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서구-과거와 같고도 다른 ‘한국형 신보수 정권’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지난달 25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 모습. 조희연 교수는 이명박 정부를 ‘신보수’로 규정한 뒤 이 정권이 구현하는 국가는 ‘신자유주의적 경쟁국가’라고 규정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① 변화·불변성 함께 판단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2주가 됐다. 갓 출범한 정부의 성격을 논하는 것은 다소 이를 수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보고서 등을 통해 새 정부의 국정 목표와 정책 기조는 대략적으로 드러난 상태다.

‘10년 만의 보수파 정권’ 탄생으로 학계에서도 새 정부의 구조적 성격을 어떻게 봐야 할지를 두고 논쟁이 활발하다.

주요 논점은 이명박 정부를 ‘신보수 정권’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이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박정희식 개발독재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받아들인다. 반면 박상훈 출판사 후마니타스 주간 등은 본질적으로 구보수와의 차별성이 없다는 점을 들어 ‘신보수’라는 정의에 반대한다. 일부 논자들은 ‘신보수’ 규정이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본질을 흐려놓을 수도 있다는 견해를 보인다. 선명하게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하자는 것이다.

조 교수 글에 이어 고세훈 고려대 교수, 강원택 숭실대 교수, 홍성민 동아대 교수가 견해를 밝힌다. 조 교수는 이번 글에서 새 정부를 ‘신보수’ 정권으로 규정하면서도 구보수 정권과의 동질성이 존재함을 강조했다. 시장자율주의와 개방주의가 차별성이라면 개발과 성장주의는 동질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전(前) 복지국가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했다. 1980년대 유럽과는 달리 ‘신국가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점과 대중의 진보적 요구에 기초하고 있는 점도 ‘한국형’의 특징으로 거론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가끔 농담처럼 나는 ‘세상이 변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사물은 변화·발전한다’는 점에서 볼 때 부질없는 기대임에도 말이다. 왜냐하면 변화에 대면하고 변화를 ‘해석’하는 것 자체가 그에 대응하는 내 자신의 변화 자체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는 이명박 정부의 성립이라고 하는 ‘거대한 변화’에 직면해서 그 변화를 해석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다. 돌이켜 보면, 1990년대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언제나 새 정권의 성격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다. 그 논쟁 참여자들에게는 두 가지 시각이 교차했던 것 같다. 하나는 ‘불변론적’ 시각 혹은 정서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정권의 구조적·계급적 성격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엄청난 변화를 지적하는 ‘변화 강조론’이다. 나는 이명박 정부의 성격에 대해서 ‘변화’의 측면과 ‘불변’의 측면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나는 이명박 정부를 ‘한국형’ ‘신보수 정권’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당연히 60·70년대의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구보수 정권으로 규정될 수 있다. 구보수 정권과 신보수 정권은 차별성과 연속성을 갖는다. 먼저 차별성을 보자. 구보수가 초기 산업화 단계의 개발독재였다면, 신보수는 ‘포스트-개발’ 정부이고 ‘포스트-독재’ 정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구보수를 냉전적인 반북(反北)적 보수이자 ‘안보형 보수’로 성격지을 수 있다면, 신보수는 ‘시장형 보수’ 혹은 ‘신자유주의적 보수’로 성격지을 수 있다. 특별히 보수세력 내부의 헤게모니 분파의 전환을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이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했다면 이제 이명박 정부는 시장자율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표방한다. 반대로 연속성을 보자. 무엇보다 과거 독재시대의 집권당이자 90년대 민주개혁 국면에서 반개혁에 섰던 보수정당이 집권당으로 복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나아가 신보수는 구보수의 가장 핵심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개발주의’와 ‘성장주의’를 새로운 형태로 정확히 계승하고 있다. 또한 신보수는 탈규제와 시장자율을 강조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구보수의 ‘친기업주의’와 ‘친자본적 성격’을 정확히 계승하고 있다. 단지 그 형태가 달라지고 있을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자본이 제 발로 서지 못하고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스스로를 성장시켜야 했던 ‘원시적 축적’ 단계의 친기업주의를 구보수가 구현했다면, 이제 자본이 제 발로 서서 자력으로 중소자본과 기타 사회영역을 통제하고자 하고 국가적 지원 없이도 글로벌 자본축적을 수행할 수 있는 단계의 친기업주의를 신보수는 구현하고 있다. 여기에 ‘탈규제’ ‘자율경쟁’이 핵심 담론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신보수 정권이 구현하는 국가는 ‘신자유주의적 경쟁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중도 리버럴 친미 정부의 붕괴가 좌파 정권으로 이어진 남미와 다른 경로를 보여준다.

 

이명박-박정희 신.구 정권은
개방주의-보호주의 차별성과 동시에
보수정당 재집권이란 연속성 지녀
개발성장-친기업.친자본 성격 계승도

 

 

앞서 ‘한국형’ 신보수 정권이라는 표현을 썼다. 신보수 정권 하면 80년대 영국의 대처 정부 등 서유럽의 우파 정부를 연상한다.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한국적·동아시아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80년대 이후 유럽의 신보수 정권이 60·70년대 복지국가를 비판하고 그것을 해체하고자 했다면,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포스트-복지국가적’ 신보수가 아니라 ‘전(前) 복지국가적 신보수’로서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서구의 신보수 정권은 사회민주당 정부 시대의 문제점을 ‘복지병’ ‘산업공동화’ ‘과부하 국가’ 등으로 진단·비판하면서 출현했다. 사회민주당 정부 스스로도 ‘복지 요구의 확대와 그것을 충족시킬 조세 기반 간의 괴리’라고 하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반독재 중도 리버럴 정부(참여정부) 하에서 전면적인 복지국가로 이행하지 못했다. 보수세력은 초보적인 복지 확대의 시도조차도 ‘좌파 사회주의’라고 생각하는 ‘가공의 이데올로기적 인식’에 기초해 있다. 이것은 그만큼 한국의 보수, 그 일부로서의 신보수가 경제적으로 배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민주노총 내부에서 온건파가 리더십을 가져도 아무것도 자본으로부터 양보를 쟁취할 수 없는 조건에 놓인다. 이는 신보수 정권하에서 이른바 ‘개량화’의 기반이 대단히 취약함을 의미한다.

둘째,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시장자율과 자율경쟁을 지배담론으로 하지만 ‘신국가주의’적 성격을 관성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여러 신자유주의적 국가들의 현실 모습은 개별 국가 내의 계급적·사회적 역관계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크게 유형화해 본다면, 신자유주의적 국가라고 하더라도, 북구형의 ‘신조합주의적 유형’, 영미 식의 ‘순수 시장자유주의적 유형’, 동아시아의 ‘신국가주의적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동아시아의 ‘신국가주의적 유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는 개발독재적 국가개입주의의 관성, 국가의 정책수단을 친기업적으로 활용하고 나아가 공권력에 의해 배제적 노동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본의 요구, 국가의 공적 역할에 대한 인식 부재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경부운하와 같은 친자본적인 대규모 국가프로젝트의 개발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구와 달리 복지국가 이행못한 현실 속
보수만이 아닌 진보적 기대 실리고
시장자율 구호 뒤 국가개입 관성도
‘민주화 퇴행’ 대신 ‘보수의 진화’로 봐야

 

셋째, 한국의 신보수 정권을 성립시킨 대중들의 요구가 단지 보수적 요구만을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라고 하는 중도 리버럴 정부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에 기초하여 성립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불신에는 양극화와 소득분배 악화의 극복, 사회복지 확대, 일자리의 확대 등 진보적 기대가 내포되어 있다. 여론조사를 보면, 각종 진보적 요구들이 다 이명박 정부에 투사되어 있다. 또한 서구의 신보수 정권에서는, 국가 실패가 강조되고 거기서 자연스럽게 시장의 역할 확대와 가족의 강조가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은 사회복지가 발달되지 않은 조건에서※국가가 과부하가 아니라※가족이 ‘과부하’ 상태에 있다. 97년 경제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경제적 양극화로 인하여 많은 중하층 가족은 사회의 부담을 이전보다 과도하게 떠안았고, 그 부담으로 더욱더 해체의 위기에 직면할 정도다. 이는 한국의 신보수 정권이 서구와는 다른 사회적 요구와 기반 위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신보수 정권 시대의 등장을 아시아 민주화의 일반적 경로에서 보면 ‘퇴행’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 ‘개발독재적 예외국가’를 벗어나서 “자본주의적 ‘정상’국가”로 변신해 가는 일종의 ‘보수의 진화’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진보의 투쟁에 의해서 강제되면서 보수가 응전한 결과이다. 이제 ‘진화된 보수’에 영향을 받고 응전하면서 ‘진보의 진화’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가.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조희연/성공회대 교수·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 소장

 



 
» 조희연 교수
 
조희연 교수는 1956년생으로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아시아 민주화의 복합적 갈등’에 대한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적 ‘급진민주주의론’의 정립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에서 정상성에 대한 저항으로> <계급과 빈곤> 등의 저작이 있습니다.


 
기사등록 : 2008-03-07 오후 07:29:19 기사수정 : 2008-03-07 오후 08:58:14

 

한국형도 신보수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일 뿐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새로 출범한 이명박 대통령(왼쪽) 정부 성격을 ‘신보수’라고 규정하는 쪽은 박정희 전 대통령(오른쪽) 체제와의 차별성에 그 근거를 둔다. 하지만 고세훈 교수는 박정희 체제가 ‘보수’의 가치와 거리가 멀었다는 점에서 새 정부에 붙이는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불필요한 수식어는 왜곡 우려

 

지난주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새 정권의 성격을 ‘신보수’로 규정했다. 조 교수는 이명박 정권이 시장자율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한 박정희 정권과 한 묶음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개발과 성장주의라는 동질적 측면이 있음도 지적했다.

조 교수는 또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전(前) 복지국가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봤다. 1980년대 유럽과는 달리 ‘신국가주의적 성격’을 지닌 점과 대중의 진보적 요구에 기초한 점도 ‘한국형’의 특징으로 거론했다.

이런 견해에 대해 고세훈 교수는 ‘보수가 의미하는 바’에 근거해 반론을 폈다. 구보수든, 신보수든 역사적으로 보수주의는 공동체 개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보수는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자율성을, 대내적으로는 유기체적 일체성을 전제하거나 추구한다는 설명이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박정희 정권에 보수의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박 정권은 보수 이념을 구현했다기보다는 기득권층을 새롭게 형성하고 고착화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공동체 의식도 박정희 체제를 거치면서 조각나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고 교수는 “우리는 적극적 가치로서 보수해야 할 무엇을 가져 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청산해야 할 역사적 유산들에 치여” 있다며, 새 정부를 신보수라고 일컫는 것은 진보정권으로 일컫는 것만큼 잘못된 규정이라고 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놓고 지식계가 소란하다. 세월의 변화와 연속성을 모두 담아내려니 성격 규정에 수식어가 복잡하게 달린다. 나름대로 서술적 의의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류가 지나치게 세분화되면, 분류의 이론적 의의는 사라지고, 우선 너무 복잡해서 대중적 전달력도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조희연 교수의 ‘한국형’ 신보수가 있다면, 중국형·터키형·이탈리아형 신보수가 없으란 법 없다. 그러다 보면 왜 분류를 하는지, 그런 분류작업이 학문적·실천적으로 어떤 의의가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그렇다고 현 정부에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역사적 담론들, 예컨대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 등을 수식어 없이 갖다 대기도 껄끄럽다. 무릇 이념이나 개념들은 특정의 상황적 맥락과 역사적 경험에서 태동하고 발전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출범한 정권에 대해 성격 규정을 서두르는 것 또한 걸린다. 그러나 시도 자체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식이든 분류는 필요하고, 어차피 우리는 끊임없이 분류할 테니까. 그럼에도 현 정부를 ‘한국형’ 신보수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한국형’이란 수사가 주는 부담감도 문제지만, 그것이 이미 역사성을 내재한 보수주의 혹은 신보수주의의 개념적 근간에 조금이라도 닿아 있으려면, ‘한국형’이란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일정한 형용 모순이거나 혼선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구보수든 신보수든, 역사적으로 보수주의는 공동체 개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대외적으론 공격적이든 방어적이든 국가의 자율성을 일정하게 전제하거나 추구하며, 대내적으론 유기체적 일체성을 역시 전제하거나 추구한다. 보수주의가 어떤 계급적 혹은 계층적 체제로 귀결했는지는 그 다음 문제다.

 

전통적 보수는 공동체 개념과 불가분
개인 의무·책임 중시하고 복지 기여해
‘박정희 체제=구보수’라 말하지만
되레 공동체 허물고 새 기득권층 형성

 

이 점은 오늘날 신보수가 아무리 시장자유주의를 전면에 내건다 해도 마찬가지다. 가장 공격적인 신자유주의가 왕왕 가장 국가주의적 색채를 드러내는 데서 볼 수 있다. 당연히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시장이나 시민사회와 대립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다른 국가들을 상대로 한 개념이다. 오히려 전통적 보수는 공동체를 원자화된 개인들로 분해하는 시장체제보다는 관계적 의무와 책임을 중시한다. 사실 보수주의 자체가 중세적 질서에 대한 일정한 향수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컨대 ‘소유하다’(own)란 영어단어가 ‘빚진다’(owe)라는 중세적 어원을 가진다거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이 중세 계층간의 쌍무적 책무의식에서 연원한다는 점은 보수주의의 공동체적 특징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수주의가 사민주의 못지않게 서유럽 복지국가의 태동과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국가복지는 취약하더라도 민간복지 혹은 자선의 전통이 굳건한 일본이나 미국의 경우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선진국에 시장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듯이 보여도, 그 배후엔 구보수적 토대가 엄연하다. 이러한 연속성은 시장자유주의적 요소가 강화되는 과정이 늘 심각한 내적 갈등을 동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엿보인다. 예컨대 영국의 정치사를 들여다보면, 벤저민 디즈레일리 이래 모리스 해럴드 맥밀런에 이르는 전통적 보수주의는 한때 에드워드 히스나 마거릿 대처의 신보수적 정치에 의해 뒷전에 밀리기도 했지만, 최근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에 의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심지어 대처주의가 당대적 힘으로 입증되려면 이른바 웨츠(wets)로 일컫던 구보수 진영과의 힘겨운 싸움을 치러야 했다.

 

‘보수’ 아닌 ‘청산’할 유산들만 떠안은
새 정권에 ‘신보수’란 수식어는 잘못
‘한국형’이란 말도 역사성 없이 혼선 불러
되레 역사에 무임승차하는 빌미 줄 뿐

 

우리의 신보수주의는 과거 박정희 체제를 보수체제로 암암리에 상정한다. 그러나 박정희체제는 기실 어떤 적극적 이념을 구현했다기보다는 그 동기·과정·결과가 기득권층을 새롭게 형성하고 고착화하는 데 초점을 둔 것이었다. 국가자율성이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서유럽 보수주의와는 정반대로 대외적 의존을 근간으로 한 대내적 (시민사회로부터의) 자율성이었다. 우리 국가의 대외적 자율성은 오로지 북한을 상대로만 기능해 왔다. 대내적으로도 국가는 수탈의 도구로 인식되었으니, 오늘날 한국 사회에 팽배한 반복지 의식 저변에는 반국가·반정치 의식이 깔려 있다. 우리의 공동체 의식은 오히려 박정희 체제를 거치면서 조각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미 와해된 공동체적 조건에다 신자유주의를 대세인 양 수용하면서 개인 중심의 극단적 혈연주의, 때론 가족조차 팽개치는 (이혼율, 해외입양률, 유아방기율, 낙태율, 출산율 등에서 나타난) 극단적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상태에 와 있다. 요행과 불로소득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며 정직한 노동과 노동자를 천시하고, ‘못사는’ 외국인노동자와 연변의 동족이나 북한을 경멸하는 저급한 의식상태가 거기에서 멀지 않다. 요컨대 우리는 적극적 가치로서 보수해야 할 무엇을 가져 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청산해야 할 역사적 유산들에 치여 있는 것이다. 신보수나 신자유는 모두 중세라는 장구한 세월에다,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근대적 경험과 정치적 실험들이 농축된 역사적 개념들이다. 이 정권에는 신보수는 말할 것도 없고, 때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조차 과분하고 민망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실용주의란 것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원칙이 전제되지 않는 유용성 혹은 현실과의 거리 조율이 애초에 가능하기나 한 건가. 우리의 실용주의도 실상은 성장주의라는 기만적 이데올로기에 터잡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 정치에 관한 한, 이념의 시대가 갔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것은 내 이념, 내 이해관계가 마침내 지배적으로 됐다고 흡족해하는 사람들의 오만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무릇, 음치가 합창단에 앉으면, 테너나 바리톤으로 ‘분류’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자동적으로 테너가 되고, 바리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음치를 합창석에 앉히지 말라. 음치를 벗어나게 하려면 먼저 음치임을 자각시켜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그렇다 치고, 이 정권에 신보수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수식어가 어떻든 그것을 진보정권으로 부르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규정이다. 장관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면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나. 투철한 국가의식은 애초에 언감생심이었고, 기형적인 한국적 시장체제에서 ‘성공한’ 몽롱한 얼굴들뿐, 진지하고 당당한 시장주의자의 모습조차 거기엔 없었다. 그리하여 현 정부가 자신의 별명을 그냥 ‘이명박 정부’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어떤 점에선 백번 옳고 또 잘한 일이다.

 
» 고세훈 고려대 교수
 
예명으로 언론이 갖다 붙인 고소영, 강부자 정부면 충분하다. 너무 냉소적이고 안이한가? 그래도 나는 이 정권에 신보수의 치장을 해 줌으로써 지레 면죄부를 주고, 그것이 역사에 무임승차하도록 빌미를 주는 일은 정말 내키지 않는다.

고세훈/고려대 교수

 


고세훈 교수는 1955년생으로 미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존 메이너드 케인즈, 국가복지사상의 역사, 조지 오웰의 삶과 사상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영국노동당사>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페이비언 사회주의> 등의 저서를 냈습니다.

 

계급성 뚜렷한 경제·물질주의적 우파다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이명박 정부로 상징되는 새로운 보수는 계급적 속성이 강한 경제적 우파에 물질주의의 이념이 결합되어 있다는 게 강원택 교수의 분석이다. 지난 1월 대운하 착공 계획을 발표하고 있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 당선인(왼쪽)과 대운하 건설을 반대하는 도보 순례를 벌이고 있는 종교인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③ 자기 변신한 보수

 

지난 두 주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와 고세훈 고려대 교수는 이명박 정부를 ‘신보수’로 규정할 수 있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조 교수는 새 정부가 시장자율 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점에 주목하면서 국가개입 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한 박정희 정권과 한 묶음으로 보기 힘들다고 했다. ‘신보수’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고세훈 교수는 보수는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자율성을, 대내적으로는 유기체적 일체성을 추구”한다면서 이런 기준으로 따질 때 박정희 정권이든 새 정부든 보수라고 볼 수 없다는 관점을 보였다.

강원택 교수는 ‘신보수’ 논쟁에서 비켜나 이명박 정부의 이념적 지형 분석에 치중했다. 그는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보수를 “계급적 속성을 띠는 경제적 우파와 물질주의적 가치의 결합”으로 요약했다. 구보수 세력은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했다면 새 정부는 경제적 요인과 계급적 특성을 지닌 우파적 속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보수 세력의 경우 경제적 우파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보수에서 상층계급이나 자본가와 같은 계급적 기반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했다.

강 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지향하는 또 다른 가치로 물질주의를 들었다. ‘물질주의적 우파’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는 새로운 보수의 등장과 함께 한국 사회의 갈등 지형이 경제적 가치를 둘러싼 좌우의 대결 혹은 물질주의 대 탈물질주의와 같은 한층 보편성을 띤 이념적 갈등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보수는 ‘변화를 거부하고 기존 질서나 가치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지켜야 할 가치나 대상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항상 조금씩 변화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보수라고 해도 그 속에 담고 있는 내용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보수성’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은 예전의 보수가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곧 우리나라의 보수 역시 변했다는 인식이 이 논란 속에는 깔려 있다.

2007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세력이 승리한 것은 보수파의 자기개혁, 자기변신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구보수가 지녔던 지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모습을 유권자에게 제시했기 때문에 보수 세력은 승리했다. 구보수가 대표했던 가치는 냉전 시대의 반공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있었다. 과거 냉전 시대, 권위주의 체제의 이념적 유산이 우리나라 구보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이명박의 보수는 냉전적 보수에서 벗어나 경제적 요인과 계급적 특성을 지닌 우파적 속성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냉전시대 반공이데올로기 기반으로
다양한 계층 속해 있던 구보수와 달리
이념 벗어나 경제적 우파 정책 강조
기득층 대변·친기업 등 계급속성 강화

 

이명박 정부가 강조하는 ‘실용’이라는 용어는, 노무현 정부의 과도한 이념성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이념성이 강조되었던 구보수로부터 거리두기의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 여기서 ‘실용’에 대비되는 ‘이념’은 서구 정치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경제적 가치를 토대로 한 좌파 대 우파의 균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북관계, 대미관계, 국가보안법 등 반공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이념적 갈등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명박의 새로운 보수가 강조하는 실용은 이런 과거 반공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이념적 갈등에서 벗어나, 시장 중심, 성장과 효율 추구라는 전통적인 우파 정책의 강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자기변신으로 이명박의 보수는 더는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을 지키려는 ‘꼴통’ 보수로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 때문에 과거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을 선택했던 많은 ‘진보적’ 유권자들로부터도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명박 정부를 우파로 지칭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구보수에 비해서 계급적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구보수 세력은 계급적 속성이 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지는 개인의 경제적 지위나 계급과는 무관한 개인의 가치와 신념의 문제였다. 계급이나 소득과 무관하게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한 신념을 지닌 이들이 과거의 보수 세력의 핵심 지지 기반이었다. 따라서 다양한 계급이 보수 세력 내에 공존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이념의 문제는 계급보다 세대적 요인이 더 큰 차별성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소득수준이 낮은 계층에서 보수이념 성향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곧 과거 보수 세력은 경제적 의미의 우파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의 새로운 보수는 상층계급이나 자본가와 같은 계급적 기반이 한층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보수 세력의 계급성이 강화되는 특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강부자’ 내각, ‘고·소·영’과 같은 용어는 이명박 정부의 계급적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런 용어들은 재산과 학연·지연·종교 등을 통해 형성된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을 상징하는 것이며, 이명박 정부는 조각 과정에서 이미 이들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역시 계급적으로 노동보다 자본에 대한 강한 선호를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풍요 부르짓는 물질주의가
대중지지 이끌어내 대선 승리했지만
환경·노동·인권 등엔 소홀 드러나
경제가치 둘러싼 좌-우 대결 신호탄

 

이처럼 계급적으로 비교적 편협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압승을 거둔 이유를 단지 냉전적 보수로부터의 이탈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명박의 새로운 보수가 지닌 또 다른 특성은 바로 ‘물질주의’이다. 물질주의는 인간 삶의 기본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는 경제적 풍요와 사회질서의 유지와 같은 생존과 안전의 문제를 강조한다. 삶의 질의 추구에 앞서 생존을 위한 최소 요건의 충족을 선호하는 것이다. 물질주의에서는 개발과 경제 논리가 우선시되며 법과 질서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 대운하 사업과 같은 개발 논리, 노동쟁의에 대한 엄벌과 질서와 법치의 강조 등은 이명박의 보수가 담고 있는 물질주의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2007년 대선에서 많은 유권자들이 이명박을 선택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물질주의적 호소의 위력이었다. 아파트 가진 이들은 부동산 재개발, 시장 상인들은 경기 회복, 젊은이들은 취업 등 물질주의적 메시지로 중산층과 서민, 노동자의 지지를 확보해 간 것이다. 경제적 침체가 지속되면서 물질주의에 대한 강조는 커다란 정치적 호소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탈물질주의적 가치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대운하 논란에서 드러나는 환경 문제의 경시, 각료 임명 과정에서 본 대로 성 평등 문제에 대한 취약함, 노동이나 인권 문제에 대한 소홀함 등이 이명박의 물질주의적 편향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경제적 성취와 가시적인 결과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물질주의는 이명박의 새로운 보수가 중시하는 또 다른 가치인 것이다.

결국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보수는 계급적 속성을 띠는 경제적 우파와 물질주의적 가치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이명박 정부의 이념적 지향점은 물질주의적 우파의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특성은 한국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정치적 변화의 특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과거 한국 정치의 균열이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을 둘러싼 갈등에 기반해 있었다면 이제는 서구의 경험을 고려할 때 한층 보편성을 띤 이념적 갈등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장·효율 대 분배·형평이라는 경제적 가치를 둘러싼 좌우의 이념 대결, 개발·안전 대 보존·자유라는 물질주의 대 탈물질주의 이념의 대결이 한층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갈등의 축 역시 지역이나 세대를 넘어서 사회경제적인 의미의 계층·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다.

 
» 강원택 숭실대 교수
 
과거 우리 사회의 진보가 권위주의 유산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자임하면서 정치적 신뢰를 확보해 왔다면, 이제 이명박의 보수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런 진보의 역할은 이미 그 소임을 다한 것 같다. 과연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구현하면서 좌파적 분배 정의를 강조할 우리 시대의 진보는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변화된 시대에 걸맞은 진보의 자기개혁, 자기변신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강원택/숭실대 교수

 


강원택 교수는 1961년생으로 영국 런던정경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영국 보수당의 역사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개혁과 민주주의>, <한국의 선거정치>, <한국 정치 웹 2.0에 접속하다>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보수’지만 ‘보수’일 수만은 없다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홍성민 교수는 정치권력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는 대통령과 정치사회/시민사회 그리고 정치주체와 국제정치 등 네 가지 층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진은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예방을 받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④ 변수에 따라 다르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와 고세훈 고려대 교수 그리고 강원택 숭실대 교수가 지난 세 주 이명박 정부의 ‘보수적 성격’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조 교수는 새 정부가 시장자율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내세우고 있다며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한 박정희 정권과 한 묶음으로 보기 힘들다고 봤다. ‘신보수’라는 것이다. 반면 고 교수는 보수는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자율성을, 대내적으로는 유기체적 일체성을 추구”한다며 이런 기준으로 따질 때 박정희 정권이든 새 정부든 보수라고 볼 수 없다는 시각을 보였다. 강 교수는 구보수 세력은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했다면 새 정부는 경제적 요인과 계급적 특성을 지닌 우파적 속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봤다.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우회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홍성민 동아대 교수는 이 글에서 정치권력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정치사회/시민사회-정치주체-국제정치라는 네 가지 층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의 보수적 헤게모니 안에 포섭되어 있는 점과 관료들의 정책 지향 등을 들어 현 정부를 보수정권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1990년대 이후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계급적 대립 지점이 흐려지고 있다며 이제 정권의 실무자들은 유권자들의 좋고 싫음이라는 취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 교수는 결론적으로 새 정부가 순항하기 위해서는 이런 4차원 공간에서 전개되는 변화와 접합의 동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처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다음주 조희연 교수가 그동안 제기된 반론들에 재반론을 펼친 뒤 이 주제의 논쟁을 마칠 계획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보수로 규정함에 있어서 지식인 사이에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현실의 변화가 매우 급격하여 논의의 수준이 이를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도 오늘날 한국 정치현장이 그런가 보다. 기초적인 정치학의 이론을 점검하면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차분히 따져보자.

정치권력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네 가지 수준의 층위가 있다.

첫째는 정치 지도자의 개인적인 퍼스낼리티에 주목하는 방법이다. 개인의 성장배경, 사회적 경험, 인사운영의 스타일 등이 정치권력의 전반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추적하는 경우이다. 기업가 출신답게 이명박 대통령은 실용노선을 앞장세워 국정을 운영하고 있어, 그 결과가 사뭇 궁금하다. 그러나 과거 군부독재와 같이 권력이 개인에게 독점된 상태가 아니고 보면, 대통령의 특성만으로 정치권력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뭔가 부족하다.

둘째는 정치사회-시민사회의 관계 속에서 정치권력의 성격을 찾아보는 방법이다. 우리가 정권의 성격을 보수-진보로 구분하는 수준이 바로 여기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분류가 매우 상대적이며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18세기의 진보는 시장의 자유를 주장했지만, 19세기의 진보는 국가개입을 요구한 바 있다.

 

정치가 시민사회에 끼치는 영향력
정권·관료들의 정책지향 볼 때
이명박 정부 보수라 부를 수 있지만
보수-진보 전통적 대립구도 무너져

 

또 정치권력을 보수-진보로 양분하기 위해서는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에 대하여 확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유럽에서 18세기 시민혁명 직후에 정치권력을 진보/보수로 양분하는 관례가 생기는데, 이때 귀족세력이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 반하여 시민사회를 대변하는 부르주아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이것은 정치권력이 사회 전체의 흐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 정치는 상황이 다르다. 우선 최근 10년 사이에 민주세력을 자임하고 등장한 행정부의 영향력이 시민사회의 보수세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의 보수적 헤게모니 안에 ‘실질적’으로 포섭되었다. 현재 불거지고 있는 삼성의 로비의혹이 전형적인 사례다. 따라서 정치세력이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시민사회의 문제에 개입하려는 의지가 있어도 현실적인 영향력은 매우 미미했던 것이 노무현 정권의 특징적인 사례다.

그리고 정치권력의 사회적 기원과 관료들의 이념적 기원을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두환 정권의 사회적 기원은 군부독재였지만, 당시에 실질적으로 전개된 정책은 신자유주의의 성격이었다. 당시 경제운영을 전담했던 김재익은 미국에서 통화주의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민영화 정책을 실시한 대표적인 관료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권력의 외면만을 보게 되면, 실질적인 내용을 혼동할 가능성이 있다.

 

국민의 취향·국제관계까지 고려할 때
정치권력 하나의 노선만 고집 못해
정치-시민사회-정치주체-국제정치라는
4각축 면밀히 주시하고 조율해야

 

이러한 세 가지 변수를 두고 볼 때 이명박 정부를 보수정권이라고 불러볼 만하다. 노무현 정권의 실정에 각을 세우면서 상대적으로 우경화된 노선을 주장하고 있고, 정권의 사회적 기원과 관료들의 정책지향은 과거 어느 때보다 일치도가 높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시민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통로가 많이 열려 있다. 대부분의 관료가 기득권을 가진 지배계급이고 그들의 친기업 정책은 정권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만큼 시장주의 논리에 더욱 철저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변수에 변화가 생기면 정권의 성격도 지금과는 다르게 될 것이다.

셋째는 정치사회-시민사회-정치주체로 확장하는 단계다. 보수-진보의 구분은 계급성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18세기에는 귀족-신흥 부르주아 세력의 대립이 있었고, 19세기에는 이것이 자본가-노동자의 대립구도로 성격이 변화된다. 계급과 정치의 상응관계는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지만, 1960년대에 서유럽이 이른바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노동자들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보수-진보의 전통적인 대립구도가 사라진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보면 한국의 보수-진보의 대립구도는 애초부터 계급적 기반이 매우 취약한 상태에서 출발했다. 즉, 지식인 중심의 진보는 있었지만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에 기초한 노동정치는 매우 취약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도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개인들의 소비취향이 그나마 남아 있던 계급적 기반을 흐려 놓고 있다. 비정규직 투쟁에 앞장서는 노동자들이 자식들의 교육문제에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선호하는 이중성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강남 사람처럼 살고 싶은 노동자들의 욕망을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파편화된 욕망의 흐름을 이성정치의 언어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의 압도적인 승리는 바로 이러한 감성의 정치와 깊숙이 맞물려 있다. 이제 정권의 실무자들은 옳음/그름의 논리(이념)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의 좋음/싫음(취향)까지 고려해서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정치권력이 분명한 노선을 지킬 수가 없다.

넷째로 국제정치의 영향력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의 정치권력은 미국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자율성을 갖는 것이 현실이다. 박정희 정권을 군부독재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가 추진했던 개발독재는 당시 세계은행이 제3세계에 강력히 추진했던 “발전국가모델”의 전형이다. 박 정권 말기에 미국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했던 박정희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사주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음모설도 있다. 물론 확인되지 않은 얘기지만, 그만큼 한국 정치는 미국의 영향권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권 초기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보인 도전적인 태도는 사실 매우 어리숙한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미국과의 화해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경제회복을 외치며 정권을 획득했다. 현재 국민들의 기대수준은 매우 높아져 있다. 그런데 이 정부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강행하고, 이로 인해 민중들의 경제생활을 파탄으로 몰고 갈 경우,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다. 실용이라는 구호만으로 국내정치의 요구와 국제정치의 외압을 조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군부독재보다 더한 수준으로 공권력을 남용하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 홍성민 동아대 교수
 
대통령-정치사회/시민사회-정치주체-국제정치라는 4각 축은 한국 정치를 떠받치는 높낮이가 서로 다른 기둥들이다. 이러한 4차원의 공간에서 전개되는 변화와 접합의 동학을 면밀히 주시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이명박 정부는 예상보다 빨리 좌초할 수 있다. 그런데 5년 뒤를 준비해야 할 진보세력도 이러한 4차원의 구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걱정스럽다. 홍성민/동아대 교수·정치학

 


홍성민 교수는 1963년생으로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정치적 변동의 관계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문화와 아비투스> <지식과 국제정치> 등이 있습니다.

 

한국만의 보수’는 재구성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신보수정권에서 평등, 생태, 평화, 사회연대 등의 가치는 진보의 재구성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조희연 교수는 지적했다. 사진은 보수단체들의 북핵 반대 집회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⑤ 조희연 교수의 재반론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와 고세훈 고려대 교수, 강원택 숭실대 교수, 그리고 홍성민 동아대 교수가 지난 4주 동안 이명박 정부 ‘보수성’의 실체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조 교수는 새 정부가 시장자율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내세우고 있다며,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적 성격을 지닌 구보수와는 차별성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반면 고 교수는 보수는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자율성을, 대내적으로는 유기체적 일체성을 추구”한다며, 이런 기준으로 따질 때 박정희 정권이든 새 정부든 보수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강 교수는 구보수 세력이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했다면 새 정부는 경제적 요인과 계급적 특성을 지닌 우파적 속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했다.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받아들인 것이다. 홍 교수는 정치권력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정치사회·시민사회-정치주체-국제정치라는 네 가지 층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조 교수는 이번 글에서 한국의 보수는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지배의 전통이 단절되는 등 정체성의 ‘해체적 재구성’을 겪었음을 강조했다. 서구적 기준의 보수와는 달리, 극단적 반북주의와 친미주의를 자기정체성으로 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신보수 정권에서 생태주의적·신좌파적·신계급적·새로운 국제주의적 진보성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지라는 과제가 주어진다고 밝혔다.

다음 주제는 ‘고종은 개혁 군주인가’이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가 다음주 의견을 먼저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지난달 22일 대만 총통선거에서 국민당의 마잉주 후보가 승리하였다. 이는 개발독재적 구(舊)지배와는 구별되는 ‘신보수정권’이 한국과 대만에서 출현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보수적 지배는, 필리핀이나 타이 등과 같이 과거 구독재세력이 강력한 제도적ㆍ비제도적인 영향력과 개입력을 보유하고 과거의 ‘정치적 독점’이 강고하게 유지되는 ‘신과두제’ 유형과 대비된다.

당연히 신보수정권은 개발독재적 구보수정권과 연속성 및 차별성을 갖는다. 내 글에 이어 실린 강원택 교수와 홍성민 교수의 글은 ‘차별성’을 강조하는 논의를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내 논지와 크게 대립되지 않으면서 그 ‘차별성’의 복합적 측면을 강조하는 논의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강원택 교수는 보수의 계급적 성격의 변화를 주목하면서, 이명박 정부가 과거 냉전형 보수와는 구별되는 ‘계급적 속성을 띠는 경제적 우파와 물질주의적 가치의 결합’으로 특징화될 수 있다고 표현했다. 이에 충분히 동의한다. 홍성민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복합적 성격을 논하였다. 네 가지 층위-정권 지도자의 퍼스낼리티, 정치사회ㆍ시민사회의 관계에 따른 정치권력의 성격, 정치 주체의 취향, 국제정치의 영향력-에서 보수정권의 성격을 복합적으로 보아야 함을 강조했다. 특히 그가 말하는 새로운 ‘감성의 정치’ 개념은 보수가 진보를 ‘추월’하고 있는 지점을 우리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단지 고세훈 교수의 경우는 다른 각도에서 중요한 논점을 제기하고 있다. 곧 보수의 일반적 성격과 한국 보수주의의 특수적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는 서구의 보수 개념을 근거로 하여, 보수를 “대외적으로 국가의 자율성을 추구하고 대내적으로 유기체적 일체성을 추구하는 지향”으로 규정하고 박정희 정권이나 이명박 정부를 보수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 자신의 개념규정의 근거를 가지고 이명박 정부를 규정하는 것을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서구 보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는 바로 그 측면이 오히려 한국 보수의 성격이고 현실적 모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곧 한국의 보수가 드러내는 극우적 반공주의, 일면적인 성장주의, 전통적인 보수의 국가자율적 배외주의와는 대립되는 극단적인 친미주의, 복지와 공동체적 삶에 대해 전혀 고려가 없는 천민자본주의적 지향, 동성애나 낙태 반대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탈(脫)도덕적 경제주의’ 등이 한국적 보수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3ㆍ1절과 8ㆍ15에 친미 데모를 하는 것 그 자체가 한국 뉴라이트의 성격을 드러내준다.

 

‘국가의 자율성’이라는 서구적 잣대로
‘극단적 친미’ 특수성 부정하면 곤란
개발독재서 신자유주의적 성장으로
한국 신보수 헤게모니 전환 이뤄져

 

더 많은 논의를 해야 하겠지만, “보수를 공동체 개념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라고 고 교수는 주장하는데, 이는 근대 초기에 서구 보수가 전근대적인 중세적 질서를 일정하게 이상화하면서 옹호하는 형태로 자신을 구성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국이나 많은 제3세계 국가들에서 보수는 자신들의 사회가 식민지로 전락하는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의 ‘해체적 재구성’을 불가피하게 겪었다. 전근대에서 근대식민지로 전환하는 과정, 나아가 해방 이후의 ‘내전적 과정’과 분단 및 60년대 군부독재의 출현 과정 등에서 ‘지배의 전통’이 단절되었다는 점이 보수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보수는 역설적으로 극단적 반북주의와 친미주의를 자기정체성으로 하여 존립하게 되었다. 이것이 냉전 시기의 한국 보수이다. 60년대 이후에는 개발독재 하에서 보수가 친기업적 성장주의와 반(反)노동자주의를 내면화한 근대화 추진세력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했다.(이 과정에서 한국의 보수는 자유주의-진보주의 세력의 연합에 기초해 전개되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억압했고 그래서 자유주의를 천명하지만 자유주의적 성격이 없다는 특성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개발독재의 ‘성공’적 추진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현재의 보수는 60~70년대 ‘근대화적 성장주의’를 새롭게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로 전환하면서 스스로를 재구성해가고 있다.(박정희라고 하는 보수의 역사적 자원을 부각시키면서 말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보수 블록 내의 헤게모니 분파도 전환되어 왔다. 예컨대 개발독재적 보수 블록과 현재의 신보수 블록 안에서 헤게모니 분파는 명백히 다르다. 이러한 변화들을 ‘신보수’라는 개념을 통해서 포착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수에 대한 ‘선험적인’ 서구적 기준을 설정해 놓고 한국에서 그에 부응하는 ‘보수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소비자본주의 대중의 욕망 포획
생활세계 지배하려는 보수시도 맞서
이젠 진보의 재구성 고민할 때
생태평화적 ‘평등연합’ 구성해야

 

우리가 이명박 정부의 성격 논쟁을 하는 데에는, 신보수정권 시대 ‘진보의 재구성’과 ‘진보의 풍부화’를 고민하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나는 신보수정권 하에서 진보는 대중들의 새롭고 지속되는 삶의 고통들을 주목하고 새로운 복합적 평등연합을 재구성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사회)공공성 담론이나 ‘민주주의의 사회적ㆍ급진적 확장’ 같은 담론이 중요하다. 복합적 신평등연합은 70~80년대의 반독재연합이나 90년대 민주개혁연합과는 다른 다양한 대중적 동력을 수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신평등연합은 새로운 ‘의제연합’이자 대중들의 다종다양한 새로운 ‘요구연합’이 될 것이다. 물론 성공적인 새로운 복합적 평등연합은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모인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기존의 진보그룹-그 일부인 급진적ㆍ좌파적 그룹을 포함하여-은 반독재적 진보성과 반미주의적 진보성, 초기 산업화 단계의 계급적 진보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제 신보수정권 하에서 우리는 생태주의적 진보성, 신좌파적ㆍ신사회운동적 진보성, 새로운 신자유주의적 성장드라이브가 촉발하는 신빈곤과 양극화에 대응하는 신계급적 진보성, 지구화가 촉발하는 새로운 국제주의적 진보성을 어떻게 결합시켜 낼 것인가 하는 과제 앞에 서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얼마 전 창당한 진보신당이 기존의 진보 이슈에 더하여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는 평등, 생태, 평화, 사회연대 등의 가치는 진보의 재구성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대중의 생활세계에 대한 신보수적 지배의 새로운 공세로 인해 분출되어 나오는 새로운 저항성들을 폭넓게 수렴하려는 고민이 필요하다. 예컨대 고도 대중 소비자본주의 시대 대중들의 신체와 욕망, 삶의 전 영역에 대한 국가와 자본의 새로운 포획과 거기서 배태되어 나오는 저항적 주체성, 신보수적 지배의 ‘감성의 정치’에 포획되면서 동시에 그것에서 탈주해오는 대중들의 저항적 감수성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하는 과제도 있다. 물론 성공적인 ‘우파 경제포퓰리즘’, 새로운 ‘우파 국제주의’ 전략, 신보수정권의 ‘경제 실패’가 가져올 수 있는 파시즘적 사회심리의 부상과 같이 신보수정권 하에서 나타날 수 있는 진보에 대한 위협적 상황도 예기해볼 수 있다. 다행히 경부운하 반대투쟁과 같이 새로운 주제를 중심으로 새로운 저항적 주체성들이 분출하고 있다.

 
» 조희연 교수
 
반독재 투쟁전선에서 이탈했던 대학생들이 등록금 투쟁으로 새롭게 정치화될 가능성도 나타난다. 암울했던 2007년 대선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지금, ‘진보의 게토화’가 아니라 ‘진보의 풍부화’로 가는 새로운 희망의 근거들을 나는 발견해가고 있다.

조희연/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조희연 교수는 1956년생으로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아시아 민주화의 복합적 갈등’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적 ‘급진민주주의론’정립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에서 정상성에 대한 저항으로> <계급과 빈곤> 등의 저작이 있습니다.

[관련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