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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학의 종언은 맞는가

 

이젠 ‘그들만의 문학’…근대문학은 끝났다
근대문학의 종언은 맞는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이젠 ‘그들만의 문학’…근대문학은 끝났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1. 왜 맞는가
이번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근대문학’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한다. 일본의 비평가이자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1941~)은 2005년 출간된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 b)에서 근대문학 곧 소설이 네이션(국민국가)의 기반이 되었다고 했다. 이전까지 감성적 오락을 위한 단순한 읽을거리였던 소설은 18세기, “감성에 대한 학문인 미학이 등장하면서 지위상승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감성과 감정이 지적·도덕적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으면서 상상력의 중요성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이는 상상력에 기반한 문학이 공감의 공동체 곧 ‘상상의 공동체’인 네이션(국민국가)의 토대가 되었다는 분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가라타니는 영화와 텔레비전·비디오 등 시각매체의 등장으로 근대소설의 특징인 ‘리얼리즘’의 가치가 제거되면서 근대문학의 특별한 의미가 이젠 끝났다고 선언한다.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상징으로 그는 1990년대 자신이 만났던 한국의 문예비평가들이 모두 문학에서 손을 떼었음을 상기시켰다. 가라타니의 이런 해석에 우리 문단 안팎에서 다양한 견해가 쏟아지고 있다. 이번 주 가라타니의 견해를 적극 받아들이는 조영일씨 글에 이어 최원식 인하대 교수가 비판적 견해를, 권성우 숙명여대 교수가 제3의 시각을 보여준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들은 대부분 ‘해결에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부함에의 저항’에 의해 해소된다. 아무리 절실한 문제제기라 할지라도, 정작 그것을 낳은 현실 쪽에서 보면 왠지 조급하고 점잖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위기감’이란 항상 현실을 앞서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은 괜찮다”라는 현실감각은 종종 본질적인 것으로까지 격상되곤 한다. 현실원리란 이처럼 위기의식을 ‘진부한 것’으로 배제하고, 자기보존적인 상식들을 ‘새로운 것’으로 삼아 자가발전하는 현상 유지 시스템을 의미한다.

사실 이는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에도 해당된다. 너무나 많이 인구에 회자된 나머지, 이제 ‘종언’이라는 말만 나와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이가 대다수다. 그러나 그런 ‘질림(물림)’이 그저 ‘진부함에의 저항’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리어 그 테제가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해, 현실원리에 기대어 ‘손님’을 쫓아내는 푸닥거리를 한다고 해서 냉수가 생명수로 바뀔 리는 만무하다는 말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을 비판하기 위해 나선 무당들은 대략 세 부류이다. 1) ‘근대문학’이 쇠퇴하고 있다는 일반론에는 찬성하지만, 그렇다고 ‘문학’이 가진 본래적인 의미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근대문학 이후의 문학’에서 가능성을 찾자는 이들, 2) 한국문학은 제대로 된 근대문학조차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종언’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이들, 3) ‘근대문학의 종언’은 남의 집 이야기이며 한국문학은 오히려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가라타니의 테제가 어떤 새로운 ‘주장’이라기보다는, 자명한 것 뒤에 숨겨져 있는 역사성을 환기시키는 ‘물음’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것은 받아들이거나 거부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로지 논리적·실증적 찬반을 통해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이는 그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또는 지나친 무관심)과 한 쌍을 이루고 있다. 모든 문제(질문)의 진실성은 그 문제 자체보다는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과민(잉여)’반응을 통해 나타난다고 할 때, ‘근대문학의 종언’이 강 건너 불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가라타니는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근대문학 이후에 포스트모던문학이 있다는 말도 아니고, 문학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말도 아니라고 전제한 후, 다만 문학(소설)이 근대에 들어서 부여받은 ‘특별한 중요성과 가치’가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곧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근대문학에 부여된 이와 같은 ‘중요성(가치)’이지 ‘종말론’이나 ‘묵시론’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애써 이를 ‘묵시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믿음(선택)’의 문제로 호도하는 것에 불과하다.

 

상상력 통해 ‘공감 공동체’ 형성한
근대문학의 역할·중요성 사라져
문단-출판계-대학-신문들
문학시스템 붕괴될라 ‘위기’ 눈감아

 

 

그럼 문학에 부여된 ‘중요성(가치)’이란 무엇일까? 가라타니는 그것을 ‘미학(감성론)’의 등장이나 ‘근대국가’의 성립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곧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어온 감정이 지적·도덕적 능력(이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그것들을 연결시키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라는 사고가 생겨나는데(이전까지 ‘상상력’은 ‘공상’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만 갖고 있었다), 그러자 ‘공상적인 것=오락적인 것’으로만 취급받던 소설이 ‘공감’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하나로 만들어 ‘네이션’(국민)을 형성케 하는 매체로서 격상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런 중요성이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가라타니의 지적처럼 이상한(특수한) 쪽은 오히려 근대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반적인 것이 저발전의 증거로서 거부되고, 특수한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옹호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도착이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문단-출판계-대학-신문’이라는 문학시스템이 그와 같은 관념을 꾸준히 생산·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문학이 그와 같은 특별한 중요성을 상실했다는 것은 그에 기반을 두고 있는 문학시스템 역시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그 시스템에 의지하여 사는 이들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정이 이렇게 절박한데도 한 원로작가는 일본문학은 끝났을지 모르지만 한국문학은 그렇지 않다며 도리어 ‘태평천하’(또는 부흥기)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한국출판계는 일본문학의 공습으로 초토화되고 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현해탄을 건너온 유령들(이미 ‘종언’을 맞이한 문학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형국이다. 따라서 굿이라도 한판 벌여 ‘문학쿼터제’ 정도는 얻어내야 하는지도 모른다(이제 창작지원금 정도로는 약발이 서질 않는다). 그러나 그 전에 ‘손님’들이 ‘주인’인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그럼 그 차이라는 게 양국의 문학인을 호명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창과 출신으로 넘쳐나는 한국문단
작가적 경험보다 제도적 문학성에 획일화
가라타니 ‘종언’ 증거와도 맞아떨어져
“오히려 중흥기” 주장은 안일한 태도

 

한국 소설가로는 박민규, 정이현, 천운영, 편혜영, 전성태, 하성란, 조경란, 강영숙, 윤성희, 이기호, 백가흠, 김종광, 백민석, 이신조, 김애란 등을 들 수 있겠고, 일본소설가로는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가네시로 가즈키, 오쿠다 히데오, 에쿠니 가오리, 미야베 미유키, 와타야 리사, 유미리, 가네하라 히토미, 야마다 에이미, 이시다 이라, 쓰지 히토나리, 다구치 란디, 교고쿠 나쓰히코, 히라노 게이치로, 기리노 나쓰오, 온다 리쿠 등을 입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 그룹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한국 쪽 구성원이 모두 문예창작과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반해, 일본 쪽은 단 한 명의 문예창작과 출신도 없다는 것이다. 실로 기묘한 결과다. 왜냐하면 가라타니가 ‘종언’의 증거로 든 예가 바로 일본에서 증가하고 있는 ‘문예창작과’이기 때문이다. 이제 문학이 작가적 경험이나 통찰이 아닌 창작코스에서 생산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가라타니의 우려와 달리 일본에서 문창과 출신이 성공한 케이스는 거의 없다. 문창과는커녕 국문과 출신조차도 매우 적으며, 하나같이 매우 다양한 경험의 소유자들이다. 따라서 가라타니의 지적은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정확히 한국문학을 겨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문학의 이런 특징은 비단 문학(창작)만의 일이 아니다. 비평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해서 거의 대부분이 국문과 출신으로 구성되고 있다. 그럼 이와 같은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늘날의 한국문학이 문학시스템에 맞게 ‘그들만의 문학’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사회·역사적 변화를 통해 다양화되기보다는 제도가 만들어놓은 ‘문학성’에 의해 획일화되어버린 것이다. 확실히 이런 완벽한 공간에서 ‘근대문학의 종언’은 그저 손님(마마)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손님은 오로지 무당의 눈에만 보인다고 할 때, 한국문학은 알게 모르게 이미 무병(巫病)을 앓은 셈이다. 그런 한국문학이 ‘손님’을 발견·추방시킴으로서 자신의 건강함을 증명하고자 하지만, 그때 발견되는 ‘손님’이란 자기 안에 살고 있는 ‘유령’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조영일 / 문학평론가

 



 
» 조영일씨
 

조영일씨는 1973년생으로 지난해 <문예중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첫발을 떼었습니다. 세계문학의 관점에서 한국근대소설의 형성·전개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와 비극> <근대문학의 종언> <세계공화국으로> 등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작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현재 가라타니의 <역사와 반복>을 번역하면서 가라타니에 대한 책을 준비 중입니다.

 

근대문학 종언론은 상상 혹은 소동일 뿐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나
 
 
한겨레 강성만 기자
 
 
» 근대문학 종언론은 상상 혹은 소동일 뿐
 
우리시대 지식 논쟁 /

2. 끝나지 않았다

 

지난 주 문학평론가 조영일씨는 근대문학의 특수한 성격을 부각하면서, 이 시대에 그 특수성이 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풀어 말하자면, 가라타니 고진(일본 비평가, 1941~)은 근대문학은 ‘공감’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하나로 만들어 ‘네이션’(국민국가)을 형성케 하는 매체라고 했는데, 현재 한국사회의 문학은 그런 특별한 중요성이나 가치를 담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조씨는 작가적 경험·통찰이 아니라 ‘문예창작과’라는 창작코스를 통해 문학이 생산되고 있는 점이나 비평의 경우 거의 대부분 국문과 출신으로 구성되고 있는 점 등을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보기로 들었다.

그는 사정이 이럴진대, 우리의 문학시스템은 근대문학의 특수성을 일반적인 것으로 옹호하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시스템 역시 붕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진단도 붙였다.

최원식 인하대 교수는 이런 주장을 ‘신판 해소론’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가라타니가 근대문학종언론을 확정한 ‘한국문학의 종언’은 일종의 상상에 가깝다고 했다. 가라타니는 1990년대 만났던 한국 문예비평가 모두가 문학에서 손을 떼었다고 했으나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씨를 제외하곤 문학을 떠난 비평가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고진이 나아가고 있는 문학 바깥의 실천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근대문학이 정말로 끝났다면 진정한 의미의 저항도 끝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한국 문학계의 논란이 좀체 수그러들지를 않는다. 이 기이한 열(熱)이 과연 우리 몸으로부터 내발한 것인지 의심스런 구석도 없지 않은데, 이처럼 지속될 때는 그저 상상에 의한 헛열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겠다. 상상이 곧잘 현실로 전화하기도 하매, 우선 이 소동의 맥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원래 “2003년 10월, 긴키대학 국제인문과학연구소 부속 오사카 칼리지에서 행한 연속강연의 기록에 기초하고 있다.”(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06, 86쪽) 강연원고를 “전면 수정”하여 이듬해 <와세다문학>(2004년 5월호)에 발표하고, 이를 다시 <근대문학의 종언>(2005)에 수록했던 것이다. 가라타니는 요즘 한국에서 바로바로 소개되곤 하는데 이 글도 ‘근대문학의 종말’이란 제목으로 <문학동네> 2004년 겨울호에 역재(譯載)된 이후, 논란의 덕택인지 책도 2006년에 번역되었다. 다시 확인하건대, 이 글의 모태는 일본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록이다. 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말의 자의성, 더구나 학생 대상 강연이 지니게 마련인 어떤 직정성(直情性)을 염두에 두더라도 일본에서는 잠잠한 근대문학종언론이 왜 한국에서는 이처럼 ‘소문난 잔치판’이 되었는지 난감한 바 없지 않다.

곳곳에 빛나는 통찰들이 박혀 있긴 하지만 이 글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진지한 독서를 요구하는 일류의 평론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진지한 학구 뒤, 그 휴식의 시간에 놀리는 경쾌한 두뇌회전에 가까운 탓인지, 강연의 어조도 시종일관 반어적이다. 이는 통념에 물든 학생들의 의식에 충격을 가해 그 사유를 자유로이 풀어놓으려는 가라타니식 수사학의 발로일 터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과 달리
문학 떠난 한국 문예비평가들 없어
잘못된 풍문만이 사실로 부풀려진 것
징후는 있지만 ‘종언’ 단정은 일러

 

우선 그의 주장을 한번 따라가 보자. “소설 또는 소설가가 중요했던 시대”로 대변되는 “근대문학이 끝났다는 것”(44쪽), 다시 말하면 혁명정치의 보수화에 대항하여 “영구혁명을 담당했”(45쪽)던 근대문학이 이제 종언을 고했다는 것이 이 글의 골자다. 더 쉽게 풀면, “네이션 형성의 기반”(62쪽)인 동시에 ‘네이션 이후’를 치열하게 모색한 근대문학이 조건의 변화 속에서 그 도덕적 과제로부터 해방되어 이제 “그저 오락이 되”(53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 징후를 1960년대의 프랑스, ‘에크리튀르’(글쓰기)의 대두에서 읽어낸다. “그들은 사르트르처럼 소설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도리어 그것을 부정하고 그 대신에 사르트르가 ‘문학’으로 서술했던 것을 에크리튀르라는 개념으로 바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46쪽) 재미있는 지적이다. “대중문화가 좀 더 빨리 발전”(47쪽)한 미국에서는 1950년대부터 이 현상이 진행되었는데, “작가가 대학의 창작 코스에서 나오”(47쪽)는 것이 중요한 징표라는 주장이다. 드디어 그 바이러스는 일본에 도착한다. 그리하여 하루키의 횡행 속에 일본 “근대문학은 1980년대에 끝났다”(46쪽)고 선고한다.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문학의 위의(威儀·위엄있는 모양)가 현저하게 쇠퇴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상에서 펼친 그의 파악이 크게 새삼스런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런데 한국으로 이동하면서 종언론은 감전(感電)된다. “그러나 내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정말 실감한 것은 한국에서 문학이 급격히 영향력을 잃어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48쪽) 이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는 1990년대에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문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일본 문학은 죽었어도 한국 문학은 살아 있다’고 한국문학에 대한 신뢰를 표명한 바 있는데, “1990년대 말경부터 문학의 쇠퇴가 급속하게 전개되었다”(49쪽)는 소식에 놀라움을 표시한다. 그 중요한 제보자가 김종철(영남대 교수·<녹생평론> 발행인)이다. 문학을 떠나 생태운동에 투신한 그에게 그 이유를 묻자,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49쪽)려서 그만두었다는 대답에 가라타니는 “동감을 표시”한다. 김종철이 전해준 이 소식은 다른 소문으로 확정된다. “그 후에 알게 된 사실은, 내가 1990년대에 만났던 한국의 문예비평가 모두가 문학에서 손을 떼었다는 것입니다.”(49쪽) “나는 한국에서 그와 같은 사태가 이렇게 빨리 진전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문학의 종언은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50쪽)

 

대학 강연록으로 출발한 종언론
일본선 잠잠한데 한국선 들썩들썩
민족문학 해체 부추기는
이름만 바꾼 ‘신판 프로문학 해소론’

 

근대문학종언론을 확정한 ‘한국문학의 종언’이 풍문에서 부풀려진 일종의 상상에 가깝다는 점이야말로 놀랍다. 우선 그가 교유한 한국의 평론가 모두가 문학에서 손을 떼었다는 지적은 아무리 수사학이라도 왜곡에 가깝다. 아마 그중에는 동아시아론에 참석해 온 나도 포함된 듯싶은데, 비평활동을 게을리한 것을 탓하면 할말이 없지만 내 자신 문학에서 아주 손을 뗀 적은 없다. 이는 내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터인데, 내가 알기론 김종철을 제외하고 문학을 떠난 비평가는 없다. 가라타니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나라 문학사정에 대해서 그것도 그저 소문에 의지해서 어떻게 이처럼 단정할 수 있을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닌가? 문학의 현장, 일본을 이탈한 가라타니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위해 한국을 동원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고 그가 이런 대세에 대한 투항을 고무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문학이 끝났다고 해도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자본주의와 국가의 운동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한복판에서 대항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점에 관해 나는 더는 문학에 아무것도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다.”(86쪽) 문학에 대한 자본의 포섭이 날로 강화되는 현실에서 문학 바깥에서 저항을 조직할 수밖에 없는 그의 곤경을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근대문학이 정말로 끝났다면 진정한 의미의 저항도 끝났기 때문이다. 근대문학 종언 이후의 저항, 그것도 텍스트 바깥의 저항이란 비관주의자의 자기위안으로 떨어지기 십상이 아닐까? 한국으로부터 전해진 풍문을 통해 완성된 신판 해소론이 다시 한국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기이한 형국이 가엾다. 요컨대 종언론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그 후신 민족문학작가회의, 그리고 창비가 주도한 한국의 민족문학운동 또는 민중문학운동의 해체를 촉진하는 나팔로 활용되고 있으니, 종언론을 둘러싼 저간의 소동이란 가라타니를 빙자한 신판 해소론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요즘 한국문학이 종언론을 싱싱하게 배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확실히 한국 문학은 종언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다른 세상을 꿈꾸고 그곳으로 가는 통로를 진지하게 모색하는 ‘근대문학’으로부터 ‘가비얍게’ 이탈하는 경향이 처처에 출몰한다.

일본의 변혁 가능성에 대한 절망 또는 체념에 기초한 그의 근대문학종언론이란 의상을 갈아입고 다시 나타난 프로문학해소론이다.

이 사태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이탈을 축복하면

 
» 최원식 교수
 
서 또는 저주하면서 문학의 집에서 가출하는 것이 능사인가? 그 쇠퇴의 원인을 궁구하고 극복을 위해 함께 토의하는 것이 현대라는 노예선에 동승한 문학인의 자세일 것이다. 더구나 세계사적 모순의 결절점인 한반도 분단체제의 변경이 목하 진행되는 이 역사적 고비에서임에랴.

최원식 인하대 교수 겸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최원식 교수는 1949년생으로 한국 근·현대 소설사 연구를 주로 해왔습니다. 현재는 동아시아 맥락속의 한국학 연구 방법론에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대표 저서로 <문학의 귀환>(2001) <한국 계몽주의 문학사론>(2002)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1997) 등이 있습니다.

 

종언 ‘위기’를 근대문학의 ‘기회’로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나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종언 ‘위기’를 근대문학의 ‘기회’로
 
우리시대 지식논쟁 /

 

3. 찬반 구도 벗어나야

 

지난 두 주 문학평론가 조영일씨와 최원식 인하대 교수는 가라타니 고진이 제기한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가라타니는 근대문학은 ‘공감’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하나로 묶어내면서 ‘네이션’(국민국가)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날 문학은 시각매체의 등장으로 ‘리얼리즘’의 가치가 제거되면서 그 특별한 의미가 끝났다는 게 그의 견해다. 특히 한국의 문예비평가들이 줄줄이 문학판을 떠나고 있다는 그의 진단은 ‘종언론’의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조씨는 한국의 작가나 비평가들이 ‘문예창작과’나 ‘국문과’라는 정형화된 코스를 통해 배출되고 있는 점 등을 지적하며 이 땅에서 문학이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 시기는 끝났다고 했다. 반면, 최 교수는 종언론을 일종의 상상에 가깝다고 반박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문예비평가들이 문학계를 떠나지도 않았고, 근대문학이 정말로 끝났다면 진정한 의미의 저항도 끝났다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권성우 교수는 가라타니 주장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는 점을 전제한 뒤, ‘종언론’은 “체제와 시스템을 뒤흔드는 비판적 문학의 근본적 위기쯤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했다. 덧붙여, 가라타니의 명제는 시대와 시스템에 대해 근원적으로 성찰하는 본격 문학이 산출되지 않고 있는 우리 문학 현실을 냉철하게 되돌아보는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다음 논쟁 주제는 ‘진보적 민족주의는 여전히 유효한가’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대개의 논쟁이 그러하듯이,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논의 역시 단순한 찬반의 구도로만 접근할 수 없는 복합적인 문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늘 각자의 문학적·정치적 입장에 연루되고 주관적으로 투사된 ‘근대문학의 종언’ 담론을 접할 뿐이다. 이 글이 찬반 구도를 탈피하여, 그렇다면 우리 문학과 비평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집중하고자 하는 바가 여기에 있다. 우선, 가라타니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문학적·역사적 맥락이 무엇인가 하는 점과 그것이 우리 문학과는 실제로 어떠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말해보자.

일단 가라타니의 주장에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령, 종언 담론에는 세부적인 면에서 한국문학이나 비평계의 현황에 대한 사실 관계의 오류가 발견되며, 분단과 민족문제 등 이 시대 한국문학이 여전히 마주하고 있는 근대적 과제 및 중대한 독립적 변수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또한 ‘종언’이라는 표현 속에 담긴 수사적 어법이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일부에서 마치 한국문학 전반이 끝났다는 식으로 극단화되어 수용되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이리라. 가라타니가 주장한 정확한 문맥과 전후맥락이 거세된 채, 죽음, 종언 등의 자극적인 표현 위주로 수용되고 있는 논의는 우리 문학의 가능성과 전망에 대한 과도한 회의주의를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존재한다. 또한 ‘근대문학의 종언’ 명제와 그 논의에 대한 문단 일부의 신경질적 반응은 오히려 우리 문학의 현황에 대한 합리적인 성찰을 방해하고 오도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가라타니의 주장을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제기된 주장이 허술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라타니의 명제는 지금 이 시대 한국문학에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채 적용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근대문학의 종언’은 문학 일반의 종언이 아니라, 체제와 시스템을 뒤흔드는 비판적 문학의 근본적 위기쯤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한 사회와 문화권 내에서 문학이 특별하게 중요한 역할을 행사하던 시대가 마감되었다는 것이 가라타니 주장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주장에는 우리 문학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실상 지금 이 시대 문학에서, 시대정신 그 자체였으며, 비판적 지성의 전위 역할을 했던 지난 연대 문학의 영광과 역할을 기대하기란 난망하다. 문학의 위상과 역할은 끊임없이 변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학의 위기’라는 풍문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 문학은 어느 때보다도 다양하게 양산되고 있으며, 엽기에서 우주적 상상력에 이르는 온갖 현란한 소재가 넘쳐난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에서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과 현실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문제제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이러한 물음들이 가능하겠다.

 

이 시대 범람하는 온갖 소재·장르 문학
거대언론 등 문학시스템에 대한 비판없어
얌전히 활용되거나 소비되고 있을 뿐
작품에 대한 치열한 논쟁·비판도 실종

 

지금 우리 사회를 실제로 움직이고 여론의 프레임을 형성하며, 문학유통과 홍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거대언론의 문제점과 행태에 대해 제대로 형상화한 소설이 단 한 편이라도 존재하는가? 이 시대의 어떤 시나 소설보다도 우리 사회의 현실에 밀도 깊게 대응하면서 ‘타자’와 ‘소수자’에 대한 연대와 공감을 감동적으로 환기시킨 서경식의 탁월한 산문(<시대를 건너는 법> <디아스포라 기행>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 등등)에 대한 본격비평을 본 적이 있는가?

여전히 황석영, 조정래, 김원일, 방현석, 안재성, 정도상, 공선옥, 정지아, 오수연, 전성태 등의 작가들이 분단 문제를 비롯하여 이 시대의 다양한 현실과 대결하면서 분투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글쓰기가 이전처럼 전사회적인 관심사가 되거나, 지배 이데올로기를 교란시키고 시스템을 뒤흔드는 차원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은 객관적이며 구조적인 현실이다. 그들의 진정한 의도와 관계없이, 그들의 문학 역시 문단시스템과 출판자본, 문학기사, 문학소비제도와 문학교육의 현장에서 얌전히 활용되며 소비되고 있을 뿐이다. 바로 이러한 현상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이웃 나라 비평가의 한가한 객담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몇몇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가라타니의 종언 테제를 수동적으로 추인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라는 물음이 던져져야 한다.

거시적인 측면에서 가라타니의 주장이 지닌 유효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러한 관점이 그대로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현실적 추인과 포개질 필요는 없다. 가라타니의 명제는 오히려 이 시대 문단시스템과 문학장에 대한 근원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 문단시스템, 예컨대 문창과와 국문과 일색의 문인 양성제도, 텍스트 해설에만 골몰하는 비평시스템 등이 가라타니가 말한바 근대문학, 곧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해 성찰케 만드는 비판적 문학의 가능성을 인위적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냉엄한 인식이 필요하다. 어느 순간부터 작품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비판은 사라졌으며, 그 어떤 이데올로기나 권력집단의 눈치도 보지 않던, 자유의 상징 그 자체이던 문인들도 거대언론 문화부의 네트워크와 주류 문단시스템 속에서 편하게 안주하고 있다. 문학에 어떤 금기도 없다지만, 지금 이 시대 문단에서 실제로 문학판을 좌지우지하는 거대언론과 주류 문학집단에 대한 비판은 자신의 문학적 미래를 위해 끝끝내 유보해야 할 금기와 다름없다. 그런가 하면, 지난 연대의 민족문학과 비판적 지성(글쓰기)의 성과는 지나치게 안이한 방식으로 매도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시대와 시스템에 대해 근원적으로 성찰하는 본격적인 문학이 산출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가라타니 주장엔 몇가지 한계 있지만
한국문단에도 적용 가능한 설득력 지녀
극단적 수용-신경질적 반응 벗어나
문학 현주소 근본적인 성찰 계기로

 

그렇다면 가라타니의 주장 이전에, 우리 문학이 지닌 근대문학의 가능성과 잠재력, 탄탄한 미학을 동반하면서도 지배 이데올로기를 뒤흔드는 비판적 문학의 위의(威儀)를 지금 이 시대의 문학과 비평이 충분히 현실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을 뼈아프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이 부정적이라면, 가라타니의 주장과 관계없이, 우리는 그러한 문학을 충분히 현실화시키지 못한 지금 이 시대의 문학시스템에 대해 해부하고 탐문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노력이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현실적인 방책이 아닐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는 우리 문학의 실상과 허상을 냉철하게 되돌아보는 계기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문단시스템에 깊게 연루되어 있을수록 가라타니의 주장에 생래적 반감을 보이며, 현존하는 문학제도에 대해 비판적이며 독립적일수록 종언 테제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역설적인 맥락에서 늘 자명성에 대한

 
» 권성우 교수
 
회의를 강조하는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 명제는 실상 우리에게 스스로가 속하거나 편승하고 있는 문단시스템과 거대언론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고 있는가를 되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일본어로 발표된 재일 디아스포라 서경식의 아름다운 번역산문을 본격비평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그들만의 문학제도도 포함해서 말이다. 권성우/숙명여대 교수·문학평론가

 


권성우 교수는 1963년생으로 서울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비평공동체 ‘크리티카’의 동인이며 기행문·산문·평전 등의 기존에 주목하지 않았던 글쓰기에 학문적·비평적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평의 매혹> <비평의 희망> <논쟁과 상처> 등의 저서를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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