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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대처 수상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우리도 대처 수상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일과 희망·27] 노동개혁의 결과는 일자리 감소와 소득 불평등 심화
 
  2007-11-27 오전 6:39:51
 
   
 
 
  우리나라에서 노사관계의 고질적인 노사대립 문제, 특히 투쟁적인 노조 문제가 나올 때마다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분들로부터 듣는 말이 있다. "우리의 노사관계를 제대로 뜯어고치려면, 영국의 대처 수상 같은 분이 나타나서 노조를 제대로 손 좀 봐 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것도 한 번에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노조의 버릇을 잡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대처 수상이 영국의 노사관계를 개혁하면서 막강하던 노조의 힘을 뺀 것은 틀림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대처 수상의 영국 노사관계 개혁에 관해서는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 너무 많다. 문제는 그것이 마치 사실인 양, 영국의 정치경제적 맥락과 노사관계를 모르는 분들에 의해 너무 쉽게 그리고 자주 인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런 점에서 영국의 노사관계 개혁을 둘러싼 단순화된 오해를 바로 잡고 우리가 무슨 교훈을 얻을 것인가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영국의 노사관계 개혁은 1970년대말 경제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1970년대 말 영국의 전후 정치경제체제의 위기 속에서 노동당 정부에서 보수당의 대처 정부로 정권이 바뀌었다. 노사관계 개혁은 영국 체제 개혁과 함께 동시에 온 것이다. 대처 수상이 정권을 잡을 즈음에는 전후 영국의 정치경제체제는 경쟁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따라서 국가 보조금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던 민간제조업과 공공부문의 완전고용이라는 목표를 수정하고 개혁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자본주의는 이미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 독일 등에 의해 밀리기 시작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전후 호황 속에서 서유럽 자본주의국가의 전후 3대 사회적 합의라고 할 수 있는 케인즈주의 경제정책, 완전고용, 복지국가에 기초하여 일정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더구나 과거 제국주의 유산, 런던 금융시장, 그리고 경쟁력이 약화되긴 했으나 여전히 제조업과 기초기술을 갖고 있었다.
  
  영국은 포드주의의 불완전한 도입, 1970년대 2차례 석유위기를 거치면서 높은 물가인상, 임금인상, 작업장 수준으로 분권화되어 갈등적 노사관계등이 겹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많은 제조업과 공기업들이 완전고용 유지를 위해 막대한 정부 보조금을 받아가면서 유지되고 있었으나 이미 경쟁력을 잃었거나 비효율을 안고 있었다.
  
  1970년대 말 캘러헌 노동당 정부는 전후 복지국가 모델에 기반을 둔 영국의 정치경제체제가 산업경쟁력의 상실로 위기에 봉착한 가운데 노정간의 사회적 합의를 통해 임금억제 - 물가인상 억제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아래 <표-1>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79년 노동당 정부 말기에 영국노조의 조직률은 53.0%로 매우 높았고 파업건수는 현장에서의 작은 분규를 제외하더라도 2000건을 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한 노동손실일수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더구나 다른 나라들에서 2차례에 걸치는 석유파동 속에서 노사정타협을 통해 임금억제 - 물가억제를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가운데 영국에서는 높은 물가인상률과 높은 임금인상률이 상호 악순환 속에서 노사분규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 자료: 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

  대처는 한꺼번에 노조를 꺾은 것이 아니다
  
  영국의 대처 수상은 노조와 노사관계를 매우 서서히 개혁해 나갔다. 흔히 일부 언론이나 정치인 혹은 학자들조차도 영국의 대처 수상은 막강했던 노조를 한 번에 꺾은 것쯤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의 노동운동은 1970년대 초반에 에드워드 히스 보수당 정부와 대결하여 정부를 물러나게 한 적이 있고 1979년 불만의 겨울 때 공공부문 노조는 노동당 캘러헌 정부를 물러나게 하는 등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보수당의 대처 수상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자칫 노조와 전면전을 벌이다가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대처수상의 보수당 정부는 영국 노사관계의 개혁, 그리고 노조의 약화를 위해서 점진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 자료: 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

  위의 <표 -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영국 노사관계는 하루아침에 개혁된 것이 아니다. 대처 정부가 집권한 뒤에도 탄광노조의 파업이 있었던 1984년과 1985년을 제외하고도 노동조합은 상당한 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표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처정부는 단계적으로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고 노사관계를 바꾸기 위해 노동관련법을 개정해 왔다. 노동당 정부 시절 그렇게 막강하게 보였던 노동운동은 높은 실업률, 노동당 정부 아래에서 노동조합의 무분별한 파업 등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고 출범한 대처정부의 점진적 노조약화와 노사관계 개혁 조치에 대해 효과적인 저항을 할 수 없었다.
  
  대처정부의 노조 약화와 노사관계 개혁은 아래와 같은 노동법의 개정을 주요 수단으로 추진되었다. (1)민법으로의 회귀를 통해 노조에 대한 면책특권 축소와 손해배상 청구 (2)단체교섭에 대한 지원수단 축소 (3)파업과 단체교섭의 대상 축소 (4)우편투표 도입 등 파업에 대한 절차적 규제 강화 (5)파업에 따른 해고요건의 완화 (6)클로즈드숍의 불법화 (7)노조의 내부 운영에 관한 직접적 개입 (8)부당해고요건의 완화 (9)최저임금제의 폐지 등이 그것이었다.
  
  탄광노조의 무리한 파업은 오히려 대처의 노조 개혁을 도와줬다
  
  대처수상의 탄광 구조조정과 노조약화에 대항한 탄광노조의 무리한 파업은 노조운동을 더욱 약화시켰다. 영국정부는 1980년대 초 당시 국제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석탄을 생산하고 있었던 석탄 산업에 상당한 보조금을 주고 있었다. 1981년 대처 정부는 탄광노조를 비롯한 노조와의 전면적인 대결이 무리라고 판단하고 탄광노조의 파업에 부분적인 양보를 하기까지 했다.
  
  1983년 3월 국유화되어 있던 탄광을 관리하는 전국석탄위원회의 이안 맥그리거(Ian MacGregor) 의장은 전국탄광노조 지도부를 만나 석탄산업의 축소 계획, 특히 1984 - 1985년 400만 톤의 석탄 생산량을 줄이고 광부들의 일자리도 2만 개를 줄일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당시 강경 좌파였던 아서 스카길이 이끄는 탄광노조는 노동조합은 조직적인 투쟁력에 의거하여 탄광폐쇄를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에는 이미 실업자가 300만 명에 이르고 영국노총 소속 조합원수가 300만 명이나 감소하고 있었다.
  
  대처 정부는 탄광노조와 전면대결을 위한 파업대비를 위해 미리 착실한 준비를 했다. 석탄재고의 확보, 싼 외국석탄 수입경로 확보, 석탄 비수기 선택, 석탄을 연료로 하는 발전소에 석유연료 사용시설 확보, 대규모 기동경찰대 창설로 피켓팅 방지 대비 등이었다. 1984년 대처정부는 탄광노조와의 전면대결을 의식하면서 석탄산업의 구조조정을 위해 비효율적인 일부 탄광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탄광노조 지도부는 당시의 석탄산업의 구조조정의 필요성에 비해 역으로 채탄량 2배 증대, 30-40개 신규탄광 개발, 주4일 근무제, 주 100 파운드 최저임금, 연금수준 인상 등 위한 국가보조금 인상 등 무리한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 대처정부는 다른 공공부문의 파업에 대해서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 타협을 하면서 탄광노조를 고립화했다. 또한 석탄산업의 구조조정 필요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국민적 여론을 의식하지 않고 파업에 돌입한 탄광노조에 대해 영국노총을 비롯한 다른 노조들의 반응은 냉담하여 파업에 대한 연대의사나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탄광노조에서 파업찬반투표를 거치지 않고 파업에 돌입하여 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노조간부들은 불법파업에 중앙 노조기금, 지역 노조기금을 사용함에 있어서 신뢰와 신용의무를 위반했다며 고소를 당했다. 파업찬반투표를 거치지 않는 파업 때문에 5만 파운드의 벌금, 노조의 규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원은 노조 기금의 몰수를 판결했다.
  
  정부와의 대결에 거의 1년을 끈 탄광노조의 파업이 패배로 돌아간 뒤 노동운동은 자신감을 상실했다. 파업 뒤 탄광노조 노조원 수는 6만5000명으로 감소했고 석탄산업 고용 광부들은 1983년 18만7000명에서 1989년 8만5000명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탄광노조가 고용유지를 위해 보조금에 의지하던 석탄산업의 구조조정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정부의 보조금을 늘리라는 시대착오적 주장을 하면서 파업을 벌인 결과 대처정부가 노조정책에서 확고한 우위에 설 수 있게 해 준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이리하여 탄광노조의 무리한 파업이 노동운동의 자신감 상실과 약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대처정부는 노조를 약화시키기 위한 입법을 더욱 본격적으로 도입할 수 있었다.
  
▲ 자료: Waddington 2003. 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

  대처의 노동개혁은 개별 노동자들의 권리도 약화시켰다
  
  대처 정부는 노조 약화와 집단적 노사관계를 개혁했을 뿐만이 아니라 개별 근로자들의 권리도 크게 약화시켰다. 300만 명에 달하는 저임금노동자들에게 적용되고 있었던 업종별 최저임금제(wages councils)를 폐지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높은 실업률 속에 취약계층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수준을 더욱 낮출 수 있게 했다. 보수당 정부 아래에서 고임금소득자와 저임금노동자들 사이의 임금격차가 크게 확대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또한 보수당 정부는 사용자가 절차 미준수나 차별 등에 따른 부당해고라는 부담 없이 아무런 사유 없이도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는 대상자를 기존의 근속 6개월 미만의 근로자에서 2년 미만의 근로자들에게까지 연장함으로써 사실상 무제한 해고의 자유를 허용했다. 사용자의 특권을 보장하는 대신 근로자들의 고용안정을 무시하는 정책을 취한 것이다. 또 여성과 청년 노동자들에 대한 보호(갱내작업, 야간작업금지)조항이 제거되었다. 뿐만 아니라 보수당 정부는 유럽연합에서 1989년 12월 합의한 사회헌장 및 동일노동 동일임금, 집단적 정리해고, 사업의 양도, 비정규직, 노동시간 등과 관련되어 발효된 각종 법적 지침(directives)의 적용을 거부했다.
  
  이리하여 보수당 정부는 개별노동자들에 대한 보호나 권리 규정을 없애거나 유럽연합 회원국들에서 적용되는 지침들(노동자들의 사회적 권리)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경쟁과 규제 완화라는 명분 아래 사용자 편향적인 정책을 편 것이다.
  
  영국경제의 부활 속 그늘…노조가 약화된 만큼 생산력은 강화됐다?
  
  이런 노동개혁, 민영화, 복지축소를 통해 전후 정치경제체제를 개혁하면서 노동시장의 유연화, 경제구조 개혁, 해외자본의 유치 등을 통해서 영국경제가 다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 자료: USDA

  위의 <표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영국은 1970년대 다른 경쟁 국가들보다 경제성장률이 뒤쳐져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마이너스 성장에서 불구하고 1980년대 - 1990년대 동안 다른 나라가 성장률이 떨어지는 동안 영국은 1970년대 수준 혹은 그보다 약간 낮은 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음으로써 미국을 제외한 다른 경쟁 국가들보다 빨리 성장할 수 있었다. 2000년대 들어와서 영국은 성장률을 회복하여 유럽 다른 나라들보다 놓은 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평균 성장률이 2.5% 정도였다.
  
  영국경제의 비교적 높은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영국 경제에 그늘은 남아 있다. 노동에 대한 규제완화, 노조의 현저한 약화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제조업은 보수당 정부 아래에서도 쇠퇴과정을 겪어 왔다. 대처 정부 아래에서 1979년 7백 만을 웃돌았던 영국의 제조업 고용인구가 1990년에는 4백 만으로 줄어들었다. 보수당 정부하의 영국 제조업은 상당수가 공장폐쇄, 생산축소, 해외시장의 상실 등 퇴보적인 구조조정 과정을 거쳤다.
  
▲ 주: 제품수출액과 제품수입액에는 석유와 불규칙적인 제품의 수출입액은 제외되었음, 자료: 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

  뿐만 아니라 1997년 토니 블레어 총리가 집권한 뒤로도 제조업의 고용은 1백 만 개가 줄어들었다. 이리하여 제조업의 구조조정은 생산성의 높은 증가에 따른 전진적인 탈산업화의 결과가 아니라 생산성의 상대적 정체 속에 이루어진 퇴영적 탈산업화의 형태로 이루어져 제조업의 고용 인력이 대폭 감축되었다. 영국 자동차산업의 상징이었던 로버(Rover)자동차는 영국 환자(English Patient)가 되어 몰락한 것도 제조업 쇠퇴를 상징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토니 블레어(Tony Blair) 영국 총리도 2000년 12월 1일 연설에서 제조업의 낮은 생산성 문제를 제기했고, 미국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포터(Michael Porter) 교수도 영국 기업들이 기존의 비용위주 경쟁에서 부가가치, 혁신 중심의 전략으로 옮겨갈 필요성을 제기했다.
  
  제조업만을 본다면, 영국은 대처 정부에 의해 노조의 약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었으나 제조업의 부활 혹은 성공적 고도화를 낳지는 못했다. 그 결과 옆의 <표 - 6>에서 보듯이 상품무역에서 역조현상은 여전히 확대되어 2006년에는 상품무역 적자 규모가 709억 파운드(약 1400억 달러) 규모로 커졌다.
  
▲ 영국의 소득불평등도 (단위: 지니계수) 자료: 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

  영국의 소득불평등도는 1970년대 노동당 정부 시절에는 완화되었다가 대처 정부가 주도한 노조와 노사관계의 개혁의 결과 그리고 사회복지제도의 개혁의 결과 지니계수 값이 급격하게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영국에서 대처 정부가 이미 위기에 봉착한 영국의 전후 정치경제체제를 신자유주의적 개혁으로 바꾸어 놓았으나 그 이면에 소득불평등, 임금불평등이 심화되는 사회적 양극화를 가져온 것이다. 노동당 정부는 보수당 정부의 주요 정책을 이어받아 추진한 결과 소득불평등도에서는 별다른 개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되기까지 했다.
  
  대처정부와 그를 뒤이은 존 메이저 보수당 정부에 의해 영국의 집단적 노사관계는 개혁되었으나 지나치게 신자유주의로 기울어 소득불평등, 근로자의 개별적, 집단적 권리의 제한 등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아래의 표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영국에서 1990년대와 2000년대 들어 노조의 약화와 노사관계의 개혁 이후 파업건수나 파업으로 인한 노동손실일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개별 노사분규(부당해고, 동일임금, 성차별, 인종차별, 근로계약 위반, 임금보호 등)의 발생빈도를 나타내는 알선중재위원회(ACAS)에 제소하는 건수 그리고 고용심판소(Employment Tribunals)에 제소하여 처리된 개별 노사분쟁 사건 수는 1980년대 보다 2.5배 가량 늘었음을 알 수 있다.
  
▲ 자료: ACAS Annual Report and Account 각 년도s. trade union statistics - Certification Officer Annual Reports. 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 Labour Dispute in 2006. Economic and Labour Market Review Vol 1(6) 2007년 6월호. Employment Tribunals Service. Annual Report & Account. 각 년호. Department of Trade and Industry.

  이것은 집단적인 노사관계가 약화되면서 개별적 노사갈등이 해결될 수 있는 채널이 없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개별적인 노사분규로 발생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1997년 노동당 집권 후 보수적 노동개혁은 완화됐다…앞으로 5년 우리는?
  
  보수당 정부의 지나치게 편향된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은 1997년 토니 블레어가 집권한 뒤 일정하게 시정되고 있다.
  
▲자료: EIRR 2003. 12. p. 30. Department of Trade and Industry. 2007.

  특히 부활된 전국단일 최저임금제는 2006년 10월 시간당 5.35 파운드(1만700원)로 전체 노동자들의 10%인 약 240만 명에게 적용되어 저임금노동자들에게 적지 않은 혜택을 주었다. 여성 근로자의 14%가 이들 최저임금의 적용을 받고 있으며 18-21세 청년 근로자의 40%가 최저임금 적용대상이고 65세 이상의 고령근로자의 23%가 최저임금의 적용을 받고 있다. 최저임금제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들이나 보수당에서 우려하던 일자리 감소는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노조와 관련된 권리(일정한 요건 충족 시 사용자의 노조 인정 의무, 공공이나 노조의무를 위한 시간 공제, 노조활동 보호), 개별 근로자들의 권리(부당해고, 부당차별당하지 않을 권리, 남녀 동일임금, 출산유급휴가, 산후 직장복귀 권리, 정리해고 시 퇴직수당 수령 권리, 노동시간 보호, 단시간 근로자에 대한 동일 처우, 계약직 근로자들에 대한 보호)를 부활시키고 있다. 보수당 정부에 의해 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이었던 정책이 노동당 정부에 의해 부분적으로 완화되어 왔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노동당 정부가 정책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선회한 결과라기보다 유럽연합이 유럽경제통합에 따르는 사회갈등을 완화하고 사회적 통합을 촉진하기 위해 추진해 온 각종 고용과 노동관련 지침을 영국에 적용함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결론적으로 영국의 노동운동은 영국 경제가 경쟁력을 잃고 위기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당 정부 아래에서 사회적 타협에 의한 '협상을 통한 개혁'의 길을 반대하고 협소한 실리를 추구하다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보수당의 대처 수상을 맞이한다. 대처 수상이 점진적으로 노동법 개정 등을 통해 노동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투성을 앞세운 탄광노조가 탄광의 구조조정에 반대하며 시대착오적인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다가 패배함으로써 오히려 대처 수상의 노조와 노사관계의 개혁은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 이런 방식의 영국 노동개혁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시장개방과 세계화에 따른 유연화 요구를 '협상에 의한 변화'를 통해서 수용함으로써 보다 점진적이고 각 이해당사자의 손익이 일정하게 고려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과 대비가 된다.
  
  보수당 정부는 영국의 전후 정치경제체제를 노조 약화, 노동법 개정, 사회복지 축소, 민영화 등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개혁하여 1980년대 중반 아래 성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불균등 성장 속에서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와 일자리의 큰 감소, 소득불평등의 큰 증가, 임금격차의 확대, 개별적 노사분쟁의 증가 등 사회적인 그늘과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1997년 노동당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보수당 정부의 정책은 대부분 그대로 수용되었으나 지나치게 신자유주의적 요소들은 부분적으로 완화되었다.
  
  내년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양극화된 고용시스템을 개혁하는 노동개혁이 주요한 과제로 등장할 것이다. 새 집권세력이 노동개혁에 어떤 처방을 들고 나올 것인가는 집권세력의 청사진뿐만 아니라 노사 주체들의 전략이라는 변수에 의해서도 달라질 수 있다. 누가 집권하든 우리의 노동개혁 처방은 영국과 유럽의 사회모델 국가들의 중간쯤 될 것이지만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는 집권세력의 철학만큼이나 노사주체들의 전략적 선택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배규식/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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