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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 두바이 하는데 내가 갈챠줄께…

 

 

두바이 두바이 하는데 내가 갈챠줄께…
 
번호 210513  글쓴이 북학인 (sayforme)  조회 4659  누리 1063 (1063/0)  등록일 2008-2-12 15:00 대문 47 톡톡
 
 
 


지난번 대문에 오른 글 "두바이가 운하를 만드는 이유를 아느뇨?"는 홧김에 간단히 적은 글이었습니다. 좀 격한 표현이 오히려 많은 누리를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

2MB 당선 후 두바이 벤치마킹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두바이를 정확히 알고 우리와 다른 점들을 알려서 어설픈 무당이 사고 못 치게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지난번 적지 못한 것 위주로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1. 두바이가 투자국으로 각광받는 핵심적인 이유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해외투자의 첫 번째 검토대상은 국가위험(Country Risk) 입니다. 최근 우리나라 기업들이 많이 투자하는 동남아나 중국의 경우 사업성을 떠나서 사업이익을 안전하게 한국으로 회수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현지화를 위해서 투자한 기업이야 별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기업의 경우는 사업에 성공하고도 외환반출이 어려워서 고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안정적인 국가제도가 없거나 변동성이 크기 때문에 믿고 사업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두바이의 경우는 모든 외환의 반·출입에 제한이 없습니다. 물론 국제 블랙머니에 대한 심사는 엄격히 합니다만…

정상적인 상거래를 위한 외환의 반·출입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죠. 두바이에는 세계 각국의 자본이 아주 골고루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오일머니는 물론이고 유럽, 미국계 자본, 심지어는 알카에다 돈도 두바이에 있습니다. 저희 첫 번째 사무실도 알카에다 보유 건물이었습니다. 이는 어느 누구도 두바이에는 테러를 못하게 하는 것이며, 정치적으로도 어느 쪽에 유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그들의 방책이었습니다.

심지어 한 개의 공사장에 같은 국적을 가진 사람이 30%를 못 넘기게 합니다. 지구 상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를 생각한 것입니다. 두바이 거주인구의 80% 이상이 외국인입니다. 관광객을 합치면 두바이 시내에 다니는 사람의 90% 이상이 외국인입니다. 그리고 두바이 전체가 거대한 공사판입니다. 많은 건설 현장에 일하는 노무자들은 100% 외국인입니다. 가난한 국가의 남자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옛날 중동에서 오일머니 벌어올 때처럼 몸 팔러 와 있는 겁니다. 이들을 보면 예전에 우리나라 근로자들이 얼마나 고생해서 일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와 비교해보죠…

대한민국의 국가위험. 북핵문제로 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다가 6자회담과 남북정상회담으로 많이 제거된 상태입니다만 2MB의 정신상태로 볼 때 악화될 가능성 매우 높습니다. 북한의 정일이 아저씨가 앙심 품고 있다면 안전한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두바이 벤치마킹하려면 김정일이 쌈짓돈도 투자받아야 합니다. ㅎㅎㅎ

지난 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두바이처럼 외국인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는 국가소유의 토지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의 민원… 끝내주지 않습니까? 게다가 환경단체는 가만히 있겠습니까? 또한, 국유지라 할지라도 아주 좋은 조건(헐값)에 내놓아야 합니다. 두바이처럼 하려면 모든 인허가를 국가가 알아서 해결해주고 법인세, 개인소득세 면제, 모든 외환의 반·출입 자유화, 부동산 취득 외국인에게 영주권 부여, 대부분의 관세 폐지, 등등등…

유일하게 가능한 땅이 있다고 한다면 새만금 정도 되겠죠?

그런데 이 새만금을 그렇게 사용해도 되는 건지는 고민해봐야 할 문제 같습니다.


2. 두바이 개발의 자본

두바이가 돈이 많아서 세계 최고층 빌딩 짓고 칠성호텔 짓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바이는 세계의 자본을 유치해서 남의 돈으로 자기 땅에 신세계를 만들고 있는 겁니다. 많은 자본이 들어와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습니다. 저도 거기에 편승해서 돈 버는 사람 중에 한 명이고요… 두바이에 돌아다니는 부자들은 두바이 사람이 아니라 두바이에 투자한 외국인이라는 겁니다. 두바이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투자받아야 할 곳이 아니라 우리가 투자해서 돈을 벌어와야 할 곳입니다.


3. 두바이의 지리적 입지

두바이는 오랜 옛날부터 중계무역의 1번지였습니다.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를 이어주는 물류의 중심지였다는 것이죠. 두바이 공항에서 세계 어느 도시도 직항이 없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지금은 칠성호텔과 세계최고층빌딩 때문에 오히려 더 알려져 있지만 실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곳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우리나라를 두바이처럼 개발한다고 갑자기 자본이 밀려오고 세계물류의 중심이 될까요?

이것이 되려면 우선은 남북문제의 해결과 주변 열강의 협조 없이는 힘들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홍콩이나 싱가포르처럼 물류의 중심지가 되기는 지리적인 여건상 한계가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4. 두바이를 그대로 벤치마킹해서 개발한다면

우선 경제정의 문제가 생길 겁니다. 자국인 역차별의 문제가 되겠죠? 두바이 정도의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대한민국 모든 기업이 부동산 개발에 모두 뛰어들 겁니다. 한국기업만 못하게 한다면 그것도 웃기는 일이겠죠?

2MB 당선되면 취직될 줄 알고 찍어줬던 우리나라의 그 잘난 백수들이 저임금에 하루 10시간씩 노가다 뛸 수 있겠습니까? 엄청난 외국인 노무자들이 몰려와야 합니다. 이들로 인한 사회적인 인권의 문제가 생기겠죠? 건설회사들은 성업을 하겠지만 이때 뽑아 놓은 사람들 공사 끝나면 다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실업자 안 만들려면 끊임없이 더 많이 부수고 파헤쳐야겠죠…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5.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저는 2MB 아저씨가 그렇게 내세우는 건설회사에 2MB 아저씨의 기념사 들으며 입사해서 2MB 아저씨 덕택에 회사가 거덜나는 바람에 말리는 동료를 뿌리치고 자진 명퇴하여 외국계 기업에서 월급쟁이 하다가 독립한 사람입니다.

H 건설사에서 많이 배운 덕택으로 밥 먹고사는 데는 전혀 지장 없고 그 유명한 강남 D동 TP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MB (Be a MBtious의 MB 아님) 타고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 아파트의 유일한 노사모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행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일 때문에도 아주 많은 나라들을 방문했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세계 어느 나라보다 우리나라가 잘 산다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서 곧 망한다고 나발 부는 인간들은 연휴만 되면 골프백 매고 해외로 나갑니다.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정하지만 그런 나발은 불지 말란 거죠…

두바이 두바이 하는데 벤치마킹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미리 경고합니다. 한 가지만 벤치마킹 하면 됩니다. 생각 좀 하면서 개발하라!!! 바로 이 한 가지…

영어 이야기 좀 하죠…

저 역시 일 때문에 영어를 합니다만 몰입교육 안 받았어도 사업하는 데 전혀 지장 없습니다. 필요하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됩니다. 해외 근무 시에 영어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하나도 문제없습니다. 두바이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영어를 잘합니다. 영어를 잘해서 두바이가 성공한 것이 아니라 90%나 되는 외국인과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영어를 잘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정확한 이유입니다.

두바이에서 사업하지만 두바이에 정착하고픈 마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살아본 곳 중에서 우리나라만큼 살기 좋은 나라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운 놈이나 못 배운 놈이나 개념 탑재하지 않고 사는 인간들 보면 두바이에서 살고픈 생각도 들긴 합니다.

앞으로 5년간은 주로 나가 살아야 할까 봅니다.

또 생각나는 대로 글 올리겠습니다. 

 

ⓒ 북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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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고함(孤喊)] 숭례문 화재현장에서

 

 

도올고함(孤喊)] 숭례문 화재현장에서


[중앙일보 김용옥.임진권] 예부터 회록지재(回祿之災)라는 말이 있다. “받은 녹(祿)을 되돌리는 재난”이라는 뜻인데, 재난 중에 최악의 재난이라 하겠다. 천지자연으로부터 받은 녹을 천지자연으로 되돌리는 재난이니 문명을 향유하려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재난일 수밖에 없다. 도둑맞은 물건은 어딘가 뒹굴고 있어 되찾을 수도 있다. 회록지재란 예부터 화재(火災)를 일컫는 아언(雅言)이었다.

 


어젯밤 TV 뉴스 속보를 볼 때만 해도 연기만 뿌옇게 올라온다 했고, 그다지 큰 불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다리차를 탄 소방관들이 물을 뿜어대고 있어 그슬리는 차원에서 끝나버리면 그래도 상량(上樑)의 묵서(墨書)라도 보존되어 복원의 명분이라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국보 1호 숭례문 전소.”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소식이었다.

11일 아침 나는 숭례문으로 달려가 보았다. 너무도 참담한 모습이었다. 불세출의 서성(書聖),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도 과천에서 내왕할 때면 해 저무는 줄 모르고 우뚝 선 채 황홀하게 쳐다보았다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현판 글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에겐 그것이 일차적 관심이었다. 현판이라도 우선 떼어냈어야 했거늘… 쳐다보니 현판이 보이지 않아 우선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탐문해 보니 그것조차 떼어내는 과정에서 떨어뜨려 손상이 되었다고 한다. 하여튼 개판이다.

국보 1호라는 하중감 때문에 소방관들의 대처가 본격적이지 못했고, 또 문화재청의 안일한 상황 판단이 결국 전소라는 수치스러운 참사를 지어낸 것이다. 국민들이 빤히 쳐다보는 가운데 진화 장비를 완벽하게 갖춘 50여 대의 소방차가 출동해 있으면서도 그냥 훨훨 태워버린 것이다. 오호라!

“기분이 나빠요.” 친구에게 전화 거는 어느 어린 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그리 기분이 나쁜가?

나를 쳐다보더니 재빨리 휴대전화를 접고 정중하게 답변한다.

“어찌 되었든 국보 1호잖아요. 그런데 저렇게 처참하게 무너진 꼴로 우리 눈앞에 놓여있는 모습이 뭔가 불길한 국운을 상징한다는 느낌도 들어요. 국민 누구든 가슴이 아플 거예요. 아니, 부끄럽겠죠.” 중앙대학교 약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란다. 이름은 신동호.

―국운? 좀 거창한 얘기지만 일리가 있군. 저렇게 처참하게 무너진 꼴이 노무현 정권의 마지막 모습일까, 이명박 정권의 시작하는 모습일까?

“서로가 서로에게 덮어씌우겠죠.”

젊은이들의 지나치는 이 한마디가 오늘날 우리나라 세태의 전부를 말해준다.

“부끄럽다”는 그 한마디에 더 첨삭할 언어가 어디 있겠느뇨?

맹자의 혁명사상을 접한 신진유생 삼봉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고루한 친원파들과 대결, 나주 소재동 등지로 귀양을 다니면서도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와 결탁해 혁명을 모의하고 결국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다. 1392년 7월 17일 신왕조를 개창하고 태조 3년(1394) 10월 25일에는 한양 천도를 감행한다. 개성의 지세가 쇠하였다고는 하나 개성 문벌 귀족의 틈바구니 속에서는 도저히 새로운 국가,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궁궐을 조성할 때도 하륜(河崙)은 무악을 주산으로 삼자 했고, 무학대사는 인왕을 주산으로 삼자 했지만, 오늘날의 백악현무(白岳玄武), 인왕백호(仁王白虎), 낙산청룡(駱山靑龍)의 모습으로 궁궐과 도성의 모습을 결정한 것은 삼봉 정도전이었다. 삼봉이 꿈꾼 것은 불교라는 고려의 낡은 이데올로기를 불식할 수 있는 새로운 유교이념! 그 유교이념을 형이상학으로서가 아니라 형이하학으로서 도시에 구현하고자 했다.

태조 4년(1395) 삼봉은 새 궁궐의 전각 이름을 지었고, 5년에는 도성 8대문의 이름을 지었는데 『시경』과 『서경』에서 그 아름다운 뜻을 취하였다. 특히 4대문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오행(五行)에 배정시켜 그 이름을 결정하였다. 인(仁)은 동방(東方)이므로 동대문에 배속되고, 의(義)는 서방(西方)이므로 서대문에 배속되고, 예(禮)는 남방(南方)이므로 남대문에 배속되고, 지(智)는 북방(北方)이므로 북대문에 배속된다. 이렇게 해서 동대문의 이름이 흥인지문(興仁之門)이 되고,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 되고, 북대문은 소지문(炤智門)이 되었다. 그리고 오행 중 중앙에 해당하는 신(信)은 종로 중앙의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중 유독 동대문만 갈 지(之) 자가 들어갔는데 그것은 그 지역이 타 지역에 비해 낮고 지세가 꺼져 있어 땅 기운을 돋우어 주자는 의도로 갈 지를 더하여 넉 자 현액을 걸어주었다 한다. 그런데 숭례문 현액이 특이한 점은 타 현액이 모두 횡으로 쓰여 있는데, 이 숭례문 현액만 위에서 아래로 써 있는 종액(縱額)이라는 것이다. 일설에는 서울 도성의 정문인 남대문은 귀한 백성이 드나들게 되므로 서서 맞이함이 예절에 합당하다 하여 세워 달았다 한다. 타설에는 남방 화(火)에 해당되는 글씨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으로 세워 달았는데, 그것은 한강 건너 남쪽 조산(朝山)인 관악산의 불길을 불로 막아, 그 관악의 화기가 서울 도성을 범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숭례문은 자신이 불길에 휩싸임이 없이 기적적으로, 600여 년의 성상을 견디었다. 서울에 남아 있는 건물로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화려한 다포(多包)양식을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목조였다. 나머지는 모두 임란 이후에 재건된 것이다.

1962년 남대문을 중수(重修)할 때 3개의 대들보가 발견되어 그 정확한 건축연도를 알 수 있는데, 남대문은 도성의 제2차 공사를 완료한 후 12일 뒤인 태조 5년 10월 6일에 상량하고, 그 2년 후인 1398년 2월 8일에 준공하였다. 그러나 남대문 자체가 도성의 연속된 성로(城路) 위에 지은 것인데 이 도성을 짓기 위하여 지반을 돋울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가라앉으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세종조에 영의정 황희(黃喜) 이하 여러 대신이 건의하여 근본적으로 남대문을 신축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세종 30년(1448) 3월 17일 상량하였고 5월에 준공하였다. 그 뒤 성종 10년(1478)에 한 번 더 개축한 사실이 대들보로 확인된다.

남대문은 이상하게도 임진왜란 때도, 병자호란 때도 화를 면했다. 경복궁이 임란으로 송두리째 잿더미로 화하여 대원군이 재건하기까지 273년 동안을 인왕산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는 공궐(空闕)로 남아 있었던 사실에 비한다면 숭례문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흥망성쇠를 기억하고 있는 혼이요 얼굴이었다. 지금 우리는 서울이 다 터져 있어 도성팔문의 의미를 망각했지만, 과거에는 저녁 10시경 인정(人定)에 8문을 다 닫고 새벽 4시경 파루(罷漏)에 일제히 여는 통금 제도가 정확히 유지된 성곽 도시, 한성(漢城)이었기 때문에 남대문의 의미는 막중한 것이었다. 여기를 통과치 않고서는 한성 진입이 불가능했다.

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한 후, 1906년 황태자(훗날 大正天皇)가 한국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때 남대문을 통해 들어올 수 없다고 강짜를 부리며 남대문을 대포로 분쇄해 버리겠다고 제의했다. 이에 민중의 여론이 들끓자 그들은 융희 원년(1907) 남대문에 연결된 북쪽 성벽을 헐어 길을 내었고 이듬해에 남쪽으로 연결된 성벽을 헐어 달랑 남대문만 남겨놓았던 것이다.

왜놈들이 헤이그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을 때도 우리 민족은 이 남대문 주변으로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일본군은 남대문 성벽에 대포와 기관총을 설치하고 마구 쏘아댔다. 상인, 노동자, 남녀 학생, 부녀자들까지 용감무쌍하게 항전을 계속했으나 결국 피를 흘리며 압제의 굴레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 통에도 광화문은 무참히 파손되었지만 남대문만은 그 원형이 훼손되지 않았다. 억센 운명을 타고난 우리 민족의 600년 유물, 국보 1호, 그 숭례문이 덧없이 하룻밤 사이의 회록지재로 사라진 것이다.

웬 일일까?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방화를 의심하거나 문화재 관리소홀을 탓하여 부질없는 경비 예산이나 늘리는 호들갑일랑 이제 되풀이하지 말자! 근원적으로 문제되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죄악의 반성이요, 우리 사회의 신뢰의 부족이요, 이 민족 혼백의 타락이다.

세종대왕은 이 민족의 구원한 미래를 위해 우리 민족의 독창적 문자인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2년 후에 남대문을 신축하여 오가는 백성들에게 위용과 믿음을 주었다. 그런데 지금 새 정권은 기껏 생각한다 하는 것이 “영어몰입교육”이요, 회록지재보다 더 무서운 재앙인 대운하 강행에 혈안이 되고 있다. 정부 기구 통폐합 운운도 어떤 합리적 원칙이나 철학이 엿보이지 않는다. 대선 전의 민생 공약은 실종되어만 가고 있다. 과연 남대문의 무너진 흉측한 모습을 과연 우발적 사건으로만 돌릴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떠나가는 그 젊은이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여보게! 부끄러워 말게. 문화재는 이제 자네 머릿속에서 솟아나와야 할 것이 아닌가? 자네들이 컸을 때 삼봉이 구상한 코스모스보다 더 위대한 작품들로 이 땅을 수놓기 바라네.”

5시간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해 완전히 무너져 내릴 때까지 걸린 시간. 불은 10일 오후 8시40~50분쯤 났다. 10일 자정쯤 건물 천장에서 화염이 치솟았고, 11일 오전 1시쯤 2층 누각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불이 난 지 5시간 뒤인 오전 1시50분부터 석반을 제외한 2층 누각 전체와 1층 누각 대부분이 무너졌다.

글=도올 김용옥 기자, 사진=임진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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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뜨는 핀란드, 외국인도 무상교육?

요즘 뜨는 핀란드, 외국인도 무상교육?
[해외리포트] 핀란드 유학의 좋은 점과 나쁜 점
이보영 (radahh)
 
 
  
헬싱키 대학 본부 건물.
ⓒ 이보영
헬싱키 대학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유럽 국가는? 정답은 의외로 핀란드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올 6월 개통되는 핀란드-한국 직항 소요시간이 불과 9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구체적인 예를 들면 그제야 많은 사람은 놀랍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일본만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핀란드도 지금까지 우리에겐 가깝지만 먼 나라였다. 일본과의 거리가 감정적인 면에서 생성된 것이라면, 핀란드와는 상호 정보 부족에서 비롯한 거리감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이야 핀란드가 여러 면에서 한국에서 이전보다 주목을 받고 있지만 내가 핀란드로 떠났던 10년 전, 주위 분들에게 핀란드에 간다고 하면 필리핀에 가느냐고 잘못 알아듣는 분들도 있었다.

 

가깝지만 먼 나라 핀란드, 20대 때 알았더라면

 

나 또한 별다른 사전 지식 없이 핀란드에 살게 된 지라 살면서 깜짝깜짝 놀라는 일이 많았다. 말로만 듣던 백야현상도 직접 겪으니 놀라웠고 어둡고 침침한 겨울도 놀라웠지만 모든 교육이 무상이라는 것, 그리고 자국 국민 뿐만 아니라 외국 유학생까지 모두 무상으로 교육시켜준다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고 놀라웠다.

 

이 사실을 알고 처음 든 생각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하는 아쉬움이었다.

 

20대 중반, 젊음과 꿈을 자산으로 청운의 꿈을 품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적이 있다. 하지만 예상했듯(?)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할 때가 많았다.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일 하나는 '저당잡히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 'hock'을 찾아서 외운 다음, 결국은 그 단어를 실전에 써먹었던 일이다.

 

요즘은 유학생활만 돈이 많이 드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려고 해도 등록금만 천만 원에 육박하는 시대가 왔다고 한다. 이런 시대에 학비 없는 핀란드 유학은 실력 있는 한국 학생들에게 대안적 교육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고 싶어 핀란드에서 유학 중인 한국 학생을 만나서 얘기를 들어봤다.

 

  
대학 합창단에서 활동했던 전환길씨가 성탄절 콘서트를 마치고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 전환길씨 블로그
핀란드 유학

<장미의 이름> 계기로 '산타의 나라' 찾은 한국 청년

 

전환길씨(30)는 현재 투르크 대학 경제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이며 올 6월 졸업을 앞두고 있다. 국내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전씨는 특이하게도 군 제대 후 맞이한 가치관의 혼란기에 읽게 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때문에 결국 핀란드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 도입부에 주인공인 윌리엄 수도사가 사건의 중심이 되는 수도원으로 가는 길에서 석양이 지는 계곡을 보면서 동료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이란 수많은 다른 다양한 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아름다움을 정의하던 바로 그 대사가 한 청년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전씨는 이후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해 큰 관심을 두게 되었고, 사회학자가 쓴 여러 관련 서적을 읽으며 사회적 다양성을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의견을 다루고 소외받는 자를 아우르는 비영리단체들이 많이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장래 목표도 '비영리단체 경영'으로 세우게 되었는데 그 당시 믿게 된 종교(가톨릭)도 그의 결심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전씨는 '비영리 단체 경영'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어 미국 유학의 가능성을 먼저 알아봤다. 그렇지만 원하던 대학의 학과에 진학할 경우 어마어마한 비용(2년 공부를 마치는 데 드는 비용이 모두 2억 원)이 들어 미국 유학의 꿈을 접을 즈음, 우연히 대학교의 홈페이지에 뜬 핀란드 관련 정보를 클릭하게 되었고 그 곳을 통해서 핀란드 유학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룸메이트와 함께 찰칵!
ⓒ 전환길씨 블로그
핀란드 유학

유학생이 전하는 핀란드 생활의 좋은 점과 나쁜 점

 

다음은 전씨가 전하는 핀란드 유학의 장점과 단점이다.

 

▲ 장점

 

1. 공기 좋고 물 맑다

공기가 아주 맑아서 별도 참 밝게 빛난다. 수돗물, 그냥 마셔도 상관없다. 세계에서 가장 수질이 깨끗한 나라가 바로 핀란드이다.

 

2. 안전하고 도둑도 없다

지진·태풍 등의 천재지변이 거의 없으며 테러가 발생하는 경우도 지금까지 없었다. 저녁 늦게, 자정이 넘어선 시간에 혼자 돌아다녀도 위험하지 않다. 특히나 여자들에게 발생하는 혐오스런 범죄도 거의 없다. 단지 취객만 조심하면 된다.

 

3. 학비가 없다

몇년 전 외국 학생들에게 학비를 징수하는 방안이 논의됐지만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즉 외국 학생들에게도 학비는 전혀 없다. 단지 매년 학기 초 100유로 정도의 학생회비가 청구될 뿐이다.

 

4. 학생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시설좋은 학생 아파트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월 200~300유로 이내면 사용 가능하다.  방은 개인 혼자 사용하고 부엌·거실 등은 공동 시설이다. 기차·시외버스·유스호스텔을 이용할 때 절반 가격으로 할인된다. 학생 식당에서도 절반 가격으로 식사를 할 수 있다. 시내버스도 학생 버스카드를 쓸 경우 절반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 학생의 경우 콘서트 관람을 비롯해 문화생활을 누릴 때도 할인을 받을 수 있다.

 

6. 생활비 이외에는 돈이 별로 들지 않는다

도서구입비나 기타 문서 출력비 같은 것, 전혀 들지 않는다. 의지만 있으면 공부할 수 있다.

 

  
핀란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각국 유학생들 모습.
ⓒ www.utu.fi
핀란드 유학

7. 생각 외로 외국 학생이 많다

유럽에서도 가장 구석에 박혀 있어서 국제교류가 부족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핀란드에는 유럽 각국에서 많은 학생이 유학생이나 교환학생으로 와 있다. 아시아·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단 자신이 먼저 다가서는 자신감과 용기, 즐거운 맘과 미소를 잃지 않는다면 말이다. 진심어린 태도는 기본이다.

 

8. 사람들이 착하다

핀란드 사람들, 남 속일 줄 모른다. 간혹 나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길거리에 떨어진 지갑도 잘 집어가지 않는 사람들이다. 볼펜·안경, 이런 거 그냥 도서관에 잊어버리고 놔두고 가도 그 다음날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정직과 신용이 이들에게 뿌리깊이 박혀 있는 것 같다.

 

9. 여름 날씨는 환상적이다

죽여준다. 평균기온 20℃ 정도로 온화한 날씨이다. 햇살도 아주 맑다.

 

10. 음식 솜씨가 저절로 좋아진다

음식점도 별로 없고 한국 음식도 구하기 어려워 먹고살려면 자기가 해먹어야 한다. 살림 솜씨가 저절로 나아진다. 나중에 마누라한테 사랑 받을 것 같다.

 

11. 고요하다

참 조용하다. 가끔 '이 나라 사람들 어디에 박혀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12. 인종 차별이 거의 없다

가끔 취객들이 기분나쁜 행동을 하는데, 그건 여기 일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인종 차별로 보기는 어렵다.

 

13. 교수님 눈치 볼 일 없다

학문적으로만 관계를 맺으면 된다. 가끔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한국과 같은 상하 수직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14. 졸업생들이 국내에서 (현재까지) 취직이 잘 된다.

아직 많은 유학생을 배출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유학생 취업 현황을 살펴보면 비교적 국내 대기업 핵심부서에 취업하고 있는 편이다.

 

  
헬싱키 예술 디자인 대학 내부 모습.
ⓒ 위키피디아
핀란드 유학

▲ 단점

 

1. 겨울이 길고 추우며 어둡다

 

2. 많이 심심하다

심심할 때가 잦다. 그렇다고 딱히 막상 할 것도 없다. 공부를 열심히 할 수밖에.

 

3. 우울증 걸리기 딱 좋다

그렇기에 우울증 걸리기 딱 좋다. 유학과정 중 우울증 한 번씩 다 겪는 것 같다. 또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문화 때문에 힘들어하기도 한다.

 

4. 핀란드 친구 사귀기 꽤 어렵다

맘 잘 열어주질 않는다. 이 사람들의 사람 사귀는 방식이므로 그냥 이해해야 할 듯 하다. 아무튼 시간 오래 걸리고 사귀어도 허물없이 지내기에는 어렵다.

 

6. 도서관 이용이 불편하다

미국과 비교하면 일반 장서량에서 밀린다. 논문 준비 중 도서 검색하면 없는 게 많았다. 타 대학교에서 빌려보는 것도 가능하므로 이를 활용할 수는 있다. 또한 일찍 문 닫는 것도 문제다.

 

  
헬싱키 공과 대학 수업 광경.
ⓒ 위키피디아
헬싱키 공과 대학

7. 영어 실력 향상에 한계가 있다

외국 학생들이 많긴 하지만 영어 네이티브 스피커를 찾아보는 것은 꽤 어렵다. 미국에서 영어 공부하는 것보다 많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물론 일단은 살아남기 위해서 영어를 사용해야 하므로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향상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8. 핀란드어 습득에 대한 매력이 없으나, 영어만 하고 살기에는 2% 부족하다

전 세계에서 600만 명 정도만 핀란드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핀란드 지역전문가나 장기거주 이외의 체류라면 핀란드어에 대한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학교 수업 역시 영어로 대부분 이루어진다. 단 기초 과목이 핀란드어로 운영될 수 있지만 교수와 상의 후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핀란드어를 모르면 불편한 일이 자주 생긴다. 슈퍼마켓이나 상점에서 영어가 완벽히 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핀란드 문화를 제대로 경험해 보고 싶거나 핀란드인 단체에 가입하고 싶으면 어느 정도의 핀란드어 지식은 필수적이다.

 

9. 물가가 비싸다

북유럽 물가, 널리 알려진 대로 비싸긴 하다. 하지만 각종 학생 할인 혜택으로 방 월세 포함해서 500유로(한화 70만~80만원)면 그럭저럭 한 달 생활이 가능하다.

 

  
헬싱키 공과 대학 전경.
ⓒ 위키피디아
헬싱키 공과 대학

10. 한국 식품 조달이 쉽지 않다

헬싱키 최초 한국 식당이 2005년 여름에 개업했다. 하지만 가난한 학생이 매일 식당에서 사먹기는 어렵다. 식재료의 경우 라면·고추장· 된장처럼 간단한 것은 헬싱키 아시아 음식 상점에서 구입 가능하지만 보통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게 많다. 요즘은 독일 등의 한국 음식재료 도매상에서 인터넷으로 구입할 수가 있어서 사정이 훨씬 좋아지기는 했다.

 

11. 학위 취득 기간이 자칫 늘어나기 십상이다

자율성이 많이 주어져서 자신이 잘 조절하지 못하면 공부 기간이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전환길씨는 이와 비슷한 내용을 핀란드 한국 유학생 홈페이지에 올린 적이 있었는데, 이때 이 내용에 공감하는 다른 유학생들의 댓글이 많이 달렸다. 그 때 달린 재미있는 댓글을 몇 가지를 소개한다.

 

"A : 좋은 글이네요^^.

B : 중앙일간지에 내도 되겄다. 장점에 바퀴벌레나 쥐 없다고 하나 추가해도 되겠다.  

C : [원츄] 이런 글은 한국의 각 대학들을 돌며 게시판에 좀 뿌려주도록.  

D : 죽인당!! 잘 썼어. 공감 가는 내용 많은데, 저두. 장점에 집은 특히 천장이 높아서 넘 좋다 추가해주셔요. 또 전철에 사람이 깔려, 하이힐에 발등 찍혀 피 질질 흘리지 않아도 된다도."

 

대학교육 경쟁력 평가에서 수위를 다투는 핀란드

 

  
유럽 3대 음악원 중 하나인 시벨리우스 음악원.
ⓒ 이보영
시벨리우스 음악원

여기에 마지막으로 기자가 생각하는 장점 한 가지를 덧붙이고자 한다. 핀란드 대학은 세계경제포럼(WEF) 세계경쟁력 보고서와 스위스경영대학원(IMD)의 국가경쟁력 평가 중 대학교육 경쟁력 부분에서 몇 년째 계속 1~2위를 다툴 정도로 수준이 높아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참고로 (앞으로는 전공 분야가 훨씬 다양해지겠지만) 현재까지 한국 유학생이 주로 유학 오는 분야는 경영경제학, 공대, 제지학, 그리고 디자인 계통이었다.

 

경영경제학과와 공대는 핀란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분야로 영어로 개설된 강좌가 상대적으로 많아 유학생들이 몰리고 있다. 디자인의 경우는 '헬싱키 예술디자인 대학'이 세계에서 앞서가는 디자인 전문대학이어서 디자인을 전공한 한국 학생들의 선호도가 높고, 제지학의 경우는 핀란드가 세계 제1의 제지기술을 자랑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선진기술 습득을 위해 다른 어느 나라보다 핀란드로 유학을 오는 것이 정석인 까닭이다.

덧붙이는 글 | < 핀란드 유학 관련 사이트 소개>

http://www.suomikorea.com/new/kosafi/index.shtml
(핀란드 한국 유학생회 홈페이지)
http://www.studyinfinland.fi/
(핀란드 유학 관련 전반적인 정보)
http://finland.cimo.fi/studying/international_study_programmes.html
(핀란드 대학, 대학원에 영어로 개설된 전공이나 강좌 검색 가능)
https://www.admissions.fi/
(핀란드 내 모든 폴리테크닉 대학을 온라인으로 지원할 수 있는 곳. 현재 2008년 가을학기 지원을 온라인에서 받고 있다. 마감은 2월 15일이다.)

2008.02.07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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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몰입 교육, 버마 군정의 실패 따라가나&quot;

영어몰입 교육, 버마 군정의 실패 따라가나"
  [버마이야기] ⑩ '몰입' 시켰더니 버마말도 못하더라
 
  2008-01-30 오후 7:25:32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살고 있는 버마의 공식 언어는 인구가 가장 많은 버마족의 언어인 버마어이고, 제2의 언어는 영어다. 그 외의 다른 민족들은 자신의 민족 언어를 집에서 배울 수밖에 없다. 영어는 원래 중학교 때부터 가르치다가 1982년 이후에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가르치게 되었다.
  
  또 86년부터는 고등학교에서 버마어, 역사, 지리학을 제외한 과목들을 영어로 가르치게 됐는데, 87년 이후 대학에서도 영어로 가르치게 되었다. 국제 교육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버마 군부는 말한다.
  
  학자들의 비판에 따르면 그렇게 교육제도를 바꾼 후부터 학생들의 영어 수준은 더 떨어지게 되었다.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교과서, 갑작스럽게 생긴 교육제도에 대한 교수와 교사들이 경험 부족, 그리고 학년 안에 교과서에 있는 많은 내용 모두를 가르쳐야하는 의무 등으로 교사와 학생들의 목표는 교과서를 끝까지 나가는 것이 되어버렸다.
  
  대다수의 과목을 영어로 배우는 데다가 공부할 것이 많다 보니 버마 학생들은 국어인 버마어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이 영어를 못할 뿐만 아니라 버마어 수준 또한 떨어지게 되었다.
  
▲ 버마 난민 캠프에서의 수업 장면 ⓒhttp://www.childsdream.org

  학교를 군대로 만들고자 했던 군부
  
  1988년 학생들이 주도한 버마의 8888민중항쟁 이후 군부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조직적으로 파괴했다. 버마 군부는 학교들의 교칙까지 간섭했으며 해방운동의 지도자이자, 아웅산 수지 여사의 아버지인 아웅산 같은 사람들과 관련되 역사를 배우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1992년부터 교수들을 위해 매년 1개월씩 연수 프로그램을 해왔는데, 그 내용은 친(親)군부 교육과 군대 훈련, 또 학생들의 활동을 감시하는 방법 등으로 채워져 있다.
  
  초중고 교사들에게는 92년 이전부터 그 같은 연수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 때문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학교를 떠난 교사들도 많았다. 그리고 많은 교사들은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눈과 입을 닫고 하나의 로봇처럼 살아오고 있다.
  
  제일 큰 문제는 학생들이 교육제도를 비판하거나 학생 권리를 이야기를 하거나, 민주화를 요구하면 그때마다 군부가 해결하는 방법은 체포와 처형, 그리고 휴교라는 것이었다. 1988년 6월부터 2000년 7월까지 버마의 대학교들은 휴교와 개교를 반복했고 그러다 보니 실질적인 교육 기간은 매우 짧았다.
  
  88년 6월~91년 4월 동안 대학교들은 폐쇄되었고, 91년 5월에 다시 문을 열었다. 또 96년 12월부터 2000년 7월까지 다시 폐쇄되었다. 13년 동안 대학교가 문을 연 기간은 36개월에 불과하다. 폐쇄 당한 대학교 중 군부와 관계된 학교들은 없다.
  
  2000년 7월에 대학교들은 다시 문을 열었는데, 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대학교를 시골로 강제 이주시켰다. 91년 이후부터 교사들의 하루 평균 근무시간은 12시 정도 되고 있다. 교사들은 수업, 제출한 보고서를 검사 하는 것 외에도 학교 보안을 위해 경비까지 해줘야한다. 또한 대학 교칙을 군대식으로 만들어 상명하복으로 통치하는 후견인 제도를 시행하라는 요구까지 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한 교사는 20~50명의 학생을 관리해야한다.
  
  이는 달리 말해 학생들이 자유와 인권, 민주화에 대해 아무런 활동을 하지 못하게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학생의 활동에 대해 제대로 보고하지 못한 경력이 있으면 그 교사도 자유와 인권, 민주화 활동을 한 학생과 마찬가지로 반국가사범으로 취급당한다. 또 학교에 대해 학생들이 말하는 애로사항이나 요청, 학생 권리에 대해 교사들이 학교 측에 보고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교사와 학생 사이에 오해들이 생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
  
  교과서 안에서만 높아지고 있는 교육 수준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힘을 쏟고,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교사들은 자신과 관계가 없는 곳에 시간과 힘을 많이 쓰게 되고 있다. 제자들에게 수학, 생물학을 영어로 가르치는 교사들은 연구할 기회가 거의 없고 교육 자재를 제대로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교사들은 제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지 못해 제자들의 무시를 받고 있다. 수업을 같이 하고 있기는 하지만 학생과 교사 양쪽 모두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찾기 힘들다.
  
  수업시간이라면 학생들과 교사가 해왔던 연구에 대한 토론을 통해 지식을 나눠야하는데, 아직도 버마의 대학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버마에서는 교사가 칠판에 분필로 쓰면서 하는 말을 조용히 듣고 따라서 메모하는 것이 유일한 공부방식이다. 연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도서관에 갈 일이 거의 없고, 도서관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도서관이 없다. 그나마 있는 도서관에는 책이 별로 없고 학교 도서관에서 학생이 책을 빌리는 문제도 만만치 않다.
  
  버마 군부는 2005년 아동의 진학률이 97.58%라고 발표하지만, 유네스코의 2004년 버마 교육보고서에 따르면 아동의 45%는 초등학교 기초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버마에서는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제도가 있는데, 유니세프의 2000년 보고서에 따르면 군부의 교육에 대한 예산이 1.2%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동 한 명 당 예산이 28센트에 불과하다.
  
  나라를 장기간동안 통치해온 버마 군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통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학자들이 비판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과서들의 내용 수준을 높게 올리는데, 교육 자제를 제대로 제공해 주지 않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와 지원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버마의 교육 수준은 교과서 안에서만 높아지고 있다. 버마 군부는 자신들의 목표가 성공한 것으로 봤다.
  
  학생과 교사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 바쁘게 지냈으며, 인권과 평화의 가치에 관심을 둘 틈이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버마 학생들은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배우고 지키고 있다. 버마의 88년 8888민중항쟁, 96년 항쟁 등의 대표적인 집단은 학생이었다. 버마의 스님들이 이끈 2007년 9월 시위의 제2의 지도자들 역시 학생들이었다.
  
  이 학생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야 국가의 미래와 사회의 평화가 밝혀진다. 버마 시민들은 아이들이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하고 있다.
  
  * 필자 마웅저(Maung Zaw) 씨는 버마 8888 항쟁 당시 고등학생으로 시위에 참가한 후 버마 민주화 운동에 투신해왔다. 1994년 군부의 탄압을 피해 버마를 탈출, 한국에 왔고 2000년 이후 현재까지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소송을 진행중이다.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결성에 참여했고, 현재는 한국 시민운동에 관심을 갖고 시민단체 '함께하는 시민행동'에서 인턴으로 활동 중이다. 블로그 <마웅저와 함께(http://withzaw.net)를 운영 중이다.
   
 
  마웅저/'함께하는 시민행동'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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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미술이냐구? 못나서 더 아름답지!

이것도 미술이냐구? 못나서 더 아름답지!
쓰레기통에서 나온 <꽃밭의 루시>가 소장품 1호... 배드아트 미술관
신주현 (imukin)
 
 
  
▲ <샘> 백 년 전, 마르셀 뒤샹은 소변기 하나를 허리춤에 끼고 전시장에 나타나 외쳤다. “변기도 예술이다!”
ⓒ 마르셀 뒤샹
뒤샹
뒤샹 이후, 오늘도 여전히


약 백년 전, 마르셀 뒤샹이 소변기 하나를 허리춤에 끼고 전시장에 나타났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외쳤죠.

 

"변기도 예술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샘>. 소변기에 단지 리처드 머트라는 서명이 하나 있을 뿐이었습니다. 뒤샹은 붓과 물감이 아닌, 변기처럼 공장에서 만들어진 기성품으로도 메시지를 전달하고 예술적 기능을 할 수 있다고 말했죠. 이 상징적인 사건 이후로, 미술은 무성 생식하듯 다양한 미적 기준과 형식을 제시하며 세포 분열해왔습니다.

 

그리고 백년 후, 불행(?)하게도 현대미술은 여전히 뒤샹의 손바닥 안에 있는 듯합니다. 시체의 일부분을 절단해 사진을 찍어도(조엘 피터 위트킨) 뒤샹의 손바닥 안이며, 산 하나를 천막으로 포장해도(크리스토와 잔느 클로드) 뒤샹의 손바닥 안이며, 접시 위에 지렁이를 올려놓아도(신디 셔면) 뒤샹의 소변기는 낄낄거리며 이 모든 것을 예견했습니다.

 

이제 미술은 더 이상 회화를 대표하지도 않으며, 지저분하고 더럽고 추한 것들도 얼마든지 미학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술은 이미 경계를 허물었고 서로의 영역을 넘나듭니다. 미술은 이제 뒤샹의 손바닥 안에서 스스로 미술임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봉착해버린 것입니다.

 

'파인아트'(Fine Art)는 '순수미술'의 통칭입니다. '순수'라는 말도 어폐가 있습니다만, 어쨌든 예술성을 지닌 미술품이나 미술을 '파인아트'라고 합니다. 우리가 책에서 또는 미술관에서 감상하는 모든 작품들이 파인아트입니다.

 

현대의 작가들은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작품이 파인아트이길 바랍니다. 비록 머리 끝에 뒤샹이 가부좌 틀고 있을지라도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야 하고 뛰어넘어야 하는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장품 1호,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작품


그렇다면 이 작품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요. 거창하게 이것도 하나의 '개념미술'일까요. 뒤샹의 명제와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이런 혼돈은 과연 이 작품들이 예술일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배드아트(Bad Art), 아주 형편없어 불편하기까지 한 작품임을 천명하고 나섰습니다. 바로 '배드아트 미술관'(Museum of Bad Art)의 작품들입니다. 미 매사추세츠주의 보스턴 지역에 있는 이 미술관은 영어 머릿글자를 모아 모바(MOBA)라 부르기도 합니다.

 

뉴욕현대미술관의 약칭인 모마(MOMA, Museum of Modern Art)를 의식한 듯한 작명이군요. 이 갤러리의 주요 작품 몇 점을 소개하겠습니다.

 

  
▲ <꽃밭의 루시> 모바 갤러리를 있게 한 대표작이다.
ⓒ MOBA
MOBA

비틀스의 노래 제목 <루시 인 더 스카이 위드 다이아몬드>(Lucy In The Sky With Diamond)를 패러디한 듯한 이 작품의 작가는 미상입니다. 보스턴의 한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이 작품이 바로 모바 갤러리 소장품 1호이자, 갤러리 설립의 이유가 됐습니다.

 

모네의 <우산을 든 여인>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작품은 모바 갤러리의 자랑입니다. 모바 갤러리는 이 작품을 두고 "인물의 움직임과 의자, 들썩이는 가슴, 오묘한 빛깔의 하늘, 얼굴 표정 등 모든 세부묘사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 무엇하나 나무랄 데 없는 포트레이트"라고 극찬하면서 단연 배드아트의 "걸작(마스터피스)!"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모바 갤러리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작품은 짐 슐만이라는 사람이 기증한 점묘 포트레이트 <일요일, 변기 위의 조지>입니다. 모바 갤러리는 이 작품의 감상 포인트는 바로 대비를 이루는 점묘법에 있다고 말합니다.
 
즉 푸른색 타월 모서리에 잘 보이지도 않는 부분의 바느질 자국은 초록과 빨간색의 작은 점으로 섬세하게 수놓은 반면, 발 부분(특히 발목으로 갈수록)은 귀찮은 듯 대충 거칠고 굵게 찍어 발라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은 묘한 대비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 <미소짓는 마돈나> 나무조각 상 얼굴에 그려넣은 마돈나의 오묘한 표정이 이 작품의 감상 포인트.
ⓒ MOBA
MOBA

<미소짓는 마돈나>라는 제목의 오른쪽 작품은 한 사람의 작업이냐, 두 사람의 작업이냐로 논쟁이 있었습니다. 즉 누군가가 나무조각상을 먼저 만든 후 또 다른 누군가가 화룡점정하듯 얼굴표정을 마무리 했는지, 아니면 한 작가가 조각과 표정까지 함께 작업을 했는지 하는 점이죠.

 

왜냐하면 지극히 단순한 형태의 나무조각상 위에 빠른 펜 놀림으로 얼굴 표정을 찍어 발라 상반되지만 오묘한 이미지를 얻어냈기 때문인데요. 어쨌든 그 이유로 이 작품 또한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너무 못나서 무시할 수 없는 작품들


모바(MOBA)의 작품들을 모마(MOMA)의 작품들과 비교하는 것은 불허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 갤러리는 엄연히 13년의 역사와 400여 점의 컬렉션, 화보집을 비롯한 많은 아트 상품을 개발하여 판매하고 있고, 지금도 활발하게 작품을 수집하고 전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느 대기업의 미술관처럼 값 비싼 작품이 아닌, 대부분 주웠거나 기증한 작품들이라 돈 한푼 들이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너무 못나서 무시할 수 없는 작품들"(Art too bad to be ignored)이라는 이 갤러리의 슬로건처럼 상식 수준의 미적 감각으로 보더라도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작품들뿐입니다.

 

하지만 모바 갤러리는 못 그렸다고 비꼬지 않습니다. 그 자체를 즐기고 인정하며, 가치 있다고 당당히 주장합니다. 작품에 대해서만큼은 진지합니다. 웃다가도 웃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기존의 관념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작품을, 그럼에도 걸작(마스터피스)이라고 자처하는 아이러니.

 

  
▲ <작은 돼지가 시장에 갔다, 집에 있는 작은 돼지>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 데미안 허스트
데미안 허스트

 

하지만 이 작품들이 난해하기 짝이 없는 현대미술 작품들 보다(만큼) 신선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박제한 돼지를 반으로 절개해 전시한, 요즘 제일 잘 나간다는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과 마돈나의 얼굴에 눈 코 입을 찍어 바른 작품의 신선도(?)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대놓고 못 그렸다고 하니 속 시원할 뿐입니다.

 

미술 작품 개념의 범람. 뒤샹이 소변기를 들고 전시장에 나타난 사건은 미술사조의 변화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현대 미술가들에게 꽤나 스트레스 받는 숙제를 내준 셈입니다. 이제 작품의 의미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묻지 마시고 그냥 작품만 보고 평가해주세요'라고 하다가는, 뒤샹의 손바닥 안에도 못 들어갈 게 뻔합니다.


내가 예술이라는데 어쩔거야?


모바 갤러리의 작품들을 보는 즐거움도 어쩌면 같은 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어려워만 지는 개념들과 억지로 쥐어짜 내고 있는 의미들, 그 미술작품들 사이에서 모바 갤러리의 작품들은 스트레스도 없고 통쾌합니다. 뒤샹이 '너희에게 숙제를 내주노라' 하고 있을 때, 모바 갤러리의 작품들은 그 빗발치는 화살의 공격을 살짝 비켜서서 '내가 예술이라는데 어쩔거야?' 하고 비웃는 듯합니다.

 

우리가 향유하는 것도 이런 개념 감상의 즐거움일 것입니다. 모바 갤러리의 작품 면면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지만 갤러리가 내세운 배드아트의 기치 아래 모인 이 작품들은 또 하나의 개념적 '도발'로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대놓고 못 그렸다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어깨에 힘 들어간 값 비싼 개념미술품들을 조롱한 듯 아닌 듯 하는 폼새가 한 수 위인 것 같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뒤샹의 숙제는 가뿐하게 해결한 셈이군요. 더군다나 이렇게 가볍고(값싸고) 유쾌하게 정곡 찌르는 것이라면, 그 못 그린 <풀밭의 루시>도 돈 있는 기업에서 비싼 값에 한번 살만하지 않을까요. 개념을 팔고 향유하는 시대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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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면 안 따져서 행복한 나라, 덴마크

체면 안 따져서 행복한 나라, 덴마크
  [덴마크에서 살아보니ㆍ<1>
 
  2008-01-21 오전 12:32:09
 
   
 
 
  덴마크는 동화 작가 안데르센의 나라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이 나라가 동화 '인어공주'와 '성냥팔이 소녀'의 배경이라고만 기억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대한민국의 절반도 안 되는 영토를 갖고 있고, 기후도 썩 좋지 않지만 덴마크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꼽힌다. 덴마크는 지난 2006년 영국 신경제재단과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대학이 뽑은 '행복지수' 세계 1위의 나라다. 반면 이 조사에서 세계 최고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고 있는 미국은 조사 대상 95개 국가 가운데 17위에 그쳤고, 한국은 56위였다.
  
  그런데 이처럼 '세계 1위'의 행복도를 기록한 나라 사람들은 정작 1등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작은 나라'라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무리한 성장과 팽창을 꾀하기보다 탄탄한 복지와 성숙한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 구성원이 두루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데 애써왔다.
  
  그리고 이렇게 삶의 질을 중시하는 덴마크인들의 태도는 미국식 부국강병(富國强兵) 노선이 우리가 배워야 할 선진국 사례로 주로 꼽히는 상황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마침 한 독자가 덴마크 체류 경험을 담은 글을 보내왔다. 50대 후반의 주부인 독자 김영희 씨는 지난 2004년 3월부터 2007년 3월까지 3년 동안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지냈다. 남편의 직장 일로 3년 동안 덴마크에서 생활하며 겪은 일을 김 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틈틈이 글로 적어 올렸다. 김 씨가 새로 다듬고 정리한 글을 연재 형태로 소개한다. <편집자>
  
  "우리는 작은 나라라서…"
  
  덴마크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에 대해 설명할 때 흔히 시작하는 말이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는 덴마크가 큰 나라인지 작은 나라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덴마크에 대해 입을 열면 꼭 '작은 나라'라는 단서부터 붙인다.
  
  그래서 언젠가는 가깝게 지내던 덴마크 인에게 "그래 덴마크는 작은 나라야. 한국에서는 몰랐는데 여기 와서 작은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라며 일부러 짓궂게 대답한 적도 있다.
  
  그랬더니 그이는 "실은 스웨덴도 우리 땅이었고 노르웨이도 우리 땅이었는데…"라며 덴마크가 예전에는 얼마나 큰 나라였는지를 슬며시 내비치는 것이었다.
  
▲ 유럽에서 덴마크의 위치. ⓒmapsofworld.com

  
▲ 덴마크 지도. ⓒlonelyplanet.com

  그도 그럴 것이 바이킹 시대에는 한때 영국의 일부까지 다스렸고, 그 후 14세기에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합병하여 스칸디나비아 3국을 통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23년에 스웨덴이 독립해 떨어져 나가고 크리스티안 4세(재위 1588∼1648) 시절에는 2차에 걸친 스웨덴과의 전쟁으로 국토를 잃었다. 지금의 스웨덴 최남단이 된 룬트, 헬싱고, 말뫼 등지의 땅은 그때 빼앗긴 것이다.
  
  그 뿐 아니다. 덴마크는 시쳇말로 줄을 잘못 서서 크게 손해를 본 나라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나폴레옹 편에 섰던 덴마크는 영국·러시아·스웨덴 등의 동맹국과 싸운 끝에, 1814년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해야 했다.
  
  영국의 넬슨제독이 코펜하겐까지 쳐들어 와서 군함을 모조리 끌어가고 배를 건조하기 위해 쌓아둔 목재를 다 불태우는 바람에 덴마크의 해군력은 한동안 재기 불능의 상태에 빠졌고, 발틱 해의 제해권을 잃은 것도 그때부터이다.
  
  1864년에는 1460년 이래 동군연합(同君聯合)의 형태로 덴마크에 속해 있던 유틀란트 남부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두 공국을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 싸워서 패한 뒤 할양하였다, 이 땅 가운데 일부인 북 슐레스비히를 제1차 세계대전 후 주민투표에 의해 되찾기는 했다.
  
  한편 본래 노르웨이 령이었다가 덴마크에 속하게 된 아이슬란드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6월 독립하였다.
  
  그리하여 북극권에 가까운 그린랜드를 제외한 덴마크 본토는 현재 한반도 1/5 정도의 면적에 인구 530만 가량의 작은 나라로 남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덴마크는 여러 차례 전쟁에서 패하여 계속 영토가 축소된, 수모와 굴욕의 역사를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항상 "우리는 작은 나라라서"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들은 아픈 역사적 현실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행복과 실리를 찾는다.
  
  필자가 3년을 지내는 동안 덴마크 사람이 '세계 제일'이라고 뽐내는 것을 별로 보지 못했다. 사실 덴마크 디자인이나 가구, 건축설계, 제약, 컨테이너 선박, 음향기기, 식품 등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게 꽤 많은 데도 말이다.
  
  그들은 구태여 '세계 제일'을 추구하지도 않는 것 같다. 체면이나 겉치레보다는 실속을 챙기는 사람들이다. 건물을 봐도 화려하고 큰 건물이 드물다. 오히려 초라할 지경이다. 그러나 그 속을 들어가 보면 깔끔하고 세련된 내부치장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849년에 입헌군주제가 된 이래 복지국가의 기반을 마련하여 발전시켜 온 덴마크는 이제 국가 경쟁력이 세계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강소국이다.
  
  작은 나라가 대국민적인 합의를 이끌어내기에는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하여, 덴마크의 경우 국민적 합의를 기반으로 끊임없이 제도를 고쳐가며 시대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간다.
  
  영토는 작아졌으나 삶의 질이라는 측면에서는 그 어느 나라보다 수준이 높은 복지국가다. 실제로 덴마크인의 행복지수는 번번이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김영희/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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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도 울고갈 '이명박 신자유주의'

 

 

애덤 스미스도 울고갈 '이명박 신자유주의'
[고태진 칼럼] 경계해야 할 기업과 교육의 '자율'
고태진 (ktjmms)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달 28일 오전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경제인 간담회에서 조석래 전경련회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등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이명박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정체성을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좌파'란 기존의 가치나 전통보다 새로운 변화와 가치를 추구하는 성향을 이야기한다. 한편, '신자유주의'는 자유로운 경쟁을 확대함으로써 효율성과 생산성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좌파는 대체로 자본주의의 여러 부조리와 모순을 극복하려는 입장인데 반해,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자본주의적 가치 성장을 추구하는 편이라 이 두 가지 가치는 모순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일 것이다. 그래서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노 대통령의 말은 그의 정체성 혼란을 상징하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차기 이명박 정부의 정체성은 무엇이라 볼 수 있을까? 정부조직과 공무원 수를 줄이고, 기업의 자유로운 경쟁과 투자를 중시하는 '친기업정부'를 내세우는 것을 보면 명실상부한 '신자유주의 정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이 '신자유주의 정부'는 오로지 자율만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져오리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시장 자유를 향한 애덤 스미스의 경계와 불신

 

20세기 후반 복지 정책을 추진한 나라들이 장기 불황에 빠져들며 경제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신자유주의는 이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신자유주의'란 단어에서 보듯 신자유주의는 자유방임적 양상으로 발전해왔던 19세기 자본주의 경향과 유사한 점이 많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근원도 1776년에 출간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애덤 스미스는 이 책에서 시장을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내버려두라고 주장하였다. 즉 개인은 오직 자신의 이득을 추구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사회적 이익)을 증진시키게 되는데, 애덤 스미스는 사회 전체에 부를 증가시키는 것이 바로 이 '자유'라고 보았다.

 

하지만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자유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2007년 1월 22일 EBS 지식채널e '국부론 1권 제11장' 참조)

 

그는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면서 "사회 전체의 안정을 위협하는 몇몇 개인의 자유 행사는 정부 법률로 제한되어야 한다" "구성원 다수가 가난하고 비참한 사회는 결코 번영하고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또한 당시의 신흥자본가 계급에 대해서도 "이 계급이 제안하는 상업적 법률, 규제 등에 대해서는 항상 큰 경계심을 가져야 하며, 오랫동안 신중하게 검토한 후 채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익은 공공의 이익과 결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으며, 심지어 사회를 기만하고 억압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고 그들의 '자유'를 경계했다.

 

심지어는 "도저히 인류의 지도자가 아니며,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그들의 대화는 소비대중을 배반하거나 가격인상을 담합하는 데서 끝난다"라며 극도의 불신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사회 전체의 안정을 위협하는 자유는 법률로 제한되어야 한다"

 

<국부론>에 등장하는 신흥자본가계급을 다시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오늘날의 상황에 대비하면 어떤 계급이 될 수 있을까? 바로 대기업이나 거대자본 등이 그에 해당되지 않을까?

 

외환은행과 관련한 론스타라는 거대자본의 투기적 행태를 보면 18세기 애덤 스미스의 경계가 정확히 그 곳에 위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유로운 시장이 될수록 공정한 경쟁과 공공의 이익이 더욱 강조되어야 함을 자유주의의 시조인 애덤 스미스가 이미 강조했던 셈이다.

 

그런데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어설픈 신자유주의들이 공공의 가치를 짓밟고 있는 듯 하다.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금산분리 완화 후 폐지, 기업 정기세무조사 대폭 감축, 상속세 단계적 인하, 이것들은 이명박 당선인의 뜻에 따라 대통령직 인수위가 추진하고 있는 사안들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4일 오후 서대문구 이화여대 LG컨벤션홀에서 열린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오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이명박

그런데 이러한 사안들은 공정한 경쟁을 통한 효율성을 추구한다기보다는 자본의 자유와 담합를 보장하는 것들처럼 보인다. 또한 그 동안 자본의 횡포와 불공정을 막고, 최소한의 공공성을 보장하는 장치들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적 이익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이 기업들로 하여금 자기이익 추구에만 골몰하게 만들고 탈선을 부추겨 사회적으로 큰 손실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최소한의 공공 가치마저 짓밟은 어설픈 신자유주의자들

 

현재 가장 직접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교육 자율화다. 이미 사교육은 코스닥시장에 상장돼 시가총액 상위자리를 차지한 업체가 등장할 정도로 거대 자본화되어 있다. 그런데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는 이명박 당선인 측은 자율형 사립고나 특목고 확대를 추진함으로써, 사교육 수요의 폭발적 확대를 예상하는 사교육업체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반면 학생과 학부모들에게는 극심한 혼란과 불안과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대학들도 학문의 전당이라기 보다는 거대기업화되고 있는 징조가 뚜렷하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학들은 이미 사회적 책무를 잊은 지 오래인 것 같다. 대학에서도 이미 자본의 가치가 지배하고 있다. 대학총장이 기업인 출신이고, 학교 안에 대형마트를 유치하고, 재벌의 자본에 굽신거리는 것은 이미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대신 자본이나 권위에 저항하는 학생들에게는 무자비하다.

 

대학들은 수시 모집에서 엄청난 전형료 수입을 벌이들이고, 등록금은 매년 올리고, 기업으로부터 기부를 받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다. 학생들은 손쉽게 줄 세워서 뽑고, 학생이 아닌 학교의 규모를 키우려 하고 있다. 이런 판국에 대학 입시 자율화는 이기적 대학들이 그나마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공공적 의무마저도 내팽개치게 만들 것이다.

 

이명박 당선인 측이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벌이고 있는 이런 공공적 가치를 훼손하는 '방종적 신자유주의'는 그야말로 자유주의의 원조인 애덤 스미스마저 울고 갈 지경이다. 이런 것들은 애덤 스미스의 말대로 "큰 경계심을 가져야 하며, 오랫동안 신중하게 검토한 후 채택되어야" 할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익은 공공의 이익과 결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으며, 심지어 사회를 기만하고 억압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국부론>이 출간된 당시, 신흥자본가계급은 어린이를 기계에 묶어서 노동을 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까지도 시장자유를 방해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제 오늘날 한국에서도 마음대로 비정규직을 쓸 수 있는 자유, 돈 받고 대학 입학시킬 수 있는 자유까지 주장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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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 게임이론과 합리성

 

 

진중권의 이매진] 게임이론과 합리성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 2007.06.29
 

<뷰티풀 마인드>의 존 내시의 예로 보는 실재와 망상의 경계

“형태(shape)를 하나 꼽아봐요.” “예?” “동물이든 뭐든, 아무거나.” “좋아요. 우산이오.” 잠시 눈으로 밤하늘의 별밭을 더듬더니, 내시는 알리샤의 등 뒤로 돌아가 그녀의 손을 잡아 밤하늘의 한쪽 구석으로 이끈다.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시선을 따라 옮기니, 별밭의 혼돈 속에 문득 우산 모양의 별자리가 나타난다. 경외에 가득 눈으로 파트너를 바라보는 알리샤. 부드러운 미소를 띠면서 말한다. “다시 해봐요.” “좋아요. 이번엔 뭐죠?” “문어.”

별자리 짜기

신이 인간을 서서 걷게 한 것이 별을 보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던가? 인간이 처음으로 밤하늘을 쳐다보았을 때, 그저 무수하게 널린 별들의 혼돈(chaos)만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속의 선으로 별들 사이를 이어가며 땅에 사는 것들의 이미지를 그려냈다. 하늘 전체가 남김없이 별자리들로 가득 찼을 때, 밤하늘은 드디어 질서 잡힌 조화(cosmos)로 변모했고, 혼돈 속을 항해하던 원시인들의 시선은 비로소 하늘의 바다에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과학적 이성은 원래 패턴을 발견하는 미학적 상상력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법칙의 발견’이란 곧 혼돈스런 자연현상에서 반복되는 질서를 찾아내는 게 아닌가. 과학에서 가설의 수립은 어떤가? 그 역시 관찰된 요소들 사이에 인과(因果)의 선을 이어 미지의 영역의 지도를 그려내는 상상력의 문제다. 위대한 과학적 발견은 종종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영감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과학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즉 정신도 위대하려면 동시에 아름다워야 한다.

“뭐해요?” 환상 속의 소녀가 내시에게 묻는다. 마침 그는 잡지를 펼쳐들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암호통신을 찾던 중. “반복되는 패턴(patterned recurrences)을 골라내고 있단다.” 코드 브레이커의 작업 역시 문자열의 혼돈에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내는 것. 그렇게 찾아낸 패턴은 객관적 실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한갓 주관적 구성에 불과할 수도 있다. 가령 내시가 밤하늘에서 찾아낸 우산이 설마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겠는가?

게임이론과 내시 균형

프린스턴대학원 시절의 논문으로 45년 뒤 그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는다. 영화는 그가 논문의 발상에 도달하는 계기를 이렇게 묘사한다. 바에 금발의 미녀가 들어온다. 누군가 애덤 스미스를 원용하며 그녀를 놓고 경쟁을 하자고 제안하자, 내시가 반박한다. 모두가 달려들면 서로 길을 막다가 아무도 그녀를 잡을 수 없고, 딱지맞고 뒤늦게 그녀의 친구들에게 가봤자 꿩 대신 닭이 되려는 여자는 없을 터. 그러니 차라리 미녀를 포기하고 그녀의 친구들에게 가는 게 전체를 위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말하기를, 최선의 결과는 집단 속의 개개인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행동하는 데에서 온다, 맞지?” “그게 완전한 답 아니야?” “아니지. 불완전해. 왜냐하면 최선의 결과는 집단 속의 개개인이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또한 집단을 위해 행동할 때에 나오기 때문이야.”

언뜻 들으면 이기심을 버리고 전체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내시가 반박하는 것은 ‘개인이 각자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가정이 아니다. 그 역시 각 행위 주체가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이익을 고려하여 행동할 거라는 애덤 스미스의 가정을 공유한다. 단지 그 이기적 선택들이 전체에게 늘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는 생각만 거부하고 있을 뿐이다. ‘수인의 딜레마’가 보여주듯이, ‘내시 균형’이 언제나 사회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상태는 아니다.

비협조적 게임

오늘날 ‘내시 균형’에 대해서는 여러 반론이 제기된다. 예를 들어 A와 B가 있다고 하자. 10달러의 돈이 있고, 그 돈을 분배할 권리를 A가 쥐고 있다. 두 사람이 합의에 실패하면 아무도 돈을 못 받는다. 그럼 A는 B에게 얼마를 줄까? A는 가능한 한 많이 가지려 할 테고, B로서는 1달러라도 받는 게 아예 안 받는 것보다는 이익이다. 따라서 게임은 B가 1달러를 주겠다는 A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균형에 도달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럴까?

실험경제학에 따르면, 이 게임에 참가한 이들은 대부분 상대에게 5달러를 제안했다고 한다. 또 2달러 이하를 주겠다는 제안에는 대다수 실험자들이 차라리 돈을 포기함으로써 상대 역시 돈을 못 받게 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수학적으로 증명이 끝난 문제인데, 왜 실제로는 반대의 결과가 나오는 걸까? 그것은 내시 균형의 바탕을 이루는 ‘이기적 인간’이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행동은 이기심만이 아니라 이타심에서 나오기도 한다는 얘기다.

이미 1950년대에 비슷한 실험이 있었다. 당시 내시는 냉전기에 미소의 전략을 연구하던 기관(RAND)에 있었다. 그의 이론의 적합성을 시험하기 위해 연구원 비서들을 상대로 실험을 했단다. 내시의 이론에 따르면 비서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서로 모함하는 것으로 균형에 도달해야 한다. 하지만 실험에 참가한 비서들은 거꾸로 공동의 이익을 위해 서로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황당한 것은 이 실험의 결과를 보고 그들이 내린 결론. ‘비서들이 직무에 적합하지 못하다.’

냉전, 그리고 망상적 분열증

그럼에도 내시의 이론이 받아들여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 중국의 공산화, 한국전쟁의 발발, 소련의 핵무기 개발. 두 체제간의 대립은 세계를 극도의 불안에 빠뜨렸고, “국무부에 200여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매카시의 선동은 미국사회 전체를 불신으로 몰아넣었다. 만인이 만인을 의심해야 하는 시대. 불신의 시대에는 역시 개개인이 생존을 위해 차라리 상대를 의심하는 길을 택하리라 가정하는 내시의 ‘비협조적’(non-cooperative) 게임이론이 적합하다.

생존의 공포에서 비롯한 이 집단 히스테리는 1959년 그의 의식으로 들어가 망상적 분열증(paranoid schizophrenic)의 원천이 된다. “우리 대학 MIT의 스탭들, 이후에는 보스턴의 모든 이들이 나에게 이상하게 행동했다. 도처에 비밀 공산당원들의 존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자서전은 “민망함을 피하기 위해” 망상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있으나, 영화에서는 극좌파 조직이 미국에 휴대용 핵무기를 반입하기 위해 잡지를 통해 암호문을 주고받는 것으로 설정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 망상이 패턴을 찾아내는 뛰어난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점. 그의 말대로 “수학과 광기 사이에 직접적 연관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위대한 수학자들이 광기의 특성, 망상증과 분열증으로 고통받는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수학엔 상상력이 필요하나 거기엔 부작용이 따른다. 그리하여 노벨상 후보의 상태를 살피러 온 이에게 내시는 말한다. “정신의 다이어트처럼 특정한 욕망을 자제하고 있지요. 가령 패턴에 대한 욕망, 상상하고 꿈꾸는 욕망 말이지요.”

정신의 다이어트

학자로 살기 위해 그는 패턴의 욕망을 자제해야 했다. 하지만 이 정신의 다이어트에도 부작용은 따르는 모양이다. 자서전에서 그는 이렇게 항변한다. 문제는 “사유의 합리성이 한 사람이 우주와 맺는 관계에 대한 생각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로아스터교를 안 믿는 이들은 차라투스트라가 그저 순진한 사람들을 꼬드겨 불을 숭배하게 만든 미친 놈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광기’가 없었다면, 그는 아마 그냥 살다가 잊혀진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로 그쳤을 것이다.”

상상력이 풍부하던 시대에는 유사성이 곧 동일성의 증거가 됐다. 그런 시대의 마지막 인물은 아마도 돈키호테일 것이다. 그의 눈에 풍차는 거인으로, 양떼는 군대로, 여관집 딸은 귀부인으로 보였다. 상상력은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까지 마치 실재하는 양 표상으로 삼곤 한다. 이 때문에 합리주의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이성적 존재가 되려면 되도록 상상력을 멀리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그의 믿음과 달리, 합리주의의 결정체인 수학에서조차 상상력은 결정적 역할을 한다.

실재와 망상의 경계는 생각보다 뚜렷하지 않다. 가령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은 실재인가, 가상인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사실인가, 허구인가? 심지어 우리가 실재라 굳게 믿는 물리학이론조차 실은 모형에 불과하다. 그리고 모형을 구성하는 것 역시 상상력의 소관이 아닌가. 이른바 ‘실재’란 혹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기로 합의한 허구에 불과한 게 아닐까? 그리하여 내시처럼 묻고 싶어진다. “무엇이 이성인지 누가 규정하지?”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뷰티풀 마인드
 
[진중권의 이매진] 게임이론과 합리성 No. 608 2007-06-29
[정훈이 만화] <뷰티플 마인드> 수학의 진정한 의미? No. 364 2002-08-06
<뷰티풀 마인드>에 얽힌 `진실` 논란 No. 345 2002-03-25
아저씨, <뷰티풀 마인드> 보고 천재 수학자들을 떠올리다 No. 343 2002-03-14
러셀 크로 미 영화배우조합 남우주연상   2002-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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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노마드? 현실엔 ‘나쁜’ 노마드도 있다

착한’ 노마드? 현실엔 ‘나쁜’ 노마드도 있다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왼쪽부터 보아, 삼성 본관, 배용준. 김진석 교수는 여러 노마드들이 현실 세계에서 뒤섞일 수밖에 없다면서, 문화산업과 결합한 ‘한류’나 한국인이 자랑스럽게 동일시하는 ‘삼성’도 유목적 세계화의 흐름 속에 있다고 지적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① 한쪽만 보는 개념은 불완전

 

지난 두 주 홍윤기 동국대 교수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노마디즘(유목주의)에 대해 엇갈린 견해를 드러냈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는 노마디즘(유목주의) 기획을 ‘개념’과 ‘실행’이 태부족한 실험기획이라고 비판했다. 노마드들이 규정력을 발휘하는 ‘개념’으로 총집되지 못하고 다감각의 ‘이미지’로 교착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노마드라는 용어 안에 심지어 ‘시장 노마드’나 ‘디지털 노마드’와 같은 수많은 노마드들이 다양한 의미를 갖고 경쟁·대립·공존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반면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시장 노마드’ 등 여러 유사 노마드들은 자본이 게바라로 돈을 버는 것처럼 ‘노마드의 상품화 전략’의 결과물일 뿐이라고 했다. 유목민은 주류적 척도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방식, 사유방식을 창안하는 자들이기에, 마음이 언제나 돈이나 자기 가족에 매여 있는 경우 유목민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또 노마디즘은 “좀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며 “그런 꿈을 통해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의 표현”이란 점에서 혁명의 정치학과 상통한다고 강조했다.

김진석 교수는 이 글에서 이 교수의 논리를 ‘착한 노마드 이야기’일 뿐이라고 공박했다. 여러 노마드들이 현실 세계에서 뒤섞일 수밖에 없음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도 실천의 복잡하고 구체적인 맥락과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도 했다. 그는 또 유목민도 ‘전쟁기계’의 복합체로 존재할 경우 폭력적 흐름을 탈 수밖에 없다면서 노마드는 그 자체로 착하며 언제나 권력과 폭력에서 자유롭다는 믿음도 공상이라고 밝혔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한국 사회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화 움직임에 덜컥 사로잡혔다. 한국을 유사 이래 최고 속도, 최대 규모로 세계로 나아가게 한 계기는 ‘디지털 노마디즘’. 그러나 세계로 나아갈수록 동시에 어떤 때보다도 유목주의적 기업과 제국들의 침입에 내맡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당연했다. 이 와중에서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점점 새로운 폭력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결국 한 생태주의자는 “유목주의가 국가주의보다 더 파국적인 시장제국주의를 부추기고 조장하는 또 하나의 침략과 파괴주의”라고 고발하고 나섰다. 고발의 목소리는 비록 거칠고 일방적이었지만,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쓴소리였다.




그런데 노마디즘을 이론적으로 칭송하는 사람들은 그 비판을 쉽게 무시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책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면서, 이들이 ‘유목민’(nomad)·이주민·정착민을 개념적으로 엄격하게 구분했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이론적 권위를 앞세운 이런 주장이야말로 왜곡에 가까운 오독을 낳는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엄격한 개념적 구별의 필요성을 강조한 건 맞다. 그러나 그들은 냉정했다. “그들의 개념적 구별이 실제로 그들이 뒤섞이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거꾸로 오히려 그들의 혼합을 필연적으로 만든다”(들뢰즈와 가타리 공저 〈천의 고원〉)고 인정했다.

이들 인용을 빌리지 않더라도, 노마디즘과 관계된 어떤 더러운 현실적 문제들로부터도 자유롭다는 이론은 자승자박에 이를 뿐이다. 현실의 더러움으로부터 뚝 떨어진 개념은 현실을 설명할 힘도 가지지 못할 터이니! 그런데 이진경씨는 개념적 구분에만 매달리면서 ‘노마디즘’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숙성한 사상이고 나쁜 자본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따라서 노마디즘이 침략적 성격을 띠는 것도 자신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마음 편하게 말한다.

 

개념의 구분·순수성 내세우며
현실적 문제에서 자유롭다는 주장
되레 유목주의에 대한 오독 부르고
실천적으로도 공허하게 만들어

 

 

그는 노마드뿐 아니라 ‘매끈한 공간’과 ‘외부성’이 그 자체로 순수하고 초월적인 혁명적 개념인 것처럼 말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기서도 그것들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일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매끈한 공간과 외부성의 형식은 결코 그 자체로 불가항력적인 혁명적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며, 거꾸로 어떠한 상호 작용의 장에 흡수되고 어떠한 구체적인 조건하에서 실행되고 성립되는가에 따라 극히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천의 고원〉) 세상에 대해 말할 때는 순수한 개념이나 의미만이 아니라, 실천의 복잡하고 구체적인 맥락과 조건을 아는 게 중요하다. 이들은 노마드에 창조성을 부여했지만, 그것이 언제나 착한 정의를 목적으로 삼는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노마드를 말할 때에도 오히려 ‘전쟁기계’의 배치를 끝없이 강조했다.(“이 기계의 본질에 비추어보자면 비밀을 쥐고 있는 것은 유목민들이 아니다”)

‘노마디즘’은 현실 속의 나쁜 노마디즘과는 아무 관계도 책임도 없으며, 나쁜 자본주의 국가의 착한 외부에만 존재한다는 말은 ‘착한 노마드 이야기’일 뿐이다. 그건 들뢰즈와 가타리의 텍스트를 지적으로 배반할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공허하기 십상이다.

‘전쟁기계’는 비록 전쟁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는 않지만, 언제든지 싸움을 무릅쓰는 어떤 것이며, 때로는 다시 국가제도에 포획되기도 하지만 다시 도망가며 싸우는 어떤 것이다. 그만큼 ‘노마디즘’처럼 지적·문화적으로 유행하기에는 복잡하고 까칠까칠한 주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진경씨는 ‘전쟁기계’가 부차적이고 적절하지도 않은 표현인 것처럼 말하는데, 그들 책을 경전처럼 주석하면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는 단순화시키다니! ‘노마디즘’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기계’의 무서운 까칠까칠함이 은폐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노마드가 항상 국가 바깥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국가에 대한 투쟁을 말하지만, 그에게는 두 갈래 길밖에 없다. 곧 국가와 싸우는 일과 국가 바깥의 평화로운 공간으로 가는 길. 그러나 유목적 전쟁기계는 국가에 대해서만 싸우는, 국가 바깥의 ‘착한 노마드’는 아니다. 그것은 국가 안에서 국가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고 떠도는 가지가지 패거리들이기도 하며, 국가 바깥에서 국가를 비웃는 다국적이고 세계적인 조직과 폭력이기도 하다. “국가 자체도 항상 바깥과 관계를 맺어 왔으며 따라서 이 관계를 빼고서는 국가를 생각할 수 없다. 국가를 규정하는 것은 ‘전부’ 아니면 ‘무’의 법칙, 곧 국가적인 사회냐 아니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냐가 아니라, 내부와 외부의 법칙이다.”(〈천의 고원〉)

 

노마드는 ‘착하다’는 믿음은 공상
한쪽 면만 극단적으로 과장 말고
전쟁기계의 폭력성 함께 인정할 때
문명 분석의 좋은 도구될 수도

 

국가를 위해 싸운 안중근은 바보일까? 또 기독교와 이슬람(그리고 유교)도 국가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유목적 전쟁기계로 작동할 수 있다. 노마드는 그 자체로 착하며 언제나 권력과 폭력에서 자유롭다는 믿음은 공상적이다. 그것은 전쟁기계와 떨어질 수 없고, “전쟁기계와 국가는 서로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 작용의 장 속에서 공존하고 경합한다.”(〈천의 고원〉)

더욱이 이진경씨는 ‘노마디즘’을 거의 부드러운 문화상품으로 만든 후에 결론으로 ‘코뮨주의’를 주장하는데, 이것도 ‘전쟁기계’를 간과하거나 은폐한다는 의심을 받을 만하다. 폭력의 수많은 흐름에서 전적으로 벗어난 우정과 사랑의 공동체를 목적으로 삼는 일은 노마드를 줄 세우는 일이 아닐까. 우애에 근거한 공동체는 훌륭한 가치지만, 그걸 노마드의 선험적 목적으로 상정할 필요는 없다. ‘전쟁기계’에게 전쟁이 목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라고 공격한 생태주의자가 내세운 것도 모든 국가로부터(심지어 복지국가도) 완전히 벗어난 공동체주의이다.

그런데 거꾸로 노마디즘은 어떤 오류도 없다고 말하는 이진경씨도 비슷한 코뮨주의에 빠진다. 단순한 우연? 아니다. 이들은 노마드의 한쪽 면만 극단적으로 과장했기 때문이다. 소수자인 이주 노동자들은 우정으로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그들도 더 좋은 일을 찾아 고향을 떠난 유목민이다. 더 나아가 이곳에서 정착을 원하는 사람도 많으니, 유목민/이주민/정착민의 배치는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전쟁기계’의 복합체로 존재하는 한, 유목민들은 ‘따로 또 같이’ 폭력적 흐름을 타고 있으며, 그 폭력적 끈의 긴장 속에서 문명적으로 생존한다.

문화산업과 결합한 ‘한류’도 거센 유목적 세계화의 흐름 속에 있고, 한국인이 자랑스럽게 동일시하는 ‘삼성’도 그렇다. 들뢰즈와 가타리도 “새로운 노마디즘은 세계적 규모의 전쟁기계를 수반하는데, 그 조직은 국가장치를 넘어서며, 다국적이고 에너지와 관계된 군산복합체 속으로 흘러간다”고 했다. 한국인은 ‘한류’와 ‘삼성’이 실현하는 유목적 공격성을 전적으로 거부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쉽게 동의하기도 힘든 소용돌이 속에서, 돌고 돈다. 때로는 자랑스럽지만 때로는 더럽다.


 
» 김진석 인하대 교수
 
노마드의 폭력성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그 폭력성이 인정된 노마드 이야기는 문명 분석의 좋은 도구일 수 있다. 강자가 먹이를 다 삼키는 폭력적 시스템만 쫓는 노마디즘은 위악적이지만, 모든 폭력에서 벗어난 공동체를 꿈꾸기만 하는 노마디즘도 위선적이지 않을까. 이 사이에서, 기우뚱, 균형을 잡자.

김진석/인하대 교수

 


김진석 교수는 1958년생으로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철학박사를 받았습니다. 미학과,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폭력의 다양한 얼굴과 맥락 등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저서로 <초월에서 포월로 1, 2, 3>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 <소외에서 소내로> <포월과 소내의 미학>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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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치폴의 역사사회학의 전망과 역사


 

 

 

글은 테다 스카치폴(Theda Skocpol)의 「역사 사회학의 쟁점과 전략」이란 글의 분석을 일차적 목적으로 한다. 이차적 목적은 스카치폴이 제시한

 역사사회학의 연구 전략을 너머서기 위한 논의들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1. 「역사 사회학의 쟁점과 전략」의 구성(이하 ‘쟁점과 전략’)

 

 


‘쟁점과 전략’은 크게 3개의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미국 사회학계 내에서의 역사 사회학적 경향의 강화 (2) 역사 사회학의 쟁점 (3) 역사 사회학의 3가지 연구 전략이 그것이다. 이 글은 스카치폴이 고백하듯이 미국 사회학의 변화 추이를 중심으로 고찰한 ‘자의적’ 성격의 글이지만, “최근 수십 년 동안에 미국이 가장 거대하고 영향력 있는 학문의 중심지로 군림해왔다”(스카치폴 : 1991, p434)는 사실과 “역사적 지향은 다른 나라의 사회학적 전통에서는 오랫동안 확고한 위치를 차지해왔다”는 사실로 인해 정당화된다.

 

쟁점과 전략’이 작성된 해는 1984년이다. 스카치폴은 “[역사 사회학]이란 말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사회학자들의 대화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것”(스카치폴 : 1991, p434)이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역사 사회학은 “경험적 연구를 중시하는 사회학의 주류로부터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활동하던, 유별나게 범세계주의적인 나이든 사람들이나 그렇게 중요한 역사적 저작을 집필할 수 있다”고 인식되었고, 동시에 “대부분의 평범한 사회학자들은 현대 사회의 특정 국면을 연구하기 위해 양적방법이나 현지조사 방법을 사용”(스카치폴 : 1991, p434)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으로 오면서 “역사 사회학은 특출한 대가들의 독점 영역이 아니”(스카치폴 : 1991, p435)게 되었다. “학생들과 젊은 신진 사회학자들이 역사적인 연구 분야를 통해 크든 적든 간에 사회학에 이바지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스카치폴 : 1991, p435)는 지적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 사회학 내에서 역사적 지향은 뚜렷하게 강화되었는데, 스카치폴은 그 부분적 원인을 틸리와 월러스타인과 같은 뛰어난 연구소 설립자들의 노력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한다.1)

 

스카치폴에 의하면 “역사 사회학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토크빌, 맑스, 뒤르켐, 베버가 유럽의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사회적 기원 및 영향에 대해 중요한 의문을 제기하고 다양한 해답을 제시하던 당시에 처음으로 확립”(스카치폴 : 1991, p434)되었다. 하지만 근대 사회학의 ‘천재’들에 의해 확립된 역사 사회학의 쟁점은 현대에 들어와 더욱 발전된 전략과 연구들에 의하여 새롭게 재서술되고 있다.


(1) 유럽 산업혁명의 기원과 결과

(2) 노동자 계급의 성장

(3) 국가의 관료제화 및 정치의 민주화


에 관한 고전적 문제의식들이 여전히 탐구되고 있으며(스카치폴 : 1991, p435), 역사 사회학에서 현재 두드러진 연구쟁점들도 “사회학 창시자들의 관심이 다른 시대와 장소, 그리고 새로운 주제를 포함하도록 확대된 것”(스카치폴 : 1991, p436)에 불과하다. 물론 스카치폴은 20세기의 주요한 (1) 산업관계 (2) 복지 국가 (3) 인종별 유형 등도 역사 사회학의 주된 연구쟁점으로 부각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스카치폴은 “모든 사회과학,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사려 깊은 사회연구는 역사적 시야를 지니는 개념과 역사적 자료를 충분히 사용해야 한다”는 C.W. 밀즈(mills)의 사회학에서의 ‘역사적 상상력’이 1980년대 중반 이후 미국 사회학 내에서 밀즈가 살았던 시대보다는 더욱더 희망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대규모 구조와 장기적 변동 과정의 본질 및 결과를 추구하는 연구 전통으로 이해되는 역사 사회학은 실제로 사회학이라는 학문 안에서 항상 하나의 중요한 구심점을 갖는 일련의 초학문적(trans-disciplinary) 시도”(스카치폴 : 1991, p439)로 자리 잡았다.


4. 역사 사회학의 연구 전략


스카치폴은 역사 사회학이 일반적으로 유용한 연구 전략을 갖고 있다는 인식에 대항하여 모든 역사적 지향의 사회학 저자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그 저자들이 선택한 연구 전략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연구 전략들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스카치폴 : 1991, p443). 물론 스카치폴은 “역사 사회학의 적절한 방법을 위한 기계적인 비결은 없다”(스카치폴 : 1991, p443)고 강조한다.


스카치폴은 래긴과 자넷이 함께 쓴 『비교 연구의 이론과 방법 : 두 가지 전략』이라는 글에 대항하여 틸리와 월러스타인을 대비시키고, 이후 틸리와 월러스타인을 포함하는 탁월한 역사적 지향의 사회학 저서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연구 전략의 3가지 지도를 보여준다.


래긴(C. Ragin)과 자넷(D. Zaret)은 분석 단위, 인과성의 개념, 적당한 설명 개념, 분석 논리와 관련하여 뒤르켐과 베버의 비교전략을 대비시킨다. 그들에게 있어 기본적으로 역사학적 방법은 베버주의적 연구 전통과 동일시된다(스카치폴 : 1991, p515). 래긴과 자넷은 “전통적인 사회학적 연구의 대부분을 본래 반(反) 역사적인 뒤르켐적 접근 방식으로 간주”한다. 뒤르켐적 접근 방식이란 주로 양적 분석을 통해 일반적인 설명 변수를 찾아내는 연구를 가리킨다. 이러한 뒤르켐적 접근 방법에 반대하는 베버주의적 접근방식이란 “역사적 사건의 특수한 양상을 이념형 개념의 도움으로 밝히려는 것”을 의미한다.


스카치폴은 ‘비교’를 사용하는 목적의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래긴과 자넷이 부당하게 “벤딕스와 앤더슨으로부터 무어와 자기 자신에 이르는 모든 역사 사회학자들을 하나의 베버주의적 진영으로 간주”(스카치폴 : 1991, p441)한다고 비판한다. 스카치폴에 의하면 역사 사회학에서 ‘비교’를 사용하는 사회학자들의 목적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이다.


(1) 대비-지향적 비교(contrast-oriented)

(2) 거시-분석적 비교(macro-analytic)


대비-지향적 비교는 “특수한 서술을 첨예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며, 거시-분석적 비교는 “인과적 일반화를 검증하거나 수립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며, 이 두 비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 스카치폴의 지적이다(스카치폴 : 1991, pp441~442). 스카치폴은 이러한 래긴과 자넷의 이분법적 유형화로는 현대 미국 사회학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연구 전략들을 올바로 포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틸리와 월러스타인은 래긴과 자넷의 연구 전략과는 상이한 연구 전략을 통해 자신의 탁월한 연구업적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 반증으로 제시된다(스카치폴 : 1991, p442).


스카치폴은 래긴과 자넷의 뒤르켐-베버주의적 대립구도로 역사 사회학의 연구 전략을 설명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역사 사회학에 적용되는 (1) 일반 모델(model) (2) 개념 (3) 인과적 규칙성의 발견이란 세 연구 전략에 따라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폭넓게 유형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화를 통해 자신이 ‘분석적 역사 사회학’이라고 명명한, ‘인과적 규칙성의 발견’이 역사 사회학의 바람직한 연구 전략임을 주장한다.


5. 연구 전략1 : 역사에 대한 일반 모델의 적용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역사 사회학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나 그 이상의 역사적 국면에 대한 일반 모델의 적용”(스카치폴 : 1991, p444)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사회학과 역사학의 첨예한 구별 위에서 구성된 역사 사회학의 유형이었다. 사회학은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일반 사회이론을 공식화할 수 있는 학문”으로 인식되고, 역사학은 “과거의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관한 ‘사실들’을 수집하는 학문”이라는 대립적 정의에 기반을 둔 것이다.


1960년대 중반에 출판된 에릭슨의 『변덕스런 청교도 : 일탈 사회학의 한 연구』는 역사에 대한 일반 모델의 적용이라는 1950년대 이후 역사 사회학의 전형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는 이 저서에서 “특정한 공동체가 일탈행동을 어떻게 정의하고 규제하는가에 관한 뒤르켐적 모델을 정교화 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는 거기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수집된 자료는 뉴잉글랜드 지역의 청교도 집단을 새롭게 조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일탈행동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미국 청교도들의 경험은 세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 생활의 한 보기로서 취급되었다. 이러한 접근이 바람직한 것인지의 여부는 [···] 궁극적으로 이 연구의 특정한 주제가 아니라 다른 시대의 사람들의 행동을 해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설명 범위에 달려 있을 것이다.”

(스카치폴 : 1991, p446, 재인용)


에릭슨의 설명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역사에 대한 일반 모델을 구성하는 학자들의 주요 관심은 “일반 이론 모델의 내적 논리를 설명하고 정교하게 다듬는”(스카치폴 : 1991, p446)것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비판에 직면한다. (1) 먼저, 일반 이론 모델을 구성하고자 하는 학자는 일반 이론 모델을 연역적으로 구성하여, 그것을 이미 주어진 모델로 독자들을 혼동시킨다. (2) 다음으로, 연역적으로 주어진 일반 이론 모델의 적합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자의적으로 경험적 사례들을 재구성한다. 즉 중요한 역사적 반증을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 연구전략을 채택한 학자진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대안전략을 구현하였다.


[대안1] 렌스키는 “알려진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세계에 일반 모델을 적용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중요한 역사적 반증을 의도적 회피하는 두 번째 비판을 넘어설 수 있지만, 연구자가 특정한 사건에 대한 본질적인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가 발생한다.

[대안2] 윌러(David Willer)는 비판(1)을 넘어서기 위하여 주어진 하나의 일반 모델로 역사적 사건을 포착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반대로 “선택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그 사건에 대한 역사적 논의들을 증명”(스카치폴 :1991, p449)한다. 하지만 이 전략 역시 ‘자의성’의 문제제기를 넘어서지 못한다.


하지만 역사에 적용되는 일반적 이론 모델을 구축하려는 학자들이 렌스키와 윌러의 접근만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스카치폴은 틸리와 월러스타인의 예를 통해 일반 모델의 적용과 결합되는 다른 유형의 연구 전략들을 소개하고 있다. (1) 하나는 유의미한 역사적 해석을 발전시키기 위해 개념을 사용하는 ‘해석적 역사 사회학’이며 다른 하나는 (2) 다른 하나는 역사의 인과적 규칙에 관한 대안적 가설을 탐구하는 ‘분석적 역사 사회학’이다.


6. 연구 전략2 : 역사를 해석하기 위한 개념의 사용


스카치폴이 ‘해석적 역사 사회학’이라고 이름붙인 이 두 번째 연구 전략은 “광범위한 역사적 유형에 대한 유의미한 해석을 발전시키기 위해 개념을 사용한 것”(스카치폴 : 1991, p451)을 의미한다. 이 연구전략은 “이론적 모델을 역사에 적용하거나 대규모 구조와 변동의 유형에 관한 인과적 일반화를 수립하기 위해 가설 검증의 접근 방식”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따라서 이 연구전략이 경제 결정론적 맑스주의와 구조기능주의의 결정론적 경향 및 지나친 일반화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 내지 ‘비판적 대응’의 전략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이러한 이론에 대한 회의가 ‘일반성’ 그 자체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이 연구전략은 “자신들의 연구관심을 한정하고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사례 연구로부터 역사적 유형을 뽑아내고 제시하기 위해 항상 명백한 일반성의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다”(스카치폴 : 1991, p452). 하지만 이 연구전략이 역사적 인과성에 관한 규칙들을 발견하려는 ‘분석적 역사사회학’과 구별되는 지점은 바로 ‘비교’를 사용하는 목적이다. 그들은 스카치폴이 말하는 ‘대비-지향적’ 비교전략을 사용한다. 이 연구전략은 “개별 사례의 독특한 특성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비교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벤딕스의 비교연구에 대한 설명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다른 연구와 비교함으로써 하나의 구조가 지닌 시계를 확대시킨다. 따라서 유럽의 봉건제는 일본의 봉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보다 정확하게 정의될 수 있으며, 서구 문명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성직에의 경향성이 발전하지 않은 문명과의 비교를 통해 보다 분명해질 수 있다.”

(스카치폴 : 1991, p453)


해석학적 연구 전략의 강점은 연구 주제가 과거-현재의 두 맥락(context)을 연결할 수 있다는 것에 존재한다. 해석학적 연구 전략은 (1) 과거 행위자들의 지향성과 행동을 취하는 제도적, 문화적 상황과 맥락을 선택하며 (2) 동시에 그것이 현재적 맥락에서 정치적,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일 때, 탁월한 연구로 이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들은 비교의 방법을 통해 사례의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어냄으로써 제한된 사례의 해석을 일반적인 개념을 통해 이루어낸다. 바로 이 지점이 두 번째 연구전략의 장점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한계가 공존한다. 사례 혹은 역사적 사건의 해석에 치중하는 ‘개념’의 적용은 그 개념에 해당 사례의 역사적 특수성이 결합되어 존재한다. 따라서 ‘해석학적’ 연구전략의 성과를 다른 나라에 확대하려고 시도하는 경우 그것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며, 개념에 연결되어 있는 잠재적 인과성을 확증하는 것에 약점을 갖는다. 그것은 그 사례의 ‘특수성’을 해석하는 것에 장점이 있는 반면, “왜”라는 질문에 대한 지속적이고 일반적인 관심에 있어 부족하다. 순수한 일반 이론 모델이 역사적 특수성과 다양성을 간과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출현한 이 연구전략은 해당 사례의 역사적 특수성을 잠재적 일반성을 지닌 ‘개념’으로 해석해내지만, ‘이론’으로 발전하는 것에 어려움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연구 전략 또한 다른 연구 전략들과 통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7. 연구 전략3 : 역사에서의 인과론적 규칙성의 분석


마지막으로 스카치폴이 주장하는 ‘분석적 역사사회학’의 연구전략은 앞의 두 전략과는 차별화된다. 분석적 연구전략의 목표는 “명백히 정의된 역사적 결과나 유형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구축하는 것이며, 이 전략은 “역사에서도 인과론적 규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스카치폴  : 1991, p459). 분석적 역사 사회학의 연구 전략의 핵심은 “연구자들이 특정한 기존 이론, 또는 이론들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역사적 유형을 설명하는 데 적합한 구체적인 인과론적 구성논리의 발견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스카치폴 : 1991, p460)에 존재한다. 즉 이 연구전략은 연구주제로 설정된 ‘실재’(the real)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며, 이 실재를 해명하기 위하여 서로 경합하는 이론들을 결합하기도 하며, 새로운 이론을 잠정적으로 구성하기도 한다. 인과론적 규칙성에 대한 발견은 일반적 이론 모델의 연구전략과 같이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재를 해명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 전략이 “독자적인 중요성을 개개의 맥락 탓으로 돌리는 해석적 경향”을 피한다고 하여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일반법칙으로 진술되지 않는 이론적 가설은 결코 탐구할 가치가 없다”는 비어(Samuel Beer)의 ‘보편성의 정론’(dogma of university)을 채택하는 것은 아니다. 이 연구전략은 “특정한 역사적 맥락, 또는 맥락들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설명적 일반화의 작업”에 만족한다(스카치폴 : 1991, p461). 즉 이 연구 전략은 자기제한적 ‘일반화’를 지향한다.


이 연구전략이 자기제한적 일반화를 지향한다는 사실은 스카치폴의 단 하나의 사례만으로도 가능하다는 주장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한 것’이지 ‘충분한 것’은 되지 못한다. 논의의 타당성을 증명하고 연구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서 스카치폴은 ‘비교’의 방법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단일사례 연구는 분석적 전략보다는 역사 사회학의 처음 두 분야에 더 전형적인 보기이다.”(스카치폴 :1991, p462)


분석 전략의 비교는 대조-지향적 비교와는 구별된다. 분석 전략의 비교는 인과적 규칙성의 발견을 목표로 한다. 인과적 규칙성의 발견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이 비교 전략은 “타당하지 않은 원인들로부터 타당한 원인을 구별하기 위한 변차 통제의 확립을 목표로 하는 사회과학의 다른 방법론적 접근”(스카치폴 : 1991, p464)과 유사하다. 이러한 비교전략으로 스카치폴은 J. S. 밀이 제시한 일치법과 차이법을 유용한 전략으로 제시한다. 스카치폴은 밀의 일치법과 차이법을 통해 인과적 규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8. 소결 : 연구 전략의 통합전략


2004년에 처음 이 논문을 접했을 때는 스카치폴이 분류한 3가지 유형의 연구 전략이 서로 대립되는 연구전략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은 3가지 연구 전략이 보다 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스카치폴은 역사의 인과론적 규칙성을 발견하려는 분석 전략이 이론적 모델이나 해석적 전략을 대체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가 생각하는 분석적 연구 전략은 ‘특수성’-‘보편성’의 양 극단에 위치하는 해석적 연구 전략과 일반적 모델의 연구 전략을 분석적 연구 전략이 매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분석적 역사 사회학의 실행은 역사 사회학이나 역사적 사례에 대한 일반 모델의 적용에 비해 역사적 증거와의 보다 친밀한 대화를 촉구한다”(스카치폴 : 1991, p473).


특수성 <----------------------------------------------------> 보편성

해석적 연구 전략 ------------ 분석적 연구 전략 ------------- 일반 모델 전략


9. Rethinking Theda Skocpol's Strategy


스카치폴의 연구 전략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우리 세미나의 주된 목표인 ‘민주주의’ 연구의 주된 접근 전략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역사 사회학의 주된 전통으로 제시되는 스카치폴의 ‘자기제한적 일반화’=‘인과론적 규칙성의 발견’이라는 연구 전략에 대항하여 공개적인 ‘이의’를 제기해볼 필요성이 존재한다.


1) 비교의 독자적 단위는 실재하는가?


스카치폴이 스스로 고백하듯이, 분석적 연구 전략은 “인과론적 규칙에 대한 비교 평가용의 독자적 단위가 발견될 수 있다는 가정”(스카치폴 : 1991, p471)에 근거한다. 월러스타인의 접근인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단 하나의 체제로서 자본주의 근대체제를 설정한다면, 우리는 비교의 독자적인 단위를 설정할 수 없다. 비교가 아닌 다른 전략적 접근이 요구된다.


2) 밀의 ‘인과관계’에 대한 규정은 실재하는 인과성을 반영하는가?


비교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비교의 방법으로 제시된 밀의 논리관계 증명법은 ‘분석’을 위한 올바른 인과관계를 보장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밀의 인과관계에 대한 개념은 흄적 인과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흄적 인과개념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인과관계를 구성하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사건들의 규칙적 결합 속에서 인과관계를 파악하려는 흄-밀적 인과개념은 기본적으로 사회와 자연관계 모두에서 그러한 규칙적 결합이 아주 드물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못한다.

 


3. 역사 사회학의 쟁점

 


2. 미국 사회학에서의 역사적 지향의 강화

 

 

 
본문스크랩 [발제문] 스카치폴의 [역사 사회학의 전망과 전략] 낙서장

2008/01/07 20:01

 

http://blog.naver.com/sickduck/20045738846

첨부파일Rethinking_Theda_Skocpol-ganndalf.hwp
출처 블로그 > Bleistifte des Ganndalf
원본 http://blog.naver.com/ganndalf/150002467680

 

Rethinking Theda Skocpol's

Vision and Method in Historical Sociology


 

장 훈 교

* 2006년 3월 9일 역사사회학


이 글은 테다 스카치폴(Theda Skocpol)의 「역사 사회학의 쟁점과 전략」이란 글의 분석을 일차적 목적으로 한다. 이차적 목적은 스카치폴이 제시한 역사사회학의 연구 전략을 너머서기 위한 논의들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1. 「역사 사회학의 쟁점과 전략」의 구성(이하 ‘쟁점과 전략’)


‘쟁점과 전략’은 크게 3개의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미국 사회학계 내에서의 역사 사회학적 경향의 강화 (2) 역사 사회학의 쟁점 (3) 역사 사회학의 3가지 연구 전략이 그것이다. 이 글은 스카치폴이 고백하듯이 미국 사회학의 변화 추이를 중심으로 고찰한 ‘자의적’ 성격의 글이지만, “최근 수십 년 동안에 미국이 가장 거대하고 영향력 있는 학문의 중심지로 군림해왔다”(스카치폴 : 1991, p434)는 사실과 “역사적 지향은 다른 나라의 사회학적 전통에서는 오랫동안 확고한 위치를 차지해왔다”는 사실로 인해 정당화된다.


2. 미국 사회학에서의 역사적 지향의 강화


‘쟁점과 전략’이 작성된 해는 1984년이다. 스카치폴은 “[역사 사회학]이란 말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사회학자들의 대화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것”(스카치폴 : 1991, p434)이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역사 사회학은 “경험적 연구를 중시하는 사회학의 주류로부터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활동하던, 유별나게 범세계주의적인 나이든 사람들이나 그렇게 중요한 역사적 저작을 집필할 수 있다”고 인식되었고, 동시에 “대부분의 평범한 사회학자들은 현대 사회의 특정 국면을 연구하기 위해 양적방법이나 현지조사 방법을 사용”(스카치폴 : 1991, p434)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으로 오면서 “역사 사회학은 특출한 대가들의 독점 영역이 아니”(스카치폴 : 1991, p435)게 되었다. “학생들과 젊은 신진 사회학자들이 역사적인 연구 분야를 통해 크든 적든 간에 사회학에 이바지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스카치폴 : 1991, p435)는 지적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 사회학 내에서 역사적 지향은 뚜렷하게 강화되었는데, 스카치폴은 그 부분적 원인을 틸리와 월러스타인과 같은 뛰어난 연구소 설립자들의 노력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한다.1)


3. 역사 사회학의 쟁점


스카치폴에 의하면 “역사 사회학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토크빌, 맑스, 뒤르켐, 베버가 유럽의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사회적 기원 및 영향에 대해 중요한 의문을 제기하고 다양한 해답을 제시하던 당시에 처음으로 확립”(스카치폴 : 1991, p434)되었다. 하지만 근대 사회학의 ‘천재’들에 의해 확립된 역사 사회학의 쟁점은 현대에 들어와 더욱 발전된 전략과 연구들에 의하여 새롭게 재서술되고 있다.


(1) 유럽 산업혁명의 기원과 결과

(2) 노동자 계급의 성장

(3) 국가의 관료제화 및 정치의 민주화


에 관한 고전적 문제의식들이 여전히 탐구되고 있으며(스카치폴 : 1991, p435), 역사 사회학에서 현재 두드러진 연구쟁점들도 “사회학 창시자들의 관심이 다른 시대와 장소, 그리고 새로운 주제를 포함하도록 확대된 것”(스카치폴 : 1991, p436)에 불과하다. 물론 스카치폴은 20세기의 주요한 (1) 산업관계 (2) 복지 국가 (3) 인종별 유형 등도 역사 사회학의 주된 연구쟁점으로 부각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스카치폴은 “모든 사회과학,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사려 깊은 사회연구는 역사적 시야를 지니는 개념과 역사적 자료를 충분히 사용해야 한다”는 C.W. 밀즈(mills)의 사회학에서의 ‘역사적 상상력’이 1980년대 중반 이후 미국 사회학 내에서 밀즈가 살았던 시대보다는 더욱더 희망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대규모 구조와 장기적 변동 과정의 본질 및 결과를 추구하는 연구 전통으로 이해되는 역사 사회학은 실제로 사회학이라는 학문 안에서 항상 하나의 중요한 구심점을 갖는 일련의 초학문적(trans-disciplinary) 시도”(스카치폴 : 1991, p439)로 자리 잡았다.


4. 역사 사회학의 연구 전략


스카치폴은 역사 사회학이 일반적으로 유용한 연구 전략을 갖고 있다는 인식에 대항하여 모든 역사적 지향의 사회학 저자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그 저자들이 선택한 연구 전략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연구 전략들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스카치폴 : 1991, p443). 물론 스카치폴은 “역사 사회학의 적절한 방법을 위한 기계적인 비결은 없다”(스카치폴 : 1991, p443)고 강조한다.


스카치폴은 래긴과 자넷이 함께 쓴 『비교 연구의 이론과 방법 : 두 가지 전략』이라는 글에 대항하여 틸리와 월러스타인을 대비시키고, 이후 틸리와 월러스타인을 포함하는 탁월한 역사적 지향의 사회학 저서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연구 전략의 3가지 지도를 보여준다.


래긴(C. Ragin)과 자넷(D. Zaret)은 분석 단위, 인과성의 개념, 적당한 설명 개념, 분석 논리와 관련하여 뒤르켐과 베버의 비교전략을 대비시킨다. 그들에게 있어 기본적으로 역사학적 방법은 베버주의적 연구 전통과 동일시된다(스카치폴 : 1991, p515). 래긴과 자넷은 “전통적인 사회학적 연구의 대부분을 본래 반(反) 역사적인 뒤르켐적 접근 방식으로 간주”한다. 뒤르켐적 접근 방식이란 주로 양적 분석을 통해 일반적인 설명 변수를 찾아내는 연구를 가리킨다. 이러한 뒤르켐적 접근 방법에 반대하는 베버주의적 접근방식이란 “역사적 사건의 특수한 양상을 이념형 개념의 도움으로 밝히려는 것”을 의미한다.


스카치폴은 ‘비교’를 사용하는 목적의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래긴과 자넷이 부당하게 “벤딕스와 앤더슨으로부터 무어와 자기 자신에 이르는 모든 역사 사회학자들을 하나의 베버주의적 진영으로 간주”(스카치폴 : 1991, p441)한다고 비판한다. 스카치폴에 의하면 역사 사회학에서 ‘비교’를 사용하는 사회학자들의 목적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이다.


(1) 대비-지향적 비교(contrast-oriented)

(2) 거시-분석적 비교(macro-analytic)


대비-지향적 비교는 “특수한 서술을 첨예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며, 거시-분석적 비교는 “인과적 일반화를 검증하거나 수립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며, 이 두 비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 스카치폴의 지적이다(스카치폴 : 1991, pp441~442). 스카치폴은 이러한 래긴과 자넷의 이분법적 유형화로는 현대 미국 사회학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연구 전략들을 올바로 포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틸리와 월러스타인은 래긴과 자넷의 연구 전략과는 상이한 연구 전략을 통해 자신의 탁월한 연구업적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 반증으로 제시된다(스카치폴 : 1991, p442).


스카치폴은 래긴과 자넷의 뒤르켐-베버주의적 대립구도로 역사 사회학의 연구 전략을 설명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역사 사회학에 적용되는 (1) 일반 모델(model) (2) 개념 (3) 인과적 규칙성의 발견이란 세 연구 전략에 따라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폭넓게 유형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화를 통해 자신이 ‘분석적 역사 사회학’이라고 명명한, ‘인과적 규칙성의 발견’이 역사 사회학의 바람직한 연구 전략임을 주장한다.


5. 연구 전략1 : 역사에 대한 일반 모델의 적용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역사 사회학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나 그 이상의 역사적 국면에 대한 일반 모델의 적용”(스카치폴 : 1991, p444)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사회학과 역사학의 첨예한 구별 위에서 구성된 역사 사회학의 유형이었다. 사회학은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일반 사회이론을 공식화할 수 있는 학문”으로 인식되고, 역사학은 “과거의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관한 ‘사실들’을 수집하는 학문”이라는 대립적 정의에 기반을 둔 것이다.


1960년대 중반에 출판된 에릭슨의 『변덕스런 청교도 : 일탈 사회학의 한 연구』는 역사에 대한 일반 모델의 적용이라는 1950년대 이후 역사 사회학의 전형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는 이 저서에서 “특정한 공동체가 일탈행동을 어떻게 정의하고 규제하는가에 관한 뒤르켐적 모델을 정교화 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는 거기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수집된 자료는 뉴잉글랜드 지역의 청교도 집단을 새롭게 조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일탈행동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미국 청교도들의 경험은 세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 생활의 한 보기로서 취급되었다. 이러한 접근이 바람직한 것인지의 여부는 [···] 궁극적으로 이 연구의 특정한 주제가 아니라 다른 시대의 사람들의 행동을 해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설명 범위에 달려 있을 것이다.”

(스카치폴 : 1991, p446, 재인용)


에릭슨의 설명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역사에 대한 일반 모델을 구성하는 학자들의 주요 관심은 “일반 이론 모델의 내적 논리를 설명하고 정교하게 다듬는”(스카치폴 : 1991, p446)것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비판에 직면한다. (1) 먼저, 일반 이론 모델을 구성하고자 하는 학자는 일반 이론 모델을 연역적으로 구성하여, 그것을 이미 주어진 모델로 독자들을 혼동시킨다. (2) 다음으로, 연역적으로 주어진 일반 이론 모델의 적합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자의적으로 경험적 사례들을 재구성한다. 즉 중요한 역사적 반증을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 연구전략을 채택한 학자진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대안전략을 구현하였다.


[대안1] 렌스키는 “알려진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세계에 일반 모델을 적용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중요한 역사적 반증을 의도적 회피하는 두 번째 비판을 넘어설 수 있지만, 연구자가 특정한 사건에 대한 본질적인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가 발생한다.

[대안2] 윌러(David Willer)는 비판(1)을 넘어서기 위하여 주어진 하나의 일반 모델로 역사적 사건을 포착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반대로 “선택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그 사건에 대한 역사적 논의들을 증명”(스카치폴 :1991, p449)한다. 하지만 이 전략 역시 ‘자의성’의 문제제기를 넘어서지 못한다.


하지만 역사에 적용되는 일반적 이론 모델을 구축하려는 학자들이 렌스키와 윌러의 접근만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스카치폴은 틸리와 월러스타인의 예를 통해 일반 모델의 적용과 결합되는 다른 유형의 연구 전략들을 소개하고 있다. (1) 하나는 유의미한 역사적 해석을 발전시키기 위해 개념을 사용하는 ‘해석적 역사 사회학’이며 다른 하나는 (2) 다른 하나는 역사의 인과적 규칙에 관한 대안적 가설을 탐구하는 ‘분석적 역사 사회학’이다.


6. 연구 전략2 : 역사를 해석하기 위한 개념의 사용


스카치폴이 ‘해석적 역사 사회학’이라고 이름붙인 이 두 번째 연구 전략은 “광범위한 역사적 유형에 대한 유의미한 해석을 발전시키기 위해 개념을 사용한 것”(스카치폴 : 1991, p451)을 의미한다. 이 연구전략은 “이론적 모델을 역사에 적용하거나 대규모 구조와 변동의 유형에 관한 인과적 일반화를 수립하기 위해 가설 검증의 접근 방식”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따라서 이 연구전략이 경제 결정론적 맑스주의와 구조기능주의의 결정론적 경향 및 지나친 일반화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 내지 ‘비판적 대응’의 전략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이러한 이론에 대한 회의가 ‘일반성’ 그 자체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이 연구전략은 “자신들의 연구관심을 한정하고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사례 연구로부터 역사적 유형을 뽑아내고 제시하기 위해 항상 명백한 일반성의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다”(스카치폴 : 1991, p452). 하지만 이 연구전략이 역사적 인과성에 관한 규칙들을 발견하려는 ‘분석적 역사사회학’과 구별되는 지점은 바로 ‘비교’를 사용하는 목적이다. 그들은 스카치폴이 말하는 ‘대비-지향적’ 비교전략을 사용한다. 이 연구전략은 “개별 사례의 독특한 특성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비교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벤딕스의 비교연구에 대한 설명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다른 연구와 비교함으로써 하나의 구조가 지닌 시계를 확대시킨다. 따라서 유럽의 봉건제는 일본의 봉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보다 정확하게 정의될 수 있으며, 서구 문명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성직에의 경향성이 발전하지 않은 문명과의 비교를 통해 보다 분명해질 수 있다.”

(스카치폴 : 1991, p453)


해석학적 연구 전략의 강점은 연구 주제가 과거-현재의 두 맥락(context)을 연결할 수 있다는 것에 존재한다. 해석학적 연구 전략은 (1) 과거 행위자들의 지향성과 행동을 취하는 제도적, 문화적 상황과 맥락을 선택하며 (2) 동시에 그것이 현재적 맥락에서 정치적,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일 때, 탁월한 연구로 이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들은 비교의 방법을 통해 사례의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어냄으로써 제한된 사례의 해석을 일반적인 개념을 통해 이루어낸다. 바로 이 지점이 두 번째 연구전략의 장점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한계가 공존한다. 사례 혹은 역사적 사건의 해석에 치중하는 ‘개념’의 적용은 그 개념에 해당 사례의 역사적 특수성이 결합되어 존재한다. 따라서 ‘해석학적’ 연구전략의 성과를 다른 나라에 확대하려고 시도하는 경우 그것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며, 개념에 연결되어 있는 잠재적 인과성을 확증하는 것에 약점을 갖는다. 그것은 그 사례의 ‘특수성’을 해석하는 것에 장점이 있는 반면, “왜”라는 질문에 대한 지속적이고 일반적인 관심에 있어 부족하다. 순수한 일반 이론 모델이 역사적 특수성과 다양성을 간과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출현한 이 연구전략은 해당 사례의 역사적 특수성을 잠재적 일반성을 지닌 ‘개념’으로 해석해내지만, ‘이론’으로 발전하는 것에 어려움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연구 전략 또한 다른 연구 전략들과 통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7. 연구 전략3 : 역사에서의 인과론적 규칙성의 분석


마지막으로 스카치폴이 주장하는 ‘분석적 역사사회학’의 연구전략은 앞의 두 전략과는 차별화된다. 분석적 연구전략의 목표는 “명백히 정의된 역사적 결과나 유형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구축하는 것이며, 이 전략은 “역사에서도 인과론적 규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스카치폴  : 1991, p459). 분석적 역사 사회학의 연구 전략의 핵심은 “연구자들이 특정한 기존 이론, 또는 이론들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역사적 유형을 설명하는 데 적합한 구체적인 인과론적 구성논리의 발견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스카치폴 : 1991, p460)에 존재한다. 즉 이 연구전략은 연구주제로 설정된 ‘실재’(the real)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며, 이 실재를 해명하기 위하여 서로 경합하는 이론들을 결합하기도 하며, 새로운 이론을 잠정적으로 구성하기도 한다. 인과론적 규칙성에 대한 발견은 일반적 이론 모델의 연구전략과 같이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재를 해명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 전략이 “독자적인 중요성을 개개의 맥락 탓으로 돌리는 해석적 경향”을 피한다고 하여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일반법칙으로 진술되지 않는 이론적 가설은 결코 탐구할 가치가 없다”는 비어(Samuel Beer)의 ‘보편성의 정론’(dogma of university)을 채택하는 것은 아니다. 이 연구전략은 “특정한 역사적 맥락, 또는 맥락들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설명적 일반화의 작업”에 만족한다(스카치폴 : 1991, p461). 즉 이 연구 전략은 자기제한적 ‘일반화’를 지향한다.


이 연구전략이 자기제한적 일반화를 지향한다는 사실은 스카치폴의 단 하나의 사례만으로도 가능하다는 주장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한 것’이지 ‘충분한 것’은 되지 못한다. 논의의 타당성을 증명하고 연구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서 스카치폴은 ‘비교’의 방법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단일사례 연구는 분석적 전략보다는 역사 사회학의 처음 두 분야에 더 전형적인 보기이다.”(스카치폴 :1991, p462)


분석 전략의 비교는 대조-지향적 비교와는 구별된다. 분석 전략의 비교는 인과적 규칙성의 발견을 목표로 한다. 인과적 규칙성의 발견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이 비교 전략은 “타당하지 않은 원인들로부터 타당한 원인을 구별하기 위한 변차 통제의 확립을 목표로 하는 사회과학의 다른 방법론적 접근”(스카치폴 : 1991, p464)과 유사하다. 이러한 비교전략으로 스카치폴은 J. S. 밀이 제시한 일치법과 차이법을 유용한 전략으로 제시한다. 스카치폴은 밀의 일치법과 차이법을 통해 인과적 규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8. 소결 : 연구 전략의 통합전략


2004년에 처음 이 논문을 접했을 때는 스카치폴이 분류한 3가지 유형의 연구 전략이 서로 대립되는 연구전략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은 3가지 연구 전략이 보다 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스카치폴은 역사의 인과론적 규칙성을 발견하려는 분석 전략이 이론적 모델이나 해석적 전략을 대체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가 생각하는 분석적 연구 전략은 ‘특수성’-‘보편성’의 양 극단에 위치하는 해석적 연구 전략과 일반적 모델의 연구 전략을 분석적 연구 전략이 매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분석적 역사 사회학의 실행은 역사 사회학이나 역사적 사례에 대한 일반 모델의 적용에 비해 역사적 증거와의 보다 친밀한 대화를 촉구한다”(스카치폴 : 1991, p473).


특수성 <----------------------------------------------------> 보편성

해석적 연구 전략 ------------ 분석적 연구 전략 ------------- 일반 모델 전략


9. Rethinking Theda Skocpol's Strategy


스카치폴의 연구 전략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우리 세미나의 주된 목표인 ‘민주주의’ 연구의 주된 접근 전략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역사 사회학의 주된 전통으로 제시되는 스카치폴의 ‘자기제한적 일반화’=‘인과론적 규칙성의 발견’이라는 연구 전략에 대항하여 공개적인 ‘이의’를 제기해볼 필요성이 존재한다.


1) 비교의 독자적 단위는 실재하는가?


스카치폴이 스스로 고백하듯이, 분석적 연구 전략은 “인과론적 규칙에 대한 비교 평가용의 독자적 단위가 발견될 수 있다는 가정”(스카치폴 : 1991, p471)에 근거한다. 월러스타인의 접근인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단 하나의 체제로서 자본주의 근대체제를 설정한다면, 우리는 비교의 독자적인 단위를 설정할 수 없다. 비교가 아닌 다른 전략적 접근이 요구된다.


2) 밀의 ‘인과관계’에 대한 규정은 실재하는 인과성을 반영하는가?


비교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비교의 방법으로 제시된 밀의 논리관계 증명법은 ‘분석’을 위한 올바른 인과관계를 보장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밀의 인과관계에 대한 개념은 흄적 인과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흄적 인과개념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인과관계를 구성하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사건들의 규칙적 결합 속에서 인과관계를 파악하려는 흄-밀적 인과개념은 기본적으로 사회와 자연관계 모두에서 그러한 규칙적 결합이 아주 드물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못한다.


3) 모델(model)이 ‘인과성’과 결합될 수 있다.


스카치폴은 역사에서 규칙적인 인과성을 발견하는 전략을 연구가설의 검토 및 수정과정과 동일한 과정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인과성을 발견하려는 전략이 가설과 연결될 필요는 없다. 반대로 인과성을 발견하려는 전략은 모델과 결합되어야만 한다. 즉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모델(model)의 구축이 가능하고, 실제로 역사 사회학은 경험에 열려 있는 모델의 구축이 보다 일반적인 전략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10. 민주주의 이행 모델(model) :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J. A. 슘페터(Schumpeter)는 『경제발전의 이론』(1912)에서 모순적인 연구전략을 통해 자본주의의 성장과 동학에 대한 혁신적 규명을 해낸다. 그는 “자본주의의 성장과 동학에 관련한 책이지만 전혀 성장이 없는 자본주의 경제를 설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슘페터는 책의 앞부분에서 애덤 스미스와 밀 그리고 마르크스와 케인스 등의 세계에 성장을 가져오는 요인 즉 자본축적을 결여한 자본주의를 설명한다. 이들과는 달리 슘페터는 축적 없는 자본주의 즉 생산의 흐름이 완전히 정태적이고 변화가 없으며 결코 부의 창조를 바꾸거나 확장하지 않는 ‘순환적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자본주의를 묘사한다”(하일브로너 : 2006, p389). 이것은 일종의 ‘정상상태’에 대한 모델이다.


슘페터의 연구 전략을 모방하여 우리가 아주 정태적인 순환적인 흐름을 가진 ‘민주주의’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순환적 흐름의 연관고리를 해체하면서 민주주의 이행의 동력과 동학을 구성하는 동태적 민주주의 모델로 이동하는 어떤 흐름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맑스가 추상화되고 단순화된 물물교환의 과정으로부터 보다 복잡하고 세부적인 근대 자본주의의 구조와 동학을 해명하듯이, 우리 또한 아주 정태적이고 단순한 모델로부터 근대 민주주의의 구조와 동학을 설명하는 모델로 이행할 수는 없을까? 그런데, 이것이 베버의 이념형(Ideal type)적 접근과는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요?


^_________^ I don't know.


· 참고문헌


1. 테다 스카치폴, 「역사사회학의 방법과 전망」, 『역사 사회학의 방법과 전망』, 한국 사회학연구소, 1991.

2. 마가렛 아처 외, 『초월적 실재론과 과학』, 한울아카데미, 2004

3. 한국비교사회연구회, 『비교사회학 : 방법과 실제1』, 열음사, 1990

4. 김용학·임현진, 『비교사회학』, 나남출판, 1998.

5. L. 하일브로너, 『세속의 철학자들』, 이마고, 2005.

 

 
본문스크랩 [스카치폴] 사회구조적 설명의 필요성 낙서장

2008/01/07 20:02

 

http://blog.naver.com/sickduck/20045738873

첨부파일사회구조적_설명의_필요성.hwp
출처 블로그 > Bleistifte des Ganndalf
원본 http://blog.naver.com/ganndalf/140009361796

사회구조적 설명의 필요성

테다 스카치폴

 

* 원제 : “Explaining Revolutions : In Quest of a Social-Structural Approach”(1976)
* 출처 : 혁명의 사회이론, 김진균 편, p14~p40, 부분발췌

 


이 글을 통해 스카치폴이 주장하려고 하는 핵심은 기존의 사회과학적 혁명이론이 혁명을 해명하거나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카치폴은 혁명을 포함하는 보다 포괄적인 현상들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분류한다.

 

(1) 집합심리학적 이론
정치적 폭력이나 저항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동기라는 관점에서 혁명을 설명하는 것

 

(2) 체계/가치합의 이론
혁명을 사회체계상의 극심한 불균형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운동의 폭력적 반응으로 설명하는 것

 

(3) 정치적 갈등 이론
정치권력을 목표로 하여 경쟁하고 있는 조직화된 집단과 정부 사이의 갈등으로 설명하는 것

 

스카치폴은 이러한 이론들이 ‘주어진 구체적 역사적 상황에 처해 있는 특정한 복합 사회 속에서의 제도적 발달의 유형에 관한 가설이 아니라 반란을 일으키는 대중들의 정신상태나 의식적인 혁명적 전위들의 출현에 대한 가설을 통해서 혁명의 발생을 설명’하려고 하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고 비판하며, 방법론적으로는 ‘혁명이 실패하였거나 일어나지 않았던 부정적 경우들과 혁명이 발생하였던 몇 개의 긍정적 경우들을 체계적으로 비교함으로써, 가설들을 귀납적으로 정립하고 검증하기 위한 비교사적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행동이나 사회과정 일반에 관한 추상적이고 연역적인 가설들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혁명을 설명하고 수많은 분석단위들을 토대로 하여 그 가설들을 통계적으로 검증하려 한다는 데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즉, 스카치폴의 이 글은 사회심리학적 설명방식과 보편주의적 연역적 설명방식에 대한 이론과 방법론적 비판을 포함하며, 이러한 설명방식의 대안으로 구조적이고 비교사적인 접근방식을 지향하는 이론적 방향의 재조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1. 집합심리학적 혁명이론

 

집합심리학적 이론은 “모든 정치현상들과 마찬가지로, 혁명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작된다”고 가정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심리적 동기의 역할을 다룬 여러 이론들로부터 설명력을 찾아내려고 한다. 혁명에 대한 가장 유력하고 발전된 형태의 집합심리학적 설명은 “불만이 폭력적 갈등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표면상 자명한 전제로부터” 출발하며, 좌절을 그것의 인지된 동인(動因)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행동과 연결시키는 심리학적 이론의 도움을 빌어서 이 전제를 해명하려고 한다.

 

데이비스(James Davies), 파이어아벤트 부부, 네스볼트 그리고 거어(Gurr)가 중심학자이며, 거어의 저작 『인간은 왜 반란하는가(Why Men Rebel)』는 좌절-공격이론(frustration-aggression theory)에 기초한 모델 중에서 대표적으로 가장 정교하고 매우 세련된 것이다.

 

좌절-공격이론가들은 혁명을, 기본적으로 어떤 정신의 구조에 의해서 야기된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정치적 행동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있다. Gurr는 ‘정치적 폭력’을 “한 정치적 공동체 내부에서 정치체제 및 그 체제의 집권자들뿐 아니라 경쟁하는 정치적 집단을 포함하는 행위자들, 혹은 그 체제의 정책에 대한 모든 집합적인 공격”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폭력은 “ 두 가지 의미에서 정치체제를 위협한다. ··· 국가에 귀속된 폭력의 독점 ··· 정상적인 정치적 과정의 방해”가 그것이다. 거어는 혁명이 가져오는 광범위한 변동의 크기나 종류에는 관심이 없고 혁명의 파괴성에만 관심을 갖는다. 즉 이러한 집합적 사건들을 다른 사건들로부터 구별시켜주는 결정적 속성으로서 한 유형의 행동, 즉 ‘불법적 폭력에의 의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상대적 박탈감 - “인간의 가치기대(사람들이 스스로가 정당하게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재화와 삶의 조건)와 인간의 가치능력(사람들이 스스로가 도달하거나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재화와 삶의 조건) 사이의 인지된 불일치” - 은 정치적 폭력의 잠재력을 산출하는 좌절적 조건으로 기술된다. 상대적 박탈감은 사회가 변동을 경험할 때마다 사람들 속에서 어느 정도 생성된다고 상정되고 있다. 상대적 박탈감에 기인하는 불만이 일단 생성되면, 그것 때문에 발생하는 집합적 정치적 폭력의 크기와 형태는, 상대적인 박탈감이 사회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범위와 그 강도 및 정치적 폭력의 일반화된 잠재력의 구체적 표현을 조정하고 규제하는 여러 가지 매개변수들의 결과에 따라 달라진다.

 

거어의 전체적 모델에서는, 특히 혁명은 ‘대중’과 사회의 주변적 ‘엘리트’에게 동시에 영향을 미치고 그리하여 폭력에의 광범위한 참여와 폭력의 신중한 조직화를 가져오는 넓고 강력한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단순한 반응일 뿐이라고 설명된다. 거어에 의하면, 대중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상대적 박탈감은 소란만을 일으킬 뿐이다.

 

모든 집합심리학적 이론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 이론이 개인들의 집합에 귀속된 주관적 지향들에 관한 가설에 다소간 직접적으로 의존하여 사회과정을 설명하려 한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론적 전략은 설명되어야할 사건들이 개인적 행동의 직접적 표현으로 인식되고, 그리하여 ‘정치적 폭력’에 초점이 두어지는 한에 있어서만 겨우 표면적으로라도 그럴 듯하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혁명, 쿠데타, 반란 심지어는 폭동까지도 무정형의 집합이 아니라 집합적으로 동원되고 조직화된 집단들이, 그들을 다른 동원된 집단들과 갈등관계에 빠뜨리는 목표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폭력에 참여하게 되는 사건들이다. 게다가 여러 유형의 정치적 폭력을 분류하고 명칭을 붙이는 일반적 기준은 행위자들의 사회구조적 위치와 정치적 갈등과정에서 의해서 야기된 사회정치적 결과들이다. 무엇보다도 혁명은 개인 행동의 어떤 동질적인 유형이 단순하게 극단적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혁명은 서로 다른 사황에 처해 있고, 동기화도 다른 집단을 포함하는 갈등이 전개되는 복합적 상황이며, 한 정체의 폭력적 파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정치적 질서를 출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좌절-공격이론가들이 설사 개인적인 정치적 폭력의 성향이나 모든 유형들이 합쳐진 순수한 집합적 결과를 설명할 수 있을지라도, 그들은 혁명의 원인이나 정치적 갈등의 어떤 다른 독특한 형태를 우리에게 새롭게 밝혀줄 수는 없는 것이다.

 

2. 체계/가치 합의 이론

 

대중의 불만이 좌절-공격이론가들에게는 혁명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 요인이지만, 체계의 위기, 그리고 특히 혁명적 이데올로기가 체계/가치합의 이론가들에게는 핵심적 요인들이다. 이 시각을 정치적 혁명의 설명에 가장 완벽하고 적절하게 사용했던 것은, 1966년에 발행한 존슨(Chalmeers Johnson)의 『혁명적 변동』이다.

 

존손에게 있어서, 혁명이란, 보통 폭력을 제한하는 기능을 하는 “시민적 사회관계 속에 폭력을 개입시키는 특별한 종류의 사회변동”이다. 존슨은 폭력을, 파괴를 향한 감정적 충동으로서가 아니라, 파괴와 함께 전체 사회의 재구성을 포함하는 변동을 성취하기 위한 합리적인 전략으로서 간주한다. 따라서 그는 혁명의 분석과 설명이 일정한 사회구조이론에 준거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존슨이 준거점으로 삼고 있는 사회학이론이 파슨즈의 체계이론이라는 사실은 치명적인 것이며, 사회통합과 변동에 관한 이 이론의 시각 때문에, 존슨은 혁명적 변동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설명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파슨즈류의 학자들과 같이, 존슨도 정상적인 사회 혹은 위기가 없는 사회는 사회의 핵심적 가치지향들을 규범과 역할 속에서 표현하고 명시하는, 내적으로 일관된 일련의 제도들로서 인식되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가치지향은 사회화과정을 통해 내면화되어 그 사회의 대부분의 정상적인 성인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도덕적 기준과 현실규정의 기준이 되어버린 가치지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한 사회의 지배적인 세계관과 개인들의 개별적 지향은 서로 아주 유사하며, 모든 객관적인 사회구조적 위기는 지배적인 세계관의 붕괴와 대안적인 사회적 가치지향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이데올로기의 대중적 수용 속에서 자동적으로 반영된다는 결론이, 사회적 통합의 기초에 관한 위와 같은 개념으로부터 도출된다. 존슨은 이러한 파슨즈의 사회통합이론의 논리적 결과들을 주저없이 받아들인다.

 

따라서 존슨에 따르면, 한 사회의 위기는 그 사회의 가치나 환경이 중대할 정도로 시간적으로 불일치할 때마다 나타난다. 위기의 원인은 내적혁신이든 외부적 영향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원인이 무엇이든 위기는 항상 사회구성원들이 지향의 상실을 경험하면서 촉진된다. 그 결과 ‘개인적 불균형’이 광범하게 경험되고, 과거의 가치합의의 관점에서 이제까지 ‘일탈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개인적 집단적 행동이 증가한다. 바로 이 순간에 혁신적인 대안적 가치지향을 중심으로 한 이데올로기적 운동들이 결합하고 수많은 추종자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할 때 비로소 혁명적 상황은 도래한다.

 

그러나 혁명적 상황이 완전히 성숙하더라도, 존슨에 따르면 혁명이 실제로 성공할 것인가의 여부는 무엇보다도 합법적 권력당국이 가치와 환경의 “재조화를 향하여 움직일 수 있는 체계의 능력과 그 체계 자체에 대한 비일탈적 행위자들의 신뢰를 유지시켜줄”정책들을 발전시킬 자발적 의사가 있고, 또 그렇게 할 능력이 있는가에 달려있다. 권력당국이 "재조화“의 정책을 시행하려고 하지만, 성공적 혁명을 방해하기 위해서 부득이하게 강압에 의존할 수도 있다.

 

요약하면, 존슨은 집합심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정부가 혁명을 회피하려면 그 시민들을 만족시켜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존슨에게 있어서 특이한 점은,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 단지 시민들의 관습적인 혹은 획득된 욕구가 아니라 그들의 내면화된 가치기준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좌절-공격이론가들의 경우 혁명운동이 불만층들의 분노를 표현하기 때문에 성공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체계/가치합의 이론가들에게 있어 혁명운동은 지향상실자들을 새로운 사회적 가치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3. 정치갈등론적 시각

 

집합적 폭력과 혁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집합심리학적 이론가와 체계/가치합의 이론가 모두, 불만이나 지향 상실에 초점을 맞추고 제도적 요인과 조직적 요인을 매개변수의 역할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하지만, 정치갈등론적 시각은 오히려 정치적 목표를 위한 조직화된 집단갈등의 역할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각의 대변자가 틸리이다.

 

정치갈등론적 시각은 정치적 폭력을 불만이나 사회적 해체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접근방식에 대한 비판속에서 발전하였다. 틸리에 따르면, 거어, 데이비스, 존슨 같은 이론가들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폭력이 동원된-즉, 자원을 통제하며 조직화된-집단과 통치권력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라는 과정의 부산물이라는 점을 보지 못하였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틸리는 ‘정치적 갈등’을 관심의 중심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는 정부(강압의 주요 수단들을 통제하는 조직체)와 정치적 조직체 구성원과 도전자 들을 포함하는 권력 경쟁자들을 그 주요 구성요소로 하는 일반적 모델의 도움을 받아 정치적 갈등을 분석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틸 리가 정치적 폭력을 설명하려는 경쟁적인 접근방식들을 비판, 반박하고 나서 혁명들을 특징지우고 상세히 설명하려는 자신의 시도로 되돌아오면, 그는 상대적 박탈감과 이데올로기적 전향에 관한 낡은 가설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틸리가 혁명은 복합적 사건이며 혁명의 발생은 몇 가지의 상대적으로 독립된 과정들이 수렴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그는 계급갈등과 사회변동의 측면을 무시하고 있으며, 정치적 주권을 둘러싼 투쟁이라는 한 측면만을 분석적 설명의 관심사로 삼고 있다. 틸리는 내란, 국제적 정복, 민족적 분리주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혁명도 단순히 복수의 주권이 존재하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혁명적 상황을 보다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경쟁하는 집단들의 투쟁대상인 목표의 특별한 성격이라면, 혁명에 관해서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러한 특별한 목표를 성취하려고 의도하는 경쟁자들의 출현과 그들의 호소이다. 하지만 틸리는 혁명의 원인을 제시해야할 지점에 이르면 사회심리학적 가설에 의존한다. 존슨을 그대로 모방하여 틸리는 잠재적 경쟁자들은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진정한 문제는 그러한 경쟁자들이 언제 증가하고 동원되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즉 불만은 중심적 설명요인으로 다시 나타나며, 종속변수는 이제 폭력적 행동이 아니며 혁명적 엘리트나 연합 혹은 조직을 옹호하는 묵종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정치갈등론적 시각은 조직화된 정치적 활동이 강조되기 때문에 국가가 중심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복수주권의 존재에 대한 틸리의 강조는 국가의 역할을 평범하게 만들어 버린다. 국가는 하나 이상의 완성된 혁명적 조직체 또는 세력과 어느 정도 대등한 입장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조직체로 묘사된다. 사회의 구성원들은 정부를 지지할 것인가 또는 혁명적 조직체를 지지할 것인가를 자유롭고 신중하게 선택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그들의 선택은 혁명적 상황이 전개될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요컨대, 정치갈등이론가들은 체계 또는 사회체계를 파괴하거나 전복시키는 혁명적 행동에 직접적으로 몰입하는 불만에 찬, 지향을 상실한 혹은 도덕적으로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개념을 명백히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혁명의 원인에 관하여 대체로 사회심리학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만에 찬 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전향한 사람들로부터 사회적 지지를 얻으려는 호소를 통해서 정부조직에 도전하는 조직화된 의식적 혁명가들이라는 이미지를 여전히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4. 구조적 비교사적 접근법의 모색

 

혁명에 대한 기존의 세 가지 접근방식은 동일한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다.

 

(1) 사회체계나 주민들 속의 변화 또는 그것들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는 불만, 사회적 지향상실 혹은 집합적 동원을 위한 새로운 집단과 잠재력을 낳는다.

(2) 그 이후 현존하는 정부, 더 나아가 전체 사회질서를 위식적으로 전복시키려 하는 광범위한 기반을 가진 의도적인 운동이 등장한다.

(3) 마지막으로 혁명운동은 ‘권력당국’이나 ‘정부’와 끝까지 싸우며, 만일 승리할 경우, 자기 자신의 통제권, 권위 혹은 사회적 변혁의 계획을 수립하는 데 착수한다.

 

즉, 혁명 발생의 기본적 조건이 현존하는 정치질서나 사회질서를 전복시킬 것을 목표로 하는 지도자와 추종자가 결합된, 신중한 노력이 사회나 국민으로부터 출현한다는 주장이 공통적이다. 이러한 이미지에 집착하면 사회구조적 설명을 지향하는 이론들조차도 사회심리학적 설명으로 변화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혁명의 설명에 있어서 핵심적인 쟁점으로서 사람들의 감정과 의식에 분석자의 주의를 필연적으로 집중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운동은 국가, 계급 그리고 지배의 정상적 유형의 위기가 발생한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위기의 발생은, 혁명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설명되어야 할 중요한 사실의 하나이다. 게다가 모든 혁명적 위기에 있어서,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있고 서로 다른 동기를 가진 여러 관련 집단들은, 그들이 처음에는 예측하지 못했거나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들을 궁극적으로 발생시키는 다양한 갈등의 복합적 전개과정 속에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혁명이론의 타당성은 분석가가 혁명 참여자들의 관점을 초월하여 주어진 역사적 보기들을 넘어서서, 혁명이 일어났던 상황과 혁명이 진행되었던 과정 속에서 비슷한 제도적 역사적 상황적 유형들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필요성에 의존한다.

 

혁명의 설명은, 총체적으로 인식된 혁명적 상황의 출현과 혁명에 참여하는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는 집단들의 다양하게 동기화된 행위의 복합적이고 비의도적인 결합을 문제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결합은 ‘한 주어진 집단이 아무리 핵심적인 집단일지라도 그 집단의 원래 의도와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전체적 변동을 낳는 결합’을 의미한다. 우리는 특정한 사회적 제도적 관계 속에서의 집단의 상호 관련 상황과 역동적인 국제적 영역 속에서의 사회의 상호관계에 초점을 동시에 맞추어야만, 그러한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비개인적이고 비주관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은 일반적 의미에서 사회역사적 현실에 대한 구조적 시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점을 취하는 것이다. 비개인적이고 비주관적인 관점이란 ‘개인, 지위, 집단 사이의 제도화된 관계의 유형을 강조하는 관점’을 의미한다.

 

혁명이론에 대한 연역적 일반화, 즉 모든 시대와 장소 그리고 모든 종류의 사회정치적 질서에서 가능하고 비슷하다고 인식된 어떤 일반적 혁명과정에 대한 일반적인 명제를 연역하려는 시도, 이러한 연역적 일반화의 이론구성 전략은 세 가지 문제점을 갖고 있다.

 

(1) 너무 일반적인 이론적 명제들은, 간단하게 일차원적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현상들을 설명하는데만 적합하며, 혁명과 같이 그 성격상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것에는 부적합하다.

(2) 사회구조적 접근방식을 택한다면, 우리는 다양한 특정 형태의 사회들의 관점에서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 이제까지 알려진 모든 종류의 사회들을 총괄하여 그 사회들의 정치적 제도나 사회경제적 제도에 관해서 말한다는 것은 거의 혹은 전혀 의미가 없다.

(3) 근본적으로 연역적으로 일반화하는 이론구성의 방법은 혁명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전혀 현실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엄밀한 정의에 따르면 혁명이 일어났던 경우는 매우 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이 모든 경우도 ‘근대화’의 시기에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혁명과정 자체는 부분적으로는 보편적이 아닌 특별한 사회정치적 구조에 독특한 것으로, 그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는 특정한 종류의 세계사적 구조에 특수한 것으로 가정되어야 한다.

 

혁명은 ‘이론적 주제’로 취급될 수 있다. 혁명에 관하여 귀납적으로 일반화하고 혁명의 원인과 결과에 관한 가설들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몇몇 국가의 역사적 궤적을 비교의 단위로서 선택하는 <비교사적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변수들은 너무나 많고 구체적 경우들이 충분하게 존재하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다변수분석 방법으로서의 비교분석은 국가적 정치적 갈등과 발전에 관심이 있고 세계적 맥락의 변수들의 국가적 발전에 대한 엄청난 영향력을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는 거시사회학자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과학적 도구이다.

 

5.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평가

 

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은 많은 점에서 모범적이다.

 

(1)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고수하는, 혁명과정의 일반적 이미지는 혁명적 위기를 발생시키는 데 있어서 사회구조적 모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2) 이론적 목적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든 혁명들이 똑 같은 것은 아니라고 가정한다. 즉, 혁명이 일어났던 여러 특정 사회들의 생산력 및 생산관계와 계급구조의 구체적 분석을 통해 각 유형의 혁명의 특별한 변형들을 구별한다.

(3)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혁명이 대규모적인 사회변동의 보다 광범한 과정과 내재적으로 연결된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도출된 혁명과정의 이론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솔직히 다음과 같다. 생산양식을 변화시키고 서로 다른 생산양식들을 구분시켜주는 계급투쟁을 발생시키는 사회경제적인 발전에 의해서 혁명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기본적 설명도식은, 실제 역사적 혁명들의 전체적 논리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혁명들에 있어서 핵심적으로 중요하였던 정치적 갈등은 계급적 관점만 가지고는 이해될 수 없다. 혁명적 상황에는 경제적 ‘모순’뿐만 아니라 정치적·군사적 모순도 포함된다.

 

또한 혁명에 있어서의 국가의 중심적 역할을 과소평가하였다. 마르크스주의적 학자들은 국가의 강력함과 그 구조 및 국가조직과 계급구조의 관계를 지칭하는 인과적 변수들이, 계급구조와 경제발전의 유형만을 지칭하는 변수들보다, 성공한 혁명의 경우와 실패한 혁명의 경우 혹은 혁명이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경우를 훨씬 잘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군대와 행정조직 같은 국가조직의 구조와 기능 및 국가와 사회계급의 관계가 보다 더 직접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이것은 국가발전의 비혁명적 유형으로부터 혁명을 구분시켜주는 독특한 제도적 변동을 밝혀내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논평의 여러 주장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이론적 전략을 통해서만 혁명의 설명에 있어서 실질적인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다.

(2) 새로운 이론적 전략이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사회구조적 설명방법과 가설검증의 비교사적 방법을 종합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거시이론적 전통의 특징인 이론적 이해와 역사적 유관성을 융합하고, 엄밀한 가설검증의 관심을 결합시킴으로써 추상적이고 현실 유관성이 없는 ‘이론화’와 ‘경험적 부적절성’이라는 두 가지 위험을 회피할 수 있다.


 
본문스크랩 [스카치폴] 혁명적 이데올로기의 역할 낙서장

2008/01/07 20:02

 

http://blog.naver.com/sickduck/20045738860

출처 블로그 > Bleistifte des Ganndalf
원본 http://blog.naver.com/ganndalf/140018034104
 

혁명적 이데올로기의 역할


* 출처 : 테다 스카치폴, 『국가와 사회혁명 : 혁명의 비교연구』, pp183~188

* 부분발췌 + 내 언어로 정리(약간)


혁명지도층을 정치가들로 생각하는 연구자들은 대개 혁명지도층이 취하는 이데올로기들, 예를 들면 <자코뱅주의> 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등이 혁명의 결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한다고 믿거나 주장한다. 또 그러한 이념들은 혁명지도자들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동할 때 추구하는 실천적 전략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혁명과정과 결과에서 혁명적 전위집단의 이념적 방침이 주요하다고 보는 분석태도는 어떤 한 가지 가정에 입각해 있는 것이 통례다. 이 견해에 따르면, 구체제에 원래부터 내재해 있던 투쟁과 모순이 사회적 위기를 가져오고 이로 인해 혁명적 변혁이 가능해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변화의 실제적 성취는, 특히 어떤 종류의 특수한 변화가 성취되는가는 확고하고 조직적 혁명 전위집단의 의도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혁명의 결과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도층의 이데올로기적 비전을 살펴야 하는 논리가 성립하는 듯 하다. 그밖에 달리 개방된 사회적 위기 속에서의 여러 가지 가능성들 중에서 특정 가능성들만이 실현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는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혁명 이데올로기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한번 따져 보기로 하자.


<자코뱅주의>나 <마르크스-레닌주의> 등과 같은 혁명이데올로기들은 확실히 사회혁명적 상황하에서 국가권력의 기초를 세워 정착시키려는 정치지도층들을 결속시키는 기능을 하는 듯하다. 또한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들을 따름으로써 혁명정치가들은 적절한 방식으로 투쟁할 수 있게 되었다. [···] <자코뱅주의>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같은 혁명 이데올로기가, 그것을 취한 정치엘리트들이 사회혁명 상황 속에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도록 도울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이 이데올로기들은 출신배경이 아주 다른 사람들을 <동료적 시민>이나 <동지>로서 함께 뭉치고 고무할 수 있었던 (그들의 역사적이고 민족적 맥락 속에서는) 보편적 교리였다. [···] 따라서 혁명 이데올로기들은 국가권력을 재건하고 이를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전면에 내세워졌다.


둘째로, 이 이데올로기들로 혁명엘리트는 대중을 정치적 투쟁과 행동에 가담시키고 전향시켰다. 이러한 방침은 비록 많은 사람들을 정말 전향시키지는 못했을지라도 적어도 자코뱅당과 볼세비키당, 중국공산당이 반혁명분자들에 대한 정치군사투쟁을 벌이는 데 중요한 보조역할을 했다. 그런데 반혁명분자들은 이념적, 물질적 이해타산을 함으로써 대중의 자발성을 기대할 수도 도움을 얻을 수도 없었다.


세 번째는, <자코뱅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둘 다 세속화된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이를 믿는 사람들에게 지상에서의 궁극적인 정치적 목표-‘일반의사’의 구현이나 ‘계급없는 사회’로의 진보 등과 같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을 써도 좋다는 것을 정당화해주었다. 그리고 비트너(Egon Bittner)의 견해처럼 만일 전체주의적 이념들이 집단 내에서 유일한 신앙으로 떠받들리게 되면, 특정한 성격의 조직장치를 세우는 일이 절실히 요구되기 십상이다. 특정한 상징이나 지도자들을 정점으로 한 집단적 위계적 권위질서에 맞춰 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것을 꾀하는 통제장치가 이에 속할 것이다. 혁명으로 인한 ‘내란’의 특징인 끝없는 정치투쟁 과정에서는 그런 장치가 소수의 무장세력에게 큰 이점을 줄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혁명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민중은, 이 세 나라의 대규모 사회혁명에서 의심할 나위 없이 필수적인 요소들이었다. 그렇지만 이에 더하여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 이데올로기의 구체적 내용이 혁명의 결과나 혹은 혁명을 정착시킨 국가조직을 건설했던 혁명가들의행위와 꼭 맞아 떨어진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혁명 이데올로기를 혁명가들의 행위와 혁명의 결과에 대한 청사진으로 보는 어떠한 논리도, 프랑스, 러시아, 중국에서 전개된 사회혁명적 상황 속에서 <자코뱅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실제로 어떻게 발전했고 작용해나갔는가에 대해서 역사적 증거에 입각한 정확한 진상을 밝혀주지 못했다.


자코뱅 이데올로기는 단지 1년가량만 혁명 프랑스를 장악할 수 있었고, “덕의 통치”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 대신 자코뱅당은 자신들을 사로 잡았던 혁명의 성공에 필수적이었던, 보다 세속적인 과업-국가건설과 혁명의 수호-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러시아의 볼세비키당은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지리멸렬된 농촌지역에서 마르크스사회주의의 명목하에 국가권력을 장악해야할 긴박성에 쫓겼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직접적으로 모순이 되는 과업과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자각했다. 결국 스탈린주의의 승리는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이상을 왜곡시켰고 전복시켰으며 관료주의와 상비군제도를 일소하려던 1917년의 레닌의 구상과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고유한 방식대로 도시프롤레타리아의 봉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이것이 실패로 돌아간 뒤, 일이 여의치 않게 되자, 농촌의 군대 주둔지역에 기반을 둔 새롭고도 실천가능한 농민지향운동이 이미 일어난 일을 정당화하고 명문화하기위해 <毛>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뒤로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실천적 과정에서 기본적인 이론에서 벗어났을 경우 정당화가 필요하다면 언제나 이것에 보조이론이 덧붙여졌다.


간단히 말해, 혁명상황에서의 이념지향적 지도층은 기존의 구조적 상황에 의해 크제 제약을 받으며 신속히 변화하는 혁명의 흐름으로 흑심한 곤란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아주 다른 과업을 성취하거나 그들이 원래부터 (아마 그때 이래로 계속된) 이데올로기적으로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새로운 체제의 강화를 촉진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였었다. 일단 우리가 하나의 분명한 사실을 깨닫고 이를 검토해 봤다면, 이런 일은 별로 놀랄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사실이란, 만일 의지가 강한 혁명가가 마음먹기만 한다면 일시에 모든 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역사의 극한적인 상황이 혁명적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한지 이유로서, 혁명적 상황은 원래 어떤 환경하에서, 어떤 구체제하에서 그것이 발생했는가에 따라 특수한 형태를 가지며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의 특수한 연쇄를 창조한다. 더 나아가 혁명적 상황이 주어진 사회 내에서 무엇인가를 가능하게 하는 매개변수들을 신속히 변화시키는 계급투쟁과 제도의 붕괴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항시 많은 조건들-특히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구체제로부터 이월된다. 이런 조건들 역시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특수한 연쇄를 창조하며 혁명가들은 새로운 체제를 정착시키려고 할 때, 그 한계 내에서 움직여야만 한다. 그리고 모든 혁명적 변혁이 발생하는 주어진 세계사적, 국제적 배경 역시 같은 작용을 한다. [···] 따라서 나는 이데올로기적 세계관이나 강령의 시각에서 혁명의 진전을 설명하고 해석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혁명적 위기의 형태와 구체제의 유산들이 국가를 건설하려는 혁명지도층의 노력과 성취를 어떻게 구체화시켰고, 또 어떻게 제약했는가에 중점을 둘 작정이다.

 

스카치폴의 국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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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 ⓕ | 2007/06/24 (일)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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