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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어떻게 볼까

 

근대화 의지 투철…대한제국은 무능치 않았다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 고종의 어진. 고종은 과연 개혁군주였는가, 개혁군주였다면 개혁의지는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 관건적인 문제다. 이태진 교수는 고종이 확고한 개혁·개화 의지를 지닌 군주였다고 역설한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① 개혁군주다

 

지난 5주 동안 네 명의 학자가 참여한 ‘이명박 정부의 성격’ 논쟁에 이어 이번주부터 ‘고종은 개혁군주인가’를 놓고 학자들의 논쟁이 펼쳐진다.

고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한국 근현대사의 출발점을 이해하는 데 관건적 문제다. 고종의 퍼스낼리티나 정책 방향, 시대인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조선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이 있었는지, 아니면 일제 강점으로 비로소 타율적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제3의 대안세력이 존재했는지, 존재했다면 어느 정도의 역사적 무게를 지니고 있었는지 따져보는 데도 고종은 하나의 준거가 된다. 그동안 고종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사이에 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무능하고 유약한 군주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논자로 나선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에 대한 이런 기존 인식이 고종의 개혁 의지와 개혁 방향을 과소평가한 데 따른 것이라며 ‘고종 재평가’를 가장 선도적으로 주장해 온 학자다. 이번 글에서도 이 교수는 고종이 “청년 시절 개방·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미국·영국·독일 등과 잇따라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빨리 받아들이기 위해 미국을 최우선 파트너로 택하여 밀착 외교를 펴려고” 했음을 강조한다. 이 교수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고종의 근대화 정책에 일본이 위협을 느낀 결과라고 해석한다. 고종의 근대화 의지는 확고했다는 것이 이 교수의 논지다. 다음주에는 하원오 동국대 연구교수가 고종에 대해 다른 견해를 밝힌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최근 ‘뉴라이트 교과서’로 지칭되는 <대안교과서 한국 근ㆍ현대사>가 무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근대사 서술에서 최근 학계에서 재평가되고 있는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반면, 일본 의존의 갑신 ‘개화파’와 식민지 시기 경제성장론을 줄기로 삼은 것이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식민지 시기를 근대 문명학습 또는 실천기로 평가하면서 경제 발전으로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고 강조한 것이 물의를 일으켰다. 이런 역사 서술로 과연 대한민국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자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려마저 빚어졌다.

나는 2004년에 이미 이런 식의 역사인식과 반년에 걸친 긴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교수신문>을 통해 벌인 이 논쟁은 한국 논쟁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 아래 <고종황제역사청문회>란 책자로 출판되기까지 했다. 백 번의 대결을 불사했던 나에게 ‘고종은 개혁군주인가’를 다시 논하라는 주문이 들어온 순간, 뒤늦게 피로감을 느꼈다. 넘어야 할 산이 이렇게 첩첩인가. ‘대안교과서’는 4년 전 논쟁에서 판정승을 거둔 것이 아니었다면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고려해 좀더 신중했어야 하지 않았던가.

달포 전, 어느 일간지에 고종황제가 을사늑약의 실효를 저지하고자 프랑스인 고문을 독일에 보내 우리 공사관들이 현지에서 철수하지 말 것을 훈령하고 또 독일 황제에게 일본의 조약강제의 만행을 알리면서 일본의 보호국이 되기보다 차라리 서구 열강국들의 시한부 공동보호를 받겠다고 제안하는 친서가 공개되었다. 그 내용의 절박성과 절절함이 국민적 감동을 자아냈는데 이번 ‘대안교과서’의 서술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않은 역사 서술이다. 내가 보기에 ‘대안교과서’가 개화파 주도의 근대화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두 가지로 우리 근대사를 엮은 것은 유감스럽게도 일본의 극우 역사관과 너무 많이 닮았다. 대한제국의 자력 근대화노력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조선총독부 지도 하의 ‘근대문명 학습’을 홍보하려는 목적 때문이라고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을사늑약부당” 독일에 보낸 친서
고종의 구국의지 여실히 드러내
뉴라이트, 자력 근대화 노력 폄하
시대적 분위기 감지 못한 것

 

 

1919년 3월1일에 만세 시위운동이 있은 뒤 9월에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조선공화국이란 새 국호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대의원회의에서 긴급동의가 나왔다. 곧 반 년 전 대한문 앞에서 울려 퍼진 만세의 함성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죽음에 대한 애도요 충성의 소리인 만큼 그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대한민국으로 하자는 제안이 나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던 우리 선조들의 역사 인식은 이렇게 대한제국의 역사를 끌어안고 있었다.

고종은 청년 시절 개방ㆍ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ㆍ미국ㆍ영국ㆍ독일 등과 잇따라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빨리 받아들이고자 미국을 최우선 파트너로 택하여 밀착 외교를 펴려고 하였다. 수교 조약을 맺은 뒤에 미국 정부에 교사 파견을 요청하고 미국 회사들과 계약하여 왕궁에 먼저 전기를 시설하고, 통신과 우편제도를 도입하고, 광산 개발 준비도 하였다. 이런 개화 노선에 대해 아버지 대원군이 불필요하게 임오군란을 일으켜 이를 빌미로 청국이 개입하여 속방화정책을 폄으로써 군주의 개화정책은 위기를 맞았다. 그의 근대화 정책은 그 뒤 일본으로부터도 위협을 받아 청일전쟁 직전에 왕궁을 침범당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왕비가 시해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만약 군주와 그의 정부가 어리석고 무능하기만 했다면 일본이 왜 국제적 비난을 사기 마련인 이런 만행을 저질렀겠는가?

고종의 개화정책은 왕비를 잃고 대한제국을 세운 뒤에 탄탄대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으로 청국이 한반도에서 물러나고 일본이 삼국 간섭으로 일시 침략의 방향을 대만으로 돌린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근대화 사업은 눈부시다 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한반도 북부 지역의 금광ㆍ석탄 개발을 중요 사안으로 한 국토개발 계획이 세워진 상태에서 철도 부설과 광산 개발이 진행되고 서울에서는 워싱턴 디시를 모델로 한 도시 개조사업이 착수되었다. 오늘날 시청 앞 광장과 방사상 도로체계는 이때 처음 틀을 잡은 것이다. 곧 미국의 대통령궁(백악관)처럼 왕궁(현 덕수궁)을 도심에 새로 짓고 대안문(대한문) 앞을 방사상 도로의 중심으로 삼고, 기존의 종로, 남대문로를 확장하여 연결시켜 전차를 달리게 하였다.

 

고종 청년시절 서구와 수교 맺고
미국과 밀착외교로 문명수입 시도
일 ‘왕비 시해’ 위협 속에서도
개화·개방정책으로 근대화 밑그림

 

한편, 서울ㆍ개성ㆍ인천 등지의 자산가들 힘으로 1899년 대한천일은행이란 국고 은행을 세우고 1902년에는 지폐 발행을 위해 중앙은행 발족 준비를 마쳤을뿐더러 1899년 한청조약을 체결하여 청국과 대등한 독립국의 위상을 세우고, 바로 이어 헌법 전문(前文)에 해당하는 국제(國制)를 반포하여 황제국을 자처하였다. 이를 두고 군주전제정치로의 회귀란 비판은 한쪽 눈으로만 보는 역사다. 천황권의 신성성까지 표방한 명치 일본제국 헌법은 고대로의 회귀란 말인가. 근대국가 수립에서 군주권의 절대성 표방은 보편적 현상인데 굳이 대한제국만 예외적으로 비판받아야 하는가.

나는 고종이 청년 시절에 어떻게 해서 선진문명 수용의 개방주의 사상을 가지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이 의문을 풀 실마리를 최근에서야 잡았다. 지난가을,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열하(북경 북방 600여㎞ 지점)를 찾으려 이 책을 열심히 읽었다. 이 책에는 벽돌ㆍ수레 등의 사용을 주장하는 이용후생의 내용이 많이 담겨 있지만 더 중요한 대목은 열하에 도착하여 건륭제가 티베트 라마불교의 지도자 판첸라마를 평등례로 대우하는 광경을 목도한 부분이다. 청국은 몽고족의 위협을 제어하기 위해 대부분의 몽고족이 믿고 있는 라마불교의 지도자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그런 우대 정책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박지원은 바깥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조선은 대명의리의 북벌론에 빠져 있는 것이 너무도 개탄스러웠다. <열하일기>는 이렇게 세계정세에 대해 눈뜨기를 외친 역사 교훈서로 큰 의미가 있다.


 
» 이태진/서울대 교수·국사학
 
나는 여기서 고종의 선진문명 수용 개방주의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금방 깨달았다. 청년 군주의 곁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가 있기도 하였지만, 직접 정치를 선언하면서 새로 지은 집무실 겸 서재(집옥재ㆍ集玉齋)를 벽돌로 지은 사연도 알 수 있었다. 아들 순종 황제가 나라를 강제로 빼앗기기 사흘 전 박지원을 “문장과 나라를 운영하는 방법이 일세에 탁월하였다”는 사유로 좌천성에 추증한 사실은 비감하기까지 했다. 순종 황제는 아버지ㆍ어머니가 연암 박지원을 높이 받든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망의 순간에 이 사실을 밝혀두고 싶었던 것이다. 박지원의 북학파 실학은 개화 군주 고종의 자력 근대화의 사상적 기초를 이루었던 것이다. 고종의 개혁정치는 이제 우리 민족사의 본류로서 깊이 천착ㆍ음미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태진/서울대 교수·국사학

 


이태진 교수는 1943년 경북 영일 출생이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국사회사연구>, <조선유교사회사론>,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왕조의 유산-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고종시대의 재조명>,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이 있다.

 

근대화 아닌 왕권 집착하다 국권 잃어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지나친 미화는 곤란

 

 

지난주부터 ‘고종은 개혁군주인가’를 놓고 학자들의 논쟁이 시작됐다. 고종이 개혁군주였는가 하는 문제는 조선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이 있었는지를 가늠하는 준거 가운데 하나다. 첫 번째 필자로 참여한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에 대한 재평가 작업의 선두에 선 학자답게 고종의 개혁의지, 개혁실천을 강조했다. 이 글에서 그는 고종이 “청년시절 개방·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미국·영국·독일 등과 잇달아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빨리 받아들이기 위해 미국을 최우선 파트너로 택하여 밀착 외교를 펴려고” 했음을 강조했다. 고종의 근대화 의지는 확고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두 번째 논자로 나선 하원호 동국대 연구교수는 “그동안 무능력으로 대표되던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고종이 근대화 과정에서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해 왔다는 점이 밝혀졌다”고 개혁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에 주목했다. 고종이 진정한 근대화 의지가 있었다기보다는 왕권 강화 차원에서 부분적으로 개혁적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온 세계가 근대사회로의 진입에 진통을 겪고 있던 시대에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던 고종이 ‘구국의 인물’로 재해석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요컨대, 고종은 왕권 강화에 골몰했을 뿐 국권 수호나 진정한 근대화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다음주에는 조선정치사상사를 전공한 강상규(도쿄대 박사)씨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그동안 고종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는 아버지인 대원군의 등에 업혀 있거나 마누라인 민비의 치마폭 밑에 있다가 결국은 나라 망해 먹은 왕이라는 부정적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고종이 그동안 무능력으로 대표되던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근대화 과정에서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해 왔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래서 90년대 이후에는 고종의 평가도 많이 달라졌는데, 그동안의 대중적 이미지나 학계의 고종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력히 비판하고 고종이야말로 한국의 현실에 맞는 자주적 근대화를 실현하고 마지막까지 국가를 지키려던 ‘우리의 황제’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정치력이란 게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고종의 행위가 오로지 국가를 위해서라는 것이 미화하는 쪽의 입장이다. 왕과 국가가 하나로 묶여 있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왕권이 곧 국권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어느 학자의 주장대로 고종이 아무리 18세기의 ‘영명한 영정조의 이념을 계승’했다고 하더라도 시대가 다르다. 온 세계가 근대사회로 진입하는 데 진통을 겪고 있던 시대에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던 고종이 ‘구국의 인물’로 재해석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개항 이후 초기 개화정책을 수행한 쪽은 김옥균 등 개화파라는 것이 교과서적 상식이지만, 고종이나 민비도 개화에는 관심이 많았다. 부국강병하자는 데야 권력의 핵심들이 싫어할 리도 없었고 그래서 민씨 일족도 이에 가세하고 있었다. 근대화하자는 큰 논리에는 고종, 민비, 민씨 척족들도 다들 인정하고 있었으나 정치적 행위는 오히려 대원군 이전 세도정권의 부패상을 그대로 잇고 있었다.

 

근대화에 정치력 발휘했지만
개혁은 권력 강화의 도구였을 뿐
왕권-국권 혼동하며 부패 일삼아
‘구국의 인물’ 재해석은 시대착오적

 

권력의 부패는 민중의 저항을 야기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민비는 죽을 위기를 넘겨 장호원으로 피신하게 되고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대원군 덕분에 권력을 행사하기 어렵게 된 고종이나 민비의 입장에서는 이 현상을 타개할 묘안을 찾아야 했고, 민비는 은밀한 서한을 고종에게 보냈다. 청나라 군대의 파병 요청이 그것이었다. 남의 나라 군대를 빌려 국내의 권력다툼을 해결하고자 했던 장본인이 바로 이 고종과 민비였고, 그 뒤 외세가 툭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우리를 협박한 빌미를 제공한 것도 이들이었다.

청나라 군대 때문에 다시 권력을 되찾게 된 고종과 민씨 척족들이 한동안 친일적이던 외교정책을 친청으로 바꿀 것은 당연했다. 갑신정변 실패 뒤 청국은 원세개를 보내 조선을 속국처럼 다루었다. 아무리 고종이 청나라에 기대 권력을 유지하는 처지지만 청에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나 미국을 끌어들여 청을 견제하려 했으나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나름대로 자주적 외교정책을 내세웠다는 평가가 가능할 정도로 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 자주적 외교정책은 국권의 확보를 위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조선에서 고종 자신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르는 청과 감국으로 파견된 원세개에 대한 반발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왕권에 대한 외세의 침해가 일차적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농민전쟁에 대응하는 고종의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청나라 병사로 막아내자.”

고종이 1893년 동학 농민군이 보은집회를 할 때부터 한 말이다. 외교정책의 반청적 성향과 국내에서의 민중봉기에 청군을 끌어들여 해결하려는 이중성의 배후에는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는 고종의 전근대적 인식이 있었던 것이고 이 이중성도 왕권에 대한 집착이라는 점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농민전쟁 때 고종이 지키려던 것은 분명히 왕권이지 국권이 아니다. 덕분에 왕자리는 보존했지만 그 통에 국가는 결딴이 나고 식민지로의 길도 가속화되고 말았다.

 

대원군·민중 견제엔 청 군대 이용
청 견제엔 서구 끌어들이려는 시도
권력 지키려다 외세간섭 빌미 줘
개혁도 못한 채 패망·식민지 가속화

 

일본인들에게 민비가 죽고 난 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했다가 환궁하고 나라 이름을 바꿔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독립협회도 만들어져서 활동하는데 독립협회 초창기에는 고종도 호의적이었지만 의회개설운동을 벌이자 보부상을 동원해 해산하고 전제황권을 강화했다. 이 독립협회의 평가는 학자간에 다소 차이가 있다. 어느 학자는 의회개설 운동이 “독립협회에 잠복한 친일분자들의 황제권 약화운동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황제권의 강화가 이 시대의 대안이었다는 이야긴데 실제로 황실 중심으로 개혁을 시행하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이 그것이다.

제도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인 광무양전사업을 벌이기도 하고 상회사, 은행, 근대적 생산공장의 설립과 광산 개발, 철도 부설 등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광무개혁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간 곳은 군사력 강화다. 국가 재정의 40%가 이 비용이었다. 강병을 하지 못해 농민전쟁 때도 외국군을 끌어들인 나라 사정을 생각하면 고종으로서 가장 공을 들일 것은 당연했다.

군사력 강화의 목적은 당연히 국가 주권의 수호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던 고종이 군사력 강화로 지키려던 것은 왕권 쪽에 더 가까웠다. 이미 1880년대에 경기와 호서, 황해도 지역 연해를 방어해 수도 방위에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던 기연해방연을 왕실 경호를 주임무로 하도록 바꾸어 농민군마저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군사력을 약화시켰던 고종은 대한제국 시기에도 군사력 증강의 주목표를 왕실을 지키는 데 두었다.

근대국민국가가 수립된 뒤의 군사제도는 국민군제다. 국민적 통합에 기반한 국민군제는 대외적으로도 강력하지만, 대내적으로 강력한 군주제를 바랐던 고종의 군대는 왕에게 충성하는 용병제일 뿐이었다. 러일전쟁이 현실화되는 1903년께 가서야 비로소 고종은 징병제 실시를 위한 조칙을 내렸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의회개설운동 등으로 확산되고 있던 근대국민국가의 수립운동을 억누르고 전제군주제를 강화하려 했던 고종으로서는 국민통합에 기반한 국민군제인 징병제를 실행할 수는 없었다. 결국 개혁은 실패하고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말았다.


 
» 하원호/동국대 연구교수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객관성을 잃은 역사의 미화는 현재 우리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일제의 강압이라는 외적 요인에만 두지 않고 우리 내부의 문제를 냉정하게 성찰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최근 뉴라이트 쪽에서 쓴 ‘대안교과서’의 대한제국 평가는 대한제국의 전체상을 그리기보다 경제 쪽에 치중해 부정적 평가를 한다. 이들의 의도는 분명하다. 대한제국의 경제적 근대화의 한계가 바로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과론적 함정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이 역시 역사의 객관성을 잃은 평가다.

하원호/동국대 연구교수 hwh2000@hitel.net

 


하원호 교수

1954년 생이며 고려대 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요즘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 분야는 ‘동아시아사와 한국근대 사회사상의 변동’입니다. 주요 저작으로 <한국근대경제사>(1997), <근대의 진통>(2006), <한말일제하 나주지역의 사회변동 연구>( 2008)가 있습니다.

 

근대화 의지,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 서구식 제복을 입은 고종 황제와 고종이 1907년 이상설 등을 통해 헤이그평화회의에 보낸 밀서. 강상규 박사는 고종이 “극소수의 개화세력을 보호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버팀목 구실을 했으며, 근대 국제법에 입각한 자주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했다”고 평가한다. 〈한겨레〉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③ 당시 정세 복합적 고려를

 

‘고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놓고 진행중인 논쟁이 열기를 더하고 있다. 고종을 개혁군주라고 보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고 보는 주장이 대립하는 국면이다. 고종 재평가 작업을 선두에서 이끌어왔던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첫 번째 필자로 나와 고종의 개혁의지가 충만했으며, 개혁실천에 힘썼음을 강조했다. 이어 두 번째 논자로 나선 하원호 교수는 고종에게 개혁성이 있었음이 실증적으로 입증됐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더 강조했다. 고종은 왕권 강화에 골몰했을 뿐 국권 수호나 진정한 근대화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하 교수의 논지였다.

이에 대해 세 번째 논자로 참여한 강상규 박사는 이태진 교수의 견해에 더 가까운 입장에서 고종의 개혁군주적 모습에 방점을 찍는다. 강 박사는 “거대한 전환기를 살았던 인물”임을 강조하면서 고종을 정확히 알려면 고종이라는 실존적 인물을 둘러싼 복잡한 권력그물을 아울러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왕을 둘러싼 복합적인 정치적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 거대한 전환기의 조선 정치를 논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강 박사는 고종의 개혁 개방 의지가 초기부터 강했지만, 그 의지가 정책으로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많은 장벽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강 박사는 고종이 왕권과 국권을 혼동했으며 왕권 수호에 급급한 인물이었다는 하원호 교수의 주장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그 근거를 밝힌다. 다음주에는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가 고종에 대한 또다른 견해를 밝힌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고종은 ‘문명사적 전환기’라고 일컬을 만한 ‘거대한’ 전환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이 시대는 동아시아가 막강한 물리력을 앞세운 서양 제국과 마주해야 했던 시기이며 아울러 고유한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이질적인 패러다임과 전면적으로 부딪치는 과정이었다.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조선의 지식인과 위정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문명의 세계가 야만으로 전락하고 금수들의 세계가 문명세계로 둔갑하는’ 것과 같은 혼돈의 상황으로 인식하였다. 상이한 문명이 충돌하게 되면서 ‘문명기준’이 뒤바뀌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열두 살 소년이 왕위에 오른 것은 이러한 위기와 혼돈의 파고가 조선에 막 밀려들기 시작하는 상황에서였다.

왕위에 오른 뒤 유교적 민본의식을 몸에 익혀 나가던 고종은 신미양요(1871)를 치른 이후 대외 정세에 점차 눈을 뜨게 된다. 측근인 박규수를 비롯한 연행사절들을 통해 서양의 제국이 강력하며 서양화된 일본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고 중국이 이를 맘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고종은 대원군이 주도하는 조선의 배외정책이 현실적으로 조선을 고립시키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상황 판단은 친정선언으로 이어지고 조선의 대외정책을 전환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고종의 고민을 정책으로 담아내는 데는 많은 정치적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공론에 의거한 정치 운영의 전통, 왕권에 대한 강력한 견제 구조, 대원군 세력의 광범위한 정치적 영향력, 조야에 팽배한 화이론적 명분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다수가 동의할 만한 비전과 정책을 현실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을까?

 

신미양요 뒤 개화·개방 눈떴지만
정책화까진 현실적 장벽 너무 높아
내부선 대원군·보수세력 부딪히고
외세 간섭으로 자주근대화 좌절

 

고종의 개혁이 현실화된 것은 1880년을 전후해서이다. 외교, 국방, 통상, 재정, 무기제조, 인재 선발 등을 담당하는 기구로서 기존의 의정부와 동급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세우고, 일본과 중국에 대규모 시찰단을 비밀리에 보내 개방과 개혁의 추진을 위한 탐색과 함께 미국 등 서구 열강과 ‘조약’관계를 추진해 나간다. “중국이 우리와 힘을 합하자고 하지만 이를 어찌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 역시 부강책을 시행해야만 한다”, “천하의 대세를 두고 볼 때 옛 도리만을 지킬 수 없다”는 고종의 지시나, 일본 쪽 외교관들이 “시찰단은 처음부터 국왕의 결단에서 나온 일”이며,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도록 국왕의 지시를 받은 이들 일행이 조선의 개화의 기본을 다지게 될 것”이라고 본국에 보고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고종은 개방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대세력을 달래가면서 극소수의 개화세력을 보호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버팀목 구실을 했으며, 중국과 일본의 개혁모델을 비교하고 절충해 가면서 사대교린 질서를 청산하고 만국공법(근대 국제법)에 입각한 ‘자주’국가를 세우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세계의 변화상에 주목하고 달라진 무대 환경에 새롭게 적응하려는 모습은 국내외의 다양한 비판과 견제에 부딪히게 된다.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은 그중 대표적인 사건들이었다. 두 사건은 정반대의 방향을 지향하는 세력이 주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유구(류큐·오키나와)병합(1879) 이후 ‘조선문제’가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적 핵심이슈로 부상하던 민감한 상황에서 발생함으로써 주도세력의 의도와는 다르게 중국과 일본의 군사적 간섭과 갈등을 초래하였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두 사건은 고종이 주도하는 개화 자강정책을 너무 과격하고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층과 너무도 온건한 것이라고 생각한 세력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사건들로 말미암아 우리 손에 의한 개방 개혁정책의 추진은 사실상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권력정치의 현장인 제국의 시대는 조선을 더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후 갑신정변의 여파로 인한 강렬한 보수 회귀의 분위기 속에서 청국의 종주권 획책이 본격화하면서 청의 외압이 가중되었으며, 국왕에 대한 견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동학 농민봉기라는 아래로부터 개혁 요구와 이를 계기로 한 열강들 사이의 전쟁이 나타난 것은 이 와중에서였다.

 

고종의 왕권 집착은 사실과 달라
일 ‘황실 보호’회유에 목숨건 저항
외부 탓하며 내부비판 외면 안돼도
분리 생각땐 되레 역사왜곡 우려

 

고종이 왕권과 국권을 혼동했으며, 왕권 수호에 급급한 인물이라는 지적(하원호 교수)은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청의 외압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고종이 자주의식에 잘못 빠져들어, 죽음에 이를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였으며, “이 어리석은 군주를 폐위시키자”고 건의하였다. 일본이 조선을 장악한 상황에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황실을 특별히 보호해 주겠다고 하면서 고종을 회유하려 할 때 “죽을지언정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저항하면서 망명을 시도하기도 했고, 목숨을 걸고 밀사외교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최근 신문지상에 고종이 친히 밀서를 작성해서 보냈다는 보도가 나온 것은 국왕의 이러한 고뇌를 담은 흔적 중의 일부이다.

19세기 서구의 아시아 인식은 ‘동양적 전제주의론’과 ‘정체(停滯)사회론’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근대적 실증사학은 이를 토대로 조선의 ‘타율적이고 정체된’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 따라서 일본의 식민사관 때문에 조선의 국왕 고종은 역사적으로 정체된 조선을 상징하는 인물로 묘사되었고, 그 후 우리의 의식 속에서 고종은 시대착오적이고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존재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외세의 압력만을 들먹이면서 우리 내부 문제를 비판하지 않는 것은 식민사관이 저지른 역사 왜곡을 극복하려는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객관성을 상실하고 역사를 미화’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지적은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의 상황은 내부와 외부의 문제가 긴밀히 맞물려 있어 형식상 나누어서 생각해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별개의 것으로 구분해서 이해해서는 오히려 구체적인 상황을 왜곡할 소지가 크다. 실증주의자들의 믿음과는 달리 사실과 가치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호구성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강상규/도쿄대 박사·정치학
 
고종에 대한 논의 수준이 깊어져야 하는 이유는 단지 왜곡된 고종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당시 한반도 내부의 복잡한 인간관계의 그물 한가운데 서 있는 존재였다. 국왕을 둘러싼 복합적인 정치적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 거대한 전환기의 조선 정치를 논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고종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19세기 조선의 정치 공간과 구조, 그리고 그 안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며 모색하던 인물들에게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다가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강상규/도쿄대 박사·정치학

 


강상규씨는 1965년생이며,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도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은 <조선의 유교적 정치지형과 문명사적 전환기의 위기>(2005)이며, 저서로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2007),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2008)가 있습니다. 주요 관심 분야는 근대 동아시아 정치외교사 및 사상사입니다.

 

근대화 내세워 백성 울린 ‘세도정권의 수장’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 전차가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98년이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능(홍릉)에 자주 행차했는데, 이것을 고려하여 전차 노선을 서대문~홍릉으로 택했다. 순종의 승용차로 쓰인 미국의 제너럴모터스에서 제작한 캐딜락.(아래)
 
우리시대 지식논쟁 /

 

4 왕권 수호에 올인

 

‘고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삼아 진행 중인 지상논쟁이 지난 3주 동안 벌어졌다. 고종을 개혁군주라고 할 수 있느냐, 개혁군주라면 어느 정도의 개혁성과 실행력을 지니고 있었느냐 하는 논쟁이었다. 첫 번째 논자로 나선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 반면에 두 번째 논자로 등판한 하원호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을 인정하다고 해도 그 한계에 더 주목해야 함을 강조했다. 고종은 왕권 강화가 궁극적 목적이었을 뿐 진정한 근대화에 큰 관심은 없었다는 것이 하 교수의 주장이었다. 세 번째로 글을 쓴 강상규 박사는 고종의 개혁군주적 모습에 더 주목했다. 강 박사는 “거대한 전환기를 살았던 인물”임을 강조하면서 고종의 개혁·개방 의지가 초기부터 강했지만, 그 의지가 정책으로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이 많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네 번째 논자로 나선 이는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다. 박 교수는 하원호 교수와 유사한 견지에서 고종을 비판적으로 들여다 본다. 그는 “고종은 조선 말기의 마지막 세도 정권의 수장에 더 가까웠다”며 “그의 치하에서 세도 통치의 전근대적 모순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외세 의존과 같은 근대적 모순들과 중첩됐다”고 말한다. “그가 조선을 단독적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주에는 김도형 연세대 교수가 다섯 번째 논자로 등장해 또다른 견해를 밝힌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인간들이 그들의 역사를 창조하지만 원하는 대로 창조하지는 못한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조건 하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이미 존재해 온 조건 하에서 역사를 만든다.” 마르크스의 이 지적대로 역사에서 지도자 개인의 구실이 결정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미미하지도 않다. 지도자 한 명이 역사의 대세를 돌이킬 수야 없지만, 그가 이끄는 집단이 역사 대세를 수용하는 방법은 그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고종이 혼자 힘으로 조선을 망칠 수도 살릴 수도 없었겠지만, 그의 일련의 전략적 선택들은 조선 독립 보존과 근대적 전환에 디딤돌보다 차라리 걸림돌이 됐다.




구한말 위기의 세계사적 본질은 중국 중심 동아시아적 국제 질서의 약화와 몰락이었다. 일본이 이 위기를 기회 삼아 제국주의 국가로 재탄생한 것과 달리 조선이 제국 일본의 피해자가 된 데 대해 얼마든지 한탄할 수 있지만, 그 당시로서 일본과 조선의 위치가 맞바뀌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조선과 비교될 것 없이 일본은 중국 중심의 대륙적 질서와 매우 느슨한 관계에 있었으면서 네덜란드 등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교류 폭은 넓었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를 위시한 근대 일본의 1세대 계몽주의자들이 이미 에도 시대 말기에 국내에서 네덜란드어를 익혀 ‘신세계’에 대한 기초지식을 쌓을 수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이와 같은 일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거기에다가 일본의 개항이 조선에 비해 20여년 더 빨랐던 것은 ‘시간과의 경쟁’이라는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치명적이었다.

일본의 강요로 조선이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을 맺었을 때 그 체결의 배경은 3만2777명의 장병과 군함 19척의 일본 육해군을 조선으로서 현실적으로 대항해내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힘의 열세였다. 불리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에서는 비록 성인현철이 왕이 되더라도 국운의 융성을 기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오랜 세도정치의 폐단이 극에 달해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경제적 활동을 파탄에 빠뜨렸던 고종의 측근인 민씨 족벌은 온 나라의 증오 대상이었다. ‘민족’(閔族)이라 불렀던 그들의 족벌에 대한 원한이 하도 높았기에 부정부패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았던 대원군마저도 ‘반민’(反閔)의 명분만으로 일부 개화파나 동학 농민 지도자 사이의 상당한 기대를 모을 정도였다. 민심 이반에다 불가항의 외적 위협까지 겹치니 고종의 고민이란 태산 같았을 것이다.

 

민씨 일종 부패로 민심 등돌리고
제국 일본 등 외적위협까지
구한말 최악의 여건 속에서도
고종 ‘나라’ 위한 개혁의지 안보여

 

고종에게 이와 같은 역경을 헤쳐나갈 만한 전략적 선택은 있었을까? 그가 만약 자신의 권력이 아닌 ‘나라’를 구하고 싶었다면 이 나라의 대다수 주민들이 바랐던 사항부터 이행하는 것이 순서였을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요구에서 잘 반영된 민중의 희망은 무명잡세 혁파와 징세 관련 비리 척결 등 조세 제도의 합리화와 관료들의 토색질을 낳는 매관매직의 엄금 등이었다. 거기에다가 해방적인 의미의 근대적 조처-예컨대 노비 해방과 비(非)양반 인재 등용, 근대 교육의 보급-등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적어도 ‘국민 통합’ 효과라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구한말에 ‘나라’를 위한 개혁의 열매를 거둔 일이 언제 있었는가?

갑오경장 때 고질적인 지방관 세금 관련 비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때 징세 업무를 일반 행정과 분리시켜 독립적 기관으로서의 징세서(세무서)를 전국에 설립하여 탁지부로 하여금 총괄케 했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를 폐지하여 지방관이 징세 업무를 보는 옛날 제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게 하여 옛 제도의 폐단들이 다 그대로 남은데다가 국가에서 지세를 계속 올리기만 했다. 1900년에 3분의 2나 인상하고 1902년에 다시 5분의 3을 인상하는 조처들이 농민의 불만을 크게 자아내 민란의 도화선이 됐다. 광업·홍삼 등 알짜 사업의 징세를 황실이 장악한데다 역둔토라는 이름의 26만 두락 이상의 광활한 관유지까지 소득원으로 관리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이 토지를 경작했던 소작 농민들에 대한 착취가 악질화돼 갔다. 종전의 2~3할 정도의 도조율(소작료)이 1900년대 초기에 3~4할로 오른데다 1904년 이후로는 5할로 고착화돼 수많은 작인들의 저항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고종의 재정 정책은 ‘근대화’의 미명 아래 국가의 부담을 백성에게 전가했을 뿐이었다. 이 정책을 집행했던 관료들이 임용을 따내고자 뇌물을 바치고, 임용된 뒤에 무자비한 가렴주구로 본전을 뽑고 이윤을 올리는 일도 고종이 실권을 내놓기 전까지 계속됐다. 고종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던 영국 여성 탐험가 비숍마저도 그 당시 조선 국가의 본질을 한마디로 ‘제도적 약탈’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백성들에게서 빼앗았던 혈세를 고종이 어떻게 썼던가? 진정 교육 보급과 같은 근대화 정책을 위해서 썼다면 몰라도 그렇지도 않았다. 1905년 정부 예산에서는 교육과 위생 관련 예산은 1.05%에 불과했던 반면, 황실비는 7.6%나 됐다. 고종은 말로는 ‘교육 입국’을 외쳤지만, 1906년에 이르러 전국의 57개의 근대식 소학교에 1924명의 아동만 다니고 있었다. 대한제국 정부보다 외국 선교사들이 몇 배나 더 많은 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도일 유학생 파견, 원칙상 신분과 무관한 근대 교육 이수자의 관직 임명 등 혁신 조처들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 수혜자는 대개 양반 출신들이나 소수의 부유한 중인 계층들이었다. 갑오경장 때 노비 제도가 형식적으로 혁파되고 그 뒤에 인신매매를 엄금하는 법률이 제정되긴 했지만 향촌사회에서 그대로 실존했던 노비 소유 관계의 해체를 위해 국가가 이렇다 할 노력을 한 적이 없었다. 고종 시대의 국가가 유일하게 진정한 관심을 보였던 분야는, 민란 진압용으로 군대와 경찰 기구를 키우는 것이었다. 1900년대 초반의 국가예산에서 군사·경찰 비용은 보통 40% 정도 또는 그 이상을 차지했다.

 

백성들에게서 수탈한 세금으로
근대교육 보급·신분제 혁파 대신
‘민란 진압용’ 군 강화에만 골몰
조선 몰락에 대한 중대책임 물어야

 

민심을 무시하고 수탈의 강화에 혈안이 된 고종 시대 국가의 생존 방식은 외세 사이의 ‘줄타기’였다. 물론 여러 열강들이 조선을 둘러싼 대립을 벌였던 상황에서는 이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는 그 나름의 효과가 따랐다. 예컨대 아관파천과 그 뒤 8년 동안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의 노련한 외교로 고종 정권은 사실상 일본에 의한 식민화를 당분간 미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벌게 된 시간은 결국 허비되고 말았다. 교육 진흥이나 근대적 공업의 진흥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무기 공장 하나 세우지도 못해 총탄 공급까지도 일본에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대한제국호가 곧 침몰했다. 고종이 10여 차례에 걸쳐 밀사를 파견하여 열강에 호소도 다 해보고 의병장들에게 밀지를 주어 의병을 일으키는 일도 은밀히 지원했지만 근대적 경제나 교육체계,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다 허사였다. 조선이 처한 최악의 상황에서는 돌파구 찾기란 지난한 과제였겠지만, 고종은 그 해결에 거의 제대로 노력하지도 않았다.


 
»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고종을 ‘계몽군주’라고 높여 일컫는 사학자들도 있지만, 그는 사실 차라리 조선 말기의 마지막 세도 정권의 수장에 더 가까웠다. 그의 치하에서 세도 통치의 전근대적 모순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외세 의존과 같은 근대적 모순들과 중첩됐다. 그가 조선을 단독적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 고대사와 고대 중세 불교사를 연구하다가 요즘에는 19세기 말 이후의 한국 민족주의 형성사, 한국 사회진화론 사상사 연구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5세기 말부터 562년까지 가야의 여러 초기 국가의 역사〉(러시아어판·1998), 〈당신들의 대한민국〉(2001), <나를 배반한 역사>(2003), 〈우승열패의 신화〉(2005), <박노자의 만감일기>(2008) 등이 있습니다.

 

자신의’ 나라 위한 ‘보수적’ 개혁 실패로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행하고 하늘에 제를 지낸 환구단(왼쪽)과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한 옥호루.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⑤ 황권 강화·근대화 동시에

 

‘고종은 개혁군주였다’는 주장과 ‘고종을 개혁군주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지난 4주 동안 팽팽한 대치 전선을 이루었다. 첫 논자였던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을 가장 선명하게 강조했다. 반면에 두 번째 논자로 나선 하원호 동국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보다는 한계에 더 주목했다. 세 번째 논자였던 강상규 박사는 고종의 개혁 개방 의지가 초기부터 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의지가 정책으로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많은 장벽이 있었음도 아울러 강조했다. 네 번째 논자 박노자 교수는 하원호 교수와 유사한 입장에서 고종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는 “고종이 조선을 단독적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고 밝혔다.

다섯 번째 논자로 나선 김도형 연세대 교수도 고종에 대한 비판적 견해에 가까운 입장을 밝힌다. “고종의 개혁은 ‘민국’(民國) 이념을 천명하면서도 민권 신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민권 신장과 군주권 제한을 지향하던 독립협회 운동을 탄압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정치는 보수적이었다”는 것이 김 교수의 평가다. 김 교수는 또 “고종의 개혁은 황제권하에 국내 세력을 결집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고,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속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며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마지막 논쟁이 될 다음주에는 강상규 박사가 고종을 둘러싼 엇갈린 평가에 대한 견해를 다시 밝힐 예정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고종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학계는 물론 일반 사회에서도 오래된 논쟁거리다. ‘명성황후’ 뮤지컬이나, 대원군과 명성왕후를 소재로 하는 텔레비전 드라마, 또는 <한반도> 같은 영화가 인기를 얻으면 항상 등장하는 문제였다. 여기에 최근의 <대안교과서>처럼 김옥균 등의 개화파를 부각시키게 되면 더없이 복잡한 논쟁이 된다. 이 논쟁은 결국 한국 근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이 강화되는 가운데 근대화 개혁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최근 고종이 독일 정부에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린 문서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고종은 을사조약 체결 직후부터 그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고, 헤이그 밀사 사건(1907. 6) 이전에 이미 이런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이나 일부 학자가 언급하듯이, 이것을 고종의 능력과 개혁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을사조약이 체결될 당시, 고종의 태도는 애매하였다. 군대를 동원한 일본의 위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종은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시원임대신의 의견을 들어야 하므로 자의로 결정할 수 없다”고 하였고, 정작 이 문제를 다루는 어전회의에는 병을 이유로 참석하지도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참석을 강요하자 고종은 “상의할 일이 있으면 대신들과 협의하라”고 하여,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였다. 강압적 분위기에서 고종의 간접적 반대 의사를 인정하더라도, 고종은 ‘대한국국제’에 명시된 황제의 대외적 권한을 포기한 것이었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에 임하는 군주의 태도로 보기에는 너무나 나약하였다. 조약이 강제적으로 체결된 뒤에도 고종이 가만히 있었다면 그는 정말 무능한 군주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조약을 인정하지 않는 외교 활동을 하고 밀지를 보내 의병을 독려했다고 그의 유능과 개혁성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행위는 ‘종묘와 사직’을 책임지고 있던 군주로서는 최소한 해야 할 일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모호한 태도 일관
일 위협 고려해도 분명한 책임 방기
밀서 등 뒤늦은 ‘무효화’ 시도
능력·개혁성의 증거라 볼 수 없어

 

고종의 개혁성을 강조하면서 흔히 대한제국 이전으로 소급하는 경우도 있다. 친정(親政) 이후, 더러 고종의 정치적 의사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정치를 주도하던 민씨 세력에 비해 특별하게 개혁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양의 기술 문명을 수용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당시의 집권세력과 동일하였다. 모든 정책이 고종의 재가를 받은 것이긴 하지만, 고종의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의사에 따라 정책이 수행된 것은 아니었다. 고종의 정치적 역할은 아관파천 이후, 더 정확하게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민씨 세력이 상대적으로 정권에서 약해진 이후였다. 고종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때, 대한제국기였다. 고종의 개혁성 여부는 결국 대한제국의 개혁사업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대한제국에서는 당시의 사회문제, 곧 농민층의 항쟁을 해결하면서 민족적 역량을 결집하고,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외세의 침략을 막아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고종의 정치는 이런 점에서 시작되었다. 고종은 가장 먼저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고, 황실을 높이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궁내부를 중심으로 근대적인 개혁을 광범하게 추진하였다. 서양의 문명을 ‘구본신참’의 원칙 아래 수용하여, 서울의 근대적 도시로의 정비, 전기의 보급, 철도 부설, 근대적 교육의 확산 등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런 점만 본다면 고종은 매우 개혁적인 군주였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은 개항 이후 정부 차원에서 전개하던 근대화 사업을 마무리한 것이었다. 왕권을 약화시킨 몇몇의 조처를 빼고는 나머지 많은 부분은 그 직전에 실시했던 갑오개혁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개혁의 원칙과 내용은 철저하게 지배층, 지주층의 입장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광무개혁에서 국가재정 확충을 위해 가장 힘을 들였던 양전지계사업도 그런 원칙에서 추진하였다. 따라서 농민층의 요구는 외면하였다. 고종의 개혁사업을 이끌던 내장원의 운영도 이런 점을 잘 보여 주었다. 내장원에서는 방대한 토지를 다시 조사하여 관리하면서 지주 경영을 강화하였다. 농민층에 대한 소작료를 올리고, 소유권이 모호한 경우에는 소유권도 빼앗았다. 이에 불만을 가진 농민층의 항쟁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심지어 내장원 중심의 정치는 국가재정의 부실화를 수반하였다. 홍삼, 어장 등 각종 전매권을 독점하면서 왕실 재정을 확충하였지만, 정작 정부의 재정은 부족하게 되어, 탁지부가 내장원에 조세 수취권을 넘겨주고 돈을 차용하는 일도 일어났다. 궁내부를 중심으로 행한 고종의 개혁은 정부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농민층을 수탈하면서 행해진 것이었다.

 

황실·지배층 위한 ‘보수정치’ 틀에서
근대문물 수용 등 ‘개방외교’ 펼쳐
농민층 외면으로 국내 세력결집 실패
격변의 국제정세 속 나라도 못지켜

 

 

19세기 말은 격변의 시기였다. 고종은 이런 격변 속에서 국권을 유지하고, 동시에 근대화를 추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고종이 개혁 군주였는지 여부는 단편적인 몇 가지 사례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국가적, 사회적 과제를 고종이 어떤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했는지를 따져야 할 것이다. 고종은 대한제국기에 전제적인 황권을 바탕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근대적 문물을 수용하여 자주적 국가를 만들려고 하였다.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했던 점은 문호를 개방할 당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으로, 이 점은 전통적, 유교적 조선 왕조에 비해서 개혁적이었다. 고종을 ‘계몽군주’로 평가해도 좋을 대목이다. 그러나 고종의 개혁은 농민층의 동력을 결집하지 못하였고, 또 ‘민국’(民國) 이념을 천명하면서도 민권 신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민권 신장과 군주권 제한을 지향하던 독립협회 운동을 탄압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정치는 보수적이었다.


 
» 김도형 연세대 교수·국사학 교수
 
고종의 정치는 유교적 변통론에 따라 폐단을 고치되 이를 통해 체제의 안정을 꾀한 전통적인 조선 왕조의 대책과 노선이 다르지 않았다. 곧 ‘보수적 개혁’, 바로 그것이었다. 고종이 보수적 차원에서 개혁을 전개한 것은 ‘종사’(宗社)로 대표되는 자신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종의 개혁은 황제권 아래 국내 세력을 결집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고,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속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종이 추진하던 다양한 개혁은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새로운 근대사회로 변용되어 갔다. 김도형/연세대 교수·국사학

 


김도형 교수는 1953년생이며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는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이기도 합니다. 한국 근대사상사와 민족운동사가 관심 연구 분야입니다. 저서로 <대한제국기의 정치사상 연구>(1994)가 있습니다.

 

 

개화의 주인’이고자 했던 ‘망국의 군주’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 나라의 자주권을 추구하기 위해 고종이 미국에 파견한 사절. 이상재(앞줄 왼쪽), 박정양(가운데) 등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⑥ 강상규씨의 재반론

 

고종은 개혁군주였나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지난 5주 동안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찬성쪽 입장에선 이태진 서울대 교수가 가장 명확한 목소리로 고종의 개혁성을 강조했다. 이어 강상규 박사가 고종의 개혁 의지를 긍정하면서도 그 개혁이 좌초할 수밖에 없었던 국내외적 상황에 주목했다. 이에 대해 하원호 동국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 한계가 더 크다는 점을 강조했고, 박노자 교수도 “고종이 조선을 단독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다섯 번째 논자로 나선 김도형 연세대 교수도 고종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김 교수는 “고종의 개혁은 ‘민국(民國)’ 이념을 천명하면서도 민권 신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황제권하에 국내 세력을 결집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낮게 평가했다.

이렇게 평가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마지막 여섯 번째 논자로 고종의 개혁성을 긍정하는 쪽에 선 강상규 박사가 다시 등판해 견해를 밝혔다. 강 박사는 앞선 논자들의 고종 비판이 구조적·역사적 요인들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단선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그는 고종의 개혁군주 여부 논의는 성급하게 결론지어져선 안 되며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차원의 검토가 동반돼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다음주부터는 세계 철학계의 이단아 슬라보예 지젝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논쟁이 벌어진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민심이 흉흉하다. 현 정부는 과연 ‘세계화’ 시대의 산적한 현안들을 대화와 타협, 그리고 온 국민이 동의할 만한 비전의 제시를 통해 지혜롭게 잘 풀어갈 수 있을 것인가. 19세기 한반도 역시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21세기 우리가 목도하는 상황보다 훨씬 더 풀기 힘든 난제였다. 현재 한반도가 직면한 문제는 적어도 우리가 속한 문명세계 ‘내부’의 성격 변화에서 빚어지는 문제인 반면, 19세기의 당면 과제는 ‘외부’의 이질적인 세계로부터의 충격에 기인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충격과 혼돈의 정도는 더욱 광범위하고 뿌리 깊은 것이었다.

당대의 일본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19세기를 ‘마치 뜨거운 불과 차디찬 물이 만나는 것과 같고’, ‘한몸으로 두 인생을 겪는 것과 같은’ 충격적인 시대라고 진단했다. 근대화의 세례를 받은 우리들이 고종이 살았던 시기에 심층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는 전통적인 우리 고유의 패러다임(뜨거운 불)과 새로운 서양의 패러다임(차디찬 물)이 격렬하게 부딪쳤던 구체적인 역사적 현장이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이처럼 고종 시대에 대한 입체적인 접근이 어려운 만큼 고종에 대한 평가는 매우 손쉬운 것일 수 있었다. 그가 다름 아닌 망국의 군주라는 사실은 바로 그의 정치적 무능을 입증하는 명백한 자료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정치가 고종에 대한 평가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책임’론은 현실정치가가 짊어져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앞서 다른 논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고종에 대한 비판은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틀림없는 비판이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몇 가지 이유만 들어보자. 우선 정치가 고종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할 고종에게 주어진 정치적 선택의 폭이 사실상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 동화 속의 영웅이나 바보가 아닌 현실 정치가로서 고종을 고찰하려면, 그가 어떠한 현실 정치적인 제약 위에서 해법을 고민하고 방법을 찾으려고 했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들어가야 한다.

 

조선정치의 특징과 상황 고려 없이
고종에 대한 비판은 옳지 않아
지배층-피지배층·개화파-수구파 등
이분법적 사고로는 본질 접근 어려워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500여년의 강고한 전통을 지닌 조선정치에 대한 구조적·역사적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채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조선의 왕권, 군신관계, 정국운영방식은 물론, 19세기의 위정자들과 지식인의 사유방식의 특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전환기 한반도의 정치상황에 대한 논의는 피상적인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조선 전통과의 단절된 해석은 필연적으로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몰이해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군신간의 ‘상호의존적 긴장관계’와 공론(公論)에 의거한 역동적인 정치운영은 조선왕조 특유의 ‘견제와 균형’을 만들어 냄으로써 500년을 지속하게 한 힘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긍정적인 힘이 19세기 후반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환의 시대에 오히려 변화를 어렵게 하는 걸림돌로 작동하게 되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어야 이 시대 정치사가 비로소 온전히 눈에 들어올 수 있다. 왜냐하면 삶에 대한 이해 없이 죽음에 대한 성찰이 불가능한 것처럼, 조선의 생명력에 대한 이해가 없는, 조선의 사망에 관한 설명이란 공허한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19세기를 둘러싼 논의가 지배세력 대 피지배 민중의 각축, 혹은 개화세력 대 수구세력의 갈등이라는 축 위에서 지나치게 단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의 방식은 지배세력 내부의 다양한 차이가 간과되고 소위 지배세력을 싸잡아서 비판하는 방식에 머무를 소지가 크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결정론적이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방식 역시 거대하게 동요하고 있던 시대를 살았던 위정자, 지식인들의 정치적 고뇌와 선택의 의미를 개화 혹은 수구라는 어느 한쪽에 끼워 맞춤으로써 당시 조선의 정치지형에 대한 도식화된 논의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19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사고의 경직성을 탓하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 이분법이고 도식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지난번 글(4월25일치)을 통해, 고종이 여러 현실적인 제약이 있음에도 1880년대 들어 일련의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주국가를 세우려고 서구열강과 외교관계를 맺어 나가게 된 경위들을 짚었다. 아울러 조선의 개방 개혁정책의 추진이 여러 차례 반대에 부딪혔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간절히 개혁을 원하던 개화세력의 정변으로 사실상 조선은 자기 손에 의한 개혁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이 시기에 이루어진 개혁정책의 속도와 범위, 방법과 아울러 개혁의 주도세력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민씨 세력’ 혹은 ‘개화세력’에 의해 이루어진 어정쩡한 개혁이라고 적당히 얼버무리고 만다면 조선 개화사의 전모를 밝히는 것은 당분간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19세기 말 한반도는 엇박자의 연속
군신간 공론 따르던 정치운영마저
개화 발목잡고 외세 위협 불러
고종의 선택 균형적 성찰 필요

 

미국 외교관의 통역관으로서 조선 왕실의 근황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문명개화의 꿈을 키워가던 청년 윤치호는 갑신정변 전후의 정황을 자신의 일기(음력 1884년 12월30일자)에 남기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조정에는 나라를 지탱할 만한 신하가 없고 백성에게는 떨쳐 일어서려는 기상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밝은 지혜를 가진 군주가 여러 나라의 문명과 기술을 살피려 노력함으로써 여러 방면에서 바라는 바를 조금씩 이루게 되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김옥균 등의 과격한 행위는 나라를 위태롭게 했고 청국의 억압은 과거의 배가 되었다. 개화를 일컫는 자는 나라의 적으로 간주되며 개화에 관한 논의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간신배들이 밖으로 청의 세력을 끼고 군주를 위협하며 나라 일을 그르치고 있으니 실로 통탄스럽다.”

이 시대 정치사는 끊임없는 엇박자의 연속이었다. 소통에 입각한 절충과 조정의 시도는 내부의 불협화음으로 말미암아 곧바로 외세의 압력으로 이어졌고 우리의 선택 폭은 더욱 좁아져 갔다. 한반도의 정치가 국제관계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종을 둘러싼 19세기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전환기적 상황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예측했다고 하더라도 현실정치 공간에서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내고 국내외의 광범위한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였음을 절감할 수 있다. 따라서 고종을 비롯한 당대의 정치가가 개화를 지향했는지의 여부를 따지는 것보다, 성숙한 ‘개화의 주인’이 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경주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더욱 의미 있을 것이다.


 
» 강상규씨
 
고종의 개혁군주 여부 논의는 성급하게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종의 정치적 선택과 실패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비극적인 엇박자에 대한 역사적 함의가 균형 있게 성찰될 수 있어야 한다. 19세기 조선정치사가 다루는 내용들은 우리의 의식과 현재의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인 동시에 앞으로 우리의 미래로 남아 있을 의미 있는 사건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강상규/도쿄대 박사·정치학

 


강상규씨는 1965년생이며,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도쿄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은 <조선의 유교적 정치지형과 문명사적 전환기의 위기>(2005)이며, 저서로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2007),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2008)가 있습니다. 주요 관심 분야는 근대 동아시아 정치외교사와 사상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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