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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세 완화해 선진화한다는 '새빨간 거짓말'

종부세 완화해 선진화한다는 '새빨간 거짓말'

[종부세, 대안을 논하자]MB정부ㆍ한나라당의 거짓말들

기사입력 2008-11-25 오전 7:3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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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거짓말을 할까?

그동안 정부와 한나라당은 부동산 세제와 주택공급 정책을 발표할 때마다 거짓말을 해왔다. 왜 그랬을까? 제대로 된 정부라면 올바른 현실인식과 정확한 통계를 바탕으로, 부동산 제도를 선진화킬 방안을 마련해야 해야할텐데, 왜 그럴까?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부동산 세금정책에서 잘 드러난다. 분당을 포함한 강남권에 지역구를 둔 국회의원들은 다음 선거에 당선되려면 종부세를 없애달라는 지역구민들의 소원을 외면할 수 없다. 종합부동산세를 형해화시키려는데 누구보다 앞장서는 공성진·이혜훈·이종구·임태희 의원의 지역구가 어디인지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물론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씨름해야 할 문제는 지역 민원이 아니라 국가적 과제이다). 그리고 자신도 종부세 대상자들이라는 것도 말 못할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부자만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부유한 지역을 지역구로 둔 의원들은 계속 국회의원을 할 수 있겠지만, 타 지역을 지역구로 둔 의원들에겐 불리하다. 바로 거짓말의 필요성이 여기서 생긴다. 사실대로 말하면 정치적으로 불리해지니까 말이다. 그래서 통계도 왜곡시키고 경제학에도 맞지 않는 이상한 논리를 만들어 주장하기도 하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반대하는 자에겐 좌파, 반(反)시장이라는 딱지를 붙이면 된다. 부동산과 관련된 그들의 거짓말은 상당히 많지만, 아래에서는 대표적인 거짓말 5개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① 재산과세 비중이 높으니까 보유세 부담도 과중하다고?

종부세를 후퇴시키려고 하는 정부와 한나라당은, 보유세 논쟁을 하면서 대한민국이 거래세까지 포함한 재산과세가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쟁점이 되는 것은 보유세이다. 재산과세 비중이 높다는 사실을 가지고 보유세 비중이 과중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의도적인 본질 왜곡에 불과하다. 진실은 아래처럼 한국의 총조세(GDP)대비 보유세 비중이 주요 선진국에 비해서 훨씬 낮다.




<총조세(GDP) 대비 보유세 비중(단위 : %, 2005년)>

▲ 주: 한국은 2007년 실징수액 기준
자료: OECD. 2007. "Revenue Statistics"

보유세 비중이 이렇게 낮음에도 재산과세의 비중이 높다는 것은, 한국의 부동산 세제가 '낮은 보유세·높은 거래세'라는 전형적인 후진국형이라는 것이고, 한국은 '낮은 거래세ㆍ높은 보유세'를 향한 개혁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한나라당은 보유세의 일종인 종부세를 후퇴시키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거짓말을 해가며 선진화가 아니라 후진화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② 소득에 비해서 보유세 부담이 과중하다고?

정부와 한나라당, 그리고 일부 시장만능주의 학자들은 우리나라의 보유세 실효세율이 선진국에 비해서 낮은 것은 인정하지만, 소득대비 보유세액 비율이 미국과 일본보다 높다고 주장한다. 보유세 강화가 올바른 방향이라고 하더라도 세금은 소득에서 내기 때문에 담세능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재정부는 "우리의 소득대비 보유세 실효세율이 서울시의 경우 7~8%"인데 반해 "뉴욕 5.5%, 도쿄 5% 등 선진국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라고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했다. 그러나 진실은 다음과 같다.

<미국 주요도시와 소득대비 보유세 부담, %>
▲ 주: 1) 뉴욕의 '8.74'는 1등급 주택만을 고려한 것. 뉴욕의 부동산 보유세율은 등급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데, 대부분의 주거용 주택은 1등급에 속하지만, 한국의 아파트와 같은 주택(3층 이상의 condominiums와 cooperatives)은 2등급에 속하고 2등급의 보유세 실효세율은 5,75%인데, 만약 이를 고려하면 뉴욕의 소득대비 보유세액은 크게 올라감.
2) 국토해양부가 제출한 2007년 서울시 주택통계자료를 활용하여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산출했음. 여기서 보유세는 (재산세+지방교육세+도시계획세)+(종부세+농특세)임

서울시 주택분
보유세 실효세율=∑(구간의 중간값의 보유세액 × 구간의 주택호수)∑(구간의 중간값*× 1.25** × 구간의 주택호수) * ex) 1억~2억 구간의 중간값은 1억 5천 만 원
** 공시가격은 실제가격의 80%를 반영하기 때문임.
자료: 데이터의 출처는 [이용섭 의원·토지+자유 연구소. 2008. 11. <종합부동산세를 둘러싼 거짓과 진실>. p. 5.] 참조.


위 표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의 주요 도시와 서울의 소득대비 보유세액 비율을 비교해보면 서울이 훨씬 낮음을 알 수 있다. 재정부 말대로 서울에서 소득의 7~8%를 보유세로 부담하는 주택의 공시가격은 14~17억, 시장가격으로 하면 17.5~21.3억 원인데, 이는 종부세 대상이 집중되어있는 강남, 송파, 서초에서도 드문 경우에 속한다. 또 이 정도의 주택에서 사는 사람이면 정상 소득 이외에 금융소득과 상가 건물 등의 부동산을 통한 임대소득도 있을텐데, 이것까지 고려하면, 그 비율은 더 내려갈 것이다.

③ 종부세는 가격안정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현행 종부세를 반대하는 한나라당의 국회의원이나 학자들은 보유세를 통해서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단언해왔다. 한나라당 나성린 의원은 지난 7월 28일에 열린 <국회 민생안정대책 특별위원회>에서 "부동산 보유과세를 강화해서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킨 사례가 있는가?", "부동산 가격 안정화는 금융정책으로 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물론 보유세(종부세)만으로 가격을 안정시킬 수는 없다. 대출규제도 필요하다. 하지만 원리적으로 보나, 실제적으로 보나 종부세는 가격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실제로 종부세가 집중적으로 부과된 강남의 2007년과 금년의 주택가격 상승률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강북과 강남의 주택가격 상승률 비교(단위: %)>

▲ 자료: 국민은행 주택매매가격 종합지수
(http://est.kbstar.com/quics?page=A015617&cc=a040514:a040514)

실제로 한번 따져보자. 종부세를 부과하면 보유비용에 부담을 느낀 투기수요는 억제되고, 투기적 목적으로 구입한 주택은 시장으로 출하될 것이다. 물론 과도기적으로 거래가 위축될 수 있으나, 수요가 줄고 공급이 늘면 가격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 제도가 계속 시행된다고 했다면, 다시 말해서 한나라당과 정부가 종부세 형해화를 위한 발언과 입법발의를 하지 않았다면, 부동산 가격의 하향 안정화의 경향성은 더욱 더 뚜렷했을 것이다.

④ 전국의 주택보급률이 100%가 안 된다고?

국토해양부는 전국의 주택보급률이 2007년 99.3%(수도권 94.6%)이므로 2018년 까지 107.1%(수도권 103.3%)로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주택문제의 근본적인 해법은 주택을 대규모로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 수치는 거짓이다. 우리나라의 실질주택보급률은 이미 100%를 훨씬 넘었다. 그동안 주택보급률은 1인 가구가 제외되고, 주택수에서도 다가구 주택, 원룸, 주거용으로 사용되는 오피스텔 등이 제외되어 부정확하다는 문제점이 지적되어 왔고, 서울시 등에서는 이를 고려한 정확한 실질주택보급률 산정 연구를 계속하면서 실질주택보급률을 공개해 왔었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발표한 2006년 서울시의 실질주택보급률은 97.7%로 공식주택보급률 91.3%보다 7%가 높았다. 경기도의 경우 서울시보다도 7∼10%정도 높은 사정을 감안하면, 실질주택보급률 역시 서울시보다 최소 3∼4%는 높은 것이 확실한 바, 이미 100%를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국토해양부는 9·19대책에서 1인 가구를 포함하고, 다가구의 구분거처를 반영한 실질주택보급률을 전국 99.3%, 수도권 94.6%로 발표하고, 주택이 많이 부족하므로 대대적인 택지개발 및 도심공급이 필요하다는 정책을 발표한 것이다. 국토해양부가 위의 통계를 몰랐을까? 그럴리 없다. 그러면 왜 조작했을까? 그 이유는 부동산을 통한 인위적인 경기부양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택을 미국처럼 110% 가까이 공급한다고 해도 주택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주택 보급률이 한국보다 높은 데도 불구하고 투기가 일어나고 거품이 붕괴하여 나라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다. 저렴한 양질의 주택 공급은 적정수준에서 필요하나, 불로소득 환수, 즉 투기수요 억제와 함께 해야 한다.

⑤ 종부세는 내리고 재산세는 그대로 두면서 보유세를 강화하겠다고?

희한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들(나성린, 이혜훈, 임태희, 이한구, 이혜훈, 남경필) 다수는 '보유세 강화·거래세 인하' 원칙은 맞다고 하면서, 그것을 실천할 방법이나 목표치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더 가관인 것은 보유세 강화의 일종인 현행 종부세를 무력화시키고, 재산세는 그대로 둔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다. 지금 여당인 한나라당은 지난 2005년 당시 보유세 실효세율 목표를 0.5%로 제시했고, 현재 주택분만의 보유세 실효세율은 0.25% 정도가 되는데(주요 선진국은 1%가 넘는다.), 한나라당이 제시한 것으로 하면 0.25%보다 더 낮아진다. 한나라당, 정말 부끄럽지 않은가? 책임 있는 정당이라면, 그리고 '보유세 강화·거래세 인하'의 방향이 맍다면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달성할 것인지를 제시해야 한다.

한나라당이 현행 종부세를 후퇴시키면 부동산 조세에서 차지하는 거래세 비중은 더 높아질 것이 자명하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의 부동산 조세구조가 더욱 더 기형적·후진적으로 바뀔 것이다.

한나라당이 말하는 자유와 시장이란?

다른 영역도 그런 모습이 보이지만,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부동산 문제에서만큼은 왜 철저히 후진적인 길로 가려고 할까? 왜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그토록 부동산에 집착하는 걸까? 정부와 한나라당의 물적 토대가 바로 부동산이라고 하면 지나친 단순화일까?

한나라당과 정부의 경제관을 요약하면 이렇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시장경제에서 자유는 부동산 불로소득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시장은 투기가 일어나든 말든 국가는 개입할 필요가 없는 시장을 의미한다.

/남기업 토지+자유연구소 연구위원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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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조갑제·전여옥, 오바마 ‘좌빨’ 맞거든”

 

 

 

조국 “조갑제·전여옥, 오바마 ‘좌빨’ 맞거든”
 
한겨레신문 기고...“2007년 가장 ‘리버럴’한 상원의원으로 선정되기도”
 
입력 :2008-11-17 09:23:00  
 
 
[데일리서프 안재현 기자]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가 조갑제 전 대표와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의 ‘오바마는 좌파 아니다’는 주장에 대해 17일 “자기 입맛대로 규정하고 나섰다”며 “오바마는 2007년 ‘내셔널 저널’ 조사에서 가장 ‘리버럴’한 상원의원으로 선정된 바 있다”고 반박했다.

조 교수는 이날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오바마는 ‘좌빨’ 아닌가?‘란 제목의 기고에서 “보수논객 조갑제씨는 오바마는 ‘좌파’가 아니라 ‘리버럴’이라고 말하였고, 전여옥 의원은 오바마는 ‘리버럴’도 아니며 ‘아메리칸드림의 신봉자’일 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며 “이에 대한 비판을 위해서 약간의 개념정리가 필요하다”고 설명을 시작했다.

☞ [관련기사1] 당혹스런 우파 조갑제 “오바마를 ‘좌파’라 불러선 안돼”
☞ [관련기사2] 전여옥도 절규? “오바마는 한국의 사이비 좌파들과 달라”
☞ [관련기사3] 진중권 “해석이 예술이네..조갑제보다 청와대가 더 웃겨”

그는 “‘자유주의’, 즉 ‘리버럴리즘’(Liberalism)은 시민의 사상과 행동에 대한 국가권력의 부당한 간섭을 거부하는 사상”이라며 “그런데 한국 보수진영이 신봉하는 자유주의는 극우·냉전·반공 이데올로기의 틀에 갇힌 반쪽짜리 자유주의였고, 그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사상과 행동을 처벌하는 사이비 자유주의였다”고 비판했다.

조 교수는 또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전면적 자유를 허용하고 사회·경제적 약자의 꿈을 무시하는 ‘자유 지상주의’, 즉 ‘리버테리어니즘’(Libertarianism)의 현대판 이론이다”며 “이에 비하여 ‘리버럴’(Liberal)은 전통적 자유주의의 가치를 수용함과 동시에 평등과 박애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상과 운동을 뜻한다”고 반박했다.

조 교수는 “이는 개인의 자유만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연대를 중시하는데, 미국 극우진영은 ‘리버럴=부의 재분배론자=빨갱이’라는 주장을 구사해 왔다”고 구분해 설명했다.

조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의 “새로운 미국의 변화를 주창하는 오바마 당선인과 대한민국의 새로운 변화를 제기한 이명박 정부의 비전은 닮은꼴”이란 주장에 대해서도 “오바마의 대선 공약은 이라크 전쟁 반대와 철군, 자본시장과 금융기관에 대한 감시·감독 강화, 부자 중심의 세수 증대와 중산층 이하 세금 삭감, 공적 의료보험 제도의 확대를 통한 국민의 건강권 증진, 공교육 강화·개선, 북핵 해결을 위한 북한과의 직접 대화 등으로 요약된다”며 “그런데 이명박 정부와 보수진영은 지금까지 이런 정책을 ‘좌파’ 정책이라고 핏대를 세우며 비난하지 않았던가”라고 반박했다.

그는 “현재 정부는 이라크 전쟁 계속 참전, 자본과 시장에 대한 정부의 통제 축소, 1%만 득을 보는 종부세 폐지, 사영리 의료보험 도입을 통한 의료복지의 편차 확대, 사교육 열풍에 기름을 끼얹는 국제중 설립 추진, 대북 강경책 고수 등을 위해 매진하고 있다”며 “이런 분명한 차이가 어찌 정치적 수사로 가려질 수 있겠는가”고 직격탄을 날렸다.

조 교수는 이어 “사실 오바마는 2007년 ‘내셔널 저널’ 조사에서 가장 ‘리버럴’한 상원의원으로 선정된 바 있다”며 “사상적으로나 정책적으로 근친성을 갖는 부시 정부와 찰떡궁합을 과시하던 현 정부와 보수진영은 이런 오바마의 당선에 당황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수진영의 대선 후 반응을 꼬집었다.

그는 “‘친미’를 신조로 삼아 왔으니 미국 대통령을 비난할 수는 없고 그 결과 자기모순적 논리를 구사하게 된 것이다”며 “똑같은 정책을 한국 정치인이 주장하면 ‘빨갱이’가 되고, 미국 정치인이 주장하면 ‘아메리칸드림’이 되니 말이다”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정부와 보수진영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오바마의 정치성향을 견강부회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 거대하게 변하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겸허하게 배우고 자신의 정책과 행태를 반성적으로 돌아보는 일이다”고 충고했다.

안재현 기자

☞ 조국 교수 글 보러가기
▶ 우파논객 이상돈도 진중권에 동조 “청와대와 우파들 행태, 정말 웃긴다”
▶ “오바마와 MB,철학 공유하고 있어” 청와대 강변 ‘눈길’
▶ 이명박 대통령 “오바마 당선자와 비전은 닮은 꼴” 자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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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우리 사회 지식논쟁]

 
 
지식사회 ‘사상 논쟁’ 말문을 트다
결산
 
 
한겨레 안수찬 기자
 
 
» 지식사회 ‘사상 논쟁’ 말문을 트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지난해 9월1일부터 매주 한 차례씩 연재했던 ‘우리 시대 지식논쟁’이 이번 호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우리시대 지식논쟁은 지식·담론·시사를 버무려 지상 논쟁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려는 노력이었다. 지금까지 37차례에 걸쳐 여러 지식인들의 글을 실었다. 모두 아홉 가지의 주제를 다뤘다.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1~3회),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4~6회),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나’ (7~9회),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10~16회),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17~21회), ‘코뮨주의 대안 맞나’ (22~25회), ‘이명박 정부의 성격’ (26~28회), ‘고종 어떻게 볼까’ (29~34회),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35~37회) 등이 우리 시대 지식논쟁의 화두로 다뤄졌다. 그 논쟁의 주요 장면을 톺아본다.

 

신자유주의… 민족주의…
9개 주제 37차례 걸쳐 실어

 

 

최첨단 서구 이론으로 지식논쟁의 첫 장을 열었다.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는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주창한 개념인 ‘제국’을 둘러싼 논쟁을 다뤘다. “권력의 중심이 사라지고 경제적·문화적 교환들이 전지구적으로 전개되는” 상태를 일컫는 ‘제국’ 개념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이해하는 첨단의 이론틀이다. 국민국가 중심의 기존 이론틀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이기도 한 이 주장을 놓고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 정성진 경상대 교수,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등이 논쟁을 펼쳤다.


제국 논쟁이 다분히 이론적인 논구의 성격이 강했다면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는 구체적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벌인 논쟁이었다. 반미 노선과 기간산업 국유화로 이름 높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실험이 ‘반신자유주의’ 진영의 대안 모델이 될 수 있을지를 두고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김수행 서울대 교수 등이 논쟁했다. 베네수엘라의 새로운 실험이 한국 사회에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는지가 핵심 쟁점이 됐다.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나’는 조금 깊은 이야기를 끄집어 올렸다. 근대문학이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제기를 바탕에 두고 ‘리얼리즘’의 가치와 근대문학의 현재적 의미에 관한 논란의 자리를 만들었다. 조영일 문학평론가, 최원식 인하대 교수, 권성우 숙명여대 교수 등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가라타니 고진의 이론을 지지 또는 비판했다.

 

우리 시대 지식논쟁이 주목한 가장 큰 화두는 민족주의 문제였다.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는 무려 일곱차례에 걸쳐 논쟁이 진행됐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일제 지배, 분단, 산업화, 민주화 등을 가로지르는 핵심 쟁점이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민족사학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새로운 보수 이념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고, 기존 진보학계 내부에서도 관성적인 민족주의를 성찰하려는 흐름이 생겨났는데, 이후 민족주의 논쟁은 복잡한 결을 가진 예민한 문제가 됐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임지현 한양대 교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권혁범 대전대 교수, 김상봉 전남대 교수 등이 치열한 논전을 펼쳤다. 안병욱 교수 등이 저항적 민족주의로부터 초국적 자본을 견제할 동력을 찾은 반면, 박노자 교수 등은 계급 모순을 호도하는 민족주의의 맹점을 비판했다.

 

지식·담론·시사 버무려
지지-비판 열띤 논쟁 벌여

 

다섯차례에 걸쳐 진행된 ‘고종 어떻게 볼까’ 논쟁도 민족주의 담론과 떼놓을 수 없다. 고종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조선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이 있었는지, 아니면 일제 강점 시기에야 타율적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것인지를 가늠하게 된다. 이는 다시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오늘에 이르러 민주화와 산업화의 흐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 하원호 동국대 교수, 강상규 박사,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김도형 연세대 교수 등이 고종을 평가했다.

마르크스주의의 현대적 재해석을 둘러싼 개념들도 우리 시대 지식논쟁에서 자주 다뤄졌다. 다섯차례에 걸쳐 다룬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는 새로운 저항의 이념을 찾으려는 지식인들의 노력을 드러낸 논쟁이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창한 ‘노마디즘’은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붙박이지 않고 끊임없이 탈주선을 그리며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사유의 여행”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 사유 방식이 과연 저항 또는 변혁의 기획에 어울리는 것인지를 두고 홍윤기 동국대 교수,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김진석 인하대 교수, 이광래 강원대 교수 등이 논쟁했다.

 

논쟁의 핵심은 노마디즘이 한국 사회에 새로운 영감을 던지는 실천적 기획인지, 아니면 급진적 언어를 빌린 상념의 소산인지에 있었다. ‘코뮨주의 대안 맞나’,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등도 비슷한 맥락의 논쟁이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주창으로 국내에서도 하나의 대안 이념으로 자리잡은 ‘코뮨주의’와 전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급진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사유를 각각 논했는데, 그때마다 이들 새로운 개념과 이념이 구체적 현실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를 두고 쟁점이 형성됐다. 고병권 ‘수유+너머’ 대표,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 이현우 박사, 박정수 수유+너머 연구원, 이성민 도서출판 b 기획위원 등이 글을 썼다.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정부 출범 2주 뒤부터 세차례에 걸쳐 연재됐다. 박정희식 개발독재와의 차별성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따라 이명박 정부의 성격 규정이 달라지는데,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 홍성민 동아대 교수, 고세훈 고려대 교수 등이 글을 썼다.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수용하는 논자도 있었고, 구보수와 별 차이가 없다는 이도 있었다. 신보수냐 구보수냐를 넘어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선명히 규정해야 한다는 필자도 있었다. 당시 논쟁은 한국 보수세력의 정치적 기원을 궁구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조희연 교수는 글에서 “극단적 친미주의, 공동체적 삶에 대해 전혀 고려가 없는 천민자본주의적 지향, 탈도덕적 경제주의 등이 한국적 보수의 특성”이라고 썼는데, 그 정의는 촛불집회 길에 컨테이너를 쌓아 올린 이명박 정부의 오늘에 이르러 더욱 새롭다. <한겨레>는 앞으로도 주요 쟁점이 떠오를 때마다 부정기적으로 ‘우리 시대 지식논쟁’과 비슷한 기획을 지면에 실을 계획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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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제국주의는 죽었다, 21세기는 지구제국 시대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한겨레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 ① 왜 제국인가

 

이번주부터 매주 한차례씩 학계의 주요 쟁점을 보는 전문 연구자들의 각기 다른 시각을 엮어 내보낸다.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관심을 가질 만한 시사성 있는 쟁점에 대해 그 논리의 틀거리와 각기 다른 논지의 차이를 세밀히 들여다볼 계획이다. 풍부한 논리 소개로 해당 주제에 대한 독자 이해도를 높이고자 원칙적으로 매주 한 꼭지의 글로 한 면을 채우기로 했다. 시리즈의 첫번째 쟁점은 ‘제국이냐 제국주의냐’이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책 〈제국〉이 지난 2000년 출간된 이후, 이 주제는 여러 나라에서 뜨거운 논란거리가 됐다. 지은이들은 현재의 전지구적 권력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제국’을 내세운다. “경제적 문화적 교환들이 전지구적으로 전개되고 권력의 중심이 사라진” 상태에서 국민국가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제국주의론’은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제국주의론’에 사망 선고를 내린 셈이다. 이들은 전지구적 주권질서의 등장으로 미국 등 어떤 국민국가도 오늘날 제국주의적 기획의 중심을 형성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제국’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오늘의 세계는 미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이며, 이른바 세계화란 미국 제국주의의 세계적 지배의 확장 과정일 뿐”이라고 논박한다. 제국론의 지지자인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의 글에 이어 정성진 경상대 교수가 제국주의론의 견해에서 반론을 펼치며, 이후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가 제3의 시각을 제시한다.

 

지구는 미국을 정점으로 한 ‘제국’
미국은 한·일·유럽 등 거느리고
일개의 국가 넘어 주권질서 구축
탈레반의 한국인 인질도 이 때문

 

왜 미국은 양귀비가 주요 산품일 뿐인 농업국 아프가니스탄에 수천억 달러의 전비를 쏟아붓고 있는가? 미국인도 아닌 한국인이나 독일인이 어째서 탈레반의 인질로 이용될 수 있는가?

‘전지구적 주권질서’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국가주권의 확장메커니즘을 설명했던 ‘제국주의론’은 20세기 세계를 이해하는 데 긴요한 것이었지만 탈식민화가 전개된 20세기 후반부터는 적실성을 잃기 시작했다.




신제국주의론, 종속이론, 세계체제론, 탈식민주의론 등은 그것의 부적실함을 메우고자 만든 이론들이다.

하지만 21세기의 세계는 더는 제국주의라는 개념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물론 제국주의 현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초강대국 미국이 ‘국익’을 위하여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작은 나라들을 침략·점령한 뒤 석유·가스와 같은 자원을 약탈하거나 그 수송로를 매설하고 무기를 비롯한 상품을 팔고 자본을 수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미국은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을 제치고 소련 제국주의와의 냉전에서 승리한 뒤 점점 더 거대한 제국주의 초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는 일면적이다. 그것이 감추는 다른 면들이 있다. 예컨대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한 전비는 점령을 통한 자원 확보나 상품 수출을 통해 볼 수 있는 이익을 훨씬 초과한다. 게다가 전후 ‘국가건설’ 프로젝트에 거대한 자금이 원조로 제공되어야 한다. 저항이 끝나지 않음으로써 전쟁은 항구화하고 전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누적된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제국주의’ 행동은 미국 자신을 연간 7000억 달러의 무역적자와 연간 4000억 달러의 재정적자를 기록하며 평균 매일 20억 달러를 차입해야 하고 또 매일 50억 달러의 이자를 지급해야 하는 ‘빚더미 국가’로 만들어 놓는다. 제국주의론이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제국주의론의 좀더 발전된 판본은 미국을 단일하게 행동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이해하기보다 여러 종속국 혹은 동맹국들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제국’으로 설명한다. 그 종속국의 범위는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독일과 같은 이전의 적대국, 그리고 프랑스·영국과 같은 옛 제국주의 맹주국들도 포함할 만큼 넓다. 동맹국들을 거느리는 데 드는 높은 비용 때문에 미국의 부채는 부단히 증가한다. 그래서 빌 보너의 〈부채의 제국〉, 에마뉘엘 토드의 〈제국의 몰락〉, 차머스 존슨의 〈제국의 슬픔〉 등은 미 제국의 불가피한 몰락을 예언한다. 전지구적 주권질서의 등장을 보지 못하고 국민국가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이상의 이론들은 미국의 군사적 강대화와 경제적 취약화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실천적으로 제국주의론은 민족해방을 아직도 유효한 투쟁전략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미국에 맞섰던 사담 후세인을 군사적으로 지지할 뿐만 아니라 탈레반을 민족해방운동의 전위대로 지지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테러와 납치도 민족해방운동의 부득이한 전술일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도 반제국주의 보루로 보일 것이다. 반면 미 제국론은 미국의 붕괴를 예상하면서 미국을 대체할 대안제국(가령 유럽이나 중국)을 상상하는 데 머무른다. 이러한 정치학이 가져올 퇴행적 결과를 여기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듯 이들이 국가행동에 정치의 초점을 맞추는 한에서 자본에 대항하는 다중들의 국경을 넘는 전지구적 연합운동의 중요성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지구제국 최상층에 미국의 무력
그 아래 G8·나토·WHO 등 복무
기타 국가·엔지오들이 맨밑 민주층
정리해고 등 ‘다중과 전쟁’ 일상화

 

사태를 근본적으로 그리고 총체적으로 이해하자면 오늘날 주권이 일국적 수준을 넘어 전지구적 수준에서 구축되고 있다는 점을 먼저 직시해야 한다.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은 주권의 이러한 전지구적 구성에 대한 커다란 밑그림을 제공한다. 각 층에 각 3단의 작은 계단을 가진 3층 피라미드의 주권 구성체 그림에서 미국은 피라미드적 주권 질서의 최상층, 최상단에서 전지구적 무력사용에 대한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 미국은 강대한 용병국가로서 지구에 산재한 미군들뿐만 아니라 동맹국의 군대들을 지구제국을 지키는 용병으로 결합함(이른바 ‘연합군’)으로써 군사적 헤게모니를 행사한다. 한국의 파병도 이러한 맥락 속에 있다. 미국 대통령은 이런 의미에서 전지구적 용병대의 우두머리다.

 
» 제국주의는 죽었다, 21세기는 지구제국 시대
 
그 아래로 전지구적 통화수단을 통제하면서 국제거래를 조절하는 일단의 국가들의 연합체(주요8국, 파리클럽과 런던클럽, 세계경제포럼 등). 그 아래 단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처럼 군사적 혹은 재정적 수준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국제단체들이 놓인다. 이상이 제국을 ‘통합’하는 군주층이다. 그 아래의 귀족층은 초국적 기업들 및 시장을 조직하는 세력들(세계무역기구, 세계은행 등과 같은 국제경제기구들)과 국지적으로 영토화된 국민국가들(유럽연합 등)에 의해 ‘절합’되어 있다. 이것이 귀족층이다. 그 아래의 민주층에 전지구적 권력배치에서 민중의 이해를 ‘대의’하는 집단들이 놓인다. 유엔을 통해 다중을 대의하는 국민국가들, 미디어들, 그리고 비정부기구(NGO)들 등이 그것이다.

등장하고 있는 전지구적 주권질서에 대한 이 그림은, 수많은 크고 작은 권력체들이 위계질서화된 그물 속에 마디들로 배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그물 주권기계의 기능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다중이야말로 오늘날 지구적 삶의 생산자라는 사실의 인식에 근거해야 한다. 전지구적 주권기계의 기능은 다중의 삶활력을 권력흐름으로 뒤바꾸는 것이다. 민주층의 대의회로를 거친 그 힘들을 귀족층에서 마디마디 절합하면 군주층이 통합하여 단일한 세계명령(보편공리)으로 만든다. 예컨대 신자유주의는 자본 착취의 무제한 자유를, 테러에 대한 영구전쟁은 다중의 삶자유에 대한 무한한 억압을 공리화한다. 이 명령기제를 통해 다중의 생산적 활력은 제국주권의 동력으로 포획된다.

요컨대 제국의 재생산은 다중으로 하여금 창조적으로 살되 공포와 예속 속에서 살게 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정리해고, 비정규직화와 같은 사회적 갈등들은 물론이고 외형상 국가간 전쟁형태를 띠는 갈등조차 실제로는 다중에 대한 제국의 전쟁, 곧 전지구적 내전이다. 21세기의 전쟁들은 자본의 이러한 필요에 따라 각층 각단의 주권마디들의 명시적 혹은 암묵적 지지 아래 일상적·보편적·항구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구제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군대는 지구상 어느 오지라도 파견된다. 그런데 그에 수반되는 전비는 누가 치르는가? 미국은 동맹국들로부터 전비를 거두는데 이것은 해당국 다중들의 세금에서 나온다. 미국 자신의 전비는 부채(국채판매)로 충당하는데 미국의 국채를 구입하는 것은 중국이나 한국 같은 여러 나라이며, 그 주요 자금은 국민들의 연금·기금·보험료·저축 등이다. 결국 전세계의 다중들이 다중 자신을 공격하는 제국의 전쟁에 전비를 치르는 셈이다.

미국의 부채는 미국이 붕괴되지 않는 한에서만, 아니 전쟁 강국으로 남아 있는 한에서만 다른 부채를 통해 상환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결국 전지구적 전쟁질서로 말미암아 미국은 부단히 ‘제국주의적’ 행동을 일삼게 되고 그것은 다중의 건강과 노년, 다시 말해 생존과 안전을 볼모로 잡는다.

이 착종되고 역설적인 상황을 깨뜨릴 대안은 무엇인가? 그 답은 오늘날의 전지구적 주권질서 자체가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다중 자신이 다양한 수준에서 벌이고 있는 투쟁들을 지구적 수준에서 연결함으로써 제국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길이다. 투쟁하는 다중의 지구적 네트워크의 길을 열어감에서 전지구적 주권질서의 실재성을 보지 못하는 제국주의 정치학을 넘어서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과제다.

조정환/다중네트워크센터 공동대표

 

 
» 조정환/다중네트워크센터 공동대표
 
*조정환씨는 1956년에 태어났으며,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현재 ‘자율평론’ 상임만사(만드는 사람), 다중네트워크센터 공동대표, 성공회대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자율주의 운동 등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탈근대적 사회운동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분야와 관련해 <제국기계 비판>(갈무리, 2005) <아우또노미아>(갈무리, 2003) 등의 저서를 펴냈습니다.

 


 

지구제국’은 허상이다, 제국주의 되레 격화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지난 6월 독일 하일리겐담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 ② 왜 제국주의인가

 

 

조정환 성공회대 강사는 지난주 이 지면에서 오늘날 주권은 일국적 수준을 넘어 전지구적 수준에서 구축되고 있다면서 제국주의론은 제국론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국주의론으로는 미국이 아프간 전쟁으로 빚더미에 몰리게 된 역설을 설명할 수 없다면서 미국을 단일하게 행동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이해하기보다 여러 종속국 혹은 동맹국들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제국’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강대한 용병국가로서 지구에 산재한 미군들뿐만 아니라 동맹국 군대들을 지구제국을 지키는 용병으로 결합함(이른바 ‘연합군’)으로써 군사적 헤게모니를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씨는 제국의 시대에 제국주의 시대의 민족해방운동은 더는 유효한 투쟁전략이 아니며, 자본에 대항하는 다중들의 투쟁을 전지구적 수준으로 연결하는 연합운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논지에 대해 이번주 정성진 경상대 교수가 반론을 펼친다. 정 교수는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나 국민주권이 현재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핵심적 구성 주체라고 본다. 다수 자본들 사이의 경쟁이 국민국가를 매개로 지정학적·군사적 경쟁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간을 침공한 것도 유럽과 러시아, 중국 등 경쟁국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자국의 패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다음주에는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가 제3의 시각을 펼칠 예정이다.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하는 논쟁은 언뜻 보기에 매우 현학적인 논쟁인 것처럼 보인다. ‘주의’라는 말이 있거나 없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다르다는 말인가? 하지만 ‘제국’과 ‘제국주의’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한다면 이 논쟁은 오늘날 세계체제의 구조와 성격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우선, ‘제국’(Empire)은 대문자로 시작되는 단수 고유명사인 데 반해, ‘제국주의’는 복수의 보통명사인 제국주의들(imperialisms)을 함축하기도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제국주의론은 그동안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계는 미국·유럽연합·일본·러시아·중국 등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그러한 강대국과 약소국의 지배-예속 관계가 주된 특징이라고 본다. 따라서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모순은 각 국민국가 내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제국주의 국가와 피억압 민족의 첨예한 대립이 중층적 구조를 이룬다.

 

세계화 불구 국민국가·국민주권이
여전히 자본주의체제 핵심주체
전지구적 주권 출현은 불가능
자본들간의 경쟁이 다극화했을 뿐…

 

반면, 네그리와 하트, 조정환 등 제국론자들은 오늘날 세계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같은 제국주의 시대로부터 세계제국, 곧 일종의 세계국가 시대로 이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제국론으로 보면, 사회의 모순 구조는 세계제국 혹은 ‘전지구적 주권’과 세계 ‘다중’의 대립 구도로 단순화된다. 물론 제국론은 이런 단순화된 대립 구도를 이른바 ‘왕정-귀족정-민주정’의 3층 구조의 비유로 보완하려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전체 구도를 규정하는 것은 여전히 이른바 ‘전지구적 주권’이며, 국민국가나 국민주권은 존재한다 하더라도 부차적인 의미밖에 없다.

 

제국론과는 반대로, 제국주의론은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나 국민주권이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핵심적 구성 주체라고 본다. 국민국가와 국민주권의 소멸과 이른바 ‘전지구적 주권’의 출현은 제국론자들의 관념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구상이며,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경쟁의 변증법’ 때문에 현실화할 수 없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경쟁의 변증법’이 뜻하는 바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다수 자본들 간의 경쟁이 자본의 국제화와 경제적 차원의 경쟁에 머무르지 않고, 국민국가(‘자본의 국가화’)를 매개로 지정학적·군사적 경쟁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세계체제의 위계적 구조와 불균등성은 더 강화된다.

 

제국주의론의 이런 기본 인식은 지난 세기에는 물론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세계대전이라는 형태로 폭발했던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격렬한 경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라는 형태로 지속됐고, 1989~91년 옛 소련 블록 붕괴 이후에는 좀더 다극화한 제국주의들 간의 경쟁으로 격화하고 있다. 최근의 사례가 다름 아닌 2001년 9·11을 기화로 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및 점령과 이를 둘러싼 서유럽·러시아·중국 등과의 갈등이다.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했다는 부시의 주장은 명백한 거짓말로 드러났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점령한 진정한 목적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석유가 매장돼 있는 이라크에 미국의 경쟁자인 유럽과 러시아, 중국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또,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 은닉을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운 것도 실은 옛 소련 블록 붕괴 이후 중동 지역과 함께 전략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떠오른 중앙아시아·서아시아 지역에 대해 러시아와 중국 등 경쟁국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미국의 패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조정환은 미국의 이러한 행동을 제국주의적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비용이 석유 확보 등에서 기대했던 경제적 이득을 초과하고, 이 때문에 미국의 재정적자가 악화돼, 미국이 경제적으로 더 취약해지고 있다는 것이 그가 드는 이유이다. 조정환이 보기에 미국 군대는 ‘지구제국을 지키기’ 위해 ‘전세계 다중들의 세금’으로 고용된 ‘전지구적 용병대’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제국주의의 두 논리, 곧 경제적 경쟁의 논리와 지정학적 경쟁의 논리(영국 역사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가 ‘권력의 영토적 논리’라고 부른 것)가 서로 상대적 독자성을 지닌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후자를 전자로 환원한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아프간 침공은
서유럽·러시아·중국과의 갈등 탓
제 3세계 구별 사라진다는 주장도
세계적 불균등·양극화 현상과 모순

 

조정환의 주장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점령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인정하는 마이클 하트 같은 원조 제국론자의 인식과도 상충된다. 하트는 2001년 이후 부시 정권의 제국주의적 행동은 9·11이라는 예기치 못한 사태로 말미암아, 지난 세기 말 이후, 특히 클린턴 정권 때부터 진행된 제국으로의 이행 궤도로부터 일시적으로 일탈한 것이고, 곧 제 궤도로 복귀할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본다.

 

그러나, 9·11 이후 부시 정권에서 노골화된 제국주의적 거대 세계 전략은, 1992년 국방부의 〈국방계획지침〉과 1997년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에서 보듯이, 이미 9·11 이전부터 준비되었으며, 일방주의적 제국주의보다 다자주의적 제국에 가깝다는 이유로 제국론자들이 선호하는 클린턴 정권에 의해 1999년 코소보 전쟁에서 실행에 옮겨졌다. 제국론자들은 이와 같은 엄연한 사실을 외면한다.

 

제국론은 ‘제3세계’라는 개념은 시대착오라고 주장한다. 제국의 시대에는 제1세계/제2세계/제3세계 같은 구별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제3세계는 제1세계 안으로 들어가 그 중심에 게토와 슬럼으로 자리 잡았고, 제1세계는 제3세계에 이전되어 주식시장, 은행, 마천루 같은 형태로 되어, 이제 중심과 주변, 남과 북은 서로 가까이 접근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북 분할이 소멸되고 있다는 제국론의 주장은 수많은 실증 연구들에서 확인되는 세계적 불균등 발전, 세계적 양극화라는 오늘날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제국론은 오늘날 세계에서는 국민국가 자체가 의미를 상실했다고 본다. 그래서, 독립적 국민국가를 수립하거나 유지하려는 민족주의는 아무런 진보적 의의도 없으며, 제국의 경향을 거스르는 역사적 반동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점령에 대항하는 이라크인들과 아프가니스탄인들의 투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 문제가 여전히 현재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투쟁은 제국주의적 억압에 맞서 민족자결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므로 테러와 같은 잘못된 전술과 잘못된 정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투쟁을 제국주의 반대자들은 지지해야 한다.

 

제국주의, 미국 제국주의 또는 줄여 말해 ‘미제’라는 말은 1970년대만 하더라도 ‘빨갱이’의 ‘삐라’에서나 볼 수 있는 불온한 용어였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오늘날은 미국의 지배계급 중 핵심 집단인 네오콘 자신이 스스로 제국주의자임을 내놓고 자랑스럽게 자임한다. 자신이 제국주의라고 ‘커밍아웃’한 21세기 ‘벌거벗은 자본주의’에 다시 제국이라는 포스트모던한 옷을 입혀 주고, 이것이 제국주의에 비해 더 낫다며 변호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제국론은 진보의 담론으로서 자격을 상실한다.

정성진/경상대 교수


 
» 정성진/경상대 교수
 
* 정성진 교수는 1957년생이며 현재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방법에 의거한 현대 한국경제 분석과 대안적 사회주의 경제 모델 구상 및 대안사회운동론 연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마르크스와 한국경제>(책갈피, 2005),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2006) 등이 있습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제국주의는 과거형, 지구제국은 미래형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이진경 교수는 유럽연합의 출현과 남미의 좌파 정권 연대 시도 등을 들며 현 세계 체제는 ‘지구 제국’이 아니라 복수의 국가적 연합이 경쟁·적대하거나 때로는 협조하는 구도라고 설명했다.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③ 제3의 시각 ‘과잉제국주의’

논쟁의 첫 주제에 대해 조정환 성공회대 강사와 정성진 경상대 교수가 지난 두 주 상반된 논지를 펼쳤다. 조 강사는 미국이 농업국 아프간에 수천억 달러의 전비를 쏟아붓고 있는 ‘역설’을 들며 국가주권의 확장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제국주의론으로는 21세기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지구제국’이 국민국가를 넘어 전지구적으로 주권질서를 구축하고 있다고 그는 본다. 반면 정 교수는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간을 침공한 것은 유럽과 러시아, 중국 등 경쟁국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자국 패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진단한다. 또 제국론은 세계적 불균등 발전과 양극화와도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세계화 시대에도 국민국가와 국민주권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주체임을 지적했다.

제3의 논자인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이번 글에서 자본운동의 전지구화가 아직 국민국가의 전지구화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제국론과는 다른 시각이다. 그는 유럽연합이나 남미 좌파 집권 국가들의 연대 시도 등을 들며 현 세계 체제를 복수의 국가적 연합들이 경쟁·적대 혹은 협조하는 구조로 파악한다. 그는 이 체제를 ‘과잉제국주의(overimperialism)’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렀다. 복수의 국가들이 하나의 제국주의적 연합체로 결합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이는 훨씬 확장된 규모의 제국주의 사이의 관계 체계라는 것이다. 지식논쟁의 다음 주제는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 혁명론’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국가 단위의 제국주의 지났지만 미국 정점으로 한 제국은 시기상조
현 단계는 유럽연합·소련·중국과 협조-적대 공존하는 ‘과잉제국주의’

 

 

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국민국가 단위의 제국주의 체제와 다른 새로운 단계로 넘어갔다는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을 인정한다. 자본이 국민국가적 경계를 넘어 생산하고 축적하는 새로운 단계로 이행했다는 주장 역시 인정한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하나의 중심에 의해 통합되고, 주요8개국(G8)을 비롯한 몇몇 선진국들에 의해 구성되는 ‘귀족정’을 통해 경제적으로 관리되는 하나의 단일한 ‘제국’을 형성했다는 말은 인정하기 어렵다. 미국의 경제적 약화가 군사적 지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곤 하지만, 약해진 경제적 능력이 언제까지 군사적 지배력을 떠받쳐줄 것인지도 의문이다. 사회주의와의 대결구도가 일국적 권력을 넘어서는 ‘제국적’ 권력을 촉발했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면 사회주의 붕괴는 그러한 통합요인의 소멸 내지 약화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특히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의 지도력이 별로 먹히지 않았던 것은 미국의 군사적 지배력이 단일한 중심이라는 말을 믿기 어렵게 한다. 반면 국가연합으로서 유럽연합의 출현은 아메리카연합(미국)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 중심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리고 이란이나 베네수엘라에서 달러 아닌 유로로 결제되는 석유시장의 출현 조짐은, 유럽연합의 경제력이 약해진 미국 경제력과 보완 관계가 아니라 대체·경쟁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로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 제국이 전 지구적 권력 네트워크라는 점에서 제국의 권력은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고, 따라서 제국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더더욱 인정하기 어렵다. 반대로 제국의 권력은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디든 그것이 작동하지 않은 구멍들, 외부들이 광범하게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런 외부가 없다면, 네그리가 그토록 강조하는 다중이나 저항적 대중의 형성은 불가능한 게 아닐까? 역으로 그 모든 저항의 지점들, 저항이 발생하는 모든 지점들이 제국적 권력의 외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와 유사한 이유에서, 제국 안에서 국민국가를 저항의 거점으로 삼는 것이 무익할 뿐 아니라 유해하다고 하는 주장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다. 물론 국민적 차원에서 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삼는 것이 혁명의 핵심고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령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의 존재가 제국 체제 안에서 제국과 대결하는 데 별 다른 의미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심지어 중국이나 쿠바 같은 사회주의 국가나, 이란 같은 반미국가의 존재 또한, 제국적 체제 안에서 의미 없는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국주의와 다른 단계의 현 세계체제를 일단 네그리처럼 ‘제국적 체제’라고 본다고 해도, 그 체제는 미국과 그 ‘귀족’들과는 다른, 쉽게 통제되지 않고 종종 적대적이기도 한 국가들, 그리고 러시아나 중국처럼 많은 경우 협조자로 행동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닌 국가들이 공존하는 체제다. 그 국가들은 제국적 국가들과는 다른 특이점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이들 국가는 제국적 체제 안에 포함되는 경우에도 제국의 ‘내부’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혁명을 통해서든 선거를 통해서든 제국적 체제 안에 제국적 국가와 다른 종류의 특이점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제국적 체제를 약화시키거나 교란시키고 그것에 대한 저항의 전선을 형성하는 데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인터넷 발달로 자본은 전지구화
국민국가는 여전히 국민관리 주체
초국민적 정치·경제연합 가능성 커
언젠가는 지구제국 시대 올 수도

확실히 일국적 국가 간의 경쟁이나 적대로 세계체제에서 국가들의 움직임을 설명할 순 없다. 이전의 세계체제가 제국주의적 ‘탈영토화’조차 국민국가적 영토성의 확장이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면, 지금은 국민국가적 영토성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영토화가 국민국가로부터 ‘탈영토화되는’(벗어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내적으로는 자본의 이윤율 저하가 일국 내에서는 극복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 외적으로는 이를 이런저런 식민주의적 방식으로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이러한 한계지점을 넘어서기 위해서 자본은 국민적 영토성을 넘어선 새로운 생산 및 착취 형태를 창안한다. 거기서 일차적인 기초가 되었던 것은 컴퓨터와 디지털화, 그리고 인터넷을 비롯한 전지구적 소통수단의 창안이었다. 인터넷과 통신수단의 발전은 대중들의 활동범위는 물론이고 자본의 활동범위를 전지구적 스케일로 확대했다. 하나의 독립적 네트워크로서 존재하는 자본은 이제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탈국민화된 형태로 존재한다. 삼성이 한국 자본이고, 도요타는 일본 자본이라는 관념은 이러한 변화의 실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물론 초국적 자본도 국적을 갖는다. 그러나 증식에 유리한 국적을 갖는다. 따라서 자본은 많은 국적을 갖는다. 자본에게는 원래 국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국가의 경우는 이와 나란히 가기 어렵다. 자본은 이윤을 일차적 관리대상으로 하지만, 국민국가는 ‘국민’이란 범위의 ‘인구/주민’을 관리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자본이 탈국민화되는 만큼 노동력의 이동도 커졌지만, 그것은 여전히 국가장치에 의해 절단되고 국적을 이용해 과잉착취된다. 이주자란 국경을 이용해 과잉착취되는 노동자들의 이름이다. 또한 국민의 ‘생존’을 관리해야 하는 책임 역시 국민국가가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항목이다. 예컨대 ‘생존’의 문제를 경제적 발전의 문제로 이해하기에, 경제성장을 위해 자본을 끌어들이는 게 국가로선 주민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고 보아, 일부 주민(가령 농민)의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투자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한다. 곧 여전히 국민국가는 전략적 판단의 주체로 존속하고 있다. 주민의 관리, 주권의 관리 문제는 국민국가의 독자성에 더 강하게 연루되어 있다.

요컨대 국민국가는 자본의 탈국민화와 나란히 탈국민화되지 않으며, 자본의 운동과 리듬을 맞추려 하지만 그것과 함께 움직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자본 운동의 전 지구화가 국민국가의 전 지구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사실 자본 또한 국가적 경계를 이용하여 착취하며, 필요에 따라 국가들을 선택한다. 따라서 국민적 경계로부터 탈영토화된 경제적·정치적 권력-네트워크가 전 지구적 통합체로 나아간다는 것은 성급한 추상적 추론이다. 그렇지만 복수의 국가들 간에 새로운 통합이나 연합, 연결의 필요성이 증대한 것은 분명하다. 곧 초국민적 연합의 정치·경제적 형태가 출현할 가능성은 매우 커졌음이 분명하다. 유럽연합의 출현이 지닌 의미를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성공 가능성은 아주 미약하지만, 남미의 몇몇 좌익적 성향의 국가들에서 제기되고 있는 연대의 제안들 또한 미국과 거리를 둔 국가적 연합의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미국이 중국의 성장에 대해 경계를 높이며 견제하려는 것 역시 자국의 지배로부터 이탈하는 또 하나의 거점의 가능성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복수의 국가적 연합들이 경쟁하기도 하고 적대하기도 하며 때로는 협조하기도 하는 체제. 이를 일단 ‘과잉제국주의(overimperialism)’라고 부르자. 무엇보다, 이질적인 위상을 지닌 복수의 국가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제국주의적 연합체로 응축되어 성립되는 체제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이전보다 훨씬 확장된 스케일의 제국주의 간의 관계체계일 것이고, 제국주의를 넘어선 단계의 제국주의 체제일 것이다.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

 

 


이진경 교수는 1963년생이며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 전반에 대해 다시 사유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구별되는 ‘코뮨주의’란 화두를 들고 공부하고 있으며, 생명의 경제·정치학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미-래의 맑스주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노마디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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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신자유주의 넘어선 21C 사회주의가 뜬다
우리시대 지식 논쟁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① 왜 대안인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실험은 사회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가 ‘우리시대 지식논쟁’의 두 번째 주제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반미노선과 기간산업 국유화, 석유판매 대금의 극빈층 지원 등 차베스의 정책은 신자유주의 지향과 판이하다는 점에서 대안 모델의 한 형태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말 63%의 지지율로 재선된 차베스는 이런 높은 국민적 인기를 기반 삼아, 그가 명명한 ‘21세기 사회주의 혁명’ 정책들을 강도 높게 밀어붙이고 있다.

높은 주목도만큼이나 평가의 진폭도 넓다.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시키고 있다는 적극적인 긍정론에서부터 재분배 정책을 통해 자본주의와 타협하고 있다는 비판론까지 나오고 있다. 그가 연임제한 규정을 없애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점도 의구심을 사는 한 요인이다.

이번 논쟁에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과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김수행 서울대 교수가 참여한다. 김 센터장은 대다수 주민이 참여하는 주민자치위원회가 민중참여 권력의 토대가 되고 있으며 노동자가 참여하는 ‘공동경영제도’의 심화 확산, ‘협동조합적 기업’을 통한 150만개 이상의 일자리 창출 등을 들며 베네수엘라 사회가 ‘실행을 통한 학습’이라는 경로를 통해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21세기 혁명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유럽 모델을 한국 사회 대안으로 검토하던 진보학계에서도 최근 베네수엘라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기 시작했다. 직접 베네수엘라를 찾는 학계 인사들도 자주 눈에 띈다. 베네수엘라의 무엇이 이들의 주목을 받는 것일까.

단적으로 말해서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체제를 생생한 현실 속에서 ‘실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양극화 고통이 10년쯤 될 무렵인 1998년, 56.2% 지지율로 처음 대통령에 오른 우고 차베스는 이듬해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헌법’을 제정하면서 새 세기의 문을 열고 헌법에 근거한 합법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그 후 지금까지, 2002년 4월 반혁명 세력의 쿠데타, 2002년 12월 석 달에 걸친 자본 파업, 2004년 8월 대통령 소환투표로 이어지는 반혁명 세력의 도전을 극복한다. 지난해 12월 63%의 지지율로 다시 재선된 차베스는 주요 기간산업 국유화, 새로운 정당 건설, 국가권력 재편과 헌법 개정 추진을 비롯한 강도 높은 개혁프로그램을 현재 실시하고 있다.

 

 

 

혁명이 일정한 궤도에 오른 2005년, 차베스는 베네수엘라가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지향을 향해 나가야 한다고 처음으로 밝힌다. 20세기 사회주의를 국가사회주의라고 규정하면서 그는, 21세기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재창조하자고 주장했다. 역사의 무덤에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새로운 모습으로 남미에서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실험되고 있는 베네수엘라 혁명이 우리에게 신선하게 다가오면서도, 대안모델로 선뜻 수용되지 못하는 가장 큰 장벽은 차베스가 ‘연임제한 철폐’를 하면서 독재자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차베스는 지난 8월에 헌법조항 총 350조 가운데 33개 주요 조항을 수정하는 개헌안을 공식적으로 국회에 제출했다. 여기에 현재의 연임제한 조항 철폐를 제안한 대목이 분명히 들어 있다. 차베스도 독재자의 길로 들어선 것 아니냐는 의문은 당연히 제시될 수 있다. 그런데 개헌안에는 다음의 조항도 동시에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헌법 70조에서 “민중들이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는 경험, 공직 선출, 국민투표, 민중협의, 대통령을 포함한 중앙선출직 관료의 국민소환, 국민발안, 그리고 공개집회를 통해 민중들의 참여와 주인정신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게” 하는 내용을 추가하자는 차베스의 제안이 그것이다. “주권은 민중에게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자본가들의 반발 맞서 초강수 개혁
빈곤의 늪 지나 4년째 두자릿수 성장
대통령 연임 따른 독재 우려도
직선·소환제 등 민중 참여로 근거 잃어

물론 이를 연임제한 철폐를 무마하기 위한 장식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론이 아닌 베네수엘라의 실제를 보자. 현재 2700만 베네수엘라 국민의 대다수를 포괄하는 2만여 개의 주민자치위원회가 아래로부터 민중참여 권력으로 창설되어 작동되고 있다. 2004년 소환투표가 이미 실행된 사례를 볼 때 대통령소환 역시 한갓 장식물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작동 가능한 대통령 견제수단이다. 유신독재를 가능하게 한 것은 국민투표를 악용해서 유신헌법을 통과시킨 사실 자체가 아니라, 유신헌법에서 또 하나의 국민적 투표라고 할 수 있는 직선제를 폐기하고 체육관 선거로 대치한 데 있다. 베네수엘라 헌법은 대통령 직선은 물론이고 지금의 우리 헌법에도 없는 대통령 국민소환제까지 포함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의 경험은 우리에게 연임제한을 민주주의의 절대 조건으로 각인시키고 있지만 실상 그것은 민주주의의 핵심기제가 아니다. 연임제한 철폐를 문제 삼지 않는 베네수엘라 전문가들이 “프랑스나 오스트레일리아, 독일, 영국 같은 나라들도 제한 없는 재선을 허용하고 있는데 이들 나라도 독재국가인가” 하고 반문하는 것이 변명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도 절실한 것은 국민의 실질적 참여와 정치기제에 대한 국민의 직접적 통제이다. 참여정부 아래에서 민주주의의 유린은 어디서 벌어졌는가. 다수 국민의 참여 과정도 없고, 국민의 의사와도 다르게 강행된 국회의 일방적 대통령 탄핵, 정부의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에서 민주주의는 사실상 유린되었다. 이런 면에서, 지금 베네수엘라는 독재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민주주의 실험이 진행 중이라고 볼 수 있다. 주민자치위원회 실험에서, 아래로부터의 새 정당 건설 실험에서, 기업의 노동자 공동경영 제도에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가 주목할 지점은 이 지점이다.

정치와 함께 베네수엘라 모델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분야는 바로 경제 시스템이다. 2007년 한국 대선도 경제대통령 논쟁이 한창이다. 그러나 절박한 양극화나 비정규직화를 구체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파격적이면서도 현실성 있는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한국 사회 양극화 현상을 능가하는 빈곤과 침체의 경제를 물려받은 이가 차베스였다. 그는 쿠데타와 자본파업이라는 시련을 극복한 2003년 이후, 빈곤층과 실업률을 꾸준히 줄이면서도, 고성장의 중국에 견줄 10% 수준의 경제성장을 4년째 이어오고 있다. 기업 내부도 주목할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노동자 참여하는 경영 확산되고
수년간 일자리 150만개 창출
도그마 아닌 생생한 현실 속 변화
미국식 경제만 좇는 한국에 교훈

 

기업경영에서 노동자가 참여하는 ‘공동경영 제도’가 실험·확산되고 있다. 우리 정부가 3만 개 벤처기업 육성을 고창하는 사이, 비록 첨단 벤처는 아니지만 다양한 생산적 산업분야에서 ‘협동조합적 기업’이 베네수엘라에서 수년 간 18만 개 이상 만들어지고 있다. 150만 개가 넘는 일자리를 창출했음은 물론이다. 자영업을 제외한 우리나라 중소기업이 대략 30만 개인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치다. 더욱이 이번 개헌안에는 하루 법정 노동시간을 8시간에서 6시간으로 줄이는 조처가 포함되어 있다. “정규적이고 생산적인 고용을 늘리고 비공식 무문 경제와 실업률을 줄이는 데 기여”하는 것이 개정 목적이다.

물론 이런 실험이 고전적 사회주의의 국유화라는 잣대로 보면 혼란스러울 수 있다. 베네수엘라 경제제도는 ‘사적 소유를 포함해서 다양한 독립적인 경제단위가 공존하는 일종의 혼합경제 시스템’이다. 과거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실행을 통한 학습’이라는 현실적 경로를 통해서 경제구조 전환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21세기 혁명의 모습을 보게 된다.

차베스 정부가 전혀 미국과의 교역량을 줄이지 않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차베스의 반신자유주의는 실제가 아닌 레토릭(수사) 수준이라고 폄하하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반신자유주의적인 경제개혁을 착실히 수행하면서도 세계경제와의 교류를 폭력적으로 단절시키지 않고 있는 지점은 거꾸로 높게 평가받아야 할 지점이다.

반신자유주의가 실제가 아닌 레토릭으로 그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베네수엘라가 아니라 한국의 정치집단과 진보학계일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아닌 방식으로 실제적인 국민 삶을 한발자국씩 전진시키고 있는 베네수엘라에서 대안은 하나씩 현실이 되고 있다.

 
»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
 
2006년 세계사회포럼에서 차베스는, “우리는 다른 나라 모델을 복사하려는 것이 아니다. 교과서를 따라 모델을 복사하는 것은 20세기 사회주의의 큰 잘못 중에 하나였다. 자주성과 다양성, 모든 공동체와 대중으로부터 나오는 힘을 통해 21세기에 새로운 경로를 여행할 사회주의 배너를 다시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 경제는 미국식 모델을 복사해온 과정이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 역시 미국식 모델에 더욱 가깝게 가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베네수엘라 혁명경험이 진정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다른 나라 모델을 ‘복사’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

 

김병권씨는 ‘새로운사회를 여는 연구원’ 연구센터장은 1964년생이며 대안사회의 주체 형성과 중소기업 역할 재규정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공저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 <베네수엘라, 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다>가 있습니다.

 

 

 

 

사회주의의 탈을 쓴 ‘자본주의 혁명’일 뿐
우리시대 지식 논쟁
 
 
한겨레 강성만 기자
 
 
» 베네수엘라 학생과 반정부 세력들이 지난해 4월 수도 카라카스의 한 도로에 누워 차베스 정부의 치안력 부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평화’라는 단어가 한 시위자의 손바닥에 쓰여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② 왜 대안이 아닌가

지난주 이 지면에서 김병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연구센터장은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 혁명론을 옹호하면서 역사의 무덤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사회주의라는 이념이 새로운 모습으로 남미에서 되살아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대다수 주민이 참여하는 주민자치위원회가 민중참여 권력의 토대가 되고 있으며 노동자가 참여하는 ‘공동경영제도’의 심화 확산, ‘협동조합적 기업’을 통한 150만 개 이상의 일자리 창출 등을 들며 베네수엘라 사회가 ‘실행을 통한 학습’이라는 경로를 통해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21세기 혁명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21세기 사회주의는 없다고 단언했다. 반미와 민중주의 경향이 합쳐진 차베스주의는 마르크시즘의 기본 원칙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국제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반미는 민족해방투쟁의 다른 형태에 불과하며, 차베스 집권 이후 실업과 보건, 빈곤 문제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도 차베스 혁명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오 교수는 주장했다. 때문에 그에게 차베스주의는 “사회주의의 탈을 쓴 주변부 자본주의 국가의 민족 부르주아지 분파의 생존전술일 뿐이다.”

다음 주에는 김수행 서울대 교수가 차베스 혁명의 미래를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는 요지의 제3의 시각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베네수엘라 수년간 물가 치솟고
GNP 증가도 국민 착취 결과
고질적 빈곤·범죄문제도 해결 못해
주변부 자본주의 위기 고스란히

지금 세계자본주의 체제는 인류 문명을 야만의 시대로 이끄는 쇠퇴의 끝으로 향하고 있다. 그 체제는 전세계 프롤레타리아를 처참한 빈곤과 참혹한 전쟁으로 내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수년 동안 밑에서부터 솟아오른 계급투쟁이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 투쟁의 주체는 전통적 의미의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가 공격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연금생활자와 예비 노동자(청년·학생)였다. 2006년 프랑스의 ‘최초고용계약법’ 반대 투쟁이나 브라질과 칠레에서 학생들의 투쟁은 “미래가 없는” 사회, 곧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안한 프롤레타리아의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2007년 5월 말에 베네수엘라에서 대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세계자본주의체제 안에서 주변부 자본주의 사회가 처한 위기를 그대로 드러내주었다. 그들에게 “미래는 없었다.” 그저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이 아니다. 차베스 집권 동안 베네수엘라 사회가 앓고 있는 오랜 병인 실업과 범죄와 보건과 빈곤문제가 조금도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베스 집권 동안 ‘혁명’ 엘리트는 강화되었고, ‘미션’(차베스의 정책 과제)을 통한 공공지출이 늘어났지만, 사회의 빈곤화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아 지난 3년 동안 평균 17%를 기록하고 있다. 최저임금이 올랐지만, 그것은 순전히 식품과 상품과 서비스 가격의 인상 때문이다. 국민총생산도 늘었지만, 그것도 착취를 바탕으로 삼은 것이며 특히 협동체와 ‘미션’으로 그럴듯하게 꾸민 비공식 부문의 고용 때문이다. 2006년에 1700명의 빈곤층 청소년 등이 범죄로 죽었으며 말라리아, 뎅기열 등 보건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희망이 앞으로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새로운 혁명 세대인 그들은 한편으로는 실업과 범죄, 버려진 어린이와 어머니, 빈곤에 대한 반대를,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말, 부도덕, 불관용, 비인간성에 대한 반대를 뚜렷이 밝히고 있다. 이는 사회주의의 탈을 쓴 국가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착취’ 없는 사회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21세기 사회주의”라고 하는 “베네수엘라 혁명”이 지닌 뜻은 무엇인가. 2004년 차베스 정권 사회경제 고문을 지낸 좌파연구자 레보위츠는 자신이 쓴 책 〈지금 건설하자, 21세기 사회주의를〉에서 차베스가 메자로스의 〈자본을 넘어〉에 영향을 받았고 2005년 세계사회포럼 연설에서 사회주의의 새로운 유형으로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를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본주의적 사회주의’가 제국주의, 신자유주의, 자본의 논리를 거부하는 논리적 연속성을 띠고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개념을 공동체, 연대, 사회주의 도덕으로 정리하면서 사회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인간 잠재성의 충만한 발전의 과정인 체 게바라의 마르크스주의라는 것이다.

‘공상적’이고 ‘인본주의적’ 수식어가 붙는다 하더라도, 차베스와 차베스주의를 마르크스주의와 연결하려는 시도는 딱 잘라 비판받아야 한다. ‘21세기 사회주의는 없다.’ 마치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적인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대립물이 “스탈린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인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칙인 국제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혁명”도 차베스가 계승하고자 하는 볼리바르 혁명, 곧 집합생산자에 의한 민주적 의사결정과 미제국주의 반대를 뜻한다면 그것은 사회주의 혁명과 관련 없는 민주혁명, 부르주아 혁명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국제주의의 원칙을 벗어난 어떠한 민족주의 운동도 앞으로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과 양립할 수 없음을 역사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1960년대는 제3세계주의와 민족해방 신화의 전성기였다. 좌파와 자유주의자는 베트남 전쟁을 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베트남 인민의 영웅적 투쟁으로, 체 게바라, 카스트로, 벤 벨라(프랑스에 대항한 알제리 독립전쟁 지도자) 등에 대한 숭배로 나아갔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황금시대’ 자본주의가 위기에 부닥치자, 이러한 신화는 더는 이어지지 않고 빛바랬다. 경쟁하는 민족국가와 제국주의 블록으로 나누어진 부르주아지는 세계전쟁으로 내몰리고 사회적 부의 생산자인 노동계급은 자신의 생활수준을 방어하는 투쟁, 곧 전쟁을 향한 움직임을 막고 공산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향한 투쟁으로 나아간다.

반미·반세계화 결합한 차베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라는
마르크스주의 기본원칙마저 벗어나
민족 부르주아 분파 생존전술일 뿐

세계자본의 제국주의 시대에는 독자적 자본주의도 나타날 수 없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2000년이 지난 뒤에도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환상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두 가지 다른 형태로 이탈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반세계화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주의의 복원을 통한 ‘미제국주의 반대운동’이다. 그런데 반세계화운동은 “자본주의를 오직 하나의 가능한 체제이고 그 개혁이 하나뿐인 대안이다”와 같은 부르주아지의 이념적 선전을 밑바탕으로 삼고 있다. 미제국주의 반대운동은 반미라고 하는 민족주의 정서와 빈곤화되는 농민과 도시빈민과 노동자의 사회 불만을 밑거름으로 삼은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주의 경향이다. 바로 이러한 두 흐름의 결합이 이른바 “차베스주의”이다.

“21세기 사회주의”를 말한 레보위츠도 베네수엘라의 국가발전계획(2001~2007)을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모델로 여기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동아시아(일본·한국)의 발전전략과 시장을 결합한 라틴아메리카식의 신구조주의로 바라보고 있다. 또한 그는 1999년 제정된 헌법에 나온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조항을 보기로 들면서 베네수엘라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추구한다고도 말한다.

 
»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그러나 베네수엘라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주변, 곧 주변부 자본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 나라는 빈민층(비공식부문 노동자)이 인구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고 석유자원 하나에만 의존해 경제를 끌고 나가고 있는 특수한 사회이다. 이 나라의 민족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석유 자본을 밑천으로 삼아 다른 제국주의 국가(미국·영국·중국 등)의 부르주아지와 손을 잡고 있지만, 베네수엘라 인민이 처한 빈곤조차 풀지 못한 무능함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이 주변부 자본주의의 반미 민족주의 세력은 몇몇 좌파 지식인과 혁명가의 도움을 받아 전세계에 베네수엘라를 ‘21세기 혁명의 상징’으로 추어올리면서 “사회주의”의 미래를 말하고 있다. 그 탓에 그들은 또다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투쟁과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잘못 이끌고 있다. 똑똑히 밝히지만, 차베스주의야말로 사회주의의 탈을 쓴 주변부 자본주의 국가의 민족 부르주아지 분파의 생존 전술일 뿐이다.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는 1943년생으로 산업노동학회장, 사회이론학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사회실천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사(특히 유럽)와 세계의 계급투쟁과 혁명전략이 주요 관심 연구 영역입니다. 대표 저서로 <맑스주의, 조직의 정치경제학 그리고 한국사회변혁>(현상과인식, 1993) <사회주의와 노동자정치>(박종철출판사, 2004) 등이 있습니다.

 

21세기 사회주의’ 향한 발걸음 뗐을 뿐
우리시대 지식 논쟁
 
 
한겨레 강성만 기자
 
 
» 베네수엘라의 달동네 주민 한 명이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의 주민자치위원회 투표에 참여하고 있다. 김수행 교수 제공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③ 판단은 아직 이르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정책을 사회주의 대안으로 볼 수 있는지를 놓고 지난 두 주 김병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연구센터장과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가 논쟁을 벌였다.

김병권 연구센터장은 민중참여 권력의 토대라고 할 만한 주민자치위원회와 노동자가 참여하는 공동경영제도의 심화·확산 등을 예로 들며 이 나라 사회가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21세기 혁명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오 교수는 반미와 민중주의 경향이 합쳐진 차베스주의는 마르크시즘의 기본 원칙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국제주의와 무관하다면서 차베스주의는 “사회주의의 탈을 쓴 주변부 자본주의 국가의 민족 부르주아지 분파의 생존전술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이번 주 김수행 서울대 교수는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견해를 보였다. 김 교수는 차베스 정부가 자국의 자본주의 사회를 새로운 사회, 곧 ‘21세기형 사회주의’ 사회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노동자들을 혁명의 주체로 아직 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차베스가 노동조합의 경영참가나 자주관리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그를 지지하는 노동조합단체조차 그의 정책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노동계급을 혁명 주체로 끌어들이고 미국 정부의 간섭을 저지할 국제 연대를 형성할 수 있느냐가 새 사회로의 이행의 관건이라고 김 교수는 봤다.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지식논쟁의 주제는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는가’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 이 나라는 극심한 빈부격차로 악명 높다. 빈민의 다수는 ‘바리오’로 불리는 달동네에 산다. 김수행 교수 제공
 
자본주의서 새로운 사회로 전환 위해
전체인구 60~80% 달하는 “빈민 대변”
전폭 지원 통해 정치·경제 참여시켜
기득권층과의 계급투쟁 예비




차베스 정부는 현재의 베네수엘라 자본주의 사회를 새로운 사회, 곧 ‘21세기형 사회주의’ 사회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소수의 기득권층(국내외의 독점자본, 국내외의 친자본적 정치세력과 각종 언론 매체들, 친자본적 지식인과 중산층, 어용노동조합,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들, 대중을 탄압하는 경찰과 군인 등)의 특권이 사라지고, 개인들이 자기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공동체가 모든 주민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의해 사회가 발전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로 가는 기나긴 이행과정은 기득권층의 권력을 제거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거대한 규모의 계급투쟁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차베스 정부는 이 이행과정에 첫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데, 계급투쟁과정에서 혁명이 왜곡될 수도 있고 좌절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이행과정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이 몇 개 있다.

하나는 ‘참여민주주의’다. 민주행동당(AD)와 기독교민주당(COPEI)이라는 보수 양당이 1958년 푼토 피호(Punto Fijo) 협정을 맺어 베네수엘라를 계속 통치했다. 4년마다 대통령, 국회의원, 주지사, 시장 등을 선거로 뽑지만 빈민은 계속 인구의 60~80%를 차지하고 있었다. 석유산업과 석유수익으로 건설한 국영산업들의 이익을 기득권층이 나누어 먹으면서 빈민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거를 하기만 하면 민주주의다’는 주장의 잘못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이러다가 1989년 2월 민주행동당의 페레스 대통령이 국제통화기금의 긴축정책을 받아들여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버스와 전철 요금을 2배 올린 것에 항의해 빈민들이 봉기했고, 군인들이 달동네 주민들을 무차별 총살함으로써 카라카스에서만 2천 명 이상이 죽는 사건(‘카라카소 Caracazo’)이 발생했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빈민은 정치에 무관심해지지 않을 수 없었고, 투표의 기권률이 60%나 달하면서 ‘구세주’를 기다리는 현상이 두드려지게 되었다.

차베스가 1998년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빈민을 대변하겠다”고 공약한 것은 카라카소에 대해 군인으로서 용서를 비는 것뿐 아니라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빈민을 정치에 참여시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지금 차베스 정부는 빈민들을 위한 교육, 건강, 취업, 문화 프로젝트에 엄청난 예산을 지출하고 있다. 특히 달동네의 주민자치위원회는 자기 동네의 모든 어려운 문제들을 토론하고 해결책을 찾아내어 하나의 프로젝트로 만들어 정부에 제안하면, 정부가 전문가를 보내어 주민자치위원회와 상의한 뒤 프로젝트를 승인하고 필요한 자금을 제공한다. 이처럼 빈민들이 정치와 경제와 문화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자기들의 능력을 놀랄 만큼 향상시키고 있으며 앞으로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물론 차베스의 가장 믿을 만한 지지 세력은 이 빈민들이다.

 
» 부자 동네는 담장 위에 전기철조망까지 설치해 놓고 있다. 김수행 교수 제공
 
다른 하나는 차베스가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베네수엘라에는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자가 없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생각은 2002년 12월~2003년 3월에 일어난 자본파업에서 조금 수정된다. 최대의 국영석유회사(페데베사)의 자본파업에 경영진은 물론이고 1936년에 창설된 어용 노동조합연맹(CTV) 소속의 노동자들도 많이 참가했다. 차베스 이전의 정부가 공약한 민영화를 통해 큰 이익을 얻으려 한 경영진과 노동조합이 오히려 국유화를 강화하는 차베스 정부를 몰아내기 위해 생산중단 등을 단행한 것이다. 공장을 계속 가동시키면서 생산을 유지하는 작업에 일반노동자들과 퇴직노동자들이 크게 공헌했다. 이 자본파업을 계기로 차베스는 공장을 노동조합에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과, 공장을 경영자가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맡기더라도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 다. 이 두 가지 생각에 의거해 차베스는 노동조합의 경영참가나 자주관리를 꺼려하면서 공장 소재지의 공동체가 공장을 관리하는 것을 새로운 헌법개정안(2007년 12월 2일 국민투표 예정)에서 제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파업 계기로 어용노조 불신 커져
경영참가 배제과정서 적대관계 형성
노동계급 혁명 주체로 끌어들이고
미 정부 간섭 저지할 국제연대 맺어야

어용 노동조합연맹(CTV)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중심이고 노동자 이기주의에 빠져 비공식부문(행상이나 소규모의 개인서비스업)의 노동자나 비정규직 등 노동계급 전체나 사회 전체의 이익을 돌보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공장 경영에 이해당사자들(주주 대표, 노동자 대표, 소비자 대표, 공동체 대표 등)이 모두 참가해야 한다고 차베스는 주장해 왔다. 새로운 헌법개정안에 따르면, 주민자치위원회가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 선거위원회, 감사위원회 등과 나란히 하나의 독립권력으로 격상되고 몇 개의 주민자치위원회가 코뮌(Commune)을 형성해 이 코뮌이 지역사회를 총괄하면서 그 지역의 공장들도 관리한다는 것이다. 이 제안은 너무나 획기적인 것이고 구체적인 내용이 잘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지금 무어라 논평할 처지는 못 되지만 ‘노동자에 의한 자주관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노동조합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차베스를 지지하는 노동자들이 모여 2003년 창설한 새로운 노동조합연맹(UNT)의 최대 정파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마르크스가 새로운 사회를 묘사한 것)을 내세우면서 차베스의 정책에 반대하고 있다.

셋째, 미국의 전통적인 세력권인 남아메리카에서 차베스 혁명이 얼마나 오래 버틸 것인가가 매우 우려된다. 차베스 혁명이 새로운 사회로 가는 이행기에서 왜곡되거나 좌절될 수 있는 가능성은 미국의 태도에 크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 정부가 이라크 전쟁으로 정신이 없고, 차베스 정부가 모든 정책을 헌법과 법률에 의해 수립·실시하며, 베네수엘라가 미국의 석유 수입량의 15%를 공급하고, 볼리비아와 에콰도르 및 니카라과에서 차베스와 비슷한 철학을 가진 대통령이 탄생했기 때문에, 미국 정부가 칠레의 아옌데 정부나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게릴라 정부를 타도하듯 쉽게 차베스 정부를 타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미국의 지원을 받는 기득권층이 사회를 계속 지배하면서 차베스의 암살까지 소리 높여 외칠 정도로 계급투쟁의 열기가 치솟고 있다.

 
» 김수행 서울대 교수
 
결론적으로 말해, 차베스 혁명의 진행 방향과 성공 여부는 지금으로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내일은 어떻게 될까”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차베스가 용감하게 ‘21세기형 사회주의’를 목표로 혁명을 개시한 것인데, 지금까지는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빈민을 하나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인간으로 각성시키면서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동참시켰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다. 그러나 앞으로 노동계급을 혁명의 ‘다른 하나의 주체’로 등장시키는 과제와, 미국 정부의 제국주의적 간섭을 저지할 국제 연대를 형성하는 과제가 남아 있는 것 같다. 물론 1999년 2월 차베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석유 1배럴의 가격이 7달러였는데 2007년 9월에는 70달러로 올랐기 때문에, 석유로부터 얻는 정부의 세입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 차베스의 활동 여지를 넓혀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김수행 교수는 1942년생으로 영국 런던대에서 1982년 ‘마르크스의 공황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마르크스 경제학 이론과 자본주의 불황이 주요 관심 영역입니다. <자본론>(비봉출판사)을 완역했으며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와 공황>(서울대 출판부)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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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학의 종언은 맞는가

 

이젠 ‘그들만의 문학’…근대문학은 끝났다
근대문학의 종언은 맞는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이젠 ‘그들만의 문학’…근대문학은 끝났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1. 왜 맞는가
이번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근대문학’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한다. 일본의 비평가이자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1941~)은 2005년 출간된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 b)에서 근대문학 곧 소설이 네이션(국민국가)의 기반이 되었다고 했다. 이전까지 감성적 오락을 위한 단순한 읽을거리였던 소설은 18세기, “감성에 대한 학문인 미학이 등장하면서 지위상승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감성과 감정이 지적·도덕적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으면서 상상력의 중요성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이는 상상력에 기반한 문학이 공감의 공동체 곧 ‘상상의 공동체’인 네이션(국민국가)의 토대가 되었다는 분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가라타니는 영화와 텔레비전·비디오 등 시각매체의 등장으로 근대소설의 특징인 ‘리얼리즘’의 가치가 제거되면서 근대문학의 특별한 의미가 이젠 끝났다고 선언한다.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상징으로 그는 1990년대 자신이 만났던 한국의 문예비평가들이 모두 문학에서 손을 떼었음을 상기시켰다. 가라타니의 이런 해석에 우리 문단 안팎에서 다양한 견해가 쏟아지고 있다. 이번 주 가라타니의 견해를 적극 받아들이는 조영일씨 글에 이어 최원식 인하대 교수가 비판적 견해를, 권성우 숙명여대 교수가 제3의 시각을 보여준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들은 대부분 ‘해결에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부함에의 저항’에 의해 해소된다. 아무리 절실한 문제제기라 할지라도, 정작 그것을 낳은 현실 쪽에서 보면 왠지 조급하고 점잖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위기감’이란 항상 현실을 앞서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은 괜찮다”라는 현실감각은 종종 본질적인 것으로까지 격상되곤 한다. 현실원리란 이처럼 위기의식을 ‘진부한 것’으로 배제하고, 자기보존적인 상식들을 ‘새로운 것’으로 삼아 자가발전하는 현상 유지 시스템을 의미한다.

사실 이는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에도 해당된다. 너무나 많이 인구에 회자된 나머지, 이제 ‘종언’이라는 말만 나와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이가 대다수다. 그러나 그런 ‘질림(물림)’이 그저 ‘진부함에의 저항’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리어 그 테제가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해, 현실원리에 기대어 ‘손님’을 쫓아내는 푸닥거리를 한다고 해서 냉수가 생명수로 바뀔 리는 만무하다는 말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을 비판하기 위해 나선 무당들은 대략 세 부류이다. 1) ‘근대문학’이 쇠퇴하고 있다는 일반론에는 찬성하지만, 그렇다고 ‘문학’이 가진 본래적인 의미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근대문학 이후의 문학’에서 가능성을 찾자는 이들, 2) 한국문학은 제대로 된 근대문학조차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종언’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이들, 3) ‘근대문학의 종언’은 남의 집 이야기이며 한국문학은 오히려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가라타니의 테제가 어떤 새로운 ‘주장’이라기보다는, 자명한 것 뒤에 숨겨져 있는 역사성을 환기시키는 ‘물음’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것은 받아들이거나 거부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로지 논리적·실증적 찬반을 통해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이는 그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또는 지나친 무관심)과 한 쌍을 이루고 있다. 모든 문제(질문)의 진실성은 그 문제 자체보다는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과민(잉여)’반응을 통해 나타난다고 할 때, ‘근대문학의 종언’이 강 건너 불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가라타니는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근대문학 이후에 포스트모던문학이 있다는 말도 아니고, 문학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말도 아니라고 전제한 후, 다만 문학(소설)이 근대에 들어서 부여받은 ‘특별한 중요성과 가치’가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곧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근대문학에 부여된 이와 같은 ‘중요성(가치)’이지 ‘종말론’이나 ‘묵시론’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애써 이를 ‘묵시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믿음(선택)’의 문제로 호도하는 것에 불과하다.

 

상상력 통해 ‘공감 공동체’ 형성한
근대문학의 역할·중요성 사라져
문단-출판계-대학-신문들
문학시스템 붕괴될라 ‘위기’ 눈감아

 

 

그럼 문학에 부여된 ‘중요성(가치)’이란 무엇일까? 가라타니는 그것을 ‘미학(감성론)’의 등장이나 ‘근대국가’의 성립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곧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어온 감정이 지적·도덕적 능력(이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그것들을 연결시키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라는 사고가 생겨나는데(이전까지 ‘상상력’은 ‘공상’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만 갖고 있었다), 그러자 ‘공상적인 것=오락적인 것’으로만 취급받던 소설이 ‘공감’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하나로 만들어 ‘네이션’(국민)을 형성케 하는 매체로서 격상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런 중요성이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가라타니의 지적처럼 이상한(특수한) 쪽은 오히려 근대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반적인 것이 저발전의 증거로서 거부되고, 특수한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옹호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도착이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문단-출판계-대학-신문’이라는 문학시스템이 그와 같은 관념을 꾸준히 생산·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문학이 그와 같은 특별한 중요성을 상실했다는 것은 그에 기반을 두고 있는 문학시스템 역시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그 시스템에 의지하여 사는 이들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정이 이렇게 절박한데도 한 원로작가는 일본문학은 끝났을지 모르지만 한국문학은 그렇지 않다며 도리어 ‘태평천하’(또는 부흥기)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한국출판계는 일본문학의 공습으로 초토화되고 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현해탄을 건너온 유령들(이미 ‘종언’을 맞이한 문학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형국이다. 따라서 굿이라도 한판 벌여 ‘문학쿼터제’ 정도는 얻어내야 하는지도 모른다(이제 창작지원금 정도로는 약발이 서질 않는다). 그러나 그 전에 ‘손님’들이 ‘주인’인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그럼 그 차이라는 게 양국의 문학인을 호명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창과 출신으로 넘쳐나는 한국문단
작가적 경험보다 제도적 문학성에 획일화
가라타니 ‘종언’ 증거와도 맞아떨어져
“오히려 중흥기” 주장은 안일한 태도

 

한국 소설가로는 박민규, 정이현, 천운영, 편혜영, 전성태, 하성란, 조경란, 강영숙, 윤성희, 이기호, 백가흠, 김종광, 백민석, 이신조, 김애란 등을 들 수 있겠고, 일본소설가로는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가네시로 가즈키, 오쿠다 히데오, 에쿠니 가오리, 미야베 미유키, 와타야 리사, 유미리, 가네하라 히토미, 야마다 에이미, 이시다 이라, 쓰지 히토나리, 다구치 란디, 교고쿠 나쓰히코, 히라노 게이치로, 기리노 나쓰오, 온다 리쿠 등을 입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 그룹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한국 쪽 구성원이 모두 문예창작과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반해, 일본 쪽은 단 한 명의 문예창작과 출신도 없다는 것이다. 실로 기묘한 결과다. 왜냐하면 가라타니가 ‘종언’의 증거로 든 예가 바로 일본에서 증가하고 있는 ‘문예창작과’이기 때문이다. 이제 문학이 작가적 경험이나 통찰이 아닌 창작코스에서 생산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가라타니의 우려와 달리 일본에서 문창과 출신이 성공한 케이스는 거의 없다. 문창과는커녕 국문과 출신조차도 매우 적으며, 하나같이 매우 다양한 경험의 소유자들이다. 따라서 가라타니의 지적은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정확히 한국문학을 겨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문학의 이런 특징은 비단 문학(창작)만의 일이 아니다. 비평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해서 거의 대부분이 국문과 출신으로 구성되고 있다. 그럼 이와 같은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늘날의 한국문학이 문학시스템에 맞게 ‘그들만의 문학’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사회·역사적 변화를 통해 다양화되기보다는 제도가 만들어놓은 ‘문학성’에 의해 획일화되어버린 것이다. 확실히 이런 완벽한 공간에서 ‘근대문학의 종언’은 그저 손님(마마)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손님은 오로지 무당의 눈에만 보인다고 할 때, 한국문학은 알게 모르게 이미 무병(巫病)을 앓은 셈이다. 그런 한국문학이 ‘손님’을 발견·추방시킴으로서 자신의 건강함을 증명하고자 하지만, 그때 발견되는 ‘손님’이란 자기 안에 살고 있는 ‘유령’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조영일 / 문학평론가

 



 
» 조영일씨
 

조영일씨는 1973년생으로 지난해 <문예중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첫발을 떼었습니다. 세계문학의 관점에서 한국근대소설의 형성·전개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와 비극> <근대문학의 종언> <세계공화국으로> 등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작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현재 가라타니의 <역사와 반복>을 번역하면서 가라타니에 대한 책을 준비 중입니다.

 

근대문학 종언론은 상상 혹은 소동일 뿐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나
 
 
한겨레 강성만 기자
 
 
» 근대문학 종언론은 상상 혹은 소동일 뿐
 
우리시대 지식 논쟁 /

2. 끝나지 않았다

 

지난 주 문학평론가 조영일씨는 근대문학의 특수한 성격을 부각하면서, 이 시대에 그 특수성이 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풀어 말하자면, 가라타니 고진(일본 비평가, 1941~)은 근대문학은 ‘공감’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하나로 만들어 ‘네이션’(국민국가)을 형성케 하는 매체라고 했는데, 현재 한국사회의 문학은 그런 특별한 중요성이나 가치를 담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조씨는 작가적 경험·통찰이 아니라 ‘문예창작과’라는 창작코스를 통해 문학이 생산되고 있는 점이나 비평의 경우 거의 대부분 국문과 출신으로 구성되고 있는 점 등을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보기로 들었다.

그는 사정이 이럴진대, 우리의 문학시스템은 근대문학의 특수성을 일반적인 것으로 옹호하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시스템 역시 붕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진단도 붙였다.

최원식 인하대 교수는 이런 주장을 ‘신판 해소론’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가라타니가 근대문학종언론을 확정한 ‘한국문학의 종언’은 일종의 상상에 가깝다고 했다. 가라타니는 1990년대 만났던 한국 문예비평가 모두가 문학에서 손을 떼었다고 했으나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씨를 제외하곤 문학을 떠난 비평가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고진이 나아가고 있는 문학 바깥의 실천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근대문학이 정말로 끝났다면 진정한 의미의 저항도 끝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한국 문학계의 논란이 좀체 수그러들지를 않는다. 이 기이한 열(熱)이 과연 우리 몸으로부터 내발한 것인지 의심스런 구석도 없지 않은데, 이처럼 지속될 때는 그저 상상에 의한 헛열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겠다. 상상이 곧잘 현실로 전화하기도 하매, 우선 이 소동의 맥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원래 “2003년 10월, 긴키대학 국제인문과학연구소 부속 오사카 칼리지에서 행한 연속강연의 기록에 기초하고 있다.”(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06, 86쪽) 강연원고를 “전면 수정”하여 이듬해 <와세다문학>(2004년 5월호)에 발표하고, 이를 다시 <근대문학의 종언>(2005)에 수록했던 것이다. 가라타니는 요즘 한국에서 바로바로 소개되곤 하는데 이 글도 ‘근대문학의 종말’이란 제목으로 <문학동네> 2004년 겨울호에 역재(譯載)된 이후, 논란의 덕택인지 책도 2006년에 번역되었다. 다시 확인하건대, 이 글의 모태는 일본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록이다. 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말의 자의성, 더구나 학생 대상 강연이 지니게 마련인 어떤 직정성(直情性)을 염두에 두더라도 일본에서는 잠잠한 근대문학종언론이 왜 한국에서는 이처럼 ‘소문난 잔치판’이 되었는지 난감한 바 없지 않다.

곳곳에 빛나는 통찰들이 박혀 있긴 하지만 이 글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진지한 독서를 요구하는 일류의 평론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진지한 학구 뒤, 그 휴식의 시간에 놀리는 경쾌한 두뇌회전에 가까운 탓인지, 강연의 어조도 시종일관 반어적이다. 이는 통념에 물든 학생들의 의식에 충격을 가해 그 사유를 자유로이 풀어놓으려는 가라타니식 수사학의 발로일 터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과 달리
문학 떠난 한국 문예비평가들 없어
잘못된 풍문만이 사실로 부풀려진 것
징후는 있지만 ‘종언’ 단정은 일러

 

우선 그의 주장을 한번 따라가 보자. “소설 또는 소설가가 중요했던 시대”로 대변되는 “근대문학이 끝났다는 것”(44쪽), 다시 말하면 혁명정치의 보수화에 대항하여 “영구혁명을 담당했”(45쪽)던 근대문학이 이제 종언을 고했다는 것이 이 글의 골자다. 더 쉽게 풀면, “네이션 형성의 기반”(62쪽)인 동시에 ‘네이션 이후’를 치열하게 모색한 근대문학이 조건의 변화 속에서 그 도덕적 과제로부터 해방되어 이제 “그저 오락이 되”(53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 징후를 1960년대의 프랑스, ‘에크리튀르’(글쓰기)의 대두에서 읽어낸다. “그들은 사르트르처럼 소설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도리어 그것을 부정하고 그 대신에 사르트르가 ‘문학’으로 서술했던 것을 에크리튀르라는 개념으로 바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46쪽) 재미있는 지적이다. “대중문화가 좀 더 빨리 발전”(47쪽)한 미국에서는 1950년대부터 이 현상이 진행되었는데, “작가가 대학의 창작 코스에서 나오”(47쪽)는 것이 중요한 징표라는 주장이다. 드디어 그 바이러스는 일본에 도착한다. 그리하여 하루키의 횡행 속에 일본 “근대문학은 1980년대에 끝났다”(46쪽)고 선고한다.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문학의 위의(威儀·위엄있는 모양)가 현저하게 쇠퇴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상에서 펼친 그의 파악이 크게 새삼스런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런데 한국으로 이동하면서 종언론은 감전(感電)된다. “그러나 내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정말 실감한 것은 한국에서 문학이 급격히 영향력을 잃어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48쪽) 이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는 1990년대에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문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일본 문학은 죽었어도 한국 문학은 살아 있다’고 한국문학에 대한 신뢰를 표명한 바 있는데, “1990년대 말경부터 문학의 쇠퇴가 급속하게 전개되었다”(49쪽)는 소식에 놀라움을 표시한다. 그 중요한 제보자가 김종철(영남대 교수·<녹생평론> 발행인)이다. 문학을 떠나 생태운동에 투신한 그에게 그 이유를 묻자,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49쪽)려서 그만두었다는 대답에 가라타니는 “동감을 표시”한다. 김종철이 전해준 이 소식은 다른 소문으로 확정된다. “그 후에 알게 된 사실은, 내가 1990년대에 만났던 한국의 문예비평가 모두가 문학에서 손을 떼었다는 것입니다.”(49쪽) “나는 한국에서 그와 같은 사태가 이렇게 빨리 진전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문학의 종언은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50쪽)

 

대학 강연록으로 출발한 종언론
일본선 잠잠한데 한국선 들썩들썩
민족문학 해체 부추기는
이름만 바꾼 ‘신판 프로문학 해소론’

 

근대문학종언론을 확정한 ‘한국문학의 종언’이 풍문에서 부풀려진 일종의 상상에 가깝다는 점이야말로 놀랍다. 우선 그가 교유한 한국의 평론가 모두가 문학에서 손을 떼었다는 지적은 아무리 수사학이라도 왜곡에 가깝다. 아마 그중에는 동아시아론에 참석해 온 나도 포함된 듯싶은데, 비평활동을 게을리한 것을 탓하면 할말이 없지만 내 자신 문학에서 아주 손을 뗀 적은 없다. 이는 내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터인데, 내가 알기론 김종철을 제외하고 문학을 떠난 비평가는 없다. 가라타니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나라 문학사정에 대해서 그것도 그저 소문에 의지해서 어떻게 이처럼 단정할 수 있을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닌가? 문학의 현장, 일본을 이탈한 가라타니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위해 한국을 동원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고 그가 이런 대세에 대한 투항을 고무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문학이 끝났다고 해도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자본주의와 국가의 운동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한복판에서 대항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점에 관해 나는 더는 문학에 아무것도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다.”(86쪽) 문학에 대한 자본의 포섭이 날로 강화되는 현실에서 문학 바깥에서 저항을 조직할 수밖에 없는 그의 곤경을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근대문학이 정말로 끝났다면 진정한 의미의 저항도 끝났기 때문이다. 근대문학 종언 이후의 저항, 그것도 텍스트 바깥의 저항이란 비관주의자의 자기위안으로 떨어지기 십상이 아닐까? 한국으로부터 전해진 풍문을 통해 완성된 신판 해소론이 다시 한국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기이한 형국이 가엾다. 요컨대 종언론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그 후신 민족문학작가회의, 그리고 창비가 주도한 한국의 민족문학운동 또는 민중문학운동의 해체를 촉진하는 나팔로 활용되고 있으니, 종언론을 둘러싼 저간의 소동이란 가라타니를 빙자한 신판 해소론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요즘 한국문학이 종언론을 싱싱하게 배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확실히 한국 문학은 종언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다른 세상을 꿈꾸고 그곳으로 가는 통로를 진지하게 모색하는 ‘근대문학’으로부터 ‘가비얍게’ 이탈하는 경향이 처처에 출몰한다.

일본의 변혁 가능성에 대한 절망 또는 체념에 기초한 그의 근대문학종언론이란 의상을 갈아입고 다시 나타난 프로문학해소론이다.

이 사태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이탈을 축복하면

 
» 최원식 교수
 
서 또는 저주하면서 문학의 집에서 가출하는 것이 능사인가? 그 쇠퇴의 원인을 궁구하고 극복을 위해 함께 토의하는 것이 현대라는 노예선에 동승한 문학인의 자세일 것이다. 더구나 세계사적 모순의 결절점인 한반도 분단체제의 변경이 목하 진행되는 이 역사적 고비에서임에랴.

최원식 인하대 교수 겸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최원식 교수는 1949년생으로 한국 근·현대 소설사 연구를 주로 해왔습니다. 현재는 동아시아 맥락속의 한국학 연구 방법론에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대표 저서로 <문학의 귀환>(2001) <한국 계몽주의 문학사론>(2002)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1997) 등이 있습니다.

 

종언 ‘위기’를 근대문학의 ‘기회’로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나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종언 ‘위기’를 근대문학의 ‘기회’로
 
우리시대 지식논쟁 /

 

3. 찬반 구도 벗어나야

 

지난 두 주 문학평론가 조영일씨와 최원식 인하대 교수는 가라타니 고진이 제기한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가라타니는 근대문학은 ‘공감’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하나로 묶어내면서 ‘네이션’(국민국가)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날 문학은 시각매체의 등장으로 ‘리얼리즘’의 가치가 제거되면서 그 특별한 의미가 끝났다는 게 그의 견해다. 특히 한국의 문예비평가들이 줄줄이 문학판을 떠나고 있다는 그의 진단은 ‘종언론’의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조씨는 한국의 작가나 비평가들이 ‘문예창작과’나 ‘국문과’라는 정형화된 코스를 통해 배출되고 있는 점 등을 지적하며 이 땅에서 문학이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 시기는 끝났다고 했다. 반면, 최 교수는 종언론을 일종의 상상에 가깝다고 반박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문예비평가들이 문학계를 떠나지도 않았고, 근대문학이 정말로 끝났다면 진정한 의미의 저항도 끝났다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권성우 교수는 가라타니 주장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는 점을 전제한 뒤, ‘종언론’은 “체제와 시스템을 뒤흔드는 비판적 문학의 근본적 위기쯤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했다. 덧붙여, 가라타니의 명제는 시대와 시스템에 대해 근원적으로 성찰하는 본격 문학이 산출되지 않고 있는 우리 문학 현실을 냉철하게 되돌아보는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다음 논쟁 주제는 ‘진보적 민족주의는 여전히 유효한가’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대개의 논쟁이 그러하듯이,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논의 역시 단순한 찬반의 구도로만 접근할 수 없는 복합적인 문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늘 각자의 문학적·정치적 입장에 연루되고 주관적으로 투사된 ‘근대문학의 종언’ 담론을 접할 뿐이다. 이 글이 찬반 구도를 탈피하여, 그렇다면 우리 문학과 비평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집중하고자 하는 바가 여기에 있다. 우선, 가라타니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문학적·역사적 맥락이 무엇인가 하는 점과 그것이 우리 문학과는 실제로 어떠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말해보자.

일단 가라타니의 주장에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령, 종언 담론에는 세부적인 면에서 한국문학이나 비평계의 현황에 대한 사실 관계의 오류가 발견되며, 분단과 민족문제 등 이 시대 한국문학이 여전히 마주하고 있는 근대적 과제 및 중대한 독립적 변수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또한 ‘종언’이라는 표현 속에 담긴 수사적 어법이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일부에서 마치 한국문학 전반이 끝났다는 식으로 극단화되어 수용되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이리라. 가라타니가 주장한 정확한 문맥과 전후맥락이 거세된 채, 죽음, 종언 등의 자극적인 표현 위주로 수용되고 있는 논의는 우리 문학의 가능성과 전망에 대한 과도한 회의주의를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존재한다. 또한 ‘근대문학의 종언’ 명제와 그 논의에 대한 문단 일부의 신경질적 반응은 오히려 우리 문학의 현황에 대한 합리적인 성찰을 방해하고 오도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가라타니의 주장을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제기된 주장이 허술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라타니의 명제는 지금 이 시대 한국문학에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채 적용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근대문학의 종언’은 문학 일반의 종언이 아니라, 체제와 시스템을 뒤흔드는 비판적 문학의 근본적 위기쯤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한 사회와 문화권 내에서 문학이 특별하게 중요한 역할을 행사하던 시대가 마감되었다는 것이 가라타니 주장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주장에는 우리 문학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실상 지금 이 시대 문학에서, 시대정신 그 자체였으며, 비판적 지성의 전위 역할을 했던 지난 연대 문학의 영광과 역할을 기대하기란 난망하다. 문학의 위상과 역할은 끊임없이 변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학의 위기’라는 풍문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 문학은 어느 때보다도 다양하게 양산되고 있으며, 엽기에서 우주적 상상력에 이르는 온갖 현란한 소재가 넘쳐난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에서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과 현실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문제제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이러한 물음들이 가능하겠다.

 

이 시대 범람하는 온갖 소재·장르 문학
거대언론 등 문학시스템에 대한 비판없어
얌전히 활용되거나 소비되고 있을 뿐
작품에 대한 치열한 논쟁·비판도 실종

 

지금 우리 사회를 실제로 움직이고 여론의 프레임을 형성하며, 문학유통과 홍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거대언론의 문제점과 행태에 대해 제대로 형상화한 소설이 단 한 편이라도 존재하는가? 이 시대의 어떤 시나 소설보다도 우리 사회의 현실에 밀도 깊게 대응하면서 ‘타자’와 ‘소수자’에 대한 연대와 공감을 감동적으로 환기시킨 서경식의 탁월한 산문(<시대를 건너는 법> <디아스포라 기행>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 등등)에 대한 본격비평을 본 적이 있는가?

여전히 황석영, 조정래, 김원일, 방현석, 안재성, 정도상, 공선옥, 정지아, 오수연, 전성태 등의 작가들이 분단 문제를 비롯하여 이 시대의 다양한 현실과 대결하면서 분투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글쓰기가 이전처럼 전사회적인 관심사가 되거나, 지배 이데올로기를 교란시키고 시스템을 뒤흔드는 차원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은 객관적이며 구조적인 현실이다. 그들의 진정한 의도와 관계없이, 그들의 문학 역시 문단시스템과 출판자본, 문학기사, 문학소비제도와 문학교육의 현장에서 얌전히 활용되며 소비되고 있을 뿐이다. 바로 이러한 현상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이웃 나라 비평가의 한가한 객담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몇몇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가라타니의 종언 테제를 수동적으로 추인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라는 물음이 던져져야 한다.

거시적인 측면에서 가라타니의 주장이 지닌 유효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러한 관점이 그대로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현실적 추인과 포개질 필요는 없다. 가라타니의 명제는 오히려 이 시대 문단시스템과 문학장에 대한 근원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 문단시스템, 예컨대 문창과와 국문과 일색의 문인 양성제도, 텍스트 해설에만 골몰하는 비평시스템 등이 가라타니가 말한바 근대문학, 곧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해 성찰케 만드는 비판적 문학의 가능성을 인위적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냉엄한 인식이 필요하다. 어느 순간부터 작품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비판은 사라졌으며, 그 어떤 이데올로기나 권력집단의 눈치도 보지 않던, 자유의 상징 그 자체이던 문인들도 거대언론 문화부의 네트워크와 주류 문단시스템 속에서 편하게 안주하고 있다. 문학에 어떤 금기도 없다지만, 지금 이 시대 문단에서 실제로 문학판을 좌지우지하는 거대언론과 주류 문학집단에 대한 비판은 자신의 문학적 미래를 위해 끝끝내 유보해야 할 금기와 다름없다. 그런가 하면, 지난 연대의 민족문학과 비판적 지성(글쓰기)의 성과는 지나치게 안이한 방식으로 매도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시대와 시스템에 대해 근원적으로 성찰하는 본격적인 문학이 산출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가라타니 주장엔 몇가지 한계 있지만
한국문단에도 적용 가능한 설득력 지녀
극단적 수용-신경질적 반응 벗어나
문학 현주소 근본적인 성찰 계기로

 

그렇다면 가라타니의 주장 이전에, 우리 문학이 지닌 근대문학의 가능성과 잠재력, 탄탄한 미학을 동반하면서도 지배 이데올로기를 뒤흔드는 비판적 문학의 위의(威儀)를 지금 이 시대의 문학과 비평이 충분히 현실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을 뼈아프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이 부정적이라면, 가라타니의 주장과 관계없이, 우리는 그러한 문학을 충분히 현실화시키지 못한 지금 이 시대의 문학시스템에 대해 해부하고 탐문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노력이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현실적인 방책이 아닐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는 우리 문학의 실상과 허상을 냉철하게 되돌아보는 계기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문단시스템에 깊게 연루되어 있을수록 가라타니의 주장에 생래적 반감을 보이며, 현존하는 문학제도에 대해 비판적이며 독립적일수록 종언 테제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역설적인 맥락에서 늘 자명성에 대한

 
» 권성우 교수
 
회의를 강조하는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 명제는 실상 우리에게 스스로가 속하거나 편승하고 있는 문단시스템과 거대언론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고 있는가를 되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일본어로 발표된 재일 디아스포라 서경식의 아름다운 번역산문을 본격비평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그들만의 문학제도도 포함해서 말이다. 권성우/숙명여대 교수·문학평론가

 


권성우 교수는 1963년생으로 서울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비평공동체 ‘크리티카’의 동인이며 기행문·산문·평전 등의 기존에 주목하지 않았던 글쓰기에 학문적·비평적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평의 매혹> <비평의 희망> <논쟁과 상처> 등의 저서를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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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유효한가

초국적 자본 견제할 힘 저항적 ‘민족의식’에 있다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초국적 자본 견제할 힘 저항적 ‘민족의식’에 있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1. 유효하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원어인 영어 단어는 내셔널리즘(nationlism) 하나이다. 근대 민족국가가 형성되면서 이른바 민족 혹은 국가 관념이 태동되었다는 게 일반적 통념이다. 우리도 조선시대만 해도 ‘소중화’ 의식이 뚜렷했을 뿐이다. 중국인들보다 더 지극정성으로 주자학을 섬긴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근대 이후 민족주의는 우리 사회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이념이었다. 일제하 독립운동이나 분단 이후 통일운동까지 이 모든 투쟁의 배후에는 ‘민족’이 있었다. 친일파와 반공 지배세력도 민족이라는 외피로 국가주의적 성향을 가렸다.

독재에 맞선 저항적 민족주의의 주요 명분은 분단모순 극복을 위한 통일운동이었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현재 상황은 많이 변했다. 국가와 기업가의 통일에 대한 열정이 기층 민중의 그것보다 더 못하다고 하기 어렵게 되었다. 급증하는 다문화 가족도 민족 관념의 정당성에 대해 되묻게 한다. 탈민족 담론이 거세지는 배경이다. 탈민족론자들은 민족이 함의하는 배타성은 민주적 개방성과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사회의 다른 갈등이 정당하게 자리잡지 못하도록 한다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진보적 민족주의의 유효성을 지지하는 안병욱 교수는 이 글에서 공동체적 유대관계가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이끈 원동력이었다면서, 세계화 시대 민족주의적 가치관만이 무소불위 초국적 자본의 폭력을 견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와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각각 비판적 시각과 제3의 시각을 밝힐 계획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민족주의라는 용어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고 그 쓰임새도 다양하다. 따라서 민족주의 논쟁은 매번 접점을 찾지 못하고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말을 한국 사회처럼 친숙하게 사용하는 경우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한국 사회를 논할 때 민족문제는 빠지지 않는다. 현실을 논하건, 역사를 설명하건 민족 내지 민족주의 문제는 중요하게 거론된다. 역사적으로 어느 때건 주어진 나름의 과제가 있었다. 이 과제들은 한반도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외면하기 어려운 공통적인 사항이었기 때문에 민족공동체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대처해 왔다. 곧 민족주의적인 인식인 것이다.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요인은 오랜 기간 역사공동체를 공유해 왔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천여 년 이상 하나의 국가로 운영되면서 불교·유교·기독교 등 다양한 문화를 공통적으로 향유해 왔다. 그 과정에서 원초적 공동체 의식을 공유해 온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유럽 근대사를 배경으로 형성된 민족주의 개념을 원론적으로 적용하여 한국 사회에서의 민족주의 문제를 비판하려는 것은 처음부터 한계를 지닌 것이다.

한국 사회는 20세기 들어 식민주의의 지배를 겪으면서 민중의 자율적인 의지는 탄압받고 식민주의에 편승한 소수만이 민족과 분리된 채로 특권을 향유하였다. 이를 두고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일제 치하에서 성장의 과실이 조선인에게도 돌아갔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 “많은 경우 종군 위안부들을 고통과 희생으로 내몬 원초적 요인들은 가정 내 가부장적 권력의 구타와 학대였다. 위안부의 비극은 민족이라는 잣대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복잡한 성적, 사회적 차별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박지향 서울대 교수·서양사)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식민지배의 후과는 극복되지 않았으며 외세는 기득권층을 숙주로 하여 여전히 중요한 변수로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방 이후 남북분단에 이어 남한 사회는 반공주의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었다. 반공주의는 이념에 의한 분열과 갈등을 조장함으로써 공동체적인 유대관계를 파괴하고 민주적 발전을 차단하였다. 남북 분단은 외부 요인이 크게 작용했지만 안으로 지배층과 민중 사이의 민족주의적 인식차와 무관하지 않았다. 남북이 각기 외세를 내세워 분단을 초래하였고 급기야 전쟁으로까지 비화된 분열과 갈등을 초래한 것은 여전히 민족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민족적 통합을 이루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는 한국 사회의 진보와 개혁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었으며 불온한 사상으로 탄압을 받았다. 또 반공주의 아래서 한반도는 일종의 게토가 되어 그 안에서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었다. 지난 20세기 후반 내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민주화운동은 이러한 게토를 파괴하고 밖으로 세계사와 소통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1960년 4월항쟁을 비롯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진 민주화 운동은 민중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적 유대 관계와 민족주의 이념에 기반하였다.

 

‘민족공동체의식’ 역사적 공유한 한국
서구 ‘민족주의’ 곧장 적용해선 안돼
식민·분단·독재에 맞선 ‘저항적 담론’

 

20세기 한국 사회가 겪어야 했던 분단과 전쟁, 독재 등 파괴적 혼란은 그 가장 큰 원인이 외세와의 관련 속에 있었다. 오늘날 통일문제와 함께 민주화·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야기된 내적 갈등 문제들을 안고 있고 또 밖으로 세계화 조류에 조응하면서 정체성을 유지하는 과제가 중첩되어 있다. 이런 역사를 성찰적으로 검토한 과정에서 민족주의는 자연히 가장 친화적이 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족주의가 여전히 한국사회의 지배적 담론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10여 년 전부터 민족주의 담론에 비판적 문제 제기가 행해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른바 탈민족을 내세우고 혹은 ‘민족주의는 반역’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 주장에 분명 유용하고 긍정적인 내용이 많다. 그동안 민족주의 담론에 다소 관념적이고 맹목적인 표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탈민족주의를 위해 지적되고 있는 것들은 논쟁을 위해 억지로 제기된 측면이 강하다. 일부에서는 지배권력을 추수하면서 전개한 국수적이거나 파시즘적 사례를 끌어다 한국 민족주의의 역사성에 붙여 함께 매도하고 있다. 곧 “민족주의 패러다임은 한국의 지적 삶을 너무나 깊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여타의 가능한 역사 해석 방식을 모두 어지럽히고 포섭하며 또는 실제로 말살시켰다”(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교수)라고 단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탈민족·탈근대 주장에는 구체적인 대안을 찾을 수가 없고 오히려 한국 사회운동의 구심점을 해체함으로써 허무와 공허함을 조장하려는 듯이 보인다. 민족주의는 현대 한국사회를 인식하기 위한 그리고 역사에 참여하기 위한 의식화의 매개체인 것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시장만능을 내세우며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신자유주의하의 초국적 자본은 세계화 추세 속에서 지구촌 곳곳으로 무소불위의 팽창과 전일적 지배를 관철하고 있다. 국제 경쟁력이라는 명분아래 자본과 기득권층의 이익만을 고려하고 있다. 한국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차별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자본은 국경을 거침없이 넘나들지만 농민·노동자들은 떠돌이로 하루하루 생존을 위한 절박한 처지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예전 같은 국가와 국경의 장벽은 이제 더는 장애가 되지 않아 보인다.

 

신자유주의 대안은 민중 주체적 행동
노동 계급 성장 미흡한 현실에서
민족적 유대 ·가치관은 유효한 ‘무기’

 

하지만 한국사회의 오랜 공동체적 유대관계와 민족의식, 관습, 언어 등이 초국적 자본의 자유로운 행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 민족주의라는 이름에 포괄되고 있는 것들이다. 이와 더불어 한국의 강한 공동체적 유대가 오랜 동안의 민주화 운동 경험과 결합됨으로써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칸쿤·시애틀·홍콩 등의 반세계화 시위의 중심에 한국 민중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이런 맥락과 닿아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 중심의 사회이고 이를 위해서는 민중의 주체적인 행동과 능동적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탈민족주의는 불균등한 세계체제에 대한 대응논리와는 거리가 있으며 지배권력에 의한 통제와 순응을 지지한다. 자본에 의해 모든 인간이 줄을 서야 할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은 인간의 자율적 의지에 기반한 유대에서 찾아야 한다. 흔히 계급의식과 성정체성, 젠더문제를 거론 하지만 현재 한국사회는 계급·젠더 문제 이전에 국가 간의 이해 대립이 초래한 모순에 의해 더 좌우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사회의 가장 유용한 유대관계는 민족의식이며 이런 맥락을 설명해 주는 것이 민족주의이다.

진보는 상대적으로 약자 계급의 집합으로 추동된다. 이러한 진보운동을 담지할 노동계급의 성장이 한국 사회에서는 만족스럽게 진행되지 못했다. 한국에서 노동 부분의 지체는 분단과 전쟁에 따른 반공주의적 억압에 기인한다. 역설적이게도 노동계급이 제 위상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는 여전히 민족이 중심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 안병욱 국사학과 교수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줄곧 지배층의 인식을 대변하기 위해서 민족논리에 시비를 걸었다. 민중과 진보세력에게 혼란과 갈등을 야기한다고 탓하면서 진보적인 논의를 억제하였다. 무소불위 초국적 자본의 폭력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현재 민족주의적 가치관이 아니고서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실상 민족주의는 반역이라는 주장은 민족주의에 대한 대안 없는 반역에 지나지 않는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는 1948년생으로 조선후기 사회변동 문제와 민중운동·민주화운동에 관한 연구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동안 과거청산과 학술 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최근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를 엮어냈습니다.

 

민족 ‘신화’ 넘어 국경없는 ‘계급연대’로 가자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국내 최초로 한국인과 이주노동자가 하나의 노조를 꾸린 대구 삼우정밀 노동자들(맨 오른쪽).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집회(가운데)와 이주 노동자 합법화 기자회견 때 잡힌 장면들(맨 왼쪽).
 
우리시대 지식논쟁 /

 

2. 유효하지 않다

 

지난 주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세계화 시대 초국적 자본의 힘을 견제할 수단으로서 저항적 민족주의의 유효성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 사회가 오랜 세월 유지해 온 공동체적 유대관계야말로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이런 유대관계는 민주화 운동 경험과 결합됨으로써 반세계화 시위의 중심에 한국 민중을 위치짓는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안 교수는 또 20세기 한국 사회가 겪어낸 파괴적 혼란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외세가 지금도 “기득권층을 숙주로 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본다. “노동계급이 제 위상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민족이 진보 진영에서 중심 구실을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에 대해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조선 말기 한국 사회는 지역적 언어 차이가 심하게 나타나는 등 동질성보다는 다양성이 강했다면서, 동질적인 것은 지배계급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유교적 문약이 국망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그 대체물로서 부강을 우선시하는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가 수용됐다는 게 그의 관점이다. 그는 민족주의의 가장 큰 폐단은 계급 모순이라는 기본적 문제를 호도하는 것이라면서 “국제주의적 계급 노선, 가깝게는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의 ‘피해자 연대’”가 진보의 거시적 담론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 주에는 임지현 한양대 교수가 견해를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최근 학계나 진보 운동계 일각에서 ‘탈민족’의 조류가 감지되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민족’만큼 신성화돼 있는 용어는 없을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 ‘국민’/‘민족’ 담론에 호소하는 일이야 어디를 가나 흔하지만, 한국의 경우 보수와 진보 양쪽은 아직까지도 ‘민족’에 대한 일종의 충성 경쟁을 하는 듯한 양상을 보인다. 예컨대 지난달 필자가 평소 지지하는 민주노동당은 개천절을 맞이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논평을 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정신으로 이 땅 위에 나라를 세운 지 반만 년의 세월이 흘렀다 (…) 하늘은 아직 다 열리지 않았다. 단군 할아버지께서 돌을 놓으시고 우리가 열어야 하는 하늘이다. 민주노동당은 인간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는 홍익의 정신이 충만한 세상을 열어 나가는 데 온 힘을 쏟을 것을 다짐한다.” ‘반만년의 역사’와 ‘단군 할아버지’의 역사성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계급 모순을 부정하는 ‘홍익’과 같은 수사를 노동계급의 정당이 이용한다는 것은 놀라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데, 이는 우리 현실 그대로다. 1993년부터 단군을 실재 인물로 선전함으로써 과학적 근대 사학 자체를 폐기했다 싶은 이북(북한)과 달리 적어도 이남(남한)의 학계에서는 민족주의적 신화와 역사를 구분한다.




그런데 학생들이 국사 교과서에서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내용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배워야 할 만큼 ‘민족’의 신화는 여전히 사회 일반에 상당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그 발원지인 유럽에서 이미 우파의 구시대적 전유물로 전락해버린 ‘민족’ 담론이 한국에서는 ‘노익장’을 과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설명은 꼭 틀리지는 않지만 오늘과 같은 ‘민족’의 위력을 과거에 무비판적으로 투영시킴으로써 한국 역사가 마치 ‘민족’의 중심적 자리매김을 늘 그 전개 목적으로 삼았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동시에 ‘민족’과 무관하거나 ‘민족’을 초월했던 부분들은 배제되고 만다.

‘민족’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한국에서의 ‘민족’의 불로불사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국은 근대에 접어들기도 전에 이미 고려·조선 왕조에 의해 천여 년 동안 통일된 중앙집권적 국가로 운영돼 왔다. 그만큼 어느 전근대 사회보다 국가의식과 내부 동일성이 높았다. 거기에다 일제에 의한 식민화가 충격으로 받아들여져 자기방어적·해방적 민족주의 담론은 사회의 통념이 됐다. 그리고 해방 이후 세계에서 동질성이 가장 높은 민족인 우리를 미·소 양국이 강제로 분단시켰으니 자연히 분단 극복 지향의 민족주의 담론이 진보적 사고의 중추로 굳어졌다.”

예컨대 조선말기에 팔도 기층민중의 문화나 언어는 전혀 ‘동질적’이지 않았다. 충남 천안 출신인 조병옥(1894~1960)이 1911년에 평양숭실학교로 유학 갔을 때 이북 지방의 언어를 거의 알아듣기 어려웠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지역적 언어 차이가 심하게 나타나는 등 전통시대 말기의 한국 사회는 ‘동질성’보다 ‘다양성’이 강했다. 국가의식이 비교적 강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명한 의병장 이인영(1867~1909)이 일본군과의 전투 도중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의병 진영을 떠나 낙향했다는 것이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질 만큼 가족 윤리는 국가윤리에 우선되기도 했다. 일제 식민화의 충격이 저항 담론으로서의 민족주의의 위치를 굳히게 했다는 것은 맞지만, 민족주의적 저항 운동 이외에도 민족 문제 해결과 계급적 혁명 노선을 병행하려 했던 국내 공산주의 운동 세력들이 식민지 시기 해방 전선의 주축을 맡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국내에서 ‘국제 노선’을 지켜온 공산주의 계열 투사들이 1946년부터 이남에서, 그리고 1953년부터 이북에서 각각 마녀사냥의 대상이 됐기에 우리가 지금처럼 저항 담론으로서 민족주의의 위치를 과장되게 평가하게 된 것이다. 분단 극복이 1945년부터 지금까지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는 것도 맞지만, 과연 1990년까지는 옛 소련, 그 뒤에는 중국의 지원으로 경제를 꾸려온 이북의 지배계급이나, 금융·기술·수출·시장·문화자본 그리고 석유공급의 안정성 등의 차원에서 미국과 일본에 여전히 의존적이지 않을 수 없는 이남의 지배계급이 진정한 분단 극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가? 계급 갈등이 해결되는 길로 나아가는 것만이 남북한 양쪽의 민중에게 유리한 통일 전망을 열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계급 모순이라는 기본적인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이야말로 민족주의의 가장 큰 폐단이다.

‘동질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지배계급의 성리학적 세계관이었는데, 조선 왕조의 멸망으로 성리학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유교적 ‘문약’(文弱)이 국망의 원인으로 지목돼 규탄 대상에 오르자 성리학의 대체물로서 ‘부강’(富强)을 우선시하는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가 수용됐다. 민족주의가 성리학이 비워준 자리를 메운 것이 민족주의 위력의 근원이 됐다.

보통 탈민족주의적 입장에 서는 이들을 공격할 때에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그러면, 대안이 무엇이냐, 민족이 용도폐기되면 진보의 구심점이 될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곤 한다. 필자로서는 그 답이 분명하다. 국제주의적 계급 노선, 가깝게는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의 ‘피해자 연대’가 진보의 거시적 담론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일차적 모순과 분단의 이차적 모순 극복에 가장 도움이 된다. 지금 세계 자본주의의 ‘커다란 착취공장’으로 떠오르는 광역의 동아시아·동남아시아는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들을 집중적으로 내포한다. 삼성이나 도요타의 중국·동남아 저임금 노동력 착취, 남한이나 중국에서 ‘정규직 노동’의 치명적 위기, 이민 노동자의 살인적 수탈, 황사처럼 국경을 모르는 환경 인재(人災)들…. 이 문제들의 해결에는 ‘민족’이 백해무익일 뿐이다. 그리고 만약 북-미 관계, 남-북 관계가 계속 개선돼 남한 등 외래 자본이 이북으로 대량으로 침투돼 저임금 노동력 착취를 한층 거대하게 벌인다면 ‘분단’과 ‘통일’ 사이의 모순이 결국 ‘남·북한의 피해 대중’과 ‘남·북한 지배자 연합’ 사이의 모순으로 대체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15~20년 만에 현대와 삼성이 평양 주위에 공장을 세워 이북 노동자들에게 10만원 이하의 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고, 북한 권력자들의 대리인들이 남한에서 은행계좌를 열기도 하고 주식 투자를 하기도 하는 시대는 얼마든지 도래할 수도 있다. 남과 북의 착취자들이 하나가 되는 상황에 대비해서 남한 민중을 대변한다는 진보도 ‘남·북한 경협’에 대한 무비판적인 민족주의적 환희심을 버리고 북한 민중과의 연대, 공동의 계급 투쟁을 벌일 자세를 곧 준비해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를 두고 벌이는 논쟁 소리가 요란하지만, 해답은 이미 현장에서 얻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2007년10월18일치 〈한겨레〉에서 ‘하나로 뭉치니 마음은 하나, 힘은 두배’라는 제목의 기사를 봤는가? 이 기사는 국내에서 최초로 한국인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들이 함께 하나의 노조를 만들어 ‘국내외 출신 가릴 것 없이 모든 노동자들을 동등하게 대우한다’라는 중요한 양보를 쟁취한 대구의 삼우정밀이라는 부품업체를 다룬다.

 
» 우리시대 지식논쟁 / 박노자교수
 
피부색과 온갖 편견들을 넘어선 자본 피해자들의 연대, 이것이야말로 모든 노동자가 평화롭게 같이 잘살 수 있게 해주는, 미래로 가는 길이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

 


박노자 교수는 가야사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 등 처음에는 주로 한국 고대사와 고대 중세 불교사를 연구했지만, 최근에는 한국 민족주의 형성사, 한국 사회진화론 사상사 연구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5세기말부터 562년까지 가야의 여러 초기 국가의 역사〉(러시아어판·1998), 〈당신들의 대한민국〉 (2001), 〈우승열패의 신화〉 (2005) 등이 있습니다.

[관련기사]
 
 
 

 

자본의 강고한 네트워크 ‘민족’ 사유로 뚫지 못한다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자본의 강고한 네트워크 ‘민족’ 사유로 뚫지 못한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3. 현실·이론적 대안 아니다

 

이번 주제의 첫 필자인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세계화 시대 초국적 자본의 힘을 견제할 수단으로서 저항적 민족주의의 유효성을 적극 강조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오래 유지해온 공동체적 유대관계야말로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이끈 원동력이었다면서 “노동계급이 제 위상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민족이 진보진영의 중심 구실을 해야 한다고 했다. 외세가 지금도 “기득권층을 숙주로 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관점도 이런 견해를 뒷받침한다.

이에 대해 지난 주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탈민족 담론을 폈다. 그는 조선 말기까지 한국 사회는 동질성보다 다양성이 강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동질적인 것은 지배계급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는 민족주의의 가장 큰 폐단은 계급모순이라는 기본적 문제를 호도하는 것이라면서 “국제주의적 계급 노선, 가깝게는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의 ‘피해자 연대’”가 진보의 거시적 담론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번주 임지현 교수도 탈민족적 관점을 보였다. 그는 지금의 세계를 ‘식민지 없는 식민주의’를 특색으로 하는 ‘3차 지구화’의 시기라고 규정했다. 임 교수는 신자유주의는 서울과 뉴욕의 중심이 연합하는 지배엘리트의 국제주의 네트워크를 표상한다면서 민족주의적 저항방식은 지배엘리트 간의 국제적 네트워크에 대한 인식을 흐리고, 피지배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해친다고 설명했다. 다음 주에는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견해를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지구화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인류의 전지구적 분포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지구화의 산물이다. 자본주의적 세계체제론이나 18세기 동아시아의 경제 네트워크론은 말할 것도 없고, 고대 세계를 ‘아프로-유라시아’라는 하나의 역사공간으로 파악하려는 ‘세계사’의 새로운 패러다임 등은 역사적 지구화를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기원 후 1세기에 이미 아프리카와 유라시아가 상업과 교역의 단일한 네트워크로 묶여 있다는 사실은 최근의 연구들에 힘입어 실증적으로 입증되었다. 인도양이 중국과 유럽, 아프리카를 묶는 네트워크의 허브로 ‘아프로-유라시아’라는 역사 공간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우리는 이를 1차 지구화라 부를 수 있다.

역사적 지구화에 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서구 문명 대 비서구 문명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비판하는 바탕 위에서 출발한다. 예컨대 ‘아프로-유라시아’라는 역사공간은 고대의 그리스/로마 문명을 서구의 전사로 설정하고, 서구와 비서구를 아테네식 민주주의와 페르시아의 전제정, 인간중심적 세계관과 신중심적 세계관 등으로 나누는 기존의 역사 이해가 서구중심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비판한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성립과 더불어 지구화는 새로운 면모를 드러낸다. 강력한 국민국가 체제를 먼저 정립한 서구가 비서구를 식민화하는 양상이 그것이다. 서구의 식민주의에 대해 비서구는 민족주의로 대항한다. 식민주의와 민족주의가 뚜렷한 특징으로 나타나는 16세기 자본주의 세계체제 이후의 지구화를 우리는 2차 지구화라 부를 수 있다. 2차 지구화에서는 국민국가가 주요한 역사적 행위자라 하겠다.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지구화는 다국적기업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신자유주의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3차 지구화라 하겠다.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매트릭스는 그대로이나 식민주의는 ‘식민지 없는 식민주의’로 자태를 변환했다. 또 국경을 초월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대규모의 노동이민과 인간의 이동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도 신자유주의와 결합하기도 하고 다문화주의의 옷을 입는 등 다양한 자태전환을 시도한다.

 

지금 세계는 ‘3차 지구화’ 시기
‘식민지 없는 식민주의’ 시대에
민족주의는 다양한 ‘외피’ 차용

 

조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외국 자본의 자유로운 투자와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민족주의가 있는가 하면, ‘열린 민족주의’라는 이름 아래 외국인 노동자들을 한국인으로 만드는 국민통합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어느 편향이든 민족주의는 3차 지구화의 위기 속에서 ‘한국인의 정체성’과 ‘국체’를 지키는 데 열심이다. 그러나 어느 편향이든 21세기 한반도의 민족주의는 3차 지구화의 새로운 현실을 뚫고 사람다운 삶을 보장하는 이론적·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다. 한국 사회의 오랜 공동체적 유대관계와 민족의식이 초국적 자본의 자유로운 행보에 걸림돌이 된다는 주장은 공허하다.

첫째,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 사회의 공동체적 전통이라는 것 자체가 날조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구의 민주주의를 개인주의적 민주주의라 비판하고 공동체적 전통에 기반한 한국적 민주주의가 유신독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일 뿐이다. 한국 사회의 지배적 공동체 형태인 가족은 시민적 공동체와는 질을 달리한다. 시민사회나 공공영역 등의 서구적 역사개념으로 한국 사회를 읽자는 것이 아니다. 가족과 같은 지극히 사적인 공동체가 민족공동체로 등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오랫동안 단일한 정치체를 유지해왔다는 것이 민족 공동체의 역사적 존재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신분제에 기초한 왕조국가의 공동체는 지배신분의 공동체일 뿐이다. 1910년 상주 양반의 일기는 이와 관련하여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 한일합방 이후 그는 집밖으로 나가길 꺼려했는데, 그 이유가 흥미롭다. 종묘사직을 잃었다거나 하는 식의 정치적 명분 때문이 아니라 상놈들이 양반인 자신한테 ‘호형호제’하는 꼴을 못 보기 때문이었다. 서발턴(하위 주체) 식으로 그의 일기를 뒤집어 읽으면, 양반한테 ‘호형호제’하는 상놈들에게 한일합방은 양반 세상이 끝나고 신분제적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다가온 측면도 있다. 의병운동에 참여한 포수들의 일부가 양반 의병장에게 고용된 용병이고, 더구나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관군 포수의 경력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셋째, 반 만 년 가까이 단일민족으로 살아왔다는 한국사의 신화를 사실로 친다고 하자. 그렇다 해도 민족주의가 자본 주도의 3차 지구화나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무기라는 생각은 너무 단순하다. 2차 지구화 단계에서 국민국가의 형성은 다른 국민국가에 대한 식민화뿐만 아니라 국내적 식민주의를 수반했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방에 대한 중앙의, 농촌에 대한 도시의, 여성에 대한 남성의 식민주의가 그것이다. 서울이 주변부·동양이고 뉴욕이 중심부·서양인 것이 아니라, 서울에도 중심과 주변이 있으며 뉴욕에도 서양과 동양이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서울 내부의 중심과 주변,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가리고, 국내 식민주의를 은폐한다. ‘식민지 없는 식민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3차 지구화단계에서 국내적 식민주의의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민족주의는 국내적 식민주의를 은폐한다.

 

‘민족’은 중심과 주변의 차이 은폐
뉴욕-서울 지배엘리트 네트워크에
피지배계급 국제적 연대로 맞서야

 

넷째, 3차 지구화 단계에서 지배-피지배 관계의 축은 더는 선진국 대 후진국의 대당관계로 파악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는 서울의 중심과 뉴욕의 중심이 연합하는 지배엘리트의 국제주의 네트워크를 표상한다. 문제는 지배엘리트의 국제적 연대와 비교할 때, 피지배계급의 국제적 연대가 극히 약하다는 점이다. 민족주의적 저항방식은 지배엘리트 간의 국제적 네트워크에 대한 인식을 흐리고, 피지배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해친다. 토빈세 논쟁이나 유럽의 노동운동 지도부의 헤지펀드에 대한 공동대응 움직임 등에서 보듯이, 자본 주도의 지구화나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효율적 무기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피지배계급의 연대인 것이다. 3차 지구화의 긍정적인 점은 피지배계급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향한 다양한 인프라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이다.

다섯째, 동북아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는 한-미, 북-미, 미-일, 중-미관계 등 각개 격파된 동아시아 각국과 미국의 양국관계를 축으로 작동한다. 미국은 동아시아 각국의 첨예한 민족주의적 갈등을 제어하고 동아시아 평화를 보장한다는 논리로 미군의 주둔을 정당화한다. 미국은 동아시아 공동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당시 미 국무부 차관 아미티지의 2005년 4월 29일 발언은 동아시아 각국의 민족주의야말로 동북아에서 미국의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비결임을 다시 한번 입증해준다. 반미 민족주의가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역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임지현 교수
 
여섯째, ‘진보’의 고지를 선점한 ‘수구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현실에 대한 기계적 이해와 자신들의 빈약한 상상력을 도덕주의로 방어한다. 적과 우군을 마니교적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도덕주의적 의사소통 방식을 고수함으로써, 민족주의에 비판적인 새로운 전망과 상상력을 질식시킨다. 민족을 중심에 놓고 모든 것을 사유하는 본질주의적 사유방식의 폐해가 이미 자기 방어의 선을 넘어 수구화된 것이다. 임지현 교수/한양대

 


임지현 교수는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원에서 ‘마르크스 엥겔스와 민족문제’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유럽의 민족주의, 유럽 사회주의 사상사, 민족주의 역사서술 비교 등의 주제에 대해 8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대중독재 1~3> <우리 안의 파시즘> 등의 책을 펴내거나 엮었습니다.

 

민족 배제한 사회변혁 ‘순진한 발상’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민족주의는 누구에 의해 어떤 국면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애국주의’와 ‘저항운동’의 상이한 면모를 보인다. 지난해 누리꾼들이 개최한 황우석 박사 지지 집회(왼쪽)와 지난 3월 열린 한미에프티에이 반대시위.(왼쪽).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4. ‘민족’은 대중의 생존기반

 

지난 3주 동안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 임지현 한양대 교수가 민족과 탈민족의 관점에 서서 논쟁을 펼쳤다. 안병욱 교수는 한국 사회가 오래 유지해온 공동체적 유대관계야말로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이끈 원동력이었다면서 세계화 시대 초국적 자본의 힘을 견제할 수단으로서 저항적 민족주의의 유효성을 강조했다.

박 교수와 임 교수는 탈민족 담론을 펼쳤다. 박 교수는 조선 말기까지 한국 사회가 동질성보다는 다양성이 두드러졌다면서 민족 관념의 실체를 부인했다. 그는 민족주의의 가장 큰 폐단은 계급 모순이라는 기본적 문제를 호도하는 것이라면서 “국제주의적 계급 노선, 가깝게는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의 ‘피해자 연대’”가 진보의 거시적 담론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임 교수는 신자유주의는 서울과 뉴욕의 중심이 연합하는 지배엘리트의 국제주의 네트워크를 표상한다면서 민족주의적 저항방식은 지배엘리트 간의 국제적 네트워크에 대한 인식을 흐리고, 피지배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해친다고 지적했다.

김동춘 교수는 이 글에서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가 대한민국 국가주의의 양상을 점점 지니게 되었다면서도,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단위를 무시하고 사회변혁을 구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라고 했다. 민족 혹은 민족주의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힘이기에 이를 병리적인 것 혹은 ‘특수한 것’으로만 간주하는 시각은 사태의 한 쪽 측면만 강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 주에는 안병욱 교수가 그동안 제기된 탈민족 시각 등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다시 정리해 보여준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민족의 개념에는 종족적 동질성과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의미가 모두 함축되어 있다. 곧 민족에는 초역사적·자연적 성격이 언제나 전제되는 경향이 있지만, 시민권의 보유자라는 의미 역시 포함되어 있다. 유럽 등 서구에서는 민족이라는 단위는 전쟁 등 봉건질서의 해체와 근대 헌법과 시민권 형성 국면에서 만들어졌고, 자국이 제국주의 침략국으로 나서면서 훨씬 강화되었지만, 근대화·산업화에 실패한 주변부에서는 민족국가 실현의 이상 속에서 만들어진 측면이 크다.

민족주의는 근대화 과정에서 사회적 응집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유사종교인데, 그것이 민족의 자연적 성격을 강조할 경우에는 우익보수주의 혹은 극우 파시즘의 양상을 지닐 수 있고, 주권·시민권 확보의 내용을 강조하면 제국주의·시장주의에 의해 붕괴된 ‘공동체’ 복원이라는 이상을 지니기도 한다. 특히 과거 식민지·종속국의 민족주의는 정치공동체 혹은 ‘사회 만들기’ 프로젝트였다.

어떤 경우든 민족주의는 국가 혹은 사회 내에서 계급적·사회적 차별이 없다고 가정하고 있다. 파시즘의 쓰라린 기억을 가진 서구에서 ‘민족주의’는 주로 부정적 현상을 지칭한다. 이 경우 국가 주도의 민족주의는 애국주의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한데, 어떤 경우든지 내부의 정치적 억압, 계급 간의 대립을 축소하고 대중을 국가에 복종시키기 위한 통치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사회 내의 소수자나 소외된 자들을 억압·기만하기 위한 체제유지적 이데올로기만은 아닌데, 근대 민족국가 수립운동은 헌법적 질서, 시민권 확보, 사회의 공공성 유지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주권의 상실, 민족국가의 부재는 약자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다. 일제 식민지,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체제가 누구를 가장 고통스럽게 했는가를 반추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대중들의 실천으로서 민족주의는 그들의 생존조건을 지키기 위한 운동의 양상을 지니기도 한다.

 

‘민족주의’눈 두개의 얼굴 지녀
국가 주도하면 ‘애국주의’ 양상
대중 실천하면 ‘저항운동’ 면모

 

그래서 민족주의는 누구에 의해, 어떤 정치경제 국면에서, 어느 정도의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 나오는가에 따라 매우 상이한 성격을 지닌다. 과거의 저항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인권·자유의 가치를 내장했지만,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는 전쟁·폭력·차별과 결합된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 자본가적 국가주도하에 급속한 경제성장을 추구하고 있는데, 중화민족주의는 중국의 자본주의화와 더불어 기지개를 펴고 있다. 중화민족주의는 외적으로는 석유자원 확보를 위해 수단의 다르푸르 학살과 미얀마의 인권탄압을 묵인하고 있고, 내적으로는 소수자나 노동자 탄압, 언론 통제를 수반한다. 그래서 반제국주의에서 출발했으나 이제는 국가주도의 성장주의의 내용을 갖는 중화민족주의는 동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의 우경화보다 더 위험한 정치적 힘이다.

그 동안 반식민지·반외세·분단극복의 내용을 갖고서 저항 이데올로기로 기능해 왔던 한국의 민족주의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점차 보수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있다. 1990년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는 분단 통일 민족주의의 측면보다는 일종의 대한민국 국가주의의 양상을 점점 지니게 되었다. 민족주의의 보수화·우경화는 앞에서 시민권·주권 확보의 측면을 강조하기보다는 민족의 자연적 성격을 강조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이익과 자본의 이해를 강조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지난번의 황우석 사태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미국 따라잡아서 1등 하기, 경제지상주의, 국가주의 등 민족주의의 모든 부정적 요소들이 결합되어 나타난 황우석 신드롬은 민족주의의 맹목적 성격과 위험성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그러나 한국이 자본의 수출국이 되었기 때문에 한국 민족주의가 이제 퇴영적 측면만 갖는다고 보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다. 과거 식민지 시절의 저항 민족주의가 제국주의/경제주의에 의해 자유와 시민권이 억압되는 현실을 벗어나서 새로운 국민국가 곧 사회를 건설하려는 열망을 담고 있었듯이, 오늘 한반도에서 항구적 평화체제를 수립하고, 신자유주의 광풍에 맞서서 대중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는 요구는 모두 국가 재형성 혹은 사회 재형성의 과제를 포함하고 있다. 분단이라는 특성 때문에 한반도에서 민족주의가 여전히 진보적 요소를 약간이나마 견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터인데, 어쨌든 분단극복과 통일국가건설의 지향이 인권·평화·민주주의· 공공성 확보와 같은 가치의 인도를 받는 한 그것은 진보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것의 최대의 수혜자는 남북한의 민중들일 것이다.

 

최근 ‘국가주의’ 우경화 뚜렷하나
민족은 관념 아닌 구체·사회적 힘
통일민족주의 수혜자는 남북한 민중

 

 

물론 현재의 지구화 국면에서 설사 남북화해와 분단체제의 제한적 극복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대자본의 프로젝트일 가능성이 크고, 그 후 만들어질 사회가 지역·세대·계층으로 극도로 차별화된 사회가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의 지구화가 곧 지구적 대안 설정, 지구적 운동의 연대를 보장한다는 전제하에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단위를 무시하고 사회변혁을 구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세계경제, 지구화된 질서 속에서도 쉽게 이전되거나 사라지지 않으면서 대중의 정신적·물질적 생존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 그것이 오늘날 민족(국가)의 실제 내용이다. 문화와 언어, 자연자원, 기술과 교육 인프라, 사회복지 시스템, 중소기업을 포함한 영세기업, 노동자와 농민 및 그들의 재생산 기반, 역사적 기억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민족 혹은 민족주의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정책·제도·정치의 기반이 되는 무시하거나 거역할 수 없는 구체적인 사회적 힘이다. 따라서 민족, 민족주의를 병리적인 것 혹은 ‘특수한 것’으로만 간주하는 자유주의와 탈국가주의 좌파 시각은 사태의 한 쪽 측면만 강조한다. 물론 이제 자본의 수출국이 되고 다인종 국가로 변해가고 있는 한국에게 과거식의 단일민족의 신화나 자민족중심주의는 이제 구시대의 유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공격은 미국발 대자본의 이해에 기초한 경우가 많다는 점, 과거 제국주의 논리의 현대판인 자유무역, 시장만능주의가 그것을 즐긴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의 중화민족주의와 일본의 우익민족주의의 틈바구니에서 경제적 생존과 문화적 자존을 도모해야 하는 한국인들에게 반미 통일 민족주의가 대안인가, 아니면 동아시아 시민사회 수립, 노동자의 연대가 대안인가? 이에 대한 답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한국 민중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방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남북한 간 전쟁과 갈등을 막는 것, 우리가 원하지 않게 전쟁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첫째요, 한반도를 아우르는 헌법적 정치단위가 수립되어 경제적 약자들을 법이나 제도로 보호해 주는 것이 둘째요, 성장주의 독재의 뒤안길에서 소외된 중국·동아시아 인민들의 처지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갖고, 공동의 이상을 향해 연대를 하는 것이 셋째다. 김동춘/성공회대 교수

 


김동춘 교수는 1959년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한국 노동자의 사회적 고립’을 주제로 하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과거사 정리 및 한국사회의 기업사회화 현상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근대의 그늘>(2000년) <전쟁과 사회>(2000) <미국의 엔진>(2004) <1987년 이후 한국사회 성찰>(2006) 등이 있습니다.

 

계급-민족, 만나야 강력해진다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한겨레  
 
 
» 주변국 문제에 있어 한국사회는 중·일과 미국에 대한 ‘이중잣대’가 존재한다. 민족의식 ‘과잉’ 현실과 ‘숭미사대주의’가 공존하는 셈이다. 동북공정 중단 촉구 시위(왼쪽)와 독도 관련 시민단체의 반일 시위 현장(오른쪽). 〈한겨레〉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5. 현실적 역할 엄존한다.

 

지난 4주 동안 민족과 탈민족 혹은 중도적 관점의 논자 4명이 논쟁을 펼쳤다.

논점은 크게 두가지였다. 하나는 근대 이전 민족 관념의 실체가 있었는냐의 문제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공동체적 유대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진단했다. 반면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조선 말기까지 한국 사회는 동질성보다 다양성이 강했으며 동질적인 것은 지배계급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불과했다는 시각을 보였다.

또 다른 논점은 민족주의가 피지배 계급 저항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다. 안 교수는 공동체적 유대관계야말로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이끈 원동력이었다면서 세계화 시대 초국적 자본의 힘을 견제할 수단으로서 저항적 민족주의의 유효성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민족주의의 가장 큰 폐단은 계급모순이라는 기본문제를 호도하는 것이라 했고 임지현 한양대 교수도 민족주의적 저항방식은 피지배 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해친다고 했다.




두 관점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1990년대 이후 한국 민족주의가 대한민국 국가주의의 양상을 점점 지니게 되었다면서도 구체적인 사회적 힘인 민족을 무시하고 사회변혁을 구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고 했다. 안 교수는 이 글에서 민족의식이 계급연대를 약화시킨다는 비판이 실사구시적 설명이 부족하다면서 계급연대는 민족공동체와 연결되었을 때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했다. 6회와 7회는 권혁범 대전대 교수와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각기 주장을 펼친다. 애초 5회로 연재를 마칠 계획이었으나 이 주제에 대해 학계 안팎의 뜨거운 관심이 쏟아져 논쟁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2회 늘리기로 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진보적 민족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논지를 펼쳐 달라고 청탁을 받기는 했지만 평소 필자가 민족주의와 관련된 논쟁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흔히 그런 논쟁은 서양의 이론을 끌어다 한국사회 연구자들을 비판하는 식으로 전개되어 왔었다. 그런데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한국사회를 연구한 성과란 서양에 비해 크게 뒤진다. 아직도 기초적인 사실규명에 급급한 처지여서 연구성과에 바탕을 둔 이론적 체계화가 크게 미흡할 수밖에 없다. 그런 형편에서 서양의 이론을 끌어다 전개하는 관념적이고 추상적 논쟁이 실제적이고 균형 있게 이루어지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한국사회에 통용되는 민족주의적 가치를 두고 허심탄회한 논의를 이끌어 내보고 싶어 청탁에 응하여 기고했다. 무엇보다 이번 논의를 기해 한국사회에 대한 심화된 분석이 이루어지고 세계사적인 시야가 확보될 수 있기를 기대한 것이다.

최근 4개 텔레비전 방송은 서로 앞다투어 가면서 고구려 시대를 소재로 한 연속사극을 방송해오고 있다. 역사를 소재로 창작된 드라마일 뿐이지만 이른바 중국 동북공정 문제로 야기된 민족주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분명 올바른 역사 인식과 거리가 있는 우리 사회의 과장된 민족영웅사관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가 하면 독도문제로 인해 거의 주기적으로 일본을 향한 비판적 공격이 촉발되곤 한다. 상대국들이 문제를 야기하고 빌미를 제공한 경우라 하더라도 우리사회는 이런 문제에 필요 이상으로 과민하게 반응해 온 것이다. 때로는 그동안 쌓인 감정의 응어리를 쏟아내듯 맹목적으로 대응하곤 한다. 이런 모습들이 한국사회만의 고유한 현상은 아니겠지만 어떻든 세련되지 못한 낙후한 역사인식인 것이며 때로는 광풍에 가깝다고 할 만큼 과도한 점이 있다.

 

동북공정·독도 관련 맹목적 반응
민족인식 ‘과잉’ 측면 방증하지만
중·일 아닌 미 정부 비판은 불가능
‘숭미사대주의’ 해법 ‘민족’에 있어

 

이런 예에서 드러나듯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적 인식이 과잉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민족 정서를 건들면서 파고들면 쉽게 흔들리곤 했다. 거기에는 대중의 정서를 악용해 온 정략적 의도, 상업주의, 기득권 세력의 책동들이 얽혀 있다. 그에 따라 때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의가 불가능하게 되고 그런 정서를 악용한 마녀사냥식 여론몰이와 사회통제가 횡행해 왔다.

그와 같은 과잉된 현상이 두드러진 경우를 크게 세 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우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 중국과 관련되는 역사와 영토 문제 등에서 쉽게 드러난다. 말하자면 대외 관계에서 살펴볼 수 있는 민족주의적 대응이다. 그러나 다 같은 대외 문제이지만 미국과 관련해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진다. 현재 반세기가 넘게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어찌됐건 민족 내부문제 때문에 주둔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초국적 자본의 안전판 구실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정부를 비난하는 행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만일 미국 정부를 비난한다면 사회적으로 무사히 넘어가지 못한다. 예컨대 어떤 경우라도 학문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함에도 강정구 교수는 한국전쟁에서 수십만 명의 인명이 희생된 데 대한 맥아더의 책임을 논했다고 하여 2심 재판까지 진행된 현재 유죄판결을 받은 상태이다. 정치인들은 훨씬 제약이 심해 만일 발언 가운데 실수로라도 반미적 표현이 들어간다면 그런 경우 정치를 그만두어야 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한국에 민족주의란 존재하기나 한 것인지. 민족주의가 아니라 숭미사대주의라는 설명이 합당할지 모르겠다. 이는 19세기 서양에서 시민적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민족주의가 형성되던 조건과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민족주의적인 인식이 강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이주노동자 문제가 상징하는 것처럼 저성장국 사람들을 상대로 표출되는 흔히 졸부 근성이라고 비난받는 일부 한국인들의 행태이다. 참으로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부끄러운 모습들이다. 그러나 이는 일부 사람들의 일그러진 행태라고 봐야지 그것을 민족성 내지 민족주의 탓으로 환원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는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일시적 부작용이며 한때 일본관광객들에게서 제기되었던 문제와 비슷한 현상이다. 개개인들의 성숙된 인식이야말로 공동체를 매개로 형성되는 자율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오히려 공동체적인 유대관계를 순기능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사회를 마치 시대착오적 민족주의가 전횡한다고 하는 획일적 시각으로 재단하여 비난하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왜곡된 편향이다. 개인들의 일탈을 민족적인 것으로 확대 인식하는 것은 지난날 일제침략을 위한 식민주의 사관과 다르지 않다.

 

 

이주노동자·저성장국 폄하 문화
‘민족 공동체의식’으로 극복해야
“민족이 계급연대 저해” 주장보다
분단·차별 대응 방안 모색해야

 

셋째로 가장 맹목적 행태는 안으로 노동자 파업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목도하게 되는 우리 사회의 파시즘적 반응이다. 한국사회에서 자본은 파시즘적 비호를 받으면서 무소불위의 횡포를 자행하지만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은 권력의 야만적 탄압으로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마저 양보해야 한다. 자본을 중심으로 기득권 세력이 주도하는 여론 몰이에 혹세무민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삼성재벌과 같은 공룡이 탄생하고 나라는 삼성의 수중에서 농락당하는 형국이 되었다. 자본의 시장논리는 노동자의 파업권이 확보될 때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데도 삼성은 국가의 공권력을 이용해 그러한 최소한의 공리마저 무시해 오다가 초역사적인 괴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자본과 노동계급관계의 차원을 넘는다. 또 계급연대만으로 해결되기도 어렵다. 더욱이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초국적 자본의 공세가 더해지면서 노동자들의 의식은 오히려 더 열악해지고 있다. 현재 비정규직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노동계의 동향은 이를 웅변해주고 있다. 지난 1990년대 한국의 노동운동이 가장 활성화되어 있을 때와 비교한다면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당시 노동운동은 민족민중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곧 노동자의 계급연대란 민족공동체와 연결되었을 때 더 강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탈민족을 향해 나가는 세계사의 흐름을 부인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의식이 어느 시대 어느 조건에서도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현재의 한국적 현실에서 불가피한 측면에 대해 변명한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세계사의 흐름에 조응하는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 탈민족을 내세우면서 민족주의적 주장들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비판할 뿐 설득력 있는 대안을 말하지는 않고 있다. 계급연대를 말하지만 이에 대한 실사구시적인 설명은 부족하다.

때문에 그동안 민족의식을 매개로 지탱해온 한국사회의 공동체적 기반과 역사성을 탈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고 허물어낸 틈새로 초국적 자본의 공세가 펼쳐지는 것은 아닌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민족의식이 계급연대를 저해한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낡은 시대의식(민족주의)이 세계사적인 새로운 흐름(탈민족 계급연대)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인지 논리적으로 모순된 인식을 주장하고 있다.


 
»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
 
지금 필요한 것은 민족주의의 개념 정의나 이론도 아니고 또 민족의식에 책임을 전가하는 일도 아니다. 현재 한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들인 민족분단, 민중 차별과 갈수록 열악해지는 생존 조건, 신자유주의 초국적 자본의 야만적 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지혜를 모으는 일이다. 그 점에서 여전히 진보적 민족주의의 할일은 남아 있는 것이다.

안병욱/가톨릭대 교수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는 1948년생으로 조선후기 사회변동 문제와 민중운동·민주화운동에 관한 연구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동안 과거청산과 학술 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최근 국가정보원 진실위원회 보고서를 엮어냈습니다.

 

신자유주의 못 막는 ‘민족’을 땅에 묻어라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 6. 용도폐기 할 때
 
우리시대 지식논쟁 /

 

6. 용도폐기 할 때

지난 5주 동안 네 명의 논자가 민족주의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을 펼쳤다. ‘민족’ 진영의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와 ‘탈민족’ 진영의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임지현 한양대 교수 그리고 중도적 견해를 가진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현 단계 민족 담론의 유효성과 한계를 주제로 비판과 반비판을 전개했다.

이번 논쟁의 큰 축은 ‘저항적 민족주의야말로 초국적 자본의 힘을 견제할 수단’이라는 안 교수의 입론을 따라 형성됐다. 그는 계급연대는 민족공동체와 연결되었을 때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민족주의의 가장 큰 폐단은 계급모순이라는 기본문제를 호도하는 것이라고 맞받았다. 임 교수도 민족주의적 저항방식은 피지배 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해친다고 했다. 김 교수는 ‘민족 현실론’을 폈다. 한국 사회에서 민족은 구체적인 사회적 힘이기에 이를 무시하고 사회변혁을 구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는 이 글에서 민족주의의 본질을 배제와 차별로 규정했다. 민족이 최고의 가치가 되면서 생명·평등 등 보편 가치가 그 아래 종속되고 개체적 정체성과 ‘개인해방’은 사소한 것으로 전제된다는 것이다. 그는 ‘민족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부국강병주의’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권 교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의 근거는 민족이 아니라 개발독재가 파괴한 작은 공동체에서 찾아야 한다면서 이제는 민족주의를 땅에 묻어야 할 때라고 단언했다. 이번 논쟁의 마지막 회가 될 다음 주에는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견해를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제3세계의 저항적 민족주의와 제1세계의 민족주의를 뭉뚱그려서 한통속으로 간주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자의 정당방위적인 성격과 후자의 공격적·제국주의적 성격을 구별하지 않는 위험을 갖기 때문이다. 사카이 나오키 등 제1세계 지식인들의 ‘탈민족주의론’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중심부-주변부의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관계를 은폐하는 기능을 맡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자와 후자의 유사성을 간과하는 진보적 민족주의론에도 큰 문제가 있다. 여전히 ‘우리’와 ‘남’을 배타적으로 설정하는 프레임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 민족은 동질적 집단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하고 상호 모순적인 성별 계급 등 간의 충돌과 이해관계를 무화시킨다. 계급의식은 몇몇 논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민족공동체’에서 더 강력해지는 게 아니라 약화된다. 진보진영에서 자주파와 평등파의 논쟁이 일어나는 이유다. ‘우리’의 강조는 ‘내부’의 문제를 덮어버리고 지배적 소수의 이익을 ‘우리 민족’이라는 언술적 가면으로 포장한다. 개인=사회=민족=국가=기업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것을 ‘삼성 민족주의’라고 부르면 과장일까?

다른 한편으로는 ‘남’ 역시 동질적인 집단으로 타자화된다. ‘미국놈’ ‘미국사람’ ‘미국정부’ ‘미국 시민사회’가 똑같은 이해관계를 지닌 하나의 단위로 간주된다. 거기서 이삼성의 표현대로 ‘한국 내 냉전세력과 미국 내 군사주의 세력 간의 비대칭적 동맹’을 읽어내기란 어렵다.

민족주의는 민족 및 국가의 영원한 유지와 번영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집단주의다. 따라서 생명·평등·인권·자유 등의 보편적 가치는 그것 아래 종속되며 개체적 정체성과 ‘개인해방’은 ‘사소한 것’으로 전제된다. 또한 사회적 소수자나 타민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자동적으로 생산한다. 그것은 ‘일부 사람들의 일그러진 행태’나 ‘일시적 부작용’이 아니다. 배제와 차별은 민족주의의 본질이다. ‘가장 유용한 유대관계는 민족의식’(안병욱)이라는 주장은 다양한 집단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위계질서화하는 기능을 한다. 민족이 최고고 그 다음은 계급이고, 성별이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계급·젠더 문제 이전에 국가 간의 이해 대립이 초래한 모순에 더 좌우되고 있다”(안병욱)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여성에게는 민족보다 젠더가 더 중요한 기준일 수가 있고 장애인에게는 장애여부가 계급이나 민족보다 우선하는 범주가 될 수 있다.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던 내 후배(장애인)는 결국 캐나다 이주를 택했고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 홍석천은 네덜란드로 떠나고 싶어했다. 국적을 넘어서는 월경적 주체를 지향하는 여성주의자에게도 민족은 부차적인 것일 수 있다. 탈민족적 주체들을 민족의 하위 단위로 포섭할 때 그것은 다중적인 주체의 형성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만다. 민족 및 계급해방 다음에 여성해방을 순차적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해방론’은 이미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와 ‘남’을 배타적으로 구분
우리 안의 다양한 모순 무화시켜
오히려 계급의식 약화 불러오고
‘남’에 대한 억압과 차별 자동생산

 

고정적 우선순위를 두면 서열화와 억압이 발생한다. 가령 사회운동이 여성운동이나 장애인운동에 ‘앞서’ 국가보안법 철폐에 ‘집중’하자는 것은 현실을 단순하게 인식한 것이다. ‘진정한 진보’라는 말은 이래서 위험하다. 우선 순위는 상황과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민족을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그 기준에 따라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는 것은 이성애-비장애인-남성 중심적인 진보적 민족주의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려는 시도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맞설 수 있는 힘이 민족주의로부터 나온다는 주장과 민족주의에 대한 공격이 ‘미국발 대자본’의 이해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지적(김동춘)은 어떤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전국적으로 일어난 ‘금 모으기 운동’과 ‘선진국 음모론’은 ‘내부’의 단결을 외치며 ‘외부’를 향해 시선을 돌리게 함으로써 되레 재벌에 대해 면죄부를 주었고 한국사회의 내부적 변혁을 오히려 가로 막는 역할을 담당했다. 민족이라는 코드를 통한 한국의 대자본과 한총련의 입장이 이렇게 유사한 때가 있었는가?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닫힌’ 민족주의나 ‘열린’ 민족주의 간에 둘 다 낡은 부국강병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전통적 신분질서를 무너뜨리는 진보적 구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발전주의를 뒷받침하며 그것이 유발하는 모순을 정당화한다. 후진국에 대한 착취나 생태계의 파괴를 ‘우리 민족’의 번영과 ‘힘을 키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중앙집중적 산업문명에 의한 자연의 정복과 약탈, 환경 공공재 파괴에 대한 고려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요즘 유행하는 ‘선진국’ 담론, 통일 담론에도 이런 점이 깊숙이 들어가 있다. ‘국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통일을 하려는 이유도 ‘한민족의 경제력 증강’을 위한 것이다. 진보적 민족주의는 국내·국제의 불균등발전과 재분배에 주목하지만 생태적 재앙을 일으키는 ‘부의 확대재생산’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전통질서 깼지만 ‘부국강병’ 내포
후진국 착취·생태계 파괴 정당화
세계화 맞선 국제연대에도 힘못써
친생태적 마을공동체 복원이 대안

 

 

자본과 상품이 무차별적으로 국경을 넘어서는 초국적 자본주의 시대에 사회운동-노동·환경·여성·비정규직·이주자 운동이 민족이라는 코드에만 의존해 ‘국제연대’를 할 수 있겠는가? 점점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은 민족주의에 입각한 일국적 관점과 운동으로는 불가능해지고 있다. 개인을 넘어서면서도 민족에 안주하지 않으며 민족국가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초국가적 시민사회 및 시민운동의 영역이 점점 확대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할 수 있는 근거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개발독재가 파괴한 작은 공동체, 곧 친생태적 풀뿌리 ‘마을 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세계화에 반대하면서도 동시에 ‘삶의 구체적인 테두리’(김우창)를 없애나가는 민족주의로 퇴행하는 것을 막으려는 녹색의 정치학이다.

민족주의는 ‘구체적인 힘’이고 민족을 무시한 ‘사회변혁을 구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김동춘)이라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30년대의 파시즘도 현실적 힘이 아니었던가? 민족의식이 부정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면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개인이나 세력은 그것을 견제해야지 따라가야 할 것인가?


 
제3세계의 진보적 민족주의가 한때 가졌던 긍정적 역할과 힘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것이 가졌던 반냉전주의 및 반제국주의적 성향은 정당하다. 하지만 후자가 결국 주변부 부르주아의 자본주의적 헤게모니에 흡수되고 말았던 역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21세기의 세계자본주의체제에 대한 고민과 대안 모색에서 필요한 것은 탁석산이 인용한 지수걸의 말대로 민족주의에 대해 ‘겸허한 장례식’을 치르는 일이다.

권혁범/대전대 교수

 


권혁범 교수는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매사추세츠대(엠허스트)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주요 관심분야는 민족주의·환경·페미니즘입니다. 지은 책으로는 <민족주의와 발전의 환상>(2000), <국민으로부터의 탈퇴>(2004),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2006), <우리 안의 파시즘> (2000, 공저) 등이 있습니다.

 

핏줄의 민족’ 버리고 ‘주체적 우리’ 고민할 때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한겨레 강성만 기자 김진수 기자
 
 
» 이주노동자들과 시민단체가 지난 9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서 함께 연 ‘이주노조 표적탄압 분쇄를 위한 결의대회’ 현장. 김상봉 교수는 ‘나’는 민족의 범주 속에서 참된 의미의 주체로서 ‘나’를 인식하고 실현한다면서, “과연 우리는 누구인지를 서로 묻고 같이 대답을 찾아가”야 할 필요성과 의미를 강조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우리시대 지식논쟁 /

 

7. ‘민족’ 해체는 절박한 과제

이번 주로 모두 일곱 차례에 걸친 ‘민족주의 논쟁’을 마무리한다. 1, 5회의 안병욱 교수를 비롯해 박노자·임지현·김동춘·권혁범·김상봉 교수 등 모두 여섯 학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 가운데 안병욱 교수가 가장 적극적으로 민족주의의 의미를 강조했다. 그는 저항적 민족주의야말로 초국적 자본의 힘을 견제할 수단이라면서 계급연대가 민족공동체와 연결되었을 때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박노자·임지현·권혁범 교수는 탈민족주의 시각을 폈다. 박 교수는 민족주의가 계급모순이라는 기본문제를 호도한다는 점에 강조점을 뒀다. 임 교수는 피지배 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해친다는 점을 강조했다. 권 교수는 ‘민족’이 최고의 가치가 되면서 생명이나 평등 등 보편가치가 종속된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중도 시각의 김동춘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민족은 구체적인 사회적 힘이기에 이를 무시하고 사회변혁을 구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는 ‘민족현실론’을 폈다.

마지막 논자인 김상봉 교수는 서양 이론에 기댄 소모적 논쟁보다는 “과연 우리는 누구인지를 서로 묻고 같이 대답을 찾아가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민족 해체로 민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서, “민족과 국가가 폭력적인 홀로 주체로 군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것을 끊임없이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능동적으로 형성해가야 한다고 했다. 다음 주제는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민족주의가 ‘집단적 자기’에 대한 집착이라면, 민족주의를 해체하는 것은 지금 한국에서 절박한 실천적 과제다. 아집이 어리석은 것은 집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집이란 자기동일성에 대한 집착인데, 살아 있는 어떤 것도 순수한 자기동일성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동일성이란 플라스틱처럼 죽은 사물의 특징인 것이다. 하물며 개인도 아닌 집단인 민족을 두고 고정된 동일성을 몽상하는 것은 계몽된 시대에 어울리는 자기인식이라 말하기 어렵다.

게다가 한국사회에서 민족의 구분기준은 너무도 야만적이다. 현행 중학교 도덕 교과서는 민족을 “씨족이나 종족, 부족 등의 단어와 마찬가지로 공통의 조상을 가진 한 핏줄로 이루어진 집단”이라고 정의한 뒤에 너무 자연스럽게도 민족을 “하나의 큰 가족”이라고 이르고 있다.(도덕 II, 156) 민족을 가족과 같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맞지 않은 것은 물론이지만, 민족이 핏줄로 규정되는 나라에서 민족 구성원들에게는 맹목적 충성이 강요되는 반면, 조금이라도 핏줄이 다른 사람들이 사회에서 배제되는 것은 세계화된 시대에 정말 심각한 질병이다.

한편에서는 차라리 감옥에 갈지언정 군대 가서 총을 들 수 없다는 젊은이들은 핏줄이 같다 해서 군대에 끌려가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태어나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음식을 먹고 살면서 이 사회에 동화되어 살고 싶어도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군대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다. 새로 결혼하는 일곱, 여덟 쌍 중의 한 쌍이 국제결혼을 하는 나라에서 계속 이런 식으로 핏줄의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린다면, 머지않아 우리 사회는 이 사회의 주류에게 까닭 없이 배제되고 차별받은 소수자들의 좌절과 증오가 집단적으로 분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핏줄’ 로 규정되는 민족주의는 주체성 억압·타자와 소통 방해
“민족이 세계화의 대안” 주장은 질병으로 다른 질병 고치는 격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가 근절되지 않는 까닭은 민족주의 없이는 개인을 국가의 부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인간으로 훈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 교과서의 첫 페이지에 실린 국기에 대한 맹세는 우리에게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요구한다. 조국은 언제나 민족을 팔아 충성을 강요한다. 그렇게 홀로주체로서 군림하는 조국과 민족 아래에서 개인은 주체성을 빼앗기고 전체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런즉 민족주의는 개인의 주체성을 억압하고, 타자와의 참된 만남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타파해야 할 이데올로기이다. 더러는 계급이 민족과 만나야 강해진다거나,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그나마 민족주의가 자기를 지키는 방파제가 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질병을 다른 질병을 통해 고치겠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 사회의 도를 넘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이제는 노골적인 인종주의로까지 타락한 상태이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호히 국가주의에 저항하고 민족주의를 내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민족주의를 비판할 뿐 그것의 존재 근거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민족주의라는 질병을 결코 치유할 수 없다. 민족은 실체가 아니라 주체이다. 주체성은 자기인식에 존립한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스스로 욕구할 줄 모르면서 주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자기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꿈과 동경 속에서 이상적 자기를 욕구하는데, 안정된 자기인식은 기억 속의 자기와 동경 속의 자기가 조화를 이룰 때 형성된다.

이 기억과 동경의 내용이 무엇이든지간에, 자기인식은 필연성과 자유라는 두 계기 사이에서 생성된다. 필연성은 고정성으로서 이를 통해 나의 존재는 안정성을 얻는다. 반면 자유는 유동성이지만, 이것이 없다면 나는 노예 상태에 떨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오직 자유로운 필연성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긴장 속에서만 자기를 주체로서 인식하고 실현하게 된다. 고정되어 주어진 나의 존재로부터 자유롭게 나를 형성할 때 비로소 나는 자기를 온전한 주체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함께하는 주체들의 공동체가 나라
민족이란 그런 나라 이루는 집단
국가 비판하며
능동적으로 형성할 ‘우리는 누구인가’ 묻고 모색해야

 

그런데 나의 주체성은 결코 고립된 홀로주체성일 수 없다. 나의 기억과 동경은 언제나 너의 기억 및 동경과 맞물려 있다. 그런즉 나는 오직 너와 더불어 우리가 될 때, 참된 주체가 된다. 이것이 서로주체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체성의 현실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연성과 자유가 같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가족은 필연적 공동체일 뿐 자유의 현실태는 아니다. 반면 정당이나 기업 같은 사회적 결사체는 유동적이고 자유로운 공동체이지만 필연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이 점에서는 계급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가족 속에서는 자유의 결여 때문에, 그리고 계급 속에서는 필연성의 결여 때문에 참된 자기를 발견하지 못한다.

필연성과 고정성을 가지면서도 자유의 현실태인 공동체가 바로 나라다. 나라는 내가 그 속에서 나고 자랐다는 점에서 이미 주어진 나의 과거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내가 적극적으로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의 현실태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사람이 다른 어떤 공동체보다 나라 속에서 자기의 존재를 강렬하게 확인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민족이란 그런 나라를 이루는 집단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런 한에서 민족이란 인종처럼 생물학적인 범주가 아니라 철저히 정치적인 범주로서, 그 속에서 나는 참된 의미의 주체 곧 시민적 주체로서 나를 인식하고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을 계급적 연대나 다른 탈민족적인 만남 속에서 해체하자는 제안은 세계시민적 주체성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제안이지만, 민족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이런 제안은 온전한 나라의 형성이라는 과제를 방치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현실적으로 규정하는 국가기구와 법률을 결국은 악한들의 손에 내맡기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민족과 국가가 폭력적인 홀로주체로 군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능동적으로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나라를 서로주체성의 현실태로서 우리의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 김상봉 교수 / 전남대
 
하지만 그런 나라를 같이 만들어야 할 서로주체인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수백년 동안 이 땅에 살아왔지만 분단되어 반세기 이상을 떨어져 살아온 사람들과 새로이 이 땅에 살기 시작한 사람들과 이 땅에 살다가 다른 나라로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의 우리로 불러모을 수 있는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어떤 것일 수 있는가? 민족의 문제는 오직 이 물음에 올바르게 대답할 수 있을 때에만 해결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민족의 역사를 개방적으로 해석하는 박노자의 상상력과 고체화된 민족과 국가를 비판하는 권혁범의 이성과 온전한 나라를 형성하려는 김동춘의 열정을 모두 필요로 한다. 그런즉 지금은 민족주의에 대한 서양 이론의 한 끄트머리씩을 붙잡고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 과연 우리는 누구인지를 서로 묻고 같이 대답을 찾아나가는 것이 더 생산적인 일일 것이다.

김상봉 교수/전남대

 


김상봉 교수는 1958년생으로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칸트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학벌없는사회’를 만들어 전 사회적인 반학벌 운동을 전개했으며 현재는 5·18에 대한 철학적 해석에 연구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대표 저서로는 <서로주체성의 이념> <도덕교육의 파시즘> <학벌사회> <나르시스의 꿈>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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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실체 없는 ‘유목주의’ 이미지만 떠돈다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 노마디즘은 저항의 철학인가 침략의 철학인가? 홍윤기 교수는 노마디즘이 실체는 없이 이미지만 떠도는 실험 단계의 기획에 불과하다는 관점을 보였다. 칭기즈 칸의 동상, 컴퓨터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어린이, 태극기를 들고 있는 한국 국적 취득자들(왼쪽부터).〈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 논쟁 /

 

① 개념부터 확정해야

 

유목주의로 옮겨지는 노마디즘(nomadism)이 국내에 본격 알려진 시기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저 〈천의 고원〉(1980) 해설서 〈노마디즘 1·2〉가 나온 2002년께다.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가 쓴 이 책에서 노마디즘은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붙박이지 않고 끊임없이 탈주선을 그리며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사유의 여행”으로 규정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특히 그들의 저서에서 “국가로 상징되는 고착된 가치에 맞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도구”로 ‘전쟁기계’를 노마디즘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로 내세웠다.

노마디즘은 지난해 ‘농사꾼 철학자’ 천규석씨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란 책을 내놓으면서 논쟁이 일었다. 천씨는 다리를 놓고 길을 내며 질주하는 유목의 세계에서 반생태성과 비지속성 그리고 ‘침략과 파괴의 역사’를 읽어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노마디즘은 칭기즈 칸의 세계로 회귀하려는 복고주의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외형상의 유목이나 움직임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홍윤기 교수는 이번 글에서 노마드라는 용어 안에서 수많은 노마드들이 서로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의미를 갖고 경쟁하거나 대립·공존하고 있음을 우선 지적한다. 자크 아탈리류의 ‘시장 노마드’나 첨단기기로 사이버공간을 가로지르는 ‘고급소비자 노마드’라고 해서 진정한 노마드가 아니라고 배제되어야 할 특별한 이유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홍 교수는 노마드들이 갖고 있는 의미가 특정 규정으로 결정력을 발휘하는 ‘개념’으로 총집되지 못하고 다감각의 ‘이미지’로 교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노마디즘은 ‘개념’과 실행’이 부족한 탈현실 기획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노마디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나의 응답부터 말하자면, 아직 ‘어떻게’ 봐야 할 ‘그 어떤’ 노마디즘 같은 것은 우리 생활 안에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 말을 써서 모종의 효과를 유발하고자 하는 이미지들은 우리 주변에 넘친다. 그리고 이 효과들은 상호 충돌한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변화무쌍한 그 용어의 용례들부터 정리하고 나서야 가능할지 모른다.

1.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공저 〈천의 고원〉이 역사학을 제외한 인문학계와 일부 사회학자들, 그리고 학문적 유행에 민감한 언론계, 소비자 취향에 집중하는 사업계 등의 지도적 인사들로 하여금 노마디즘을 일상적으로 입에 달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들은 “1227년”이라는 암호 같은 연대를 앞세운 이 책 12장의 표제를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라고 붙이면서 “전쟁기계는 국가 장치 외부에 존재한다”는 알 듯 모를 듯한 진술로 그 장을 시작한다.(유목민의 최고 상징 격인 칭기즈 칸은 바로 이해 8월18일 서하(西夏) 정벌 중 병사했다.) 이때 “전쟁”을 무엇으로 이해했든 들뢰즈·가타리는 전쟁과 관련된 유목민의 역동성 같은 것이 “국가”의 영토성을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탈국가적·탈경계적 추진력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했다. “전쟁기계는 유목민의 발명품이다”라고 주장하는 두 사람은 “불복종 행위, 봉기, 게릴라전 또는 행동으로서의 혁명이라는 반국가적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전쟁기계가 부활하여 “새로운 유목적 잠재세력”이 출현한다는 일반명제를 제시했다.

 

탈국가 지향하는 제2의 칭기스칸
사이버 공간 활보하는 고급 소비자들
모든 문명 내던지는 원시 회귀 까지
수많은 노마드 주장들 대립·공존

 

2. 문제는 이들이 그렇게 타파하려는 국가가, 민주적이든 독재적이든, 어떤 종류의 국가인지는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국가는 그 자체로서 이미 어떤 형태이든 “포획 장치”이다. 그리고 이들이 그렇게 작동시키고자 하는 전쟁기계의 목표가 반드시 전쟁은 아니라는 언명은 전쟁을 게임 속에서의 경쟁쯤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정도로 문제의 진지성을 약화시킨다. 하지만 전쟁 기계의 가동이라는 명목 아래 국가뿐만 아니라 노동·상품·자본 등 “포획”을 연상시키는 모든 제도 장치로부터의 탈주를 권장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전면적 탈경계 기획은 그 실천적 함의가 대단히 다양하다.

3. 이것을 문명의 모든 성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 그것은 원시로의 회귀까지 각오한 급진적 생태주의가 나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때의 탈주는 역진적 퇴주가 되는 셈이다.

4. 만약 탈경계의 지향점을 문제삼지 않을 경우, 삶의 조건과 영역에 처진 경계들 그 자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왕래하거나 이동할 수 있는 일체의 행위와 생활양식은 모두 노마드적이다. 인간이란 “여행을 존재의 본질”로 한다고 하여 ‘호모 노마드’를 부각시킨 자크 아탈리는 세계화된 지구시장을 그 옛날 대상로가 거미줄처럼 얽혔던 실크로드로 간주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노마드로서 진화의 최종점에 도달하며, 이들이 전세계를 장악하기까지의 무질서 너머로 “모든 인생 여행자들을 환영하는 땅”이 전개된다고 고무한다.

5. 당연히 아탈리류의 시장 노마드는 세계 자본 순환과 그것의 외양인 제국에 완전히 포획되어 그 안에서 이익에 혈안이 된 “여행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여행자는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다. 농촌자치 공동체를 꿈꾸는 농민 철학자 천규석 선생에게 이런 “유목주의는 침략주의이다.”

6. 그렇지만 자본과 제국의 포획 안에서 자신의 생활압박 때문에, 베네치아에서 출생하고 호주에서 성장하다가 프랑스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네덜란드에서 교수로 취업한 로저 브라이도티 같은 이에게 유목적 주체란 연속된 이주로 복잡화되고 다층화된 수많은 다양한 타자들 사이의 다양한 정체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7. 그러나 자본의 속도는 유목민의 다양화를 앞질러간다. 이미 시장에는 마셜 매클루언의 예언대로 “휴대전화, 노트북 컴퓨터, 피디에이(PDA), 디지털카메라, 엠피3(MP3)을 갖춘” 고급 소비자들이 노마드를 자칭하면서 사이버공간이라는 새로운 무한 초원을 무대로 “공간의 물리적 이동만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와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하게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법을 능동적으로 바꾸어가는 창조적 행위”를 감행하고 있다.

 

21세기판 유토피아 꿈꾸는 노마디즘
개념·실행 없는 ‘탈현실’ 실험일 뿐
찬반을 말하기엔 아직 일러
변화무쌍한 용례들부터 정리해야

 

 

자, 위의 노마드 또는 유목민의 사례들 가운데 자기만 빼고 다른 것은 진정한 노마드나 유목민이 아니라고 얘기할 권리가 있는 진정한 유목민은 몇 번인가? 그 의미가 어떠하든 노마디즘은 어떤 동기나 근거에서든 21세기 현재의 (지구)사회적 지형 위에서 과거의 ‘유토피아’ 구상을 대체하는 탈현실(post-reality) 기획이다. 그야말로 노마드라는 용어 안에 수많은 노마드들이 서로 경계를 허물면서 다양한 의미를 갖고 경쟁하거나 대립하거나 공존한다. 이때 의미들(senses)은 특정 규정으로 결정력을 발휘하는 ‘개념’으로 총집되기보다 다(多)감각(multi-sense)의 ‘이미지’ 파문으로 교착한다.

다만 노마디즘 기획은 노마드를 바로 지금 이곳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유토피아 구상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적어도 외양상으로는 탈경계의 이동이나 탈주를 하는 듯이 보이는 소수 엘리트층 또는 자기 땅에서 밀려나 탈국가적으로 이동해야 하는 수많은 빈민이나 노동 이민자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진경 교수의 말대로 이들은 “떠돌아다니지만 끊임없이 어딘가 멈출 곳을 찾는” ‘실질적 고착자들’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역시 이진경 교수의 구상을 빌려, 떠남/멈춤의 이동성을 신체물리적 차원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사상과 갈등을 자유자재로 읽고 사유하는 한층 정신적인 차원에서 유목성을 추구해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유목성이 국가·자본·시장과 같은 외적 준거점을 떠나 정신과정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그런 관념적 유목성이 들뢰즈·가타리가 “모델을 늘리지 않으면서” 끝까지 놓지 않으려던 “매끈매끈한 판”을 슬그머니 놓아버리고 홈 안으로 몸을 도사리는 것임을 금세 눈치챌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단지 탈주의 기획을 말했을 뿐이다. 그것은 노마드에서 많은 것을 학습하는 과정, 곧 노마돌로지(유목론)적 탐색이긴 해도 노마드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노마디즘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 홍윤기 교수
 
노마드나 노마디즘은 거기에 대한 찬반 의견을 말하기엔 그 자체의 ‘개념’과 ‘실행’이 현실적으로, 그리고 현재적으로 태부족한 실험기획이다. 더 중요한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결국 인정했듯이 노마드 그 자체에서도 벗어나는 것이다. 곧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의 매끈한 공간만으로 충분하다고는 절대 믿지 말라.”

홍윤기/동국대 철학과 교수

 


홍윤기 교수는 1957년생으로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철학박사를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사회통합의 규범기반 모델, 그리고 문화적 가치의 철학적·사회과학적 실현 등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변증법 비판과 변증법 구도> <헌법 다시 보기>(공저) 등이 있습니다.

 

다른 삶을 위한 ‘차이 철학’이자 ‘혁명 정치학’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오스트리아제국 태생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왼쪽)와 〈자본론〉 저자 카를 마르크스(1818~1883·오른쪽). 이진경 교수는 오래된 소설 형식을 혁파한 카프카나 “불모의 땅”에서 새 영토를 일구고 있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유목민의 보기로 들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충분히 숙성된 사유다

 

지난주 홍윤기 동국대 교수는 노마디즘(유목주의) 기획을 과거의 ‘유토피아’ 구상을 대체하는 탈현실 기획이며, ‘개념’과 ‘실행’이 태부족한 실험기획이라고 지적했다. 노마드들이 규정력을 발휘하는 ‘개념’으로 총집되지 못하고 다감각의 ‘이미지’로 교착되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노마드라는 용어 안에 수많은 노마드들이 다양한 의미를 갖고 경쟁하거나 대립·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시장 노마드’나 ‘디지털 노마드’라고 해서 진정한 노마드가 아니라고 배제되어야 할 이유를 찾기 힘들다고 했다. 홍 교수는 또 제도장치로부터의 탈주라는 개념은 원시로의 회귀를 각오한 “역진적 퇴주”가 될 수 있음도 지적했다. 성격을 불문하고 모든 종류의 국가를 ‘포획’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도 이견을 보였다.

2002년 들뢰즈와 가타리 공저 〈천의 고원〉(1980) 해설서인 〈노마디즘 1·2〉를 펴내면서 우리 사회에 노마디즘을 널리 알린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이 글에서 유목민은 주류적 척도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방식, 사유방식을 창안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자동차나 비행기로 돌아다니지만, 마음은 언제나 돈이나 자기 가족에 매여 있는 자는 유목민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장 노마드’ 등 여러 유사 노마드들은 자본이 게바라로 돈을 버는 것처럼 ‘노마드의 상품화 전략’의 결과물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또 노마디즘은 “좀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며 “그런 꿈을 통해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의 표현”이란 점에서 혁명의 정치학과 상통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주에는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가 견해를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에게 노마디즘이란 정착과 소유, 착취와 포획, 동일성의 지배에 대항하기 위한 철학적 문제 설정이고, 우리의 신체와 삶을 사로잡고 있는 권력과 대결하며 새로운 창조적 삶을 창안하며 살아가는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윤리학인 동시에 정치학이고, 삶의 방법인 동시에 사유의 방법이다. 흔히들 말하는 ‘차이의 철학’이나 ‘탈주의 철학’이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지층 속에서 ‘숙성’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쓸모 있는 사유도 영향력을 얻게 되면, 그래서 심지어 ‘유행’의 물결을 타게 되면, 그것에 촉발되어 생성되는 ‘친구’들과 더불어, 거기에 편승하는 유사품들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자본은 돈이 된다면 게바라나 혁명마저도 상품화해서 팔아먹지 않던가! 그러나 상품화되는 사태를 들어 게바라를 비난하고 혁명을 포기할 순 없는 일 아닐까? 거기서 중요한 것은 상업적 물결 속에서도 애초의 문제의식을 더욱 멀리 밀고 나가는 것일 게다. 그래서 삼성이 ‘디지털 노마드’를 광고 카피로 삼고, 자크 아탈리 같은 이가 “인간이란 본래 노마드였다”면서 재빨리 책을 내는 사태도, 역으로 적절한 근거 없이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라고 비난하는 사태도 내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사태를 헤쳐나갈 수 없다면, 어떤 사상도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능력을 획득할 수 없을 것이다.

 

 

신체·정신적으로 주류적 척도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창안하는 자들이 노마드
새 정착지를 찾아 여기저기 떠돌거나
돈·가족에 얽매인 ‘이동’과 혼동 말아야

 

이동이 자본의 중요한 특징이 된 지금 노마디즘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유목’과 ‘이동’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정착민도 이동을 하며, 유목민도 멈춘다. 차이는 정착민의 이동이 어떤 목적지(멈춤)에 종속되어 있다면, 유목민에게 멈춤이란 이동의 궤적 안에서 잠시 머무는 것이란 점에서 이동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휴대폰, 노트북 컴퓨터 등을 갖고 “세계는 넓고 갈 곳은 많다”고 자동차로 비행기로 돌아다니지만, 마음은 언제나 돈이나 자기 가족에 매여 있는 자를 유목민이라고 하지 않는다. 반면 여행도 잘 다니지 않지만, 멈추지 않는 사유로 자신이 구축한 영토마저 떠나는 사상가는 유목민이란 정의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더구나 들뢰즈·가타리는 ‘이주민’과 ‘유목민’ 또한 구별한다. 이주민이란 어느 영토에 이주하여 그 영토를 이용하며 살지만 그 영토가 불모가 되면 버리고 떠나는 자들이다. 반면 유목민은 불모가 된 땅(초원이나 사막, 혹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같은…)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거기서 살아가는 법을 창안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나는 정착민이란 성공에 안주하는 자라면 유목민은 성공을 버릴 줄 아는 자고, 이주민이란 실패를 쉽게 떠나는 자라면 유목민이란 실패와 대결하며 새로이 길을 찾아내는 자들이라고 이해한다.

유목이나 정착, 이주는 ‘현실적인’ 영역에서도,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모두 나타난다. 어느 영역에서든 유목은, 홍윤기 교수 말대로 “국가나 자본, 시장 같은 준거를 떠날” 뿐 아니라 그것과 대결한다. 노마디즘이나 차이의 철학이 혁명의 정치학과 상통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배적인 척도가 새겨 놓은 사유나 삶의 ‘홈 파인 공간’을, 그 깊은 홈들을 범람하여 매끄러운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지금의 조건에서라면 어떤 것도 자본이나 국가, 시장과 대결하지 않고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관념적’이라는 나쁜 관형어를 덧붙인다고 해도, 이를 ‘홈 파인 공간’ 안으로 몸을 도사리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좌우를 못 가리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마이너리티(minority)란 수가 적다는 의미의 ‘소수파’가 아니라 이처럼 주류적(major) 척도와 대결하는 자들이고, 그런 척도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방식, 사유방식을 창안하는 자들이다. 빈민이나 이민자, 혹은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들조차 주어진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혹은 주류적 척도에서 벗어난 삶이나 사유의 방식을 구성하지 못하고 개별적인 새 정착지를 찾을 뿐이라면, 홍 교수 지적대로 그들 또한 정착민이다. 물론 주어진 상태가 결코 안주하기 힘들기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나서게 할 거대한 잠재성을 갖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되지만.

 

유사 노마드·이념 상품화 현혹됨 없이
애초의 문제의식 더욱 밀고 나가야
비현실적 ‘유토피아’ 주장 틀렸음은
현대·역사 속 수많은 노마드들이 증거

 

이런 대결을 들뢰즈·가타리는 니체의 용어법을 따라 ‘전쟁’이라고 했다. 지배적인 가치에 대한 전쟁, 낡은 습속에 대한 전쟁. 그리고 이런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그들은 ‘전쟁기계’라고 일컬었다. 가령 오래된 소설의 형식을 혁파하고 관료제와 더불어 새로이 등장한 권력을, 그 권력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과 대결하는 카프카의 책들 또한 그들의 정의에 따르면 전쟁기계다. 따라서 이런 전쟁기계는 전쟁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좋은 전쟁에서는 화약 냄새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삶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국가장치나 지배적 가치와 충돌할 때, 그 전쟁 같은 충돌을 피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굳이 ‘전쟁’이란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나로선 ‘투쟁’, ‘투쟁기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전쟁기계나 탈주선, 매끄러운 공간 등 들뢰즈·가타리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들조차, 창조적 생성이 결여된 채 주어진 세계에 대한 분노와 혐오에 머문다면, 전쟁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파괴적 전쟁기계로 될 수 있음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매끄러운 공간으로 충분하다고 믿지 말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했던 것이며, ‘노마드 자체에서 벗어나라’는 홍 교수 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적 사유를 어떤 이념의 냄새를 확실하게 풍기는 ‘노마디즘’과 대비하여 ‘노마돌로지’라는 말로 그들을 구해주려는 시도가 있음을 알고 있다. 어떤 사유의 명칭에 ‘이즘’이란 말을 넣거나 뺌으로써 무언가 크게 달라질 거라고 믿지 않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자신들의 책을 삶을 바꾸고 정치적으로 작동하는 ‘책-기계’로 사용해 달라고 책의 첫머리부터 주문했던 사람들이, ‘노마드적 삶에서 많은 것을 학습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어떤 이념 같은 것이 되어선 안 되기에 ‘노마디즘’이란 말을 거부할 거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마치 “중요한 것은 변혁”이라고 했던 마르크스가 자신의 이론이 ‘이념’이 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 대신 ‘마르크스론’(Morxology)이란 말을 고집했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어이없어 보인다. 아니라면, 들뢰즈는 그저 ‘학자’일 뿐이라는 말일까? 마지막으로, 노마디즘은 ‘21세기 유토피아’인가? 유토피아라는 말이 ‘좀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고 그런 꿈을 통해 삶을 바꾸려는 의지의 표현이라면,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 서울산업대 이진경 교수
 
반면에 흔히 말하듯 비현실적 공상이라면, ‘그렇지 않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를 모르고도 스피노자주의자가 될 수 있”듯이, 노마디즘을 모르고도 노마드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 그리고 역사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진경 교수/서울산업대

 


이진경 교수는 1963년생이며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 전반에 대해 다시 사유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구별되는 ‘코뮨주의’란 화두를 들고 공부하고 있으며, 생명의 경제·정치학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미-래의 맑스주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등이 있습니다.

 

착한’ 노마드? 현실엔 ‘나쁜’ 노마드도 있다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왼쪽부터 보아, 삼성 본관, 배용준. 김진석 교수는 여러 노마드들이 현실 세계에서 뒤섞일 수밖에 없다면서, 문화산업과 결합한 ‘한류’나 한국인이 자랑스럽게 동일시하는 ‘삼성’도 유목적 세계화의 흐름 속에 있다고 지적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3 한쪽만 보는 개념은 불완전

 

지난 두 주 홍윤기 동국대 교수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노마디즘(유목주의)에 대해 엇갈린 견해를 드러냈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는 노마디즘(유목주의) 기획을 ‘개념’과 ‘실행’이 태부족한 실험기획이라고 비판했다. 노마드들이 규정력을 발휘하는 ‘개념’으로 총집되지 못하고 다감각의 ‘이미지’로 교착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노마드라는 용어 안에 심지어 ‘시장 노마드’나 ‘디지털 노마드’와 같은 수많은 노마드들이 다양한 의미를 갖고 경쟁·대립·공존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반면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시장 노마드’ 등 여러 유사 노마드들은 자본이 게바라로 돈을 버는 것처럼 ‘노마드의 상품화 전략’의 결과물일 뿐이라고 했다. 유목민은 주류적 척도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방식, 사유방식을 창안하는 자들이기에, 마음이 언제나 돈이나 자기 가족에 매여 있는 경우 유목민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또 노마디즘은 “좀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며 “그런 꿈을 통해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의 표현”이란 점에서 혁명의 정치학과 상통한다고 강조했다.

김진석 교수는 이 글에서 이 교수의 논리를 ‘착한 노마드 이야기’일 뿐이라고 공박했다. 여러 노마드들이 현실 세계에서 뒤섞일 수밖에 없음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도 실천의 복잡하고 구체적인 맥락과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도 했다. 그는 또 유목민도 ‘전쟁기계’의 복합체로 존재할 경우 폭력적 흐름을 탈 수밖에 없다면서 노마드는 그 자체로 착하며 언제나 권력과 폭력에서 자유롭다는 믿음도 공상이라고 밝혔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한국 사회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화 움직임에 덜컥 사로잡혔다. 한국을 유사 이래 최고 속도, 최대 규모로 세계로 나아가게 한 계기는 ‘디지털 노마디즘’. 그러나 세계로 나아갈수록 동시에 어떤 때보다도 유목주의적 기업과 제국들의 침입에 내맡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당연했다. 이 와중에서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점점 새로운 폭력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결국 한 생태주의자는 “유목주의가 국가주의보다 더 파국적인 시장제국주의를 부추기고 조장하는 또 하나의 침략과 파괴주의”라고 고발하고 나섰다. 고발의 목소리는 비록 거칠고 일방적이었지만,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쓴소리였다.




그런데 노마디즘을 이론적으로 칭송하는 사람들은 그 비판을 쉽게 무시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책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면서, 이들이 ‘유목민’(nomad)·이주민·정착민을 개념적으로 엄격하게 구분했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이론적 권위를 앞세운 이런 주장이야말로 왜곡에 가까운 오독을 낳는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엄격한 개념적 구별의 필요성을 강조한 건 맞다. 그러나 그들은 냉정했다. “그들의 개념적 구별이 실제로 그들이 뒤섞이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거꾸로 오히려 그들의 혼합을 필연적으로 만든다”(들뢰즈와 가타리 공저 〈천의 고원〉)고 인정했다.

이들 인용을 빌리지 않더라도, 노마디즘과 관계된 어떤 더러운 현실적 문제들로부터도 자유롭다는 이론은 자승자박에 이를 뿐이다. 현실의 더러움으로부터 뚝 떨어진 개념은 현실을 설명할 힘도 가지지 못할 터이니! 그런데 이진경씨는 개념적 구분에만 매달리면서 ‘노마디즘’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숙성한 사상이고 나쁜 자본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따라서 노마디즘이 침략적 성격을 띠는 것도 자신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마음 편하게 말한다.

 

개념의 구분·순수성 내세우며
현실적 문제에서 자유롭다는 주장
되레 유목주의에 대한 오독 부르고
실천적으로도 공허하게 만들어

 

 

그는 노마드뿐 아니라 ‘매끈한 공간’과 ‘외부성’이 그 자체로 순수하고 초월적인 혁명적 개념인 것처럼 말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기서도 그것들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일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매끈한 공간과 외부성의 형식은 결코 그 자체로 불가항력적인 혁명적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며, 거꾸로 어떠한 상호 작용의 장에 흡수되고 어떠한 구체적인 조건하에서 실행되고 성립되는가에 따라 극히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천의 고원〉) 세상에 대해 말할 때는 순수한 개념이나 의미만이 아니라, 실천의 복잡하고 구체적인 맥락과 조건을 아는 게 중요하다. 이들은 노마드에 창조성을 부여했지만, 그것이 언제나 착한 정의를 목적으로 삼는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노마드를 말할 때에도 오히려 ‘전쟁기계’의 배치를 끝없이 강조했다.(“이 기계의 본질에 비추어보자면 비밀을 쥐고 있는 것은 유목민들이 아니다”)

‘노마디즘’은 현실 속의 나쁜 노마디즘과는 아무 관계도 책임도 없으며, 나쁜 자본주의 국가의 착한 외부에만 존재한다는 말은 ‘착한 노마드 이야기’일 뿐이다. 그건 들뢰즈와 가타리의 텍스트를 지적으로 배반할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공허하기 십상이다.

‘전쟁기계’는 비록 전쟁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는 않지만, 언제든지 싸움을 무릅쓰는 어떤 것이며, 때로는 다시 국가제도에 포획되기도 하지만 다시 도망가며 싸우는 어떤 것이다. 그만큼 ‘노마디즘’처럼 지적·문화적으로 유행하기에는 복잡하고 까칠까칠한 주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진경씨는 ‘전쟁기계’가 부차적이고 적절하지도 않은 표현인 것처럼 말하는데, 그들 책을 경전처럼 주석하면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는 단순화시키다니! ‘노마디즘’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기계’의 무서운 까칠까칠함이 은폐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노마드가 항상 국가 바깥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국가에 대한 투쟁을 말하지만, 그에게는 두 갈래 길밖에 없다. 곧 국가와 싸우는 일과 국가 바깥의 평화로운 공간으로 가는 길. 그러나 유목적 전쟁기계는 국가에 대해서만 싸우는, 국가 바깥의 ‘착한 노마드’는 아니다. 그것은 국가 안에서 국가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고 떠도는 가지가지 패거리들이기도 하며, 국가 바깥에서 국가를 비웃는 다국적이고 세계적인 조직과 폭력이기도 하다. “국가 자체도 항상 바깥과 관계를 맺어 왔으며 따라서 이 관계를 빼고서는 국가를 생각할 수 없다. 국가를 규정하는 것은 ‘전부’ 아니면 ‘무’의 법칙, 곧 국가적인 사회냐 아니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냐가 아니라, 내부와 외부의 법칙이다.”(〈천의 고원〉)

 

노마드는 ‘착하다’는 믿음은 공상
한쪽 면만 극단적으로 과장 말고
전쟁기계의 폭력성 함께 인정할 때
문명 분석의 좋은 도구될 수도

 

국가를 위해 싸운 안중근은 바보일까? 또 기독교와 이슬람(그리고 유교)도 국가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유목적 전쟁기계로 작동할 수 있다. 노마드는 그 자체로 착하며 언제나 권력과 폭력에서 자유롭다는 믿음은 공상적이다. 그것은 전쟁기계와 떨어질 수 없고, “전쟁기계와 국가는 서로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 작용의 장 속에서 공존하고 경합한다.”(〈천의 고원〉)

더욱이 이진경씨는 ‘노마디즘’을 거의 부드러운 문화상품으로 만든 후에 결론으로 ‘코뮨주의’를 주장하는데, 이것도 ‘전쟁기계’를 간과하거나 은폐한다는 의심을 받을 만하다. 폭력의 수많은 흐름에서 전적으로 벗어난 우정과 사랑의 공동체를 목적으로 삼는 일은 노마드를 줄 세우는 일이 아닐까. 우애에 근거한 공동체는 훌륭한 가치지만, 그걸 노마드의 선험적 목적으로 상정할 필요는 없다. ‘전쟁기계’에게 전쟁이 목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라고 공격한 생태주의자가 내세운 것도 모든 국가로부터(심지어 복지국가도) 완전히 벗어난 공동체주의이다.

그런데 거꾸로 노마디즘은 어떤 오류도 없다고 말하는 이진경씨도 비슷한 코뮨주의에 빠진다. 단순한 우연? 아니다. 이들은 노마드의 한쪽 면만 극단적으로 과장했기 때문이다. 소수자인 이주 노동자들은 우정으로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그들도 더 좋은 일을 찾아 고향을 떠난 유목민이다. 더 나아가 이곳에서 정착을 원하는 사람도 많으니, 유목민/이주민/정착민의 배치는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전쟁기계’의 복합체로 존재하는 한, 유목민들은 ‘따로 또 같이’ 폭력적 흐름을 타고 있으며, 그 폭력적 끈의 긴장 속에서 문명적으로 생존한다.

문화산업과 결합한 ‘한류’도 거센 유목적 세계화의 흐름 속에 있고, 한국인이 자랑스럽게 동일시하는 ‘삼성’도 그렇다. 들뢰즈와 가타리도 “새로운 노마디즘은 세계적 규모의 전쟁기계를 수반하는데, 그 조직은 국가장치를 넘어서며, 다국적이고 에너지와 관계된 군산복합체 속으로 흘러간다”고 했다. 한국인은 ‘한류’와 ‘삼성’이 실현하는 유목적 공격성을 전적으로 거부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쉽게 동의하기도 힘든 소용돌이 속에서, 돌고 돈다. 때로는 자랑스럽지만 때로는 더럽다.


 
» 김진석 인하대 교수
 
노마드의 폭력성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그 폭력성이 인정된 노마드 이야기는 문명 분석의 좋은 도구일 수 있다. 강자가 먹이를 다 삼키는 폭력적 시스템만 쫓는 노마디즘은 위악적이지만, 모든 폭력에서 벗어난 공동체를 꿈꾸기만 하는 노마디즘도 위선적이지 않을까. 이 사이에서, 기우뚱, 균형을 잡자.

김진석/인하대 교수

 


김진석 교수는 1958년생으로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철학박사를 받았습니다. 미학과,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폭력의 다양한 얼굴과 맥락 등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저서로 <초월에서 포월로 1, 2, 3>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 <소외에서 소내로> <포월과 소내의 미학> 등이 있습니다.

 

나쁜 노마드’ 구별해야 ‘진정한 노마드’ 찾아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 그는 1980년 가타리와 함께 펴낸 저서 <천의 고원>에서 유목민을 뜻하는 노마드라는 개념을 구체화했다. 국내에 노마디즘을 유행시킨 이진경 교수의 저서 <노마디즘 1·2>는 이 책의 해설서이다. 그린비출판사 제공
 
우리시대 지식논쟁/

 

 

④ 비판들에 대한 재반론

 

지난 3주 홍윤기 동국대 교수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김진석 인하대 교수가 노마디즘(유목주의)에 대해 엇갈린 견해를 보였다. 이 교수가 노마디즘을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의 표현”이라면서 ‘혁명의 정치학’이란 수사를 통해 정극 옹호했다면 두 사람은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홍 교수는 ‘시장 노마드’나 ‘디지털 노마드’ 등 여러 노마드들이 다양한 의미를 갖고 경쟁·대립·공존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노마드들이 ‘개념’으로 묶이지 못하고 ‘이미지’로만 교착되고 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지난주 김 교수는 현실 속에서 여러 노마드들이 뒤섞일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다. 들뢰즈·가타리도 개념뿐 아니라 실천의 복잡하고 구체적인 맥락과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도 했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이 교수의 ‘노마디즘’은 현실 속의 ‘나쁜 노마디즘’과는 아무 관계도 책임도 없는 ‘착한 노마드 이야기’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이 교수는 이 글에서 ‘나쁜 노마드’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노마디즘을 버릴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는 “단순화해서 ‘나쁜 노마디즘’과 ‘좋은 노마디즘’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중요한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 옳다고 믿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초월적 외부에서 선과 악이 뒤섞여 구분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현실에서 올바른 삶을 위한 길찾기에 나선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주제의 마지막 토론자인 이광래 강원대 교수가 다음주 견해를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비판을 서로 자신에 대한 오해라고 반박하며 진행되는 논쟁처럼 소모적인 것은 없지만, 오해나 곡해를 그냥 두고 토론하기는 어렵다. 나 역시 간단하게나마 몇 가지 오해나 곡해에 대해 지적하는 방식으로, 그런 지적에 기생하듯 말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첫째, 나는 어디서도 들뢰즈·가타리 책을 읽지 않았다면서 누구를 반박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반대로 나는 “노마디즘을 모르고도 노마드로 사는 게 가능하다”고 믿는다. 많이 읽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경우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처럼 누군가를, 그것도 저리 강하게 비판하려면, 비판하는 대상을, 다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읽거나 알고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 경우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문제의식이 있다고 해도, 쉽게 무시되는 것을 어찌 피할 수 있을까?

둘째, 나는 “‘매끄러운 공간’이나 ‘외부성’이 그 자체로 초월적인 혁명적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긍정적인 가치를 갖는 전쟁기계도 전쟁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게 되는 사태가 있을 수 있다고 썼다. 마찬가지로, “노마디즘은 현실 속의 나쁜 노마디즘과 아무 관계 없다”면서 “나쁜 자본주의 국가 외부에만 존재하는 착한 노마디즘”에 대해 말할 정도로 순진하지 않다. 다만 홍윤기 교수가 제시한 여러 노마드들 가운데 어떤 걸 ‘진정한 노마드’라고 말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나쁜 노마드나 문화상품화된 ‘노마드’들이 있다는 이유가 노마디즘을 버릴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답했을 뿐이다. 반복하건대, 김 교수 말처럼 ‘유목주의적 기업’이나 ‘침략적 노마드’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노마디즘을 버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 나치가 생태주의자였다는 게 생태주의를 버릴 이유는 되지 않는 것처럼. “노마디즘에 침략적 성격이 있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나는 이렇게 쓰지 않았지만)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였음을 이해하기가 그리 어려웠을까? 김 교수는 내가 노마디즘은 “더러운 현실과 무관한 이론”이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정말 믿고 있을까? “폐허가 된 마르크스주의, 그 불모의 땅에 달라붙어서, 실패에 달라붙어서 새로운 길을 찾는 게 노마드”라고 썼는데도 불구하고.

 

현실 속 노마드 무시한 게 아니라
노마디즘을 버릴 이유 아니다 했을 뿐그럴수록 시비 가리고 개념 구분해야

 

셋째, 나는 전쟁기계 개념을 부차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적절한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있다(나는 경전을 주석하는 훈고학자가 아니기에,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으며 나름의 답을 찾는다).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전쟁’의 개념이 일차적으로 지배적 가치에 대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조건에서 ‘전쟁’이란 말은 국가 간의 적대적 충돌이란 의미가 지배적이기에, 오해 없이 사용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는 생각에서다. ‘전쟁기계’ 대신에 ‘투쟁기계’라고 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들뢰즈·가타리가 표현하려는 개념적 내용이 ‘투쟁’이란 말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실제로 가타리는 〈새로운 자유의 공간〉에서 그렇게 고쳐 쓴다). 그렇지만 그들이 ‘전쟁기계’란 개념을 오해를 무릅쓰고 사용했던 것은, 전쟁기계가 전쟁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부정적 사태를 지적하기 위해서였다고 덧붙여 놓았다. 따라서 전쟁기계의 무서운 까칠함을 은폐하여 노마디즘을 부드러운 문화상품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넷째, 나는 어디서도 ‘착한 노마드’에 대해 쓴 적이 없다. “노마디즘에는 어떤 오류도 없다”니! 비난과는 반대로, 이주노동자들조차 주어진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안주할 곳을 찾는다면 노마드가 아니라 정착민이라고 썼다. 그래서 이주노동자도 이주노동자-되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상품화나 유행에 편승하는 유사품과 대비하여 노마디즘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믿으며, 단순화해서 ‘나쁜 노마디즘’과 ‘좋은 노마디즘’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생각이 그런 단어를 사용한 것처럼 생각하게 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김 교수는 ‘착한 것’과 ‘폭력적인 것’, ‘선과 악’이 결코 단순하게 분리될 수 없다고 거듭 말한다.

맞다. 데리다 이후, 선과 악이 뒤섞이고 선과 악이 서로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건 일종의 철학적 상투구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니 ‘좋은 노마드’를 ‘나쁜 노마드’ 와 구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철학적 순진성으로 비난받기 딱 좋은 처지를 자초하는 것이다. 확실히 노마디즘이 작동하는 세계를 그 초월적 외부에서 바라보면서, “거기서 선악은 구별 불가능해”라고 해체하는 철학자들이라면, 그것의 복합성이나 결정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현재적 삶 속에서 그것을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지, 아니 어떠한 삶의 방식을 구성할 것인지, 지금 이 길로 가는 게 옳은 것인지를 고심하고 판단해야 하는 사람에게도 그럴까? 거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 하려는 것이 쉽게 말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가리는 것이고, 좋은 것이 나쁜 것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포착하는 것이다. 유목을 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게 유목적인 것인지, 아니면 유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닌지, 애써 얻은 하나의 성공에 안주하면서 다시 정착민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 구별불가능하고 서로 기대어 있는 ‘좋음/나쁨’을 떠나 초월적 자리에서 모든 것을 해체해대는 데리다 같은 철학자보다는, 오류를 범할지라도 “자, 다시 한 번!” 하면서 지금 조건에서 어떤 게 좋은 것인지를 그때그때 판단하며 옳다고 믿는 것을 실행하려 애쓰는 나의 친구들을 더 믿는다.

 

지배적 가치와 싸우는 ‘전쟁기계’
오해 우려했을 뿐 은폐한 적 없어
코뮨-노마디즘 결부해 사유하는 게
전쟁기계 필연성 간과한 건 아니다

 

다섯째, 개념들을 엄밀하게 구별하고 발전시키는 게 중요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나쁜 것과 좋은 것이 잘 섞이기 때문에, 잘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어느새 반대가 되는 사태가 빈발하기 때문에, 오류와 위험을 포착하고 구별할 개념들이 필요한 것이다. 가령 내가 “유목민과 이주민은 다르다”고 하며 개념적으로 구별하려 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마지막으로 코뮨주의에 대하여. 내가 코뮨주의를 노마디즘과 결부하여 사유하고 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거기서 전쟁기계적 성격을 간과·은폐한다는 의심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나는 코뮨주의가, 혹은 코뮨이 전쟁기계라고, 전쟁기계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개인주의, 전체주의, 가치법칙 등의 지배적인 가치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고서 코뮨이 가능하리라고 믿을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가 만들어온 코뮨 안에서도 오랫동안 고성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지금도 근본적으로는 마찬가지다. 우리 각자가 자본주의나 근대적 삶의 습속에 너무도 길들어 있기에, 코뮨이 가능하려면 그런 나에 대한 투쟁, 그런 친구들의 습속에 대한 투쟁을 결코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 이진경 교수
 
굳이 새로운 단어를 만들며 코뮨주의를 친숙함과 동질성에 안주하는 공동체주의와 구별하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따라서 코뮨주의는 노마드적 삶의 방식을 포함하며, 또한 그래야 한다. 그러나 코뮨주의가 노마디즘의 선험적 목적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다른 노마드적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

 


이진경 교수는 1963년생이며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 전반에 대해 다시 사유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구별되는 ‘코뮨주의’란 화두를 들고 공부하고 있으며, 생명의 경제·정치학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미-래의 맑스주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실제-가상 오가는 ‘유목적 생활인’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컴퓨터 모니터와 키보드가 일상의 가장 친숙한 도구가 된지 오래다. 이 교수는 한국인이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을 자유자재로 유목하며 융합현실 속에서 생활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노마디즘은 데자뷔(기시감) 현상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⑤ 전혀 새롭지 않다

 

네 번에 걸쳐 홍윤기 동국대 교수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김진석 인하대 교수가 노마디즘(유목주의)에 대해 비판과 반비판을 펼쳤다.

핵심 논점은 현실 속에서 여러 노마드들이 뒤섞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였다. 김 교수는 이진경 교수가 ‘혁명의 정치학’이란 수사를 통해 적극 옹호하는 ‘노마디즘’은 현실 속의 ‘나쁜 노마디즘’과는 아무 관계도 책임도 없는 ‘착한 노마드 이야기’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홍 교수는 경쟁·대립·공존하고 있는 여러 노마드들이 ‘개념’으로 묶이지 못하고 ‘이미지’로만 교착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나쁜 노마드’의 존재가 노마디즘을 버릴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반론을 펼쳤다. 중요한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 옳다고 믿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또 초월적 외부에서 선과 악이 뒤섞여 구분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현실에서 올바른 삶을 위한 길찾기에 나선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보였다.

이광래 교수는 이 글에서 우리가 이미 융합의 최전선에 있다면서 노마디즘은 새롭지 않다는 견해를 보였다. 한국인들이 이미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을 자유자재로 유목하며 융합현실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부의 다양한 힘과 격투하는 사고’인 노마디즘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느냐고 이 교수는 반문했다. 다음 주제는 ‘‘코뮨주의’ 대안인가’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해체는 비상이다

해체의 외징(外徵)은 비상이다. 해체주의는 비상의 철학사조이다. 그 비상한 외징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종말이다. 그것의 주인공들은 종말과 종결을 좋아한다. 우선 그들은 예외 없이 철학의 종말을 주장한다. 해체주의의 선조이자 아방가르드였던 니체를 비롯하여 푸코와 들뢰즈, 그리고 데리다의 주장이 그렇다.

누구보다도 니체는 ‘빠삐용’이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철학적 전통을 탈출하여 이른바 ‘자유의 바다’에 비상착륙하고 싶어 했다. 기존 철학에 대한 답습이 그에게는 단순 노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가 철학노동자들을 혐오한 까닭도 마찬가지였다. 들뢰즈는 니체를 가리켜 ‘철학을 망치질하는 이’에 비유한다. 모리스 블랑쇼도 “니체의 철학을 성찰하는 것은 철학의 종말을 성찰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니체를 전위(前衛)로 숭상하는 이들에게 ‘종말에의 유혹’은 가장 뚜렷한 유전인자였다. 아직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임에도 우리를 위해 변증법과 인간학의 혼합된 약속들을 불태워버린 장본인이 바로 니체였다고 하여 푸코는 니체와의 유전성을 강조한다. 또한 푸코는 “아마도 인간은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는 자일 것”이라고 하여 근대적 주체로서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다. 데리다도 형이상학적 인간주의(휴머니즘)의 모든 가정 자체를 부인하고 ‘인간의 종말’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종말이란 ‘존재에 대한 사유’의 종말이다.” 이처럼 그 역시 형이상학의 해체와 그 이후의 철학을 위해 주체에 대한 단죄와 퇴출을 명령한다.

다음으로, 종말에 대한 교의주의자들의 비상한 외징은 그들 자신의 삶마저도 비상한 죽음으로 종결지은 것이었다. 언제나 ‘미래를 위해 글을 쓴다’는 니체가 56살 되던 1900년 매독으로 인한 정신이상(또는 뇌종양)으로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것이 그 전조였다. 종말과 해체의 교의가 크리스마스병이라는 혈우병처럼 열성 반성유전형질이 되어 격세유전되었듯이 죽음의 방식마저도 푸코와 들뢰즈에게 잠복유전되었기 때문이다. 1984년 58살의 푸코가 에이즈로 인한 패혈증으로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것, 그리고 1995년 70살의 들뢰즈가 돌연히 투신자살한 것이 그러하다. 특히 이미지 철학자인 들뢰즈의 죽음은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보여주는 비상한 외징의 클라이맥스가 되었다.

이들의 죽음은 ‘외징 없이는 유사성도 있을 수 없다’는 푸코의 신념을 실천한 것일까? 어쨌든 푸코는 “하느님은 어떤 사물들을 숨겨놓았으면서도 특별한 형식의 외적이고 가시적인 기호들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게 하셨다”는 16세기 스위스의 의학자 파라셀수스의 말에 따라 죽음의 유사성조차도 종말과 해체의 외징으로 남겨놓았다. 그러나 이들의 비상한 죽음은 또다른 종말의 예후(豫後)나 다름없다. 그것은 니체로부터 시작된 종말과 해체라는 비상한 교의의 종결 징후이기 때문이다. 20세기를 푸코의 세기이고 들뢰즈의 세기라고 서로 덕담하면서도 상속인이나 상속집단을 원하지 않는 프랑스 철학의 특징대로 그들의 죽음은 해체교의적 종말의 징표가 되고 있다.

 

비상해제와 후위게임

이처럼 철학의 종말, 그 비상(非常)은 이미 해제되고 있다. 외징들이 바뀐 것이다. 비상해제나 정상의 생성을 원하는 이들의 후위(後衛)게임, 곧 생성게임이 해체부정이나 통합과 융합으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해체의 여진이 남은 이 땅에서 요즘은 ‘플러스 울트라’(그 너머의 세상)를 외치며 통섭을 부르짖는 환원주의 망령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통섭의 전도사로 위장한 환원주의자들이 푸코와 들뢰즈, 그리고 데리다의 해체를 빌미삼아 재출현한 것이다. 특히 에드워드 윌슨은 니체의 후예들을 가리켜 ‘무정부주의자, 해적, 반역자, 무지한 심령치료사’라고 극언하며 그들의 해체주의를 융단폭격한다. 그는 해체주의가 모든 주제들을 ‘변화의 무자비한 원심분리기’ 속에 쑤셔 넣었다고 힐난한다.

그 대신 윌슨이 주장하는 것은 ‘봉합선이 없는 인과관계의 망’이라는 사회생물학으로의 환원주의적 대통섭이다. 심지어 통섭이 미래의 의심할 수 없는 대안이라고까지 단언한다. 그러나 해체주의를 극도로 혐오하는 윌슨의 팡글로스주의(통섭의 세계가 모든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 최선이라는)도 ‘생물학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반박하는 그 내부의 적과의 후위게임 속에 휘말려 있다.

종말과 해체의 또다른 후위게임은 해체가 아닌 융합주의 거대이론으로의 회귀이다. 해체 이후의 에피스테메(인식소)는 융합(convergence)이다. 미래는 해체 그 너머의 세상, ‘플러스 플러스 울트라’의 융합현실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소생한다면 그는 국가장치가 아닌 실제와 가상의 융합장치, 자본주의 기계 대신 융합주의 기계, 그리고 전쟁기계가 아닌 인터페이스(이종공유) 기계의 상호 횡단적 교섭을 설명하려 들 것이다. 그의 노마디즘은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의 다층구조적 프랙털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융합현실과의 게임이론으로 수정이 불가피할 것이다. 1979년 10월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텔에 찾아온 드레퓌스와 레비노를 보고 ‘나의 암살자들이 왔군!’ 하고 외치던 푸코도 융합현실에 소생한다면 초감도 센서로 된 인터페이스 안경을 통해 그들의 상세한 정보를 불러내며 ‘나의 후원자들이 왔군!’ 하며 반길 것이다.

 

우리에게 해체는?

이처럼 우리는 융합의 최전선(frontland)에 있다. 철학적 유목민이기 이전에 우리는 이미 유목적 생활인이 된 지 오래다. 그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유목을 체득하고 있는 한국인에게 노마디즘은 새롭지 않다. 새로운 리좀인 가상의 다리들(cyber-bridges)이 연결하는 동시편재적 융합현실에서 인터페이스를 만끽하고 있는 한국인에게 노마디즘은 데자뷔(기시감)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유목민으로서의 한국인은 들뢰즈가 말하는 ‘탈코드화’나 ‘기관 없는 신체’, ‘국가장치’나 ‘전쟁기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가 ‘노마드적 사고란 외부의 다양한 힘과 격투하는 사고’라고 정의한들 이미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을 자유자재로 유목하며 융합현실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그게 무슨 의미일 수 있을까?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를 설명하지 못하듯이 ‘지금 여기에’ 가상현실로 열려 있는 우리의 유목현실도 들뢰즈의 노마디즘대로는 전개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융합현실(융합사회체)에서는 이미 자본보다 정보가 들뢰즈가 말하는 ‘충실신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 이광래 교수
 
그의 노마디즘이 우리를 더욱 데자뷔적 착각 속에 빠져들게 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들뢰즈가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어느 나라보다 유목적 삶에 익숙한 우리의 기술환경과 생활문화 때문일 것이다.

이광래 교수/강원대 철학과

 


이광래 교수는 1946년생으로 고려대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연구자로서 초창기 20년 동안은 반철학과 해체주의 계열의 프랑스 철학에 연구의 초점을 맞췄고 그 이후 15년은 일본과 동아시아 사상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지금은 <욕망 이동사> 저술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미셸 푸코-광기의 역사에서 성의 역사까지> <프랑스 철학사> <일본사상사 연구>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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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뮌주의 대안 맞나

다양한 존재의 소통을 실험하라, 새 삶을 위해!
‘코뮨주의’ 대안 맞나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연구공간 ‘수유+너머’ 회원들이 재작년 경기 평택 시청 앞에서 대추리 미군기지 건설 계획의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고 대표는 대안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들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로 가는 유효한 방도라고 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제공
 
① 독점당한 삶 벗어나야 할 때

 

‘코뮨주의’는 21세기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이다. 현실 사회주의 패배 이후에도 마르크시즘을 고수하고 있는 좌파 진영 일군의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이 용어 속에 담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라고 옮겨 온 ‘코뮤니즘’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영어 표기를 할때 ‘Commun’(공동체란 뜻)과 ‘ism’ 사이에 하이픈(-)을 끼워 넣기도 한다. 코뮨주의를 통해 새 대안 체제를 구상해온 그룹 가운데 하나인 연구공간 ‘수유+너머’ 쪽이 최근 한 권의 책을 내어 그 개념과 전략을 소상히 밝혔다. 이 논쟁을 통해 코뮨주의가 새로운 대안 체제 담론으로서 적실성을 가질 수 있는지 알아본다.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는 이 글에서 자신들이 내세우는 ‘코뮨주의’를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존재들은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는다. 예컨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국내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가 그 보기이다. 때문에 과거와 같은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했던 운동은 더는 의미가 없다고 본다. 상이한 존재들의 공통운동과 같이 대안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를 여는 유효한 방도라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탈국가적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다른 코뮨주의자들과 차이를 보인다. 국가의 개입은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 낳으면서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의 발명”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견해다. 다음 주에는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의견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국가와 자본의 탈근대적 폭력이 그야말로 만연한 시대다. 지난 십여년간 한국 사회의 대중들은 부와 권력의 장에서 계속 배제되고 추방되었다. 국가경쟁력, 기업경쟁력의 이름으로 자기 나라 안에서 자기 정부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 나라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이 별 의미도 없을 정도로 권력과 자본의 지구적 폭력에 난타당하고, 마치 이국인처럼 나라 안에서 거처를 잃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 말 그대로 ‘홈리스’가 우리 사회 대중들의 보편 형상이 되고 있다.

역설적인 것은 국가와 자본에 의한 추방과 배제가 노골화될수록 사람들은 그것들에 더 매달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삶의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삶의 소속과 근거를 얻기 위해 온갖 불이익과 차별을 감수한다. 비정규 노동자들은 반밖에 안 되는 임금에 고용 기간만 일정하게 보장하는 직군·직무군제도 감지덕지 받아들이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농민이나 어민은 적은 보상금이나마 더 받으려고 경쟁한다. 일자리만 늘어난다면 자연이 어찌되든 대운하라도 만들라 하고, 먹고 살게만 해준다면 국가 지도자나 기업가의 부도덕성 따위는 문제도 안 된다. 삶의 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와 자본의 온정에 기대를 걸게 하고, 국가와 자본의 힘은 습한 환경의 곰팡이처럼 이런 불안 속에서 급속히 증대된다.

이제야말로 다른 삶의 방향을 발명해야 할 때가 아닐까. 좋은 정부와 좋은 기업에 대한 소속을 그리워할 게 아니라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삶을 시도해야 할 때가 아닐까. 코뮨주의는 이처럼 우리 삶을 보살핀다는 환상 속에서 사실상 우리 삶을 지배하고 한정짓던 국가와 자본에서 벗어나는 삶의 시도이며,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은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이다.




코뮨주의를 제창하면서 우리는 국민이나 시민, 노동자 등의 이름으로 진행된 과거 운동의 유산, 곧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했던 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가령 1987년의 ‘국민운동본부’는 오늘날 더는 작동할 수 없다. 최근 민노당의 자주파 논란에서 학계의 민주주의 논쟁까지 ‘국민’의 표상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우리 안에는 이미 국민이 아닌 자, 시민권이 없는 자, 가령 이주노동자 같은 존재들이 들어 있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지, ‘그들’이 새로운 ‘우리’임을 깨닫지 못한다.

 

국가와 자본의 탈근대적 폭력이
대중들 삶 지배하고 불안 키워
사회운동도 자격·소속에 기반
이주민·실업자·비정규직 등 외면

 

노동 운동은 어떤가. 취업과 노조라는 자격과 소속을 기본으로 자기 이익을 확대하려는 운동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현재 민주노총이 자격과 소속이 불투명한 실업자나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에 실질적으로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나 자본보다 먼저 대기업 노동조합들, 현장의 운동가들이 자격과 소속을 은연중에 문제삼기 때문이다. “우리도 힘든데, 왜 그들을 도와야 하는가. 우리가 살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희생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을 단결시켰던 동일성의 표상이 이제는 거기에 속하지 못한 자들, 자격 없는 자들을 내치는 장치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변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동원했던 방식이 그렇게 기능하는 것이다.

이는 대표를 늘리고 소속을 늘려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정규직을 늘리고, 민주노총의 발언권을 키우고, 민노당의 국회의원을 늘리고, 시민단체의 참여를 확대해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소속이나 자격, 근거의 공유 없이 서로의 자유와 해방, 삶의 행복을 위해 공통 작용을 생산해낼 수 있는 실질적인 운동의 기예이다. 이주노동자와 중증장애인이 만나는 데 인간이라는 공통 근거가 필요하지 않고, 비정규 노동자가 농민회와 접속하는 데 생산자라는 공통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주노동자와 중증장애인의 싸움이 이동권이라는 공통의 권리를 창안해낼 수 있을지, 홈에버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홈에버에 물건을 납품하던 농민과 함께 대형마트를 극복하는 농산물 유통에 성공할 수 있을지이다. 상이한 존재들의 이러한 공통 운동은 서로의 삶에 절실한 상호협력뿐만 아니라 국가나 기업의 정책에 맞설 힘과 방향을 제공한다.

어떤 이들은 이런 구상을 공상적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공상적인 것은 국가의 핵심을 장악한 후 그것으로 사회 전체를 바꾸겠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구체적 이미지도 없으면서 국가를 장악한 후 그런 삶을 생산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그런 식으로는 새로운 삶이 아니라,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을 낳을 뿐이다. 대안적 삶을 꿈꾸었던 공산주의가 삶의 다양한 특이성을 상실하고 획일적 국가 독점 체제가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복지국가도 국가권력만 확대
지식·정보 등의 독점 아닌 공유 바탕
각계각층 사람들의 공통 운동으로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한 길 찾아야

 

이런 면에서 복지국가에 대한 좌파들의 갈망에는 걱정스러운 면이 있다. 복지국가 모델은 국가 권력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보살핌을 확대하는 것이다. 국가는 복지제공을 명목으로 삼아 사람들을 분류 관리하고 서비스를 매개로 지배력을 키운다.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삶의 의존이 커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본적 삶에 대한 보장이지 국가권력의 확대가 아니다. 우리는 소속이나 자격에 상관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기본적 삶의 보장을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요구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소통하고 협력하는 대중의 것이어야 한다.

공공성 강화는 이 점에서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이다. 그러나 코뮨주의자로서 우리가 생각하는 공공성은 진보진영에서 그동안 강조해온 것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공공성의 강화가 국가성의 강화로 귀결되는 것을 경계한다. 우리는 국가 독점과 사적 독점(계급 독점)이라는 나쁜 선택지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교육을 국가가 독점해야 하느냐 민간이 독점해야 하느냐 하는 나쁜 선택지를 버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국가적이든 사적이든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깨고 자유롭게 소통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일종의 ‘비국가적 공공성’인 소통과 협력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식, 정보, 에너지, 생명 자원, 그 무엇이든 함께 소통하고 생산하는 비국가적·비시장적 네트워크를 구축해가야 한다.

사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이 강할 때일수록 정부 역할이 중요해 보이고 안정된 일자리 창출이 중요해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좋은 정부에 대한 갈망, 안정된 일자리에 대한 갈망은 해법이라기보다는 증상이다. 그것들은 우리 삶이 얼마나 불안한지를 보여줄 수는 있어도 어떻게 대안적인 삶을 구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코뮨주의자로서 우리는 국가나 시장이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 고병권 대표
 
단지 지금처럼 그것들에 대한 의존을 높여 놓고서는 결코 그것들을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분명한 것은 대안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들과 그것의 소통만이 지형을 바꿀 힘과 방향을 알려 줄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

 


고병권 대표는 1971년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코뮨주의, 혁명 등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고, 최근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현실을 새롭게 사유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가, 공저로는 <코뮨주의 선언> 등이 있습니다.

 

자본지배 ‘벗어남’ 넘어 ‘극복·대체’ 노력을
‘코뮌주의’ 대안 맞나
 
 
한겨레  
 
 
» 이탈리아 볼로냐 지역 코뮌 운동의 구심점인 ‘민중의 집’의 활동 모습을 만화로 보여주고 있다. 볼로냐 민중의 집 소개 책자에 실린 만화다. 이곳은 생활협동조합의 기능은 물론 문화 활동과 정치적 토론의 장으로도 활용된다. 심광현 교수는 ‘민중의 집’이 생태적 문화 사회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올 여름께 한국에도 ‘민중의 집’을 세울 계획이다. 심광현 교수 제공.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생태문화적 혁명이다

 

 

지난주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는 새로운 대안 체제 모델로 ‘코뮨주의’를 정립하면서 그 특징을 개괄적으로 밝혔다. 그는 우선 ‘코뮨주의’를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이라고 규정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말하는 ‘코뮨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격과 소속, 기반에 근거한 운동의 의미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상이한 존재들의 공통운동과 같이 대안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를 여는 유효한 방도라는 시각을 보였다. 탈국가적 태도도 눈에 띈다. 국가 개입은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 낳으면서 소통과 협력의 삶으로 가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견해다.

심광현 교수의 시각은 다르다. 그는 우선 국가를 “벗어나는 것”과 “극복하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을 수 있음을 지적했다. ‘사회적 공공성의 코뮌적 전화’를 위한 실천이 동반되지 않을 경우 자칫 고립된 공동체주의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 공공성 강화와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자립적 동력 구성이 선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은 존재들의 공통운동을 강조하는 것은 “동질성 대 이질성, 공공성 대 공통성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관념적 도식이라는 시각을 보였다. 그는 새 대안 체제는 특정 세력이 아니라 현대 세계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국가에 예속된 삶을 극복할 능동적 기획자로 거듭나는 복합적 운동을 통해 형성될 것이라고 봤다. 다음주에는 조정환 성공회대 강사가 의견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지난해 내내 20여 년 간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이 민주주의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의 후퇴로 귀착된 원인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논의들이 무색하게 2007년 대선에서 투표자 다수는 양극화를 초래해온 신자유주의를 아예 전면화하려는 ‘이명박 정부’를 선택했다. 대단히 위험한 ‘이열치열’ 식의 논리인 셈이다.

이에 맞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사회투자국가, 사회적 공화주의 같은 사회민주주의적 대안들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윤율 하락으로 일부 첨단산업과 투기금융에만 투자하는 신자유주의의 장기 하강 궤도에서 성장과 분배의 끊긴 고리는 다시 연결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대다수가 성장의 떡고물이 언제 내게 떨어지나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것은 성장과 소비의 악순환에 중독된 탓이다.

민주주의란 본래 대중의 자기-통치를 뜻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자율·자립에 기반 한 자기-통치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자기-통치의 권리를 오직 투표 때만 행사하면서 모든 책임을 자본·국가나 ‘진보개혁세력’에게 돌릴 경우 민주주의의 실종은 필연적이다. 아무리 새로운 진보정당을 구성해도 대중의 자기-통치가 부재할 경우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더 늦기 전에 그동안 대의제에 넘겨줬던 정치적 자기결정력을 되찾고, 자본주의적 성장과 소비 논리에서 벗어나 호혜적 생활양식을 새롭게 꾸리고 사회적 연대를 확장해야 한다. 또 자기-조직적인 문화적 역능을 키워내어 자본·국가의 지배를 극복하고 대체할, 자기-통치적인 대중적 네트워크(“민중의 집”)를 아래로부터 새롭게 구성해가야 한다. 이 새로운 운동을 우리는 ‘코뮌주의’라고 지칭한다.(※심광현 교수는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와는 달리 코뮌주의라는 용어를 썼다. 고 대표는 그가 말하는 코뮨주의의 개념은 공산주의 번역어인 ‘communism’에 하이픈을 넣은 ‘commun-ism’이라면서 ‘코뮨-주의’로 표기해야 한다는 견해다. 반면 심 교수는 주민 자치체를 뜻하는 프랑스어 commune의 우리말 표기인 ‘코뮌’을 따라 써야 한다는 견해다. 두 의견을 모두 존중해 필자에 따라 각기 다르게 표기한다.)

 

성장·소비논리에 중독된 대중들
자기 통치력 상실로 민주주의 후퇴
자기 삶의 능동적 기획자로 거듭나
아래로부터의 사회연대 구성해야

 

흔한 오해와 달리 마르크스는 ‘위로부터의’ 계획은 자본주의의 특성이라고 보고, 그 ‘전제적’ 성격을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전제적인 계획생산에 맞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코뮌주의’)을 대치시켰고, 후자로부터 생산의 진정한 재조직과 ‘아래로부터의 참여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코뮈니즘’은 ‘전제적 계획’에 의한 공동생산을 강조하는 번역어 ‘공산주의(共産主義)’와는 무관하다. 코뮈니즘을 ‘코뮌주의’로 재번역하려는 것은 이런 오해를 불식하고, 자유롭고 호혜적인 “사회적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코뮌’의 새로운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그런데 새로운 코뮌주의 운동에도 몇 가지 중요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고병권은 코뮌주의를 “국가와 자본에서 벗어나는 삶의 시도”로 정의했다. 그러나 자본·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과 “이를 극복하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을 수 있다. 노장 사상이나 간디의 운동, 모르몬교 같은 전통적인 공동체 운동도 국가와 자본의 포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물론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벗어나는” 실험부터 해야 한다. 하지만 후자의 노력이 전자의 노력과 선순환 구조를 이루지 않는 한, 이는 자본·국가의 지배에 무해한 소수자들의 자족적인 유토피아적 실험에 머물 뿐이다. 마르크스가 고립된 기묘한 성을 세우는 데에 몰두하며 노동자들의 정치운동에 반대했던 오웬의 ‘홈-콜로니’나 푸리에의 ‘팔랑스테르’ 운동을 공상적이라고 비판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수많은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그러하듯이 ‘사회적 공공성의 코뮌적 전화’를 위한 실천 없는 코뮌 운동은 고립된 공동체주의로 머물 수밖에 없다. 반면, 제도 내 사회화 투쟁에만 매몰될 경우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자립적 동력 구성에 실패하고, 이념적 전위주의로 고립되거나 개혁주의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 자본·국가의 지배를 극복·대체할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양자가 자기 혁신을 통해 선순환구조를 만드는 일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정규-비정규·장애-비장애 구분 없이
모든 이들의 호혜적 협동 필요
화폐적·상품적 생활양식 벗어나
생태적 문화사회에서 대안 찾아야

 

그동안의 국민운동, 민주노총 운동, 민주노동당 운동, 시민운동 등은 대의제 운동의 한계에 갇혀 있었기에 비판받을 점이 많다. 또 공공성의 강화가 단지 국가성의 강화로 귀결되지 않게 하려면 국가권력의 장악을 넘어 국가권력을 해체할 비국가적 공공성을 새롭게 발명해야 한다. 하지만 과거 운동들이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했기 때문에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은” “공통작용”을 찾아야 한다는 고병권의 주장은 원인 분석과 대안으로 적절한가?

정규직 노동자보다 비정규직·해고 노동자가, 정주노동자보다 이주노동자가, 비장애인보다 장애인이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전자 대신에 후자만의 공통작용이 대안이라고 보는 것은 마치 남성보다 여성이 열악한 처지이므로 오직 여성들 간의 공통작용만이 대안이라는 기이한 주장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들뢰즈·가타리도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소수자를 고정된 형태에 한정하지 않았다. 동질성 대 이질성, 공공성 대 공통성이라는 이분법은 “목욕물 갈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우”를 범하기 쉬운 관념적 도식이다. 자본과 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날 뿐만이 아니라” 이를 “극복·대체”하기 위해서는 이런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새로운 코뮌주의 운동은 특정 세력이 아니라 현대세계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국가에 예속된 삶을 극복할 능동적 기획자로 거듭나는 복합적 운동에 붙여진 이름인 까닭이다.

동시에 만연해 있는 화폐적·상품적·반생태적 생활양식과 문화를 비화폐적·비상품적·생태적 생활양식과 문화로 대체해가는 연속적 노력이 중요하다. 이것이 과거의 사회주의·공산주의와 새로운 코뮌주의 운동을 구별해주는 생태문화적 특성이다. 호혜적 협동 속에서 지적·감성적·인성적·신체적 역능을 극대화하면서 타자와 적극 소통하는 다양한 문화적 실험들을 대중 스스로 수행하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코뮌주의 운동을 과거의 정치혁명과는 다른 자기조직적인 문화정치적 혁명으로 발전시켜줄 핵심이다.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를 넘어서는” 코뮌주의는 노동을 단지 새롭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양식을 변혁하여

 
»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노동의 폐지”와 더불어 “모든 개인들을 위해 자유롭게 된 시간과 창출된 수단에 의한 각 개인들의 예술적·과학적 교양 등”을 통해-자연과 공생하는 한에서만- “생활과정을 확장하고 풍요롭게 하는 사회”, 곧 생태적 문화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심광현 교수는1956년생으로 서울대 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생태문화사회 구성체와 코뮌주의 운동의 관계, 생산 양식과 주체화 양식의 관계를 규명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프랙탈〉 〈흥한민국〉 〈문화사회와 문화정치〉 등이 있습니다.

 

코뮤니즘 ‘발견’하고 현실화를 ‘발명’하라
‘코뮨주의’ 대안 맞나
 
 
한겨레  
 
 
» 1968년 5월 파리 바스티유 광장에 모인 학생 시위대. 프랑스 좌파는 ‘68혁명’을 계기로 ‘탈중앙·탈집중화’ 의제에 눈을 떴다. 조정환 강사는 이 운동이 학생이나 여성·동성애자 등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인 움직임에 의해 전개되어 나갔다는 점에서 정치적 태도의 다양성과 분화를 특징으로 하는 현 시기 대안체제 운동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③ 이미 실재한다

 

 

지난 두 주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와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코뮨주의’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두 가지 쟁점이 두드러졌다. 고 대표는 자격과 소속, 기반에 근거한 운동이 더는 의미를 갖기 힘들다고 봤다. 상이한 존재들의 공통운동과 같은 대안적 삶을 위한 실험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를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심 교수는 이에 대해 “동질성 대 이질성, 공공성 대 공통성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관념적 도식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고 대표는 또 국가 개입은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 낳을 것이라며 탈국가적 태도를 분명히 했다. 반면 심 교수는 국가를 벗어나는 것과 극복하는 것은 다르다며 사회적 공공성 강화와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자립적 동력 구성이 선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조정환 강사는 지구화하는 신자유주의가 아이러니하게도 ‘코뮤니즘’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면서 새로운 삶, 새로운 정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대안적 요구에 붙일 이름으로 코뮤니즘보다 더 적실한 것이 아직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오늘날 가능한 코뮤니즘은 자본 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 자체”라고 했다. 이런 노력들 속에서 발전된 코뮤니즘의 개념으로 그는 다중,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을 들었다. 다음주에는 이 주제의 마지막 논자인 정성진 경상대 교수가 의견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신자유주의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삶의 곳곳에 깊숙이 도입되었고 이명박 후임정부에서 더욱 심화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자신이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정치적 집중점이라고 주장해 왔다. 최근 민주노동당의 선거 패배와 혁신, 탈당, 분당, 창당 급물살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사회민주주의적 대응, 곧 복고적 대응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적 가치와 생태주의적 가치의 정치적 혼합 혹은 정치의 사회주의적 급진화 등의 주장이 새로운 대안처럼 제기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적 제국은 이러한 정치들에 대한 면역력과 포섭력을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치적 균열과 다종적 분기의 이 현상들이 새로운 삶, 새로운 정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대안적 요구가 실재함을 보여주는 징후들임은 분명하다. 그 요구가 무엇인가? 그것은 신자유주의 및 신보수주의 우파는 물론이고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좌파들 모두가 한사코 억제하거나 회피하고자 하는 것인바, 그것에 붙일 이름으로는 코뮤니즘(communism)보다 더 적실한 것이 아직은 없다. 이것은 정확히 160년 전 마르크스가 불러내었으나 20세기의 각종 동구적·서구적·제3세계적 사회주의들이 먼 미래로 추방하거나 복지국가, 관료국가의 울타리 속에 가두는 데 성공했던 바로 그 괴물의 이름이다. 코뮤니즘을 추방하고 가두었던 저 역사적 울타리들을 파내면서 지금 코뮤니즘을 다시 불러내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구화하는 신자유주의다.

코뮤니즘은 우리가 미래에서 현재 속으로 도입해야 할 어떤 이상적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관계 속에서 발전하고 성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그리고 자연-인간-기계 사이의) 협력관계로, 나아가 착취관계의 틀을 부수려는 공통되기의 운동으로 이미 실재한다. 자본은 사회 속에 협력관계를 도입하고 촉진함으로써만 축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의 착취는 인간들 사이의 협력과 자연-인간-기계 사이의 협력에 대한 착취이기 때문이다. 착취가 노동시간에 대한 착취로 나타나는 순간에조차 그것은 ‘사회적인’ 노동시간, 곧 협력의 시간을 착취한다. 따라서 자본의 성장과 발전은 동시에 이 협력관계의 성장과 발전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코뮤니즘이라는 사람들간의 협력관계
착취의 틀을 부수려는 공통되기는
자본 등 세계화 속에서 이미 성장·발전
그 잠재된 실재의 발견이 최우선

 

마르크스는 착취관계의 발전을 규명하면서도 그 이면에서 발전하는 협력관계를 밝힐 개념들을 발명했다. 생산 확대에 따른 욕망의 사회문화적 확대, 노동의 사회화, 일반지성의 형성 등이 그것이다. 아니 ‘추상노동’부터가 사회적 협력을 지시하는 개념이다.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비물질화와 혼종(뒤섞임)을 통한 노동의 공통되기, 금융화를 통한 자본의 공통되기, 네트워크적 제국화를 통한 주권의 공통되기가 전개되고 있다. 물론 이 공통되기는 적대적으로 발전한다. 점점 공통화하는 삶에 대한 공통적 식민화가, 다시 말해 공통된 것의 지구화에 대한 공통적 착취의 지구화가 진행된다. 주식회사가 자본의 사회주의였듯이 초국적 금융자본과 제국은 자본의 코뮤니즘의 형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반혁명적 코뮤니즘이다. 우리는 자본의 코뮤니즘이라는 거울상을 통해 삶의 코뮤니즘의 실재성과 그 성숙을 엿볼 수 있다. 코뮤니즘은 발명되기에 앞서 우선 먼저 발견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정치가 이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적 사회주의 운동들은 당대의 협력관계와 공통된 것을 발견했지만 그것을 자본주의적 추상 내부에서 주체화하고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관리하려 했다. 오늘날 사회주의 정치는 코뮤니즘의 실재성을 부정함으로써 코뮤니즘의 현실화를 봉쇄하는 자본주의적 위기관리 방책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문제는 코뮤니즘이다. 코뮤니즘이 현실화하고 활성화해야 할 ‘공통된 것(the common)’은 자본관계 속에서 발전해온 산물이라는 점에서 전자본주의적 공유지(commons)들과는 다르며 전자본주의의 지역적 소공동체들인 코뮌(commune)들과도 다르다. 파리 코뮌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전국적 정치공동체들도 오늘날의 ‘공통된 것’을 표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모든 공동체들은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그 동력을 획득하지만 오늘날 공통된 것은 그 어떤 외부도 존재하지 않는 삶의 내재적 공통화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가능한 코뮤니즘은 자본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 자체이다. 특이적 공통으로서의 다중,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은 이러한 노력 속에서 발전된 코뮤니즘의 개념들이다.

 

‘소공동체들의 소통 중시한 코뮨주의’와
‘국가를 정점에 둔 다층적 코뮌주의’는
새로운 발명 아닌 실험·관리에 그쳐
실질적 창조로서 기능할 코뮤니즘 필요

 

고병권과 심광현은 기존의 자본주의 정치들과는 다른 새로운 정치를 발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필자와 공통적이다. 고병권이 코뮤니즘을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으로 정의할 때 그것은 나의 코뮤니즘 개념의 뒷부분과 일치한다. 하지만 그에게서 코뮤니즘적 발명은 잠재적 코뮤니즘의 발견에 정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소속, 자격, 근거 등의 동일성들을 버리는 과정에서 바로 그것들 속에서 잠재하는 코뮤니즘의 실재성까지 버려 버린다. 그래서 코뮤니즘의 발명은 발견된 실재 위에서의 그것의 발명적 현실화로서보다는 의지적 실험으로 축소된다. 그 실험의 정치는 지금 소공동체로서의 코뮨들을 도입하고 촉발하고 연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코뮨-주의’로 발전되고 있다.

심광현은 이것의 위험성을 ‘고립된 공동체주의’라는 말로 표현해 낸다. 이 위험을 벗어날 심광현의 ‘코뮌주의’적 묘수는 무엇일까? 그것은 실험적 코뮌들의 발명의 층위 위에 비국가적 공공성의 발명이라는 층위을 얹는 것이다. 이 두 발명의 층위들은 국가를 민주화할 층위들인데 국가는 이들의 상층에 놓인다. 그런데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이 삼층의 선순환 구조야말로 지금까지 자본이 협력을 흡혈하고자 사용한 바로 그 구조가 아닌가? 그리하여 심광현은 다중의 전 지구적 공통되기를 코뮌적 발명들로 환원한 후 그 위에 몇 겹의 중층적 구조물을 얹어 그것을 관리하는 정치를 ‘코뮌주의’적 정치라고 한다. 다중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고병권의 실험적 위험보다 더 큰 구조적 위험을 삶에 도입하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은 이 변형된 사회주의가 ‘호혜적 협동 속에서 대중 스스로 수행하는 문화적 실험’들의 성과까지 체계적으로 금력(金力)으로 전화시킬 연금술적 장치로 기능할 것임을 앞서 보여준다.


 
» 조정환 강사
 
이 위험들로부터 우리는, 코뮤니즘적 발명들이 실험이나 관리를 넘는 실질적 창조로서 기능하려면 발견되는 코뮤니즘의 발명적 현실화여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조정환/다중지성의 정원 상임강사

 


조정환 강사는 1956년에 태어났으며,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이탈리아 자율주의 운동 등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탈근대적 사회운동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제국기계 비판〉(갈무리, 2005) 〈아우또노미아〉(갈무리, 2003) 등의 저서를 펴냈습니다.

 

자본주의 안의 코뮤니즘’ 아닌 반자본주의로
‘코뮨주의’ 대안 맞나
 
 
한겨레  
 
 
» 멕시코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가 자본주의 체제의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인 착취 구조를 고발할 의도로 그린 1933년 벽화 <현대 산업>. 정성진 교수는 자본주의를 뛰어 넘기 위한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투쟁 및 혁명정당의 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④ 고전적 코뮤니즘과 접목해야

 

지난 세 주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와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상임강사가 논쟁을 펼쳤다.

고 대표는 자격과 소속 기반에 근거한 운동이 더는 의미를 갖기 힘들다고 봤다. 상이한 존재들의 공통운동과 같은 대안적 삶을 위한 실험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를 열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 개입은 삶에 대한 독점만 강화할 것이라고도 했다. 심 교수는 고 대표 주장은 동질성 대 이질성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관념적 도식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사회적 공공성 강화와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자립적 동력 구성이 선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지난 주, 조 강사는 코뮤니즘은 “자본 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이라면서 이는 “다중이나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으로 이미 실재한다고 했다.

정성진 교수는 코뮤니즘 담론의 난점으로 “코뮤니즘이 자본주의 안에서 이미 실존한다는 주장으로 건너뛴 데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지배적인 조건에서 코뮨주의자들의 ‘탈주’는 자본주의 영토를 더욱 넓힐 것이라면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투쟁 및 혁명정당의 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다. 다음 주에는 논쟁의 새 주제인 ‘이명박 정부의 성격,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가 의견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최근 진보진영 일각에서 코뮨주의 혹은 코뮤니즘 담론이 유행하고 있다. 코뮤니즘은 이전에는 ‘공산주의’라고 번역했던 ‘communism’이라는 영어 단어를 발음 그대로 표기한 것이며, 코뮨주의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라는 ‘코뮨’(commune)의 성격을 부각하기 위한 표기법이다.

우리나라에서 코뮤니즘 담론은 고병권과 이진경이 주로 주장하는데, 자율주의자 조정환과 생태적 문화사회론자 심광현도 이를 부분적으로 공유한다. 고병권에 따르면, 코뮤니즘은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노력”으로서 “국가와 자본에서 벗어나는 삶의 시도”로 정의되며, 실제로는 공동체주의로 구체화된다. 반면, 조정환은 코뮤니즘을 “자본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로 정의하고, 이는 “자본관계 속에서 발전하고 성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협력관계로, 나아가 착취관계의 틀을 부수려는 공통되기의 운동”, 곧 “다중,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으로 이미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코뮤니즘 담론의 의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개념 복원이자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이미지 쇄신
반자본주의 공동전선 재건 길 마련한 것

 

최근 코뮤니즘 담론의 유행은 옛 소련의 몰락 이후 득세했던 ‘자본주의 이외 대안부재론’(TINA)이나 ‘역사의 종언’이 퇴조하고 자본주의 모순이 격화되면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넘어서려는 갈망이 증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코뮤니즘 담론은 그 동안 스탈린주의와 반공주의, 사민주의가 억압·왜곡해 온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코뮤니즘 개념에 핵심적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복원한다는 점에서 적극적 의의를 갖는다. 그 동안 국유화, 명령경제, 수용소군도의 음울한 세계로 그려졌던 코뮤니즘을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고병권과 이진경)으로, 혹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기쁨”(네그리와 하트)으로 환골탈태한 것은 코뮤니즘 담론의 주요한 공헌이다. 코뮤니즘 담론은 코뮤니즘의 실현을 “먼 미래”의 일로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달성해야 할 과제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최근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가속화되고 있는 진보진영의 개량화 경향에 제동을 걸고, 반자본주의 공동전선을 재건할 수 있는 이론적 자원으로서 주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코뮤니즘 담론을 그 뿌리인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비추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차이와 난점이 드러난다. 우선 코뮤니즘 담론은 코뮤니즘이 현재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서 미래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가 없다. 코뮤니즘의 잠재태가 자본주의 안에서도 “자본관계 속에서 사람들 사이의 협력관계”로서 형성·발전된다는 말은 맞다. 또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을 지향하는 운동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코뮨주의자들이 새롭게 창안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을 반복한 것이다. 코뮤니즘 담론에서 새로운 점은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 이행의 주객관적 조건의 실존 사실을 근거로 하여 현실의 지배적 체제로서 코뮤니즘이 자본주의 안에서 이미 실존한다는 주장으로 건너 뛴 데 있다. 하지만 이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을 위한 주객관적 조건이 실존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서 지배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체제는 코뮤니즘이 아니라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지배적인 체제인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 이행하는 문제는 회피될 수 없다.

코뮤니즘 담론은 이행의 문제 자체를 부정하고,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의 도정에서 정면 돌파해야 할 장애물들인 자본주의적 착취관계와 억압적 국가권력을 모두 회피하거나 무력한 것 혹은 무해한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들이 유지되고 강화되는 것에 봉사한다. 단지 “탈주”를 되풀이하는 것으로는 국가와 자본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중투쟁의 거대한 고양 없이 “비국가적 비시장적 네트워크”를 확대하는 것만으로 자본주의적 착취체제와 억압적 국가권력은 해체될 수 없다. 자본과 국가를 배경으로 한 시장의 논리, 상품화의 논리, 경쟁력의 논리 자체가 코뮨주의의 “잠재태의 현실화”에 근본적 한계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코뮤니즘이 이미 실재한다는 건 비약
자본주의 지배 체제에 갇혀 있는 한
비국가·비시장적 네트워크 실현 힘들어
대중투쟁 통해 자본주의 경계 넘어서야

 

자본주의 체제가 지배적인 조건에서 대중들이 “안정된 일자리에 대한 갈망”, “좋은 정부에 대한 갈망”을 갖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이러한 대중의 갈망을 뭔가 문제 있는 “증상”이라고 탓하거나 무시하고, 이를 모종의 대안 공동체 실험들로 대신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에 갇혀 있는 한, 대중들의 이와 같은 갈망이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구명하고, 대중의 갈망과 분노, 투쟁과 결합하여, 이를 자본주의의 경계를 넘어서는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전화시키는 것이 코뮨주의자들의 과제일 것이다.

코뮨주의자들은 조직노동운동처럼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한 운동이나 “복지국가에 대한 갈망”을 “복고적”일 뿐만 아니라 기존 체제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대중들이 국가에서든 자본에서든 “자격이나, 소속, 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은 자신의 노동력 판매에 성공할 때이다. 극소수 자산가를 제외한 대중은 이와 같은 노동력 상품의 판매에 실패할 경우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복지국가에 의존하거나, 소상품생산자(자영업자)가 되는 도리 밖에 없다. 코뮨주의자들은 이러한 선택지 중 노동력 상품 판매와 복지국가를 거부하므로, 결국 남는 대안은 소상품생산이라는 자본주의 시장의 주변부에 기생하는 것이다.

코뮨주의자들은 브로델이나 아리기처럼 “비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서 시장의 논리는 상품화의 논리, 경쟁력의 논리로 발전하여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코뮨주의자들이 애호하는 “비시장적 네트워크”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 자체가 거부되고 폐지되지 않는 한, 고립된 주변적 공동체들 간의 연계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가 지배적인 조건에서 코뮨주의자들이 탈주하고 난 다음 생겨난 국가와 자본의 빈 자리는 다시 시장에 의해 채워질 것이며, 그 결과 자본주의 영토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 정성진 경상대 교수
 
코뮨주의자들의 오해와는 달리, 오늘날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퇴각하거나 시장으로 대체되기는커녕, 상품화의 확대와 경쟁력의 강화, 착취의 강화에 봉사하는 국가로서 그 역할이 다시 정의되고 있다. 이 때문에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코뮤니즘 개념에 핵심적인 자본주의 국가 분쇄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투쟁 및 혁명정당의 역할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 코뮤니즘 담론이 진정으로 반자본주의 운동에 헌신하고자 한다면 그 동안 멀리했던 자신의 뿌리와 다시 접목할 필요가 있다.

정성진 경성대 교수·경제학

 


정성진 교수는 1957년생이며 현재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방법에 의거한 현대 한국경제 분석과 대안적 사회주의 경제 모델 구상 및 대안사회운동론 연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마르크스와 한국경제>(책갈피, 2005),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2006)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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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어떻게 볼까

 

근대화 의지 투철…대한제국은 무능치 않았다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 고종의 어진. 고종은 과연 개혁군주였는가, 개혁군주였다면 개혁의지는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 관건적인 문제다. 이태진 교수는 고종이 확고한 개혁·개화 의지를 지닌 군주였다고 역설한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① 개혁군주다

 

지난 5주 동안 네 명의 학자가 참여한 ‘이명박 정부의 성격’ 논쟁에 이어 이번주부터 ‘고종은 개혁군주인가’를 놓고 학자들의 논쟁이 펼쳐진다.

고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한국 근현대사의 출발점을 이해하는 데 관건적 문제다. 고종의 퍼스낼리티나 정책 방향, 시대인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조선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이 있었는지, 아니면 일제 강점으로 비로소 타율적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제3의 대안세력이 존재했는지, 존재했다면 어느 정도의 역사적 무게를 지니고 있었는지 따져보는 데도 고종은 하나의 준거가 된다. 그동안 고종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사이에 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무능하고 유약한 군주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논자로 나선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에 대한 이런 기존 인식이 고종의 개혁 의지와 개혁 방향을 과소평가한 데 따른 것이라며 ‘고종 재평가’를 가장 선도적으로 주장해 온 학자다. 이번 글에서도 이 교수는 고종이 “청년 시절 개방·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미국·영국·독일 등과 잇따라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빨리 받아들이기 위해 미국을 최우선 파트너로 택하여 밀착 외교를 펴려고” 했음을 강조한다. 이 교수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고종의 근대화 정책에 일본이 위협을 느낀 결과라고 해석한다. 고종의 근대화 의지는 확고했다는 것이 이 교수의 논지다. 다음주에는 하원오 동국대 연구교수가 고종에 대해 다른 견해를 밝힌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최근 ‘뉴라이트 교과서’로 지칭되는 <대안교과서 한국 근ㆍ현대사>가 무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근대사 서술에서 최근 학계에서 재평가되고 있는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반면, 일본 의존의 갑신 ‘개화파’와 식민지 시기 경제성장론을 줄기로 삼은 것이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식민지 시기를 근대 문명학습 또는 실천기로 평가하면서 경제 발전으로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고 강조한 것이 물의를 일으켰다. 이런 역사 서술로 과연 대한민국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자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려마저 빚어졌다.

나는 2004년에 이미 이런 식의 역사인식과 반년에 걸친 긴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교수신문>을 통해 벌인 이 논쟁은 한국 논쟁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 아래 <고종황제역사청문회>란 책자로 출판되기까지 했다. 백 번의 대결을 불사했던 나에게 ‘고종은 개혁군주인가’를 다시 논하라는 주문이 들어온 순간, 뒤늦게 피로감을 느꼈다. 넘어야 할 산이 이렇게 첩첩인가. ‘대안교과서’는 4년 전 논쟁에서 판정승을 거둔 것이 아니었다면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고려해 좀더 신중했어야 하지 않았던가.

달포 전, 어느 일간지에 고종황제가 을사늑약의 실효를 저지하고자 프랑스인 고문을 독일에 보내 우리 공사관들이 현지에서 철수하지 말 것을 훈령하고 또 독일 황제에게 일본의 조약강제의 만행을 알리면서 일본의 보호국이 되기보다 차라리 서구 열강국들의 시한부 공동보호를 받겠다고 제안하는 친서가 공개되었다. 그 내용의 절박성과 절절함이 국민적 감동을 자아냈는데 이번 ‘대안교과서’의 서술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않은 역사 서술이다. 내가 보기에 ‘대안교과서’가 개화파 주도의 근대화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두 가지로 우리 근대사를 엮은 것은 유감스럽게도 일본의 극우 역사관과 너무 많이 닮았다. 대한제국의 자력 근대화노력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조선총독부 지도 하의 ‘근대문명 학습’을 홍보하려는 목적 때문이라고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을사늑약부당” 독일에 보낸 친서
고종의 구국의지 여실히 드러내
뉴라이트, 자력 근대화 노력 폄하
시대적 분위기 감지 못한 것

 

 

1919년 3월1일에 만세 시위운동이 있은 뒤 9월에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조선공화국이란 새 국호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대의원회의에서 긴급동의가 나왔다. 곧 반 년 전 대한문 앞에서 울려 퍼진 만세의 함성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죽음에 대한 애도요 충성의 소리인 만큼 그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대한민국으로 하자는 제안이 나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던 우리 선조들의 역사 인식은 이렇게 대한제국의 역사를 끌어안고 있었다.

고종은 청년 시절 개방ㆍ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ㆍ미국ㆍ영국ㆍ독일 등과 잇따라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빨리 받아들이고자 미국을 최우선 파트너로 택하여 밀착 외교를 펴려고 하였다. 수교 조약을 맺은 뒤에 미국 정부에 교사 파견을 요청하고 미국 회사들과 계약하여 왕궁에 먼저 전기를 시설하고, 통신과 우편제도를 도입하고, 광산 개발 준비도 하였다. 이런 개화 노선에 대해 아버지 대원군이 불필요하게 임오군란을 일으켜 이를 빌미로 청국이 개입하여 속방화정책을 폄으로써 군주의 개화정책은 위기를 맞았다. 그의 근대화 정책은 그 뒤 일본으로부터도 위협을 받아 청일전쟁 직전에 왕궁을 침범당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왕비가 시해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만약 군주와 그의 정부가 어리석고 무능하기만 했다면 일본이 왜 국제적 비난을 사기 마련인 이런 만행을 저질렀겠는가?

고종의 개화정책은 왕비를 잃고 대한제국을 세운 뒤에 탄탄대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으로 청국이 한반도에서 물러나고 일본이 삼국 간섭으로 일시 침략의 방향을 대만으로 돌린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근대화 사업은 눈부시다 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한반도 북부 지역의 금광ㆍ석탄 개발을 중요 사안으로 한 국토개발 계획이 세워진 상태에서 철도 부설과 광산 개발이 진행되고 서울에서는 워싱턴 디시를 모델로 한 도시 개조사업이 착수되었다. 오늘날 시청 앞 광장과 방사상 도로체계는 이때 처음 틀을 잡은 것이다. 곧 미국의 대통령궁(백악관)처럼 왕궁(현 덕수궁)을 도심에 새로 짓고 대안문(대한문) 앞을 방사상 도로의 중심으로 삼고, 기존의 종로, 남대문로를 확장하여 연결시켜 전차를 달리게 하였다.

 

고종 청년시절 서구와 수교 맺고
미국과 밀착외교로 문명수입 시도
일 ‘왕비 시해’ 위협 속에서도
개화·개방정책으로 근대화 밑그림

 

한편, 서울ㆍ개성ㆍ인천 등지의 자산가들 힘으로 1899년 대한천일은행이란 국고 은행을 세우고 1902년에는 지폐 발행을 위해 중앙은행 발족 준비를 마쳤을뿐더러 1899년 한청조약을 체결하여 청국과 대등한 독립국의 위상을 세우고, 바로 이어 헌법 전문(前文)에 해당하는 국제(國制)를 반포하여 황제국을 자처하였다. 이를 두고 군주전제정치로의 회귀란 비판은 한쪽 눈으로만 보는 역사다. 천황권의 신성성까지 표방한 명치 일본제국 헌법은 고대로의 회귀란 말인가. 근대국가 수립에서 군주권의 절대성 표방은 보편적 현상인데 굳이 대한제국만 예외적으로 비판받아야 하는가.

나는 고종이 청년 시절에 어떻게 해서 선진문명 수용의 개방주의 사상을 가지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이 의문을 풀 실마리를 최근에서야 잡았다. 지난가을,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열하(북경 북방 600여㎞ 지점)를 찾으려 이 책을 열심히 읽었다. 이 책에는 벽돌ㆍ수레 등의 사용을 주장하는 이용후생의 내용이 많이 담겨 있지만 더 중요한 대목은 열하에 도착하여 건륭제가 티베트 라마불교의 지도자 판첸라마를 평등례로 대우하는 광경을 목도한 부분이다. 청국은 몽고족의 위협을 제어하기 위해 대부분의 몽고족이 믿고 있는 라마불교의 지도자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그런 우대 정책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박지원은 바깥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조선은 대명의리의 북벌론에 빠져 있는 것이 너무도 개탄스러웠다. <열하일기>는 이렇게 세계정세에 대해 눈뜨기를 외친 역사 교훈서로 큰 의미가 있다.


 
» 이태진/서울대 교수·국사학
 
나는 여기서 고종의 선진문명 수용 개방주의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금방 깨달았다. 청년 군주의 곁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가 있기도 하였지만, 직접 정치를 선언하면서 새로 지은 집무실 겸 서재(집옥재ㆍ集玉齋)를 벽돌로 지은 사연도 알 수 있었다. 아들 순종 황제가 나라를 강제로 빼앗기기 사흘 전 박지원을 “문장과 나라를 운영하는 방법이 일세에 탁월하였다”는 사유로 좌천성에 추증한 사실은 비감하기까지 했다. 순종 황제는 아버지ㆍ어머니가 연암 박지원을 높이 받든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망의 순간에 이 사실을 밝혀두고 싶었던 것이다. 박지원의 북학파 실학은 개화 군주 고종의 자력 근대화의 사상적 기초를 이루었던 것이다. 고종의 개혁정치는 이제 우리 민족사의 본류로서 깊이 천착ㆍ음미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태진/서울대 교수·국사학

 


이태진 교수는 1943년 경북 영일 출생이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국사회사연구>, <조선유교사회사론>,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왕조의 유산-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고종시대의 재조명>,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이 있다.

 

근대화 아닌 왕권 집착하다 국권 잃어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지나친 미화는 곤란

 

 

지난주부터 ‘고종은 개혁군주인가’를 놓고 학자들의 논쟁이 시작됐다. 고종이 개혁군주였는가 하는 문제는 조선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이 있었는지를 가늠하는 준거 가운데 하나다. 첫 번째 필자로 참여한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에 대한 재평가 작업의 선두에 선 학자답게 고종의 개혁의지, 개혁실천을 강조했다. 이 글에서 그는 고종이 “청년시절 개방·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미국·영국·독일 등과 잇달아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빨리 받아들이기 위해 미국을 최우선 파트너로 택하여 밀착 외교를 펴려고” 했음을 강조했다. 고종의 근대화 의지는 확고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두 번째 논자로 나선 하원호 동국대 연구교수는 “그동안 무능력으로 대표되던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고종이 근대화 과정에서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해 왔다는 점이 밝혀졌다”고 개혁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에 주목했다. 고종이 진정한 근대화 의지가 있었다기보다는 왕권 강화 차원에서 부분적으로 개혁적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온 세계가 근대사회로의 진입에 진통을 겪고 있던 시대에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던 고종이 ‘구국의 인물’로 재해석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요컨대, 고종은 왕권 강화에 골몰했을 뿐 국권 수호나 진정한 근대화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다음주에는 조선정치사상사를 전공한 강상규(도쿄대 박사)씨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그동안 고종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는 아버지인 대원군의 등에 업혀 있거나 마누라인 민비의 치마폭 밑에 있다가 결국은 나라 망해 먹은 왕이라는 부정적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고종이 그동안 무능력으로 대표되던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근대화 과정에서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해 왔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래서 90년대 이후에는 고종의 평가도 많이 달라졌는데, 그동안의 대중적 이미지나 학계의 고종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력히 비판하고 고종이야말로 한국의 현실에 맞는 자주적 근대화를 실현하고 마지막까지 국가를 지키려던 ‘우리의 황제’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정치력이란 게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고종의 행위가 오로지 국가를 위해서라는 것이 미화하는 쪽의 입장이다. 왕과 국가가 하나로 묶여 있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왕권이 곧 국권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어느 학자의 주장대로 고종이 아무리 18세기의 ‘영명한 영정조의 이념을 계승’했다고 하더라도 시대가 다르다. 온 세계가 근대사회로 진입하는 데 진통을 겪고 있던 시대에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던 고종이 ‘구국의 인물’로 재해석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개항 이후 초기 개화정책을 수행한 쪽은 김옥균 등 개화파라는 것이 교과서적 상식이지만, 고종이나 민비도 개화에는 관심이 많았다. 부국강병하자는 데야 권력의 핵심들이 싫어할 리도 없었고 그래서 민씨 일족도 이에 가세하고 있었다. 근대화하자는 큰 논리에는 고종, 민비, 민씨 척족들도 다들 인정하고 있었으나 정치적 행위는 오히려 대원군 이전 세도정권의 부패상을 그대로 잇고 있었다.

 

근대화에 정치력 발휘했지만
개혁은 권력 강화의 도구였을 뿐
왕권-국권 혼동하며 부패 일삼아
‘구국의 인물’ 재해석은 시대착오적

 

권력의 부패는 민중의 저항을 야기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민비는 죽을 위기를 넘겨 장호원으로 피신하게 되고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대원군 덕분에 권력을 행사하기 어렵게 된 고종이나 민비의 입장에서는 이 현상을 타개할 묘안을 찾아야 했고, 민비는 은밀한 서한을 고종에게 보냈다. 청나라 군대의 파병 요청이 그것이었다. 남의 나라 군대를 빌려 국내의 권력다툼을 해결하고자 했던 장본인이 바로 이 고종과 민비였고, 그 뒤 외세가 툭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우리를 협박한 빌미를 제공한 것도 이들이었다.

청나라 군대 때문에 다시 권력을 되찾게 된 고종과 민씨 척족들이 한동안 친일적이던 외교정책을 친청으로 바꿀 것은 당연했다. 갑신정변 실패 뒤 청국은 원세개를 보내 조선을 속국처럼 다루었다. 아무리 고종이 청나라에 기대 권력을 유지하는 처지지만 청에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나 미국을 끌어들여 청을 견제하려 했으나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나름대로 자주적 외교정책을 내세웠다는 평가가 가능할 정도로 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 자주적 외교정책은 국권의 확보를 위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조선에서 고종 자신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르는 청과 감국으로 파견된 원세개에 대한 반발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왕권에 대한 외세의 침해가 일차적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농민전쟁에 대응하는 고종의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청나라 병사로 막아내자.”

고종이 1893년 동학 농민군이 보은집회를 할 때부터 한 말이다. 외교정책의 반청적 성향과 국내에서의 민중봉기에 청군을 끌어들여 해결하려는 이중성의 배후에는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는 고종의 전근대적 인식이 있었던 것이고 이 이중성도 왕권에 대한 집착이라는 점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농민전쟁 때 고종이 지키려던 것은 분명히 왕권이지 국권이 아니다. 덕분에 왕자리는 보존했지만 그 통에 국가는 결딴이 나고 식민지로의 길도 가속화되고 말았다.

 

대원군·민중 견제엔 청 군대 이용
청 견제엔 서구 끌어들이려는 시도
권력 지키려다 외세간섭 빌미 줘
개혁도 못한 채 패망·식민지 가속화

 

일본인들에게 민비가 죽고 난 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했다가 환궁하고 나라 이름을 바꿔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독립협회도 만들어져서 활동하는데 독립협회 초창기에는 고종도 호의적이었지만 의회개설운동을 벌이자 보부상을 동원해 해산하고 전제황권을 강화했다. 이 독립협회의 평가는 학자간에 다소 차이가 있다. 어느 학자는 의회개설 운동이 “독립협회에 잠복한 친일분자들의 황제권 약화운동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황제권의 강화가 이 시대의 대안이었다는 이야긴데 실제로 황실 중심으로 개혁을 시행하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이 그것이다.

제도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인 광무양전사업을 벌이기도 하고 상회사, 은행, 근대적 생산공장의 설립과 광산 개발, 철도 부설 등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광무개혁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간 곳은 군사력 강화다. 국가 재정의 40%가 이 비용이었다. 강병을 하지 못해 농민전쟁 때도 외국군을 끌어들인 나라 사정을 생각하면 고종으로서 가장 공을 들일 것은 당연했다.

군사력 강화의 목적은 당연히 국가 주권의 수호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던 고종이 군사력 강화로 지키려던 것은 왕권 쪽에 더 가까웠다. 이미 1880년대에 경기와 호서, 황해도 지역 연해를 방어해 수도 방위에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던 기연해방연을 왕실 경호를 주임무로 하도록 바꾸어 농민군마저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군사력을 약화시켰던 고종은 대한제국 시기에도 군사력 증강의 주목표를 왕실을 지키는 데 두었다.

근대국민국가가 수립된 뒤의 군사제도는 국민군제다. 국민적 통합에 기반한 국민군제는 대외적으로도 강력하지만, 대내적으로 강력한 군주제를 바랐던 고종의 군대는 왕에게 충성하는 용병제일 뿐이었다. 러일전쟁이 현실화되는 1903년께 가서야 비로소 고종은 징병제 실시를 위한 조칙을 내렸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의회개설운동 등으로 확산되고 있던 근대국민국가의 수립운동을 억누르고 전제군주제를 강화하려 했던 고종으로서는 국민통합에 기반한 국민군제인 징병제를 실행할 수는 없었다. 결국 개혁은 실패하고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말았다.


 
» 하원호/동국대 연구교수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객관성을 잃은 역사의 미화는 현재 우리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일제의 강압이라는 외적 요인에만 두지 않고 우리 내부의 문제를 냉정하게 성찰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최근 뉴라이트 쪽에서 쓴 ‘대안교과서’의 대한제국 평가는 대한제국의 전체상을 그리기보다 경제 쪽에 치중해 부정적 평가를 한다. 이들의 의도는 분명하다. 대한제국의 경제적 근대화의 한계가 바로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과론적 함정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이 역시 역사의 객관성을 잃은 평가다.

하원호/동국대 연구교수 hwh2000@hitel.net

 


하원호 교수

1954년 생이며 고려대 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요즘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 분야는 ‘동아시아사와 한국근대 사회사상의 변동’입니다. 주요 저작으로 <한국근대경제사>(1997), <근대의 진통>(2006), <한말일제하 나주지역의 사회변동 연구>( 2008)가 있습니다.

 

근대화 의지,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 서구식 제복을 입은 고종 황제와 고종이 1907년 이상설 등을 통해 헤이그평화회의에 보낸 밀서. 강상규 박사는 고종이 “극소수의 개화세력을 보호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버팀목 구실을 했으며, 근대 국제법에 입각한 자주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했다”고 평가한다. 〈한겨레〉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③ 당시 정세 복합적 고려를

 

‘고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놓고 진행중인 논쟁이 열기를 더하고 있다. 고종을 개혁군주라고 보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고 보는 주장이 대립하는 국면이다. 고종 재평가 작업을 선두에서 이끌어왔던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첫 번째 필자로 나와 고종의 개혁의지가 충만했으며, 개혁실천에 힘썼음을 강조했다. 이어 두 번째 논자로 나선 하원호 교수는 고종에게 개혁성이 있었음이 실증적으로 입증됐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더 강조했다. 고종은 왕권 강화에 골몰했을 뿐 국권 수호나 진정한 근대화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하 교수의 논지였다.

이에 대해 세 번째 논자로 참여한 강상규 박사는 이태진 교수의 견해에 더 가까운 입장에서 고종의 개혁군주적 모습에 방점을 찍는다. 강 박사는 “거대한 전환기를 살았던 인물”임을 강조하면서 고종을 정확히 알려면 고종이라는 실존적 인물을 둘러싼 복잡한 권력그물을 아울러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왕을 둘러싼 복합적인 정치적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 거대한 전환기의 조선 정치를 논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강 박사는 고종의 개혁 개방 의지가 초기부터 강했지만, 그 의지가 정책으로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많은 장벽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강 박사는 고종이 왕권과 국권을 혼동했으며 왕권 수호에 급급한 인물이었다는 하원호 교수의 주장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그 근거를 밝힌다. 다음주에는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가 고종에 대한 또다른 견해를 밝힌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고종은 ‘문명사적 전환기’라고 일컬을 만한 ‘거대한’ 전환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이 시대는 동아시아가 막강한 물리력을 앞세운 서양 제국과 마주해야 했던 시기이며 아울러 고유한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이질적인 패러다임과 전면적으로 부딪치는 과정이었다.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조선의 지식인과 위정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문명의 세계가 야만으로 전락하고 금수들의 세계가 문명세계로 둔갑하는’ 것과 같은 혼돈의 상황으로 인식하였다. 상이한 문명이 충돌하게 되면서 ‘문명기준’이 뒤바뀌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열두 살 소년이 왕위에 오른 것은 이러한 위기와 혼돈의 파고가 조선에 막 밀려들기 시작하는 상황에서였다.

왕위에 오른 뒤 유교적 민본의식을 몸에 익혀 나가던 고종은 신미양요(1871)를 치른 이후 대외 정세에 점차 눈을 뜨게 된다. 측근인 박규수를 비롯한 연행사절들을 통해 서양의 제국이 강력하며 서양화된 일본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고 중국이 이를 맘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고종은 대원군이 주도하는 조선의 배외정책이 현실적으로 조선을 고립시키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상황 판단은 친정선언으로 이어지고 조선의 대외정책을 전환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고종의 고민을 정책으로 담아내는 데는 많은 정치적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공론에 의거한 정치 운영의 전통, 왕권에 대한 강력한 견제 구조, 대원군 세력의 광범위한 정치적 영향력, 조야에 팽배한 화이론적 명분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다수가 동의할 만한 비전과 정책을 현실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을까?

 

신미양요 뒤 개화·개방 눈떴지만
정책화까진 현실적 장벽 너무 높아
내부선 대원군·보수세력 부딪히고
외세 간섭으로 자주근대화 좌절

 

고종의 개혁이 현실화된 것은 1880년을 전후해서이다. 외교, 국방, 통상, 재정, 무기제조, 인재 선발 등을 담당하는 기구로서 기존의 의정부와 동급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세우고, 일본과 중국에 대규모 시찰단을 비밀리에 보내 개방과 개혁의 추진을 위한 탐색과 함께 미국 등 서구 열강과 ‘조약’관계를 추진해 나간다. “중국이 우리와 힘을 합하자고 하지만 이를 어찌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 역시 부강책을 시행해야만 한다”, “천하의 대세를 두고 볼 때 옛 도리만을 지킬 수 없다”는 고종의 지시나, 일본 쪽 외교관들이 “시찰단은 처음부터 국왕의 결단에서 나온 일”이며,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도록 국왕의 지시를 받은 이들 일행이 조선의 개화의 기본을 다지게 될 것”이라고 본국에 보고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고종은 개방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대세력을 달래가면서 극소수의 개화세력을 보호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버팀목 구실을 했으며, 중국과 일본의 개혁모델을 비교하고 절충해 가면서 사대교린 질서를 청산하고 만국공법(근대 국제법)에 입각한 ‘자주’국가를 세우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세계의 변화상에 주목하고 달라진 무대 환경에 새롭게 적응하려는 모습은 국내외의 다양한 비판과 견제에 부딪히게 된다.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은 그중 대표적인 사건들이었다. 두 사건은 정반대의 방향을 지향하는 세력이 주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유구(류큐·오키나와)병합(1879) 이후 ‘조선문제’가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적 핵심이슈로 부상하던 민감한 상황에서 발생함으로써 주도세력의 의도와는 다르게 중국과 일본의 군사적 간섭과 갈등을 초래하였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두 사건은 고종이 주도하는 개화 자강정책을 너무 과격하고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층과 너무도 온건한 것이라고 생각한 세력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사건들로 말미암아 우리 손에 의한 개방 개혁정책의 추진은 사실상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권력정치의 현장인 제국의 시대는 조선을 더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후 갑신정변의 여파로 인한 강렬한 보수 회귀의 분위기 속에서 청국의 종주권 획책이 본격화하면서 청의 외압이 가중되었으며, 국왕에 대한 견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동학 농민봉기라는 아래로부터 개혁 요구와 이를 계기로 한 열강들 사이의 전쟁이 나타난 것은 이 와중에서였다.

 

고종의 왕권 집착은 사실과 달라
일 ‘황실 보호’회유에 목숨건 저항
외부 탓하며 내부비판 외면 안돼도
분리 생각땐 되레 역사왜곡 우려

 

고종이 왕권과 국권을 혼동했으며, 왕권 수호에 급급한 인물이라는 지적(하원호 교수)은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청의 외압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고종이 자주의식에 잘못 빠져들어, 죽음에 이를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였으며, “이 어리석은 군주를 폐위시키자”고 건의하였다. 일본이 조선을 장악한 상황에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황실을 특별히 보호해 주겠다고 하면서 고종을 회유하려 할 때 “죽을지언정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저항하면서 망명을 시도하기도 했고, 목숨을 걸고 밀사외교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최근 신문지상에 고종이 친히 밀서를 작성해서 보냈다는 보도가 나온 것은 국왕의 이러한 고뇌를 담은 흔적 중의 일부이다.

19세기 서구의 아시아 인식은 ‘동양적 전제주의론’과 ‘정체(停滯)사회론’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근대적 실증사학은 이를 토대로 조선의 ‘타율적이고 정체된’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 따라서 일본의 식민사관 때문에 조선의 국왕 고종은 역사적으로 정체된 조선을 상징하는 인물로 묘사되었고, 그 후 우리의 의식 속에서 고종은 시대착오적이고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존재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외세의 압력만을 들먹이면서 우리 내부 문제를 비판하지 않는 것은 식민사관이 저지른 역사 왜곡을 극복하려는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객관성을 상실하고 역사를 미화’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지적은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의 상황은 내부와 외부의 문제가 긴밀히 맞물려 있어 형식상 나누어서 생각해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별개의 것으로 구분해서 이해해서는 오히려 구체적인 상황을 왜곡할 소지가 크다. 실증주의자들의 믿음과는 달리 사실과 가치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호구성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강상규/도쿄대 박사·정치학
 
고종에 대한 논의 수준이 깊어져야 하는 이유는 단지 왜곡된 고종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당시 한반도 내부의 복잡한 인간관계의 그물 한가운데 서 있는 존재였다. 국왕을 둘러싼 복합적인 정치적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 거대한 전환기의 조선 정치를 논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고종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19세기 조선의 정치 공간과 구조, 그리고 그 안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며 모색하던 인물들에게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다가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강상규/도쿄대 박사·정치학

 


강상규씨는 1965년생이며,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도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은 <조선의 유교적 정치지형과 문명사적 전환기의 위기>(2005)이며, 저서로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2007),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2008)가 있습니다. 주요 관심 분야는 근대 동아시아 정치외교사 및 사상사입니다.

 

근대화 내세워 백성 울린 ‘세도정권의 수장’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 전차가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98년이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능(홍릉)에 자주 행차했는데, 이것을 고려하여 전차 노선을 서대문~홍릉으로 택했다. 순종의 승용차로 쓰인 미국의 제너럴모터스에서 제작한 캐딜락.(아래)
 
우리시대 지식논쟁 /

 

4 왕권 수호에 올인

 

‘고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삼아 진행 중인 지상논쟁이 지난 3주 동안 벌어졌다. 고종을 개혁군주라고 할 수 있느냐, 개혁군주라면 어느 정도의 개혁성과 실행력을 지니고 있었느냐 하는 논쟁이었다. 첫 번째 논자로 나선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 반면에 두 번째 논자로 등판한 하원호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을 인정하다고 해도 그 한계에 더 주목해야 함을 강조했다. 고종은 왕권 강화가 궁극적 목적이었을 뿐 진정한 근대화에 큰 관심은 없었다는 것이 하 교수의 주장이었다. 세 번째로 글을 쓴 강상규 박사는 고종의 개혁군주적 모습에 더 주목했다. 강 박사는 “거대한 전환기를 살았던 인물”임을 강조하면서 고종의 개혁·개방 의지가 초기부터 강했지만, 그 의지가 정책으로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이 많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네 번째 논자로 나선 이는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다. 박 교수는 하원호 교수와 유사한 견지에서 고종을 비판적으로 들여다 본다. 그는 “고종은 조선 말기의 마지막 세도 정권의 수장에 더 가까웠다”며 “그의 치하에서 세도 통치의 전근대적 모순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외세 의존과 같은 근대적 모순들과 중첩됐다”고 말한다. “그가 조선을 단독적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주에는 김도형 연세대 교수가 다섯 번째 논자로 등장해 또다른 견해를 밝힌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인간들이 그들의 역사를 창조하지만 원하는 대로 창조하지는 못한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조건 하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이미 존재해 온 조건 하에서 역사를 만든다.” 마르크스의 이 지적대로 역사에서 지도자 개인의 구실이 결정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미미하지도 않다. 지도자 한 명이 역사의 대세를 돌이킬 수야 없지만, 그가 이끄는 집단이 역사 대세를 수용하는 방법은 그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고종이 혼자 힘으로 조선을 망칠 수도 살릴 수도 없었겠지만, 그의 일련의 전략적 선택들은 조선 독립 보존과 근대적 전환에 디딤돌보다 차라리 걸림돌이 됐다.




구한말 위기의 세계사적 본질은 중국 중심 동아시아적 국제 질서의 약화와 몰락이었다. 일본이 이 위기를 기회 삼아 제국주의 국가로 재탄생한 것과 달리 조선이 제국 일본의 피해자가 된 데 대해 얼마든지 한탄할 수 있지만, 그 당시로서 일본과 조선의 위치가 맞바뀌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조선과 비교될 것 없이 일본은 중국 중심의 대륙적 질서와 매우 느슨한 관계에 있었으면서 네덜란드 등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교류 폭은 넓었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를 위시한 근대 일본의 1세대 계몽주의자들이 이미 에도 시대 말기에 국내에서 네덜란드어를 익혀 ‘신세계’에 대한 기초지식을 쌓을 수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이와 같은 일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거기에다가 일본의 개항이 조선에 비해 20여년 더 빨랐던 것은 ‘시간과의 경쟁’이라는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치명적이었다.

일본의 강요로 조선이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을 맺었을 때 그 체결의 배경은 3만2777명의 장병과 군함 19척의 일본 육해군을 조선으로서 현실적으로 대항해내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힘의 열세였다. 불리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에서는 비록 성인현철이 왕이 되더라도 국운의 융성을 기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오랜 세도정치의 폐단이 극에 달해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경제적 활동을 파탄에 빠뜨렸던 고종의 측근인 민씨 족벌은 온 나라의 증오 대상이었다. ‘민족’(閔族)이라 불렀던 그들의 족벌에 대한 원한이 하도 높았기에 부정부패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았던 대원군마저도 ‘반민’(反閔)의 명분만으로 일부 개화파나 동학 농민 지도자 사이의 상당한 기대를 모을 정도였다. 민심 이반에다 불가항의 외적 위협까지 겹치니 고종의 고민이란 태산 같았을 것이다.

 

민씨 일종 부패로 민심 등돌리고
제국 일본 등 외적위협까지
구한말 최악의 여건 속에서도
고종 ‘나라’ 위한 개혁의지 안보여

 

고종에게 이와 같은 역경을 헤쳐나갈 만한 전략적 선택은 있었을까? 그가 만약 자신의 권력이 아닌 ‘나라’를 구하고 싶었다면 이 나라의 대다수 주민들이 바랐던 사항부터 이행하는 것이 순서였을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요구에서 잘 반영된 민중의 희망은 무명잡세 혁파와 징세 관련 비리 척결 등 조세 제도의 합리화와 관료들의 토색질을 낳는 매관매직의 엄금 등이었다. 거기에다가 해방적인 의미의 근대적 조처-예컨대 노비 해방과 비(非)양반 인재 등용, 근대 교육의 보급-등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적어도 ‘국민 통합’ 효과라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구한말에 ‘나라’를 위한 개혁의 열매를 거둔 일이 언제 있었는가?

갑오경장 때 고질적인 지방관 세금 관련 비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때 징세 업무를 일반 행정과 분리시켜 독립적 기관으로서의 징세서(세무서)를 전국에 설립하여 탁지부로 하여금 총괄케 했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를 폐지하여 지방관이 징세 업무를 보는 옛날 제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게 하여 옛 제도의 폐단들이 다 그대로 남은데다가 국가에서 지세를 계속 올리기만 했다. 1900년에 3분의 2나 인상하고 1902년에 다시 5분의 3을 인상하는 조처들이 농민의 불만을 크게 자아내 민란의 도화선이 됐다. 광업·홍삼 등 알짜 사업의 징세를 황실이 장악한데다 역둔토라는 이름의 26만 두락 이상의 광활한 관유지까지 소득원으로 관리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이 토지를 경작했던 소작 농민들에 대한 착취가 악질화돼 갔다. 종전의 2~3할 정도의 도조율(소작료)이 1900년대 초기에 3~4할로 오른데다 1904년 이후로는 5할로 고착화돼 수많은 작인들의 저항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고종의 재정 정책은 ‘근대화’의 미명 아래 국가의 부담을 백성에게 전가했을 뿐이었다. 이 정책을 집행했던 관료들이 임용을 따내고자 뇌물을 바치고, 임용된 뒤에 무자비한 가렴주구로 본전을 뽑고 이윤을 올리는 일도 고종이 실권을 내놓기 전까지 계속됐다. 고종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던 영국 여성 탐험가 비숍마저도 그 당시 조선 국가의 본질을 한마디로 ‘제도적 약탈’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백성들에게서 빼앗았던 혈세를 고종이 어떻게 썼던가? 진정 교육 보급과 같은 근대화 정책을 위해서 썼다면 몰라도 그렇지도 않았다. 1905년 정부 예산에서는 교육과 위생 관련 예산은 1.05%에 불과했던 반면, 황실비는 7.6%나 됐다. 고종은 말로는 ‘교육 입국’을 외쳤지만, 1906년에 이르러 전국의 57개의 근대식 소학교에 1924명의 아동만 다니고 있었다. 대한제국 정부보다 외국 선교사들이 몇 배나 더 많은 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도일 유학생 파견, 원칙상 신분과 무관한 근대 교육 이수자의 관직 임명 등 혁신 조처들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 수혜자는 대개 양반 출신들이나 소수의 부유한 중인 계층들이었다. 갑오경장 때 노비 제도가 형식적으로 혁파되고 그 뒤에 인신매매를 엄금하는 법률이 제정되긴 했지만 향촌사회에서 그대로 실존했던 노비 소유 관계의 해체를 위해 국가가 이렇다 할 노력을 한 적이 없었다. 고종 시대의 국가가 유일하게 진정한 관심을 보였던 분야는, 민란 진압용으로 군대와 경찰 기구를 키우는 것이었다. 1900년대 초반의 국가예산에서 군사·경찰 비용은 보통 40% 정도 또는 그 이상을 차지했다.

 

백성들에게서 수탈한 세금으로
근대교육 보급·신분제 혁파 대신
‘민란 진압용’ 군 강화에만 골몰
조선 몰락에 대한 중대책임 물어야

 

민심을 무시하고 수탈의 강화에 혈안이 된 고종 시대 국가의 생존 방식은 외세 사이의 ‘줄타기’였다. 물론 여러 열강들이 조선을 둘러싼 대립을 벌였던 상황에서는 이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는 그 나름의 효과가 따랐다. 예컨대 아관파천과 그 뒤 8년 동안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의 노련한 외교로 고종 정권은 사실상 일본에 의한 식민화를 당분간 미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벌게 된 시간은 결국 허비되고 말았다. 교육 진흥이나 근대적 공업의 진흥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무기 공장 하나 세우지도 못해 총탄 공급까지도 일본에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대한제국호가 곧 침몰했다. 고종이 10여 차례에 걸쳐 밀사를 파견하여 열강에 호소도 다 해보고 의병장들에게 밀지를 주어 의병을 일으키는 일도 은밀히 지원했지만 근대적 경제나 교육체계,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다 허사였다. 조선이 처한 최악의 상황에서는 돌파구 찾기란 지난한 과제였겠지만, 고종은 그 해결에 거의 제대로 노력하지도 않았다.


 
»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고종을 ‘계몽군주’라고 높여 일컫는 사학자들도 있지만, 그는 사실 차라리 조선 말기의 마지막 세도 정권의 수장에 더 가까웠다. 그의 치하에서 세도 통치의 전근대적 모순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외세 의존과 같은 근대적 모순들과 중첩됐다. 그가 조선을 단독적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 고대사와 고대 중세 불교사를 연구하다가 요즘에는 19세기 말 이후의 한국 민족주의 형성사, 한국 사회진화론 사상사 연구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5세기 말부터 562년까지 가야의 여러 초기 국가의 역사〉(러시아어판·1998), 〈당신들의 대한민국〉(2001), <나를 배반한 역사>(2003), 〈우승열패의 신화〉(2005), <박노자의 만감일기>(2008) 등이 있습니다.

 

자신의’ 나라 위한 ‘보수적’ 개혁 실패로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행하고 하늘에 제를 지낸 환구단(왼쪽)과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한 옥호루.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⑤ 황권 강화·근대화 동시에

 

‘고종은 개혁군주였다’는 주장과 ‘고종을 개혁군주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지난 4주 동안 팽팽한 대치 전선을 이루었다. 첫 논자였던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을 가장 선명하게 강조했다. 반면에 두 번째 논자로 나선 하원호 동국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보다는 한계에 더 주목했다. 세 번째 논자였던 강상규 박사는 고종의 개혁 개방 의지가 초기부터 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의지가 정책으로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많은 장벽이 있었음도 아울러 강조했다. 네 번째 논자 박노자 교수는 하원호 교수와 유사한 입장에서 고종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는 “고종이 조선을 단독적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고 밝혔다.

다섯 번째 논자로 나선 김도형 연세대 교수도 고종에 대한 비판적 견해에 가까운 입장을 밝힌다. “고종의 개혁은 ‘민국’(民國) 이념을 천명하면서도 민권 신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민권 신장과 군주권 제한을 지향하던 독립협회 운동을 탄압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정치는 보수적이었다”는 것이 김 교수의 평가다. 김 교수는 또 “고종의 개혁은 황제권하에 국내 세력을 결집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고,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속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며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마지막 논쟁이 될 다음주에는 강상규 박사가 고종을 둘러싼 엇갈린 평가에 대한 견해를 다시 밝힐 예정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고종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학계는 물론 일반 사회에서도 오래된 논쟁거리다. ‘명성황후’ 뮤지컬이나, 대원군과 명성왕후를 소재로 하는 텔레비전 드라마, 또는 <한반도> 같은 영화가 인기를 얻으면 항상 등장하는 문제였다. 여기에 최근의 <대안교과서>처럼 김옥균 등의 개화파를 부각시키게 되면 더없이 복잡한 논쟁이 된다. 이 논쟁은 결국 한국 근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이 강화되는 가운데 근대화 개혁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최근 고종이 독일 정부에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린 문서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고종은 을사조약 체결 직후부터 그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고, 헤이그 밀사 사건(1907. 6) 이전에 이미 이런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이나 일부 학자가 언급하듯이, 이것을 고종의 능력과 개혁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을사조약이 체결될 당시, 고종의 태도는 애매하였다. 군대를 동원한 일본의 위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종은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시원임대신의 의견을 들어야 하므로 자의로 결정할 수 없다”고 하였고, 정작 이 문제를 다루는 어전회의에는 병을 이유로 참석하지도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참석을 강요하자 고종은 “상의할 일이 있으면 대신들과 협의하라”고 하여,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였다. 강압적 분위기에서 고종의 간접적 반대 의사를 인정하더라도, 고종은 ‘대한국국제’에 명시된 황제의 대외적 권한을 포기한 것이었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에 임하는 군주의 태도로 보기에는 너무나 나약하였다. 조약이 강제적으로 체결된 뒤에도 고종이 가만히 있었다면 그는 정말 무능한 군주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조약을 인정하지 않는 외교 활동을 하고 밀지를 보내 의병을 독려했다고 그의 유능과 개혁성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행위는 ‘종묘와 사직’을 책임지고 있던 군주로서는 최소한 해야 할 일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모호한 태도 일관
일 위협 고려해도 분명한 책임 방기
밀서 등 뒤늦은 ‘무효화’ 시도
능력·개혁성의 증거라 볼 수 없어

 

고종의 개혁성을 강조하면서 흔히 대한제국 이전으로 소급하는 경우도 있다. 친정(親政) 이후, 더러 고종의 정치적 의사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정치를 주도하던 민씨 세력에 비해 특별하게 개혁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양의 기술 문명을 수용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당시의 집권세력과 동일하였다. 모든 정책이 고종의 재가를 받은 것이긴 하지만, 고종의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의사에 따라 정책이 수행된 것은 아니었다. 고종의 정치적 역할은 아관파천 이후, 더 정확하게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민씨 세력이 상대적으로 정권에서 약해진 이후였다. 고종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때, 대한제국기였다. 고종의 개혁성 여부는 결국 대한제국의 개혁사업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대한제국에서는 당시의 사회문제, 곧 농민층의 항쟁을 해결하면서 민족적 역량을 결집하고,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외세의 침략을 막아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고종의 정치는 이런 점에서 시작되었다. 고종은 가장 먼저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고, 황실을 높이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궁내부를 중심으로 근대적인 개혁을 광범하게 추진하였다. 서양의 문명을 ‘구본신참’의 원칙 아래 수용하여, 서울의 근대적 도시로의 정비, 전기의 보급, 철도 부설, 근대적 교육의 확산 등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런 점만 본다면 고종은 매우 개혁적인 군주였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은 개항 이후 정부 차원에서 전개하던 근대화 사업을 마무리한 것이었다. 왕권을 약화시킨 몇몇의 조처를 빼고는 나머지 많은 부분은 그 직전에 실시했던 갑오개혁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개혁의 원칙과 내용은 철저하게 지배층, 지주층의 입장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광무개혁에서 국가재정 확충을 위해 가장 힘을 들였던 양전지계사업도 그런 원칙에서 추진하였다. 따라서 농민층의 요구는 외면하였다. 고종의 개혁사업을 이끌던 내장원의 운영도 이런 점을 잘 보여 주었다. 내장원에서는 방대한 토지를 다시 조사하여 관리하면서 지주 경영을 강화하였다. 농민층에 대한 소작료를 올리고, 소유권이 모호한 경우에는 소유권도 빼앗았다. 이에 불만을 가진 농민층의 항쟁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심지어 내장원 중심의 정치는 국가재정의 부실화를 수반하였다. 홍삼, 어장 등 각종 전매권을 독점하면서 왕실 재정을 확충하였지만, 정작 정부의 재정은 부족하게 되어, 탁지부가 내장원에 조세 수취권을 넘겨주고 돈을 차용하는 일도 일어났다. 궁내부를 중심으로 행한 고종의 개혁은 정부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농민층을 수탈하면서 행해진 것이었다.

 

황실·지배층 위한 ‘보수정치’ 틀에서
근대문물 수용 등 ‘개방외교’ 펼쳐
농민층 외면으로 국내 세력결집 실패
격변의 국제정세 속 나라도 못지켜

 

 

19세기 말은 격변의 시기였다. 고종은 이런 격변 속에서 국권을 유지하고, 동시에 근대화를 추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고종이 개혁 군주였는지 여부는 단편적인 몇 가지 사례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국가적, 사회적 과제를 고종이 어떤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했는지를 따져야 할 것이다. 고종은 대한제국기에 전제적인 황권을 바탕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근대적 문물을 수용하여 자주적 국가를 만들려고 하였다.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했던 점은 문호를 개방할 당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으로, 이 점은 전통적, 유교적 조선 왕조에 비해서 개혁적이었다. 고종을 ‘계몽군주’로 평가해도 좋을 대목이다. 그러나 고종의 개혁은 농민층의 동력을 결집하지 못하였고, 또 ‘민국’(民國) 이념을 천명하면서도 민권 신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민권 신장과 군주권 제한을 지향하던 독립협회 운동을 탄압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정치는 보수적이었다.


 
» 김도형 연세대 교수·국사학 교수
 
고종의 정치는 유교적 변통론에 따라 폐단을 고치되 이를 통해 체제의 안정을 꾀한 전통적인 조선 왕조의 대책과 노선이 다르지 않았다. 곧 ‘보수적 개혁’, 바로 그것이었다. 고종이 보수적 차원에서 개혁을 전개한 것은 ‘종사’(宗社)로 대표되는 자신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종의 개혁은 황제권 아래 국내 세력을 결집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고,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속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종이 추진하던 다양한 개혁은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새로운 근대사회로 변용되어 갔다. 김도형/연세대 교수·국사학

 


김도형 교수는 1953년생이며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는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이기도 합니다. 한국 근대사상사와 민족운동사가 관심 연구 분야입니다. 저서로 <대한제국기의 정치사상 연구>(1994)가 있습니다.

 

 

개화의 주인’이고자 했던 ‘망국의 군주’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 나라의 자주권을 추구하기 위해 고종이 미국에 파견한 사절. 이상재(앞줄 왼쪽), 박정양(가운데) 등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⑥ 강상규씨의 재반론

 

고종은 개혁군주였나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지난 5주 동안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찬성쪽 입장에선 이태진 서울대 교수가 가장 명확한 목소리로 고종의 개혁성을 강조했다. 이어 강상규 박사가 고종의 개혁 의지를 긍정하면서도 그 개혁이 좌초할 수밖에 없었던 국내외적 상황에 주목했다. 이에 대해 하원호 동국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 한계가 더 크다는 점을 강조했고, 박노자 교수도 “고종이 조선을 단독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다섯 번째 논자로 나선 김도형 연세대 교수도 고종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김 교수는 “고종의 개혁은 ‘민국(民國)’ 이념을 천명하면서도 민권 신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황제권하에 국내 세력을 결집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낮게 평가했다.

이렇게 평가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마지막 여섯 번째 논자로 고종의 개혁성을 긍정하는 쪽에 선 강상규 박사가 다시 등판해 견해를 밝혔다. 강 박사는 앞선 논자들의 고종 비판이 구조적·역사적 요인들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단선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그는 고종의 개혁군주 여부 논의는 성급하게 결론지어져선 안 되며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차원의 검토가 동반돼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다음주부터는 세계 철학계의 이단아 슬라보예 지젝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논쟁이 벌어진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민심이 흉흉하다. 현 정부는 과연 ‘세계화’ 시대의 산적한 현안들을 대화와 타협, 그리고 온 국민이 동의할 만한 비전의 제시를 통해 지혜롭게 잘 풀어갈 수 있을 것인가. 19세기 한반도 역시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21세기 우리가 목도하는 상황보다 훨씬 더 풀기 힘든 난제였다. 현재 한반도가 직면한 문제는 적어도 우리가 속한 문명세계 ‘내부’의 성격 변화에서 빚어지는 문제인 반면, 19세기의 당면 과제는 ‘외부’의 이질적인 세계로부터의 충격에 기인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충격과 혼돈의 정도는 더욱 광범위하고 뿌리 깊은 것이었다.

당대의 일본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19세기를 ‘마치 뜨거운 불과 차디찬 물이 만나는 것과 같고’, ‘한몸으로 두 인생을 겪는 것과 같은’ 충격적인 시대라고 진단했다. 근대화의 세례를 받은 우리들이 고종이 살았던 시기에 심층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는 전통적인 우리 고유의 패러다임(뜨거운 불)과 새로운 서양의 패러다임(차디찬 물)이 격렬하게 부딪쳤던 구체적인 역사적 현장이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이처럼 고종 시대에 대한 입체적인 접근이 어려운 만큼 고종에 대한 평가는 매우 손쉬운 것일 수 있었다. 그가 다름 아닌 망국의 군주라는 사실은 바로 그의 정치적 무능을 입증하는 명백한 자료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정치가 고종에 대한 평가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책임’론은 현실정치가가 짊어져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앞서 다른 논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고종에 대한 비판은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틀림없는 비판이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몇 가지 이유만 들어보자. 우선 정치가 고종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할 고종에게 주어진 정치적 선택의 폭이 사실상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 동화 속의 영웅이나 바보가 아닌 현실 정치가로서 고종을 고찰하려면, 그가 어떠한 현실 정치적인 제약 위에서 해법을 고민하고 방법을 찾으려고 했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들어가야 한다.

 

조선정치의 특징과 상황 고려 없이
고종에 대한 비판은 옳지 않아
지배층-피지배층·개화파-수구파 등
이분법적 사고로는 본질 접근 어려워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500여년의 강고한 전통을 지닌 조선정치에 대한 구조적·역사적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채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조선의 왕권, 군신관계, 정국운영방식은 물론, 19세기의 위정자들과 지식인의 사유방식의 특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전환기 한반도의 정치상황에 대한 논의는 피상적인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조선 전통과의 단절된 해석은 필연적으로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몰이해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군신간의 ‘상호의존적 긴장관계’와 공론(公論)에 의거한 역동적인 정치운영은 조선왕조 특유의 ‘견제와 균형’을 만들어 냄으로써 500년을 지속하게 한 힘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긍정적인 힘이 19세기 후반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환의 시대에 오히려 변화를 어렵게 하는 걸림돌로 작동하게 되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어야 이 시대 정치사가 비로소 온전히 눈에 들어올 수 있다. 왜냐하면 삶에 대한 이해 없이 죽음에 대한 성찰이 불가능한 것처럼, 조선의 생명력에 대한 이해가 없는, 조선의 사망에 관한 설명이란 공허한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19세기를 둘러싼 논의가 지배세력 대 피지배 민중의 각축, 혹은 개화세력 대 수구세력의 갈등이라는 축 위에서 지나치게 단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의 방식은 지배세력 내부의 다양한 차이가 간과되고 소위 지배세력을 싸잡아서 비판하는 방식에 머무를 소지가 크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결정론적이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방식 역시 거대하게 동요하고 있던 시대를 살았던 위정자, 지식인들의 정치적 고뇌와 선택의 의미를 개화 혹은 수구라는 어느 한쪽에 끼워 맞춤으로써 당시 조선의 정치지형에 대한 도식화된 논의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19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사고의 경직성을 탓하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 이분법이고 도식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지난번 글(4월25일치)을 통해, 고종이 여러 현실적인 제약이 있음에도 1880년대 들어 일련의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주국가를 세우려고 서구열강과 외교관계를 맺어 나가게 된 경위들을 짚었다. 아울러 조선의 개방 개혁정책의 추진이 여러 차례 반대에 부딪혔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간절히 개혁을 원하던 개화세력의 정변으로 사실상 조선은 자기 손에 의한 개혁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이 시기에 이루어진 개혁정책의 속도와 범위, 방법과 아울러 개혁의 주도세력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민씨 세력’ 혹은 ‘개화세력’에 의해 이루어진 어정쩡한 개혁이라고 적당히 얼버무리고 만다면 조선 개화사의 전모를 밝히는 것은 당분간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19세기 말 한반도는 엇박자의 연속
군신간 공론 따르던 정치운영마저
개화 발목잡고 외세 위협 불러
고종의 선택 균형적 성찰 필요

 

미국 외교관의 통역관으로서 조선 왕실의 근황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문명개화의 꿈을 키워가던 청년 윤치호는 갑신정변 전후의 정황을 자신의 일기(음력 1884년 12월30일자)에 남기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조정에는 나라를 지탱할 만한 신하가 없고 백성에게는 떨쳐 일어서려는 기상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밝은 지혜를 가진 군주가 여러 나라의 문명과 기술을 살피려 노력함으로써 여러 방면에서 바라는 바를 조금씩 이루게 되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김옥균 등의 과격한 행위는 나라를 위태롭게 했고 청국의 억압은 과거의 배가 되었다. 개화를 일컫는 자는 나라의 적으로 간주되며 개화에 관한 논의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간신배들이 밖으로 청의 세력을 끼고 군주를 위협하며 나라 일을 그르치고 있으니 실로 통탄스럽다.”

이 시대 정치사는 끊임없는 엇박자의 연속이었다. 소통에 입각한 절충과 조정의 시도는 내부의 불협화음으로 말미암아 곧바로 외세의 압력으로 이어졌고 우리의 선택 폭은 더욱 좁아져 갔다. 한반도의 정치가 국제관계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종을 둘러싼 19세기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전환기적 상황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예측했다고 하더라도 현실정치 공간에서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내고 국내외의 광범위한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였음을 절감할 수 있다. 따라서 고종을 비롯한 당대의 정치가가 개화를 지향했는지의 여부를 따지는 것보다, 성숙한 ‘개화의 주인’이 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경주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더욱 의미 있을 것이다.


 
» 강상규씨
 
고종의 개혁군주 여부 논의는 성급하게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종의 정치적 선택과 실패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비극적인 엇박자에 대한 역사적 함의가 균형 있게 성찰될 수 있어야 한다. 19세기 조선정치사가 다루는 내용들은 우리의 의식과 현재의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인 동시에 앞으로 우리의 미래로 남아 있을 의미 있는 사건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강상규/도쿄대 박사·정치학

 


강상규씨는 1965년생이며,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도쿄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은 <조선의 유교적 정치지형과 문명사적 전환기의 위기>(2005)이며, 저서로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2007),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2008)가 있습니다. 주요 관심 분야는 근대 동아시아 정치외교사와 사상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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