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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에 침 뱉는 기분 아시나요?

 

 

 

내 얼굴에 침 뱉는 기분 아시나요?
우리는 '조승희 사건'을 이해합니다"
[조승희 그 후 ① - 르포] '국경 없는 마을' 경기 안산 원곡동의 '코시안' 아이들
텍스트만보기   장윤선(sunnijang) 기자   
 
 
국내 체류 외국인 100만 시대. 2000년 이후 급격히 증가한 이주 외국인이 한국 사회의 주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럼에도 이주민을 위한 대책은 요원하다. 정부도 '버지니아텍 총기난사사건' 이후 국내 이주민을 위한 다양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나섰다. '한국판 조승희 사건'을 우려한 탓일까.

<오마이뉴스>는 지난 16일 발생한 총기사건 이후 한국 사회가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할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우리 안의 인종주의'와 '이주민과 함께 살기 위한 정책 대안'을 다룬 기사를 내보낼 예정이다. 이 기사는 그 첫번째다.
 <편집자 주>
 
 
▲ 경기도 안산 원곡동에 있는 '코시안의 집'. 이곳은 이주노동자 자녀 보육시설이다.
ⓒ 오마이TV 문경미
 

22일 정오 지하철 4호선 안산역 광장.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동남아시아계 청춘남녀들이 삼삼오오 벤치에 앉거나 한 귀퉁이에 서서 밀어를 속삭였다. 안산역 지하차도 안에서는 중국말로 흥정하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눈에 띄었고, 길 건너편 거리에는 베트남 쌀국수집이 현지 음식점인 양 허름한 간판을 달고 있었다.

시화공단과 반월공단의 지리적 요충지인 원곡동은 어느새 '이주민들의 명동'이 돼 있었다. 원곡동은 양고기를 파는 식육점부터 죽순을 파는 야채가게, 본국으로 전화를 걸 수 있는 전화방 등이 이국적 향취를 물씬 풍기는 다문화 거리다. 한글 간판보다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 말들이 이 동네 간판의 주를 이루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대다수 한국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코시안(Korean과 Asian의 합성어), 한국에 살고 있는 아시아인들이었다.

'국경 없는 마을' 경기 안산 원곡동에 있는 '코시안의 집'은 이주노동자 자녀들을 돌봐주는 보육시설이다.

코시안의 집을 찾는 데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길을 묻는 기자의 한국말을 알아들은 한 50대 남성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동네를 몇 차례나 뱅뱅 돌았을 것이다.

코시안의 집엔 담이 없었다. 대신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꽃 사이로 난 계단 길을 올라가니, 마루에서는 많은 다국적 아시아인들이 떡과 음료수를 나눠먹고 있었다. 일자리를 찾아 이역만리 타국에 온 이주민 자녀들. 그들에게 코시안의 집은 안식처였다. 이곳에서 몇몇 아이들과 최근 벌어진 '버지니아텍(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1. 소외감 "조씨 겪었을 고통 짐작돼... 한국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조승희씨 사례는 제가 한국에서 겪은 사정과 참 비슷해서 더 안타까웠어요. 물론 제가 조씨의 범행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건지 이해됩니다. 몽골에서 온 저는 조씨처럼 한국 친구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혼자만의 세계에 빠졌죠. 내성적인 성격에다 말도 안 통해 한국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내지 못했고, 따돌림을 당하면서 증오심이나 악한 감정이 생기기도 했어요. 피부색이 같은 저도 이 정도인데, 미국에서 조씨가 겪었던 일은 더 심했겠죠."

몽골인 무탕카(21·가명·대학생)의 말이다. 조씨가 겪었을 심적 고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14살에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 온 무탕카는 "나와 조씨의 형편이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돈을 벌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한 어머니를 따라 무작정 이주한 무탕카와 세탁업을 하며 어렵사리 미국생활을 이어가는 가정에선 자란 조씨의 처지는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학교에서도 이번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에 대해 많이 토론했어요. 저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모두 다니다 말았는데,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참 어려웠기 때문이에요.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이 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무탕카의 한국살이는 낯설음의 연속이었다. 비자문제로 불법 체류했기 때문에 신분상의 불안함도 무탕카를 억누르는 요인 중 하나였다. 고된 노동에 지쳐있는 어머니도 무탕카의 속사정을 훤히 알기 어려웠다.

"가난한 외국인이 현지에서 돈 벌면서 생활하기도 빠듯하기 때문에 자식을 하나하나 챙기며 돌보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냥 학교에 잘 다니는 줄만 알지, 학교생활이 어떤지 꼼꼼히 체크하기 어렵잖아요. 어머니는 한국말에 익숙지 않고 한국 학교에 대해서도 잘 모르셨거든요. 제가 어머니에게 정확하게 자주 말씀드리지 않으면 잘 모르시죠."

무탕카는 고등학교 시절, 하루하루 못 견딜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두발자유화에 찬성한다고 하면, 일부 교사들이 '너는 자격이 없다, 신분이 불안정한데도 학교 측이 너를 받아줬으면 순순히 학교가 하자는 대로 따르라'는 식이었다. 강한 반발심이 생겼지만 속으로 누를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회의 이방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 다문화가족협회는 22일 경기도 안산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 오마이뉴스 장윤선
 
#2. 배타적 분위기 "학교서도 한국어만 써라" 강요

우친츠르(17·가명·고등학생)가 겪은 일도 비슷하다. 또래보다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일도 자존심 상하는데, 한국 학생들이 시비를 거는 것은 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고 했다.

"애들이 욕하고 놀릴 때는 같이 때리고 싶어도 못 때려요. 그냥 참고 지내요. 몽골에 대해 기분 나쁜 말을 많이 해요. 몽골에 건물이 있느냐는 식이에요. 당연히 있다고 해도 잘 믿지 않아요. 학교에서 몽골 아이들끼리 떠들면 선생님이 몽골말을 하지 말라고 해요. 우린 한국말이 서툰데도 학교에서는 한국말만 쓰라고 하죠. 그럼 답답해집니다."

일제 식민지 시절 학교에서 일본말을 강요했던 것처럼, 한국 학교에서는 한국어만 쓰라고 몽골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반발하면, 곧장 공포를 느끼게 하는 말이 날아온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초등학교 때 한 반에 외국인이 한 명 정도였어요. 같이 놀 친구가 없으니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져요. 자연스럽게 내성적인 성격이 되고. 저는 조승희씨가 한 일이 이해가 돼요. 정말 화가 날 때가 있어요. 학교에 무슨 일만 생기면 모두 제 탓을 해요. 하도 놀려서 멱살을 잡았을 뿐인데, 나이 많은 네가 동생뻘인 친구를 때렸다고 야단맞아요. 정말 억울해요. 그래도 학교에서는 제 편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가슴이 콱 막히죠."

아농드(14·가명·중학생)도 평소에 친구들에게 "몽골에서 왜 왔느냐, 한국에 너는 필요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아농드는 참고 참고 또 참다가 폭발하면 친구를 때리고 결국 투석전을 한 판 치르게 된다.

"계속 참아요. 그런데도 계속 약 올리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그땐 주먹이 날아가요. 싸워서 경찰서 가게 되면 부모님과 함께 강제추방되기 때문에 많이 참지만, 그래도 정말 화가 날 때는 물불을 가리기 힘들어요. 내 얘기를 잘 안 들어요. 내가 아무리 제대로 말을 해도 결국 화살이 저한테 돌아오고, '너희 나라로 가!'라는 말만 듣게 돼서 어느 때는 부모님께 몽골로 돌아가자고 애원해보기도 했어요."

아버지는 새벽 5시에 출근해 밤늦게 돌아오기 때문에 아농드의 고민을 들어줄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다. 어머니와 학교생활에 대해 간간이 얘기를 나누지만 솔직하게 말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불편한 학교생활을 자주 얘기하면 가족이 더 힘들어질까봐 속으로 삭이게 된다는 것이다.

#3. 피부색 차별 "까맣다고 '아프리카인'이라고 놀려"

 
▲ 뜨구네 가족. 라니는 학교에서 '인도네시아'로 불린다. 자주 들으면 기분좋은 소리는 아니다.
ⓒ 오마이뉴스 장윤선
 
조영철(11·가명·초등학생)군은 베트남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빠가 베트남에 가서 어머니와 결혼한 경우다. 그런데 친구들이 간혹 '왜 한국에 쳐들어왔느냐'고 해서 어리둥절하단다.

김석훈(14·가명·중학생)군도 학교에서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놀림을 받는다. 석훈이는 방글라데시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산 원곡동이 고향인 셈이다. 아버지의 피부색을 많이 닮은 석훈이는 학교 형들이 '아프리카'라고 놀려서 학교 다니기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학교에 가면 형들이 매일매일 놀려요. 아프리카에서 왔다고. 혼자 지나갈 때는 머리에 침도 뱉어요. 머리에 침 뱉고 아프리카라고 놀려요. 우리 아버지는 방글라데시 사람이라고 해도 형들은 아프리카에서 왔대요. 너무 속상할 때는 선생님께 말씀드려요. 그러면 선생님들이 형들을 불러 혼내주시지만 소용없어요. 계속 놀리고 괴롭혀요. 학교 가기 싫어요."

석훈이는 얼큰한 찌개와 떡볶이, 김치를 좋아한다. 학교 공부에서도 영어보다 한국어가 더 쉽고, 매년 생일인 2월 14일이 되면 어머니가 끓여주는 미역국을 먹는다. 코시안의 집에서는 선생님들의 일을 잘 돕는 착한 학생이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걸 제외하면 놀림 받을 이유가 없다.

"제 고향은 한국이에요. 코시안의 집에 오는 다른 친구들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고, 여기가 고향이에요. 그런데도 애들은 저만 보면 자꾸 아프리카로 가래요. 거기가 어딘지 저는 알지도 못해요. 자꾸 형들이 놀려서 공부하기도 싫어요."

남매인 라니(19)와 뜨구(12)는 아버지 수마르또(45)와 어머니 치트라(43)를 따라 2003년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으로 왔다. 1주일 동안 서울을 여행하고 곧바로 안산 원곡동에 둥지를 틀었다. 그 뒤로 어려운 한국살이가 시작됐다.

수마르또는 '버지니아텍 총기난사 사건'에 대해 "매우 끔찍한 일"이라며 "너무 깜짝 놀랐다"고 안타까워했다. 치트라도 "같은 생각"이라면서 "가족생활을 잘 하면 '한국판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큰딸 라니는 학교에서 '인도네시아'로 통한다. 또래보다 나이가 많은 라니가 복도를 지나다닐 때마다 친구들이 '인도네시아 간다'고 말한다. 다들 나이가 어려서 그냥 지나치지만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다.

뜨구도 학교에서 차별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뜨구의 아버지도 "외국인이라서 겪는 차별은 견딜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한국이 좀 더 열린 사회가 된다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4. 잘못된 선입견 "남아시아인은 가난하고 게으르다는 오해"

 
▲ 니락샤는 "1950년대 한국이 전쟁 직후 매우 어려웠을 때 스리랑카에서 쌀을 보내줬다"며 "사람은 언제나 처지가 바뀔 수 있다는 점을 한국인들이 인식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 오마이뉴스 장윤선
필리핀인 마리테스(35)는 안산이주민지원센터에서 일하는 활동가다. 마리테스 역시 한국 남자와 결혼해 비자문제를 해결했지만, 아이들의 교육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7살짜리 아들과 6살짜리 딸이 학교에 들어가면 당장 '필리핀 엄마'라고 놀림을 받을텐데 걱정이다. 아이들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참 속상해요. 피부색과 문화가 다를 뿐 똑같은 사람들인데 겉모습으로 차별하고 따돌리는 것은 나쁜 거잖아요. 한국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인권교육'을 했으면 좋겠어요. 모두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아이들을 같이 길러야지요."

니락샤(28)는 지난해 한국 여자와 결혼한 스리랑카 사람이다. 그 역시 안산이주민지원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다. 니락샤는 최근 스리랑카 아이들이 학교에서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놀림 당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스리랑카 부부 자녀들이 한국인 아이들과 자주 싸워 걱정된다는 게 요지인데, 어떤 대책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남아시아 사람들에 대해 잘못 인식하는 게 있어요. 돈 없는 나라, 게으른 나라. 그런데 이걸 기억하는 분들은 거의 없어요. 1950년대 한국이 전쟁 직후 매우 어려웠을 때 스리랑카에서 쌀을 보내줬다는 사실을요. 사람은 언제나 처지가 바뀔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 스리랑카나 남아시아 나라들이 가난한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에 대해 인종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지금은 한국이 잘 살지만, 언제 처지가 또 바뀔지 모르는 거잖아요. 함께 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찬응 안산이주민센터 대표는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점이 크다"면서 "우리 안의 인종주의나 인종 소외는 없는지 자성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주 외국인도 '한국인'... 같은 공동체인으로 보듬어야"

1994년부터 13년째 이주노동자 운동을 펼쳐온 박 대표는 "한국에 살고 있는 이주민 자녀들이 모두 조승희씨 같지는 않지만, 주변의 이주가정 아이들이 겪는 사회 문제의 깊이는 비슷할 것"이라며 "한국 사회가 이주민을 인정하고 제도 안에서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빨리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박 대표는 "버지니아공대에서 총기를 난사한 조씨는 개인적인 문제와 사회병리적인 문제가 복합적으로 나타난 경우"라면서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은 혹시 우리 주변에 소외를 겪고 있는 사람들은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점"이라고 꼽았다.

한국보다 시민사회의 폭이 넓은 미국사회는 다인종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에 익숙하지만, 한국사회는 미국사회보다 훨씬 폐쇄적이기 때문에 이주민들이 겪는 고통이 훨씬 클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특히 박 대표는 국내 거주 외국인 100만 시대에 절대로 방치해서는 안 될 문제가 바로 이주민 자녀들의 인격권과 교육권이라고 밝혔다. 티없이 맑게 자라는 아이들의 눈동자에 시름의 눈물이 맺혀서야 되겠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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