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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집권땐 나라 망한다?

한나라 집권땐 나라 망한다?
과학적으로 한번 따져봅시다
[기획리포트] 과학과 정치의 닮은 점은 '관찰의 이론의존성'
텍스트만보기   이종필(ststnight) 기자   
 
 
과학 발전에 있어서 실험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은 보통 사람들에게 매우 널리 퍼져있다.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든지, 무슨 연구소에서 어떤 이론을 실험적으로 검증했다든지 하는 얘기를 우리는 심심찮게 듣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아무런 이론적 편견도 없이 설계된 객관적인 실험의 결과로부터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자연법칙을 이론적으로 구성해 낸다'는 상식을 받아들인다.

나 또한 대학교 1학년 때 물리실험시간을 떠올려 보면, 그리고 그때 과학에 대해 가졌던 심상을 생각해 보면 이 생각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자연법칙은 객관적 실험을 거친 결과다?

예컨대 평면대 위의 수레에 줄을 연결해서 도르래를 통해 수직으로 늘어뜨린 다음 그 끝에 다양한 질량의 추를 연결해서 평면대 위의 수레의 가속운동을 관찰하는 실험이 있다.

수레를 가속시키는 추의 질량 변화와 수레 속도의 변화(즉 단위 시간당 이동 거리의 변화)를 비교해서 우리는 F=ma(F:힘, m:질량, a:가속도)라는 뉴턴의 운동방정식을 실험적으로 확인한다. 나는 오랜 시간 운동량(p)의 질량과 속도(v)에 대한 관계(p=mv)나 에너지(E)의 관계(E=0.5mv²)도 이런 방식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오해'했었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중고등학교 물리수업도 아직 이 틀을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상식'은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물론, 자연현상에 대한 면밀하고도 비편향적인 관찰로부터 직접적으로 어떤 법칙을 이끌어 낸 경우도 있다. 티코 브라헤가 남긴 방대한 천문학적 자료로부터 그의 제자 케플러가 그 유명한 자신의 3가지 법칙들을 유도한 경우라든지, 막스 플랑크가 1901년 흑체복사 곡선을 빛의 양자화 가설에 입각해서 완벽하게 설명한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케플러마저도 자신의 법칙들을 구축할 때 플라톤의 정다면체 '이론'에 기대고 있고, 플랑크가 촉발시킨 양자역학은 이른바 '코펜하겐 해석'으로 불리는 몇 가지 가설하에 구축되어 있다. 뉴턴의 운동방정식 'F=ma'는 떨어지는 사과와는 무관하게 힘(Force)에 대한 뉴턴역학의 정의에 가깝다.

실험 결과가 이론의 존폐를 결정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론이 실험의 구성과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이론적인 배경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어떤 실험을 구상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실험이란 어느 이론을 물질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이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새로운 현상이 발견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처음부터 무작정 뭔가 새로운 현상을 보려고 시작하는 실험은 없다. 그 실험의 결과 또한 이론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론과 실험의 이런 관계는 핸슨의 '관찰의 이론의존성(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이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이론이 실험결과 해석을 바꾼다

보통 사람들(혹은 잘 모르는 과학자들)은 생소할지 모르지만 과학에서 이론적 과정이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예는 무척 많다. (관찰의 이론의존성을 설명하면서 몇 가지 '관찰적 사실'만을 주된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그러나 이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에 대한 첫 실험적 검증은 1919년 영국의 천문학자 에딩턴에 의한 것이었다. 일반상대론에 의하면, 질량이나 에너지의 존재가 그 주변 공간을 휘어지게 한다. 그 주변을 지나는 다른 물체(혹은 빛마저도)는 이 휘어진 공간을 따라 운동하게 된다. 이는 마치 침대 위에 무거운 볼링공을 올려놓으면 그 일대가 움푹 패는 것과 같다. 주변에 골프공이라도 있다면 이 패인(즉 휘어진) 면을 따라 볼링공 쪽으로 굴러갈 것이 분명하다.

이런 효과는 물론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극히 미미하다. 과학자들은 멀리 떨어진 별에서 나온 빛이 지구에 이를 때 질량이 아주 큰 태양 주변을 지나면서 그 경로가 휘어질 것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그런데 평상시에는 태양의 빛이 워낙 강렬해서 멀리서 오는 희미한 별빛을 제대로 관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달이 태양을 가리는 일식을 기다려 관측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에딩턴은 일반상대론의 예측과 어긋나는 사진 검판을 일부러 제외했다는 의혹을 사게 되었다. 에딩턴은 망원경의 초점 등의 문제 때문에 제외했다고 해명했지만 적지 않은 과학자들은 에딩턴의 실험 결과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이후에 실시된 일식 실험에서도 그리 만족할만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이는 노벨상 위원회에서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안기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였다.(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은 것은 1925년으로, 주로 광전효과-금속에 빛을 쬐면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들이 일반상대론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잇따른 실험에서 만족할만한 결과가 없었음에도 많은 과학자들은 오히려 일반상대론을 지지했다. 그 이유는 일반상대론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인 매력 때문이었다.

패러다임 보호 본능

 
▲ 에딩턴의 실험
ⓒ 이종필
 
실험하는 사람들이 기존에 알려진 결과나 상식과 동떨어진 결과를 얻게 되면 처음부터 새로운 뭔가를 발견했다고 여기기보다는 실험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오차들을 우선적으로 점검하게 된다. 기존 패러다임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보정의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친 후에도 여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학계의 수수께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애초의 이상한 결과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각종 제한조건들을 점검하는 것은 무슨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는 분명히 데이터 조작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 실험에서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난다. 규모가 꽤 큰 실험그룹에서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이 실험그룹에서 관심 있었던 물리량은 어떤 비율에 대한 사인(sin)함수 값으로 표현된다. 중고등학교 때 다들 배웠겠지만, 사인함수는 기본적으로 직각삼각형의 빗변에 대한 다른 변의 비율로 정의되는 양이다. 따라서 이 값은 결코 1을 넘을 수 없다.

그런데 처음 데이터를 열고 분석을 해 보니 그 결과가 1을 약간 넘는 것으로 나왔다고 한다. 사인함수 값이 1이 넘는다고 나왔으니 그 결과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심리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내부적으로 격론이 벌어졌고 다시 다양한 제한조건들을 계속해서 점검하고 오차를 줄이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 최종적으로 0.99라는 결과로 공식발표하게 된다.

이처럼 아무리 새로운 결과가 실험에서 관측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새로운 자연현상이나 새로운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이 알고 있는 혹은 몸담고 있는 기존의 이론적인 체계 내에서 그 결과를 해석하려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때까지 일종의 유예기간이 필요하다.

어느 분야보다 합리적이며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과학에서도 자연세계에 대한 관찰과 실험 과정에서 일종의 '선입견'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면, 그보다 더 애매한 온갖 사회 영역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하다고 예상할 수 있다. 최근의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면 이 점이 명확해진다.

망국론 부추기는 정치에 객관적 관찰 가능한가

 
▲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은 '무능한 좌파정권이 나라를 망친다'는 논리 펴고 있고, 노무현 대통령은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끔찍하다고 말하고 있다. 두 주장 모두 합리적인 관측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참여정부 이후 지난 5년은 한마디로 '무능한 좌파정권 대 꼴통수구보수'의 격돌로 요약된다. 한편에서는 정권 초기부터 이른바 <조중동>이 신정부를 '좌파=빨갱이=무능'으로 몰아붙였다. 많은 사람들은 언론보도나 그 주장들이 모두 객관적인 사실취재와 전문가들의 합리적인 분석 결과라고 쉬 믿는다.

그러나 과학 활동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경우는 드물다. 소재·사진·취재원·전문가, 이 모두는 편집부의 '이론'이나 선험적인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성'된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옳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참여정부 들어서 경제가 나빠지고 있다는 기사를 쓰고 싶으면 재래시장을 찾으면 된다. 이곳 경기가 안 좋은 주된 원인이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에 의한 것인지 인근 대형할인점에 의한 것인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무능한 좌파정권이 나라를 망친다'는 자신의 이론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나라가 망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나라가 망해가는 데이터 수집에 열을 올렸다. 2003~2004년에 걸친 대대적인 경제위기론이 그러했고 종부세 '세금폭탄'도 여기 해당한다.

다른 한편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주장이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혹은 전쟁난다)'는 것이다. 손학규 전 지사가 탈당하긴 했지만, 이른바 빅2인 이명박-박근혜 후보는 많은 국민들의 예상을 뒤엎고 당내 경선에 모두 참여했다. 어찌되었든 이것은 우리나라 정당정치가 최소한의 상식과 룰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비록 자신과 정견이 다르지만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나라가 망하지 않을 만큼 그 사회가 성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정말 그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 자신의 그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차기 정부에서 지금처럼 또 무리하게 '나라 망해가는 관측'에만 열을 올릴 것이 분명하다.

관찰의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과학자들은 어지간한 이론이나 주장은 잘 안 믿는다. 또한 실험 뿐만 아니라 이론 그 자체의 내적 정합성을 따지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들인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론이나 실험도 쉽사리 거부하지 않는다. 그 결과 과학에서는 온갖 종류의 다양한 이론과 실험결과들이 대체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과학의 힘이다.

세상만사 모든 일을 과학 하듯이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다양한 가치판단이 민주적이고 평화롭게 공존하고 또 공유될 수 있다면 아마도 그런 사회가 열린 사회이고 선진화된 나라가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모두가 이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관찰의 한계를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오마이뉴스 기획취재기자단 기사입니다. 이종필 기자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연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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