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황학동 벼룩시장은 시간과 보물창고

황학동 벼룩시장은 시간과 보물창고

기사입력 2008-04-11 18:31 기사원문보기
마음 먹으면 우주선도 만든다. 세상에 있는 건 다 있는 서울의 보물창고가 황학동 벼룩시장이다. 단돈 천원만 들고 가도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그 무엇을 건질 수 있는 곳. 세상에서 제일 비싸고 단 하나 뿐인 1억짜리 오디오를 만들 수도 있는 곳.

황학동은 살아있다.

풍경을 듣다

그 옛날도 아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란색 삼일아파트가 있던 자리에는 높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주위 청계천 방향으로는 새로운 건물들이 하나하나 생기고 있다. 아파트 옆길로 들어서면 바로 황학동 벼룩시장 입구다. 더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허름한 복장의 남자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거, 아무래도 가게 하나 사두는 게 좋지 않겠어?’

‘아, 뭣땀시 가게는 또 산댜?’

‘아, 롯데캐슬 지하에 대형 마트가 들어온다는데, 아무래도 값이 좀 오르지 않을까?’

‘조금은 그렇겠지 뭐.’

‘재개발도 제대로 될 것이고’

‘아이, 참 나, 닝기리…개발이고 나발이고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구만. 그냥 이렇게 살다 가게…’

골목 안은 조그만 철공소들이 즐비하다. 복잡하고 무질서해 보이지만 나름대로의 전문성을 갖고 있는 사업장들이다. 이 철공소들은 못 만드는 게 없는 곳이다. 설계도만 가져가면 무엇이든 다 만들어 낸다. 오프로드 마니아가 자동차 끌고 가서 극단적 광폭 타이어를 받혀 줄만한 축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뚝딱뚝딱 제대로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지금은 불법이라서 그런 작업은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대포도 만들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의 철공소 사람들은 완전 마니아들이다. 그들의 손재주는 일급 엔지니어 뺨 칠 정도로 정밀하다. 그들은 대기업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저 공작이 좋아서 이 골목에 처박혀 수십 년을 철밥 먹고 사는 것이다. 이들이 만일 공작공화국 유럽에서 태어났다면 벌써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어있을 것이다.

무질서 속의 원칙

골목을 조금 더 들어가 본다. 오래된 가구…가구? 그렇다 가구라기 보다는 우리의 생활 도구들, 절구, 맷돌, 나무 문짝, 농, 의자, 뒤주 등을 파는 고가구점이 뜨문뜨문 나온다. 그들은 고물 마니아들이다. 충청북도 제천의 어느 농가가 헐린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새벽바람 맞으며 전속력으로 달려가 이른바 ‘아도’를 찍어온다. 재수 좋을 땐 그냥 가져오기도 하는데, 불편해 보이던 고가의 문짝도 황학동 골목으로 들어오면 문화재가 된다. 그렇다고 비싼 가격을 매기는 것은 아니다. 사람 보아가면서 문화적 가치를 내세워 엄청 비싸게 받기도 하고, 오래된 고물을 이유로 헐값에 주기도 한다.


황학동 벼룩시장의 메인 골목을 들어선다. 흑백테레비, 보쉬전동드릴, 야마하 7번 아이언, 소니릴테이프재생기, 진공관전축, LP플레이어, 포르쉐미니카, 빅타 엠프, 삼성모니터, 금성라디오, 팬탁스카메라 등등 전자제품 위주의 골목이다. 사진을 찍어도 아무 말 안한다. 얼굴에 들이대지만 않으면 아무 상관 안한다. 상점에 나와있는 물건들을 보면 저기에서 소리가 제대로 나올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천만의 걱정이다. 이곳의 오디오 가게에 들어가면 세계 최고의 오디오를 만날 수도 있으며, 잠바떼기 걸치고 낮술 한 잔 한 얼굴의 사장님과 상의하면 세 마디도 못 가서 말발이 무너진다. 그들은 음향의 박사들이다. 그들은 뱅앤올룹슨이 부럽지 않다. 1억원 짜리 오디오 제대로 만들어 달라고 하면 정직하게 1억원 짜리 오디오를 조립해낼 수 있는 전문가들이다.

오호라! 가끔씩 보이는 성인 전용 비디오테이프 가게가 사람 발길을 후끈 잡는다.

곧세우마금순아/내여자친구는소,개입니다/꼴리는밤이오면/반지하제왕/살흰애추억/침대에서쉬리/입으로하는여자/오양의침묵/황홀해서새벽까지/구멍가게습격사건/박아사탕/공동경비구멍/인정상사정할수없다/나도처제가해줬으면좋겠다/샛방새댁의혀놀림/번지점프중에하다/귀신이싼다/털밑썸씽/마님은왜돌쇠에게쌀밥을먹이능가/감자캐러갔다가등에흙은왜묻혀/지금만지러갑니다/그놈은뭣이섯다…

제목 읽다가 숨 넘어가는 골목이다 ^^

성동기계공고 건너편 조그만 가게 앞 지하철 환풍구 위에 오디오 세트가 얌전히 앉아있다. 다가가 보니 마란츠다. 엠프, 카세트플레이어, 튜너, CD플레이어 등 일단 구색은 제대로다. 그 옆에는 JBL스피커가 떡허니 버티고 서 있다. 주인과 객은 흥정 중이다. 마란츠 오디오 세트가 15만원, JBL 스피커가 35만원이다. 손님은 마란츠 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JBL스피커의 앞면을 열어본다. 찢어진 곳이 없는 것이 확인되자 바로 구입한다. 스피커는 승용차도 아닌, 용달차도 아닌, 리어커로 운반된다. 손님은 오디오 조립 전문가였다. 그의 작업장도 황학동이다.

힘내라 힘!

성동기계공고 앞길에는 주방도구 판매하는 곳이 즐비하다. 조그만 식당 하나 차릴 사람들은 모두 이곳으로 간다. 망한 집 주방 싸게 사서 물청소 배관청소 배선작업 모두 새로 해서 또 다시 싸게, 패키지로 판매하는 것이다.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다. 새로운 사업을 생각하고 있으면서 어째서 울상일까? 대답은 뻔하다. 퇴직금 털어 분식집 차리는데, 이거 날리면 끝장인데…뭐 이런 근심이 가득한 것이다. 판매하는 사람들도 그다지 밝은 표정은 아니다. 그래도 힘 내라 힘! 돈 주고 물건 받을 때만이라도 서로를 격려한다.

다시 롯데캐슬앞 황학동벼룩시장 입구의 영도교를 건너간다. 동묘 가는 길이다. 이곳에는 노점이 즐비하다. 박정희대통령화보집이 길바닥에 누워있다. 트롯트가수 김연자의 LP판 김연자 노래꽃다발, 베르디 아이다, 사교를 위한 폴카 총선집, 기타와 전자올갠…1970년대와 80년대에 서라벌레코드에서 찍은 앨범들이다. 한 장에 천원.

골동품들의 가격을 물어본다. 보통 5천원에서 2만원이다.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동네 건달로 보이는 중년 세 사람이 참견을 한다.

구둣발로 도자기를 가리키며, 이 도자기는 얼마예요? 사장님~~~하더니, 얀마, 넌 저런 거 5백원에 사다 만원 받냐? 이, 순, 날…주인과는 오랜 친구인 듯 보인다. 영화 원스어폰어타임인아메리카의 앞 장면이 잠깐 오버랩 되는데, 장사를 방해하는 친구들에게 주인이 말한다. 너희들한테는 안 파니까 절루 꺼져라! 서로 놀리며 걀걀 웃는다. 주인도 웃고 친구들도 웃고 손님도 웃는다 ㅋㅋㅋ.

버룩시장은 동묘 담장까지 이어진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동대문 밖이다. 조선 시대부터 성문 밖에서 열린 난전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살아있는 풍경이요 누구도 거둘 수 없는 삶의 현장이다.

황학동 벼룩시장은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예전에 비해 많이 위축된 게 사실이다. 많은 노점이 사라졌고 사라진 노점상들의 낡은 가방 속에 있던 시대의 보물들도 사라졌다.

그러나 최근까지 동대문운동장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옛 숭인여중 자리로 옮기면서 벼룩시장은 다시 예전의 풍경을 재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먹고살기 힘들다 칭얼거리지 말고, 문화의 보고, 시간의 창고, 현물의 골목 황학동에서 당신의 좋았던 시절을 되새김해봄은 어떨까?

[글 사진 = 이영근 프리랜서 에디터]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124호(08.04.21일자)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매일경제 구독] [주소창에 '경제'를 치면 매경 뉴스가 바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