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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같은 내 인생, 그녀가 위로하네

 

 

개같은 내 인생, 그녀가 위로하네


[한겨레] 얼음처럼 냉정하고 야심으로 가득차 있지만 직업적 열정으로 가득찬 장준혁 과장을 보면서 저런 의사 한번 만나봤으면 했다. 말썽장이 고딩이지만 때로 속 깊은 오빠같고 때로 아이처럼 해맑은 윤호를 보면서 ‘연애는 나이 순이 아니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버스에서 허벅지를 더듬던 손길에서 부부싸움한 직장 상사의 화풀이까지 감당해야 했던 날 막돼먹은 영애씨를 불러내 함께 소주 한잔을 하고 싶었다.

드라마나 영화, 또는 만화나 광고의 캐릭터는 단순한 등장인물이 아니다. 이들은 지금 내 옆에 성큼 다가와 상처입은 나를 위로하기도 하고,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뤄주며, 또 사그러들었던 열정에 불을 지펴주는 친구다.

 

 

 
2007년에도 수많은 캐릭터들이 우리를 들뜨게 했고, 눈물 흘리게 만들었으며 사는 시름을 잠시라도 잊게 해줄만큼 시원한 웃음을 선사했다. 〈Esc〉는 2007년을 마무리하는 기획 1탄으로 올해의 캐릭터들을 선정했다. 그들과 함께 했던 즐거운 시간을 곱씹어보면 올 한해도 허무하게 지나간 것만은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직업·외모 막론하고 다양한 여성에게 사랑받는
<막돼먹은 영애씨>의 김현숙


“나는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 기사에는 영애를 묘사할 때 꼭 평균 이하의 외모라고 적혀 있더라구요.” 영애씨가 현숙씨인지, 현숙씨가 영애씨인지 헷갈리는 <막돼먹은 영애씨>(이하 영애씨)의 김현숙이 인터뷰 머리에 농담처럼 말을 꺼냈다. 이 말엔 영애씨가 케이블 프로그램이라는 시청률의 태생적 한계를 가졌음에도 수많은 공중파 드라마의 여성들을 제치고 수많은 20~30대 여성들에게 ‘나 같은’ 캐릭터로 열광적인 공감을 얻은 이유의 핵심이 있다.

일방적 캐스팅 제의에 처음엔 황당

굳이 계보를 따지자면 영애는 삼순이의 사촌 동생쯤 된다. 넘쳐나는 건 살이고 부족한 건 돈, 남자, 타인(특히 남자)의 배려와 존중 …, 끝이 없다. 하지만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 가운데 가장 인간미 넘치는 삼순이였다 할지라도 그녀는 술 마시고 남자 등에 토를 해도 사랑스러운 여주인공의 카테고리 안에 남아 있었다. (늘씬한 김선아가 통통하고 귀엽게 나오네?) 하지만 영애의 외모는 엄마에게조차 “저, 응뎅이 좀 봐. 저러니 시집을 가겠냐구”라는 핀잔을 듣는, 말 그대로 대한민국 평균치다. 그러니 ‘진짜’ 이영애 같은 공주, 왕자들로 빼곡한 텔레비전에서 평균 이하로 보이는 거고, 또 “러시아 백마” 따위의 이야기를 태연하게 지껄이는 ‘막돼먹은’ 남자들에게는 ‘덩어리’로 불릴 밖에.

우리 나이로 서른 살, 영애씨와 동갑인 김현숙이 없었더라면 영애씨는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을까. 태어나기나 했을까? “<미녀는 괴로워>가 끝났을 때쯤 전화가 왔어요. 보통 캐스팅 제의라면 한번 만나자고 할 텐데, ‘김현숙씨를 모델로 쓰고 있으니까 오셔야 합니다’라고 일방적인 통보를 하는 거예요. 황당해서 소속사에 전화했죠. 나 모르게 출연 진행한 거 있냐고. 소속사도 금시초문이라데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갔다가 작가들과 처음 만나 수다를 떨면서 “10년 사귄 친구처럼 필이 확 꽂혀” 버렸다. 회사에서는 같잖은 상사에게 무시당하고, 길거리에서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에게 놀림당하고, 소개팅 나가서는 나보다 스무 살 더 먹어 보이는 남자에게 나이 많다고 외면당하는 게 어디 한두 사람의 경험이었을까.

김현숙을 <영애씨>의 모델로 추천한 건 바로 티브이엔의 송창의 대표였다. “출산드라와 <미녀는 괴로워>, 제가 엄마와 토크쇼 나왔던 것까지 다 보셨나 봐요. 그래서 작가들한테 ‘나 믿고 써라’라고 하셨다는데, 그 이후 취향 독특하다는 이야기를 엄청 들었다죠?(웃음)”

시트콤도, 다큐멘터리도, 드라마도 아니면서 또 그 셋의 혼합 변종 쇼로 자리잡은 <영애씨>의 핵심은 현실성이다. 삼순이도 결국 왕자님(현빈)을 만났다. 하지만 서른 살 먹은 여자는 안다. 누더기 입은 신데렐라의 손을 꼭 잡아주는 왕자님은 동화책과 드라마에만 등장한다는 사실을. 영애씨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눈물 콧물 흘리고 악다구니 치며 각자의 삶을 사는 동안 시종 <인간극장> 톤으로 차분하게 나오는 내레이션처럼 “드라마틱한 사건은 드라마에서나 벌어진다”는 걸 <영애씨>는 가감없이 보여준다. 영애는 시즌1에서 난데없이 ‘도련님’과의 짧은 연애로 백일몽을 꾸다가 깨어나더니 시즌2에서는 돈 천만원 떼어먹고 달아났던 첫사랑과 해후해 다시 한번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내 인생은 왜 이러냐.” 오늘도 영애는 단짝 지원이와 한잔 마신다. “저도 가끔 영애가 답답할 때가 있어요. 비참하게 차인 첫사랑과 다시 만나는 것도 그렇죠. 그래서 주변 스태프들에게 물어보니까 외로우면 그래, 다 속아 하더라구요. 미련이 남아 있다면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사랑이란 게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잖아요.”

전 세계를 아우를 듯한 그녀의 활약

김현숙은 요새 촬영 중인 영화 <어젯밤에 생긴 일>에서 “남자를 ‘떡 주무르듯’ 가지고 놀고, 자신감 넘치는 커리어우먼”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영애씨의 반대 캐릭터? 겉보기에는 그럴 수 있지만 김현숙이 연기하는 세련된 ‘모던 걸’은 알고 보면 영애씨의 또다른 얼굴일 수 있다.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이라고 해도 힘들고 외로운 순간이 있잖아요. 또 삽질했구나, 후회할 때도 많고. 그래서 영애씨가 직업과 외모를 막론하고 다양한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거 같아요.” 맞다. 비슷한 고민과 좌절을 하는 또래 여성들은 모두 영애다. 요새 일본 티브이에서도 회사에서는 잘나가는 전문직 여성이지만 집에만 오면 ‘추리닝’ 바람에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뒹굴뒹굴하는 ‘건어물녀’가 인기라니 겉 다르고(강하다, 때로는 멋져 보인다), 속 다른(여리고, 고민 많고, 게으르고, 의지박약인데다가…) 영애씨의 활약은 앞으로도 전세계를 아우르며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일러스트레이션 신예희/ 〈매거진t〉 ‘t사감의 기름진 시선’ 연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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