한 비밀의 정원 분위기가 극에 달한 듯한 느낌표가 그려집니다.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있는 관람정(觀纜亭) 위에는 붉은 단풍나무 가지가 물결에 출렁거리듯 드리워져 있습니다. 관람지는 연못에 닻줄 즉 배를 띄워 구경을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참으로 옛 조상들의 상상력이 기발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람정 위에 육각으로 되어 있는 존덕정(尊德亭)이라는 잘 생긴 겹 지붕 정자 하나가 보입니다. 존덕정의 기와지붕 골 사이에는 떨어진 낙엽이 수북이 쌓여 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천정에는 청룡과 황룡이 어우러져 있는데, 그 아래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란 정조의 글씨가 새겨 있습니다. '수많은 강을 비추는 달과 같은 임금'이 되고자 했던 정조. 그는 개울(백성)을 골고루 비추는 달이 되고자 했으나, 시대의 아픔을 안은 채 지금은 그 시대의  임금도 백성도 낙엽처럼 사라져 버리고 없습니다.

 

존덕정을 지나 다소 가파른 비탈길에 올라서니 언덕의 정점에 규성이 모였다는 취규정(聚奎亭)이란 정자가 서 있는데, 그곳에도 여지없이 단풍이 불타고 있습니다. 비탈길을 힘겹게 올라와 숨을 고르기에 딱 좋은 장소입니다. 별로 채색을 하지 않는 단아한 정자가 오히려 주변의 단풍과 어울려 자연미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 옥류천의 폭포와 단풍 임금과 신하들이 옥류천 맑은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읊었다는 소요암
ⓒ 최오균
옥류천의 단풍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놓고 시를 읊다!
더욱 비밀스런 옥류천(玉流川)의 단풍


취규정 큰길에서 북쪽으로 좁은 오솔길이 하나 나 있는데, 이 길이 바로 후원의 가장 깊숙한 곳, 옥류천(玉流川)으로 가는 길입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모두가 시인이 된 듯한 착각마저 느끼게 하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밟는 소리가..." 누군가의 입에서 구르몽의 시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시몬, 가자, 나뭇잎이 져버린 숲으로,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누구나 문학소년 소녀가 되어버리는 그런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오솔길입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임금과 선비들도 이 길을 걸으며 그런 감정을 느꼈겠지요.

 

옥류동 골짜기는 비원의 절정을 이루는 비밀한 장소입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안내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행을 앞질러 서둘러 옥류천으로 다가갔습니다. 옥류천에 가까이 다가서니 소요정 앞으로 떨어지는 폭포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듯 들려옵니다.


후원에 웬 폭포소리냐고 하겠지만, 소요암을 깎아 물을 고이게 하고, 마치 경주 포석정처럼 둥그렇게 홈을 파 만들어 옥처럼 맑은 물이 바위 둘레를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들어 놓고, 임금과 신하들이 그 주위에 둘러 앉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고 읊으며 풍류를 즐겼던 곳입니다.

 

  
▲ 청의정에 불타는 단풍 창덕궁에서 유일한 초가지붕을 하고 있는 청의정에 낙엽이 불타고 있다.
ⓒ 최오균
청의정의 단풍

 

飛流三百尺 폭포는 삼백척인데
遙落九天來 멀리 구천에서 내리네
看是白虹起 보고 있으면 흰 무지개 일고
飜成萬壑雷 골짜기마다 우뢰소리 가득하네

 

소요암에는 '玉流川'이란 인조의 어필이 새겨져 있고, 바로 그 위에 숙종의 오언절구시가 새겨져 있어 당시 이곳이 얼마나 임금과 선비들의 사랑을 받는 운치가 있는 곳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졸졸거리며 마치 처마 끝에서 흘러 떨어지는 물소리일지라도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이곳 후원에서는 삼백척 높이에서 떨어지는 우뢰 같은 폭포소리로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단풍은 소요정을 뒤덮고 옥류천 앞으로 긴 혀를 내밀어 폭포를 넘어 소요암까지 뻗칠 듯 기염을 토하고 있습니다. 옥류천에는 때마침 새들이 푸드득거리며 목욕을 즐기고 있습니다. 새들이 알까봐 간격을 두고 망원렌즈로 몰래 새들의 모습을 담아봅니다. 단풍 사이로 날갯짓을 하며 물속을 유희하는 새들의 모습이 더 없이 평화로워 보입니다. 관람객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자 새들은 곧 숲 속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 창덕궁 단풍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드는 관람객들 능허정으로 가는 길에 수많은 관람객들이 창덕궁 후원의 단풍을 만끽하고 있다.
ⓒ 최오균
창덕궁의 관람객

 

옥류천 주변에는 소요정을 비롯하여 태극정(太極亭), 청의정, 농산정, 취한정 등 5개의 정자가 모여 있어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요암 뒤에는 천년을 족히 넘었을 주목이 속이 텅 빈 채로 살아 있고, 그 위로는 청의정이 후원 안에서는 오직 홀로 독야청청 초가지붕을 머리에 이고 불타는 단풍 속에 묻혀 있습니다.


'청의'는 '맑은 잔물결'이란 뜻인데, 과연 물 논이 청의정을 싸돌고 있고 물 논 가운데 볏짚으로 지붕을 얹어 주변의 자연과 소박하게 어울리는 건축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후원에 한 가닥 바람이 불 때마다 청의정의 초가 지붕 위로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내려 가을 정취를 한껏 더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서 비원의 가을 단풍여행은 끝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비원에는 단풍 말고도 천년을 넘은 느티나무, 750년을 넘은 향나무, 650년을 넘은 다래나무, 400년은 족히 되었을 회화나무, 역시 400년 수령을 넘겼을 뽕나무 등 천연기념물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후원을 제대로 돌아보려면 하루종일도 부족한 시간입니다.


옥류천에서 다시 취규정으로 올라가 청심정을 돌아보고 능허정으로 가는 언덕에 올라서는데 관람객들의 물결이 무수히 떨어지는 낙엽처럼 붐비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 관람객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능허정 능선길에도 여전히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단풍들이 오색으로 숲을 물들이며 들어서 있습니다.

 

  
▲ 천년을 넘은 후원의 느티나무 창덕궁에는 느티나무, 향나무, 다래나무, 뽕나무, 회화나무 등 수백년을 넘은 천연기념물이 수두룩 하다.
ⓒ 최오균
창덕궁의 느티나무

 

한국 고유의 단풍나무들로 곱게 치장된 창덕궁 단풍은 어쩌면 설악산과 내장산 단풍보다도 그 색이 더 아름답게 보일 뿐 아니라, 고풍스런 정원과 연못이 함께 어우러져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멋진 경관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했으면 미얀마의 삐쇼가 가을이 오면 비원의 단풍이 보고 싶어 눈물이 다 날 지경이라고 했는지 짐작케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까이 있음에 귀하고 아름다운 줄을 모르기 십상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창덕궁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탁월함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최근에는 덴마크의 여왕 마르그레테 2세가 이곳을 찾아 그 아름다움에 원더풀을 연발했고, 한국을 찾는 귀빈들은 모두 아름다운 '시크리트 가든'을 찾아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곤 합니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비밀의 정원'은 아름다운 단풍으로 활활 타오르며 그 진가를 더욱 값지게 빛나고 있습니다. 금호문을 통해 창덕궁을 나오면서 이 빛나는 보석이 오염으로 부서져 버리지나 않을지 걱정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비원의 단풍을 뒤돌아보는데,  미얀마의 그 어디선가에서 한국의 단풍이 보고 싶어 눈물이 날 정도로 안달을 하고 있을 삐쇼의 표정이 단풍과 함께 어우러져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가을이 오면 한국의 시크리트 가든 단풍이 보고 싶어 눈물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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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임기 여성의 음주와 흡연, 얼마나 나쁜데...

가임기 여성의 음주와 흡연, 얼마나 나쁜데...
[뉴스 속의 건강 25] 가임기 여성, 산모와 태아 위해 ‘계획 임신’해야
엄두영 (eomdy)
 
 
  
▲ 흡연중인 여성 지난 9월 조사에서 여성 흡연율은 3.7%로 조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임기인 20대의 흡연율이 4.8%로 여성의 평균 흡연율을 넘어서고 있으며 그 비율도 증가추세에 있습니다.
ⓒ 엄두영
흡연

현재 우리 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남녀관계가 많이 평등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번 주 <뉴스 속의 건강>에서는 다소 불편할 수 있지만 평등하지 말아야 할 남녀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임산부의 흡연과 음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금연운동협의회는 지난 9월 우리나라 20세 이상 성인 남성, 여성의 흡연율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성인 남성 흡연은 43.7%, 여성 흡연율은 3.7%로 조사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아직 월등히 남성의 흡연율이 높지만, 성인 남성 흡연율은 전년에 비해 2.2% 감소한 반면, 여성 흡연율은 0.9%로 증가했습니다. 특히 여성쪽에선 가임기인 20대 흡연율이 4.8%로 여성 평균 흡연율을 넘어서고 있어 그 주의를 요하고 있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도 지난 1999년 우리나라 20세 이상 여성의 음주율이 54.9%로 조사됐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우대 간호학과 양승희 교수가 지난 2003년 12월 여대생을 대상으로 음주에 관해 조사한 바에 의하면 92.4%가 술을 마신다고 답해 가임기 여성의 음주율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 가임 여성의 흡연과 음주율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임신시 태아와 산모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소홀합니다.


음주, 태아 기형의 주원인

 

  
▲ 태아알코올증후군 태아알코올증후군으로 태어난 아이의 특징적 얼굴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성장발육 부진, 정신 장애, 안구, 코, 심장, 중추신경계에 이상을 보일 수 있습니다.
ⓒ 미국가정의학회지
태아알코올증후군

'여성이 술을 한 잔 마시는 것은 퍽 좋은 일이다. 두 잔 마시면 그녀는 품위를 떨어뜨린다. 석 잔째는 부도덕하게 되고, 넉 잔째에서는 자멸한다.'


여성의 음주를 바라보고 있는 <탈무드>의 유명한 말입니다.


실제로 '프렌치 패러독스(French Paradox)'라는 표현이 있듯 동맥경화증의 예방을 위해서 소량의 알코올을 매일 섭취하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알코올 농도가 30g 미만이면 심장에 좋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알코올의 양은 일반적으로 하루 3잔 미만의 술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가임기 여성에게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알코올은 태반을 쉽게 통과할 정도로 분자가 작아서 임산부의 혈중 알코올 농도의 약 85% 정도는 태아의 혈액에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반면 태아의 간은 아직 알코올 분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태아에는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리고 태아에게는 '태아알코올증후군(Fetal Alcohol Syndrome)'이라고 불리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줄 수 있습니다.


김종화 성균관의대 삼성서울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태아알코올증후군은 신생아 성장장애, 안면기형과 신경기형 등을 일으키며 신생아 정신지체의 가장 큰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면서 "많은 약들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술의 경우 임신 첫 3개월 기간 동안 태아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임신 초기에는 음주를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한의학적으로 술은 오곡의 정수(精髓)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들에게 약간의 술은 몸에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술은 몸에 열을 내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체력을 빨리 소진시킬 수 있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장준복 경희대 경희한방병원 부인과 교수는 "임산부들은 임신 중 더위를 탄다"면서 "이 상태에서 술을 먹는 것은 몸을 더 덥게 만들고, 체력소모도 촉진 시킨다"고 임산부들에게 술이 해가 된다고 조언합니다.


아직 어느 정도의 술이 태아 기형에 영향을 주게 되는지에 대한 정확한 결과는 없습니다. 그러나 임신 초기 폭음은 단 한번으로도 '태아알코올증후군'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임신 초기 임신한지 모른 채 모임에서 폭음을 할 경우 위험할 수 있으니 가임기 여성들은 음주를 조심하셔야 하겠습니다.


흡연, 태아 기형과는 무관하지만 유산 확률 높여

 

  
▲ 금연포스터 태아에 대한 흡연의 영향을 경고하는 영국의 금연 포스터입니다. 흡연은 태아에게 발육부전, 저체중아, 태아 유산 등을 일으킬 수 있고, 출생 후 '영아 돌연사 증후군'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 영국 국민건강보험(NHS)
흡연

'흡연은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며, 특히 임신부와 청소년의 건강에 해롭습니다.'


이전 담뱃갑에 적혀있던 흡연 경고 문구입니다. 짧은 문구이지만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담배가 '백해무익'하다는 말은 이제 누구에게나 상식입니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금연을 권유하다가 오히려 반 페미니스트로 오해를 받거나 남녀불평등의 주범으로 오해받는 상황에 맞닥뜨리기도 하는 등 여성들에게 금연을 권하는 것이 예전보다 힘들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현재 분위기를 반영하듯 매년 남성 흡연율의 감소와 달리 여성 흡연율은 증가추세입니다.


일반인들의 생각과 달리 임산부들의 흡연은 음주와 달리 태아의 기형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신 임산부들에게는 임신을 유지시키는데 치명적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김종화 교수는 "임신 중의 흡연은 태아의 기형을 유발하지는 않지만, 발육부전과 저체중아를 출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태아 유산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출생 전후의 흡연을 통해 갓 태어난 아이들은 '영아 돌연사 증후군'을 겪을 수 있으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임산부들에게는 흡연이 태반 조기박리(자궁 속 태반이 정상보다 일찍 원래 위치에서 떨어지는 것)나 전치태반(태반이 자궁 입구에 전부 혹은 일부가 놓여 있는 경우), 양막 조기파열의 가능성을 높이고, 조산을 유도하는 등 임신을 유지시키는 것을 힘들게 만드는 주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담배가 임신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주장도 보고되고 있습니다. 태아의 기형 유발과는 무관하고, 임신중독증과 관련 있는 임신중 고혈압을 막는 등 일부 긍정적인 영향이 학계에 거론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종화 교수는 "아직 모든 의사들이 이 부분에 있어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고 잘라 말합니다.


한의학적으로 임신의 상황은 일종의 기(氣)가 울체(鬱滯, 순환하지 않고 머뭄)된 상황입니다. 기가 울체되면 빈혈이 자주 일어나는 등 모체의 혈액이 모자라게 되는데, 이때는 조혈 등을 통해 임산부의 체력을 보강해줘야 합니다.


장준복 교수는 "담배는 매우 조(燥, 마른 상태)하게 만드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더욱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서 건조한 성질의 담배가 피를 말려 여성들의 빈혈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담배의 해악에 대해 말합니다.


음주와 흡연을 한다면... '계획 임신' 생각해야

 

  
▲ 임신중인 여성 생명을 수태하는 것은 부모와 가족 모두에게 축복이지만, 수태된 생명을 태어날 때까지 잘 유지하는 것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 영국의학저널(BMJ)
임신

생명을 수태하는 것은 부모와 가족에게 모두 축복이지만, 수태된 생명을 태어날 때까지 잘 유지하는 것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하지만 임신 중 음주와 흡연은 태아와 산모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모든 가임기 여성들이 절주와 금연을 하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가임기 여성들에게 일괄적으로 절주와 금연을 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를 가질 계획이 있다면 적어도 임신 6개월 전부터 절주와 금연을 시작하는 '계획 임신'을 권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임신 후 담배를 끊겠다는 가임기 여성의 2/3 이상이 담배의 중독성 때문에 임신 중에도 계속 담배를 피운다는 보고가 있고, 임신의 자각증상이 없는 가운데 한 번의 폭음은 태아를 불행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엄두영 기자는 현재 경북 의성군의 작은 보건지소에서 동네 어르신들을 진료하고 있는 공중보건의사입니다. 많은 독자들과 '뉴스 속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2007.11.17 11:23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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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랩된 누드화, 이게 사진이야 그림이야?

오버랩된 누드화, 이게 사진이야 그림이야?
배준성의 '미술관'(The Museum)전을 가다
김형순 (seulsong)
 
 
  
갤러리현대 입구의 홍보게시물. '화가의 옷(The Costume of Painter)' 미술관 연작 인형(doll) 캔버스에 유화 렌티큘러(Lenticular) 194×259cm 2007
ⓒ 김형순
배준성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 보이는 입체적 기법으로 누드사진과 서양명화를 오버랩 시켜 독특한 회화양식을 일구어낸 배준성의 '미술관(The Museum)전'이 지난 7일에 시작되어 오는 25일까지 경복궁 옆 갤러리현대에서 선보인다.

 

작품을 처음 보면 그림인지 사진인지 착오가 생기지만 그림 속에 베르메르, 다비드, 앵그르 등 서양미술사에 널리 알려진 명화들이 나오기에 그림 보는 재미는 두 배가 아니라 몇 배로 증폭된다. 그리고 그 명화들을 모사한 작가의 빼어난 솜씨에 할 말을 잃는다.

 

배준성(40)은 우리에게 친숙하지는 않지만 최근 바젤 아트페어 등 해외미술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프랑스국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알랭 사야그(A. Sayag)는 그를 '고전을 껴안은 동양의 포스트모던예술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작가의 관객 끌어안기

 
  
'화가의 옷(The Costume of Painter)' 미술관 연작 베르메르(Vermeer) 우유 따르는 하녀. 캔버스에 유화 렌티큘러(Lenticular) 194×259cm 2007
ⓒ 김형순
배준성

 

작가는 결과보다 그림의 과정을 중시한다면서 "움직이는 정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정물화는 말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그림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전통을 거부하고 움직이는 정물화에 도전하고 있다.

 

작가는 또한 이미지 홍수시대에 관객들이 동시다발로 보여주는 기제가 강력하기에 이를 받아들이고 여기에 부응하는 매체기법인 '렌티큘러(lenticular)'를 도입한다. 레이어(layer, 층위)를 층층이 사용하기 때문에 보는 각도와 위치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 보인다.

 

게다가 루브르, 메트로폴리탄, 프라도, 에르미타주 박물관 등 유수 미술관에서 명화를 감상하는 관객들이 감동을 하거나 혹은 함축된 뜻이 담긴 그림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표정까지 담고 있어, 이를 보는 우리도 마치 그림 속 주인공이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림감상의 기원은 누드
 
  
'화가의 옷(The Costume of Painter)' 미술관 연작. 앵그르(Ingres)의 붉은 드레스(Red dress) 캔버스에 유화 렌티큘러(Lenticular) 194×259cm 2007. 왼쪽 프레임은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을 나란히 놓은 것임.
ⓒ 김형순
배준성

 

우리가 흔히 화장실 낙서에서 누드를 보듯이 모든 미술 감상의 기원은 여자 몸에 대한 호기심이나 혹은 그런 것을 보려는 은밀한 욕망 즉 관음증에서 시작된 것인지 모른다. 작가는 이러한 관객의 요구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고 있다.

 

이렇게 그의 그림에는 우선 볼거리가 많다. 우아하고 화려한 17~18세기 유럽풍의 드레스를 입은 한국여자가 등장하고 보는 방향에 따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누드로 변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파리 유명디자이너인 라크르의 현란한 의상을 재현해 더욱 눈부시다.

 

작가가 의도하는 본질은 누드가 아니고 명화다. 다만 오랫동안 작업을 하다 보니 작품이 쌓였고 이를 정리하면서 동시에 보여주기 위해 비닐 작업과 렌티큘러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작가역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 방향으로 쏠리는 것이 사실이다.

 

관객에게 들춰보기 유혹

 

  
'화가의 옷(The Costume of Painter)' 미술관 연작 화가 알마-타데마(A. Tadema) 비닐(vinyl)과 사진에 유화 154×194cm 2007. 왼쪽은 비닐을 들춰보면 나온다.
ⓒ 김형순
배준성

 

장 보드리야르는 '유혹'을 21세기의 키워드로 보았다. 이제는 그림도 관객을 유혹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세련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혹의 기술이 필요하다. 작가는 바로 그런 정신을 그림에도 그대로 적용시키고 있다.

 

작가에 그림감상에서 관객의 더 적극적 개입을 유도한다. 그의 작품을 감상할 때 주의할 점은 미술관 매너를 지키느라 점잔을 빼면서 눈으로만 감상하면 안 된다. 투명한 아크릴 비닐 필름이 있는 작품은 들춰봐야 한다. 그 속에 누드화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렇게 관객을 당황하게 하기나 낯설게 하는 것이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더 적극적인 반응을 유발시키거나 미적 호기심을 일으킨다며 이렇게 말한다.

 

"관객은 이러한 불규칙적이며 일정치 않은 대상과의 관계에 분노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의 그간 경험에서 일탈된 느낌은 대상에 대한 감상을 더욱 매력적인 긴장으로 위치 이동시킨다."

 

누드의 예술성 여부

 

  
'화가의 옷(The Costume of Painter)' 미술관 연작 방 거울(House Mirror) 캔버스에 유화 렌티큘러(Lenticular) 150×162cm 2007.
ⓒ 김형순
배준성
 
누드의 예술성과 음란성 여부는 어느 시대나 논쟁거리다. 작가는 이점을 통쾌하게 빠져나갈 위트와 재치를 보여준다. 관객들은 전시장에 들어서면 너무나 세련되고 우아하고 장엄한 격조와 품격과 위엄에 매려 되어 도무지 그런 걸 언급할 틈이 없다.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도 <미의 역사> 서론에서 '옷을 벗은 비너스와 옷을 입은 비너스'로 서양미술사를 요약하기도 했지만 작가는 '옷을 입은 이미지'와 '옷을 벗은 이미지'를 하나의 작품으로 합성하여 독특한 사실주의 회화형식을 생성해냈다.

 

사진과 미술의 경계 흐려지다

 
  
'화가의 옷(The Costume of Painter)' 미술관 연작. 캔버스에 유화 렌티큘러(Lenticular) 194×259cm 2007. 도무지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 김형순
배준성
 
누드사진 위 옷 그린 비닐 필름을 덮는 방식이나 방향에 따라 달라 보이는 렌티큘러 방식은 사진과 미술의 경계가 흐려지는 요즘에 이를 어떻게 통합하여 새로운 기법을 통해 작품에 담을까하는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미술양식을 위협하는 이때에 전통양식이 가지는 고정관념을 깨고 일종의 충격을 주는 극약처방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장르의 경계를 넘어 창조적 결합을 통해 예술적 영역을 넓히고 새로운 회화를 개척하여 보다 대중적으로 접근하려 하고 있다.
 
작가의 창조적 융합
 
  
'화가의 옷(The Costume of Painter)' 미술관 연작 휘슬러 차이나(Whistler China) 캔버스에 유화 렌티큘러(Lenticular) 206×226cm 2007. 동서양 문화의 융화를 시도한 것 같다
ⓒ 김형순
배준성
 
작가는 아카데미즘을 충분히 소화했다고 자부하기에 이런 독자적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신감이 넘쳐 보이고 자기식으로 이를 비틀어 보려는 야심찬 열망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성(聖)과 속(俗), 시간과 공간, 동양과 서양, 현대와 고전이 통합된 총체적 미를 추구한다. 누드사진과 고전회화에다 첨단패션까지 융합시킬 뿐 아니라 키치아트나 팝아트처럼 경쾌하고 가벼우면서 신고전주의처럼 장중하고 엄격함도 대입시킨다.
 
작가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작품에 옷을 입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전시회 제목은 한결같이 '화가의 옷'이다. 이 점에 대해서 "결국 나의 '화가의 옷'은 화가가 그리는 옷이 아니라 옷을 그리다가 발생하게 되는 화가의 별안간의 사건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미술관의 독점적 시각 희화
 
  
'화가의 옷(The Costume of Painter)' 미술관 연작. 빵이 있는 새 정물화(New still life with bread) 캔버스에 유화 렌티큘러(Lenticular) 194×259cm 2007. 미술관에 대한 보다 쉬운 접근에 대한 암시가 풍긴다
ⓒ 김형순
배준성
 
미술평론가 김찬동은 이번 전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미술관을 제도의 정점으로 만든 서양미술의 시각적 관습과 전통에 대한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 셈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는 렌티큘러 작품을 통해 미술관이 가지는 독점적 시각을 교란시키고 명작의 일부를 자신의 작품으로 대체함으로써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고 있다. 그는 이렇게 서구미술이나 그 제도를 희화하는 측면을 은근히 풍긴다.  
 
작가는 시대정신을 반영이라도 하듯 미술관을 과거의 성전과 같은 권위적 공간으로부터 백화점이나 공공미술과 같은 일상적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데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
 

 

작가 배준성은 누구인가?

 

[작가 약력]

  
작품 앞 작가
ⓒ 김형순
배준성

1967 광주 출생

1990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2000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2007 '미술관(The Museum)', 갤러리현대, 서울
2006 '화가의 옷(The Costume of Painter)', 갤러리 터치아트, 헤이리
2006 '화가의 옷', 캔버스 인터내셔널 아트 갤러리, 암스테르담

2006 '화가의 옷, 롯데 에브뉴엘, 서울
2004 '화가의 옷', 백해영갤러리, 서울
2003 "라크르씨, 치마를 올려 봐도 될까요?" 대림미술관, 서울
2002 '화가의 옷', 보자르미술관/투르(Tour), 프랑스
2000 '이름붙이기(Naming)', 갤러리인, 서울
1997 '이름붙이기', 살갤러리, 서울
1996 '독후감', 금호미술관, 서울

 

[수상] 1995 95년 정경자 미술문화재단 창작 지원 신인예술가상

2000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화관광부 주관

 
  
▲ 배준성의 다른 작품 감상하기. 그의 그림 어딘 가엔 렌티큘러가 숨어 있다
ⓒ 갤러리현대
배준성

덧붙이는 글 | 갤러리 현대(www.galleryhyundai.com) / 서울시 종로구 사간동 80 / 734-6111~3
mail@galleryhyundai.com /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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