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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티시즘, 삶을 지배하다

페티시즘, 삶을 지배하다
[철학으로 수다떨기⑤] 자본주의 브레이크를 잃다
황상윤 (suoangel)
 
 

순진한 내가 페티시즘이란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을 때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제발 믿어주기 바란다. <자본론>에서 페티시즘은 '물신화' 내지는 '물신숭배'로 번역된다.

 

이성의 한 구석에서 잠자고 있는 페티시즘이란 단어를 흔들어 깨운 것은 그 이후로 십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다. 선천적인 기계치고 '컴맹'인 나는 아주 어렵게 땀을 뻘뻘 흘리며 인터넷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인터넷에 무지했던 나는 의도와는 무관하게, 실수로, 영문도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미지의 사이트에 접속하게 되었다. 괴 사이트가 내 컴퓨터 모니터를 점령하는 사태를 손써볼 엄두도 못낸 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컴맹이던 나는 정말이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정말이지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 사이트를 통해 나는 페티시즘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게 되었다. 세포 하나하나마다 일어서는 말초신경의 감각을 통해 페티시즘을 이해했다. 뇌를 통한 이성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반응하는 세포 하나하나를 통해 직접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한마디로 '환골탈퇴'한 것이다.

 

포르노와 자본주의의 공통점


페티시즘은 사회과학용어로 물신화라 번역되지만, 정신분석학에서는 성도착증으로 번역된다. 특정 물건을 통해 성적으로 흥분하는 경우를 뜻한다. 페티시즘은 포르노와 만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특정 부위만을 확대하여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포르노가 등장한 것이다.

 

하이힐 페티시, 속옷 페티시, 손가락 페티시 등 다양한 방식으로 페티시 포르노는 존재한다. 하이힐 페티시는 하이힐 신은 다리를 통해서 성적 흥분을 느낀다. 속옷 페티시는 속옷을 통해서, 손가락 페티시는 손가락을 통해서 성적 흥분에 도달한다. 그러니까 페티시즘은 특정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는 것을 말한다.

 

물신화도 마찬가지다. 포르노에서 클로즈업된 음모나 유방이 여성을 대표하듯이, 자본주에서는 상품이 그 사람을 대표한다. 자본주의는 상품 생산과 상품 판매를 통해 유지된다. 상품의 생산과 판매에서 유일한 목적은 돈이다. 대장장이가 칼을 생산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다. 생산된 칼이 일류 요리사가 요리를 하기 위해 사용되는지, 살인자가 사람의 배를 쑤시는데 사용되는지 자본주의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얼마에 팔리느냐만 중요할 뿐이다. 이 자본주의에서는 대장장이는 인간 자체로 평가되지 않는다. 대장장이가 제작한 칼이 대장장이를 대표할 뿐이다.

 

어느 날 저녁 술 한잔 마시기 위해, 솔직하게 고백해서 여러 병 마시기 위해, 단골 술집에 갈 수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술집 문이 닫혔을 수 있다. 단골집 주인이 상을 당했을 수도 있고, 병이 났을 수도 있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술집 문을 닫았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단골집 주인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편하게 술 마실 술집이 문을 열지 않은 것을 아쉬워할 뿐이다.

 

내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사실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다. 내가 술집 주인을 걱정하지 않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단골집 주인과 인간과 인간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술집이라는 상품을 매개로 해서 소비자와 판매자로 만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상품과 상품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가짜가 진짜를 대신한다

 

자본은 끝없는 이윤을 위해 계속해서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기존의 상품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상품을 계속 개발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팔리는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 팔리기 위해서는 욕망을 자극해야 한다. 자본은 새로운 상품만이 아니라 새로운 욕망도 생산해야 한다.

 

가장 손쉽게 욕망을 생산하는 것은 성상품이다. 성상품은 다양한 방식으로 매매된다. 직접적으로 성기사용권이 매매 되기도 한다. 성기사용권이 매매되지는 않지만 다양한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품도 있다. 그리고 성적 이미지라는 아주 고급한 상품도 존재한다.

 

다양한 성상품을 통해 새로운 여성이 창조된다. 이미지로 창조된다. 내가 광적으로 열광하는 송혜교도 사실 알고 보면 실제 여성 송혜교가 이니라 창조된 이미지일 뿐이다. 나는 단지 창조된 여성인 송혜교에 열광할 뿐이다.

 

남성의 욕망은 창조된 여성을 향한다. 실제 여성이 아니라 창조된 여성을 향해 발기한다. 여성은 남성이 욕망하는 창조된 이미지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어 한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의해 코를 세우고, 가슴을 키운다. 그렇게 창조된 여성이 되기를 욕망한다.

 

여성의 욕망도 다르지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구조는 다르지 않다. 여성의 욕망에서도 창조된 남성이 실제 남성을 대신한다. 남성은 여성이 욕망하는 창조된 이미지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어 한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의해 헬스클럽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몸짱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창조된 남성이 되기를 욕망한다.

 

실제 인간은 창조된 인간을 욕망하게 되며, 이를 통해 실제 인간이 창조된 인간처럼 되기를 욕망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실제 인간과 창조된 인간은 전도된다. 창조된 인간이 실제 인간의 욕망을 지배하게 된다.

 

브레이크를 잃어버린 자본주의

 

욕망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무한한 이윤 추구를 위해 상품은 없애버리고 상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상표는 이미지다. 보다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는 구찌란 가방을 사는 것이 아니라 구찌란 이미지를 사게 만들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이렇게 진짜 상품을 가짜 상품인 이미지가 대신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미지가 판매되고 있는 진짜 상품인지도 모른다. 구찌 가방을 사는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가방이 아니라 꾸찌란 이미지인지 모른다.

 

그러다 상표 생산조차 귀찮아졌다. 생산이란 것 자체가 거추장스러워졌다. 무엇인가를 생산한다는 명분보다는 보다 많은 이윤이 중요했다. 생산 자체를 생략해 버리고 자본 자체를 판매하면 보다 많은 이윤이 남게 된다. 현대 금융자본주의의 이윤추구 방식이다.

 

주주자본주의는 생산을 파괴한다. 생산을 파괴함으로써 생산에 투여될 자본을 주식 배당금으로 돌린다. 생산을 파괴함으로써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대량 정리해고도 자행한다. 그러나 자본을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본을 입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산 없이는 어떤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경제 수치가 아무리 사기를 쳐도 생산 없이는 삶의 지속은 불가능하다.

 

자본은 더 이상 생산의 절대적 요소가 아니다. 생산에서 자본의 역할은 계속 줄어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주자본주의에서 자본은 생산을 파괴하고 있다. 이윤 추구를 위해 생산조차 파괴하는 자본주의는 이미 브레이크를 잃어버렸다.

덧붙이는 글 | * 본 기사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대안정책 사이트 이스트플랫폼(http://epl.or.kr)에 공동 게재됩니다.

** 2008년 초에 민연사에서 출판 예정인 책의 내용을 연재 기사로 묶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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