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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집권땐 나라 망한다?

한나라 집권땐 나라 망한다?
과학적으로 한번 따져봅시다
[기획리포트] 과학과 정치의 닮은 점은 '관찰의 이론의존성'
텍스트만보기   이종필(ststnight) 기자   
 
 
과학 발전에 있어서 실험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은 보통 사람들에게 매우 널리 퍼져있다.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든지, 무슨 연구소에서 어떤 이론을 실험적으로 검증했다든지 하는 얘기를 우리는 심심찮게 듣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아무런 이론적 편견도 없이 설계된 객관적인 실험의 결과로부터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자연법칙을 이론적으로 구성해 낸다'는 상식을 받아들인다.

나 또한 대학교 1학년 때 물리실험시간을 떠올려 보면, 그리고 그때 과학에 대해 가졌던 심상을 생각해 보면 이 생각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자연법칙은 객관적 실험을 거친 결과다?

예컨대 평면대 위의 수레에 줄을 연결해서 도르래를 통해 수직으로 늘어뜨린 다음 그 끝에 다양한 질량의 추를 연결해서 평면대 위의 수레의 가속운동을 관찰하는 실험이 있다.

수레를 가속시키는 추의 질량 변화와 수레 속도의 변화(즉 단위 시간당 이동 거리의 변화)를 비교해서 우리는 F=ma(F:힘, m:질량, a:가속도)라는 뉴턴의 운동방정식을 실험적으로 확인한다. 나는 오랜 시간 운동량(p)의 질량과 속도(v)에 대한 관계(p=mv)나 에너지(E)의 관계(E=0.5mv²)도 이런 방식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오해'했었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중고등학교 물리수업도 아직 이 틀을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상식'은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물론, 자연현상에 대한 면밀하고도 비편향적인 관찰로부터 직접적으로 어떤 법칙을 이끌어 낸 경우도 있다. 티코 브라헤가 남긴 방대한 천문학적 자료로부터 그의 제자 케플러가 그 유명한 자신의 3가지 법칙들을 유도한 경우라든지, 막스 플랑크가 1901년 흑체복사 곡선을 빛의 양자화 가설에 입각해서 완벽하게 설명한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케플러마저도 자신의 법칙들을 구축할 때 플라톤의 정다면체 '이론'에 기대고 있고, 플랑크가 촉발시킨 양자역학은 이른바 '코펜하겐 해석'으로 불리는 몇 가지 가설하에 구축되어 있다. 뉴턴의 운동방정식 'F=ma'는 떨어지는 사과와는 무관하게 힘(Force)에 대한 뉴턴역학의 정의에 가깝다.

실험 결과가 이론의 존폐를 결정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론이 실험의 구성과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이론적인 배경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어떤 실험을 구상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실험이란 어느 이론을 물질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이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새로운 현상이 발견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처음부터 무작정 뭔가 새로운 현상을 보려고 시작하는 실험은 없다. 그 실험의 결과 또한 이론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론과 실험의 이런 관계는 핸슨의 '관찰의 이론의존성(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이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이론이 실험결과 해석을 바꾼다

보통 사람들(혹은 잘 모르는 과학자들)은 생소할지 모르지만 과학에서 이론적 과정이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예는 무척 많다. (관찰의 이론의존성을 설명하면서 몇 가지 '관찰적 사실'만을 주된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그러나 이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에 대한 첫 실험적 검증은 1919년 영국의 천문학자 에딩턴에 의한 것이었다. 일반상대론에 의하면, 질량이나 에너지의 존재가 그 주변 공간을 휘어지게 한다. 그 주변을 지나는 다른 물체(혹은 빛마저도)는 이 휘어진 공간을 따라 운동하게 된다. 이는 마치 침대 위에 무거운 볼링공을 올려놓으면 그 일대가 움푹 패는 것과 같다. 주변에 골프공이라도 있다면 이 패인(즉 휘어진) 면을 따라 볼링공 쪽으로 굴러갈 것이 분명하다.

이런 효과는 물론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극히 미미하다. 과학자들은 멀리 떨어진 별에서 나온 빛이 지구에 이를 때 질량이 아주 큰 태양 주변을 지나면서 그 경로가 휘어질 것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그런데 평상시에는 태양의 빛이 워낙 강렬해서 멀리서 오는 희미한 별빛을 제대로 관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달이 태양을 가리는 일식을 기다려 관측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에딩턴은 일반상대론의 예측과 어긋나는 사진 검판을 일부러 제외했다는 의혹을 사게 되었다. 에딩턴은 망원경의 초점 등의 문제 때문에 제외했다고 해명했지만 적지 않은 과학자들은 에딩턴의 실험 결과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이후에 실시된 일식 실험에서도 그리 만족할만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이는 노벨상 위원회에서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안기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였다.(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은 것은 1925년으로, 주로 광전효과-금속에 빛을 쬐면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들이 일반상대론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잇따른 실험에서 만족할만한 결과가 없었음에도 많은 과학자들은 오히려 일반상대론을 지지했다. 그 이유는 일반상대론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인 매력 때문이었다.

패러다임 보호 본능

 
▲ 에딩턴의 실험
ⓒ 이종필
 
실험하는 사람들이 기존에 알려진 결과나 상식과 동떨어진 결과를 얻게 되면 처음부터 새로운 뭔가를 발견했다고 여기기보다는 실험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오차들을 우선적으로 점검하게 된다. 기존 패러다임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보정의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친 후에도 여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학계의 수수께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애초의 이상한 결과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각종 제한조건들을 점검하는 것은 무슨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는 분명히 데이터 조작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 실험에서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난다. 규모가 꽤 큰 실험그룹에서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이 실험그룹에서 관심 있었던 물리량은 어떤 비율에 대한 사인(sin)함수 값으로 표현된다. 중고등학교 때 다들 배웠겠지만, 사인함수는 기본적으로 직각삼각형의 빗변에 대한 다른 변의 비율로 정의되는 양이다. 따라서 이 값은 결코 1을 넘을 수 없다.

그런데 처음 데이터를 열고 분석을 해 보니 그 결과가 1을 약간 넘는 것으로 나왔다고 한다. 사인함수 값이 1이 넘는다고 나왔으니 그 결과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심리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내부적으로 격론이 벌어졌고 다시 다양한 제한조건들을 계속해서 점검하고 오차를 줄이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 최종적으로 0.99라는 결과로 공식발표하게 된다.

이처럼 아무리 새로운 결과가 실험에서 관측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새로운 자연현상이나 새로운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이 알고 있는 혹은 몸담고 있는 기존의 이론적인 체계 내에서 그 결과를 해석하려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때까지 일종의 유예기간이 필요하다.

어느 분야보다 합리적이며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과학에서도 자연세계에 대한 관찰과 실험 과정에서 일종의 '선입견'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면, 그보다 더 애매한 온갖 사회 영역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하다고 예상할 수 있다. 최근의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면 이 점이 명확해진다.

망국론 부추기는 정치에 객관적 관찰 가능한가

 
▲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은 '무능한 좌파정권이 나라를 망친다'는 논리 펴고 있고, 노무현 대통령은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끔찍하다고 말하고 있다. 두 주장 모두 합리적인 관측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참여정부 이후 지난 5년은 한마디로 '무능한 좌파정권 대 꼴통수구보수'의 격돌로 요약된다. 한편에서는 정권 초기부터 이른바 <조중동>이 신정부를 '좌파=빨갱이=무능'으로 몰아붙였다. 많은 사람들은 언론보도나 그 주장들이 모두 객관적인 사실취재와 전문가들의 합리적인 분석 결과라고 쉬 믿는다.

그러나 과학 활동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경우는 드물다. 소재·사진·취재원·전문가, 이 모두는 편집부의 '이론'이나 선험적인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성'된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옳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참여정부 들어서 경제가 나빠지고 있다는 기사를 쓰고 싶으면 재래시장을 찾으면 된다. 이곳 경기가 안 좋은 주된 원인이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에 의한 것인지 인근 대형할인점에 의한 것인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무능한 좌파정권이 나라를 망친다'는 자신의 이론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나라가 망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나라가 망해가는 데이터 수집에 열을 올렸다. 2003~2004년에 걸친 대대적인 경제위기론이 그러했고 종부세 '세금폭탄'도 여기 해당한다.

다른 한편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주장이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혹은 전쟁난다)'는 것이다. 손학규 전 지사가 탈당하긴 했지만, 이른바 빅2인 이명박-박근혜 후보는 많은 국민들의 예상을 뒤엎고 당내 경선에 모두 참여했다. 어찌되었든 이것은 우리나라 정당정치가 최소한의 상식과 룰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비록 자신과 정견이 다르지만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나라가 망하지 않을 만큼 그 사회가 성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정말 그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 자신의 그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차기 정부에서 지금처럼 또 무리하게 '나라 망해가는 관측'에만 열을 올릴 것이 분명하다.

관찰의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과학자들은 어지간한 이론이나 주장은 잘 안 믿는다. 또한 실험 뿐만 아니라 이론 그 자체의 내적 정합성을 따지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들인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론이나 실험도 쉽사리 거부하지 않는다. 그 결과 과학에서는 온갖 종류의 다양한 이론과 실험결과들이 대체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과학의 힘이다.

세상만사 모든 일을 과학 하듯이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다양한 가치판단이 민주적이고 평화롭게 공존하고 또 공유될 수 있다면 아마도 그런 사회가 열린 사회이고 선진화된 나라가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모두가 이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관찰의 한계를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오마이뉴스 기획취재기자단 기사입니다. 이종필 기자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연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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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희,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quot;

 

 

 

조승희,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애도 편지 잇따라... 용서, 유족 치유 기원
텍스트만보기   연합뉴스(yonhap)   
 
(블랙스버그=연합뉴스) 이기창 특파원 = "너를 미워하지 않아. 오히려 가슴이 미어진다."

"너를 향한 사람들의 가슴 속 분노가 용서로 변하기를…."

"네가 그렇게도 절실히 필요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슬펐단다."

버지니아텍 참사의 범인인 조승희(23)씨의 끔찍했던 삶을 용서하고 안식과 평화를 기원하는 내용의 편지들이 캠퍼스 내 추모석 앞에 잇따라 놓여 눈길을 끌고 있다.

버지니아텍 캠퍼스 중앙 잔디밭인 드릴 필드에 타원형으로 놓인 참사 사망자 33명 추모석 중 왼쪽 네 번째 조승희군 추모석에는 학생들로 보이는 바버라, 로라, 데이비드 등의 이름이 적힌 애도 편지가 나란히 놓여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않는' 성숙한 '용서의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추모석은 버니지아텍 상징석인 화강암 덩이로 그 위에는 장미 10송이와 카네이션, 백합, 안개꽃 등이 놓여있고 소형 성조기와 버지니아텍 교기도 앞쪽에 세워져 있다. 21일에는 유리컵에 든 촛불도 놓였다.

왼쪽에서 네 번째에 놓인 높이 20㎝, 가로 30㎝ 정도 크기의 조씨 추모석 앞에는 버지니아텍을 상징하는 VT 모양의 카드가 놓여 있고 여기에 '2007년 4월 16일, 조승희'라고 쓰여 있다.

또 추모석 오른쪽 옆에는 "조승희의 가족에게... 사랑으로(To the family of Cho Seung Hui with love)"라고 쓰인 종이도 있다.

조씨의 추모석에는 특히 "네가 그렇게 절실히 필요로 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가슴이 아팠단다, 머지않아 너의 가족이 평온을 찾아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느님의 축복을"이라는 등의 편지가 놓여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이 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편지 작성자는 노트 종이에 손으로 이 같은 글을 쓴 뒤 '바버라'라고 이름을 적었다.

데이비드라는 다른 작성자가 쓴 편지는 "승희, 내가 너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손을 내밀어 그의 삶을 좀 더 좋게 바꿀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가지기를, 너로 인한 지금 이 고난을 네 가족이 이겨낼 수 있기를, 그 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네가 가한 손상이 곧 치유되고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자리한 분노가 용서로 바뀌기를, 33명 희생자 모두의 고난이 아스라한 기억으로 사라지기를 나는 기원한다"고 적었다.

로라는 "승희야,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아, 네가 아무런 도움과 안식을 찾지 못한 게 너무 안 됐고 가슴이 미어진다, 네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하기조차 어렵지만 이제는 평화와 사랑도 조금은 찾기를 빈다, 우리가 너무 이기적이어서 네가 그렇게 분노했다는 생각을 해본다, 네 친구가 되어주지 못해 미안해, 하느님께서 너를 받아주시기를 기도하마"라고 썼다.

이 같은 애도 편지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감을 표시하며, 조승희에게도 다른 희생자들과 똑같은 슬픔을 느낀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교직원은 "이 비극은 너무나 슬픈 일이지만 누구를 미워하거나 분노할 일이 아니다"라며 "조승희에게도 처음부터 다른 32명과 똑같은 슬픔을 느꼈다"고 말했다.

조승희의 추모석 앞에서 한동안 흐느낀 재미교포 임남숙(59)씨는 "어린 나이에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고 힘들었으면 그랬겠느냐"며 "자식이 있는 부모라면 누구든 그를 미워하기보다는 가슴 아프고 불쌍한 마음이 앞설 것"이라고 말했다.

버지니아텍 1996년도 졸업생인 딸과 함께 버지니아주 애난데일에서 블랙스버그까지 찾아온 임씨는 "이민온 한인들은 사는 데 급급해 자식들이 학교에서 얼마나 힘들고 고통받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아이들과 더 많이 대화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어려움을 이해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강조했다.

lkc@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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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에 침 뱉는 기분 아시나요?

 

 

 

내 얼굴에 침 뱉는 기분 아시나요?
우리는 '조승희 사건'을 이해합니다"
[조승희 그 후 ① - 르포] '국경 없는 마을' 경기 안산 원곡동의 '코시안' 아이들
텍스트만보기   장윤선(sunnijang) 기자   
 
 
국내 체류 외국인 100만 시대. 2000년 이후 급격히 증가한 이주 외국인이 한국 사회의 주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럼에도 이주민을 위한 대책은 요원하다. 정부도 '버지니아텍 총기난사사건' 이후 국내 이주민을 위한 다양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나섰다. '한국판 조승희 사건'을 우려한 탓일까.

<오마이뉴스>는 지난 16일 발생한 총기사건 이후 한국 사회가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할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우리 안의 인종주의'와 '이주민과 함께 살기 위한 정책 대안'을 다룬 기사를 내보낼 예정이다. 이 기사는 그 첫번째다.
 <편집자 주>
 
 
▲ 경기도 안산 원곡동에 있는 '코시안의 집'. 이곳은 이주노동자 자녀 보육시설이다.
ⓒ 오마이TV 문경미
 

22일 정오 지하철 4호선 안산역 광장.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동남아시아계 청춘남녀들이 삼삼오오 벤치에 앉거나 한 귀퉁이에 서서 밀어를 속삭였다. 안산역 지하차도 안에서는 중국말로 흥정하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눈에 띄었고, 길 건너편 거리에는 베트남 쌀국수집이 현지 음식점인 양 허름한 간판을 달고 있었다.

시화공단과 반월공단의 지리적 요충지인 원곡동은 어느새 '이주민들의 명동'이 돼 있었다. 원곡동은 양고기를 파는 식육점부터 죽순을 파는 야채가게, 본국으로 전화를 걸 수 있는 전화방 등이 이국적 향취를 물씬 풍기는 다문화 거리다. 한글 간판보다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 말들이 이 동네 간판의 주를 이루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대다수 한국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코시안(Korean과 Asian의 합성어), 한국에 살고 있는 아시아인들이었다.

'국경 없는 마을' 경기 안산 원곡동에 있는 '코시안의 집'은 이주노동자 자녀들을 돌봐주는 보육시설이다.

코시안의 집을 찾는 데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길을 묻는 기자의 한국말을 알아들은 한 50대 남성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동네를 몇 차례나 뱅뱅 돌았을 것이다.

코시안의 집엔 담이 없었다. 대신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꽃 사이로 난 계단 길을 올라가니, 마루에서는 많은 다국적 아시아인들이 떡과 음료수를 나눠먹고 있었다. 일자리를 찾아 이역만리 타국에 온 이주민 자녀들. 그들에게 코시안의 집은 안식처였다. 이곳에서 몇몇 아이들과 최근 벌어진 '버지니아텍(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1. 소외감 "조씨 겪었을 고통 짐작돼... 한국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조승희씨 사례는 제가 한국에서 겪은 사정과 참 비슷해서 더 안타까웠어요. 물론 제가 조씨의 범행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건지 이해됩니다. 몽골에서 온 저는 조씨처럼 한국 친구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혼자만의 세계에 빠졌죠. 내성적인 성격에다 말도 안 통해 한국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내지 못했고, 따돌림을 당하면서 증오심이나 악한 감정이 생기기도 했어요. 피부색이 같은 저도 이 정도인데, 미국에서 조씨가 겪었던 일은 더 심했겠죠."

몽골인 무탕카(21·가명·대학생)의 말이다. 조씨가 겪었을 심적 고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14살에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 온 무탕카는 "나와 조씨의 형편이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돈을 벌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한 어머니를 따라 무작정 이주한 무탕카와 세탁업을 하며 어렵사리 미국생활을 이어가는 가정에선 자란 조씨의 처지는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학교에서도 이번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에 대해 많이 토론했어요. 저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모두 다니다 말았는데,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참 어려웠기 때문이에요.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이 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무탕카의 한국살이는 낯설음의 연속이었다. 비자문제로 불법 체류했기 때문에 신분상의 불안함도 무탕카를 억누르는 요인 중 하나였다. 고된 노동에 지쳐있는 어머니도 무탕카의 속사정을 훤히 알기 어려웠다.

"가난한 외국인이 현지에서 돈 벌면서 생활하기도 빠듯하기 때문에 자식을 하나하나 챙기며 돌보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냥 학교에 잘 다니는 줄만 알지, 학교생활이 어떤지 꼼꼼히 체크하기 어렵잖아요. 어머니는 한국말에 익숙지 않고 한국 학교에 대해서도 잘 모르셨거든요. 제가 어머니에게 정확하게 자주 말씀드리지 않으면 잘 모르시죠."

무탕카는 고등학교 시절, 하루하루 못 견딜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두발자유화에 찬성한다고 하면, 일부 교사들이 '너는 자격이 없다, 신분이 불안정한데도 학교 측이 너를 받아줬으면 순순히 학교가 하자는 대로 따르라'는 식이었다. 강한 반발심이 생겼지만 속으로 누를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회의 이방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 다문화가족협회는 22일 경기도 안산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 오마이뉴스 장윤선
 
#2. 배타적 분위기 "학교서도 한국어만 써라" 강요

우친츠르(17·가명·고등학생)가 겪은 일도 비슷하다. 또래보다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일도 자존심 상하는데, 한국 학생들이 시비를 거는 것은 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고 했다.

"애들이 욕하고 놀릴 때는 같이 때리고 싶어도 못 때려요. 그냥 참고 지내요. 몽골에 대해 기분 나쁜 말을 많이 해요. 몽골에 건물이 있느냐는 식이에요. 당연히 있다고 해도 잘 믿지 않아요. 학교에서 몽골 아이들끼리 떠들면 선생님이 몽골말을 하지 말라고 해요. 우린 한국말이 서툰데도 학교에서는 한국말만 쓰라고 하죠. 그럼 답답해집니다."

일제 식민지 시절 학교에서 일본말을 강요했던 것처럼, 한국 학교에서는 한국어만 쓰라고 몽골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반발하면, 곧장 공포를 느끼게 하는 말이 날아온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초등학교 때 한 반에 외국인이 한 명 정도였어요. 같이 놀 친구가 없으니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져요. 자연스럽게 내성적인 성격이 되고. 저는 조승희씨가 한 일이 이해가 돼요. 정말 화가 날 때가 있어요. 학교에 무슨 일만 생기면 모두 제 탓을 해요. 하도 놀려서 멱살을 잡았을 뿐인데, 나이 많은 네가 동생뻘인 친구를 때렸다고 야단맞아요. 정말 억울해요. 그래도 학교에서는 제 편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가슴이 콱 막히죠."

아농드(14·가명·중학생)도 평소에 친구들에게 "몽골에서 왜 왔느냐, 한국에 너는 필요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아농드는 참고 참고 또 참다가 폭발하면 친구를 때리고 결국 투석전을 한 판 치르게 된다.

"계속 참아요. 그런데도 계속 약 올리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그땐 주먹이 날아가요. 싸워서 경찰서 가게 되면 부모님과 함께 강제추방되기 때문에 많이 참지만, 그래도 정말 화가 날 때는 물불을 가리기 힘들어요. 내 얘기를 잘 안 들어요. 내가 아무리 제대로 말을 해도 결국 화살이 저한테 돌아오고, '너희 나라로 가!'라는 말만 듣게 돼서 어느 때는 부모님께 몽골로 돌아가자고 애원해보기도 했어요."

아버지는 새벽 5시에 출근해 밤늦게 돌아오기 때문에 아농드의 고민을 들어줄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다. 어머니와 학교생활에 대해 간간이 얘기를 나누지만 솔직하게 말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불편한 학교생활을 자주 얘기하면 가족이 더 힘들어질까봐 속으로 삭이게 된다는 것이다.

#3. 피부색 차별 "까맣다고 '아프리카인'이라고 놀려"

 
▲ 뜨구네 가족. 라니는 학교에서 '인도네시아'로 불린다. 자주 들으면 기분좋은 소리는 아니다.
ⓒ 오마이뉴스 장윤선
 
조영철(11·가명·초등학생)군은 베트남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빠가 베트남에 가서 어머니와 결혼한 경우다. 그런데 친구들이 간혹 '왜 한국에 쳐들어왔느냐'고 해서 어리둥절하단다.

김석훈(14·가명·중학생)군도 학교에서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놀림을 받는다. 석훈이는 방글라데시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산 원곡동이 고향인 셈이다. 아버지의 피부색을 많이 닮은 석훈이는 학교 형들이 '아프리카'라고 놀려서 학교 다니기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학교에 가면 형들이 매일매일 놀려요. 아프리카에서 왔다고. 혼자 지나갈 때는 머리에 침도 뱉어요. 머리에 침 뱉고 아프리카라고 놀려요. 우리 아버지는 방글라데시 사람이라고 해도 형들은 아프리카에서 왔대요. 너무 속상할 때는 선생님께 말씀드려요. 그러면 선생님들이 형들을 불러 혼내주시지만 소용없어요. 계속 놀리고 괴롭혀요. 학교 가기 싫어요."

석훈이는 얼큰한 찌개와 떡볶이, 김치를 좋아한다. 학교 공부에서도 영어보다 한국어가 더 쉽고, 매년 생일인 2월 14일이 되면 어머니가 끓여주는 미역국을 먹는다. 코시안의 집에서는 선생님들의 일을 잘 돕는 착한 학생이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걸 제외하면 놀림 받을 이유가 없다.

"제 고향은 한국이에요. 코시안의 집에 오는 다른 친구들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고, 여기가 고향이에요. 그런데도 애들은 저만 보면 자꾸 아프리카로 가래요. 거기가 어딘지 저는 알지도 못해요. 자꾸 형들이 놀려서 공부하기도 싫어요."

남매인 라니(19)와 뜨구(12)는 아버지 수마르또(45)와 어머니 치트라(43)를 따라 2003년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으로 왔다. 1주일 동안 서울을 여행하고 곧바로 안산 원곡동에 둥지를 틀었다. 그 뒤로 어려운 한국살이가 시작됐다.

수마르또는 '버지니아텍 총기난사 사건'에 대해 "매우 끔찍한 일"이라며 "너무 깜짝 놀랐다"고 안타까워했다. 치트라도 "같은 생각"이라면서 "가족생활을 잘 하면 '한국판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큰딸 라니는 학교에서 '인도네시아'로 통한다. 또래보다 나이가 많은 라니가 복도를 지나다닐 때마다 친구들이 '인도네시아 간다'고 말한다. 다들 나이가 어려서 그냥 지나치지만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다.

뜨구도 학교에서 차별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뜨구의 아버지도 "외국인이라서 겪는 차별은 견딜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한국이 좀 더 열린 사회가 된다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4. 잘못된 선입견 "남아시아인은 가난하고 게으르다는 오해"

 
▲ 니락샤는 "1950년대 한국이 전쟁 직후 매우 어려웠을 때 스리랑카에서 쌀을 보내줬다"며 "사람은 언제나 처지가 바뀔 수 있다는 점을 한국인들이 인식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 오마이뉴스 장윤선
필리핀인 마리테스(35)는 안산이주민지원센터에서 일하는 활동가다. 마리테스 역시 한국 남자와 결혼해 비자문제를 해결했지만, 아이들의 교육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7살짜리 아들과 6살짜리 딸이 학교에 들어가면 당장 '필리핀 엄마'라고 놀림을 받을텐데 걱정이다. 아이들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참 속상해요. 피부색과 문화가 다를 뿐 똑같은 사람들인데 겉모습으로 차별하고 따돌리는 것은 나쁜 거잖아요. 한국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인권교육'을 했으면 좋겠어요. 모두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아이들을 같이 길러야지요."

니락샤(28)는 지난해 한국 여자와 결혼한 스리랑카 사람이다. 그 역시 안산이주민지원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다. 니락샤는 최근 스리랑카 아이들이 학교에서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놀림 당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스리랑카 부부 자녀들이 한국인 아이들과 자주 싸워 걱정된다는 게 요지인데, 어떤 대책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남아시아 사람들에 대해 잘못 인식하는 게 있어요. 돈 없는 나라, 게으른 나라. 그런데 이걸 기억하는 분들은 거의 없어요. 1950년대 한국이 전쟁 직후 매우 어려웠을 때 스리랑카에서 쌀을 보내줬다는 사실을요. 사람은 언제나 처지가 바뀔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 스리랑카나 남아시아 나라들이 가난한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에 대해 인종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지금은 한국이 잘 살지만, 언제 처지가 또 바뀔지 모르는 거잖아요. 함께 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찬응 안산이주민센터 대표는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점이 크다"면서 "우리 안의 인종주의나 인종 소외는 없는지 자성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주 외국인도 '한국인'... 같은 공동체인으로 보듬어야"

1994년부터 13년째 이주노동자 운동을 펼쳐온 박 대표는 "한국에 살고 있는 이주민 자녀들이 모두 조승희씨 같지는 않지만, 주변의 이주가정 아이들이 겪는 사회 문제의 깊이는 비슷할 것"이라며 "한국 사회가 이주민을 인정하고 제도 안에서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빨리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박 대표는 "버지니아공대에서 총기를 난사한 조씨는 개인적인 문제와 사회병리적인 문제가 복합적으로 나타난 경우"라면서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은 혹시 우리 주변에 소외를 겪고 있는 사람들은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점"이라고 꼽았다.

한국보다 시민사회의 폭이 넓은 미국사회는 다인종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에 익숙하지만, 한국사회는 미국사회보다 훨씬 폐쇄적이기 때문에 이주민들이 겪는 고통이 훨씬 클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특히 박 대표는 국내 거주 외국인 100만 시대에 절대로 방치해서는 안 될 문제가 바로 이주민 자녀들의 인격권과 교육권이라고 밝혔다. 티없이 맑게 자라는 아이들의 눈동자에 시름의 눈물이 맺혀서야 되겠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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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 가족은 이민 성공과 실패 동시에 보여줘&quot;

 

 

 

조씨 가족은 이민 성공과 실패 동시에 보여줘"
텍스트만보기   연합뉴스(yonhap)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장익상 특파원 = 버지니아텍 참사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조승희 가족은 교육과 성공을 강조하면서 '성공 아니면 실패'의 잣대로 보는 체면 중시의 아시아 이민 사회의 전형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22일 보도했다.

타임스는 '명랑한 딸, 시무룩한 아들: 조씨 가족의 수수께끼'라는 제하의 1면 기사에서 "15년전 한국에서의 힘든 삶을 청산하고 미국으로 이민 온 조승희 부모의 3층짜리 주택은 자녀들의 성공을 기원하며 뼈빠지게 일해 이뤄낸 중산층 성공의 상징으로 보여지지만 지금은 취재진들을 피해 텅 비어있다"며 무엇이 이런 끔찍한 일을 초래했는지 구체적인 동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단서들은 있다면서 조씨 가족의 과거와 현재를 짚었다.

이 가족에는 명문 아이비리그 출신의 이상적인 딸 조선경(25)씨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캠퍼스 참사를 저지른 닫힌 세계속에 살던 조승희(23)라는 전혀 다른 두 자녀가 있으며 이들은 이민자 성공과 실패라는 두 전형이라고 신문은 지적하며 조승희의 닫힌 세계를 집중 조명했다.

친인척들에 따르면 조승희 부모는 궁핍한 삶속에서도 밤낮으로 일해 이민을 온지 5년만인 1997년 14만5천달러짜리 타운하우스를 구입하는 등 근면하게 생활했지만 조승희의 내성적이고 고립적인 태도는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변함이 없었다는 것.

이웃들은 이 집에 아들이 있는지 조차 잘 모를 정도였고 그가 다닌 웨스트필드고교는 2000년 개교한 이래 뉴스위크가 뽑은 전국 우수 공립고교 랭킹 50위 이내에 드는 명문이었는데, 조승희는 친구들과 거의 말한 적이 없는 이상한 아이였다.

교내 과학클럽에 가입했지만 그냥 앉아있을 뿐이어서 '트럼본 보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벙어리가 아닐까 생각하는가 하면 영어를 못하는 최근의 이민자로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고교시절 식탁에서도 친구들과 거의 얘기를 나누지 않은 조승희의 태도는 대학에 와서도 변하지 않았고 일요일 저녁 가족들과 통화하는 것을 빼고는 거의 말하지 않아 가족들도 늘 말수가 적은 조승희가 근심거리였다.

이처럼 숨어들려는 동생과 달리 선경씨는 돋보였다. 하버드와 프린스턴에서 입학 허가를 받은 선경씨는 장학금 혜택이 더 많은 프린스턴을 선택했고 세계 경제에 흥미를 느껴 개도국의 공장 조건들을 살펴보기 위해 태국-미얀마 국경지역에서 인턴십을 했으며 이 경험을 토대로 이라크재건관리회사에서 일하게 됐다는 것.

매우 겸손한 여성이라는 평가를 받은 선경씨에 대해 지인들은 술과 담배를 안하고 화장도 거의 않는 강건한 여성이라고 칭찬했으며 재학시절 대학도서관에서 일하며 기도 모임이나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는 등 이민자 성공의 모델이었다.

선경씨는 최근 발표한 성명에서 "우리는 항상 가깝고 평화롭고 사랑했던 가족이었다. 우리는 한 번도 동생이 그런 엄청난 폭력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전 세계를 슬픔에 빠뜨렸고 우리는 악몽 속에 살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딸에 대해 그의 모친은 무척 자랑스러워 했지만 "딸보다 아들이 프린스턴을 졸업하기를 원했다"고 밝힐 만큼 딸보다 아들의 성공에 더 무게를 두는 아시아 이민자중 하나였다고 이웃은 전했다.

이런 현상들에 대해 전문가들은 교육과 성공을 강조하는 문화, 실패는 종종 수치스럽다고 여기는 문화가 큰 몫을 했다고 풀이하면서 이런 문화는 주변에서 어떻게 생각할 까를 우선하는 체면에 의해 지배되며 가족 이외에 누군가와 상담한다는게 힘들고 창피해 자신들끼리 해결하려는 문화도 한 원인으로 분석했다.

장태한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주립대(UC리버사이드) 인류학 교수는 "누나는 이민자 성공 스토리의 전형인 반면에 아들은 실패의 전형이자 도움이 필요한 정신병자였다"며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이를 주시하지 않았고 사회 역시 실패했다"고 전했다.

isjang@yna.co.kr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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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라걸>서 80년 사북사태를 떠올리다

 

 

 

훌라걸>서 80년 사북사태를 떠올리다
1965년 일본 탄광 내리막 시절 배경, 절망 속 희망 그려
텍스트만보기   김대홍(bugulbugul) 기자   
 
 
 
▲ 80년대 사북사태를 다룬 동아일보 기사
ⓒ PDF파일(캡처)
 
 
▲ 동아일보에 실린 사북사태 내용
ⓒ PDF파일(캡처)
"건설정부는 현재 30개에 이르는 탄광을 오는 99년까지 10개만 남기고 폐쇄하고, 주요 탄광지역을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해 스키장·골프장 등 위락시설이 들어설 수 있게 할 방침이다. 통상산업부는 5일 현재 7백40여만t인 연간 석탄생산량을 99년까지 4백30만t으로 줄이기로 하고 이러한 석탄산업 종합대책을 확정했다. 이 대책에 따르면 전국 30개 탄광 가운데 99년까지 △장성 도계 화순 등 석공 탄광 3개 △동원 삼척 경동 한보 등 민영대탄광 4개 △의령 만호 등 민영중소탄광 3개 등 10개를 제외한 20개 탄광이 폐쇄된다. 정부는 내년부터 가격보조, 발전용탄 배정 등 지원을 이들 10개 탄광에 집중할 계획이다." - 한겨레(1995년 4월 6일)

1989년 석탄합리화계획이 시행되면서 석탄산업은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1988년 347개이던 탄광 중 93년말 이후 살아남은 탄광은 44개에 불과했다. 6만2천여명이던 광원도 94년말엔 1만5천여명으로 줄어들었다.

강원도 속초 태생이던 영화감독 박광수가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을 극장에 내건 게 이듬해인 1990년이다. 지금은 농업이 죽니 사니 하지만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오는 기간 그 몫은 석탄산업의 것이었다.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강원 정선군 사북읍에서 벌어진 '사북사태'는 그런 갈등의 시발점이었다. 어용노조와 임금 소폭 인상에 대한 항의로 일으킨 이 사태에서 경찰관 1명이 숨지고 160여명의 민간인과 경찰이 부상을 당했다. 당시 계엄사령부는 관련 인물 31명을 구속하고, 5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총 81명을 군법회의에 넘겼다.

흔히 '막장인생'이라는 말로 표현되듯 이들은 도저히 물러설 곳이 없는 삶을 살았다.

"스물한 살 때부터 27년째 광산 일을 해온 중앙개발 광원 김정경씨의 얘기는 그런 처지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배운 기술이라고는 땅 파는 것밖에 없어 도시로 나가 날품이라도 팔아보려 해도 당장 방 한 칸 얻을 돈이 없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서 어떻게 먹고 살란 말입니까." - 한겨레신문(1994년 12월31일)

불과 10여년 전 일이다. 하지만 벌써 탄광산업은 추억이 됐다. 우리나라에 남은 연탄공장 몇 개, 폐철로를 활용한 관광열차 등이 가끔씩 뉴스가 될 뿐이다. 그 와중에 얼마 전 큰 칼을 목에 쓰고 죽비로 자신을 수백대씩 때리는 시위를 하는 전 강원랜드 복지재단 상임이사 성희직(50)씨의 사연이 뉴스면을 장식해, 그 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성씨는 광부 출신으로 3선의 강원도의원(민중당)을 지냈다. 1991년 당시 지자체 선거에서 민중당 출신으로 유일하게 광역의원을 지내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80년대에서부터 90년대 그렇게 강원도 탄광지역은 진보세력의 주요 거점이었다.

내리막 석탄사업, '지키느냐' '활용하느냐'

 
▲ <훌라걸> 1965년 혼슈 지방의 최대 탄광촌 토키와 탄광이 배경이다.
ⓒ 미디어2.0
<훌라걸>(시라이시 마미 글, 민경욱 옮김)은 1965년 혼슈 지방의 최대 탄광촌 토키와 탄광이 배경이다. 당시 일본에선 이미 대규모 석탄산업 구조조정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다시 아들에게 곡괭이를 쥐어주며 석탄산업을 숙명이라 생각하며 일해 온 이들에게 석탄산업 폐쇄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 지역에서 일하다 이미 석탄산업은 내리막길이라고 생각하고, 살 길을 찾아 떠난 뒤, 하와이안센터라는 구상을 갖고 다시 찾아온 요시모토는 지역민들에게 배신자다. 그가 데리고 온 하와이안댄서 강사 도모카도 지역민들에게 망측한 존재일 뿐이다.

주민들은 하와이안 댄서가 벌거벗고 추는 스트립 댄서나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요시모토의 구상은 당연히 벽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책에서 모든 어른들은 선탄산업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책이 끝날 때까지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이 확고한 광부 요지로가 하와이안 댄서 강사 마도카를 사랑한다. 광부의 딸인 사나에는 이 지긋지긋한 삶을 벗어나고 싶어 하고, 기미코는 사나에의 가장 절친한 친구다.

이 중 가족을 부양하며 학교조차 다닐 수 없었던 사나에는 하와이안 댄서에 가장 큰 매력을 느낀다.

"일단 손톱에 석탄이 들어가면 아무리 씻어도 안 지워져. 비누로 씻어도 소용없어. 이런 손을 가진 열여덟 살짜리가 세상에 어디 있겠니?…이 기회를 잡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누구는 전통을 유지하고자 하고, 누구는 새로운 삶을 꿈꾼다. 결국은 삶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이 던지는 것은 화두는 '어떠한 삶이냐'다. 또한 이 책은 전통과 현대문명의 충돌과 조화를 다루면서, 여성의 숙명과 진보를 다룬다. 이 점에서 책에서 가장 주목해서 봐야 할 인물은 탄광을 지키는데 있어선 가장 강경파이면서 여자의 숙명을 말없이 받아들이는 지요의 행동이다.

 
▲ 영화 <훌라걸스> 흥행과 평단 양쪽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 훌라걸스
 
"탄광의 여자는 아이를 낳아 기르고 탄광에서 일하는 남편을 돕는다. 실실 웃으면서 남자들에게 교태나 부리고 엉덩이를 흔들거나 다리나 벌리는 게 아냐!" - 지요의 말 중에서

 
 
  영화 <훌라걸스>에 대해  
 
 
소설 <훌라걸>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바로 최근 개봉한 영화 <훌라걸스>다. 요즘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배우 아오이 유우(타나카와 키미코역)가 출연해 관심을 끈 이 작품은 지난해 9월 일본에서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다.

연말 영화상에서 5개 작품상을 수상한 <훌라걸스>는 '키네마준보' 2005년 최고 영화 선정, 2007년엔 일본 아카데미 11개 부문 수상 등 흥행과 작품성 양 부문에서 평가를 받았다.

또 하나 화제가 된 대목은 제작자(이봉우)와 감독(이상일)이 모두 한국인이었다는 점. 주인공 아오이 유우의 고향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후쿠오카 지방이었다는 점도 이와 함께 주목을 끌었다. / 김대홍
 
 
결론적으로 탄광을 가장 떠나고 싶어 했던 사나에는 꿈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 딸의 댄서일을 적극 막고자 했던 지요도 뜻을 이루지 못한다. 최고 댄서를 꿈꾸었던 마도카는 결국 이 시골마을의 댄스 교사로 눌러앉는다. 그렇다면 과연 꿈을 이룬 사람은 누구일까.

또 하나, 책엔 '프로'에 대해 논쟁하는 대목이 나온다. 탄광작업 도중 한 댄서의 아버지가 갱이 무너지면서 돌아가시는데, 그 날은 중요한 공연이 있는 날이다. 과연 '프로'라면 공연을 그만둬야 하는가, 웃음을 흘리면서 공연을 마무리해야 하는가. 1차산업인 석탄산업에선 필요 없었던 이 질문이 하와이안센터로 상징되는 서비스산업에선 필요하다.

그래서 과연 전통과 현대는 어떻게 결별하고 손을 맞잡았는지 궁금했다.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야 했던 그 용감하고 어린 주인공들은 과연 그 뒤 어떻게 됐을까. 다행히 지은이는 독자의 그런 마음을 안 모양이다.

"기미코는 조반하와이안센터의 대성공으로 도쿄 연예계로부터 수많은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자신이 자란 토호쿠의 하와이에서 춤을 추다가 서른에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 현재는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기미코의 오빠 요지로는 조반하와이안센터가 문을 연 10년 뒤인 1976년, 조반 탄광의 마지막 갱이 폐쇄될 때까지 자긍심을 가지고 광부로 계속 일했다. 그리고 마도카는 하와이안센터의 개장 이후 35년 동안, 이 도호쿠에서 댄스 교사를 계속하며 일흔을 넘긴 지금도 훌라댄스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전하고 있다. 1976년, 탄광은 명실상부한 '하와이'가 되었다" - 에필로그
 
 
2007-04-16 09:49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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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혹은 지루한 스톡홀름

 

 

 

연재기사 | 무작정 떠난 러시아-유럽여행 + 종합
 
조용한 혹은 지루한 스톡홀름
[무작정 떠난 러시아-유럽여행 26] 스웨덴 스톡홀름 1
텍스트만보기   강병구(kbk81) 기자   
 
 
준비 없는 도착이 가져다준 당황스러움

 
▲ 도착해서 처음 본 스톡홀름 시내의 한가로운 모습.
ⓒ 강병구
 
머무는 내내 한기가 충분히 느껴지던, 바다 밑에 잠긴 공짜 방은 결국 나에게 감기 기운을 선물해 주었다. 심포니호에서 얻은 마지막 선물이랄까? 으슬으슬 추워지는 몸에 더해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도착한 스웨덴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 아침시간이 지난 오전 10시쯤, 배는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몸이 괜찮은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곳에 도착함에서 오는 막연한 즐거움은 이곳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막상 배에서 내리고 보니 내 수중에 단 한 푼의 스웨덴 돈이 없는 관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배가 도착한 여객터미널에는 현금인출기도 없었고, 터미널의 위치도 스톡홀름 시내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가지고 있는 유로는 적어도 터미널의 빠져나가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너무나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다행스러운 도움을 찾을 수 있었다. 어제 심포니호에서 만난 분들과는 다른, 단체관광객들을 만나 그분들이 사용하시는 버스를 얻어탈 수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출발하려는 버스에 올라타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잠시 뒤 스톡홀름 시내까지 태워주시겠다고들 대답해주셔서 버스를 얻어 타게 되었다.

 
▲ 스톡홀름 중앙역의 모습, 중앙역 근처에 주요시설이 몰려있다.
ⓒ 강병구
 
하지만 현지에 와서 구하려고 한 숙소는 더 문제였다. 으슬으슬한 감기 기운이 느껴지는 상태에서 마음 놓고 푹 쉴 수 있는 숙소를 찾고 싶었지만, 연고도 아무것도 없는 스톡홀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고민 끝에 택한 방법이 한국에 연락해 인터넷으로 이곳 민박집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우선 도시의 중심이라 할만한 중앙역을 찾아가 전화카드를 구매하여 한국에 전화를 걸었다. 한국으로의 몇 번 통화 끝에 알아본 민박집 전화번호로 한인민박집에 방을 구할 수 있었다.

통화를 해서 위치를 안내받고, 그곳까지 찾아가고 보니 어느덧 오후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답답하고 불안하기만 하던 상황에서 말이 통하는 주인 아주머니를 만나고 나니 마음이 푹 놓였다. 새삼 준비 없이 떠나온 내 여행이 너무 힘들게만 느껴졌다.

조용하고 여유로운 스톡홀름의 풍경

 
▲ 중앙역 앞에서 본 반가운 한국차의 모습.
ⓒ 강병구
 
짐을 풀고, 씻고, 간편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나니 본격적으로 내가 도착한 스톡홀름이란 곳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여태껏 스웨덴의 수도라는 객관적인 사실과, 어릴 적 즐기던 부르마블 게임에 등장하던 도시였다는 것 이외에 특별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오래된 도시로서 왕궁 같은 건축물이 유명하겠지만,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보게 될 다른 유럽의 오래된 도시와 특별히 다르지 않을 듯했고, 스톡홀름만의 특별한 무엇인가가 떠오르지 않았다.

사전지식 없는, 제목처럼 무작정하게 도착한 스톡홀름의 첫인상은 참으로 조용하고, 차분하다는 느낌이었다. 여객터미널에서 고생하다가 스톡홀름 중심가에 도착하여 시내를 돌아다니던 시간이 한참 점심때쯤인 낮 12시였다. 서울 같았다면 1시간이라는 쫓기는 시간 안에 점심을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과 시민들로 매우 분주해야 할 시간이었다.

 
▲ 중앙역 인근의 쇼핑거리의 붐비는 모습.
ⓒ 강병구
 
하지만 스톡홀름의 점심시간은 그런 종류의 분주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쫓기듯이 어딘가로 향하는 직장인들도, 정신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는 시민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그보다는 여유롭고 느긋한 모습의 점심시간이었다.

물론 이런 느낌이 스톡홀름에서만 느낀 것은 아니다. 유럽의 도시들이 대부분 이런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스톡홀름 시내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북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만큼 백화점과 쇼핑가가 주를 이루는 중심가에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여행자로서 느끼는 여행지의 주된 느낌이란 것이 있다. 그런 점에서 스톡홀름의 그것은 조용함과 여유로움이었다. 러시아의 모스크바가 서울과 비슷한 분주한 느낌을 주었고,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고풍스러움을, 에스토니아의 탈린이 중세풍의 만화 같은 젊은 느낌(영화 <기사 윌리엄> 같은 느낌이랄까?)이었고, 헬싱키가 평화로움을 주었듯이 말이다.

아마도 스톡홀름에서 겪은 몇 가지 경험들이 이런 인상에 쐐기를 박았을지도 모르겠다. 스톡홀름 여행 둘째 날 국립미술관에서 점심을 먹었을 때의 일이다. 민박집에서 같이 묵고 있던 부부와 함께 그곳을 둘러보다 점심시간이 되어 미술관 안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점심시간이 조금은 넘은, 오후 1시가 조금 덜되었을 시간이었다.

 
▲ 너무나 여유로운 스톡홀름 모습.
ⓒ 강병구
 
같은 시각의 서울이었다면 서둘러 점심을 마치고 직장으로 혹은 다른 곳으로 돌아가려고 분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식사를 여전히 여유롭게 하고 있었고, 식사를 마치고는 차 한 잔을 두고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테이블도 있었다(이 테이블 사람들은 우리가 밥을 다 먹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야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급한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모두 같이 온 사람들과 재미있게 이야기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고, 시계를 보아가며 서둘러 먹는 사람은 시간도 여유로운 여행자인 우리가 유일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이 미술관 관람객일 수도 있다. 혹은 종업원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건 다들 미소를 머금고 식사상대들과 이야기하는데 시끄럽지 않았으며, 그런 그들 누구도 시간에 쫓기듯 먹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다음날 시내의 다른 식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유롭다 못해 지루하다면?

 
▲ 가장 번화한 세르옐 광장의 붐비는 모습 - 이 날 저녁 이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었을까?
ⓒ 강병구
 
하지만 지나치면 모자른만 못한 것인지 정신없는 한국인의 삶에 너무 익숙한 때문이었는지, 너무나 조용하고 여유로운 스톡홀름의 풍경은 차츰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지루하다 못해 신물이 났다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그것도 3일 만에 말이다.

술을 좋아하고 밤에 노는 전형적인 한국인으로서, 황금 같은 주말 저녁 시내중심가 술집도 밤 9시가 넘은 시간에 열려있는 곳이 눈 씻고 찾기 힘든 점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 민박집에 같이 머물던 다큐멘터리 촬영팀 형님들과 함께 술을 한잔 먹으로 시내 중심가로 나왔지만, 밤 9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임에도 시내에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여행서에 소개된 몇 안되는 술집들도 한산하거나 영업이 끝났었다. 스웨덴 사람들은 주말저녁 술도 안 마신다는 건가? 그런 것에 비하면 새벽 3시까지 운행하는 지하철은 너무 생뚱맞았다.

민박집이 있던 곳은 시스타(Kista)라는 스톡홀름 외각의 신도시였다. 그곳에 위치한 30년된 아파트가 민박집이었는데, 어찌나 동네가 조용한지 조금 늦은 시각 길거리에서 떠들기라도 하면 주민들이 밖을 내다볼 지경이었다.

조용하고, 여유로운 스톡홀름. 마음 한 쪽에서는 이런 곳에서 편히 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지만, 다른 한편 이런 곳에서 살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하는 의문도 들었다. 아무래도 나에겐 스톡홀름에 살기엔 부적당한, 음주가무를 즐기는 동이족의 피가 너무 많은 듯했다.

 
  [여행팁 19] 스톡홀름에서  
 
 
 
▲ 너무나 조용했던 민박집 아파트 모습
ⓒ강병구
작년 5월 필자가 도착했을 당시 스톡홀름의 한인민박은 두 곳이 있었다. 사전정보 없이 유스호스텔 숙박을 생각하고 도착한 곳이라 한인민박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행에 따른 피치 못 할 사정으로 급히 한국에 연락을 하면서까지 알아보니 한인민박이 있기는 있었다.

혹여 스톡홀름을 가시려는데 한인민박의 존재를 궁금해하실 분이 있을지 몰라서 필자가 묵었던 민박의 홈피 주소를 남긴다. 민박집은 깔끔했고 머물기에 불편함은 없었지만, 필자가 있었던 기간이 비수기라 성수기에는 어떨지 모르겠다. 한인 아주머니와 스웨덴인이신 아저씨 두 분 다 매우 친절하셨고, 한국말을 잘하는 아들분이 인상적이었다.

민박집 홈페이지 : http://www.stockholmminbak.se

환전에 관한 팁 : 유로권을 여행하다 북유럽에 와서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점이 환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편하게 유로가 통용되던 곳을 여행하다가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덴마크에 도착하면 환전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또 나중에 소개할 비유로권 동유럽과는 달리 시내에서 유로가 통용이 거의 되지 않는다. 유로로 지불하려고 하면 환전소에서 바꿔오라고 한다.

시기마다 환율이 어떻게 다를지 모르니, 북유럽에서 쓸 돈을 모두 미리 환전할 필요는 없지만, 도착해서 수고롭지 않을 정도의 돈은 미리 환전해오자. 적어도 교통비를 지불할 50유로 안팎의 돈은 미리 환전해 오는 것이 좋다.

그리고 동유럽과 또 다른 점은 북유럽 화폐가 남아도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동유럽화폐가 남으면 서유럽에서는 거의 재환전이 불가능한 것에 비해, 북유럽 화폐는 그럴 걱정은 없으니 남는다고 다 쓰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환전을 여러 번 하는 것에 따른 손해는 있지만 말이다. / 강병구
 
 
 
 
개인적인 사정으로 예고된 날짜에 기사를 올리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지난 2006년 4월 21일부터 7월 28일까지 러시아와, 에스토니아, 유럽 여러 국가를 여행했습니다. 약 3개월간의 즐거운 여행 경험을 함께 나누고자 올립니다. 다음 기사는 4월 16일(월요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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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세대의 해방구 '강촌'에 가다

 

 

 

7080세대의 해방구 '강촌'에 가다
강원도 춘천 신남면 강촌에서 옛사람의 흔적을 찾다
텍스트만보기   강기희(gihi307) 기자   
 
 
 
▲ 경춘선 기찻길, 혼자 걸어도 좋던 시절이 있었다.
ⓒ 강기희
 
강촌에 간다. 오랜만의 일이다. 강촌으로 가는 길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많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의 언어 중에서 생각만 해도 식욕이 돋거나 그리워지고 또는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들이 많다.

강촌이란 말도 그렇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강촌은 내게 청춘의 해방구이자 첫사랑 같이 아련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오랜 세월 잊고 살아도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고 또 불현듯 가보고 싶은 곳이 강촌인 것이다.

80년대 강촌과 함께 해방구 역할을 했던 백마는 일산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숱한 사연들도 함께 사라졌다. 신도시가 생기기전 나는 일산 백마역 인근인 풍동의 한 농가에 살았다.

 
▲ 북한강을 끼고 달리는 경춘선 기차, 다음 내리실 역은 강촌역입니다.
ⓒ 강기희
 
걸어서 십여분만 가면 백마역과 카페 '화사랑'이 있었고 '숲속의 섬'이 있었다. 그곳에 모인 청춘들은 당시의 시국에 대해 토론하며 울분을 토했다. 당시 쏟아냈던 수많은 언어들은 신도시의 화려함 속에 묻혔다.

그 시절 백마역으로 오기 위해 신촌역에 모여 있던 젊은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형체가 사라진 신촌역은 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한다.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강촌리, 강촌으로 가는 길은 아무래도 경춘선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이 옛추억을 되살리기에 좋다. 기차 안의 풍경은 예전 같지 않지만 기찻길과 강촌역은 그 자리에 있다.

 
▲ 기차에서 내리는 여행객들.
ⓒ 강기희
 
예전 서울 성북역에서 출발하는 비둘기호를 타면 기차 안은 물론이고 통로와 계단까지 젊은이들로 가득 찼다. 실내는 담배연기로 인해 숨쉬기조차 힘들었지만 소박한 게임만으로도 모두들 즐거웠다. 그러나 통근 열차로 명맥을 유지하던 그 기차마저 얼마 전 운행을 멈추었다.

성북역에서 출발한 승객의 절반은 대성리역에서 내렸고 나머지는 강촌역에 내렸다. 요즘도 그러하지만 그 모습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통기타를 둘러메고 다니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라면상자를 등짝에 지고 내리는 신입생들도 보이지 않는다.

M.T 문화가 바뀌며 강변에 둘러앉아 통기타를 치는 젊은이도 없으며 기타소리에 맞춰 부르는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전이 되어버린 당시의 문화는 빛바랜 사진 속에서나 확인이 가능하다.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린 대성리와 강촌

 
▲ 자전거 대신 4륜 오토바이가 더 인기다.
ⓒ 강기희
 
2인용 자전거를 타고 구곡폭포나 등선폭포 또는 강변길을 달리는 청춘남녀의 모습도 예전 같지 않다. 강변길이 넓게 포장되면서 차들이 속도를 내는 까닭이다.

강촌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예전 민박집 아주머니를 따라 가던 길은 꼬리를 무는 차량으로 인해 산만하기 그지없다. 여관과 노래방 또 음식점들은 얼마나 생겼는지 강촌만이 가지고 있던 예전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강촌역을 빠져나오는 남녀에게 말을 건다.

"강촌까지 놀러온 이유라도 있어요?"
"기차타고 갈 만한 곳이 여기밖에 더 있나요?"


남자의 말을 들으니 사실 그러했다. 서울에서 가까운 기차여행지가 많이도 사라졌다. 20대 초반의 남녀는 허리를 감싸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강촌역도 많이 변했다. 플랫폼 공사가 있은 이후 풍경이 예전만 못하다. 강촌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낙서문화이다. 벽을 가득채운 낙서는 기다리는 이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 낙서는 그 시절의 역사다. 누군들 한 때 뜨겁지 않았던 사람 있었을까.
ⓒ 강기희
 
강촌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또 하나 있다. 강촌역 플랫폼을 나와 골뱅이처럼 생긴 철제 계단을 내려가면 오래된 카페 하나가 있다. 80년대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윌 카페'다.

윌 카페는 몇 해 전만 해도 대학가요제 출신 그룹사운드들이 자주 공연을 했던 곳이다. 그때만 해도 카페는 <나 어떡해>나 <구름과 나> 같은 노래가 매일 연주되었다. 지금은 올드팬이 된 당시의 젊은이들은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나 어떡해>를 따라 불렀다.

요즘엔 그러한 공연마저 자주 열리지 않는다. 다들 먹고 살기 바쁜 탓이다. 무대엔 아직도 그들이 치던 드럼과 전자 기타가 남아있다. 요즘엔 윌 카페의 주인인 가수 최영엽씨가 혼자 라이브 공연을 한다.

 
▲ 드럼은 오늘도 제 스스로 소리를 내지 못한다.
ⓒ 강기희
 
최영엽씨는 본인의 노래가 있지만 들국화 멤버 전인권씨의 노래를 즐겨 부른다. 전인권씨와는 친구 사이란다. 노래방 문화가 강촌까지 밀려들면서 라이브카페를 찾는 이들이 많이 줄었다. 강촌까지 와서도 노래방을 찾기 때문이다.

요즘 윌 카페를 찾는 이들은 7080 세대들이다. 이미 사십대가 되어버린 당시의 젊은이들이 추억 한 자락을 찾기 위해 윌 카페를 찾는다. 간혹 혼자 오는 손님도 있다. 흐르는 북한강을 바라보며 추억에 젖었다 조용히 떠난단다.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80년대 그룹사운드 공연 무대...'윌 카페'

 
▲ 가수 나훈아의 '강촌에 살고 싶네' 노래비, 비 앞에 설치된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흘러나온다.
ⓒ 강기희
 
강촌역을 떠나 등선폭포로 간다. 등선폭포로 가는 길은 북한강을 끼고 있기에 산책하기에도 좋다. 등선폭포 입구는 벌써 겨울을 맞았다. 빙어 튀김이 만들어지고 갓 만든 도토리묵을 선보인다.

등선폭포는 지각변동에 의해 산이 갈라지면서 생긴 협곡이다. 삼악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맑고 차다. 눈 내리는 날 차 한잔을 두고도 지루하지 않을 그런 곳이다.

군밤 한 봉지를 사 입 안에 넣는다. 고소함과 따스함이 입안에 감돈다. 군밤을 먹으며 다시 강촌역으로 향한다. 강변길을 걸으며 옛 사람의 흔적을 찾아본다. 강변길에서 솜사탕을 파는 아저씨가 보이지 않는다.

당시엔 분홍빛 솜사탕이 인기였다. 몰래버린 솜사탕 막대와 기념으로 숨겨 놓은 십원짜리 동전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다.

 
▲ 등선폭포 입구, 작은 입구를 지나면 누구나 신선이 된다.
ⓒ 강기희
 
강촌 다리 옆에는 교각만 남은 다리가 있다. 출렁다리가 있던 곳이다. 강촌의 명물이던 출렁다리는 지난 80년대 초 끊어졌다. 출렁다리와 함께 놀러왔던 남녀 대학생 둘도 세상을 떠났다. 슬픈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강촌을 찾는 이들은 죽음을 맞은 남녀의 몫까지 사랑해야 한다.

강촌역 플랫폼에 오래 서 있어 보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는다. 무심하게 떠나는 기차를 바라보며 추억 하나를 접는다. 낙서를 하고 있는 젊은 친구에게 펜을 빌려 '2006.11.12. 옛 추억을 찾아 강촌에 왔다감'이라 쓴다.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 북한강변의 억새, 오래된 추억은 꺼내지 말고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하라 한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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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2006-11-18 11:55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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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탑갤에 '정전'이란 없다!

 

 

 

거탑갤에 '정전'이란 없다!
2007-01-20 10:16:54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는 갤러들이 있다. 바로 디시인사이드 '하얀거탑' 갤러리(이하 거탑갤) 이용자들이다. 지난 6일 첫 방송된 MBC 주말드라마 '하얀거탑'은 등장인물 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긴장감 넘친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뜨거운 성원으로 문을 연 거탑갤도 '정전 방지'를 외치며 무섭게 달리고 있다.

  언제나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의사, 최도영(이선균)은 친절하고 자상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캐릭터 성격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짤방(잘림 방지용)이 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가스 나오셨나요?'라고 묻는 최도영. 이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패러디한 것으로, 극 중 실제 대사를 넣어 만들었다.

  또한, 검사 결과를 토대로 진단을 내리는 최도영의 신중함을 표현한 짤방도 있다. '좀 더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고요'라는 대사는 명언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거탑갤에서 '검사도영'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

  강력한 카리스마가 인상적인 의사, 장준혁(김명민)의 '자장면' 먹는 장면은 순식간에 많은 합성물을 양산했다. 불어터지다 못해 딱딱하게 굳은 자장면을 맛있게 먹는 장면이 방송된 것. 특히 자장면 본좌로 불리는 '환상의 커플' 나상실(한예슬)과 대결을 펼치는 장면은 폭소를 자아낸다. 수술대를 식탁 삼아 중국 요리를 시켜 먹는 장면이나 자장면 먹는 자세를 분석한 짤방 등도 재미나다.


< 인쇄정길 >


< '토끼정길'과 '토끼선균' >

  드라마 방영 첫 회부터 거탑갤 이용자들을 사로잡은 외과 과장, 이주완(이정길)은 '인쇄정길', '토끼정길' 등으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비밀리에 준비한 과장 후보 리스트를 찾고자 허겁지겁 뛰는 장면에서 '인쇄정길'이란 별명이 탄생했다. 또한, 인기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토끼 탈을 뒤집어쓴 서민정의 '움짤(움직이는 짤방)'에 이정길의 얼굴을 합성한 짤방은 '토끼정길'로 불린다.


< '억제인표' >

  장준혁의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한 노민국(차인표)의 인상적인 장면을 합성한 짤방도 있다. 과장 대결에서 물러나 달라는 의국장의 무례한 행동에 '내가 나 자신을 얼마나 억제하고 있는지 모르시겠습니까?'라는 대사로 화를 낸 장면이 계기가 되었다. 이 때문에 '억제인표'라는 별명도 얻었다.

  드라마 등장인물 간의 갈등을 재치있게 표현한 짤방도 많다. 가장 극명한 대립을 이루는 '이주완-장준혁' 관계는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명장면과 합해져 더욱 눈길을 끈다.

  또한, 원칙과 신념을 고수하는 최도영과 기회주의자인 부원장 우용길(김창완)의 대결도 볼 만하다.

  무엇보다 거탑갤 이용자들은 드라마가 방송되지 않는 평일에 정전 사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며 '정전 방지'를 외치는 짤방을 만들어내고 있다. 눈에서 빛을 쏘며 '갤이 왜 정전이야!'라며 분노하는 이주완 과장, '안 달리면 밀어 버린다'라고 협박(?)하는 의사회 유필상(이희도) 회장, 특유의 굵은 목소리로 '갤이 정전이야'라며 침울해하는 최도영 등 재치있는 짤방이 웃음을 자아낸다.

 

 
  김정화 junyjung@dcinsi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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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행동은 절대로 따라하지 마세요!

 

 

 

위험한 행동은 절대로 따라하지 마세요!
  2007-01-12 11:30 | VIEW : 17,568
위 사진은 최근 일주일 사이 인터넷상에 '개념없는 초딩 뭐하노'라는 제목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이다. 초등학생 같기도 하고 중학생처럼 보이기도 하는 한 어린이가 신문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지하철 플랫폼에 앉아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왜 저렇게 위험하게 앉아 있을까.
사진을 본 네티즌들은 "사진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면서 "제 아무리 재미로 연출한 사진이라지만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라는 의견들이다.

▲ 아무리 연출을 했더라도 배우는 어린이들의 교육상에는 위험합니다.
▲ 분명히 따라하는 무뇌아들이 생길거다...그래서 위험한거다.
▲ 허거걱 이런~. 저게 뭐하는 짓이고 지금
▲ 장난이건 뭐건 XX 짓이다. 개념은 어디에 말아먹고 오셨나, 앙?
▲ 호기심의 장난이 치명적이 될 수 있다. 제발 정신차리세요

위 사진이 올라온 커뮤니티 사이트들 마다 댓글이 수없이 달리고 있으며, 플랫폼에 앉아 있는 어린이와 찍은 사람을 모두 비난하고 있다. 일부 "합성 아니냐"는 의견엔 "아무리 합성이라도 저런걸 왜 합성해서 퍼뜨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아무튼 다수의 네티즌들은 "호기심도 호기심 나름이고 상상력 나름이지 위험한 건 절대로 안된다"는 주장들이다.

실제로 지난 9일 서울 목동의 중학생 두명이 호기심으로 아파트 옥상에서 던진 돌에 어느 40대 가장이 맞고 사망한 사건을 한겨레가 전하기도 했다. ☞ 관련기사 보기
이 기사에는 25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으며 네티즌들은 "개념없는 저 중학생들을 어찌해야 하느냐"며 한탄했다.

또, 지난달 30일 후세인의 교수형을 두고 전세계적으로 10여명의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들도 들린다. 모두가 후세인 교수형에 대한 어린이들의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는 게 공통점이다.

이것은 모두 어린이들이 호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

위 사진도 마찬가지다. 사진은 오래전부터 인터넷상에 돌아다니는 것으로 지하철이 들어오는 순간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을 찍은 구도상 지하철 선로에 내려가 찍은 것으로 보인다.
누가 찍었는지 그 대상은 밝혀지진 않았지만 어찌됐든 이것도 일부 네티즌들의 "누군가의 호기심이나 장난으로 찍힌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에 크게 틀리진 않는다.

위 사진에 대해서도 네티즌들은 "사진을 찍은 사람의 정신 세계가 궁금하다. 어떻게 저런걸 호기심에 찍을 수 있는지 대단하다고 해야하나"라고 비꼬면서 "정말 무심코 던진돌에 엄청난 피해를 받을 수 있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전혀없다"고 꼬집었다.

아래 사진은 도깨비뉴스가 지난해 2월 '위험! 어린이 여러분 이런 놀이는 안됩니다'라며 소개했던 것이다. 이렇게 아파트 담벼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어린이들의 사진들 또한 인터넷상에 적잖이 올라온다.


너무 위험하니 절대 흉내내면 안됩니다

이러한 사진들을 본 부모 입장에 있다는 일부 네티즌들은 "호기심에 위험한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주변에서 계속 따라다닐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경각심이나 안전 교육을 그래서 해야한다"면서 "되도록이면 어린아이들에게 더욱 관심과 사랑으로 교육을 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도깨비뉴스 김동석 기자 feelsogood@dkbnews.com

▽ 관련기사
- 위험! 어린이 여러분 이런 놀이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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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소피아는 지적이고 아리따운 백인일까?

 

 

 

과연 소피아는 지적이고 아리따운 백인일까?
  2007-01-14 15:18 | VIEW : 5,938

비에 젖은 소피아 시내

불가리아는 지난 밤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10월 초순의 새벽. 전날 저녁 9시 터키 이스탄불을 출발해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로 달리는 나이트 버스는 두 나라의 국경 검문소에서 멈췄다. 앞자리에 앉은 백인 숙녀가 “Passport control”이라고 알려줬다. 우리 일행은 모두 버스에서 내려 국경 검문소 앞에 줄을 섰다.

일행은 버스기사를 포함해 열 명 남짓이었다. 그저 관행적인 검사인 줄 알았는데 젊은 공무원이 내 여권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기다려라”라고 짤막하게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나이 든 한 사내가 와서 내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는다. 그 또한 내 여권을 가지고 휑하니 사라졌다. 그동안 숱하게 국경을 넘었지만 별 설명 없이 이렇게 다짜고짜 세워놓는 푸대접은 처음 받아본다.

꼭두새벽 비 내리는 이국 땅에서 길 위의 국경초소 앞에 홀로 서 있으려니 오만 잡생각이 다 든다. 버스기사가 “노 프라블럼”이라며 내게 말을 건네왔지만 답답한 심정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다시 사내가 터벅터벅 걸어 나와 내 여권을 툭 건넸다. “땡큐!” 한마디와 함께.


소피아 버스터미널, 지은 지 얼마되지 않았다. 건너편에 중앙역이 있다.

터키와 불가리아. 땅 위에 줄 하나 그었을 뿐인데도 이쪽과 저쪽은 완전히 딴판이다. 이스탄불에서 국경까지는 새로 닦은 듯한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려왔다. 그러나 국경에서 소피아까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차선은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고 도로 옆으로는 주택과 상가, 작은 시골 마을들이 연이어 스쳐 지나갔다.

새벽 6시. 소피아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터미널은 지방 도시로, 이웃 나라로 오가는 사람들로 한창 붐볐다.


모닝커피 한 잔으로 몸을 데운 후 숙소를 찾아 나섰다. 론니플래닛의 동유럽 편은 소피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배낭여행자 숙소로 ‘아트 호스텔(Art Hostel)’을 꼽는다. 서울로 치면 종로 뒷골목쯤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무엇보다 숙소 분위기가 좋다고 한다. 터미널에서 만난 불가리아 신사의 도움으로 그의 자동차를 타고 숙소까지 갈 수 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벤츠. 한국에서도 타보기 힘든 고급 자가용이다. 먼 나라에서 온 여행자이기에 누릴 수 있는 사치(?)다.

아트 호스텔은 젊은 남녀 3인방이 운영하는, 낭만이 물씬 풍기는 호스텔이다. 건물 일부를 임대받은 숙소의 시설은 그리 훌륭하다고 할 수 없지만 숙소 곳곳에는 이런저런 예술적 흔적이 남아 있다. 거실, 룸, 바깥벽 등에는 아방가르드풍 그림과 낙서들이, 객실로 가는 길의 안뜰에는 꽃·잡목과 함께 파티를 했음직한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호스텔에서 준 식권으로 근처 레스토랑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우산을 받쳐들고 소피아 시내로 걸어나갔다.

빗방울이 더 굵어졌다. 이제 우산을 받쳐들지 않으면 흠뻑 젖을 정도다. 호스텔에서 준 지도는 비에 젖어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가이드북을 펼쳐 들고 이 길 저 길 사이로, 짧은 시간 안에 소피아의 냄새를 흠뻑 맡을 요량으로 걸음을 바삐 떼었다.

소피아. 이토록 예쁜 도시 이름이 또 있을까? 지적이고 아리따운 백인 여인 같은 이름이다. 소피아의 실제 모습도 그러할까? 소피아의 거리는 다른 유럽 도시들의 그것과 엇비슷하다. 그러나 느낌은 사뭇 다르다. 정리가 덜 된 것 같고, 작은 듯 아담하고 조금은 어둡다. 게다가 비까지 내린다.


노점에서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는 레닌 두상. 불가리아는 1989년 공산주의 정권이 몰락한 뒤 자유화의 길을 걷고 있다.

소피아의 대표적 명소인 알렉산더 네브스키 교회(Ploshad Alek-sander Nevski)를 찾았다. 아트 호스텔에서 쉬엄쉬엄 길을 따라 걸으니 약 20분이 걸린다. 가는 길에 만난 슬라베이코프 광장(Pl. Slaveikov)과 교회 입구에는 중고서적과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이 즐비했다. 가게들은 과거 공산정권 시대의 유물을 팔고 있었다. 불가리아의 과거와 오늘이 교묘하게 교차된 느낌이다. 특히 레닌의 두상을 발견했을 때는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알렉산더 네브스키 교회

교회의 금색 돔은 제법 거대한 규모였다. 런던, 파리, 로마 등에서 본 으리으리한 성당들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딱 소피아가 포용할 수 있는 크기랄까. 성당 안은 어두웠다. 촛불들이 실내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성모마리아 상은 서유럽의 성모와는 달리 좀더 동양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교회 한쪽에서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이의 영세 의식이 열리고 있었다. 아이의 부모는 근엄한 신부 앞에 다소곳한 모습으로 몸을 조아리고 있었다. 19세기에 전사한 20만 군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교회에서 열린 새 생명의 영세는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유아세례를 받고 있는 가족

교회를 나와 소피아 중심가로 발길을 옮겼다. 소피아의 볼거리들은 이 교회에서 금색의 천사상인 소피아 동상이 있는 곳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소피아 동상 앞의 비토샤 대로는 명품 쇼핑가와 바, 나이트, 성인클럽 등이 모여 있는 불가리아 최고의 중심가다. 당연히 소피아의 나이트라이프도 이 거리에서 시작한다. 가을을 닮은 불가리아처럼 거리의 네온사인과 흘러나오는 재즈, 블루스 음악들도 가을을 닮은 듯하다. 거리를 활보하는 소피아의 청춘 남녀들도 유행에 민감하기는 세계 여느 나라 젊은이들과 마찬가지였다. 미국식 청바지를 입거나 유명 메이커의 운동화, 구두를 신고 화려하고도 다양한 색깔의 헤어스타일을 가진 젊은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시내를 걷다 보면 소피아는 볼거리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당장 외지에서 온 관광객이 그리 많지 않다는 데서도 다른 유럽 도시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차분하면서도 조용한 분위기, 과거 공산 시절과 새롭게 밀려든 자본주의의 공존과 대조를 천천히 음미하며 하루 이틀 쉬어가기에는 좋은 도시다. 무엇보다 도착하자마자 버스터미널에서 만났던 불가리아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 씀씀이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기사제공 = 주간동아 / 글·사진 = 김형렬 www.travelb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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