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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우리 사회 지식논쟁] 가장 어렵고 가장 대중적인 ‘철학계 괴물’

 

 

 

가장 어렵고 가장 대중적인 ‘철학계 괴물’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한겨레 안수찬 기자
 
 
» 가장 어렵고 가장 대중적인 ‘철학계 괴물’. 사진 도서출판 b제공.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① 이유있는 열풍

 

철학에도 유행이 있다면, 오늘날 세계 철학계의 최신 유행은 슬라보예 지젝이다. 모든 첨단 유행이 그러하듯이 지젝 또한 시대의 상식을 파괴한다. 마르크스, 헤겔, 라캉을 접붙인 그는 독일 고전 철학에 바탕을 두고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뒤, 이를 디딤돌 삼아 다시 현대 철학의 새로운 사유를 개척하고 있다. 그는 ‘급진적인 정치 실천적 철학자’의 전형이기도 한데, 고국 슬로베니아에서 1990년 대통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 국내에서도 지젝 열풍은 심상찮다. 90년대 중반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됐는데, 2000년대 들어 그가 직접 쓴 책만 10권 이상 번역·출판됐다. 대단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한겨레>는 이번주부터 이 ‘지젝 신드롬’의 속살을 파고들려 한다. 그의 사유에는 과연 새로운 영감으로 삼을 만한 자양분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난해함 빼고는 건질 게 없는 서구적 언어 유희에 불과한 것일까? 지젝의 저작을 국내에 번역·소개하고 관련 논의를 이끌었던 학자들이 그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이현우 박사가 첫 번째 글을 썼다. 그는 지젝의 사유로부터 우리 시대의 이념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레닌의 혁명 전략마저 넘어서는 전복의 기운이 지젝에게 있다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괴물입니다”라고 말하는 철학자가 있다. 자신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의 책을 경탄과 함께 읽어본 독자라면 ‘당신도 인간인가?’란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세계 철학계의 이단아’라고도 하는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 슬라보예 지젝이다. 아예 그의 이론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잡지가 나올 정도로 지난 20년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엠티브이(MTV) 철학자’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들을 정도로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 그리고 아마도 가장 많은 책을 써낸 철학자, 그가 지젝이다. 그래서 열광하는 독자들까지도 그의 책을 다 따라 읽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매년 두어 권씩 번역돼 나오는 ‘한국어 지젝’에만 한정하더라도 그렇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한 비판자의 표현을 빌리면, ‘지젝주의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젝은 흔히 ‘슬로베니아 라캉주의 헤겔주의자’라고 불리지만 거기에 마르크스와 대중문화가 이론적 틀로 더해진다. 어떤 저자를 읽기 위해서 독일 관념론과 라캉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와 현대 대중문화에 ‘정통’해야 한다면 보통은 다른 저자를 알아보는 게 낫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지젝은 매혹적이다. 그는 가장 난해한 두 사상가,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헤겔을 어떻게 라캉으로 읽을 수 있으며, 반대로 라캉은 어떻게 헤겔로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독해가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과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매혹은 동시에 그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그의 담론이 세련된 라캉적 분석과 덜 해체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정신분열적으로 분열돼 있다는 비판은 그의 이런 작업방식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 옆에는 그의 철학 ‘퍼포먼스’가 고상한 철학을 대중문화로 더럽힌다는 비난도 빠지지 않는다. 독창성도 진정성도 없는 ‘철학적 재담꾼’ 정도에 불과하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세기적인 ‘재담꾼’을 갖는다는 게 과연 불행한 일인지? 가령, 급진적 철학자로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에 관한 재담은 어떠한가?

 

헤겔과 라캉 자유자재로 다루며
마르크스·대중문화 이론적 틀까지
매혹과 혐오의 시선 동시에 받는
21세기 세계철학계의 이단아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기는 너무도 쉽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패러독스라고 지적하면서, 지젝은 그럼에도 우리가 유토피아를 발명해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긴급한 요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유토피아, 곧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와는 무관하다. 유토피아는 어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지젝이 자주 드는 것은 1917년의 레닌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곧 정치적 ‘활동’이 아닌 ‘행위’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이다. 러시아 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불가능을 돌파한 레닌의 바로 그러한 ‘광기’였다. 하지만 레닌도 혁명 이후에는 대중의 창조적 역량에 대해 불신하면서 전문가 집단의 역할을 강조했고, 그것은 곧 스탈린주의로의 길을 예비하지 않았던가? 거대 은행이 없다면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적 기구인 중앙은행을 더 크게, 더 민주적으로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젝은 이 지점에서 국가의 관리에 대한 레닌의 ‘전체주의적’ 프로그램을 우리 시대의 상황에 맞게 다시 읽기를 제안한다. 중앙은행의 자리에 오늘날 ‘일반 지성’의 상징인 월드와이드웹을 갖다놓아 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신경제의 첨병처럼 보이는 월드와이드웹에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폭발적인 잠재력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경우 레닌적 제스처는 국가기구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과 싸우는 대신에 그것을 사회화(국유화)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사회주의=전력화+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레닌의 공식은 ‘사회주의=인터넷 무료접속+소비에트 권력’으로 변형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두 번째 요소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인터넷은 해방적 잠재력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중앙은행 사회주의’에 대한 레닌의 전망을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월드와이드웹에서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재담’이다.

 

시대 넘나드는 철학적 재담으로
오늘날 이념적 지형·돌파구 찾아
‘독창성·진정성 없다’ 비판 불구
열정과 광기에 아낌없는 지지를

 

물론 그의 재담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젝은 또한 ‘소유의 종말’이 예견되는 디지털시대의 ‘탈소유 사회’에 대한 첫 번째 모형을 바로 스탈린시대 소련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알다시피 원칙적으로는 아무런 서열관계도 없는 평등한 사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계급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스탈린주의 사회는 계급이 없는, 무계급 사회였다. 하지만 동시에 ‘권력서열’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특권층인 노멘클라투라와 기술관료, 군대 등의 순으로 정확하게 서열화된 사회였다. 거기서 지배계급은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과 통제수단, 물질적·사회적 특권에 직접 접근이 가능한가라는 ‘접속 가능성’으로 결정되었다. 바로 오늘날 현 단계 자본주의에서도 특권이 직접적인 소유가 아니라 뒤에서 조정하고 교육과 경영·정보 등에서 각종 특혜를 누리는 것에서 확인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면하게 된 선택지는 사적 소유(사유재산)와 사적 소유의 사회화(국유화) 사이의 낡은 마르크스주의적 선택이 아니라 ‘위계적인 탈소유 사회’와 ‘평등한 탈소유 사회’ 사이의 선택이다. 여기서 선택은 물론 자명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이다. 지젝은 다시 레닌적 제스처를 끌어온다. 그가 보기에 레닌주의의 핵심적 교훈은, 당이라는 조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 말로만 하는 정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비판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것과 다름없는 ‘신사회운동’에도 가해진다. 과연 폴리페서(정치교수)들처럼 체제에 편승하거나 페미니즘에서부터 생태주의와 반인종주의에 이르는 신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사회적 개입’의 방법이 따로 없는 것일까? 지젝이 보기에 이러한 운동의 한계는 보편성이 결여된 ‘단일 이슈 운동’이라는 데 있다. 곧 사회적 총체성과 연관돼 있지 않다는 것이며, 중도좌파와 좌파 자유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다. 백포도주냐 적포도주냐 하는 선택은 ‘근본적인’ 선택이 아니다.


 
» 이현우 씨
 
지젝이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반복이 뜻하는 것은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이 한갓 ‘혁명을 연기하는 배우’의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레닌을 전체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괴물’의 광기와 열정을 지지한다. 이현우/서울대 강사

 


이현우 씨는 1968년생이며 서울대 노어노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학위 논문에서 ‘푸시킨과 레르몬토프의 비교시학’을 다뤘습니다. 현재 서울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전공 외에도 현대 철학과 영화 이론에 두루 관심이 깊고, 최근에는 새로운 인문학의 변형을 학문적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누리꾼들에게는 ‘로쟈’라는 필명의 인터넷 서평꾼으로 더욱 친근할 것입니다.


 
기사등록 : 2008-05-23 오후 08:57

 

지식사회 ‘사상 논쟁’ 말문을 트다
결산
 
 
한겨레 안수찬 기자
 
 
» 지식사회 ‘사상 논쟁’ 말문을 트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지난해 9월1일부터 매주 한 차례씩 연재했던 ‘우리 시대 지식논쟁’이 이번 호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우리시대 지식논쟁은 지식·담론·시사를 버무려 지상 논쟁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려는 노력이었다. 지금까지 37차례에 걸쳐 여러 지식인들의 글을 실었다. 모두 아홉 가지의 주제를 다뤘다.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1~3회),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4~6회),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나’ (7~9회),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10~16회),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17~21회), ‘코뮨주의 대안 맞나’ (22~25회), ‘이명박 정부의 성격’ (26~28회), ‘고종 어떻게 볼까’ (29~34회),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35~37회) 등이 우리 시대 지식논쟁의 화두로 다뤄졌다. 그 논쟁의 주요 장면을 톺아본다.

 

신자유주의… 민족주의…
9개 주제 37차례 걸쳐 실어

 

 

최첨단 서구 이론으로 지식논쟁의 첫 장을 열었다.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는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주창한 개념인 ‘제국’을 둘러싼 논쟁을 다뤘다. “권력의 중심이 사라지고 경제적·문화적 교환들이 전지구적으로 전개되는” 상태를 일컫는 ‘제국’ 개념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이해하는 첨단의 이론틀이다. 국민국가 중심의 기존 이론틀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이기도 한 이 주장을 놓고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 정성진 경상대 교수,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등이 논쟁을 펼쳤다.




제국 논쟁이 다분히 이론적인 논구의 성격이 강했다면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는 구체적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벌인 논쟁이었다. 반미 노선과 기간산업 국유화로 이름 높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실험이 ‘반신자유주의’ 진영의 대안 모델이 될 수 있을지를 두고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김수행 서울대 교수 등이 논쟁했다. 베네수엘라의 새로운 실험이 한국 사회에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는지가 핵심 쟁점이 됐다.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나’는 조금 깊은 이야기를 끄집어 올렸다. 근대문학이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제기를 바탕에 두고 ‘리얼리즘’의 가치와 근대문학의 현재적 의미에 관한 논란의 자리를 만들었다. 조영일 문학평론가, 최원식 인하대 교수, 권성우 숙명여대 교수 등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가라타니 고진의 이론을 지지 또는 비판했다.

 

우리 시대 지식논쟁이 주목한 가장 큰 화두는 민족주의 문제였다.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는 무려 일곱차례에 걸쳐 논쟁이 진행됐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일제 지배, 분단, 산업화, 민주화 등을 가로지르는 핵심 쟁점이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민족사학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새로운 보수 이념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고, 기존 진보학계 내부에서도 관성적인 민족주의를 성찰하려는 흐름이 생겨났는데, 이후 민족주의 논쟁은 복잡한 결을 가진 예민한 문제가 됐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임지현 한양대 교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권혁범 대전대 교수, 김상봉 전남대 교수 등이 치열한 논전을 펼쳤다. 안병욱 교수 등이 저항적 민족주의로부터 초국적 자본을 견제할 동력을 찾은 반면, 박노자 교수 등은 계급 모순을 호도하는 민족주의의 맹점을 비판했다.

 

지식·담론·시사 버무려
지지-비판 열띤 논쟁 벌여

 

다섯차례에 걸쳐 진행된 ‘고종 어떻게 볼까’ 논쟁도 민족주의 담론과 떼놓을 수 없다. 고종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조선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이 있었는지, 아니면 일제 강점 시기에야 타율적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것인지를 가늠하게 된다. 이는 다시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오늘에 이르러 민주화와 산업화의 흐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 하원호 동국대 교수, 강상규 박사,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김도형 연세대 교수 등이 고종을 평가했다.

마르크스주의의 현대적 재해석을 둘러싼 개념들도 우리 시대 지식논쟁에서 자주 다뤄졌다. 다섯차례에 걸쳐 다룬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는 새로운 저항의 이념을 찾으려는 지식인들의 노력을 드러낸 논쟁이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창한 ‘노마디즘’은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붙박이지 않고 끊임없이 탈주선을 그리며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사유의 여행”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 사유 방식이 과연 저항 또는 변혁의 기획에 어울리는 것인지를 두고 홍윤기 동국대 교수,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김진석 인하대 교수, 이광래 강원대 교수 등이 논쟁했다.

 

논쟁의 핵심은 노마디즘이 한국 사회에 새로운 영감을 던지는 실천적 기획인지, 아니면 급진적 언어를 빌린 상념의 소산인지에 있었다. ‘코뮨주의 대안 맞나’,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등도 비슷한 맥락의 논쟁이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주창으로 국내에서도 하나의 대안 이념으로 자리잡은 ‘코뮨주의’와 전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급진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사유를 각각 논했는데, 그때마다 이들 새로운 개념과 이념이 구체적 현실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를 두고 쟁점이 형성됐다. 고병권 ‘수유+너머’ 대표,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 이현우 박사, 박정수 수유+너머 연구원, 이성민 도서출판 b 기획위원 등이 글을 썼다.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정부 출범 2주 뒤부터 세차례에 걸쳐 연재됐다. 박정희식 개발독재와의 차별성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따라 이명박 정부의 성격 규정이 달라지는데,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 홍성민 동아대 교수, 고세훈 고려대 교수 등이 글을 썼다.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수용하는 논자도 있었고, 구보수와 별 차이가 없다는 이도 있었다. 신보수냐 구보수냐를 넘어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선명히 규정해야 한다는 필자도 있었다. 당시 논쟁은 한국 보수세력의 정치적 기원을 궁구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조희연 교수는 글에서 “극단적 친미주의, 공동체적 삶에 대해 전혀 고려가 없는 천민자본주의적 지향, 탈도덕적 경제주의 등이 한국적 보수의 특성”이라고 썼는데, 그 정의는 촛불집회 길에 컨테이너를 쌓아 올린 이명박 정부의 오늘에 이르러 더욱 새롭다. <한겨레>는 앞으로도 주요 쟁점이 떠오를 때마다 부정기적으로 ‘우리 시대 지식논쟁’과 비슷한 기획을 지면에 실을 계획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관련기사]
 
 
 
 


 
기사등록 : 2008-06-13 오후 07:56:21 기사수정 : 2008-06-16 오전 11: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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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레프트 리뷰’ 한국판 나온다

 

 

뉴 레프트 리뷰’ 한국판 나온다
진보 지성의 내비게이션
 
 
한겨레  
 
 
» 사진 탁기형 기자
 
블랙번·바디우…‘1급 필진’
서브프라임 사태 분석 등
창간호에 18편 논문 실어

 

영국에서 발행되는 진보 학술지 <뉴 레프트 리뷰>(<리뷰>) 한국어판이 올해 말 출간된다. 1960년 페리 앤더슨 등 런던의 젊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창간한 <리뷰>는 경제학자 폴 스위지가 1949년 창간한 미국의 <먼슬리 리뷰>, 프랑스 일간 <르몽드>의 자매지로 탄생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 함께 ‘세계 3대 진보저널’로 꼽히지만, 지적 권위와 담론의 깊이, 지식인 사회에 대한 영향력 면에서 다른 두 저널을 앞선다는 평을 듣는다.

한국어판 편집위원장을 맡은 백승욱 중앙대 교수는 22일 “다소 늦어진 감은 있지만 시대가 요구하는 <리뷰>의 역할은 여전하다”며 “한국어판 출간을 계기로 진보담론의 폭이 확장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려는 실천적 고민이 깊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편집위원회에는 백 교수를 포함해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 등 4명이 참여하고 있다.

격월간인 <리뷰> 영문판과 달리 한국어판은 1년에 한 번 발간된다. 영국 국내정치에서 제3세계 지역문제를 아우르는 영문판의 모든 내용이 한국 독자의 관심을 끌기는 어렵다는 점을 감안했다. 창간호에는 2002년 3·4월호(재창간 14호)부터 올해 3·4월호(50호) 사이에 실린 18편의 논문이 게재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에 대한 로빈 블랙번의 분석과 사르코지 집권 뒤 프랑스 사회의 변화를 분석한 알랭 바디유의 글, 새로운 금융 중심지로 떠오른 두바이에 대한 마이크 데이비스의 논문 등 시의성이 높고 <리뷰>의 편집 방향을 잘 드러내는 글을 엄선했다.

 
» 로빈 블랙번 / 마이크 데이비스 / 페리 앤더슨
 
출판을 담당하는 도서출판 길의 이승우 기획실장은 “현재 번역을 마치고 교정·감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12월 말쯤 550쪽 분량으로 1500~2000부 정도 찍어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출판사 쪽이 예상하는 독자층은 서구 진보이론과 국제 정세에 관심 있는 대학 고학년생과 대학원생,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다. 애초엔 국내 연구자의 글을 한국판에 함께 싣는 방안을 타진했지만, 현지 편집위원회가 “전례가 없다”며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뷰>는 창간 초기부터 국제주의적·이론적 지향이 뚜렷했고, 보수화된 사민주의 정당이나 스탈린주의의 자장 안에 있던 공산당 모두에 냉소적이었다. 이런 연유로 초창기에는 그람시·루카치·코르쉬·알튀세르 등 ‘정통 마르크스주의’ 대열에서 비껴서 있던 ‘서구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일에 주력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에서 슬라보예 지젝에 이르는 필자 목록은 최근 50년의 세계 지성사를 압축한 ‘지식인 지도’로도 손색이 없다. 에릭 홉스봄, 테리 이글턴, 위르겐 하버마스, 프레드릭 제임슨, 이매뉴얼 월러스틴, 피에르 부르디외, 에드워드 사이드 등 하나 같이 각 분야의 ‘1급’ 학자로 공인받은 거물들이다. 현재 편집위원은 페리 앤더슨과 로빈 블랙번, 마이크 데이비스 등이 맡고 있다.




2000년 ‘재창간’을 계기로 지적 관심을 세계 경제와 반체제 운동, 문학과 영화, 예술 영역으로 확장했다. 발행부수는 1만부, 온라인 구독자는 전 세계에 걸쳐 25만여 명에 이른다. <리뷰>는 현재 영문판 외에 스페인어·이탈리아어·그리스어·터키어판이 발간되고 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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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다시읽기]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다/이진경

 

 

고전다시읽기]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다/이진경

한겨레 | 기사입력 2006.05.19 16:56



[한겨레] 고전 다시읽기/알튀세르 < 맑스를 위하여 >

이 책은 원래 1965년에 출판되었지만, 우리가 이 책을, 그나마 영역본으로나마 처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알다시피 그 시절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아니 책을 구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 맑스를 위하여 > 라는 제목에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 않는 게 가능했을까? 아니, '마르크스를 위하여'라니! 일단 숨겨서 몰래 봐야할 것 같은 긴장을 주는 책이었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이듬해(1966년)에 알튀세르가 제자들과 함께 또 하나의 책을 출판한다. ' < 자본 > 을 읽자!'는 말로도 번역될 수도 있는 < 자본 읽기 > 였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 허, 책 제목을 이렇게 지을 수가 있다니!

그러나 < 자본 > 이란 책이야 그 전에도 읽었던 것이고, 그 책이 출판된 당시에도 다들 읽던 책이 아니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안 읽는 책을 "이젠 좀 읽자"고 말하려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이제까지 읽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자는 말이었을 게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의 고식적인 독서, 그 상투적 독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읽는 것,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를 위하여'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일 게다.

'이론적 반-휴머니즘' 견지

그래서 이 책의 서문은 자신들이 마르크스를 읽던 시기에 대해서, 그 독서의 방식을 제한하던 조건들에 대해 쓰고 있다. 그 글의 제목에 '오늘'이라고 붙인 것도 이런 점에서 아주 탁월한 작명이었다. 당에 의해 독서와 해독의 방식이 결정되고 제한되던 시절,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적 진리' 내지 '프롤레타리아 과학'이란 이름으로 "오류를 그 모든 서식지에서 쫓아내던 무장한 지식인들의 시대"였고, "세계를 단 하나의 칼로 갈랐던, 예술·문학·철학 및 과학들을 계급이라는 가차 없는 절단으로 갈랐던 철학자들의 시대"였다. 스탈린은 죽었어도, 스탈린식의 진리가 사유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정작 겨누고 있는 일차적 대상은 뜻밖에도 스탈린식의 실증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던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고, 마르크스를 휴머니스트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물론 그는 휴머니즘이 실증주의의 짝이고 보충물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가 휴머니즘을 겨냥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만든다는 점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자 자신을 위한 이데올로기. < 경제학·철학 초고 > 라고도 불리는 마르크스의 < 1844년 초고 > 의 출판 이후 크게 유행한 이른바 '소외론'의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스탈린의 '비인간적' 비극을 비판하며 등장한 '휴머니즘적 사회주의'가 그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입장을 '이론적 반-휴머니즘'이라고 명명했던 것은 이러한 태도를 좀더 극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독해의 강력한 지지자는 헤겔이었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헤겔과 절연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한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헤겔보다는 포이어바흐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소외론자로서의 마르크스를 '청년 시절'의 미숙함으로 돌리고 성숙한 마르크스와 다시 떼어놓는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역사과학이라는 대륙을 발견한 과학자로서 성숙기의 마르크스와, 그러한 과학을 알기 이전의,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청년 마르크스를 분리한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그는 '인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관념을 '사회적 관계'라는 과학적 개념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즉 인간이란 그가 어떤 관계 속에 들어가는가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갖는 존재고, 따라서 그런 구체적인 관계와 무관한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를 마르크스는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 그 특정한 관계가 달라지면 그는 노동자가 될 수도 있고,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지'가 아니라 '어떤 인간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란 목적지 모르는 기차

그는 또 모순의 개념을 헤겔적 관념에서 끄집어내고자 한다. '과잉결정(중층결정)'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모든 관계의 본질에는 모순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전개 양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본질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은 모순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에 따르면 사회란 '기본모순'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동심원적 구조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수준의 외부적 조건들이 기본모순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모순은 자본과 노동의 모순이지만, 어떤 때는 농민들과 지주의 모순이, 또 어떤 때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인민의 모순이 사회 전체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다른 모순들이 그 모순에 응축되고 그것의 작동을 통해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목적론적 사고방식'과 평생 동안 집요하게 대결한다. 가령 '공산주의'나 '절대정신의 실현' 혹은 '인간성의 실현' 같은 역사의 목적/종말을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진행되는 것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목적론적 역사관념이 그것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란 "기원도, 목적도 없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출발지도, 목적지도 모르는 채 역사라는 기차에 올라타고 내리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된 또 하나 중요한 명제는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란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원래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통상적 관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상식'이 바로 그런 것에 속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1845년에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피지배계급의 입장에선 당연히 거짓된 의식, 허위의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배/피지배가 사라진다면 그런 허위의식도 사라질 것이고,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포함하여, 이런저런 생각(표상)들을 방향짓고 미리 규정하는 무의식적 '표상체계'라고 본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없다면, 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결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을 사회가 요구하는 주체로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이데올로기인 것이고, 따라서 어떤 주체도 이데올로기 없이는 불가능하며, 어떤 사회도 이데올로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개념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과 결합하여, '호명'이라는 흥미론운 이론으로 이어진다. 가령 "모세야" 하는 신의 호명에 "예"하고 답함으로써 모세는 히브리 인민을 이끄는 '주체(subject)'가 된다. 신이 알려준 주체의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인정하고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신이나 부모, 혹은 사회라는 큰 주체(Subject)가 지정한 자리를 나의 자리로 오인하는 것이며, 그를 통해 그 큰 주체의 신민(subject)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란 없다

이처럼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바슐라르나 프로이트, 라캉, 혹은 그가 피하면서 받아들였던 '구조주의'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섞어서 새로운 얼굴의 마르크스를 만들어낸다. 고답적인 형태의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그리고 그것을 마르크스에게 돌려준다. 그것이 그가 '마르크스를 위하여' 하고자 했던 것이었을 게다. 마르크스가 그의 선물을 반가워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배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고답적인 사고에 지쳤던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선물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상이한 사유들이, 새로운 사유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사유 자체를 마르크스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가르쳤고, 마르크스의 사유가 다시 살아 있는 사유와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다시금 새로운 형태로 마르크스적 이론을 창안하여 마르크스에게 돌려주려는 또 다른 사유를 촉발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지키고 유지해야 할 또 하나의 마르크스주의가 되는 순간, 다른 종류의 차이를 배제하는 절단의 칼날이 된다는 점을 잊지 않는 한에서지만 말이다.

서평자 추천 도서

맑스를 위하여
알튀세르 지음, 이종영 옮김, 백의 펴냄(1997)
아미엥에서의 주장
알튀세르 지음, 김동수 옮김, 솔 펴냄(1998)
(알튀세르의 사상 전반에 접근하기에 좋은 책. 쉽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돌베개 펴냄(1994)
(부인을 죽인 뒤 금치산자로서 유폐된 상태에서 씌어진 알튀세르의 자서전)
◇ Mjspinaza(인터넷서점 예스24 회원리뷰)="비록 마르크스주의의 실추로 인해 이제는 널리 읽히지 않고 논의되는 빈도도 훨씬 줄어 들었지만, 알튀세르의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일종의 논문모음집임에도, 놀라운 이론적 통일성을 보여 주고 있다."

◇ 익명="프랑스 공산당에 속해 있었던 알튀세르는 이러한 복잡한 정치적 사태에 정치적으로,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맑스에 대한 인간주의적 해석 전체를 비판의 도마 위해 올려놓게 된 것입니다."

◇논장="이 책에 내포된 세적, 정치적 담화들은 시대의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현 시기 새롭게 번역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책이 갖는 탁월한 인식론적 가치 때문이다."

▽ 다음주 이후 고전 < 죽음의 수용소에서 > < 한국사신론 > 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bonbon@hani.co.kr

[책속으로]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이 인간주의적 청년 맑스로 변장시켜

"당에 들어왔던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이 정치적 행동주의나 적어도 순수한 행동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로 태어나지 않았기에 지게 된 상상적 채무를 변제할 수 있다고 느꼈던 것 또한 우리 사회 역사의 한 특징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동류들 속에 우리의 말을 들어주는 자를 갖지 못하였다. …자신의 가장 뛰어난 대화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듣게 하기 위해 몇몇 맑스주의 철학자들은 …언젠가는 가면이 진짜 얼굴이 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를 변장할 수밖에 없었다. 맑스를 훗설로, 맑스를 헤겔로, 맑스를 윤리적 내지 인간주의적 청년 맑스로 변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 맑스를 위하여 > , 이종영 옮김, 22~23쪽)

"모순은 자신이 그 속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신체 전체의 구조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자신의 존재의 형식적 조건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층위들로부터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순은 그 자체가 그 핵심에 있어서 이 층위들에 의해 영향받고 있으며, 하나의 동일한 운동 속에서 규정적인 동시에 규정받고 있고, 자신이 추동하는 사회구성체의 다양한 수준들과 다양한 층위들에 의해 규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순은 원리상 중층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같은 책, 116~17쪽)

"인간사회들은 이데올로기를 마치 호흡하는데 필수적인, 역사적 삶에 필수적인 요소나 공기인 것처럼 분비한다. 오직 이데올로기적인 세계관만이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들을 상상할 수 있고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의해 대체되어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관념을 받아들일 수 있다. …도덕이건 예술이건 '세계의 표상'이건 간에 역사유물론에서는 이데올로기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를 상상할 수 없다."(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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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국회의원에서 역술인으로 변신한 베스트셀러 소설가

인터뷰] 국회의원에서 역술인으로 변신한 베스트셀러 소설가
 
입력 :2008-03-07 10:32:00   김효 편집위원
 
 
한 인간의 변천은 반드시 자신이 의지만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치열한 삶에 대한 애정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 사람 중 하나가 이철용 전 의원이다. 소설가이자 정치인이었고, 또 현재는 장애인 인권 운동가이기도 한 이철용 전 의원.

3급 장애인으로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이 전 의원은 창녀촌 펨프(기둥서방)와 삐끼(호객꾼)를 전전하다가, 그 인생을 그대로 옮긴 소설 ‘어둠의 자식들’ ‘꼬방동네 사람들’로 일약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된다, 그러다가 1988년엔 평민당 국회의원으로 정치인이 되기도 했던 이 전 의원은 이후 현재까지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장을 맡아 장애인 문화복지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 그가 또 다시 자신을 진화시켰다. 역술인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 전 의원은 현재 서울 종로구 안국동 아름다운 가게 건너편 골목에 위치한 이철용 운기(運氣)관리연구소에 통(通)이라는 역술원을 열었다. 이에 본보 김효 편집위원이 이 전 의원을 만나봤다. [편집자 주]



   
 
  ▲ 소설가에서 정치인으로, 그리고 다시 역술인으로 변신한 이철용 전 의원   
 
김효 : 굉장히 바쁘실텐데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철용 :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효 : 선생님이 일약 대중 속에 알려지게 된 것이 70년대 <어둠의 자식들>이란 소설 때문이었죠. 우리 사회 속 ‘어둠의 자식’으로 태어나 폭압적인 군사독재 시절 민주 투사로서 그 누구보다도 가열찬 투쟁을 하셨고, 또 13대 국회에서는 보건복지위원회에서 빼어난 의정 활동을 보여 주신 인생역정에 대해 얘기를 듣는 것도 의미있고 매우 흥미로운 일이겠지만, 오늘은 역술가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계신 이철용 선생과 함께 대화의 시간을 가져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답답하고 일이 잘 안 풀릴 때 점쟁이 혹은 역술인들을 찾게 됩니다. 헌데 사주풀이 같은 것을 통해 역술가들이 제시하는 운세풀이가 어느 정도나 신빙성이 있는지가 매우 궁금합니다. 다른 역술가들과는 달리 선생님께서는 매우 합리적인 역술관 혹은 역술해석론을 가지고 있으실 것 같아서 여쭈어 보는 겁니다.


이철용 : 우선 이걸 좀 보세요. 내가 구축한 데이터베이스인데 이것만 구축하는데 1년 6개월 걸렸어요. 예컨대 59년 5월에 태어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때 일어난 주요사건들이 여기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태풍 사라호 강타, 피델 카스트로 집권, 경향신문 폐간, 등이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태풍 사라호가 왔을 때 태어 난 겁니다. 그리고는 일년 연표가 여기 죽 있죠. 이 사람이 태어난 5월에 일어난 사건들이 죽 있죠.

이 연표를 보면 근현대사를 총망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점이 아니라는 거죠. 이 데이터를 보면 그 사람의 엄마 아버지의 정서,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다 볼 수 있는거죠. 이것은 과학입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전체 기운이 어땠는가를 보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데이터 베이스를 만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사주와 점을 보는 사람들이 개인병리로만 보는데, 제 말은 개인병리가 아니라는 거죠. 사회병리와 함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거죠. 그래야 개인구원도 사회구원도 가능다는거죠. 그럴려면 세상을 좀 제대로 공부하고, 사람에 대해 끝없는 애정을 갖고 공부를 해야만 역학 공부가 완성될 수 있다는 거예요. 난 아직도 공부하고 있는 중예요.


김효 : 개인의 사주를 현대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를 철저하게 연구하고 계신거군요.

이철용 : 사주는 개인의 문제고, 사회는 사회의 문제를 갖고 있단 말이예요. 근데 개인이 사회에 던져졌기 때문에 같이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개인의 사주만 가지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얘기죠. 사회병리와 개인병리를 같이 보시되 상황을 보면 그 사람 흐름이 나온다는거지. 옛날에 광대가 천박한 직업이지만 지금은 뜨는 직업 아닙니까. 그러니까 해석이 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농경시대 때 만든 사주 원리만 가지고 전혀 사회환경이 다른 현대인에게 접합시킨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죠.

김효 :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사주라는 것이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분명 개인이 태어날 때 자신이 손에 쥐고 태어나는 운명 같은 것은 있다고 보는 것 같은 데요. 맞습니까?

이철용 : 사주는 운명학이 아니라 관리학입니다. 운명학으로 몰아 가는 것이 혹세무민하는 것이죠.

김효 : 제가 말하는 운명이라는 것이 반드시, ‘당신은 몇날 몇시에 죽을 것’이라거나 ‘당신은 대통령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외부적인 사건을 예언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개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체질과 성격 등을 말하는 것인데요. 사실은 체질이 성격을 낳고 성격이 운명을 낳는 것 아닙니까? 그런 식의 운명은 인정하시는 겁니까?

이철용 : 아닙니다. 사주는 바꿀 수 있습니다. 관리에 따라서 자신의 체질 성격 다 바꿀 수 있습니다. 사주가 암만 나빠도 자기가 절제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김효 :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태어날 때 우리 손 안에 체질과 성격의 다이어그램이 그려져 있는 예정표 즉 사주를 가지고 태어나기는 하되, 개인의 의지에 따라 그 표 자체를 고쳐 그릴 수 있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 그러면 차후에 개인의 강력한 의지와 노력에 의해 고쳐 쓸 수는 있을지언정 일단 가지고 태어나는 운명은 있으며 그것을 사주학이 알아내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맞습니까? 실은 사람들이 가장 궁금한 것은 사주 풀이로 나오는 예언이 얼마만한 적중률이 있느냐 하는 문제인데 사주학의 적중률은 몇 퍼센트 쯤으로 보십니까?

이철용 : 의사도 오진률이 50%입니다. 아무리 명의라 해도 그렇습니다. 일기예보도 빗나간 예보가 많아요. 사주학은 상담학입니다. 사주라는 것은 기운과 기질과 성향을 파악해서 일기예보를 하듯이 인생예보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그걸 듣고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지요. 극복할 것은 극복하고 받을 건 받고 피할 것은 피해 간다는 것이죠. 이런 말이 있잖아요. 인천 앞바다가 사이다라도 컵이 없으면 못 마신다고, 아무리 사주가 좋고 운이 좋아도 받아먹을 준비가 안 되면 아무 효력이 없는 것이죠. 기회란 준비된 자의 몫이거든요. 준비되지 아니한 자는 아무리 사주가 좋아도 나쁘게 풀리는 것이고, 철저히 준비한 사람들은 사주가 나빠도 성공하는 겁니다. 역술이 몇 프로 맞느냐 안 맞느냐 하는 질문은 우문입니다.

김효 : 그래도 사주를 보면 그 사람의 ‘그릇’ 같은 것은 나오지 않습니까?

이철용 : 우리의 몸이 그릇입니다. 그 그릇이 어떤 그릇이냐 하는 것은 그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물을 담으면 오물 그릇이 되는 것이고,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몸을 밥그릇을 만드느냐 오물그릇을 만드느냐는 자기 자신의 문제지요. 그러니까 몸 관리를 잘 해야 되는 거예요. 암만 사주가 좋아도 건강을 잃으면 다 잃게 됩니다.

김효 : 선생님께서 방금 우문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여쭙겠는데요. 방금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사주가 나빠도 철저하게 준비한 사람들은 성공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이 선거운동을 하던 기간에 많은 역술인들의 점괘들이 인터넷에 많이 올라 왔었거든요. 근데 대다수의 역술인들이 이 대통령이 대권을 잡는 데는 실패할 거라는 의견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불가능의 벽을 뚫고 대권에 성공을 했거든요. 그때 그 역술가들, 모두 좌판 걷어야 할 판인데요. 이 선생님께서는 혹시 그때 당시 이 후보에 대해 사주풀이를 안 해 보셨나요? font>

이철용 : 대통령은 선출직입니다. 임명직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이명박 씨가 운이 좋거나 안 좋은 것과 상관없이 민심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386세대라든가 민주화 세력들이 준비 부족으로 해서 정권을 망쳐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진보에 대한 염증이 난 거예요. 그래서 반사적으로 간 것이예요.

로이터 통신이 뭐라고 했어요? 개를 내세워도 된다는 것 아니었어요? 보수 측에서는 아무나 내 보내도 된다는 얘기죠. 이미 결정이 난 상황인 거죠. 그런데 그런 상황에 사주를 가지고 얘기한다는 것이 웃기지 않아요? 그리고 선출직이라는 것은 개인의 운도 있지만 상대방 운이 어떠한가가 중요합니다.

예컨대 단순 구조만 보더라도 정동영 씨는 오행으로 볼 때 금(金) 기운이 없어요. 헌데 이명박은 금이 많아요. 그러면 정동영에게는 이명박이 천적인 겁니다. 그러니까 선출직에 있어서는 내가 아무리 나쁜 사주라도 상대편이 더 나쁘면 내가 이기는 겁니다. 이번 이명박 씨의 당선은 실은 이명박이라는 개인의 운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보수 대 진보의 싸움에서 진보가 진 상황인 것이 핵심입니다.

물론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이 과연 경제를 망쳤느냐 하는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양극화가 심해지고 경제 특수가 당장 없으니까 나쁘다는 거예요. 실제로 노무현 정권이 IMF 극복했거든요. 그렇다면 경제 망쳐 놓은 것은 아니거든요. 근데 피부로 체감하는 경제 지수가 형편없거든요. 실은 옛날보다 우리 경제 수준 훨씬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형편없게 느껴요. 왜냐하면 요즘 3D 업종은 안할려고 한단 말예요.

간병인이라든가 파출부라든가 이런 것 다 연변 사람들이 와서 합니다. 노래방 가서 도우미는 할망정 그런 일은 안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경제가 나쁘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처럼 우리 민심도 각성해야될 문제가 많아요. 더럽고 추잡스러운 여론몰이꾼들, 한쪽으로 편향된 언론, 이런 기운들이 모두 국민들을 전부다 돈에 미치게 만드는 거예요. 자본가의 논리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사주를 가지고 된다 안된다를 얘기해서는 안되는 거죠. 좀더 크게 보아야 합니다. 이명박 문제는 잘나서 된 것도 아니고 이명박이가 못나서 안된다는 것도 아니고 시대의 흐름이 그렇게 돼 있었던 것이지요.


김효 : 대통령은 하늘에서 내야 한다고 하는데 결국은 대통령이 되는 데조차 개인의 사주가 결정적은 아니라는 얘기가 되네요. 상황이 문제인 것이지.

   
 
  ▲ 안국동에 위치한 이철용 운기관리연구소에서 작업 중인 이철용 전 의원   
 

이철용 : 이건희 회장이 평양에서 태어났다면 재벌 안돼요. 재벌 되겠어요? 보통 동일한 사주를 가진 사람들이 약 50명쯤 됩니다. 그 사람들이 성향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가정환경과 사회환경, 교육정도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들도 약 50명 된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 사람들을 모아 놓고 보면, 여자를 보는 눈, 남자를 보는 눈, 이성을 보는 눈, 취향이 비슷하게 나와요, 그 기운을 보는 것이지, 당신은 대통령 될 거다 아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확률적으로 그들이 모두 대통령이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김효 : 하지만 여기서 삼성을 일으킬 정도의 큰 기운을 가진 사람이라면 평양에서 태어났다면 뭔가 큰 자리를 하지 않았을까요?

이철용 : 제가 재미있는 얘기를 할께요. 옛날 이성계가 자기랑 똑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을 찾아냈는데, “자네 뭐하나?”라고 묻자 “양봉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러자 이성계가 “너도 군사는 가지고 있구나”라고 응수했다는 겁니다. 즉 벌도 일종의 군사라는 것이죠. 다시말해서 동일한 사주라 하더라도 임금과 양봉치는 사람만큼의 편차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검사와 조폭이 기운이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특수부대 근무하는 분이나 조폭이나 기운이 비슷합니다. 근데 누구는 조폭으로 가고 누구는 특수부대로 가게 되는 것은 교육에 의한 결과입니다.

김효 : 요즘 국회의원 공천 기간이라 그쪽 분들도 많이 찾아 오실 것 같은데요?

이철용 : 예, 많이 옵니다. 그러면 제가 그럽니다. 그런 것을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 같은 사람들이 알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얘기합니다. 저는 그런 것은 모릅니다. 저는 점쟁이가 아닙니다. 과학자입니다. 그 사람들의 공천 여부를 보려면 경합 대상자의 사주와 같이 놓고 보아야 합니다.

김효 : 과학 얘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인데, 선생님은 기독교인으로써 장로님이시기도 합니다. 세계사에서 종교와 과학은 끊임없이 갈등하고 다툼하는 다분히 모순된 영역입니다. 아무리 역술이 과학이라 하더라도 선생님의 종교적인 신념과의 갈등은 없으십니까?

이철용 : 네, 목사님들이 많이 찾아 옵니다. 궁금해서죠. 말하자면 기자님이 질문하신 것과 같은 데 대한 궁금증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도 동방박사들이 별자리로 예측했었다. 동방박사들은 별자리를 가지고 우주의 운행을 예측하는 과학자들이었습니다. 역술도 하늘의 별자리의 운행을 가지고 세상의 기운을 알아내는 일종의 천문학입니다.

김효 : 우리나라 국운은 어떻게 보십니까?

이철용 : 국운이라고요? 국운을 보려면 우리나라 사주를 뽑아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나이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단기로 쳐야 할까요, 서기로 쳐야 할까요? 요컨대 국운을 본다는 것 자체가 혹세무민이요, 어불성설인거죠. 나라의 운세를 예측하려면 현재 나타나는 사회적인 징후들을 보면서 판단해야지, 그런 현실을 도외시하고 운 타령을 한다는 것이 혹세무민입니다. 다만 육십갑자 중 무자년으로만 짚어 볼 수 있는 건데, 무자라는 건 무토, 흙과 자는 자수, 이게 계가 돼서 계수가 되는 거예요. 무와 계가 합하면 무계 합화, 벼락불이 일어나는 해이다. 불이 많이 난다, 뭐 이정도 얘기할 수 있겠죠.

김효 : 사주풀이에도 여러 가지 학파와 방법론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명리학이나, 당사주, 자미두수 등이 있다고 하던데요. 선생님은 어떤 학파의 것을 채택하십니까?

이철용 : 사주 공부를 제대로 한번 해 보았어요. 그런데 잘 안맞더라구요. 농경시대 때 만들어 놓은 것이 디지털 환경의 급변하는 사회에 맞을 리가 없죠. 그래서 제가 옛날 것을 토대로 통계를 도입해 제가 지금 새로운 체계를 만든겁니다. 환자, 장애인, 고위층 등 부류를 묶어 통계를 내서 보충을 하니까 이제 조금씩 맞는 것 같더라구요. 이거 하는데 머리에 쥐나더라고요. 오죽하면 내가 머리를 밀었겠어요. 그럼에도 100%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 연구를 하고 있는 중이죠. 지금으로서는 제가 계획하고 있는 공부의 약 70% 정도는 된 것 같은데, 마지막 100%를 채우려고 하는데 요즘 얼굴이 팔려서 진도를 못나가고 있어서 괴롭습니다.

김효 : 공부가 괴로워서 머리 깎으셨어요?

이철용 : 아니, 뭐 단지 그것만은 아니고, 새롭게 태어나 보자는 각오를 다짐하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김효 : 역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 선생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되었다는 기사를 어디서 보았는데요. 자신의 사주를 보면서 의문을 많이 푸셨습니까?

이철용 : 저에게 있어서 첫번째 의문은 장애의 문제였어요. 청소년 때는 장애만 아니면 춤꾼도 돼 보고 싶고, 가수도 돼 보고 싶었어요. 나는 운동신경이 굉장히 발달되어 있거든요. 운동선수가 그렇게 되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못됐죠, 그러니 그 심리적인 상처가 내 인생의 의문을 풀지 않으면 안되는 절실한 숙제를 남긴거예요. 그리고 특히 우리 어머니가 30에 홀로 되셨는데, 우리 어머니는 왜 과부가 되었을까, 몹시 의문스러웠어요. 그러던 중 국회의원 그만 두고 시간이 좀 되어서 한의학을 한 3년 하고 본격적으로 사주를 보는데(그 전에도 관심 갖고 관상이며 사주 공부를 조금씩 했었거든요) 무엇보다도 내 사주가 기본적으로 안맞는 거예요.

김효 : 무엇이 그렇게 안맞던가요?

이철용 : 아, 전혀 안 맞아요. 나는 장애인 될 사주가 없어요. 그리고 옛날 사주 식으로 보면 지금의 내 상황과 완전히 달라요. 그 식으로 보면 굉장히 잘나가야 되요, 사주로 보면 제 인생에는 평지풍파가 없어요. 하지만 제 인생은 장애인으로, 그 다음에는 감옥 갔다 오고 감옥에서 살아난 것이 기적일 정도의 모진 고문을 받는 등, 끊임없는 평지풍파였거든요. 그러면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내 문제를 가지고 계속 수업을 해 나갔죠. 무엇보다도 장애의 문제만 보더라도, 옛날과 비교해서 장애인이 될 수 있는 환경적 요인이 지금이 더 많거든요. 환경과 약물, 산업재해, 공해 문제 등. 우리나라 장애 인구가 480만명인데 그 중 90%가 후천적이거든요. 결국은 단순한 사주만이 아니라 사회학적인 인과론적 요소의 개입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제대로 된 사주풀이가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겁니다.

김효 : 결국은 선생님께서 창안하신 ‘제대로 된 사주풀이’, 아직은 70%의 완성도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100% 완성도를 갖추게 되면, 우리의 인생은 100% 예측가능해지는건가요?

이철용 : 아, 제가 한 말을 크게 오해하셨군요. 저의 역학은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운명론이 아니라 관리학입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상처(喪妻) 살이 있다 칩시다. 그러면 기존의 혹세무민하는 역술가들은 상처 할 팔자라고 재단해 버립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 그 사람이 아내를 잃게 될 수 있는 요인을 찾아내어 그것에 대비하게 합니다. 상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아내를 괴롭히는 성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얘기거든요.

예컨대 겉으로는 다 좋은데, 섹스 면에서 결함을 가지고 있다든지요. 예컨대 그럴 경우, 섹스력를 강화시키는 방법을 알려주고 안내해 주는 것을 역학의 소명으로 삼는 것입니다. 섹스력을 강화하려면 요가, 방중술 같은 것들을 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손쉬운 보양식으로만 해결하려는 게 문제입니다.


김효 : 예, 저도 섹스를 하면 엔돌핀이 나온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었어요.

이철용 : 엔돌핀이 아니라 다이돌핀입니다. 엔돌핀보다 5000 배 강력한 호르몬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천사의 호르몬’이라고 합니다. 다이돌핀은 초기 암도 치료한다는 것이죠. 다이돌핀은 웃을 때도 나옵니다.

김효 : 자위할 때도 다이돌핀은 나오는가요?

이철용 : 예 나옵니다.

김효 : 그러면 자위할 때 나오는 다이돌핀은 양성 섹스의 경우보다는 질적으로 약간 떨어집니까?

이철용 : 아닙니다. 가장 좋은 것은 음양이 조화하는 섹스이지만, 자위할 때도 그에 못지 않아요.

김효 : 그러면 성적 흥분을 할 때 다이돌핀이 나오는 것인가요?

이철용 : 예, 여성의 경우, 오르가즘을 느낄 때 다이돌핀이 나오는 거죠.

김효 : 섹스가 안되는 섹스리스 부부들은 자위하는데 주저해서는 안되겠군요.

이철용 : 흔히 사람들이 모이면 처음에는 정치 얘기로 시작해서 직장이나 가정사에 관한 신변잡기 얘기로 넘어가게 되고 결국은 음담패설로 끝나게 된다고 합니다. 섹스에 관한 흥미 진진한 얘기는 다음 편으로 남겨 둡시다.

김효 : 예, 빈민의 아들, ‘어둠의 자식’으로 태어나 밝은 세상을 열기 위해 평생 열정을 불사르신 선생님, 아직 절망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중생들에게 삶의 용기와 희망을 전파하는 희망의 전도사가 되신데 경외의 마음을 전합니다.

인터뷰를 한 김효 님은 프랑스 국립파리7대학에서 예술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본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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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5] - 진중권이 말한다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5] - 진중권이 말한다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 2003.11.14
 

매트릭스의 철학,무엇을 말했는가

철학하는 블록버스터의 철학하기

“어떤 인간이 사악한 과학자에게 수술을 받았다. 그 사람의 두뇌가 육체에서 분리되어 두뇌를 계속 살아 움직이게 해줄 영양분이 가득 담긴 통 속에 옮겨졌다. 신경조직은 그대로 초과학적 컴퓨터에 연결되어 (…) 모든 것이 완벽히 정상적인 듯이 보이는 환각을 일으키도록 한다고 하자. 사람들, 사물들, 하늘 등등이 모두 있어 보이지만 그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컴퓨터로부터 신경세포에 이어지는 전자자극의 결과다. (…) 그 사악한 과학자는 여러 가지로 프로그램을 변형시킴으로써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과학자가 원하는 어떠한 상황이나 상태일지라도 ‘경험’하도록 할 수 있다.”(힐러리 파트남, <이성, 진리, 역사>)

실재론과 관념론

<매트릭스> 1편에서 거대한 수조 속에서 배양되는 인간 클론들의 충격적인 영상을 보고, 곧바로 미국 철학자 파트남의 사유실험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 “과학적 공상”은 “외부세계의 존재에 관한 회의론이라는 고전적인 문제”를 새로이 제기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하나의 두뇌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지 그는 곧 이 운명을 전 인류에 지워 “모든 인간이 통 속에 들어 있는 두뇌라고 상상”하더니, 이어서 자기가 묻고자 했던 그 질문을 던진다. “정말로 우리가 통 속에 들어 있는 두뇌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가 말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가?”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 물음 자체가 모순, 즉 “스스로 논파하는 가정”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 내 견해를 묻는다면, 나 역시 파트남처럼 ‘아니오’라고 대답할 게다. 세계 속에서 특정 사물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있으나 세계 전체를 의심할 수는 없다. ‘의심’의 문법은 ‘믿음’이라는 낱말의 문법 위에 서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한다면 생각 또한 못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의심이라는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푸른 하늘과 빛나는 햇살, 새들의 지저귐과 들꽃의 아름다움을 맘껏 즐기라. 데카르트처럼 “방법적”으로만 회의를 하든, 아니면 그보다 더 진지하게 회의를 하든, 세계 전체를 회의하는 것은 철학적 난센스다.

팬텀과 매트릭스

‘매트릭스’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이는 미디어 철학자 귄터 안더스로 안다.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이 유대인 비평가는 잠깐 한나 아렌트의 남편 노릇도 했는데, 훗날 그의 아내는 “그의 대책없는 페시미즘(염세주의)이 견딜 수 없어서” 그와 헤어졌노라고 술회했다. 아내를 질리게 한 안더스의 비관주의는 대중매체가 만들어내는 미래에 대해서도 매우 우울한 전망을 내놓는다. 이 현대판 묵시론에는 인간이 만든 도구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통제능력 사이에 점점 벌어지는 ‘격차’(Diskrepanz)를 걱정하는 하이데거의 우려가 깔려 있다. 이 철학적 우려는 오래전부터 SF영화를 위한 풍부한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안더스에 따르면 대중매체는 새로운 존재층을 만들어낸다. 가령 안방의 텔레비전 속에서 쌍둥이빌딩이 실시간으로 불탈 때, 그 영상은 ‘가짜’ 하기도 뭐하고, ‘진짜’라 부를 수도 없다. 이렇게 가상도, 현실도 아닌 이 제3의 존재층을 안더스는 ‘팬텀’(환영)이라 부른다. 실제로 대중매체가 등장한 이래로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 관념적인 팬텀으로 변해가고 있다. 가령 미국에 가보지 못한 나의 머리 속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100% 사진이나 영화, 혹은 텔레비전 영상, 즉 내가 아닌 남이 본 영상들로 짜여져 있다.

‘팬텀’을 재료로 세계를 짜는 원리가 바로 ‘매트릭스’다. 철학자 칸트에게 시간과 공간이 주관의 선험적 형식인 것처럼, 대중매체는 세계를 세계로 제시할 때 ‘매트릭스’라는 선험적인 틀을 사용한다. 가령 <조선일보>를 생각해보라. 노무현 대통령이 말을 아끼면, “대통령, 꿀 먹은 벙어리인가”, 대통령이 말을 흐리면, “대통령 입장을 확실히 하라”, 대통령이 입장을 확실히 밝히면, “대통령, 입이 헤프다”. 이렇게 세계는 미리 짜여진 선험적인 틀에 따라 우리에게 제시된다.

사건은 원본의 형태로는 더이상 ‘사건’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보도라는 형태로 복제가 될 때 비로소 사건은 ‘사건’으로 인정받는다. 이렇게 모든 것이 원본이 아니라 외려 복제의 형태로서 사회적으로 더 중요해질 때, 현실은 팬텀과 매트릭스의 가상현실에 자리를 내주고 점차 사라져간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누가 짠 것인가? 이 세계는 과연 누구의 표상인가? 오래전에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나의 꿈이 너희의 표상이다.” 누굴까? 이 말을 한 매트릭스의 창조주는 히틀러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어디선가 주인공 네오는 해킹 프로그램을 감추려고 서가에서 책을 하나 꺼내든다. 영화의 원작자들이 성경처럼 여긴다고 하는 보드리야르의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다. ‘시뮬라크르’란 ‘원본보다 더 실재적인 복제’를, ‘시뮬라시옹’이란 그런 복제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가리킨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이 개념들이 실은 안더스의 ‘팬텀과 매트릭스’를 인터넷 버전으로 번안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원래 자기 사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에 대해 함구하는 게 철학자들의 못된 버릇인 모양이다.

‘가상’에는 늘 인식론적 문제가 따른다. 현실의 모습과 일치하면 그것은 ‘참’이요, 일치하지 않으면 ‘거짓’이다. ‘현실’이 아직 펄펄하게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조작은 개별적인 사실의 날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현실’의 개념 자체가 위험에 빠진 시대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조작은 개별 사실이 아니라 아예 세계 전체를 날조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조작은 ‘시뮬라시옹’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가상현실을 만들어 유지하는 거시적 규모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돌발사태와 저지전략

가령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자. 이는 예기치 못한 우연이 하마터면 깨끗한 이미지로 포장된 미국 정치의 추악함을 폭로할 뻔했다. 그러나 시뮬라시옹의 관리자들은 이 돌발사태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이 놀라운 조작의 비밀은 권력의 본질을 보여주는 필연적 사건을 한갓 우연적인 ‘스캔들’로 만들어 제시한 데에 있다. 더러운 것은 권력 자체가 아니라, 닉슨이라는 한 개인의 도덕성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이 사건은 외려 ‘대통령도 잘못 하면 처벌하는’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로 기억된다. 얼마나 완벽한가?

‘시뮬라시옹’을 관리하는 자들의 골칫거리는, 미리 입력하지 않은 돌발사태가 가상의 세계로 치고 들어와 현실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 현실이 자기 주장을 하면 가상의 가상성은 폭로된다. 관리자들은 이를 저지해야 한다. 1편의 시나리오는 이 ‘저지전략’의 포맷을 따른다. 저지되어야 할 ‘돌발사태’는 네오처럼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을 거스르는 자들. 이들은 제거되어야 할 ‘버그’다. ‘버그’는 프로그램의 작동을 멈춤으로써 그 속에 몰입해 있던 이를 돌연 바깥의 현실로 끄집어낸다. 버그를 잡아내는 프로그래머처럼 스미스 일당은 네오와 그의 친구들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기계들의 도시로 향하는 네오의 모습은 예수의 모습과 다름없다. 네오는 시온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전쟁이 끝난 뒤 모피어스는 전쟁의 끝을 선포한다. 이는 결국 <매트릭스>가 가진 기독교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결정론과 자유의지

이때만 해도 아직 가상과 현실의 구별이 존재했다. 선택은 기껏해야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하나를 고르는 문제였다. 인간을 구하려고 네오는 행복한 가상을 포기하고 현실의 비참함을 받아들인다. 2편에서는 이 선택마저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로써 1편의 소박한 ‘해방’의 서사는 흔들린다. 만약 네오의 선택마저 미리 입력된 것이라면? 그리하여 매트릭스 밖의 현실도 또 하나의 매트릭스라면? 이제 그것은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윤리학적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선택이란 걸 할 수 있느냐’의 존재론적 문제가 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것은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대립’이라는 고전적인 물음이다.

’라플라스의 악마.’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입자들의 위치와 운동량을 입력할 수 있는 무한한 용량의 두뇌. 이런 슈퍼컴퓨터가 있다면 우주의 진행을 남김없이 예측할 수 있으리라는 것. 그것이 근대 자연과학의 인식이상이었다. 이런 관념에 따르면 우연은 아직 인식되지 않은 필연일 뿐이며, 나의 자유의지는 내가 아직 의식하지 못하는 타인의 결정에 불과하다. 매트릭스의 창조주는 ‘라플라스의 악마’다. 2편에서는 이 악마를 대변하는 목소리들이 강박적으로 “자유의지란 피지배자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대사를 반복한다.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시온은 이미 다섯번 멸망했고, 네오 역시 여섯번 태어났다. 우주는 유전하고, 만물은 윤회한다. 안더스의 논문 제목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패러디한 것. 그가 말하는 ‘표상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사바세계’라 부른다. 니체의 ‘영겁회귀’에서도 불교적 기원을 추측할 수 있을 게다. 현각 스님의 해석에 따르면 불교에서는 “새로운 우주가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는 바, 석가모니는 “고해의 매트릭스인 이 우주에 나타난 여섯 번째 부처”라고 한다.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부처의 길이 어떤 의미에서는 ‘매트릭스 탈출하기’가 되는 셈이다.

매트릭스 벗기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네오를 보는 괴로움 속에서도 2편을 참아줄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철학적 충격을 강화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 충격은 매트릭스를 교란시키는 네오라는 ‘버그’마저도 매트릭스의 특정한 필요에 따라 미리 입력된 존재로 상정된 데에서 비롯된다. 1편의 철학적 패러다임은 가상과 현실의 구별 위에 서 있는 플라톤적 매트릭스다. 하지만 리로디드된 2편의 패러다임은 가상이 아닌 현실 자체도 하나의 매트릭스, 그것도 새로이 생성되어 소멸하기를 영원히 반복하는 니체적 매트릭스다.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매트릭스의 필연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는 것은 계산되지 않은 우연, 즉 믿음, 소망, 사랑 같은 비합리적 동인에서 비롯된 행위들이다. 2편에서 네오는 예정된 대로 시온을 구하러 가는 대신에 돌연 위험에 빠진 트리니티에게로 간다. 3편에서 네오는 스미스의 냉철한 합리성 앞에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설교하고, 또 그가 구원해줄 인류들은 네오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토로한다. 이 믿음은 그야말로 비합리적인 믿음, 즉 ‘근거가 없는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라는 중세적 믿음이다.

이 우발성의 개입에, 합리적 결정론의 화신 스미스는 히스테리 반응을 보인다. “내가 올 것을 미리 알았지? 그런데 왜 피하지 않은 거지?” 쿠키를 집어던지며, “내가 집어던질 것을 미리 알았지? 그런데 뭐 하러 구운 거야?” 하지만 스미스를 당혹하게 만든 이 돌발사태도 혹시 미리 예정된 게 아닐까? 결말 부분에 비슷한 질문이 반복된다. 매트릭스의 과학자가 오라클에게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지?”라고 묻자, 오라클은 가볍게 부정을 하며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띄운다. 이로써 대답은 슬쩍 유예된다.

종교와 철학

3편의 분위기는 철저하게 기독교적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전형적인 십자가 책형의 모티브를 따르고 있다. 네오는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 스미스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나 그에게 반기를 든 사탄의 역할을 한다. 네오와 스미스가 3편에 걸쳐 벌이는 결투는 마치 광야에서 벌어진 사탄과 예수의 세 차례의 대결을 연상시킨다. 몸에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을 극복한 예수처럼, 네오는 몸 속에 스미스를 받아들임으로써 스미스를 사라지게 한다. 순간 묵시록에서 예언한 아마겟돈의 결전은 멈추고, 네오의 사도 요한이 군중 앞에서 인류가 구원받았음을 외친다. 기쁜 소리, 복음이다. 할렐루야, 성령 충만한 은혜로운 시간이다.

성가족의 성스런 대화(웅덩이에 쓰러진 네오의 얼굴에서 언뜻 오라클을 본 것 같다. 제대로 본 것이라면 이는 수육(受肉)의 드라마, 즉 인류를 구원하러 인간의 몸이 되어 내려온 신의 얘기가 된다). 매트릭스의 창조주에게 오라클이 묻는다. “이제 저들을 어떻게 할 거죠?” “이제 저들에게도 자유를 줘야지.” 유일신교의 승리다. 이집트 당국은 다시 이 영화를 허용하라. 하지만 이렇게 끝낼 수는 없는 일. 창조주는 “이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 같냐”고 묻고, 거기에 오라클은 “가능한 한 오래”라고 대답한다. 이로써 이 평화가 궁극적인 것은 아님이 슬쩍 암시된다. 기독교사관의 직선은 다시 불교사관의 원환과 합류한다.

포스트모던

이 절충주의가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일반적 특징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온갖 철학과 온갖 종교에서 따온 인용들로 가득 차 있다. 이를 ‘혼성모방’이라고 하는데, ‘포스트모던’ 계열의 작품에 종종 사용되는 기법이다. 나아가 현대의 최첨단 기술이 신화나 신학 같은 고대적 모티브과 모순적 결합을 이룬다든지, 가장 대중적인 오락에 매우 난해한 지적 유희를 도입하여 대중과 엘리트를 가르는 구별을 내파(implosion)하는 것도 포스트모던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매트릭스 속의 ‘키치’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키치’는 포스트모던에 본질적으로 속한다.

끝없이 자기 복제를 하는 스미스는 자본주의의 이미지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유일물의 제작이 아니라 동일한 ‘코드’에 따라 수천, 수만개의 동일자를 복제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를 동일자를 무한복제하는 암세포에 비유한 바 있다. 상품만이 아니라 자본주의는 그것을 생산하는 인간들마저도 획일화한다. 현대사회는 인간들을 다양하게 획일적으로 만들고, 이 매트릭스 안의 인간 시뮬라크르들은 남이 정해준 인생의 목표에 따라 남의 삶을 살아가며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역사적 사명을 다하다가 죽는다. <매트릭스>는 이런 현대사회의 영화적 반영이다.

아이러니와 몽타주

벗어날 길은 없을까? 포스트모던은 계몽의 서사와 해방의 수사를 비웃는다. 영화 속에서도 매트릭스를 벗어나려는 네오와 그의 동료들의 노력은 스미스나 메로빈지언에게 비웃음만 사게 된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대중들은, 적어도 영화를 보러 온 순간만큼은, 아직도 구원의 복음과 그것의 세속적인 형태인 해방의 서사를 보고 싶어한다. 3편의 시나리오가 진부한 기독교적 대속의 서사로 귀결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리라.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던은 모던의 엘리트주의와 구별된다.

해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해방의 수사는 벌써 낡은 것이 되었다. 이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가끔 ‘매트릭스’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른바 ‘전투적 글쓰기’를 한다고 하나, 어쩌면 그 전투도 미리 체제의 프로그머에 의해 입력이 되어, 대중에게 값싼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줌으로써 이 현실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헛된 저항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해방의 뜨거운 열정과 순응의 차가운 지혜를 종합할 수는 없다. 영화의 결말처럼 다만 절충이 있을 뿐이다.

절충을 피하는 방법도 있다. 가령 네오가 스미스가 되고, 스미스가 네오가 되는 것처럼 ‘아이러니’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판 낭만주의자들의 방법이다. 아니면, 두개의 생각을 부싯돌처럼 충돌시켜 거기서 얻어지는 불꽃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몽타주 예술이리라. 구원은 구세주에 대한 믿음에 있는 게 아니다. 스스로 구세주가 되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 속의 대사처럼 구원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너 자신뿐이다. 하긴, 촌스런 구원의 수사학을 포기하고도 여전히 구원을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 아니겠는가?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5] - 진중권이 말한다 1/5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4] - 오시이 마모루가 말한다 2/5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3] - 듀나가 말한다 3/5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2] - 류승완이 말한다 4/5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1] 5/5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매트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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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와 다른 한국의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 논쟁을 자주적 사고의 계기로"
  [기고] 역사적 오류와 논쟁의 현실화
 
  2007-02-16 오후 3:16:51
 
   
 
 
  정성진 경상대 교수(경제학)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를 계기로 3주 가까이 트로츠키주의가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놓고 논란이 진행 중이다. 찬반 공방이 진행되는 가운데 불가피하게 국내외 트로츠키주의자의 현실 인식과 활동에 대한 평가도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논쟁과 관련해 모스크바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뒤 현재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사회학연구소의 박사 과정에 있는 정다신 씨가 논평을 보내왔다. 정 씨는 소련 몰락 후 공개된 볼셰비키 당시의 비밀문서 등 사료에 입각해 논쟁 과정에서 제기된 크론시타트 반란과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의존하는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시도했다.
  
  
특히 정 씨는 이 글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외국 이데올로그가 발행한 교재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발 딛고 선 곳에 대해 독립적이고 객관적이며 자주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라며 "과거 혁명가의 주장에서 취할 것은 취하되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은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 진정한 트로츠키주의자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편집자>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이러한 논쟁들을 접하면서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부분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단 몇 마디로 '다함께' 류의 역사 왜곡을 교정해 줄 능력이 있는 역사학자들이 그럴 필요조차 없다고 여겨서인지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이러한 논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함께가 '국제사회주의자(IS)'라는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던 시절, 그들은 그나마 학계에서는 유일하게 자신들의 이론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정성진에 대해 IS 그룹에 속해 활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입만 살아있는 지식인 분자'로 취급했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는 이토록 정성진을 옹호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바로 관념론의 소산이자 자신들의 지주 격인 국가자본주의론을 자신의 조직원도 아닌 이가 풍부하게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 분자의 입은 어느새 범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그 누구보다도 저들에게 힘을 실어 줄 이데올로그로 전화하여 칭송받게 됐다. 이번에 <프레시안>을 통해 제기된 논쟁에 이들이 이렇게 핏대를 세우게 된 이유도, 그 동안 타 정파나 집단들이 무시해 오던 다른 때와는 달리, 본격적이지는 않지만 다함께가 신주처럼 모시는 국가자본주의론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토니 클리프에 의해 발명된 국가자본주의론은 저들이 항상 자신들이 트로츠키 교조주의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애호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건, 자신들이 비판에 열려 있고 심지어 트로츠키주의 그 자체까지도 비판하는 융통성 있는 활동가들임을 보여 주려고 애용하는 부분은 철저하게 클리프와 그 계승자들인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교과서에 나온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누가 진정 역사를 왜곡하는가?
  
  이정구를 비롯한 다함께 그룹, 아니 저들이 암송하는 영국 SWP의 이데올로그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의 모든 혁명을 국가자본주의 혁명으로 만들기 위해, 유일무이한 노동자 혁명이었다는 러시아 혁명을 계속 왜곡해 왔다. 그러다 보니 그 과정에서 늘 혁명 계급이 노동자 계급인지, 또 '무슨 무슨 주의'에 오염된 이들인지가 강조돼 왔다.
  
  노동자 계급은 거의 예외 없이 볼셰비키를 지지했고 문맹에 가까운 농민을 비롯한 여타 계급은 철저하게 무슨 주의에 물들고 무슨 주의자들인 양 과장, 왜곡하는 나쁜 습관은 이런 왜곡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이 시기 러시아 혁명의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은 볼셰비키 지지 세력이고 농민을 비롯한 여타 계급은 철저하게 반 볼셰비키였다는 특유의 이분법 논리로 역사를 과장, 왜곡하는 일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이 이전 수병들과는 다른 농민 출신 신병들이 주가 되었던 것은 맞다. 그런데 이정구는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비밀문서 운운까지 하며 이 점을 무슨 엄청난 일인 양 하고 있다. 바로 그 비밀문서에 나와 있는 당시 노동자 계급 주도의 수많은 반 볼셰비키 파업, 반란 등에 대해서는 아예 침묵하고 말이다.
  
  페트로그라드에는 푸틸로프 공장 하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반도의 수십 배는 더 되는 러시아에 도시가 페트로그라드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페트로그라드에는 노동자 계급 중에 상대적으로 볼셰비키 지지 세력이 많았다. 그럼에도 심지어 최대의 볼셰비키 지지 기반인 푸틸로프 공장마저 잔혹한 전시 공산주의 기간 내내 반 볼셰비키 파업이 진행된 사실을 이정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인 이유를 주로 식량 부족에 있는 것으로 축소, 왜곡시키는 버릇도 영국 이데올로그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소비에트 선거에 대한 부분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서 박정희까지 빗댄 부분을 보며 이정구가 진정으로 노동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인지조차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크론시타트 반란은 일부 반 볼셰비키 세력에 철저하게 조종된 농민 출신 신출내기들의 반란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 당시 전국적으로 줄을 이었던 노동자 계급의 요구였다는 사실은 학계에서는 정설로 인정되었다. 당시 푸틸로프 공장은 친 볼셰비키 노동자들의 주도 하에 간신히 파업이 마무리되었지만, 그 외 수많은 페트로그라드 공장들에서의 파업은 이정구의 주장과는 달리, 크론시타트 반란 당시에도 이어졌었다.
  
  무엇보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 이 때 내전은 유럽, 러시아 지역에서는 거의 종결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을 아사 직전으로 몰고 가던 곡물 징발은 계속되었고, 볼셰비키가 주장했던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비롯한 민주주의 약속은 파괴되었다. 크론시타트 반란을 비롯한 일련의 파업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지극히 정당한 노동 대중들의 항의 행동이었다.
  
  지지하기 애매한 집단마저도 '비판적 지지' 운운하는 다함께가 감히 굶어 죽어 가는 생존권과 관련된 항의 행동을 억지로 노동자와 농민으로 나누어 한 쪽을 반동으로 몰 수 있는가? 이와 관련해 당시 여타의 공장에서의 파업과 시위에는 볼셰비키 지지 노동자들의 볼셰비키에 대한 항의 행동이 즐비했다는 것만은 꼭 알아 두기를 바란다.
  
  이정구가 정직한 활동가이고 진정한 유물론자라면 크론시타트 반란은 크론시타트에서만의 일부 농민 출신 수병의 반란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크론시타트 반란은 크론시타트 외의 전 러시아에서까지 벌어졌던 노동자 계급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반란은 정당했다. 진압 이후 볼셰비키가 전적으로 전시 공산주의를 폐지하고 수병들의 주장 중 중요한 부분인 농업과 가내 공업 등의 자유시장경제 요구 등의 맥락에서 시장 요소를 도입한 신경제 정책을 채택한 것은 이정구의 말과는 정반대로 그들의 요구가 옳았음을 증명해 준다. 농민뿐 아니라 노동자들 역시 볼셰비키에 대한 실망과 반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완전한 흑백 논리로 이 당시부터 소련 붕괴 때까지 지속되었던 크론시타트 반란에 대한 거짓을 그대로 인용하여 크론시타트 반란을 왜곡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이기는커녕 스탈린주의의 교조에서 한 발 자국도 못 벗어났음을 보여 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만약 크론시타트 반란의 주역들이 노동자 계급 출신이면 다함께 동지들은 또 무슨 이유를 댔을까? 혁명의 대의를 이해하지 못 한 후진 노동자들, 멘셰비키 영향 하 노동자들 뭐 이런 게 아니었을까?
  
  제발 현실로 돌아오라!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노동자의 군대화, 노동조합의 국가 기관화 등등 명백한 반사회주의적 조치들을 옹호하려거든 똑같은 맥락에서, 아니 맥락은 그만 두더라도 역사적 사실만이라도 알고 주장하기 바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영국 SWP와 같은 외국의 이데올로그가 발행한 교재가 아닌 사료들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며, 자신이 발 딛고 선 곳에 대해 독립적이고 객관적이며 자주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초를 갖는 것이다. 영국에서 내려 온 거 그냥 아무거나 무조건 외지 말고 사료를 근거로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영국 SWP의 이론은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가장 핵심적인 주장들과 거리가 멀다. 트로츠키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였다고 자평하는 클리프의 주장만 절대적으로 따르는 다함께에 그들이 좋아하는 '~주의'를 갖다 붙이자면, 트로츠키주의자라기보다는 클리프주의자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다. 하루라도 빨리 국가자본주의를 비롯한 관념론의 극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들을 클리프주의가 아니라 트로츠키주의라고 치장하는 데에도 조금 더 나을 듯 싶다.
  
  이재영이 틀린 건 단 한 가지다. 저들은 마르크스 훈고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트로츠키주의와도 별 상관이 없다. 그저 클리프 교과서를 암송하는 관념론 집단일 뿐이다. 이미 오래 전에 파산 선고를 받은 국가자본주의론은 그 자체로는 하나의 이론일지는 몰라도 현실 사회주의의 모습과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
  
  러시아에서의 70년은 우리가 그리던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지만, 자본주의와 닮은 점은 더욱 없었다는 점을 이 땅의 그 누구도 증명할 수 있다. 영국 SWP에서 소련 붕괴 직후 파견한 전문가들조차 소련 땅에 발을 디딘 직후 현실과 맞지 않는 자신들의 관념론을 뼈저리게 깨닫고 자기비판하고 다른 트로츠키주의 조직의 조직원으로 전환하였고, 지금까지도 유독 이들만이 최소한의 뿌리조차 내리지 못 하고 있다. 그 이유를 정녕 모르겠는가?
  
  이정구를 비롯한 다함께는 이번처럼 공개적으로 논쟁에 나서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이번 논쟁이 더욱 많은 활동가들, 연구자들로 하여금 국가자본주의론과 그를 뒷받침하는 역사 왜곡 등에 반박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투쟁에 헌신하는 이들은 많다. 문제는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사회주의가 무엇인지조차 헷갈리는 이들이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투쟁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이다. 혁명을 외친다고 해서 운동권적 도덕률에 있어서 우위를 점한다는 착각해도 되는 시대는 지났다. 소련 체제를 지키고자 했던 트로츠키조차 저들의 논리에 의하면, 그저 오류 정도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를 옹호하고자 하는 반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자신들이 트로츠키주의자라고 그의 이름을 빌려서 그나마 '오류' 정도로 완곡하게 표현할 뿐, 사회민주주의보다 훨씬 날선 용어로 비판했을 것은 자명하다.
  
  다함께가 진정한 변혁 운동가 집단이라면 과거 혁명가들의 사상과 주장에서 취할 것은 취하되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진정성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그들 자신을 진정한 트로츠키주의주의자로 거듭나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다신/러시아 과학아카데미사회학연구소 연구원
 
 
 
 
"낡은 '사민주의' 비행기로는 절대로 날 수 없어" 2007-02-12
"무엇이 혁명을 배반케 하나…훈고학은 이제 그만" 2007-02-06
"지금 '역사의 먼지' 속으로 사라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2007-02-05
"무조건 '재'부터 뿌려놓고 보자는 심사인가?" 2007-01-31
"트로츠키주의가 죽어야 트로츠키가 산다" 2007-01-29

 

트로츠키와 다른 한국의 ‘트로츠키주의’
[새책]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눈에 거슬리는 과장들"
 
 
 

책읽기는 즐거워도 책에 대한 글쓰기는 즐겁지 않다. 글쓰기를 작정하고 책을 드는 순간부터 책읽기가 숙제가 되어 버리니, 소란스런 지하철이나 쾌적한 화장실에서 가끔 책 꺼내 보는 소소한 재미는 사라지고, 책상 위에 책 펴두고 밑줄 긋는 고역이 시작된다.

더군다나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같이 두툼하고 묵직한 책은 족히 반 년 거리인데, 출판사 영업팀이나 언론 편집자의 시간 관념이 그런 ‘장구한 세월’을 용납할 리도 만무하다. 그래서 이 글은 어쩔 수 없이, ‘서평’이 아닌 ‘책소개’다.

경상대 경제학과에 정성진 교수가 내놓은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첫째 가는 장점은 그 필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점이다.

   
 
한국에 트로츠키주의를 소개한 이들은 크리스 하먼, 토니 클리프, 알렉스 캘리니코스 같이 영국 사람들이었는데, 트로츠키가 영국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아는 ‘교양인’이라 할지라도,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들의 눈으로 번역된 트로츠키보다는 한국 사람이 쓴 트로츠키가 훨씬 손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에게는 나름의 특수성이 있어 마땅하므로 정성진의 책은 공간적 시간적 번역을 해야 하는 독자의 수고로움을 덜어 준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트로츠키』가 한국 경제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적 해석은 아니다. 부지런한 독자라면, 정성진이 ‘영구군비경제론’이나 ‘장기파동론’이라는 방법틀을 이용해 한국 경제를 분석한 『마르크스와 한국경제(책갈피, 2005)』를 이미 읽어 보았을 것이고,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여러 가지 주의(主義)를 다루고 있는 이 책,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를 먼저 읽은 후에 그 책을 보는 것이 더 좋을 듯 하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1부에서 3부까지는, 요즘은 찾아 보기 힘든 경제사상사 책 삼아 읽어도 훌륭하다. 정성진은, 리카르도, 제2인터내셔널의 이론가들, 레닌, 포스트모너니즘과 알튀세르,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브레너의 세계경제위기론, 네그리의 『제국』, 그리고 신정완, 이병천, 장상환 같은 ‘케인즈주의’ 학자들에 비판의 칼날을 겨눈다. 19세기 초 이래 정치사회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됐던 경제이론을 일별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은 대학 학부 수준에서 정치경제학 기초를 이수한 분들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쟁점들을 공부하는 ‘고급 정치경제학’ 과정이나, 대학원 수준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과정의 교재로도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머리말).”

4부는 트로츠키의 사상에 대한 소개인데, 물론 ‘트로츠키주의’의 눈으로 해석된 트로츠키 사상이다. 이를 위해 정성진은,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해에 태어나 2000년에 사망한 토니 클리프의 생애를 되짚으며, 트로츠키를 추종하는 사람들 사이의 분열과 투쟁을 통해 ‘트로츠키주의’를 도출해낸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15장 ‘21세기 사회주의와 참여계획경제를 위하여’에서는 계산 가능성, 기술 혁신 문제 등을 다루며 사회주의 대안 경제의 원칙을 제시한다.

정성진의 책에는 눈에 거슬리는 과장이 적지 않다. “요즘 세계 진보 진영의 화두는 …… 차베스가 제창한 21세기 사회주의”라거나 그로 인해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다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11장)”는 언급은 ‘국제사회주의자들(IS)’끼리의 유행인지는 몰라도, 내가 알고 있는 ‘세계 진보 진영’에서는 과히 그렇지 않다.

“스탈린주의는 청산되기는커녕 알튀세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민주주의, 시장사회주의, 자율주의 등 ‘포스트스탈린주의’ 경향으로 변이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진보 학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머리말)”는 인식도 과장스럽다.

그런 조류들이 스탈린주의 흥망성쇠와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내게 24시간쯤의 시간만 주어져도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시장사회주의 같은 온갖 조류들과 트로츠키 이론의 연관성도 능히 증명해낼 수 있다. 비판의 대상이 스스로 무슨 주의라거나 무슨 주의가 아니라는 관념에 묶여 있지 않는 한, 무슨 주의라는 낙인은 요즘 시류에서는 비판 논거로 별 쓸모가 없을 듯하다.

여러 진보적 사회운동에 간여하고 있는 진보학자들이 거시적 변혁 전망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정성진의 비판은 타당하다. 민주노동당의 대표적 이론가인 장상환 교수(경상대 경제학과, 진보정치연구소장)는 “규모가 크고 복잡한 경제에서는 계획의 한계가 명확하다. 정확한 정보 수집의 불가능과 동기 유발의 어려움, 개인의 개성적 발전의 저해 등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한국경제의 위기와 민주노동당의 대안」, 2005)”라며, 전통적 시각을 고수하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정보화의 핵심인 네트워크 경제의 발전에 따라 아래로부터 참여 계획의 실행 가능성이 20세기보다 오히려 더 높아졌다(11장)”라거나, “가령 모든 기업의 재무제표를 웹사이트에 공개하는 것을 의무화한다면, 구글과 같은 검색엔진을 통해 이를 수집 분석하여 전국적 및 전세계적 규모에서 생산과 투자를 계획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15장)”는 정성진의 주장도 장상환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를 계산 가능성으로 치환한 것은 아닌가?

트로츠키뿐 아니라, 혁명적이든 개량적이든 모든 사회주의자들은 계산 가능성 같은 행정적 요소가 아니라, 사회주의적 경제 제도의 지배적 지위에서 나타나는 자연사적 경제운동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권능을 사회주의의 요체라고 보지 않았는가?

스탈린주의가 트로츠키를 곡해한 것처럼, ‘트로츠키주의’ 역시 읽고 싶은 트로츠키만을 읽는다. 정성진은 후기 레닌을 ‘경제주의로의 후퇴’라며, 레닌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론’과 신경제정책을 예로 든다(4장). 그런데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하에서는 - 오로지 그 밑에서만! - 민주적 문제의 사회주의적 문제로의 성장이행이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러시아혁명사」, 1932)”며 긍정한다.

정성진은, 신경제정책이 “진지하게 장기간에 걸쳐 실시될 것”이라는 레닌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인용한다. 그런데 트로츠키도 “퇴각이되 항복은 아니(「신경제정책과 세계혁명의 전망에 대한 보고」, 1922)”라며 신경제정책을 과도단계로 인정하고, 그 과도기가 “한 세기 또는 반 세기 동안(「코민테른 강령초안 - 기초 비판」, 1928)” 계속되리라는 예측도 제시한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실천적 문제의식에서 신경제정책은 ‘과도단계, 시장요소, 유럽혁명과의 관계’로 동일하게 존재했었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트로츠키주의’와 다르다.

정선진의 책은 그가 비판하는 ‘스탈린주의 교과서’의 문법을 따른다.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배분할 수 있다 ……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신속할 수 있다 ……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귀결될 것이다(15장).” 트로츠키주의 경제이론대로 따르면 다 해결되고, 잘 될 것이다!?

이 인용문의 ‘트로츠키’를 ‘스탈린’으로만 바꾸면 국가사회주의체제론의 자동 해결론과 본원적 우월론에 완벽하게 일치한다. 매사가 그리 잘 풀린다면야 뭔 걱정이 있겠는가?

“트로츠키가 추구한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경제학비판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의 방법과 마르크스주의 역사를 복원하고, 이에 기초하여 최근 우리나라 진보 진영의 지배적 경향들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머리말).”

그래서인지 정성진은 이 책의 초교지를 ‘다함께’에 보내 조언을 구했다. 나는 ‘다함께’가 트로츠키의 주장을 잘 실천하고 있는지 의문스러울 때가 많다. 그들이 트로츠키를 잘 알고 자주 인용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주체사상파와 어울려 논다는 추문이 ‘트로츠키주의’의 반스탈린주의 투쟁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자유게시판도 없는 ‘다함께’의 독특하고 해괴한 문화가 어떤 식으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인지를 모르겠다.

레닌이나 스탈린보다 ‘아래로부터’를 더 많이 강조한 트로츠키는 크론슈타트 반란과 노동자 파업의 파괴자이기도 하다. 또,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트로츠키는 노동조합과 평의회의 자율성에 반하는 결정과 실천을 했다. 내가 굳이 트로츠키의 과거를 끄집어내는 것은 걸출한 혁명가였던 그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트로츠키주의’ 교과서의 문구들을 신봉하는 것보다는 트로츠키의 실천적 굴절을 연구하는 것이 트로츠키가 꿈꾸었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살려내는 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이 글은  <프레시안>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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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서평 반론] "너스레보다 정독이 중요하다"
 
 
 

정성진 교수의 책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쓴 이재영 씨의 글은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문제의식을 포착하지 못했다. 그는 그 동안 스탈린주의(NL과 PD)와 각종 포스트스탈린주의(포스트모더니즘, 자율주의, 케인스주의 등)에 맞서 트로츠키를 지렛대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전통을 새로운 대안으로 구체화하려는 정 교수의 노력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물론 정 교수의 문제의식과 논의 과정, 그리고 잠정적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정 교수의 노력에 대한 객관적 평가 정도는 할 수 있을 법한데, 이재영 씨가 찾아낸 이 책의 장점이라곤 “한국 사람이 쓴 트로츠키에 대한 책”, 혹은 엉뚱하게도 “요즘은 찾아 보기 힘든 경제사상사 책”이라는 것뿐이다. 그런 다음 이재영 씨는 “서평이 아닌 책 소개”를 하겠다는 자신의 말을 어기고, 정 교수와 그가 지지하는 ‘다함께’를 “트로츠키와 다른 한국의 트로츠키주의”라며 비난하는 것으로 지면을 채웠다.

이재영 씨는 “정성진의 책에는 눈에 거슬리는 과장이 적지 않다”며 먼저 “요즘 세계 진보진영의 화두는 (…) 21세기 사회주의”라거나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다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다함께’나 정 교수와 같은 “국제사회주의자들(IS) 끼리의 유행”일 뿐이라고 치부한다.

하지만, 1991년 소련, 동유럽 붕괴 이후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자본주의 이외 대안 부재론’(TINA)이 득세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듯했던 ‘마르크스의 유령’이 지난 1997~98년 세계경제 위기와 함께 다시 살아나면서 ‘마르크스로 돌아가자’(Return to Marx)가 지난 세기말 “세계 진보진영의 화두”였음은 이재영 씨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1999년 시애틀 전투 이후 반신자유주의 대안세계화 운동, 그리고 21세기 들어 반전 반제국주의 운동이 고양되고 라틴아메리카에서 차베스를 비롯한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마르크스로 돌아가자’에서 더 나아가 ‘21세기 사회주의’가 요즘 세계 진보진영의 화두로 되고 있음은 마르크스와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인터넷을 조금만 서핑해도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21세기 사회주의’를 제창하고 있는 차베스의 인기가 전세계적으로 높은 사실에서 뿐만 아니라, 올 가을 예정된 ‘제5차 국제마르크스대회’(Congress Marx International V)의 대회주제가 ‘대안 세계화/반자본주의’이고, 우리나라 좌파 논객들의 대표적 연합체인 ‘맑스코뮤날레’의 올해 대회주제 역시 ‘21세기 자본주의와 대안 세계화’인 데서 알 수 있다.

게다가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2006.12.28)나 <중앙일보>(2007.1.4) 같은 대표적인 국내외 보수 언론들조차 세계화의 진전과 함께 마르크스주의, 특히 트로츠키주의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도한 데서 알 수 있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옛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민주노동당이 등장했다. 물론 '민주적 사회주의'의 내용에 대한 이해는 저마다 다르지만, 한국 사회의 대안 사회 모델 중의 하나로 사회주의가 거론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이재영 씨는 정 교수가 “~주의”라고 낙인을 찍는다고 힐난하지만 정 교수의 책, 특히 제3부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자원들’을 조금만 훑어보아도 정 교수가 자신과 다른 이론적 정치적 입장들에 대해 풍부한 논거에 입각한 논리적 비판을 하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재영 씨가 계획경제의 불가능성을 반박하는 정 교수의 주장을 1930년대의 사회주의 계산 논쟁과 비교하고 더 나아가 이와는 무관한 1921년의 신경제정책과 연결시키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다.

그러나 정 교수는 이재영 씨가 주장하듯이 “사회주의를 계산 가능성으로 치환”하고 있지 않다. 정 교수는 오늘날처럼 고도로 발달한 복잡한 현대 경제에서는 시장 없이는 계산이 불가능하다며 시장 폐지(즉, 사회주의)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자본주의 이외 대안 부재론’을 논박하기 위해 시장의 매개 없이도 참여계획경제 방식으로 계산과 경제의 조절이 가능함을 보였을 뿐이다.

또,이재영 씨는 레닌과 트로츠키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신경제정책을 정 교수가 경제주의라고 비판한 것을 거론하며, 트로츠키 자신과 정 교수의 트로츠키주의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1920년대 소련의 신경제정책과 관련하여 정 교수가 문제삼은 것은, 이 책 14장에서 보듯이, 신경제정책의 시장사회주의론적(부하린) 혹은 일국사회주의론적(스탈린) 정당화였으며, 당시 혁명의 고립과 노동자계급의 해체의 조건에서 신경제정책과 같은 전술적 후퇴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또,이재영 씨는 “레닌이나 스탈린보다 ‘아래로부터’를 더 많이 강조한 트로츠키는 1921년 크론슈타트 반란의 파괴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 당시 트로츠키는 우랄산맥 지방에 출타 중이었고, 그곳에서 곧바로 모스크바로 가서 제10차 당대회에 참가했다. 진압 책임자는 서부전선 담당 적군 사령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였다.

1917년 10월 혁명 당시 혁명의 최정예 부대였던 크론슈타트 수병과 1921년의 수병은 계급 구성이 달랐다. 페트로그라드의 공업 노동자들과 가장 선진적인 농민들로 이루어진 1917년의 수병들은 내전 동안 혁명을 방어하며 전투를 이끌었기 때문에 대부분 죽거나 부상당했다. 반면 1921년의 수병은 새로 징집된 농민 신병들이었다.

1921년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은 반혁명 위협이 사라진 뒤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소비에트 내에서 볼셰비키를 제거하자고 주장하는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요구는 반혁명 세력의 복귀를 부르는 신호나 다름없었기에, 볼셰비키가 이를 들어줄 수는 없었다. 더욱이 백군과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계급들은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반란을 반혁명의 발판으로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을 진압한 것은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비극적 결정이었고 불가피한 폭력이었다.

이재영 씨의 논법은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 맥락에서 떼어내 그 자체로만 파악하고 논의해야 한다는 역사적 추상주의의 전형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사람이 죽은 뒤 앙상한 뼈만 남은 것을 두고 '같은 뼈조각이니 사람과 원숭이가 같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트로츠키에게도 약점과 실수가 있었고 또 1956년 헝가리혁명에 대한 소련의 진압을 옹호하거나 1989년 톈안먼 항쟁을 진압한 중국 지배자들을 옹호한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국제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 자기해방이라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정수를 보존하고 후대 사회변혁 운동가들에게 전수하려 한다는 점에서 트로츠키와 정 교수는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한편, 이재영 씨는 ‘다함께’가 “주체사상파와 어울려 논다는 추문” 운운하며, ‘다함께’가 “트로츠키의 주장을 잘 실천하고 있는지 의문스러울 때가 많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함께’가 북한을 사회주의가 아닌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는 사실과 북한 지배자들의 억압에 반대하고 탈북자들을 환영한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남한의 범자민통 동지들은 대체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고 피착취·피억압 대중의 민주적 권리를 옹호하며 사회 변화를 위해 투쟁하는 우리 운동의 일부다. ‘다함께’가 이들의 전략과 사상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이들과 함께 연대해서 투쟁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다함께’는, 이재영 씨의 주장과 달리, 트로츠키가 말한 공동전선 정신에 부합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이재영 씨는 또 “자유게시판도 없는 ‘다함께’의 독특하고 해괴한 문화” 운운하며 ‘다함께’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실천하지 않는 것처럼 몰아갔다. 그러나 자유게시판이 없는 것이 ‘다함께’만의 “해괴한” 특징인가? 또,자유게시판이 없다는 것이 ‘다함께’와 그 정치적 청중 사이의 관계가 민주적이지 않다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자유게시판이 있는 그 수많은 단체와 기관들이 과연 ‘다함께’보다 민주적인가?  ‘다함께’ 홈페이지에는 대표 연락처와 메일 주소가 있고, ‘다함께’의 주장과 그 청중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맞불>을 발간하고 있다.

오히려,정치 사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쑥덕공론을 펼치거나 지지하고 연대해야 할 운동을 그 지도 세력의 정치사상을 핑계되며 지지하지 않는 종파주의가 진정한 문제가 아닐까?

물론 진보진영 내부에도 다양한 차이들, 상충되는 정치적 노선들이 존재하며, 이들 간의 비판과 토론은 역사의 진보를 앞당기는 것으로 존중되고 고무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가 입장이야 어떻든 우리나라 진보 학계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정말 오랜 만에 나온 역작임은 이재영 씨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재영 씨는 자신이 지지하지도 않는 트로츠키의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척하며 너스레를 떨 것이 아니라, 최소한 “24 시간 쯤”은 투자해서 책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우선순위였을 것이다.

그런 다음 자신이 속한 사회민주주의 혹은 케인스주의의 입장에서 '다함께'에 대해서든 정 교수에 대해서든 인식과 대안에서의 차이와 논리적 비판을 분명하게 제기했더라면, 21세기 우리나라 진보의 대안 모색을 위한 토론의 발전에 약간이라도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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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1월 29일 (월) 14:06:38 이재영 기획위원

누가 역사를 날조하는가?
[트로츠키 논쟁] 추락할 것이 뻔한 고물 비행기에 동승하라니
 
 
 

이재영 씨(이하 존칭 생략)는 내가 “악질적인 역사 날조”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한다. 누가 그런지 크론슈타트 반란 문제부터 살펴보자.

1921년 크론슈타트 반란과 그 진압은 우익과 자유주의자, 이재영을 비롯한 온갖 사회민주주의 경향은 물론 일부 아나키스트들이 애호하는 쟁점이다. 이 사건이 볼셰비키가 자기 자신의 지지자들을 공격한 대표적 사례이자 러시아 혁명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레닌, 트로츠키 정치와 스탈린 공포정치의 연속성 명제를 가장 잘 뒷받침해 주는 호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재영은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이 ‘농민 신병’이라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단정한다. 그런데 내가 크론슈타트 반란자들 대부분이 ‘농민 신병’이라고 말한 것은 실은 크론슈타트 반란 연구의 고전인 <1921년 크론슈타트>의 저자이자 반란군에 호의적인 아나키스트 역사가 폴 아브리치 저작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비밀 문서들은 이 통설의 타당성을 입증하고 있다.

또, 이재영은 크론슈타트 반란 직전인 “2월 페트로그라드에서는 푸틸로프 공장을 비롯한 노동자 파업이 줄을 이었고,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은 파업 노동자들과 연계하며 그들의 요구 사항을 봉기에 내걸었다”고 주장하면서 크론슈타트 반란을 마치 ‘제3의 노동자 혁명’처럼 미화하는데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아브리치에 따르면, 크론슈타트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페트로그라드의 파업은 마무리되고 있었고, 노동자들은 반란을 지지하기는커녕 반란 진압에 동조했다. 최근 공개된 러시아 문서들도 크론슈타트 기지의 노동자들이 반란에 반대하는 파업을 벌인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사실, 내전 말기에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인 것은 주로 식량 부족 때문이었는데, 이들이 식량 배급을 더욱 악화시킬 게 뻔한 ‘곡물 징발 중단’을 요구했던 크론슈타트 반란을 지지할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 1921년 크론스타트 반란 당시의 자료사진 
 
이와 관련해, 이재영은 당시 “‘노동자 반대파’들이 트로츠키를 짜르 시대 반동 장군이었던 트레포프에 견주어 비아냥댔”다면서, 그 증거로 바로 그 문장 다음에 “총알을 아끼지 말라” 운운한 <크론슈타트에 관한 진실>을 인용한다. 그런데 이재영은 그 인용문을 쓴 것은 ‘노동자 반대파’가 아니라 크론슈타트 반란 지도부인 ‘임시군사혁명위원회’인 것 정도는 알고나 인용했어야 했다.

또, 이재영은 자신이 크론슈타트 반란군과 함께 노동자 민주주의의 구현체로 애지중지하는 ‘노동자 반대파’조차 크론슈타트 반란 사태가 터지자 당시 10차 당대회에 참석했던 ‘좌익공산주의’ 등 다른 반대파들과 함께 투하체프스키의 진압 부대에 자원 입대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다.

이재영은 또,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이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를 주장했다”는 내 주장도 “거짓”이며 “악질적인 역사 날조”라고 공격한다. 하지만 볼셰비키와 공산당에 호의적일 리 만무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반란군이 “경제 개혁 이외에도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와 … 공산당 독재의 종식 … 등을 요구했다”고 서술한다. 실제로, 반란군은 군대, 공장 등에서 볼셰비키 기구들을 폐지하라고 요구했고, 당시 크론슈타트 함대에 있던 볼셰비키 정치위원 등 수백 명을 체포 구금했다.

물론 반란군이 내건 15개 강령에 “소비에트 선거”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 반란군들이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어떤 초짜 운동가도 어떤 조직이나 운동의 정치적 성격을 그들이 내건 슬로건만을 갖고 판단하지 않는다. 진지한 역사가는 박정희와 공화당이 “한국적 민주주의” 기치를 내걸었다고 해서 그들을 민주주의자라고 보지 않는다.

크론슈타트 반란은 다름 아닌 그 크론슈타트 기지의 노동자들조차 반대했던 반란이고, 1920년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에 맞서 당시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가장 강력하게 옹호했던 ‘노동자 반대파’까지 무력 진압에 동참한 반란이다. 그런데 그 반란을 도대체 무슨 근거로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향한 ‘제3의 노동자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재영의 주장처럼 크론슈타트 반란군이 “자유로운 소비에트 선거”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요구하고 실현하려 했다면, 도대체 왜 서방 제국주의 열강들, 로마노프 왕조의 복귀를 노리는 러시아 왕당파들, 자본가들의 자유주의 정당인 입헌민주당,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등이 모두 크론슈타트 반란을 지지했을까? 그들이 언제부터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지지자들이 된 것일까?

이재영의 주장은 이처럼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 따로 떼어내 그 자체로만 파악하려는 역사적 추상주의의 발로이다. 예컨대 이재영은 내전 시기 트로츠키가 제기했던 노동자의 군대화나 노동조합의 국가기관화 주장과 관련해 이 주장들이 제기된 역사적 맥락은 고려하지 않고, 당시 출판된 트로츠키의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의 구절(트로츠키 자신은 곧 자기비판을 하며 이 주장을 철회했다)을 인용하면서 마치 트로츠키가 내내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부정”한 사람인 양 암시한다.

비판 대상에 대한 무지

이재영은 트로츠키가 1920년대 스탈린주의 관료에 맞서 당내 민주주의,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부활을 위해 투쟁하고 1936년 <배반당한 혁명>에서는 다당제를 주장한 사실(이는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 잘 서술되어 있다)은 피해 간다.

‘다함께’는 물론 정성진도 트로츠키 사상의 적잖은 부분에 대해, 또 다양한 정설파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해 비판을 제기할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입지하고 있는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이론과 정치에 대해서도 중요한 쟁점들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재영은 이 역시 전혀 “보지 않는다”. 이재영의 억측과는 반대로 “흠집 없는 권위로의 도피”만큼 ‘다함께’의 정치와 거리가 먼 것은 없다.

‘다함께’는 이재영이 주장하듯이 우리와 다른 정치적 입장들에 대해 “트로츠키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결코 매도하지 않는다. 예컨대 정성진은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그가 21세기 사회주의의 대안 구상을 위해 중요한 자원으로 고려하는 참여계획경제의 세 가지 모델(‘파레콘’, ‘협상조절’, ‘노동시간 모델’)이 모두 트로츠키주의에 대해 적대적임에도 그들로부터 배울 것은 배운다.

또, 같은 책에서 정성진은 때로 ‘다함께’보다 더 나아가,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의 이론적 발전을 위해 심지어 알튀세르주의자들로부터도 수용할 것은 수용한다.

정성진과 ‘다함께’는 북한의 사회 체제를 노동자 권력과 혁명으로 타도되어야 할 국가자본주의적 착취․억압 체제로 규정하지만, 남한의 주사파가 북한 체제를 지지한다고 해서 이들을 이재영처럼 하나의 적으로 대하는 종파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이들이 반신자유주의, 반제국주의, 반전 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한 이들과도 연대한다.

이재영은 “‘다함께’ 같은 자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한 망명객 시절의 언행에 더욱 주목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성진은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트로츠키 사상의 정수는 1906년에 발표한 영구혁명론에 있는가 하면, “망명객 시절”, 즉 1930년대의 “언행” 중에도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국가’론이나 섣부른 제4인터내셔널 창건과 같은 오류들이 적잖이 있다고 지적한다. 물론 반나치 공동전선의 필요성에 대한 글이나 프랑스, 스페인 인민전선 비판에 대한 글은 실로 탁월하다.

이재영은 “스탈린주의라 불리는 체제의 이론적 기초와 정치적 토대의 상당 부분은 트로츠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라는 자유주의자들과 일부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을 반복한다. 그런데 정성진이 각종 자료와 논거를 동원해서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이와 같은 종류의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마르크스-레닌-룩셈부르크-트로츠키)과 스탈린주의 간의 연속성 명제이다.

1989~91년 붕괴된 소련권 사회의 실체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변형인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일 뿐임을 논증하는 작업은 정성진의 책이나 ‘다함께’의 이론적 작업의 핵심적 부분인데, 이재영은 이에 대해 완전한 노코멘트이다. 그러고는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실패를 이유로 “실존하는 구체에서 검증되지 않은 추상으로 내려 앉았”다고 주장한다.

정성진이 옛 소련의 국가자본주의적 본질을 논증하려는 시도, 그리고 이를 매개로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스탈린주의 간의 질적 단절을 논증하려는 시도, 그리고 이를 기초로 21세기 조건에서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창조적 발전과 한국적 착근을 모색하는 것에 대해 사회민주주의자인 이재영은 물론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왜 어떤 점에서 동의하지 않는지를 논리적으로 근거를 대며 지적해야지, 이런 시도와 모색이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애써 간과하며 논쟁을 원점으로 되돌려서는 우리 진보 진영의 이론과 정치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분파주의

한편, 이재영이 ‘다함께’와 범자민통의 “야합” 또는 “연대” 운운하면서, ‘다함께’가 당당하다면 “‘주사파와 어울려 논다’는 지적에 그저 ‘그렇다’ 라고만 답하면 되는 것”이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이재영이 인용했듯이, 나는 지난번 글에서 ‘다함께’가 범자민통 동지들과 “함께 연대해서 투쟁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광범한 대중운동을 건설하려면 자신과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람들과도 기꺼이 함께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야합’이라면 ‘다함께’는 ‘야합’을 결코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분파주의에 눈이 멀어 연대와 투쟁의 대의를 종파적으로 외면하는 것은 ‘다함께’의 정치와 거리가 멀다. 게다가 ‘다함께’는 민주노동당 선거에서 범PD 계열일지라도 지난해 하반기 이래 최대 쟁점인 북핵과 일심회 사건과 사회연대전략 문제에서 우리가 보기에 올바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면 그를 지지했고, 민주노총과 현 금속선거에서는 NL계열이 아니라 노힘 등 옛 PD계열 내 좌파를 지지하고 있다.

이재영이 ‘다함께’의 정치를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는 “마르크스 훈고학”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것이다. ‘다함께’ 신문이나 홈페이지(www.alltogether.or.kr)를 잠깐 둘러보아도 ‘다함께’가 “마르크스 훈고학”자들이기는커녕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인 정세 분석과 반전․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투쟁에 헌신하는 투사들임을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재영 자신이 경멸해마지 않는 “마르크스 훈고학”도 이재영처럼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척하면서도 역사와 사상을 그 전체 역사적 맥락 및 진화 과정 속에서 판단하지 못하고, 뻔히 보이는 것조차 보지 않고, 자기 맘에 드는 것만 골라 보고, 그것도 멋대로 날조해서 진보를 호도하는 사람들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때로 유용하다.

사회민주주의적 본질

이재영은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지평에서 이륙을 위한 가속을 시작해야 한다. … 우리의 이륙이 성공했을 때 그 비행기에 어떤 이름이 새겨질지를 알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재영의 문제의식을 추적하다 보면 이재영이 타고 있는 ‘비행기’의 이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재영은 “지난 150여 년을 거슬러 반추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했지만,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이 비행기의 이름은 분명히 사회민주주의다.

이는 이재영이 민주노동당의 집권이 “겨우 한두 걸음을 내딛는 것이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의 대장정이 아니다”라거나, 국유화 계획을 “앞으로 오랫동안 가질 필요도 없다”는 말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낡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자”며 이재영이 제시한 것은 전혀 새롭지 않은 사회민주주의행 비행기 티켓이다.

그러기에 이재영에게는 “요즘 세계 진보 진영의 화두”로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다시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는 정성진의 지적이 “현실과 동떨어진 상황 파악”처럼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이재영은 글 끝 부분에서 “무엇이 혁명을 배반케 했는가?”하고 자문하고 그 답은 “세상에 대한 무지, 무엇보다도 자신의 무지에 대한 무지”라고 주장하고, “우리는 사회혁명을 이룰 정보와 지식, 확신과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의 어림과 나약함, 무지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이재영은 고전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적 방법을 버리고 계급투쟁과 역사 발전을 지식의 문제로 환원하는 관념론을 채택했음이 분명히 확인된다. 이재영이 이륙을 시도하고 있다는 그 개량주의적 관념론의 비행기는 이미 지난 20세기 동안 무수히 되풀이된 이륙 실험에서 형편없이 실패한 바 있다.

이재영이 글 끝 부분에서 “아직도 멀었다”며 일갈하며 자신의 “무지”를 시인한 것이 진심이라면, 그 이륙은커녕 추락할 것이 뻔한 고물 비행기에 동승하라고 어쭙잖은 말장난과 거짓말로 호객하는 짓은 당장 그만 두고, 먼저 마르크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한 자신의 “무지”부터 깨쳐야 할 것이다.

 
2007년 02월 12일 (월) 09:03:31 이정구 / '다함께' 회원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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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논술, 사교육과 관련 없다&quot;, 믿어도 되나

신뢰성을 얻으려면 군(郡) 출신 합격자수와 서울과 광역시 출신 합격자수가 제시돼야 한다. 아울러 군(郡) 출신 합격생들이 사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 또한 필수다

 

 군 지역의 상위 소수와 서울과 광역시의 상위 다수를 놓고 평균을 잰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데다가, 군(郡) 출신 합격생들은 공교육이나 자신의 능력만으로 논술고사를 치렀다는 것을 전제하는 잘못된 발표다. 또한 수능이 끝나면 전국 상위권 학생들이 사교육 현장에 장사진을 이룬다는 사실이 숨겨져 있다.

 

서울대 논술, 사교육과 관련 없다", 믿어도 되나
논술교육, 단위 학교는 준비중..."교육청 지원과 현장 연구 결합 필요"
텍스트만보기   박병춘(hayam) 기자   
 
서울대가 지난 1일 놀랄만한 발표를 했다. '2007학년도 정시모집 합격자 논술 점수 분석결과, 군(郡) 출신 합격자의 평균 점수가 25점 만점을 기준으로 23.58점인데 서울(23.42점)과 광역시(23.41점) 출신 합격자 평균보다 오히려 높았다'고 말이다.

더욱 놀랄만한 사실은 '이 같은 결과로 논술고사에서 사교육 효과가 없다는 것을 반영한다'며 논술과 사교육의 관계를 떼어놓으려는 의도가 듬뿍 담겨 있다는 것. 논술과 사교육의 상관관계를 분리하려는 그 의도의 순수성이야 충분히 환영하지만 현실을 외면한 판단이니 비난 받아 마땅하다.

이 발표가 최소한 신뢰성을 얻으려면 군(郡) 출신 합격자수와 서울과 광역시 출신 합격자수가 제시돼야 한다. 아울러 군(郡) 출신 합격생들이 사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 또한 필수다. 또한 논술고사에서 어떤 채점 방식을 적용했는지도 참고 되어야 할 것이다.

군 지역의 상위 소수와 서울과 광역시의 상위 다수를 놓고 평균을 잰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데다가, 군(郡) 출신 합격생들은 공교육이나 자신의 능력만으로 논술고사를 치렀다는 것을 전제하는 잘못된 발표다. 또한 수능이 끝나면 전국 상위권 학생들이 사교육 현장에 장사진을 이룬다는 사실이 숨겨져 있다.

공교육이 논술교육을 진행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학문에 왕도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논술을 잘 하는 왕도 또한 마땅치 않다. 많은 독서활동으로 배경지식을 쌓고 많이 써 보는 것 정도가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공교육이 논술교육을 주도할 수 있게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하는데 단위학교마다 소위 통합논술을 지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논술 사교육 광풍이 불자 교육부가 나서 지원에 나섰다. 교육부가 지난 겨울방학을 앞두고 단위학교마다 5백만 원씩 예산을 지원하여 논술교육의 단초를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아직 그 성과물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인데 이것만 보더라도 준비 자체가 안 됐다는 증거다.

필자는 이번 겨울방학 전에 뜻을 같이 하는 교사 9명과 논술팀을 꾸렸다. 마침 시교육청이 공문을 보내 논술 교육 프로그램을 공모하여 함께 참여했다. 우리는 겨울 방학 중 십여 차례 모임을 갖고 교과별(주로 국영수사과 교사)로 주제를 정해 100분짜리 수업용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모두 12개의 주제를 정했다. 주제마다 학생들이 통합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다양한 정보를 주고 글쓰기를 하게 하는 형식이다. 사진, 만평, 동영상 등을 동원했다. 한 교사가 프로그램을 만들면 세미나 형식으로 발표를 하고 장단점을 토론하여 보완했다.

이 과정에서 교사마다 개별 교과의 창의적 수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공감했다. 또한 정보와 지식을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교사가 정보전달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교실 수업을 개선하는 것이 결국 통합논술을 대비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번 겨울방학 때는 단위학교마다 많은 교사들이 이곳저곳 논술교사 연수에 참여하고 있다. 그 동안 얼마나 논술교육 여건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오래 전부터 논술교육을 실시하여 앞서가는 일부 고교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논술교육에 참여했던 교사들이 논술교육 연수에서 강사로 활동하여 경험적 사례를 전하고 있다.

아무튼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들이 좋은 학생을 선발하려고 밀어붙인 논술고사로 사교육 광풍에 시달려야 하는 현실이 아쉽다. 단위학교는 여전히 준비 중이니 말이다.

논술, 대학입시 대비라기보다는 수업 개선의 차원으로 고민해야

여전히 논술고사 시행을 밀어붙이는 대학들이 밉다. 언제가 될지 모르나 3불 정책(고교등급제, 본고사, 기여입학제)도 깨질 확률이 많다고 우려하는 분들도 많다. 고려대는 최근 500개 고교를 줄세워 내신 등급을 조절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대학이 가르쳐야 할 글쓰기를 일선학교 현장에 책임을 전가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많은 분들이 입시경쟁 속에서 논술까지 가세해 우리 학생들이 짊어져야 할 과다한 학습량을 걱정하기도 한다.

논술이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읽기를 토대로 한다고 볼 때, 독해력은 기본이다. 또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어떻게 글을 쓸 수 있을까. 결국 독서량이 글쓰기를 좌우한다. 교사마다 보다 창의적으로 수업 방식을 개선하여 토의 토론식 수업을 엮어내야 한다. 이미 주입식 교육에서 환골탈태한 학교도 많이 있지만 현재와 같은 문제풀이식 수업은 지양해야 한다.

지난 1일 서울대가 미세한 차이로 군(郡) 지역 합격자 평균이 우위를 점했다고 하여 논술고사와 사교육의 관련성을 부정하고 있으나, 이는 위에서 밝힌 대로 몇 가지 숨어 있는 전제를 배제한 채 발표한 것이다. 최근 고려대 논술에서도 강남·북·지방간 논술 점수 격차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나, 중요한 사실은 여전히 논술을 사교육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서울대가 발표한 내용은 논술과 사교육의 상관관계를 끊어보려는 차원이라고 이해한다. 대학서열화가 존재하는 한 사교육이 사라질 수 없겠으나 여전히 단위학교는 '준비 중'이다. 우리 교사들이 논술을 입시대비용으로 다루지 않고 토의와 토론을 통한 창의적인 수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교육부나 교육청의 지원 속에서 현장 교사들의 끊임없는 연수와 연구가 엮어질 때 논술교육은 성공할 수 있다.
 
 
2007-02-05 14:23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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