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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르네상스'에 실패한 정조, 그리고 노무현

 

 

조선 르네상스'에 실패한 정조, 그리고 노무현
[주장] '자기부정'이 초래한 개혁의 좌절... 지금의 역사적 소임은 뭘까
김태희 (classic)
 
 
  
정조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MBC 드라마 <이산>. 정조는 개혁군주로 알려져있지만 그의 자기부정이 결국 개혁 실패를 낳는다.
ⓒ MBC
이산

 

"정조대왕이 좀더 오래 살았다면 …."



호학군주이자 개혁군주인 정조에게 어울리지 않은 정책이 있었다. '천주교 금단'과 '문체반정'이 그것이다.

 

개혁군주 정조, 그러나

 

천주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조는 신하들의 성화에 못 이겨 최소한의 처벌로 대처했다. 그러면서 '정(正)'을 바로 세우면 '사(邪)'는 자연 사라질 것이라 했다. 현실적으로 '척사'의 극렬한 방법을 피하고 부정(扶正, 바름을 부양한다)의 온건하면서 근원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반대의 원칙은 그대로 남는다. 이가환·정약용 등 정조가 재능을 아꼈던 남인계 인물들이 천주교 관련 혐의로 정적들의 공격에 줄곧 시달렸다. 정조가 보호하기 힘겨울 정도였다.


정치적 견제와 균형을 고려한 정조는 당시 주류적 정파였던 노론계 인물들을 겨냥해서는 '문체반정'을 내건다. 자유분방한 글쓰기를 중단하고 순정한 문장을 쓸 것을 요구했다.

 

"근자에 문풍(文風)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연암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를 내 이미 익히 보았거늘 어찌 속이거나 감출 수 있겠느냐?"


김조순은 반성문을 제출했고, 이서구는 문체를 군주가 관여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 박지원은 의연하게 대처했지만, 이덕무 등은 낙심천만이었다.

 

제왕의 자기부정, 부메랑 되어 날아오고

 

사실 천주교 신앙이나 자유분방한 문체를 초래한 서학이나 북학은 정조의 문예부흥정책에 힘입은 것이다. 사상적 개방성을 자양분으로 성장한 실학자들에게 정조는 후견인이었다. 따라서 순정한 학문을 바로 세운다는 취지의 '천주교 금단'과 '문체반정'은 문예부흥정책의 내용과 성과를 부정하는 정조의 '자기모순'이요 '자기부정'이었다.


정조는 온건하게 대처했지만, 그가 죽자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정조와는 정치적 원수 사이였던 정순왕후가 실권을 쥐고 파괴에 나섰다.


"선왕(정조)께서는 매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듣건대, 이른바 사학이 옛날과 다름이 없어서…(중략)…날로 더욱 성해지고 있다고 한다…(중략)…이와 같이 엄금한 후에도 뉘우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마땅히 역률(반역죄)로 다스릴 것이다."


정순왕후의 하교는 살육의 신호탄이었다. 정조의 명분으로 정조의 인물인 이가환·정약용 등을 제거했다. 누차 천주교와 무관함을 밝혔지만 소용없었다. 다른 실학자들도 죽거나 흩어지게 된다.

 

이 때 살육을 자행한 세력은 불과 5년 정도밖에 권력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조가 24년에 걸쳐 인내심을 갖고 차근차근 쌓았던 개혁의 성과를 파괴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5년 후 순조의 장인 김조순에 의해 파괴세력은 물러나지만 개혁시대는 부활되지 않았고 세도정치로 이어진다.


아무런 견제장치 없이 일당독재가 가능했던 세도정치도 따져보면 정조의 책임이 없지 않다. 특권적 정치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정치원칙을 스스로 깨고 장차 왕실의 외척이 될 김조순에게 적극적 정치개입을 부탁했던 것이다.


5년 만에 개혁성과는 파괴되고 부패한 세도정치로


  
노무현 대통령(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이종호
노무현 대통령

이른바 참여정부의 5년 임기가 다 되어간다.

 

정권 초기의 대북송금 특검수용은 평화통일이라는 헌법적 과제를 하위규범인 법률 위반의 문제로 전락시켰다. 열린우리당 창당은 '당내 민주화와 혁신을 통한 정당정치 발전'이라는 당면과제를 회피하는 결과가 되었다. 최근의 한미FTA논쟁은 애국적 시민과 학자들을 크게 분열시켰다.

 

이런 과정을 돌아보면, 노무현 정권 스스로 정체성을 훼손하고 자기 지지기반을 분열시키는 대장정이었다.


민주정부의 집권이 '87년 민주화 쟁취'와 '97년 외환위기'의 결과라는 역사성을 고려하면, 민주주의를 실제화하고 세계화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경제개혁이 정권의 역사적 임무였다.

 

97년 환란은 재벌들이 금융시장 개방에 편승해 단기자금 차입으로 과잉중복투자를 하다가 당한 유동성 위기였다. 정부주도의 관치금융과 재벌특혜에 의한 성장우선의 경제가 더 이상 불가능한 단계에서, 내부개혁 없는 개방이 초래한 혹독한 결과이기도 했다.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규칙과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마련하고, 정부와 공공부문이 공공성 효율성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개혁하는 것은 정권의 역사적 과제가 되었다.


노무현 정권의 자기 정체성과 역사성 부정


언론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 '시장에 맡겨야' '규제완화' 등을 만병통치의 주술처럼 반복하고 있지만, 대기업의 성과가 고용창출과 내수확대로 잘 연결되지 않는 실정이다. 시장실패도 관치폐해도 방치할 수 없는 문제이다. 노무현 정권은 언론과 시종 불화하면서도 정작 언론의 주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경제개혁을 포기한 듯하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그 상징적 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부동산시장의 동향과 약간 소유한 주식이나 펀드의 가격변동에 일희일비하면서 소수 자산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방향으로 동조하고 있다. 그로 인해 내 근로소득의 가치가 떨어지고 공동체 일각이 무너지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재벌기업의 비리와 그 엄청난 경제적 폐해는 외면하고, 당장 경제가 안 좋아질까 걱정한다.

 

부패사슬을 제거하고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여 경제주체 간 신뢰를 높이는 등 경제체제와 체질을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이건만, 단기적 성장론과 인위적 경기부양에 현혹되고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고 생각한다. 부패 위에 세운 건물은 돌연 무너진다는 경험은 잊어버렸다.


5년 전 특권과 반칙을 거부했던 우리들이 어느새 편법이나 탈법으로라도 성공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제 10년 전 환란의 책임을 져야 했던 사람들이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며 화려한 복귀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정조의 급작스런 죽음을 안타까워하여 정조독살설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정조가 스스로의 가치를 부정했던 '자기부정'의 역사적 귀추에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87년 민주화와 97년 외환위기를 통해 집권한 정권이 과연 그 역사적 소임에 충실했는지 의문이거니와, 자신의 역사적 가치를 부정한 과오가 다른 공적마저 잠식하고 역사적 후퇴를 초래할까 걱정스럽다. 기우에 그치기만 바랄 뿐이다.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에 관해서 대부분 깊은 아쉬움을 갖고 있다. 개혁과 문예부흥의 활기찬 시대와 대조적으로, 정조가 죽자(1800년) 부패한 세도정치와 피의 민란으로 얼룩진 시대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조 이후 전개된 역사에 대해서 정조에게 책임은 없는가.

덧붙이는 글 | 위 글은 다산연구소 홈페이지(www.edasan.org) <실학산책>에 실린 글입니다. 
김태희는 다산연구소 기획실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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