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심환지가 정조 측근이라 독살 아니라면

 

 

 

심환지가 정조 측근이라 독살 아니라면
 박정희가 김재규 손에 죽은 것은 뭔가?"
[인터뷰] <조선왕독살사건>의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김태희 (ew4203)
 
 
  
<조선왕 독살사건>의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남소연
이덕일

 

 

 

 

 

"노론과 그 후손들에게 정조독살설은 껄끄러운 이야기다. 그래서 독살설은 남인들이 한이 맺혀 지어낸 이야기나 소설이라고 폄하해 왔다. 비밀편지가 발견되니까 '둘은 편지를 주고받던 친한 사이다, 정조 독살 의혹이 사라졌다'는 수준 낮은 이야기를 삽시간에 퍼뜨렸다. 지금의 사태는 그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반증하는 것이다.

 
정조 독살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료적 근거를 전혀 대지 못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역사관에는 200년 전 정조를 죽인 노론 벽파의 시각, 우리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난도질했던 조선사편수회의 시각이 일정 부분 반영돼 있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과 한국고전번역원 번역대학원은 지난 9일,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정조가 노론 벽파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299통을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어찰이 공개되면서 정조의 막후정치와 독살설의 진위 여부 등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13일 오후에 만난 역사평론가 이덕일 한가람역사연구회 소장은 다소 격앙돼 있었다. 이 소장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자마자 관련 자료들을 제시하며 최근 일고 있는 '정조 독살설은 허구였다'란 일각의 주장에 반박하기 시작했다.
 
<조선왕 독살사건>으로 대중역사서의 새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이덕일 소장은 최근 언론 등에서 대서특필하고 있는 '독살설 허구'에 대해 "사료적 근거도 없는 수준 낮은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 정조 어찰 공개 기자회견 9일 서울 성균관대학교에서 김문식 단국대 교수,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등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새로 발굴한 정조 어찰 299통 중 일부를 공개하고 있다. 이 편지들은 모두 정조가 친필로 써 심환지 한 사람에게 보낸 것으로서 정조 말년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정국 동향을 파악하는 데 획기적인 가치를 지닌 자료로 평가된다.
ⓒ 연합뉴스
정조어찰

 

 
"측근이라 독살 아니라면, 박정희는 어떻게 설명하나"
 
이덕일 소장은 "정조 어찰이 발견되었다고 노론 벽파의 정조 독살 의혹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며 "둘 사이에 비밀 편지가 오갔다고 해서 심환지가 정조와 가까운 사이였거나 정조의 측근이었을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정조 어찰 발견 후 둘이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심환지가 정조독살에 가담했을 리가 없고, 따라서 정조독살설이 힘을 잃게 되었다는 보도가 많은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 
 
그는 이런 주장의 근거로 박정희와 카이사르의 예를 들었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로 정조와 심환지가 측근이었기 때문에 독살했을 리 없다면, 박정희가 김재규의 손에 죽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것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측근에게 암살됐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편지가 발견된 것만으로 정조와 심환지가 측근이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지만 측근이므로 암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독살설 허구'란 주장은 "억지 해석"이라며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노론 벽파와 조선사편수회의 후손이 역사학계 주류를 장악하고 다른 해석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마포에 위치한 한가람역사연구회 사무실에서 진행한 이덕일 소장과의 인터뷰 전문.
 
"정조 독살설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 이번 편지 발견으로 일각에선 '정조 독살설은 허구'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대한제국이 멸망한 다음 달, 일본이 76명의 조선인들에게 훈장과 돈을 준다. 76명은 대부분 노론이었다. 노론은 일제 때도 세력을 온존해 왔고, 지금도 학계, 법조계 등 한국 사회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노론과 그 후손들에게 정조독살설은 껄끄러운 이야기다. 그래서 독살설을 '남인들이 한이 맺혀 지어낸 이야기나 소설'이라고 폄하해 왔다. 비밀편지가 발견되니까 '둘은 편지를 주고받던 친한 사이다, 정조 독살 의혹이 사라졌다'는 수준 낮은 이야기를 삽시간에 퍼뜨렸다. 지금의 사태는 그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반증하는 것이다.
 
정조 독살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료적 근거를 전혀 대지 못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역사관에는 200년 전 정조를 죽인 노론 벽파의 시각, 우리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난도질했던 조선사편수회의 시각이 일정 부분 반영돼 있다."
 
  
이덕일 소장이 쓴 <조선왕독살사건>
ⓒ 다산초당
조선왕독살사건

- 정조가 보낸 편지엔 병명, 증세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다. 때문에 알려진 것과 달리 심환지가 정조의 측근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나오는 것 같다.

"정조는 재위 24년인 1800년 6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6월 14일 어의가 진찰을 해서 병세가 드러났다. 이미 알려진 병을 감출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심환지는 노론 벽파의 원칙론자이지만 대화가 되는 상대다. 노론 벽파가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데, 전부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지 않나? 서로 이익이 있으니 편지를 주고받는 핫라인을 개설한 거다.
 
편지를 보면 심환지가 어떤 부분은 정조의 뜻대로 움직이고 어떤 부분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니 측근'이라는 말이 맞으려면, 심환지는 정조가 죽자마자 몰락해야 된다. 하지만 승진을 하고 정순왕후와 함께 (정조의)24년 치세를 모두 뒤집어버린다."
 
- 그렇다면, 독살설이라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조는 사후 준비를 전혀 안했다. 그 정치지형을 그냥 가지고 가면 다 되돌릴 텐데, 꼼꼼한 정조가 왜 대비를 안 했을까? 자신이 세상을 떠나리라고는 생각도 안한 것이다. 그래서 독살설에 무게를 두는 거다. 인위적인 특정 세력이 정조를 독살한 것이라면, 수천 수백 년이 지나도 역사의 법정에 반드시 세워야 한다. 그래서 10년째 이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순조실록>에 이런 기록이 있다. 정조가 죽지도 않았는데, 정순왕후가 언서(諺書)를 내려 도승지를 갈아치우는 인사권을 행사한다. 그리고 정조의 상태를 직접 보겠다고 간다. 조선은 대비가 오면 어의는 물론 남자 신하 전원이 밖으로 나가야 한다. 정순왕후만 있는 상태에서 곡소리가 났고, 정조가 죽은 후 (정순왕후는) 바로 언서를 내려 좌상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삼는다.
 
정조를 연구할 때 풀리지 않았던 미스터리는 '정조가 왜 심환지를 내의원 제조로 계속 두었는가'였다. 비밀편지는 심환지가 왜 왕의 병 치료를 담당하는 내의원 제조로 계속 있을 수 있었는가를 밝혀주었다. 그래서 심환지의 혐의가 더 커진다. 둘이 편지를 주고받았기에 혐의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사료를 해석할 능력이 안 되거나 악의적으로 사료를 왜곡하는 것 밖에 안 된다.
 
'편지를 주고 받았으니, 독살했을 리가 없다', 그럼 박정희는 죽었을 리가 없다. 김재규하고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데 죽느냐.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암살하고, 수양제가 자신의 아버지를 암살하지 않았나. 항상 독살이라는 것은 최측근에서 나왔다."
 
"노론 벽파는 정조와 근본적으로 화해할 수 없다"
 
- 정옥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과 유봉학 한신대 교수 등 간송학파 계열 학자들은 정조와 노론의 제휴·협력설을 주장하고 있다.
"노론 벽파는 정조와 근본적으로 화해할 수 없다. 노론벽파는 사도세자를 잘 죽였다고 본다. 노론이 석고대죄를 하든지, 정조가 아버지 잘 죽었다고 하지 않는 한 양자는 화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정조가 오회연교에서 남인들을 대거 등용하겠다고 말했다. 정계 개편을 한다고 말한 거다. 그래서 노론 벽파가 급해진 것이다. 오회연교(5월 그믐날 경연에서 왕이 내린 교시) 후 한 달이 안 되어 정조가 갑자기 죽는다."
 
- 비밀 편지의 발견으로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공식 기록도 믿을 수 없는 것 아닌가란 지적이 있는데.
"정조 시대는 <정조실록> <홍재전서> <승정원일기> 정약용의 글, 문집, 외사촌이나 채제공에게 보낸 편지 등 사료가 많다. 그런 것 중 하나가 새로 나온 것이다. 다만 정적이었던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것이라 성격이 다른 것이다. 하지만, 이 사료로 인해 바뀐 사실은 하나도 없다. 편지와 <정조실록>의 내용이 다르지 않다. 이 편지는 기존의 사료를 보완해 줄 뿐이다."
 
- 박사학위 논문이 <동북항일연군>이다. 근현대사 전공인데 조선 시대에 관한 책을 많이 쓴 이유는?
"대학원 다닐 때, 노론 벽파와 조선사편수회로부터 내려오는 특정 사관에 동조하지 않으면 역사로 벌어먹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구조적 모순과 근현대사의 여러 문제의 원인을 찾다보니 조선시대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관한 책을 많이 쓰게 되었다."
 
  
<조선왕 독살사건>의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남소연
이덕일

 

- 예전 국사 교과서는 정조를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한 왕으로만 소개했다. 소설 <영원한 제국> 이후 정조를 연구한 책들이 많이 나온 것 같은데.
"예전 교과서들은 노론 벽파의 시각으로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가 별로 한 일도 없는, 영조의 부록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직도 그들의 시각이 관철된 부분이 많다. 그러다 이인화 교수가 책을 내면서 몇몇 사람들이 정조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바탕이 돼서 정조에 대한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국사교과서에 '중상학파(북학파)는 서울의 노론출신이 대부분이었다'란 부분이 있다. 하지만 (북학파인) 박제가, 이덕무 등은 노론이 아니다. 가장 크게 왜곡된 부분은 '상공업 중심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국사교과서 314쪽, 교과서 맥락으로 보면 '유수원=노론'이라고 인식하게 된다)'란 부분인데, 유수원은 노론에게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다.
 
남인이 농업 중심 개혁론을 개발했으니, 집권 세력인 노론도 한 일이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왜곡한 것이다. 청을 오랑캐로 보는 노론에서 청과 교류하자는 상공업 중심 개혁론이 나올 수가 없다. 이렇게 교과서가 노론 벽파의 시각을 담고 있으니 정조가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던 것이다."
 
"정조 붐은 지금 우리에게 이런 지도자가 필요하기 때문"
 
- 정조를 근대적 군주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사료를 찾아보면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 끝까지 토론을 했다'고 나온다. 이는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관철하려고 한 것 아닌가란 느낌을 준다. 이를 보면 다양성을 존중하는 현대사회 사고방식과는 좀 다른, 성리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으로 정조를 볼 수 있지 않나.
"(정조가) 근대적 군주였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첫째 증거는 천주교에 관대했다는 점이다. 노론은 성리학만 유일사상으로 신봉하고 그 외는 이단으로 본다. 노론 벽파가 천주교를 수사하고 처벌해야 한다고 했을 때, 정조는 '정학(正學, 성리학)이 바로서면 사학(邪學, 천주교)은 저절로 소멸한다'면서 용인한다. '천주교 별로 나쁜 것 없던데'라고 하면 난리가 날 테니 돌려 말한 거다. 정조는 서양 사상까지도 포용하며 사상의 다원화를 꾀한 인물이었다.
 
둘째는 남인 등 다른 당파 사람을 적당한 시기에 등용해 노론 일당 독재를 다당체제로 만든 점이다.
 
셋째는 신분제 완화다. 노론은 서자(庶子)를 인간으로도 안 보는데,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에 서얼을 등용하면서 신분제를 완화시켜 나간다. 지금 우리나라는 학벌로 차별한다. 정조의 신분제 완화 조치는 학벌 카르텔 사회와의 싸움이기도 했다. 현재의 학벌 카르텔 사회와 조선시대 노론 일당 체제 사회는 똑같은 사고구조를 지닌다. 요즘 정조 붐이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런 지도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정조는 문체를 정통고문(正統古文)으로 되돌리려는 '문체반정'을 시도했다. 이 대목을 접하고 개인적으로 꽤 놀랐는데, 이는 보수적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 아닌가.
"문체반정도 당시 시대의 맥락을 보고 이해해야 한다. 문체반정의 시작은 진산사건(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도 권상연과 윤지충이 부모 신주를 불태운 사건)이다. 이 사건은 노론에게 정조를 돕는 남인을 몰아낼 호재였다. 정조가 불리한 현안을 반전시키려고 제기한 것이 문체반정이다.
 
정조는 신분제의 틀을 바꾸고자 했던 사람이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를 보면 서북인(함경도, 평안도 사람)이 차별받는 것, 한 번 노비가 되면 영원히 노비로 차별받는 것, 여성의 재가를 허용하지 않는 것 등을 비판하고 있다. 그 시대 국왕이 어찌 저토록 선진적인 발상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다."

정조를 위한 변명 - 1

그림 이야기 2009/02/10 09:35 이충렬

어제(2월 9일), 정조의 비밀 편지 299통이 공개되었다.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예조판서와 우의정 등을 역임한 노론 벽파(僻派)의 거두 심환지(沈煥之.1730-1802)에게 보낸 비밀 편지다.

이 편지들 중에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자신의 건강에 심대한 이상이 있음을 여러 차례 알렸다는 내용이 있어, '심환지의 정조 독살 의혹'은 종지부를 찍어야 할 형편이 되었다. 추측과 심증에 의한 역사해석이 얼마나 위험한지가 증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러 언론에서는...

편지 내용 중, 최측근인 노론계 서영보(1757~1824)를 “호로자식(胡種子)”, 촉망받던 젊은 학자 김매순은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 학문적 정적을 비방하는 일부 유생들을 겨냥해 “오장에 숨이 반도 차지 않았고” “도처에 동전 구린내를 풍겨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는다”는 등의 비속적 표현을 썼으니...

정조는, ‘학자 군주’라기보다 능수능란 ‘고단수 정객’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어느 일간지 기자는 "200여 년 전에 부친 왕의 편지. 이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알던 18세기 ‘성인 군주’를 잃어야 할지는 모르지만..."이라고 썼다....

왼쪽에서 다섯번째 줄 아래에 '뒤죽박죽'이라는 한글이 보인다.

어제 언론의 평가에 따르면, 정조는 '욕쟁이 정치꾼'이라는 소린데... 그건 아니다....  얼마전,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해진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소개하면서 숙종과 그 시대는 다시 평가되어야 한다고 했듯이, 조선시대의 왕들은 하나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동시대에 세상에 존재하던 왕들 중에서 공부를 가장 많이 한 '학자'들이었고, 어려서부터 '제왕학'을 공부한 '전문 정치인'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학자와 정치인의 두가지 모습이 있다... 

따라서 성리학이라는 학문에 기반을 두었던 조선시대의 왕과 그들의 통치형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자와 전문 정치인 양면을 보고 평가해야지, 어느 한쪽만 보면 정당한 평가를 할 수 없다....  정조도 마찬가지다....


영조의 <연강시>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 번역

위의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정조는 설날에도 83세의 할아버지 영조 아래서 공부를 했다....  영조는 세손 정조에게 그렇게 '제왕의 길'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런 '제왕 훈련'은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상풍에 긔후 평안하오신 문안 아옵고져 바라오며 뵈완디 오래오니 섭~ 그립사와 하옵다니 어제 봉셔 보압고 든~ 반갑사와 하오며 한아바님 겨오셔도 평안하오시다 하온니 깃브와 하압나이다. 元孫"
(가을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을 알기를 바라오며 뵌 지 오래되어 섭섭하고도 그리워하였사온데 어제 봉한 편지를 보고 든든하고 반가워하였사오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 하시오니 기쁘옵나이다. 원손)

이 한글 편지는, 정조가 8살 원손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문안편지이다...  어려서 부터 한문뿐 아니라 한글 공부도 했고, 친인척에 대한 예의범절을 배웠다... 학문과 제왕학뿐 아니라 인성교육도 함께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심성은 훗날 왕이 되어서도 이어진다....


정조 어찰(왕의 편지)  출처 : <묵적> (명문당 발행)




이 편지는 위의 한글 문안 편지를 쓴 종이처럼 꽃 무늬가 찍힌 시전지에 쓴 걸로 봐서, 신하가 아니라 왕실 친인척 누군가에게 보낸 새해 선물 편지로 보인다....  정조는 신하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도장을 찍었기 때문에 친익척에게 보낸 편지라고 추정할 수 있다.


정조 <김참판에게 보내는 선물 편지> 출처 : <묵적>


               큰 곶감이 아니라 곶감이라는 부분이 눈에 띈다.


조선 시대의 왕들은 시서화에 능했다. 시는 공부를 했으니 당연히 잘 짓고, 글씨 역시 연습을 많이했으니 명필이 많다. 그림은 글씨를 쓰면서 붓과 먹에 익숙해있고 세자시절 그림의 기본을 배워 웬만한 문인화가 못지 않은 솜씨를 가진 임금이 많다. 예를 들어 영조는 세자 시절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다.


정조 <정혜공 연시 잔치의 시>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 번역


정조 <임지로 떠나는 철옹부사에게> 201.8 x 73.3cm 1799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미술사학자 고 오주석 선생의 글에 의하면, "정조는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두 살 때 글자 모양을 만들었고, 서너 살 때는 필획을 이루어 날마다 그것으로 장남을 삼았다고 한다. 심지어 여섯 살 때 쓴 글씨로 병풍을 만들었다 전하는 사람도 있다."라면서 정조의 글씨는 바르고 단정하다고 평가했다.

시(詩)와 서(書)를 봤으니 이제 화(畵), 그림을 볼 차례다.


정조 <들국화> 종이에 수묵 84.6 x 51.5cm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보물 제743호

이 작품은 고 혜곡 최순우 선생을 비롯해 많은 미술사학자들이 매우 잘그렸다고 평가한 작품이다. 일본에 살던 왕손의 소장품이었는데, 어느 재일동포가 구입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해 고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정조의 내면적 모습이 느껴지는 듯한 작품이다. 왕 혹은 왕세손이기에 가질 수 밖에 없는 쓸쓸함을 그림 속에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국화꽃 위에 메뚜기 한마리를 그려 넣었는지도....


정조 <파초> 종이에 수묵 84.6 x 51.5cm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보물 제743호

왕은 외롭고 고독하지만, 꿋꿋함과 고고함을 잃으면 안된다... 정조는 그렇게 외로운 삶을 살았고, 자신의 능력을 믿었기에, 편지에다 자신의 속마음을 나타냈고 마음에 차지 않는 신하들을 우습게 알면서 욕을 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번에 발굴된 편지들은, 왕이기에 갖고 있는 내면의 한 모습일뿐, 정조의 전체를 평가하는 잣대로 삼을 수는 없다....


정조 <묵매도> 종이에 수묵 123.5 x 62.5cm 1777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정조가 28세 께, 작은 외숙에게 그려준 작품이다. 직업 화가의 그림이 아닌 문인화로서 이정도면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정조는 이렇게 시서화에 능하고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백성들을 생각하는 정치를 하려고 한 성군이었다.

따라서 이번에 발굴된 편지들은,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왕이,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신하들에 대한 불신과 경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편지들 속에서 비속어가 보이고, 정치술이 보인다고 하여  정조가 성군이 아니었다고 단정하려는 듯한 기사는 매우 위험하다...  그 편지들은 정조의 통치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백성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아니, 그는 백성들을 어떻게 생각하며 나라를 다스린 임금이었을까?  정말로 성군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줬을까? 그 답 또한 몇 점의 그림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 계속
top

정조를 위한 변명 - 2

그림 이야기 2009/02/11 07:39 이충렬
정조는 백성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아니, 그는 백성들을 어떻게 생각하며 나라를 다스린 임금이었을까?  정말로 성군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줬을까? 그 답 또한 몇 점의 그림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어제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렇다면, 어떤 그림에서 임금과 백성의 관계가 설명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그림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사실, 다른 임금들에게는 그런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그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조에게는 있다. 그것도 아주 자세히 알 수 있는 여러 점의 그림이 남아있다.... 




<화성능행도 8폭 병풍> 작가미상 비단에 채색 각 폭 크기 142 x 62cm (전체 크기 142 x 496cm) 
1795 ~ 1796년 경 추정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정조와 백성들의 관계는, 너무 유명한 이 병풍 그림 속에 있다....  정조 19년인 1795년 윤 2월 9일부터 8일동안 정조의 행적과 행사의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그런 정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구체적 일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윤2월 9일 창덕궁 출발, 시흥행궁 유숙, 10일 화성행궁 도착ㆍ유숙,11일 화성 성묘 배알, 낙남헌 과거시행, 12일 현륭원 전배, 서장대 성조 및 야조, 13일 봉모당 회갑연 거행, 14일 낙남헌 양노연 거행, 득중정 어사, 15일 화성행궁 출발, 시흥행궁 유숙, 16일 시흥행궁 출발, 창덕궁 환궁.

정조는 한양으로 돌아온 후, 행사의 내용을 묘사한 도설(圖說)을 제작하고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의 머리에 첨가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이 도설작업은 윤2월 28일 의궤청의 건의로 이해 1월 연풍현감에서 파직된 김홍도가 주관자(主管者;‘專管’者)로 임명되어 그의 지휘 아래 제작되었다. 그래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밑그림 비슷한 그림이 많이 담겨있고, 이런 이유때문에 한때 8폭 병풍도 김홍도가 그렸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병품 그림은 김득신, 최득현, 이명규, 장한종, 윤석근, 허식, 이인문 등으로 모두 실력이 쟁쟁한 화원들이 그렸고, 이 병풍을 헤경궁에게 진상하자 칭찬과 포상을 받았다고 하니, 김홍도는 의궤의 도판 그림 정리 작업을 하느라 병품그림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전해지는 8폭병풍은 리움 소장품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과 궁중유물전시관(구 창덕궁)에도 거의 같은 병풍이 있으니, 어느 병풍이 진상품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리움의 경우 화가 소개를 '작자미상',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김득신 외'라고 표기한다.

# 정조의 경로사상와 구휼의식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이미지


윤2월 14일 오전, 정조가 낙남헌에서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등 능행에 수행한 노대신(老大臣) 15명과 수원부의 노인 총 384명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이다.

80세 이상의 사서인(士庶人) 노인은 무려 209명이나 되고, 99세 3명, 97세 1명 등 90세 이상 노인만도 17명이나 됐다.

군병(軍兵)과 시위의장(侍衛儀仗)이 낙남헌 주변의 사방을 둘러싼 가운데 차일을 친 낙남헌의 어좌에 정조가 앉아 있고, 그 앞 마루에 융복(戎服) 차림의 노대신과 입시관원(入侍官員)들이 앉았다. 섬돌앞 뜰에는 서인(庶人)들이 도포 차림으로 줄지어 앉았고, 담장 사이에는 곱게 차린 무희와 붉은 옷을 입은 악사가 늘어서 있다. 그리고 시위군병 밖의 길가에는 부민(府民)들이 이 아름다운 광경을 흡족한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다.

정조는 이날 '경로잔치'뿐 아니라, 화성부에 사는 홀아비와 과부, 고아, 독자 등 539명과 가난한 백성 4천813명에게 쌀과 소금을 나눠 주고, 죽을 쑤어 먹였다.

쌀을 나눠 줄 대상자는 미리 선발해 뒀다. 쌀을 나눠 주는 지역을 4곳으로 나눠 성곽 내외의 도시 지역은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서 왕이 친림한 가운데 진행됐다.

주변 지역은 승자들을 보내 산창(山倉)과 사창(社倉), 해창(海倉)으로 보내 왕을 대신해 나눠 주도록 했다.

화성행궁에서 음식물이 분배되는 동안 정조는 신풍루에 올라가 이를 지켜봤고, 백성에게 주는 죽을 직접 맛보기도 했다.

이 행사를 통해 화성부 인구의 10분의 1 정도가 혜택을 받게 됐다.

쌀과 소금은 4개 지역으로 나눠 배급됐다. 나이와 남녀에 따라 차등을 뒀으며, 이때 나눠 준 쌀이 모두 368석에 달했다.

정조는 당시 '화성 능행' 행사를 위하여 10만 3천여 냥의 재원을 조성하였는데,  그 자금의 일부를 떼어내어 제주도의 진휼곡(賑恤穀)으로 보냈고, 행사 후 남은 자금을 3도(都)와 8도에 분급하여 진휼곡으로 쓰도록 하였다.

이쯤되면 어진 임금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백성들이 다치지 않게 주의했다.


<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2월 12일 밤, 정조가 화성의 서장대(西將臺)에 갑옷을 입고 행차하여 군사조련을 실시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화면 제일 아래에 위치한 문은 동문인 창룡문(蒼龍門)이고, 중앙 좌우변의 대문은 오른쪽이 북문인 장안문(長安門), 왼쪽이 남문인 팔달문(八達門)이다.

당시 정조는 투구와 갑옷을 입고 직접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西將臺)에 올라가 군사들의 조련을 지휘했다.

무기로는 낭기(浪機)와 조총(鳥銃), 신포(信砲), 삼안총(三眼銃) 등이 동원됐으며, 여기에 참가한 군사는 모두 3천700여 명이었다.

정조는 군사훈련때 사용하는 총포에 백성들이 다치거나 피해를 입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줬다는 기록이 있고, 훈련이 끝난 뒤 수백 명의 장병들에게 궁시(弓矢)와 포목 등을 상으로 하사했다. 

따라서 정조는 공권력으로 백성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임금이 아니라,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하는 임금이었다...


# 유생들과 함께 공자에게 절했다


<알성도(謁聖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2월 11일, 정조가 화성에서의 첫 번째 공식행사로 거행했던 성묘(聖廟) 참배 장면이다. 학문을 사랑하는 정조의 유학진흥(儒學振興)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孔子)에서 주희(朱熹)에 이르는 21명의 중국 성현과 설총(薛聰)에서 박세채(朴世采)에 이르는 15명의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가장 뒤쪽의 대성전(大成殿) 위에 큰 차일을 치고 뜰에는 청금복(靑衿服)을 입은 유생(儒生)들이 시좌한 가운데 지금 섬돌 위의 오른쪽에서 정조가 4배를 올리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다. 대성전의 신문(神門) 앞에는 산선(?扇) 시위(侍衛)들이 서있고, 그 앞에 수행한 문무백관이 동서로 나뉘어 시좌하였다.

이곳에서 참배를 마친 정조는 행궁으로 돌아와 낙남헌(洛南軒)에서 문과와 무과 별시(別試)를 실시했다.

길과 산자락에는 구경나온 백성들이 매우 자유로운 동작으로 묘사되어 있다. 정조는 백성들에게 자유롭게 '임금 구경'을 할 수 있게 한 왕이라고 할 수 있다.  








# 백성들과 함께 불꽃놀이를 즐겼다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2월 14일 오후 정조가 화성행궁 안의 득중정(得中亭)에서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를 한 다음 저녁에 혜경궁을 모시고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장면이다. 기록화에서는 임금을 그리지 않기 때문에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의궤>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계단 앞 어사대(御射臺)에는 지금 혜경궁이 나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잠시 행차하여 가마를 열어 놓은 채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있지만, 임금의 어머니도 그리지 않기 때문에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매화포가 폭발하는 광경 가까이 백성들이 있으니, 백성들과 함께 한 불꽃놀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는 그렇게 백성들과 즐거움을 나누려고 했던 임금이었다....
 







# 정조는 백성들이 어려워하지 않는 임금이었다


<시흥환어행렬도 始興還御行列圖 >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윤2월 15일, 화성행궁을 출발하여 서울로 올라오면서 이제 막 시흥행궁 앞에 다다른 장대한 행렬을 묘사하였다. 처음으로 혜경궁을 모시고 함께 능행하여 무려 6,000여 명의 인원과 1,400여 필의 말이 동원된 가장 성대했던 행렬의 장관을 과시한 장면이다.

그림의 내용은 시흥행궁을 멀리 바라보면서 그 남쪽의 안양교(安養橋) 앞길에서 행렬을 잠시 멈춘 다음 정조가 직접 혜경궁에게 미음(米飮)과 다반(茶盤)을 올리는 매우 효성스러운 장면을 담은 것이다. 화면 밑에 정조가 능행을 위해 세운 시흥 행궁이 정조의 치정(治政)을 자랑하듯 거대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화면 중앙에 미음을 들기 위해 푸른 휘장으로 가린 혜경궁의 가마가 보이고, 그 바로 뒤에 산선(?扇)을 받고 있는 정조의 좌마(座馬)가 서 있다. 그리고 그린 아래 길가 빈터에 수라를 실은 수레(水刺架子)와 음식을 준비하는 막차(幕次)가 보인다.

원래 정조는 전체 그림의 용 깃발 아래에 가야하나, 어머니보다 앞서 갈 수 없다는 효심에 헤경궁 뒤에서 따라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래의 세부도를 보면, 당시 백성들은 임금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 부분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 부분도

오른쪽 아래가 수라를 실은 수레(水刺架子)와 음식을 준비하는 막차(幕次)이다.


국립중알박물관 소장 작품 부분도

정조는 모두 15차례의 화성능행 길에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려고 노력한 임금이었다. 재위 3년째에는, 상언(上言)·격쟁(擊錚)의 제도에 붙어 있던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들을 철폐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능행(陵行) 중에 그것들을 접수하도록 하였다.

그렇다. 정조는 백성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했고, 백성들은 그런 임금인 줄 알기에 편안한 자세로 그의 행차를 구경했을 것이다... 

백성들의 편안함은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조는 이번 비밀편지 발굴에서 보듯이, 신하들에게는 어렵고 무서운 임금이었는지 몰라도, 백성들과는 소통하려고 노력했고 학문과 문화를 발전시키려고 한 임금이었다... 그래서 이런 기록화도 남아있는 것이다....

알려지지 않았던 편지 299통에 너무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  그 편지들은 역사 서술을 위한 또 하나의 보조자료일뿐이다....  지금은 학계에서 그 편지들을 자세히 분석하기를 기다릴 때다....  (끝)

주 : 설명 중 일부는 수원시와 안산시의 자료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top

엮인글 주소 :: http://blog.ohmynews.com/arts/rmfdurrl/23661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