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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실체 없는 ‘유목주의’ 이미지만 떠돈다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 노마디즘은 저항의 철학인가 침략의 철학인가? 홍윤기 교수는 노마디즘이 실체는 없이 이미지만 떠도는 실험 단계의 기획에 불과하다는 관점을 보였다. 칭기즈 칸의 동상, 컴퓨터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어린이, 태극기를 들고 있는 한국 국적 취득자들(왼쪽부터).〈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 논쟁 /

 

① 개념부터 확정해야

 

유목주의로 옮겨지는 노마디즘(nomadism)이 국내에 본격 알려진 시기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저 〈천의 고원〉(1980) 해설서 〈노마디즘 1·2〉가 나온 2002년께다.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가 쓴 이 책에서 노마디즘은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붙박이지 않고 끊임없이 탈주선을 그리며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사유의 여행”으로 규정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특히 그들의 저서에서 “국가로 상징되는 고착된 가치에 맞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도구”로 ‘전쟁기계’를 노마디즘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로 내세웠다.

노마디즘은 지난해 ‘농사꾼 철학자’ 천규석씨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란 책을 내놓으면서 논쟁이 일었다. 천씨는 다리를 놓고 길을 내며 질주하는 유목의 세계에서 반생태성과 비지속성 그리고 ‘침략과 파괴의 역사’를 읽어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노마디즘은 칭기즈 칸의 세계로 회귀하려는 복고주의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외형상의 유목이나 움직임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홍윤기 교수는 이번 글에서 노마드라는 용어 안에서 수많은 노마드들이 서로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의미를 갖고 경쟁하거나 대립·공존하고 있음을 우선 지적한다. 자크 아탈리류의 ‘시장 노마드’나 첨단기기로 사이버공간을 가로지르는 ‘고급소비자 노마드’라고 해서 진정한 노마드가 아니라고 배제되어야 할 특별한 이유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홍 교수는 노마드들이 갖고 있는 의미가 특정 규정으로 결정력을 발휘하는 ‘개념’으로 총집되지 못하고 다감각의 ‘이미지’로 교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노마디즘은 ‘개념’과 실행’이 부족한 탈현실 기획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노마디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나의 응답부터 말하자면, 아직 ‘어떻게’ 봐야 할 ‘그 어떤’ 노마디즘 같은 것은 우리 생활 안에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 말을 써서 모종의 효과를 유발하고자 하는 이미지들은 우리 주변에 넘친다. 그리고 이 효과들은 상호 충돌한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변화무쌍한 그 용어의 용례들부터 정리하고 나서야 가능할지 모른다.

1.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공저 〈천의 고원〉이 역사학을 제외한 인문학계와 일부 사회학자들, 그리고 학문적 유행에 민감한 언론계, 소비자 취향에 집중하는 사업계 등의 지도적 인사들로 하여금 노마디즘을 일상적으로 입에 달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들은 “1227년”이라는 암호 같은 연대를 앞세운 이 책 12장의 표제를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라고 붙이면서 “전쟁기계는 국가 장치 외부에 존재한다”는 알 듯 모를 듯한 진술로 그 장을 시작한다.(유목민의 최고 상징 격인 칭기즈 칸은 바로 이해 8월18일 서하(西夏) 정벌 중 병사했다.) 이때 “전쟁”을 무엇으로 이해했든 들뢰즈·가타리는 전쟁과 관련된 유목민의 역동성 같은 것이 “국가”의 영토성을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탈국가적·탈경계적 추진력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했다. “전쟁기계는 유목민의 발명품이다”라고 주장하는 두 사람은 “불복종 행위, 봉기, 게릴라전 또는 행동으로서의 혁명이라는 반국가적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전쟁기계가 부활하여 “새로운 유목적 잠재세력”이 출현한다는 일반명제를 제시했다.

 

탈국가 지향하는 제2의 칭기스칸
사이버 공간 활보하는 고급 소비자들
모든 문명 내던지는 원시 회귀 까지
수많은 노마드 주장들 대립·공존

 

2. 문제는 이들이 그렇게 타파하려는 국가가, 민주적이든 독재적이든, 어떤 종류의 국가인지는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국가는 그 자체로서 이미 어떤 형태이든 “포획 장치”이다. 그리고 이들이 그렇게 작동시키고자 하는 전쟁기계의 목표가 반드시 전쟁은 아니라는 언명은 전쟁을 게임 속에서의 경쟁쯤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정도로 문제의 진지성을 약화시킨다. 하지만 전쟁 기계의 가동이라는 명목 아래 국가뿐만 아니라 노동·상품·자본 등 “포획”을 연상시키는 모든 제도 장치로부터의 탈주를 권장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전면적 탈경계 기획은 그 실천적 함의가 대단히 다양하다.

3. 이것을 문명의 모든 성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 그것은 원시로의 회귀까지 각오한 급진적 생태주의가 나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때의 탈주는 역진적 퇴주가 되는 셈이다.

4. 만약 탈경계의 지향점을 문제삼지 않을 경우, 삶의 조건과 영역에 처진 경계들 그 자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왕래하거나 이동할 수 있는 일체의 행위와 생활양식은 모두 노마드적이다. 인간이란 “여행을 존재의 본질”로 한다고 하여 ‘호모 노마드’를 부각시킨 자크 아탈리는 세계화된 지구시장을 그 옛날 대상로가 거미줄처럼 얽혔던 실크로드로 간주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노마드로서 진화의 최종점에 도달하며, 이들이 전세계를 장악하기까지의 무질서 너머로 “모든 인생 여행자들을 환영하는 땅”이 전개된다고 고무한다.

5. 당연히 아탈리류의 시장 노마드는 세계 자본 순환과 그것의 외양인 제국에 완전히 포획되어 그 안에서 이익에 혈안이 된 “여행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여행자는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다. 농촌자치 공동체를 꿈꾸는 농민 철학자 천규석 선생에게 이런 “유목주의는 침략주의이다.”

6. 그렇지만 자본과 제국의 포획 안에서 자신의 생활압박 때문에, 베네치아에서 출생하고 호주에서 성장하다가 프랑스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네덜란드에서 교수로 취업한 로저 브라이도티 같은 이에게 유목적 주체란 연속된 이주로 복잡화되고 다층화된 수많은 다양한 타자들 사이의 다양한 정체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7. 그러나 자본의 속도는 유목민의 다양화를 앞질러간다. 이미 시장에는 마셜 매클루언의 예언대로 “휴대전화, 노트북 컴퓨터, 피디에이(PDA), 디지털카메라, 엠피3(MP3)을 갖춘” 고급 소비자들이 노마드를 자칭하면서 사이버공간이라는 새로운 무한 초원을 무대로 “공간의 물리적 이동만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와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하게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법을 능동적으로 바꾸어가는 창조적 행위”를 감행하고 있다.

 

21세기판 유토피아 꿈꾸는 노마디즘
개념·실행 없는 ‘탈현실’ 실험일 뿐
찬반을 말하기엔 아직 일러
변화무쌍한 용례들부터 정리해야

 

 

자, 위의 노마드 또는 유목민의 사례들 가운데 자기만 빼고 다른 것은 진정한 노마드나 유목민이 아니라고 얘기할 권리가 있는 진정한 유목민은 몇 번인가? 그 의미가 어떠하든 노마디즘은 어떤 동기나 근거에서든 21세기 현재의 (지구)사회적 지형 위에서 과거의 ‘유토피아’ 구상을 대체하는 탈현실(post-reality) 기획이다. 그야말로 노마드라는 용어 안에 수많은 노마드들이 서로 경계를 허물면서 다양한 의미를 갖고 경쟁하거나 대립하거나 공존한다. 이때 의미들(senses)은 특정 규정으로 결정력을 발휘하는 ‘개념’으로 총집되기보다 다(多)감각(multi-sense)의 ‘이미지’ 파문으로 교착한다.

다만 노마디즘 기획은 노마드를 바로 지금 이곳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유토피아 구상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적어도 외양상으로는 탈경계의 이동이나 탈주를 하는 듯이 보이는 소수 엘리트층 또는 자기 땅에서 밀려나 탈국가적으로 이동해야 하는 수많은 빈민이나 노동 이민자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진경 교수의 말대로 이들은 “떠돌아다니지만 끊임없이 어딘가 멈출 곳을 찾는” ‘실질적 고착자들’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역시 이진경 교수의 구상을 빌려, 떠남/멈춤의 이동성을 신체물리적 차원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사상과 갈등을 자유자재로 읽고 사유하는 한층 정신적인 차원에서 유목성을 추구해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유목성이 국가·자본·시장과 같은 외적 준거점을 떠나 정신과정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그런 관념적 유목성이 들뢰즈·가타리가 “모델을 늘리지 않으면서” 끝까지 놓지 않으려던 “매끈매끈한 판”을 슬그머니 놓아버리고 홈 안으로 몸을 도사리는 것임을 금세 눈치챌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단지 탈주의 기획을 말했을 뿐이다. 그것은 노마드에서 많은 것을 학습하는 과정, 곧 노마돌로지(유목론)적 탐색이긴 해도 노마드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노마디즘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 홍윤기 교수
 
노마드나 노마디즘은 거기에 대한 찬반 의견을 말하기엔 그 자체의 ‘개념’과 ‘실행’이 현실적으로, 그리고 현재적으로 태부족한 실험기획이다. 더 중요한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결국 인정했듯이 노마드 그 자체에서도 벗어나는 것이다. 곧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의 매끈한 공간만으로 충분하다고는 절대 믿지 말라.”

홍윤기/동국대 철학과 교수

 


홍윤기 교수는 1957년생으로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철학박사를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사회통합의 규범기반 모델, 그리고 문화적 가치의 철학적·사회과학적 실현 등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변증법 비판과 변증법 구도> <헌법 다시 보기>(공저) 등이 있습니다.

 

다른 삶을 위한 ‘차이 철학’이자 ‘혁명 정치학’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오스트리아제국 태생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왼쪽)와 〈자본론〉 저자 카를 마르크스(1818~1883·오른쪽). 이진경 교수는 오래된 소설 형식을 혁파한 카프카나 “불모의 땅”에서 새 영토를 일구고 있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유목민의 보기로 들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충분히 숙성된 사유다

 

지난주 홍윤기 동국대 교수는 노마디즘(유목주의) 기획을 과거의 ‘유토피아’ 구상을 대체하는 탈현실 기획이며, ‘개념’과 ‘실행’이 태부족한 실험기획이라고 지적했다. 노마드들이 규정력을 발휘하는 ‘개념’으로 총집되지 못하고 다감각의 ‘이미지’로 교착되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노마드라는 용어 안에 수많은 노마드들이 다양한 의미를 갖고 경쟁하거나 대립·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시장 노마드’나 ‘디지털 노마드’라고 해서 진정한 노마드가 아니라고 배제되어야 할 이유를 찾기 힘들다고 했다. 홍 교수는 또 제도장치로부터의 탈주라는 개념은 원시로의 회귀를 각오한 “역진적 퇴주”가 될 수 있음도 지적했다. 성격을 불문하고 모든 종류의 국가를 ‘포획’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도 이견을 보였다.

2002년 들뢰즈와 가타리 공저 〈천의 고원〉(1980) 해설서인 〈노마디즘 1·2〉를 펴내면서 우리 사회에 노마디즘을 널리 알린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이 글에서 유목민은 주류적 척도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방식, 사유방식을 창안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자동차나 비행기로 돌아다니지만, 마음은 언제나 돈이나 자기 가족에 매여 있는 자는 유목민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장 노마드’ 등 여러 유사 노마드들은 자본이 게바라로 돈을 버는 것처럼 ‘노마드의 상품화 전략’의 결과물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또 노마디즘은 “좀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며 “그런 꿈을 통해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의 표현”이란 점에서 혁명의 정치학과 상통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주에는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가 견해를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에게 노마디즘이란 정착과 소유, 착취와 포획, 동일성의 지배에 대항하기 위한 철학적 문제 설정이고, 우리의 신체와 삶을 사로잡고 있는 권력과 대결하며 새로운 창조적 삶을 창안하며 살아가는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윤리학인 동시에 정치학이고, 삶의 방법인 동시에 사유의 방법이다. 흔히들 말하는 ‘차이의 철학’이나 ‘탈주의 철학’이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지층 속에서 ‘숙성’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쓸모 있는 사유도 영향력을 얻게 되면, 그래서 심지어 ‘유행’의 물결을 타게 되면, 그것에 촉발되어 생성되는 ‘친구’들과 더불어, 거기에 편승하는 유사품들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자본은 돈이 된다면 게바라나 혁명마저도 상품화해서 팔아먹지 않던가! 그러나 상품화되는 사태를 들어 게바라를 비난하고 혁명을 포기할 순 없는 일 아닐까? 거기서 중요한 것은 상업적 물결 속에서도 애초의 문제의식을 더욱 멀리 밀고 나가는 것일 게다. 그래서 삼성이 ‘디지털 노마드’를 광고 카피로 삼고, 자크 아탈리 같은 이가 “인간이란 본래 노마드였다”면서 재빨리 책을 내는 사태도, 역으로 적절한 근거 없이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라고 비난하는 사태도 내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사태를 헤쳐나갈 수 없다면, 어떤 사상도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능력을 획득할 수 없을 것이다.

 

 

신체·정신적으로 주류적 척도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창안하는 자들이 노마드
새 정착지를 찾아 여기저기 떠돌거나
돈·가족에 얽매인 ‘이동’과 혼동 말아야

 

이동이 자본의 중요한 특징이 된 지금 노마디즘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유목’과 ‘이동’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정착민도 이동을 하며, 유목민도 멈춘다. 차이는 정착민의 이동이 어떤 목적지(멈춤)에 종속되어 있다면, 유목민에게 멈춤이란 이동의 궤적 안에서 잠시 머무는 것이란 점에서 이동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휴대폰, 노트북 컴퓨터 등을 갖고 “세계는 넓고 갈 곳은 많다”고 자동차로 비행기로 돌아다니지만, 마음은 언제나 돈이나 자기 가족에 매여 있는 자를 유목민이라고 하지 않는다. 반면 여행도 잘 다니지 않지만, 멈추지 않는 사유로 자신이 구축한 영토마저 떠나는 사상가는 유목민이란 정의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더구나 들뢰즈·가타리는 ‘이주민’과 ‘유목민’ 또한 구별한다. 이주민이란 어느 영토에 이주하여 그 영토를 이용하며 살지만 그 영토가 불모가 되면 버리고 떠나는 자들이다. 반면 유목민은 불모가 된 땅(초원이나 사막, 혹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같은…)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거기서 살아가는 법을 창안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나는 정착민이란 성공에 안주하는 자라면 유목민은 성공을 버릴 줄 아는 자고, 이주민이란 실패를 쉽게 떠나는 자라면 유목민이란 실패와 대결하며 새로이 길을 찾아내는 자들이라고 이해한다.

유목이나 정착, 이주는 ‘현실적인’ 영역에서도,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모두 나타난다. 어느 영역에서든 유목은, 홍윤기 교수 말대로 “국가나 자본, 시장 같은 준거를 떠날” 뿐 아니라 그것과 대결한다. 노마디즘이나 차이의 철학이 혁명의 정치학과 상통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배적인 척도가 새겨 놓은 사유나 삶의 ‘홈 파인 공간’을, 그 깊은 홈들을 범람하여 매끄러운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지금의 조건에서라면 어떤 것도 자본이나 국가, 시장과 대결하지 않고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관념적’이라는 나쁜 관형어를 덧붙인다고 해도, 이를 ‘홈 파인 공간’ 안으로 몸을 도사리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좌우를 못 가리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마이너리티(minority)란 수가 적다는 의미의 ‘소수파’가 아니라 이처럼 주류적(major) 척도와 대결하는 자들이고, 그런 척도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방식, 사유방식을 창안하는 자들이다. 빈민이나 이민자, 혹은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들조차 주어진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혹은 주류적 척도에서 벗어난 삶이나 사유의 방식을 구성하지 못하고 개별적인 새 정착지를 찾을 뿐이라면, 홍 교수 지적대로 그들 또한 정착민이다. 물론 주어진 상태가 결코 안주하기 힘들기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나서게 할 거대한 잠재성을 갖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되지만.

 

유사 노마드·이념 상품화 현혹됨 없이
애초의 문제의식 더욱 밀고 나가야
비현실적 ‘유토피아’ 주장 틀렸음은
현대·역사 속 수많은 노마드들이 증거

 

이런 대결을 들뢰즈·가타리는 니체의 용어법을 따라 ‘전쟁’이라고 했다. 지배적인 가치에 대한 전쟁, 낡은 습속에 대한 전쟁. 그리고 이런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그들은 ‘전쟁기계’라고 일컬었다. 가령 오래된 소설의 형식을 혁파하고 관료제와 더불어 새로이 등장한 권력을, 그 권력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과 대결하는 카프카의 책들 또한 그들의 정의에 따르면 전쟁기계다. 따라서 이런 전쟁기계는 전쟁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좋은 전쟁에서는 화약 냄새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삶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국가장치나 지배적 가치와 충돌할 때, 그 전쟁 같은 충돌을 피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굳이 ‘전쟁’이란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나로선 ‘투쟁’, ‘투쟁기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전쟁기계나 탈주선, 매끄러운 공간 등 들뢰즈·가타리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들조차, 창조적 생성이 결여된 채 주어진 세계에 대한 분노와 혐오에 머문다면, 전쟁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파괴적 전쟁기계로 될 수 있음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매끄러운 공간으로 충분하다고 믿지 말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했던 것이며, ‘노마드 자체에서 벗어나라’는 홍 교수 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적 사유를 어떤 이념의 냄새를 확실하게 풍기는 ‘노마디즘’과 대비하여 ‘노마돌로지’라는 말로 그들을 구해주려는 시도가 있음을 알고 있다. 어떤 사유의 명칭에 ‘이즘’이란 말을 넣거나 뺌으로써 무언가 크게 달라질 거라고 믿지 않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자신들의 책을 삶을 바꾸고 정치적으로 작동하는 ‘책-기계’로 사용해 달라고 책의 첫머리부터 주문했던 사람들이, ‘노마드적 삶에서 많은 것을 학습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어떤 이념 같은 것이 되어선 안 되기에 ‘노마디즘’이란 말을 거부할 거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마치 “중요한 것은 변혁”이라고 했던 마르크스가 자신의 이론이 ‘이념’이 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 대신 ‘마르크스론’(Morxology)이란 말을 고집했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어이없어 보인다. 아니라면, 들뢰즈는 그저 ‘학자’일 뿐이라는 말일까? 마지막으로, 노마디즘은 ‘21세기 유토피아’인가? 유토피아라는 말이 ‘좀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고 그런 꿈을 통해 삶을 바꾸려는 의지의 표현이라면,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 서울산업대 이진경 교수
 
반면에 흔히 말하듯 비현실적 공상이라면, ‘그렇지 않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를 모르고도 스피노자주의자가 될 수 있”듯이, 노마디즘을 모르고도 노마드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 그리고 역사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진경 교수/서울산업대

 


이진경 교수는 1963년생이며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 전반에 대해 다시 사유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구별되는 ‘코뮨주의’란 화두를 들고 공부하고 있으며, 생명의 경제·정치학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미-래의 맑스주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등이 있습니다.

 

착한’ 노마드? 현실엔 ‘나쁜’ 노마드도 있다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왼쪽부터 보아, 삼성 본관, 배용준. 김진석 교수는 여러 노마드들이 현실 세계에서 뒤섞일 수밖에 없다면서, 문화산업과 결합한 ‘한류’나 한국인이 자랑스럽게 동일시하는 ‘삼성’도 유목적 세계화의 흐름 속에 있다고 지적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3 한쪽만 보는 개념은 불완전

 

지난 두 주 홍윤기 동국대 교수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노마디즘(유목주의)에 대해 엇갈린 견해를 드러냈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는 노마디즘(유목주의) 기획을 ‘개념’과 ‘실행’이 태부족한 실험기획이라고 비판했다. 노마드들이 규정력을 발휘하는 ‘개념’으로 총집되지 못하고 다감각의 ‘이미지’로 교착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노마드라는 용어 안에 심지어 ‘시장 노마드’나 ‘디지털 노마드’와 같은 수많은 노마드들이 다양한 의미를 갖고 경쟁·대립·공존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반면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시장 노마드’ 등 여러 유사 노마드들은 자본이 게바라로 돈을 버는 것처럼 ‘노마드의 상품화 전략’의 결과물일 뿐이라고 했다. 유목민은 주류적 척도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방식, 사유방식을 창안하는 자들이기에, 마음이 언제나 돈이나 자기 가족에 매여 있는 경우 유목민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또 노마디즘은 “좀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며 “그런 꿈을 통해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의 표현”이란 점에서 혁명의 정치학과 상통한다고 강조했다.

김진석 교수는 이 글에서 이 교수의 논리를 ‘착한 노마드 이야기’일 뿐이라고 공박했다. 여러 노마드들이 현실 세계에서 뒤섞일 수밖에 없음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도 실천의 복잡하고 구체적인 맥락과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도 했다. 그는 또 유목민도 ‘전쟁기계’의 복합체로 존재할 경우 폭력적 흐름을 탈 수밖에 없다면서 노마드는 그 자체로 착하며 언제나 권력과 폭력에서 자유롭다는 믿음도 공상이라고 밝혔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한국 사회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화 움직임에 덜컥 사로잡혔다. 한국을 유사 이래 최고 속도, 최대 규모로 세계로 나아가게 한 계기는 ‘디지털 노마디즘’. 그러나 세계로 나아갈수록 동시에 어떤 때보다도 유목주의적 기업과 제국들의 침입에 내맡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당연했다. 이 와중에서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점점 새로운 폭력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결국 한 생태주의자는 “유목주의가 국가주의보다 더 파국적인 시장제국주의를 부추기고 조장하는 또 하나의 침략과 파괴주의”라고 고발하고 나섰다. 고발의 목소리는 비록 거칠고 일방적이었지만,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쓴소리였다.




그런데 노마디즘을 이론적으로 칭송하는 사람들은 그 비판을 쉽게 무시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책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면서, 이들이 ‘유목민’(nomad)·이주민·정착민을 개념적으로 엄격하게 구분했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이론적 권위를 앞세운 이런 주장이야말로 왜곡에 가까운 오독을 낳는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엄격한 개념적 구별의 필요성을 강조한 건 맞다. 그러나 그들은 냉정했다. “그들의 개념적 구별이 실제로 그들이 뒤섞이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거꾸로 오히려 그들의 혼합을 필연적으로 만든다”(들뢰즈와 가타리 공저 〈천의 고원〉)고 인정했다.

이들 인용을 빌리지 않더라도, 노마디즘과 관계된 어떤 더러운 현실적 문제들로부터도 자유롭다는 이론은 자승자박에 이를 뿐이다. 현실의 더러움으로부터 뚝 떨어진 개념은 현실을 설명할 힘도 가지지 못할 터이니! 그런데 이진경씨는 개념적 구분에만 매달리면서 ‘노마디즘’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숙성한 사상이고 나쁜 자본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따라서 노마디즘이 침략적 성격을 띠는 것도 자신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마음 편하게 말한다.

 

개념의 구분·순수성 내세우며
현실적 문제에서 자유롭다는 주장
되레 유목주의에 대한 오독 부르고
실천적으로도 공허하게 만들어

 

 

그는 노마드뿐 아니라 ‘매끈한 공간’과 ‘외부성’이 그 자체로 순수하고 초월적인 혁명적 개념인 것처럼 말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기서도 그것들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일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매끈한 공간과 외부성의 형식은 결코 그 자체로 불가항력적인 혁명적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며, 거꾸로 어떠한 상호 작용의 장에 흡수되고 어떠한 구체적인 조건하에서 실행되고 성립되는가에 따라 극히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천의 고원〉) 세상에 대해 말할 때는 순수한 개념이나 의미만이 아니라, 실천의 복잡하고 구체적인 맥락과 조건을 아는 게 중요하다. 이들은 노마드에 창조성을 부여했지만, 그것이 언제나 착한 정의를 목적으로 삼는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노마드를 말할 때에도 오히려 ‘전쟁기계’의 배치를 끝없이 강조했다.(“이 기계의 본질에 비추어보자면 비밀을 쥐고 있는 것은 유목민들이 아니다”)

‘노마디즘’은 현실 속의 나쁜 노마디즘과는 아무 관계도 책임도 없으며, 나쁜 자본주의 국가의 착한 외부에만 존재한다는 말은 ‘착한 노마드 이야기’일 뿐이다. 그건 들뢰즈와 가타리의 텍스트를 지적으로 배반할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공허하기 십상이다.

‘전쟁기계’는 비록 전쟁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는 않지만, 언제든지 싸움을 무릅쓰는 어떤 것이며, 때로는 다시 국가제도에 포획되기도 하지만 다시 도망가며 싸우는 어떤 것이다. 그만큼 ‘노마디즘’처럼 지적·문화적으로 유행하기에는 복잡하고 까칠까칠한 주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진경씨는 ‘전쟁기계’가 부차적이고 적절하지도 않은 표현인 것처럼 말하는데, 그들 책을 경전처럼 주석하면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는 단순화시키다니! ‘노마디즘’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기계’의 무서운 까칠까칠함이 은폐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노마드가 항상 국가 바깥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국가에 대한 투쟁을 말하지만, 그에게는 두 갈래 길밖에 없다. 곧 국가와 싸우는 일과 국가 바깥의 평화로운 공간으로 가는 길. 그러나 유목적 전쟁기계는 국가에 대해서만 싸우는, 국가 바깥의 ‘착한 노마드’는 아니다. 그것은 국가 안에서 국가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고 떠도는 가지가지 패거리들이기도 하며, 국가 바깥에서 국가를 비웃는 다국적이고 세계적인 조직과 폭력이기도 하다. “국가 자체도 항상 바깥과 관계를 맺어 왔으며 따라서 이 관계를 빼고서는 국가를 생각할 수 없다. 국가를 규정하는 것은 ‘전부’ 아니면 ‘무’의 법칙, 곧 국가적인 사회냐 아니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냐가 아니라, 내부와 외부의 법칙이다.”(〈천의 고원〉)

 

노마드는 ‘착하다’는 믿음은 공상
한쪽 면만 극단적으로 과장 말고
전쟁기계의 폭력성 함께 인정할 때
문명 분석의 좋은 도구될 수도

 

국가를 위해 싸운 안중근은 바보일까? 또 기독교와 이슬람(그리고 유교)도 국가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유목적 전쟁기계로 작동할 수 있다. 노마드는 그 자체로 착하며 언제나 권력과 폭력에서 자유롭다는 믿음은 공상적이다. 그것은 전쟁기계와 떨어질 수 없고, “전쟁기계와 국가는 서로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 작용의 장 속에서 공존하고 경합한다.”(〈천의 고원〉)

더욱이 이진경씨는 ‘노마디즘’을 거의 부드러운 문화상품으로 만든 후에 결론으로 ‘코뮨주의’를 주장하는데, 이것도 ‘전쟁기계’를 간과하거나 은폐한다는 의심을 받을 만하다. 폭력의 수많은 흐름에서 전적으로 벗어난 우정과 사랑의 공동체를 목적으로 삼는 일은 노마드를 줄 세우는 일이 아닐까. 우애에 근거한 공동체는 훌륭한 가치지만, 그걸 노마드의 선험적 목적으로 상정할 필요는 없다. ‘전쟁기계’에게 전쟁이 목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라고 공격한 생태주의자가 내세운 것도 모든 국가로부터(심지어 복지국가도) 완전히 벗어난 공동체주의이다.

그런데 거꾸로 노마디즘은 어떤 오류도 없다고 말하는 이진경씨도 비슷한 코뮨주의에 빠진다. 단순한 우연? 아니다. 이들은 노마드의 한쪽 면만 극단적으로 과장했기 때문이다. 소수자인 이주 노동자들은 우정으로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그들도 더 좋은 일을 찾아 고향을 떠난 유목민이다. 더 나아가 이곳에서 정착을 원하는 사람도 많으니, 유목민/이주민/정착민의 배치는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전쟁기계’의 복합체로 존재하는 한, 유목민들은 ‘따로 또 같이’ 폭력적 흐름을 타고 있으며, 그 폭력적 끈의 긴장 속에서 문명적으로 생존한다.

문화산업과 결합한 ‘한류’도 거센 유목적 세계화의 흐름 속에 있고, 한국인이 자랑스럽게 동일시하는 ‘삼성’도 그렇다. 들뢰즈와 가타리도 “새로운 노마디즘은 세계적 규모의 전쟁기계를 수반하는데, 그 조직은 국가장치를 넘어서며, 다국적이고 에너지와 관계된 군산복합체 속으로 흘러간다”고 했다. 한국인은 ‘한류’와 ‘삼성’이 실현하는 유목적 공격성을 전적으로 거부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쉽게 동의하기도 힘든 소용돌이 속에서, 돌고 돈다. 때로는 자랑스럽지만 때로는 더럽다.


 
» 김진석 인하대 교수
 
노마드의 폭력성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그 폭력성이 인정된 노마드 이야기는 문명 분석의 좋은 도구일 수 있다. 강자가 먹이를 다 삼키는 폭력적 시스템만 쫓는 노마디즘은 위악적이지만, 모든 폭력에서 벗어난 공동체를 꿈꾸기만 하는 노마디즘도 위선적이지 않을까. 이 사이에서, 기우뚱, 균형을 잡자.

김진석/인하대 교수

 


김진석 교수는 1958년생으로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철학박사를 받았습니다. 미학과,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폭력의 다양한 얼굴과 맥락 등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저서로 <초월에서 포월로 1, 2, 3>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 <소외에서 소내로> <포월과 소내의 미학> 등이 있습니다.

 

나쁜 노마드’ 구별해야 ‘진정한 노마드’ 찾아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 그는 1980년 가타리와 함께 펴낸 저서 <천의 고원>에서 유목민을 뜻하는 노마드라는 개념을 구체화했다. 국내에 노마디즘을 유행시킨 이진경 교수의 저서 <노마디즘 1·2>는 이 책의 해설서이다. 그린비출판사 제공
 
우리시대 지식논쟁/

 

 

④ 비판들에 대한 재반론

 

지난 3주 홍윤기 동국대 교수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김진석 인하대 교수가 노마디즘(유목주의)에 대해 엇갈린 견해를 보였다. 이 교수가 노마디즘을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의 표현”이라면서 ‘혁명의 정치학’이란 수사를 통해 정극 옹호했다면 두 사람은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홍 교수는 ‘시장 노마드’나 ‘디지털 노마드’ 등 여러 노마드들이 다양한 의미를 갖고 경쟁·대립·공존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노마드들이 ‘개념’으로 묶이지 못하고 ‘이미지’로만 교착되고 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지난주 김 교수는 현실 속에서 여러 노마드들이 뒤섞일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다. 들뢰즈·가타리도 개념뿐 아니라 실천의 복잡하고 구체적인 맥락과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도 했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이 교수의 ‘노마디즘’은 현실 속의 ‘나쁜 노마디즘’과는 아무 관계도 책임도 없는 ‘착한 노마드 이야기’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이 교수는 이 글에서 ‘나쁜 노마드’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노마디즘을 버릴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는 “단순화해서 ‘나쁜 노마디즘’과 ‘좋은 노마디즘’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중요한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 옳다고 믿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초월적 외부에서 선과 악이 뒤섞여 구분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현실에서 올바른 삶을 위한 길찾기에 나선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주제의 마지막 토론자인 이광래 강원대 교수가 다음주 견해를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비판을 서로 자신에 대한 오해라고 반박하며 진행되는 논쟁처럼 소모적인 것은 없지만, 오해나 곡해를 그냥 두고 토론하기는 어렵다. 나 역시 간단하게나마 몇 가지 오해나 곡해에 대해 지적하는 방식으로, 그런 지적에 기생하듯 말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첫째, 나는 어디서도 들뢰즈·가타리 책을 읽지 않았다면서 누구를 반박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반대로 나는 “노마디즘을 모르고도 노마드로 사는 게 가능하다”고 믿는다. 많이 읽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경우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처럼 누군가를, 그것도 저리 강하게 비판하려면, 비판하는 대상을, 다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읽거나 알고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 경우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문제의식이 있다고 해도, 쉽게 무시되는 것을 어찌 피할 수 있을까?

둘째, 나는 “‘매끄러운 공간’이나 ‘외부성’이 그 자체로 초월적인 혁명적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긍정적인 가치를 갖는 전쟁기계도 전쟁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게 되는 사태가 있을 수 있다고 썼다. 마찬가지로, “노마디즘은 현실 속의 나쁜 노마디즘과 아무 관계 없다”면서 “나쁜 자본주의 국가 외부에만 존재하는 착한 노마디즘”에 대해 말할 정도로 순진하지 않다. 다만 홍윤기 교수가 제시한 여러 노마드들 가운데 어떤 걸 ‘진정한 노마드’라고 말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나쁜 노마드나 문화상품화된 ‘노마드’들이 있다는 이유가 노마디즘을 버릴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답했을 뿐이다. 반복하건대, 김 교수 말처럼 ‘유목주의적 기업’이나 ‘침략적 노마드’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노마디즘을 버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 나치가 생태주의자였다는 게 생태주의를 버릴 이유는 되지 않는 것처럼. “노마디즘에 침략적 성격이 있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나는 이렇게 쓰지 않았지만)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였음을 이해하기가 그리 어려웠을까? 김 교수는 내가 노마디즘은 “더러운 현실과 무관한 이론”이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정말 믿고 있을까? “폐허가 된 마르크스주의, 그 불모의 땅에 달라붙어서, 실패에 달라붙어서 새로운 길을 찾는 게 노마드”라고 썼는데도 불구하고.

 

현실 속 노마드 무시한 게 아니라
노마디즘을 버릴 이유 아니다 했을 뿐그럴수록 시비 가리고 개념 구분해야

 

셋째, 나는 전쟁기계 개념을 부차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적절한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있다(나는 경전을 주석하는 훈고학자가 아니기에,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으며 나름의 답을 찾는다).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전쟁’의 개념이 일차적으로 지배적 가치에 대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조건에서 ‘전쟁’이란 말은 국가 간의 적대적 충돌이란 의미가 지배적이기에, 오해 없이 사용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는 생각에서다. ‘전쟁기계’ 대신에 ‘투쟁기계’라고 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들뢰즈·가타리가 표현하려는 개념적 내용이 ‘투쟁’이란 말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실제로 가타리는 〈새로운 자유의 공간〉에서 그렇게 고쳐 쓴다). 그렇지만 그들이 ‘전쟁기계’란 개념을 오해를 무릅쓰고 사용했던 것은, 전쟁기계가 전쟁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부정적 사태를 지적하기 위해서였다고 덧붙여 놓았다. 따라서 전쟁기계의 무서운 까칠함을 은폐하여 노마디즘을 부드러운 문화상품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넷째, 나는 어디서도 ‘착한 노마드’에 대해 쓴 적이 없다. “노마디즘에는 어떤 오류도 없다”니! 비난과는 반대로, 이주노동자들조차 주어진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안주할 곳을 찾는다면 노마드가 아니라 정착민이라고 썼다. 그래서 이주노동자도 이주노동자-되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상품화나 유행에 편승하는 유사품과 대비하여 노마디즘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믿으며, 단순화해서 ‘나쁜 노마디즘’과 ‘좋은 노마디즘’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생각이 그런 단어를 사용한 것처럼 생각하게 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김 교수는 ‘착한 것’과 ‘폭력적인 것’, ‘선과 악’이 결코 단순하게 분리될 수 없다고 거듭 말한다.

맞다. 데리다 이후, 선과 악이 뒤섞이고 선과 악이 서로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건 일종의 철학적 상투구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니 ‘좋은 노마드’를 ‘나쁜 노마드’ 와 구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철학적 순진성으로 비난받기 딱 좋은 처지를 자초하는 것이다. 확실히 노마디즘이 작동하는 세계를 그 초월적 외부에서 바라보면서, “거기서 선악은 구별 불가능해”라고 해체하는 철학자들이라면, 그것의 복합성이나 결정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현재적 삶 속에서 그것을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지, 아니 어떠한 삶의 방식을 구성할 것인지, 지금 이 길로 가는 게 옳은 것인지를 고심하고 판단해야 하는 사람에게도 그럴까? 거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 하려는 것이 쉽게 말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가리는 것이고, 좋은 것이 나쁜 것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포착하는 것이다. 유목을 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게 유목적인 것인지, 아니면 유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닌지, 애써 얻은 하나의 성공에 안주하면서 다시 정착민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 구별불가능하고 서로 기대어 있는 ‘좋음/나쁨’을 떠나 초월적 자리에서 모든 것을 해체해대는 데리다 같은 철학자보다는, 오류를 범할지라도 “자, 다시 한 번!” 하면서 지금 조건에서 어떤 게 좋은 것인지를 그때그때 판단하며 옳다고 믿는 것을 실행하려 애쓰는 나의 친구들을 더 믿는다.

 

지배적 가치와 싸우는 ‘전쟁기계’
오해 우려했을 뿐 은폐한 적 없어
코뮨-노마디즘 결부해 사유하는 게
전쟁기계 필연성 간과한 건 아니다

 

다섯째, 개념들을 엄밀하게 구별하고 발전시키는 게 중요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나쁜 것과 좋은 것이 잘 섞이기 때문에, 잘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어느새 반대가 되는 사태가 빈발하기 때문에, 오류와 위험을 포착하고 구별할 개념들이 필요한 것이다. 가령 내가 “유목민과 이주민은 다르다”고 하며 개념적으로 구별하려 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마지막으로 코뮨주의에 대하여. 내가 코뮨주의를 노마디즘과 결부하여 사유하고 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거기서 전쟁기계적 성격을 간과·은폐한다는 의심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나는 코뮨주의가, 혹은 코뮨이 전쟁기계라고, 전쟁기계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개인주의, 전체주의, 가치법칙 등의 지배적인 가치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고서 코뮨이 가능하리라고 믿을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가 만들어온 코뮨 안에서도 오랫동안 고성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지금도 근본적으로는 마찬가지다. 우리 각자가 자본주의나 근대적 삶의 습속에 너무도 길들어 있기에, 코뮨이 가능하려면 그런 나에 대한 투쟁, 그런 친구들의 습속에 대한 투쟁을 결코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 이진경 교수
 
굳이 새로운 단어를 만들며 코뮨주의를 친숙함과 동질성에 안주하는 공동체주의와 구별하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따라서 코뮨주의는 노마드적 삶의 방식을 포함하며, 또한 그래야 한다. 그러나 코뮨주의가 노마디즘의 선험적 목적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다른 노마드적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

 


이진경 교수는 1963년생이며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 전반에 대해 다시 사유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구별되는 ‘코뮨주의’란 화두를 들고 공부하고 있으며, 생명의 경제·정치학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미-래의 맑스주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실제-가상 오가는 ‘유목적 생활인’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컴퓨터 모니터와 키보드가 일상의 가장 친숙한 도구가 된지 오래다. 이 교수는 한국인이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을 자유자재로 유목하며 융합현실 속에서 생활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노마디즘은 데자뷔(기시감) 현상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⑤ 전혀 새롭지 않다

 

네 번에 걸쳐 홍윤기 동국대 교수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김진석 인하대 교수가 노마디즘(유목주의)에 대해 비판과 반비판을 펼쳤다.

핵심 논점은 현실 속에서 여러 노마드들이 뒤섞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였다. 김 교수는 이진경 교수가 ‘혁명의 정치학’이란 수사를 통해 적극 옹호하는 ‘노마디즘’은 현실 속의 ‘나쁜 노마디즘’과는 아무 관계도 책임도 없는 ‘착한 노마드 이야기’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홍 교수는 경쟁·대립·공존하고 있는 여러 노마드들이 ‘개념’으로 묶이지 못하고 ‘이미지’로만 교착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나쁜 노마드’의 존재가 노마디즘을 버릴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반론을 펼쳤다. 중요한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 옳다고 믿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또 초월적 외부에서 선과 악이 뒤섞여 구분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현실에서 올바른 삶을 위한 길찾기에 나선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보였다.

이광래 교수는 이 글에서 우리가 이미 융합의 최전선에 있다면서 노마디즘은 새롭지 않다는 견해를 보였다. 한국인들이 이미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을 자유자재로 유목하며 융합현실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부의 다양한 힘과 격투하는 사고’인 노마디즘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느냐고 이 교수는 반문했다. 다음 주제는 ‘‘코뮨주의’ 대안인가’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해체는 비상이다

해체의 외징(外徵)은 비상이다. 해체주의는 비상의 철학사조이다. 그 비상한 외징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종말이다. 그것의 주인공들은 종말과 종결을 좋아한다. 우선 그들은 예외 없이 철학의 종말을 주장한다. 해체주의의 선조이자 아방가르드였던 니체를 비롯하여 푸코와 들뢰즈, 그리고 데리다의 주장이 그렇다.

누구보다도 니체는 ‘빠삐용’이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철학적 전통을 탈출하여 이른바 ‘자유의 바다’에 비상착륙하고 싶어 했다. 기존 철학에 대한 답습이 그에게는 단순 노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가 철학노동자들을 혐오한 까닭도 마찬가지였다. 들뢰즈는 니체를 가리켜 ‘철학을 망치질하는 이’에 비유한다. 모리스 블랑쇼도 “니체의 철학을 성찰하는 것은 철학의 종말을 성찰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니체를 전위(前衛)로 숭상하는 이들에게 ‘종말에의 유혹’은 가장 뚜렷한 유전인자였다. 아직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임에도 우리를 위해 변증법과 인간학의 혼합된 약속들을 불태워버린 장본인이 바로 니체였다고 하여 푸코는 니체와의 유전성을 강조한다. 또한 푸코는 “아마도 인간은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는 자일 것”이라고 하여 근대적 주체로서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다. 데리다도 형이상학적 인간주의(휴머니즘)의 모든 가정 자체를 부인하고 ‘인간의 종말’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종말이란 ‘존재에 대한 사유’의 종말이다.” 이처럼 그 역시 형이상학의 해체와 그 이후의 철학을 위해 주체에 대한 단죄와 퇴출을 명령한다.

다음으로, 종말에 대한 교의주의자들의 비상한 외징은 그들 자신의 삶마저도 비상한 죽음으로 종결지은 것이었다. 언제나 ‘미래를 위해 글을 쓴다’는 니체가 56살 되던 1900년 매독으로 인한 정신이상(또는 뇌종양)으로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것이 그 전조였다. 종말과 해체의 교의가 크리스마스병이라는 혈우병처럼 열성 반성유전형질이 되어 격세유전되었듯이 죽음의 방식마저도 푸코와 들뢰즈에게 잠복유전되었기 때문이다. 1984년 58살의 푸코가 에이즈로 인한 패혈증으로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것, 그리고 1995년 70살의 들뢰즈가 돌연히 투신자살한 것이 그러하다. 특히 이미지 철학자인 들뢰즈의 죽음은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보여주는 비상한 외징의 클라이맥스가 되었다.

이들의 죽음은 ‘외징 없이는 유사성도 있을 수 없다’는 푸코의 신념을 실천한 것일까? 어쨌든 푸코는 “하느님은 어떤 사물들을 숨겨놓았으면서도 특별한 형식의 외적이고 가시적인 기호들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게 하셨다”는 16세기 스위스의 의학자 파라셀수스의 말에 따라 죽음의 유사성조차도 종말과 해체의 외징으로 남겨놓았다. 그러나 이들의 비상한 죽음은 또다른 종말의 예후(豫後)나 다름없다. 그것은 니체로부터 시작된 종말과 해체라는 비상한 교의의 종결 징후이기 때문이다. 20세기를 푸코의 세기이고 들뢰즈의 세기라고 서로 덕담하면서도 상속인이나 상속집단을 원하지 않는 프랑스 철학의 특징대로 그들의 죽음은 해체교의적 종말의 징표가 되고 있다.

 

비상해제와 후위게임

이처럼 철학의 종말, 그 비상(非常)은 이미 해제되고 있다. 외징들이 바뀐 것이다. 비상해제나 정상의 생성을 원하는 이들의 후위(後衛)게임, 곧 생성게임이 해체부정이나 통합과 융합으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해체의 여진이 남은 이 땅에서 요즘은 ‘플러스 울트라’(그 너머의 세상)를 외치며 통섭을 부르짖는 환원주의 망령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통섭의 전도사로 위장한 환원주의자들이 푸코와 들뢰즈, 그리고 데리다의 해체를 빌미삼아 재출현한 것이다. 특히 에드워드 윌슨은 니체의 후예들을 가리켜 ‘무정부주의자, 해적, 반역자, 무지한 심령치료사’라고 극언하며 그들의 해체주의를 융단폭격한다. 그는 해체주의가 모든 주제들을 ‘변화의 무자비한 원심분리기’ 속에 쑤셔 넣었다고 힐난한다.

그 대신 윌슨이 주장하는 것은 ‘봉합선이 없는 인과관계의 망’이라는 사회생물학으로의 환원주의적 대통섭이다. 심지어 통섭이 미래의 의심할 수 없는 대안이라고까지 단언한다. 그러나 해체주의를 극도로 혐오하는 윌슨의 팡글로스주의(통섭의 세계가 모든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 최선이라는)도 ‘생물학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반박하는 그 내부의 적과의 후위게임 속에 휘말려 있다.

종말과 해체의 또다른 후위게임은 해체가 아닌 융합주의 거대이론으로의 회귀이다. 해체 이후의 에피스테메(인식소)는 융합(convergence)이다. 미래는 해체 그 너머의 세상, ‘플러스 플러스 울트라’의 융합현실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소생한다면 그는 국가장치가 아닌 실제와 가상의 융합장치, 자본주의 기계 대신 융합주의 기계, 그리고 전쟁기계가 아닌 인터페이스(이종공유) 기계의 상호 횡단적 교섭을 설명하려 들 것이다. 그의 노마디즘은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의 다층구조적 프랙털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융합현실과의 게임이론으로 수정이 불가피할 것이다. 1979년 10월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텔에 찾아온 드레퓌스와 레비노를 보고 ‘나의 암살자들이 왔군!’ 하고 외치던 푸코도 융합현실에 소생한다면 초감도 센서로 된 인터페이스 안경을 통해 그들의 상세한 정보를 불러내며 ‘나의 후원자들이 왔군!’ 하며 반길 것이다.

 

우리에게 해체는?

이처럼 우리는 융합의 최전선(frontland)에 있다. 철학적 유목민이기 이전에 우리는 이미 유목적 생활인이 된 지 오래다. 그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유목을 체득하고 있는 한국인에게 노마디즘은 새롭지 않다. 새로운 리좀인 가상의 다리들(cyber-bridges)이 연결하는 동시편재적 융합현실에서 인터페이스를 만끽하고 있는 한국인에게 노마디즘은 데자뷔(기시감)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유목민으로서의 한국인은 들뢰즈가 말하는 ‘탈코드화’나 ‘기관 없는 신체’, ‘국가장치’나 ‘전쟁기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가 ‘노마드적 사고란 외부의 다양한 힘과 격투하는 사고’라고 정의한들 이미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을 자유자재로 유목하며 융합현실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그게 무슨 의미일 수 있을까?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를 설명하지 못하듯이 ‘지금 여기에’ 가상현실로 열려 있는 우리의 유목현실도 들뢰즈의 노마디즘대로는 전개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융합현실(융합사회체)에서는 이미 자본보다 정보가 들뢰즈가 말하는 ‘충실신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 이광래 교수
 
그의 노마디즘이 우리를 더욱 데자뷔적 착각 속에 빠져들게 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들뢰즈가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어느 나라보다 유목적 삶에 익숙한 우리의 기술환경과 생활문화 때문일 것이다.

이광래 교수/강원대 철학과

 


이광래 교수는 1946년생으로 고려대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연구자로서 초창기 20년 동안은 반철학과 해체주의 계열의 프랑스 철학에 연구의 초점을 맞췄고 그 이후 15년은 일본과 동아시아 사상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지금은 <욕망 이동사> 저술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미셸 푸코-광기의 역사에서 성의 역사까지> <프랑스 철학사> <일본사상사 연구>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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