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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경제학 메카'였던 서울대, 왼쪽 눈 가리나

 

 

'마르크스경제학 메카'였던 서울대, 왼쪽 눈 가리나
[기고 ③] 서울대 경제학부 박사과정 정상준
정상준 (news)
 
33명의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중 유일하게 마르크스경제학을 전공한 김수행 교수가 이번 달에 퇴임합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가 그 후임이 돼, 경제학부 내에서 최소한의 학문적 균형을 이룰 수 있을지는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이에 '학문의 균형과 비판정신의 복원을 바라는 서울대 경제학부 대학원생들' 70명은 18일 학내에 "마르크스경제학 전공교수를 채용하라"는 호소문을 붙였습니다. 이들이 호소문에 공감하는 대학원생과 학부생 등의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왔습니다. <편집자주>
 
  
서울대 정문(자료 사진).
ⓒ 권우성
서울대

"(주류경제학과 마르크스경제학) 양자가 각각의 독자적인 접근법을 포기하고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상대방을 인정하고 때로는 허심탄회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질 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접근법만이 유일하게 적합한 것이라는 독단적인 태도가 젊은 계층에서 두드러지고 있다는 사실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이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앞으로도 상당히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이번에 퇴임하시는 김수행 교수께서 쓰신 글이 아닙니다. 이준구 교수께서 19년 전에 쓰신 글의 일부입니다(<경제논집>, 제28권 4호, 526쪽). 저는 경제학 연구자들의 '독단성'과 '협소한 사고'를 염려하고 경고하는 이준구 선생님의 지적에 십분 백분 공감합니다. '자신의 접근법만이 유일하게 적합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젊은 계층'이 19년여의 세월이 흘러 설마 더욱 완고해졌을까요?

 

학부 시절부터 지켜봐온 다른 선생님들도 충분히 이준구 선생님만큼 포용력 있는 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선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의 필요성에 대해 계급 간 동학으로 혹은 가치이론의 틀로 현대 자본주의 경제를 분석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 의의를 논하는 재미없는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그저 저는 대학원생이니 대학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경제학 수업에만 몰두한 요즘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안 통하는 까닭

 

"요새 유학 간 애들은 퍼포먼스가 안 좋아." '미국 대학 유학원으로 전락한 이 곳 대학원'이라는 냉소는 어지간한 석사 1년차들도 다 하는 소리이니 여기서 유학은 미국 유학을 뜻함을 재차 설명 드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어쨌든 위 '퍼포먼스' 이야기는 우리 학부 선생님들로부터 은근히 많이 듣는 소리입니다.

 

1년 동안 미·거시, 계량(경제학)을 들은 후 논문자격시험, 소위 '퀄'을 패스하지 못하면 제적까지 당하는 미국 대학원의 경제학 교육 체제에서 서울대 출신들이 우등으로 '퀄'을 통과하면서도, 정작 '퀄' 패스 이후 논문의 아이디어들을 제출하고 써나가는 데 있어서는 그리 빛을 발하지는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일부 학생들은 여기서 심지어 수학과나 통계학과 대학원 과목들까지 섭렵하고 유학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러나 저는 그런 지적들을 들을 때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미국 학계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제 또래나 선배 그룹들의 면면을 요즘 세대 이 곳 대학원생들과 비교해보면 이해가 됩니다.

 

이전 세대의 유학파들 중엔 여기서 학부를 다니던 시절 경제학 전공 수업도 대놓고 안 들어가던 이들도 수두룩했습니다. 지금 계신 일부 교수님들도 저희와 술자리를 하시다보면 겸연쩍게 자신의 그런 과거들을 폭로하곤 하시지 않습니까?

 

좌파적 사회과학 학습, 시장주의 경제학 연구에도 도움 됩니다

 

하긴 요새처럼 강의실 앞에서 이전 수업 끝나기 10여 분 전부터 줄을 서 자리를 잡으려 대기하는 대입단과학원 같은 한심한 풍경이 아니라, 담배 연기 가득한 동아리방이나 으슥한 찻집, 퀴퀴한 골방에서 제목부터 살벌한 온갖 '이념 서적'들을 읽어가며 필요 이상으로 과격한 발언들로 토론에 피를 튀기는 '오버'가 그 시절 대학의 풍경, 또래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기말고사 날에야 '자체 개강'하고도 일필휘지로 답안을 써내려가는 실력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예컨대 마르크스경제학의 악명 높은 '전형문제'(transformation problem)를 직접 풀겠다며 당찬 포부로 선형대수학 책을 꺼내 독파하던, 솔직히 지금 같으면 저부터도 한 대씩 쥐어박을 '무식한 용감함'이 그 시절 학부생들에겐 도리어 있었습니다.

 

  
서울대 앞 인문사회과학 서점 <그날이오면>에서 한 이용자가 책을 읽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덕련
인문사회과학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학부생들의 중간·기말 고사 채점이나 성적 처리를 할 기회가 많다보니 요즘 세대의 화려한 글쓰기 테크닉에 종종 놀랄 기회를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행히도 겉만 번지르르하거나 알맹이 없는 답안들이 대부분입니다.

 

아마 이들은 논술 사교육으로 범벅이 되어 대학에 들어왔다가 그저 학점 경쟁에 바로 정신없이 내몰린 탓일 겁니다.

 

물론, 그것이 요새 학부생 세대들의 한계 또는 잘못만은 아닐 것이고요.

 

즉, 어쩌면 결국 과거 이른바 또래들과의 '사회과학 학습'에서 길러진 토론 능력과 '과학적 상상력'은 경제와 사회를 분석하는 이론적 능력에 있어서는 훗날 설사 시장주의 경제학을 연구하더라도 알게 모르게 각자에게 큰 강점이자 자산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슘페터의 고백 "마르크스를 공부한 학생들이 더 우수"

 

고백컨대 대학 시절 그렇게 치열하게 토론하고, 때론 교조적이고 때론 융통성 없었을지언정 엄청나게 많은 양의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들을 읽고 변혁이론 토론을 해야 했던 경험과 그 과정에서 맞닥뜨린 고뇌들이 당사자들에게는 의도치 않은 부산물을 낳은 셈입니다.

 

논문자격시험 이후 논문의 아이디어를 잡는 힘, 교수님들께서도 말씀하시는 '퍼포먼스'의 실력 차이는 일부 천재들을 논외로 하면 결국 그런 의도하지 않은 부분들에도 크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변혁의 무기로서 학문을 중시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면 그런 역설에 치를 떨었을 노릇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음지'에서 지내던 아이들일수록 오히려 '전향'을 해도 더 성공적으로 전향하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사실 마르크스경제학에 우호적이기는커녕 무척 적대적이었던 슘페터(J. Schumpeter)마저도 일찍이 지적했던 바입니다.

 

"심지어 오늘날조차 모든 경제학 교수들은 마르크스를 자신의 모델로 사용한 학생들이 이론적 관심이 없는 학생들보다 더 우수하다는 사실에서, 하나의 이론체계에 친숙하다는 것이 얼마나 교육적 효과가 있는지, 그 장단점과 별도로, 알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정확히 연구의 과학적 핵심에 관한 한 사실상 깊은 이해를 항상 충족한 것은 아닐지라도, 사회주의자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에게조차 교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학의 역사와 방법>, 한신대출판부, 2006년, 171쪽)

 

별 대단한 발견이 아닙니다. 젊은 시절의 책읽기와 또래들과 함께한 토론, 마르크스경제학을 포함한 비판사회과학에 대한 천착이 좋든 싫든 이후 얼마나 학생들의 이론적 발전에 영향을 주는지는 교수님들도 사실은 아시는 이야기이며, 굳이 비유를 하면 멀쩡한 왼쪽 눈을 가린 채 오른쪽 눈만 치켜뜨기보다는 두 눈 다 뜨고 공부를 해야 공부도 더 잘 된다는, 당연하기 그지없는 논리일 뿐입니다.

 

'적극적 연구 지침'으로 재부상한 마르크스경제학... 도쿄대에선 전공 필수

 

더군다나 최근까지 세계 곳곳에서 빈발하는 금융위기와 불평등, 고실업의 만연은 신고전학파적인 시장 원리로만 설명·해결될 수 없으며, 교과서적인 시장 원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처방들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제3세계 빈곤 문제를 둘러싼 세계은행의 역할에 대한 논란과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들(SAPs)의 부작용은 이젠 관대한 일부 주류경제학 내용에도 포함되기 시작한, 상식 수준의 이야기입니다.

 

후진국뿐만이 아닙니다. 미국과 유럽을 위시한 선진국에서도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 각종 경제 불황의 위협과 사회복지시스템의 경쟁적인 해체로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위협받고 있는 절박한 상황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을 뿐더러, 이에 맞서 자본을 재통제하고 재규율하자는 주장들 또한, 무슨 '이념에 사로잡힌 소수'의 주장만이 아님은 도리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고용 없는 성장과 금융자본의 독주를 용인하는 신자유주의 세계 경제에서 고실업은 필연적이다. 사진은 도쿄 신쥬쿠카부키죠의 젊은 노숙자들.
ⓒ 전국백수연대
실업

마르크스경제학은 각자의 정치적 혹은 정서적 호불호, 전공 여부를 떠나 그런 논의에 있어 현재까지 가장 많은 연구 성과가 집적, 축적되어 온 경제학의 한 분야입니다. 경제학설사·경제학방법론의 용어를 감히 빌리면 마르크스경제학은 그런 전 지구적 시장주의의 독단적 지배와 그 폐해 덕분에 오히려 21세기 경제학의 '적극적 연구 지침'(positive heuristic)으로서 다시 부각된 셈입니다.

 

또한 프랑스 오를레앙 선언, 하버드 경제학부 학부생들의 주장, 캔자스 선언 등 탈자폐적 경제학 네트워크(post-autistic economics network)의 목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경제학이 진정 무엇에 대해 답변해야 하는지, 단일한 경제학만을 가르치고 배우고 이에 순응케 한 것(conformity of economics)이 설령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얼마나 지금까지 학생들의 생각과 이론을 질식시켰는지,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 등에 대한 경제학자·경제학도들의 고뇌와 질문·노력이 전 세계적인 현상이며 서로 공명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덧붙여, 이 곳은 엄연히 '연구중심대학, 대학원 중심 대학'을 지향한다는 국립서울대학교의 대학원입니다. 괜찮은 제자다 싶으면 도리어 미국 유학부터 먼저 종용하시는 일부 교수님들의 이야기는, 제자들의 앞길을 열어주고 싶은 그 분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님에도 오히려 현재 이 곳 서울대 경제학부 대학원의 정체성과 강점이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삼가 여쭙게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한때 대학원의 석박사논문 상당수가 마르크스경제학으로 쏟아지던 시절, 서울대는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마르크스경제학의 메카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마르크스경제학으로 제출된 석박사 학위논문들 중 일부는 지금 기준으로 보더라도 상당한 이론 수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서울대 경제학부의 역설적인 '강점'이자 '세계적인 경쟁력' 중 하나였습니다. 소위 '랭킹'을 따짐에 있어 솔직히 서울대보다 뒤떨어진다고 할 수 없을 도쿄대 경제학부에서 여전히 마르크스경제학이 1학년 전공, 그것도 필수과목이라는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문제는 좌파경제학 '과잉'이 아니라 '부족'

 

  
20년 전 서울대 경제학부 대학원생들은 시장주의에 비판적인 경제학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고 학문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그 결과 김수행 교수가 서울대 경제학부에 자리를 잡았다. 사진은 그 당시 상황을 보도한 서울대 <대학신문>.
ⓒ <대학신문>
마르크스경제학

물론 마르크스경제학의 과제와 가치가 과거와 같을 수는 없으며, '그때 그 시절'을 복원코자 함도 아닙니다. '안병직 교수께서 제자 대학원생들에게 공장 현장으로 투신하라고 일갈하던 시절'(이영훈·안병직,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기파랑출판사, 2007년, 48쪽)의 마르크스경제학이 더 이상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학원 다니는 것마저 부끄러워하며 힘겹게 버텨내던 세대들 일부에게는 소련이나 북한이 대안사회로 여겨졌는지는 모르나, 지금 마르크스경제학에 관심을 두거나 연구를 하는 세대들은 기존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동경은커녕 구경도 못해본, 아니 별 구경할 생각도 없는 세대입니다.

 

오히려 지금의 마르크스경제학은 그런 모종의 과거의 굴레, 즉 기존 사회주의 체제를 어떻게든 옹호해야 했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일부는 수학·통계학의 영역을, 일부는 철학·논리학의 영역을, 일부는 역사·정치학의 영역을 잠식하면서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게 발전해 온 지 오래입니다.

 

더욱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의 고삐풀린 자본주의야말로 마르크스경제학을 소위 '블루오션'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셈입니다. 심지어 서울대 주류경제학의 거장이신 조순·정운찬 두 분 선생님께서도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사회주의 사상은 어떤 형태로든지 계속 존재할 것이다, 볕이 비치는 곳에는 항상 그림자가 있다"(조순·정운찬·전성인, <경제학원론>(7판), 법문사, 2003년, 943쪽)고 이야기하시지 않습니까?

 

물론 당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거나 연구했던 많은 선배 세대들이 일부는 한국경제학계의 편견으로 인해 노동시장이 더욱 좁아지면서, 혹은 일부는 직면한 생계의 문제로 인해 학문을 지속적으로 연구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정작 한국 경제의 진보적 혁신과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의 발전에 기대만큼 기여하지 못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즉, 문제는 당시 일부 관념적이기도 했던 '좌파경제학의 과잉'이 아니라 도리어 '진정한 좌파경제학의 부족함'에 있었으며, 따라서 지금 마르크스경제학의 명맥 유지가 위협받는 위기를 스스로 자초한 면도 있음을 냉정히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와 같은 비극이 2008년 현재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과거 선배들이 왜 마르크스경제학을 중심으로 한 비판사회과학 탐구에 열중하였는가라는 그 가치를 진심으로 존중하면서 동시에 현재 발 딛고 선 경제 사회의 현실, 인민들의 살림살이에 천착하여 뛰어난 연구업적을 지속 생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졸업 이후 현실적인 진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을 탐구하는 젊은 연구자들이 평생 지고 가야 할 책임일 것입니다.

 

'미래의 노벨상' 차버린 캘리포니아주립대... 서울대, 그 전철 밟을 건가 

 

글이 길어졌습니다. 에피소드 하나로 마칠까요? 1960~70년대 미국의 진보적 경제학계를 이끌었던 하워드 셔먼(H.Sherman) 캘리포니아주립대학(UC Riverside) 경제학부 명예교수의 회고에 따르면(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Fall 2006, pp.533~535), 셔먼 교수는 1968년 당시 이미 23권의 저서를 냈던 미국공산당의 수석경제학자와 인도의 한 대학 교수를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로 영입하려다 보수적인 다른 교수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 이유들이 걸작입니다. 전자는 학부에 신임교수를 채용할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였고, 후자는 고작 제3세계의 인도 사람을 교수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류'의 편견과 선입견이 설마 1960년대 미국이나 2000년대 한국이나 마찬가지일까요?

 

특히, 당시 결국 임용에 탈락하고 만 인도인이 바로 불평등과 빈곤 연구의 대가이자 훗날 가장 이단적인 노벨경제학상 수상자(1998년)로 불리는 아마티아 센(A.Sen)입니다. 결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 경제학부 교수진들은 자신들의 보수적인 오만과 폐쇄적인 편견 덕분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교수진(faculty)에 보유할 기회를 놓친 셈입니다.

 

불필요한 독단론(dogmatism)에 사로잡혀 그들과 똑같은 오류를 범하는 서울대 경제학부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고 설마 우리 교수님들께서 그 정도로 편협하겠느냐고 자문하면서, 경제학부 졸업생이자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김수행 선생님에 이어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가 후임으로 채용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988년 학문 다양성 확보를 위한 집단행동을 통해 마르크스경제학 교수 채용을 이뤄냈던 서울대 경제학부 대학원생들. 그로부터 20년 후인 지난 18일 이들은 다시 '학문의 균형과 경제학에서 비판정신 복원을 위해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를 채용하라'며 학내에 호소문을 붙였다.
 
마르크스경제학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프레시안>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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