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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4/24
    독립신문-데일리안 ‘대통령 저격 만평’ 놓고 옥신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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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데일리안 ‘대통령 저격 만평’ 놓고 옥신각신

베리타스의 힘? 이 인간 진짜 보수인가? 그럴리가 있나? 대한민국에 보수가 과연 있나?

대한민국 보수 자처하는 인간들은 정신적 조국인 미국 가서도 그 알량한 affirmative action, 완전히 철폐하자고 설래바리치고 다닐 인간들이다. 대한민국 보수?의 지향 미국은 1950년대 초코렛 얻어먹던 당시의 미국이다. 거기서 정체됐다. 우리는 그래도 외형상politically correctness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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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데일리안 ‘대통령 저격 만평’ 놓고 옥신각신
“저급하다, 사과하라”에 사과그림 게재 조롱…보수매체 시장 갈등 시각도
2005-04-24 16:50 김현 (guist10@dailyseop.com)기자
노무현 대통령 저격 패러디에 대한 사과 문제를 두고 보수 인터넷 매체인 독립신문과 데일리안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일고 있다.

데일리안의 한 논객이 23일 컬럼에서 “독립신문이 패러디 사건에 대해 사과하라”고 주장하자 독립신문이 ‘고결한 중도보수께 드린다’며 과일 사과 한 알을 내밀며 비꼰 것이다.

컬럼과 사진으로 오간 두 사이트의 공방을 지켜 본 네티즌들의 의견은 보수매체 시장경쟁 공방으로 이어지고 있다.

갈등의 발단은 데일리안 사이트에서 ‘베리타스의 힘’이라는 필명으로 고정칼럼을 쓰고 있는 논객의 칼럼에서 시작됐다.

데일리안 “언론 자유 보장받는 한 페어플레이 해야”

그는 히틀러 암살을 기도하다 사형당한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의 예를 들며 “독립신문의 노 대통령 저격 패러디는 얼핏 ‘본 회퍼’의 히틀러 암살 기도를 연상케 하며 동시에 노 대통령에 대한 독립신문의 증오와 적개심의 단면을 보여 준다”며 “문제는 노 대통령이 히틀러와 비견될 만큼 악한 사람이냐는 것인데 독립신문은 ‘그렇다!’ 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필자가 볼 때 아직은 속단”이라고 말했다.

▲ 독립신문에 게재된 ‘사과’ 만평.  
그는 또 “보수우익은 노 대통령의 국가경영 방식에 반대하여 그를 격렬하게 비판하며, 그의 경박하고 방정맞은 통치스타일을 비웃고 혐오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인류 공공의 적’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며 “노무현의 외교기조와 대북관이 매우 위험스럽게 보이며, 그래서 이 나라가 혹시 김정일의 적화야욕에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감을 갖고 있지만 그게 너무 지나치면 자칫 강박증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패러디의 자유를 허용하는 노무현 정부와 페어플레이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물리적으로 방해하거나 봉쇄하지 않으며 이 나라는 아직까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며 “따라서 우리는 노 정권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공격할 수 있지만 모함이나 저주, 직설적인 인신공격은 ‘더티 플레이’이므로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은 민주적인 방식에 의하여 정권을 잡았고 허락된 야망을 실현하고 있으며 우리가 볼 때는 매우 못마땅하고 위험해 보이지만 국민들이 그것을 허용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는 또 “그런 의미에서 독립신문의 노무현 ´저격 패러디´는 유감스런 해프닝이며 행동이 수반된 것은 아니지만 선동적 요소가 엿보인다”며 “패러디가 일부 보수우익들에게는 통쾌감을 주었을지 모르나 국민 대다수에게 혐오감을 주었으며 자칫 극우집단의 히스테리로 보여질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보수우익 전체가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고 주장했다.

독립신문 “고결한 중도보수께 사과 (한 알) 드립니다”

컬럼의 결론은 독립신문이 직접 사과를 하라는 것.

그는 KBS 정연주 사장이 박근혜 대표의 ‘알몸 패러디’를 사과한 것을 예로 들면서 “만약 좌파 찌라시들이 박근혜에 대한 ´저격 패러디´를 했다면 독립신문이 제일 앞장서서 비난했을 것”이라고 말한 뒤 “솔직히 이번 ‘저격 패러디’는 ‘알몸 패러디’보다 훨씬 더 강도가 심했으며 독립신문의 신혜식은 이번에 물의를 빚은 것에 대하여 정중하게 사과하라”고 주장했다.

독립신문은 여기에 과일 사과를 내미는 만평 사진으로 한껏 비꼰 사과의 뜻을 전달했다.

이 신문은 ‘스나이퍼 패러디 사과드립니다’ 라는 제목의 만평을 실어 “데일리안 베리타스님께 드립니다. 고결하신 중도보수님께 심려를 끼쳐...”라며 사과를 내밀면서 “세파에 거칠어진 두 손으로 드립니다”라고 밝혔다.

독립신문은 또 게시판에 이같은 데일리안의 칼럼을 올리면서 독자들의 의견을 물었다.

네티즌들은 “데일리안은 독립신문 패러디에 대해 그동안 침묵하더니 사건이 마무리 단계에 드러 가니깐 사과하라고 하네”(아이디 저격) “경찰이 수사할때 그런글을 올리면 좋았을거 같았는데 그때는 침묵하더니 데일리안이 그런 컬럼을 오늘 올린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음..)는 글을 올렸다.

두 보수 인터넷 매체의 분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로 나왔다.

‘국민’ 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은 “데일리안과 독립신문은 같은 편에 서 있는 우파 신문으로 알고 있는데 이 무슨 망발을 하고 있는 겁니까. 제가 볼 때 반성해야 할 측은 데일리안”이라고 말했고 아이디 ‘똥닙변소’는 독립신문을 향해 “까놓고 얘기해서 니들 스스로에겐 당장 방문자 늘어서 좋겠지만 전체 우익진영엔 엄청난 독이란거 알고 있니? 니들은 우익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폐기 되어야 할 쓰레기 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그 밖에도 “독립신문은 너희 같은 인터넷 찌라시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는 우익의 성지”(까불지마) “데일리안은 울고 싶은 독립신문의 뺨을 때린 꼴”(거북이) “독립신문 편드는 척하면서 데일리안과 독립신문을 은근히 이간시키고 있는 것 아닙니까? 요즘 노빠들이 우익들을 이간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으므로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감시원) 라는 글이 올라왔다.

보수 인터넷매체 시장 점유 갈등 드러내

이같은 두 사이트의 갈등을 촉발시킨 데일리안의 칼럼은 최근 독립신문이 자사 영향력을 홍보하는 기사를 연달아 내보낸 직후에 나온 것이어서 보수 인터넷 시장에서 경쟁을 벌이는 두 매체의 신경전이 가시화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독립신문은 21일 기사에서 한 인터넷 순위조사 사이트를 인용해 ‘독립신문의 독자가 10만명을 넘었다’고 보도했으며 다음 날 기사에서는 “이른바 ´보수´라고 불리는 자유진영 사이트들이 방문자집계순위에서 약진을 보이고 있다”면서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의 사이트와 프리존만을 언급하고 데일리안에 대한 얘기는 빼놓았다.

‘이게 뭡니까’는 “독립신문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지 않습니까. 아니면 독립신문이 랭킹이 높고 열혈 지지자가 많아서 단순한 경쟁상대로만 보입니까”라고 물은 뒤 “최근 우파사이트 순위는 거의 대부분 낮게 나오고 있는데 데일리안만 최근에 한달 사이 300등이나 오른 게 좌파들과 손잡은 건 아닌지 의심이 된다”며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네티즌은 “독립신문이 최근 랭킹과 관련, 은근히 데일리안의 신빙성을 까는 듯해서 기분이 나빠서 뒤늦게 뒷북치는 주장을 펼치는 건가요”라고 묻기도 했다.

독립신문은 지난해 초 보수 인터넷 매체의 후발주자인 데일리안의 창간 당시 ‘건전한 보수진영을 위한 새 인터넷신문의 창간’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으며 데일리안은 지난해 11월 신혜식 독립신문 대표가 국가보안법 사수 시위를 벌이다 구속됐을 당시 이 소식을 상세히 보도하는 등 업계의 우의(?)를 과시해왔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 김현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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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류)파리 68혁명(네이버 즐 펌)

 

 

 

 

파리의 68혁명(1968년 5월혁명)

 

 

68혁명의 발생배경


지난날의 세대간의 갈등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반항으로 상정되었으나 1960년대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영역에 걸치 기성세대의 모든 것에 대한 도전으로서 다시 말해 반체제로서 나타났다.

68년을 기점을 세계적으로 저항운동이 집중된 이유는 동서세계의 냉전으로 인한 획일적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대가, 미국의 베트남 침략이나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의해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전후의 경제번영과 자유를 누리며 대학에 진학한 젊은이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대학교육체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교육제도에서의 지식교수는 억압적 성격을 띄고 있었고 그 결과 지식의 수익자는 노동자원으로서 사회속에 통합되거나 혹은 경제 사회체제의 결합에 봉사하는 기술산업요원으로 편입되기 마련이라고 생각한 학생들은 대학이 지닌 모순이 산업사회의 구조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1) 대학 내의 문제



당시 프랑스 대학이 과도한 양적인 팽창으로 인한 문제를스스로 해결할 수 없게 되자 그 부작용은 학생들에 의해 폭발하게 된다. 68혁명 당시의 학생들은 전후 베이비붐 세대들로서 196년 23만명이던 것이 68년이 되면 2배 이상 증가하여 60만명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대학당국의 시설과 교수법에서의 대처는 미흡했다. 초대형 강의, 비좁은 건물, 구태의연한 강의내용과 평가제도, 암기와 주입식에 의존하는 전통적 교수법, 기숙사 시설 대학교원수의 절대부족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와 함께 졸업 후 사회 진출에 대한 불안감도 크게 작용했다. 학생수의 급격한 증대는 많은 졸업생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곧 고학력 실업자가 양산되는 요인이 되었다.


2) 드골의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드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구원자였고 그후 프랑스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며 미제국주의의 허구를 지적하고 나토를 탈퇴하는 등 대미종속을 탈피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것도 사실이지만 60년대말 사회의 다양한 욕구와 변화를 충족시키는 정책을 펴내지 못하고 권위주의에 의존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을 펴는 부작용을 낳았다.


3) 2차대전 후의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사회구조적 변동과 소비사회의 도래


무제한적인 소비와 이윤을 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거부반응을 꼽을 수 있다. 혁명 와중에 나타난 문구들을 보면 여성에 대한 억압과 인종차별 등을 고발하는 내용이 많으며 강대국 중심의 패권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역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개과정


당시 프랑스에서는 68년까지의 10년동안 인문과학 계열의 대학생은 3.5배, 사회과학 계열의 대학생은 4배 증가한 상태였으나 이들을 수용하기에는 대학과 사회 모두 역부족이었다. 대학의 면적은 같은 기간 동안 겨우 2배 증가했을 뿐이며 불투명한 진로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또 전쟁과 공황을 겪지 않은 세대들은 부모 세대의 간섭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대학가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이러한 불만으로 고조되고 있었다.

미국의 베트남 공습에 항의하기 위해 American Express Bank를 습겨하다 체포된 급진파 학생 6명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3월 22일 다니엘 콩방디를 비롯한 8명의 학생이 낭태르 대학 학부장의 집무실을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점거 6일만에 경찰에 의해 캠퍼스는 봉쇄되고 강사들과 학생들은 격렬한 토론을 벌인다. 낭테르 대학 폐쇄에 반발한 학생들은 5월 3일 소르본에서 시위를 계속한다 10일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대치하다 경찰과 유혈충돌이 일어난다 .그 이후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학생들보다 2주정도 늦은 13일 총파업으로 노동자들이 시위에 적극 가담하고 공장을 점거하고 연속적으로 총파업에 돌입해 천만명의 노동자가 파업하는 등 사회가 마비되는 상황에 이른다. 27일 CGT등에서는 임금의 10%인상등을 담고 있는 '그르넬 협약'을 맺지만 그 후에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계속되다 29일 드골실종사건을 계기로 드골지지시위가 있다. 이후 6월 5일 시위는 막을 내리고 드골정권은 6월에 총선을 실시하여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이듬해 국민투표에서 진 드골은 대통령을 사임한다.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는 68년의 상황에서 반자본의 기치 아래 학생과 노동자가 하나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학생과 청년 노동자는 프랑스 역사에서 처음으로 노학연대를 실현해 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학생들과 청년 노동자들이 정치적 좌파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로 통합되기 이전의 학생들은 객관적 거리에서 현상을 바라볼 수 있었고 따라서 이들은 관료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자본주의의 병폐를 간파하고 이와의 단절을 요구하고 있었다. 청년노동자들 역시 노조지도부를 불신하고 있었고 경제주의적인 타성에만 젖어있는 기성노동자들과 구분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노조 지도부는 정부와의 협상을 위해 5월 22일부터 학생과의 연대를 단절한다. 5월 27일 '그르넬 협약'체결을 공포한 후 연대는 와해된다. 하지만 '그르넬 협약'은 일선 노동자들로부터 거부당하고 파업은 계속된다.


특징


5월 혁명의 특징은 일상 생활에서의 문화적 저항과 정치적 저항이 융해되어 표출되었다는 데에 있다.

69의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드골의 경제개발정책과 식민지 정책에 반대했다. 즉 소회된 노동의 거부와 제 3세계 수탈의 거부가 68을 이은 두 개의 이념이었다. 68혁명은 자본주의적 노동을 사회주의적 노동을 반 소외의 관점에서 동시에 문제삼았던 인류역사상 최초의 투쟁이었다. 자본주의 경제가 만들어낸 발전, 그 경제적 진보에 대한 단호한 거부와 소외되지 않은 삶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표현되어 있다.

이런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혁명은 노동에서 출발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햐려 했던 전통적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는 달리 일상의 삶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통제의 권력에 지나지않는 국가권력 장악을 거부하고 삶의 복구와 확장, 즉 더 나은 삶을 추구했다.

즉 물질적 행복의 추구를 넘어서 자아의 실현이라는 질적 가치를 추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삶의 양식과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또 5월 혁명은 프랑스사회의 전통적인 권위주의적 인간관계를 보다 평등한 인간관계로 바꾸어 놓는 계기로 작용했다. 일상수준에서의 관습과 인습의 엄청난 변화가 이를 말해준다. 68 이후 이성간의 동거와 피임기구의 판매가 자유롭게 되고 사제간의 경어 사용이 폐지된다.

"혁명을 생각할때면 섹스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라는 슬로건에서는 혁명가들이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무엇을 성취하고 싶어하는가가 아니라 혁명가들이 무엇을 하고 그 일을 할 때 어떻게 느끼는 가를 찾아볼 수 있다. 개인의 해방과 사회적 해방이 병행되었다.

68년은 산업사회의 계급갈등에 기반한 노동운동과 후기산업사회의 탈계급적인 새로운 사회운동이 혼재하여 나타났다. 전통적 노동운동을 넘어 환경운동, 여성운동, 정보운동, 반핵운동 등의 다양한 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지배계급은 공산당과의 협력을 통해 68을 선거로 봉합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개혁조치들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업의 감축, 노동자의 경영참가에 따른 공장의 공동관리, 학생 참여에 따른 학교의 공동관리 등이 그것이다.

68혁명의 모두에게 발언권이 주어지고 모두가 토론을 했다. 60년대를 통해 절제와 억압에 기초를 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저항하여 육체적 쾌락과 성의 자유가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며 영화와 출판물에 있어서도 성과 폭력이 일반화되었으며 마약과 환각제가 공공연하게 되었다. 이는 전통적 문화와 공리주의적 가치관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즉 혁명세대는 성의 자유와 함께 이를 공개적인 담론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기존세대의 가치관이 가지는 허구성과 위선을 폭로할 수 있었다. 이전에 금지되었던 것을 행하는 것 그 자체가 기존 가치관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68혁명으로 인해 섹스, 마약, 동성애 같은 모든 금지가 풀리게 되었다. 결국 68세대는 개인적 해방과 함께 사회적 해방을 완성했다. 68혁명은 프랑스 사회에 새로운 가치, 새로운 고민,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삶의 방식을 부여했다. 공장에서든 정치에서든 교육에서든 방송에서든 수직적 커뮤니케이션은 무너지고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대화에 근거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양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68혁명 이후 프랑스에서는 여성의 지위상승과 여성운동이 괄목할만한 발전을 보인다. 여성운동가들의 저서가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이후 낙태와 피임을 합법화시키는데에 또 의료보험의 대상이 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5월에 맛본 자유의 장기적 파급효과를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들은 그 폭발을 간단히 잊지도 않았을 것이고, 당시에 드러났던 사회적 모순들이 자진해서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그들은 순종시키기 위한 제약과 사회적 지서를 강력히 거부함으로써 자신들과 전세계 사람들에게 인류의 존엄을 확인시켰다.

68혁명은 상상할수조차 없었던 산업화된 국가에서의 혁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권위와 명성의 상징이었던 드골을 1969년 4월 27일 은퇴시켰다. 또한 권력구조를 능률화하고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참여의 외관을 부여하는 일군의 개혁이 도입되었으며 종국에는 1981년 사회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68혁명은 대학교육의 대중화, 성의 혁명을 통한 여권의 성장, 엘리트 문화의 대중화라는 성과를 얻었다.



68혁명의 정치적 의미


1)애국주의와 국제주의


5월 투쟁의 목표로 했던 비전은 어떠한 국가경계도 인정하지 않았다. "국경을 타도하라"는 구호는 대중적 감정을 표현했다. 전단과 포스터들을 통해 쁘띠적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조직적 켐페인이 수행되었다. 이 켐페인은 즉각적으로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던 세계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5월 사태에 참가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학생폭동이 강화됨에 따라 파리의 외국인 학생 기숙사는 가장 급진적인 구성원들에 의해 점거되었다. 기숙사들의 민주적 재조직이 요구되었고 고향과 프랑스내에서 모두 해방운동을 지원해 줄 것이 요청되었다.

2개국어로 된 포스터들은 아랍인과 유대인같이 겉으로 보기에 적대적인 집단들이 "당신들의 공동의 적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통적으로 프랑스 노동자들의 일자이레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고 인종주의자의 공격을 빈번히 받았던 프랑스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6월의 기간동안 동지로 받아들여졌다. 총파업은 분열된 노동자들을 변화시켰다 .경영자 측이 이민자들을 구사대로 동원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절대다수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참여했다.

저항자들의 국제주의와는 달리 정부는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파리에 오고자 시도했던 많은 젊은이들에 대해 프랑스 국경을 봉쇄했다. 국외추방은 프랑스에서 외국활동가들을 제거하는데 이용되었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국경철폐를 위한 행동위원회가 파리에서 건설되어 유럽인들이 혁명을 대륙전체로 확산시킬 것을 촉구했다. 행동에 대한 그들의 요구는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반향이 있었다.


2) 권위주의와 자주관리


총파업의 참여자들 중에는 많은 수의 전문가들, 기술자들, 생산라인 밖의 사무실 요원과 서비스 요원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단결된 노동계급은 이전까지의 분절되고 부분적이었던 생산관을 통합할 수 있었다. 지식의 구획과 그에 상응하는 특권화된 전문가와 경영자에 대한 필요는 희망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공공연히 논박되었다.

1968년 프랑스 노동자들은 단순히 자본주의 파이의 더 많은 몫을 분배받기 위해 파업을 계속한 것은 아니었다. 그르넬협약에 대한 그들의 압도적 거부, 지주관리에 대한 많은 제안들, 소유권 폐지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들이 그것이다 총파업기간중 많은 공장들을 점거했으며 경영진 없이 노동자들의 자주관리로 제품을 생산하기도 했다. 이는 단순히 강자에 대한 복종으로 더 많은 재화를 얻고자 하는 대신 그들의 직무와 삶에 대한 스스로의 통제를 원하는 프랑스 노동자의 깊은 열망을 나타내준다. 자주관리는 프랑스의 집중화 권위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자율과 직접 참여에 기반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공해 주었다. 자주관리는 소비사회의 수동성과는 대조적으로 능동적 참여를 요구했다. 자주관리는 지식의 구획과는 대조적으로 집단구성과 개인적 기술들의 공유를 요구했다. 그르넬 협약을 거부하고 파업을 계속한 기층노동자들은 좀더 많은 임금이나 좀 더 좋은 작업조건이 아니라 더 이상 복종적인 도구가 되지 않겠다는 동기에서 파업을 지속하였다. 즉 이들은 생산현장에서의 권력관계 재편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리하여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이 자주관리를 통해 자율적으로 공장을 운영해갔다. 이런 자주관리는 대학에서 기원한 것으로 대학의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들은 이른바 '직접민주주의'와 '참여하는 데모크라시'를 내세워 대학관리위원회를 조직하여 스스로 대학의 결정권을 손에 넣으려고 한다.



6월 혁명의 세계사적 의의


프랑스 혁명은 꼬뮌을 추구한 프롤레타리아의 패배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이 패배는 이후의 역사에서 보면 계급간의 싸움에 있어 서전에 불과하다. 5월의 노동자투쟁은 학생의 카드제시로 시작하여 드골의 또다른 카드제시로 끝났다. 그러나 5월혁명에서 승리한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전후 제국주의의 경제적 세계체제의 막바지에서 프랑스자본주의가 부딪친 문제를 조금도 해결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것을 둘러 싼 대립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했다고 보기 힘들게 한다.

5월혁명은 선진자본주의국 내부의 진정한 투쟁이 공장점거반란으로 들고 일어선 노동자대중과 지배계급·국가권력사이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대중 내부의 혁명파와 질서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예리하게 폭로했다. 즉 노동자에게 자기 자신들 속의 질서파, 조합적·회의적 개량파를 무력화하지 않고서는 지배계급·국가권력에게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우쳐 주었다.

또하나 혁명의 전위에게 요구되는 것은 부르조아적 노동자당과 싸울수 있어야 하며 조합주의적인 켐페인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


일반적 의미에서의 혁명 즉 사회변혁적이고 또 저이체제의 변화를 가져오는 혁명으로서 68혁명은 결코 성공한 혁명이라 부를 수 없다. 아니 처음부터 68혁명은 그렇지 않은 부분이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68은 분명 그 이전의 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를 단절시키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성문화와 가족제도 대중문화의 측면에서 변화의 모습들을 더욱 많이, 그리고 선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68혁명의 성격중 일부이다.

그러나 68을 재평가함에 있어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은 '계급성'을 끊임없이 확인시켰던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1848년의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부르주아 혁명 이래로 프랑스에 있어서 120년만에 노동자중심성, 반자본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던 명백히 계급적인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혹자들이 지나치게 68의 일상성에 침잠한 나머지 보고 있지 못하는 부분이 아니었는가 한다.

68세대들이 이제 정권을 잡았다고 한다. 68혁명을 주도했던 세대. 그러나 사실 정권을 잡은 68세대들은 이미 그 때의 주역들과는 많이 멀어져 제도권으로 편입해간 인물들이 아닌가.

우리가 볼 것은 지금의 그 사람들이 아니라 그때 그사람들이 외쳤던 말들을 현재적으로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하는 점에 있다

자유, 평등, 박애를 외쳤던 부르주아 혁명은 68년에 재전위되면서 프랑스를 주목케 했다. 다시한번 대혁명의 정신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지금. 다시 우리는 '실업자 운동'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 본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바로 이곳에서 혁명의 꿈은 아직 접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까치, 1997.

요미우리 신문사,『20세기의 드라마 3』,새로운 사람들.

월러스틴, 『반체제운동』, 창작과 비평사

편집부 편, 『프랑스 5월 혁명』, 백산서당.

"1968: 거부된 과거, 감추어진 미래", 신진욱 외, 『학회평론』11호, 1995.

"68혁명 이후 한세대", 카피레프트 모임, 『읽을 거리』2호, 1998.

노동자연대 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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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여고생 충격 유머

전에 딴지일보ddanzi.com에서 본 유머인데 지금 찾을 수가 없다. 한 순진한 여고생이 충격먹는 내용인데 기억을 복원해보면 다음과 같다(나도 어릴 때 이런 경험이 있었던 것 같다. 고딩 때는 아니고...).

 

여학생 Q: 상담 선생님, 저는 ㅎㅎ여고 2학년 학생입니다. 얼마전에 친구 집에 가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포르노라는 것을 봤어요. 너무 충격이 커서 지금도 밥도 잘 못먹고 있어요. 짐승같은 그 모습이 사람이 너무 불결한 것 같아요. 그때 그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막 매스껍고 그래요.

우리 부모님 앞에서도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우리 엄마 아빠가 그런 짓을 그런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엄마 아빠도 이상하게 보이고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어떻하죠, 선생님?

 

 

상담선생님 A: 학생, 걱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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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엄마랑은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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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매일 블로그에 올린다.

머리 속 생각 좀 정리 좀 하면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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