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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스님 인연의 끈 놓던날

진정 성불하소서

 

법장스님 인연의 끈 놓던날
‘육친의 정’ 차마 삼키지 못하고…“스님, 스님” 육신의 눈물 뚝뚝
조연현 기자
▲ 지난 11일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입적한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의 법구가 서울 조계사 극락전에 도착하자 스님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사람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11일 열반한 법장 스님이 불교계를 대표하는 ‘조계종 총무원장’이란 직책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삶의 모습’들이 드러나고 있다.

서울 견지동 조계사엔 빈소가 차려지자마자 남녀 재가자들이 엎드려 연신 눈물을 쏟았다. 이들은 법장 스님의 영정 사진을 보면서 “스님, 스님”하고 부르며 닭똥 같은 눈물을 방석에 뚝뚝 떨어뜨렸다. 또 한 여성은 조계사 마당에서 장례식에 쓸 만장을 그리는 것을 보고, 통곡하기도 했다.

출가자인 스님들의 빈소는 엄숙하고 조용한 분위기인 경우가 다반사다. 이처럼 극한 슬픔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왜일까. 법장 스님의 부음이 갑작스런 것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슬퍼하는 이들이 많은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19살에 충남 예산 수덕사로 출가했던 법장 스님은 일찍부터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데려다 길렀던 것으로 전해졌다. 법장 스님은 이들에게 직접 호적을 만들어주고 때론 아버지가 되고, 때론 스승이 되어 아이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법장 스님이 심장 수술을 위해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뒤부터 열반 때까지 줄 곧 옆을 지켰던 정묵 스님과 도신 스님들이 그런 이들이다. 정묵 스님은 “나에게 스님은 부모님 그 이상이었다”며 울먹였다. 정묵 스님이 빈소에서 입고 있는 옷은 실은 법장 스님의 것이다. 정묵 스님은 “서울대병원에서 스님께서 옷을 내게 주셨다”고 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던 것일까. 평소 입던 옷까지 평생 돌봐온 상좌에게 주고 간 것이다.

그의 상좌는 40명. 빈소를 지키던 상좌들은 빈소 밖에서 서로 껴안고 울음을 삼키거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곤 했다. 출가자들에선 좀체 보기 힘든 육친의 정 같은 것을 사형사제들 간에 나누고 있었다.

법장 스님은 수덕사 인근에서 부모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소년소녀 가장들도 돌봐왔다. 평생 통장이 없던 법장 스님은 어린 아이들을 유독 좋아해 돈이 생기면 한 푼 남김 없이 아이들을 위해 썼다고 한다. 이런 소년소녀 가장을 상좌로 두기 시작한 법장 스님은 그 뒤에도 따르는 젊은이들을 유발상좌(스님이 아닌 재가 제자)로 두었다. 이들이 무려 수백 명이나 될 정도다. 빈소를 지키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이들의 상당수가 이렇게 인연 맺어진 유발상좌들이다. 15일 조계사에서 거행될 영결식의 조사도 한 소년소녀 가장이 하겠다고 자청했다고 한다.

법장 스님의 부재에 충격과 슬픔을 느끼는 이들은 제자들만이 아니다. 법장 스님보다 5년 먼저 수덕사 원담 스님(현 방장)에게 출가한 사형인 정혜사 선원장 설정 스님은 “어린 나이에 출가해서부터 힘든 일은 본인이 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물불 안 가리고 돕던 사람인데…”라며 말을 잊지 못했다. 11일 오후 법구를 입관할 때는 설정 스님 등 사형사제와 제자들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슬퍼해 옆에서 부축했다고 한다.




역시 수덕사로 출가했던 불교환경연대 대표 수경 스님도 퉁퉁 눈이 부을 정도로 울었다. 수경 스님은 “출가한 뒤부터 친형처럼 돌봐주었지만, 환경운동을 하다보니 스님에겐 전혀 인간적 도리를 하지 못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스님께서 병고로서 도반을 삼았듯 우리는 지금 슬픔을 도반 삼습니다

수경 스님(불교환경연대 대표)

이렇게 홀연히 이 화택(火宅)을 빠져나가시다니요. 목이 메고 눈물이 흐릅니다. 계실 때는 몰랐습니다. 스님의 빈 자리가 이리 클 줄은 참으로 몰랐습니다. 며칠 전 스님께서 아픈 중의 공부가 진짜 공부라고, 옛 어르신들이 왜 병마로서 도반(道伴)을 삼으라 했는지 알겠다고 말씀하셨지요. 스님께서 병고(病苦)로서 도반을 삼았듯이 우리는 지금 슬픔을 도반 삼습니다.

스님과 저, 이승에서 인연 맺은 지 어언 40년입니다. 그 40년은 제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 세월이었습니다. 열여덟, 제가 처음 중이 됐을 때부터 스님께서는 크고 작은 일들을 챙겨주셨습니다. 뒷받침은 내가 할테니 열심히 수행만 하라고 챙기셨습니다. 마치 맏형과 같았습니다. 어찌 저뿐이겠습니까. 늘 그렇게 맏이처럼 챙기시는 스님은 우리에게 고요한 수행처를 만들어주시느라 시끄러운 곳에서 고요해지셨고, 힘드는 곳이 힘을 얻는 곳이라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스님께 왜 그리 냉정했을까요? 수행자들이야 구름처럼 무심해야 한다고 크고 작은 일들을 챙겨 받으면서도 당당하기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무심한 게 아니라 냉정한 것이었습니다. 그 냉정했음이 이제 갚을 길 없는 큰 빚이 되어 남았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어쩌다 스님께서 저에게 부탁을 했지만, 명분이 없다고 번번이 거절했습니다. 어찌 서운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도 스님께서는 여전히 넉넉하게 품으셨습니다.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를 할 때 오셔서는 눈시울을 붉히시던 스님! 끝까지 ‘나’를 따라오는 것은 명예도 사람도 아니야. 끝까지 남는 것은 원력(願力)뿐이야. 그렇게 격려해주시던 스님! 지리산과 북한산 골짜기와 낙동강 천릿길을 도량으로 삼을 때도 그리 하셨는데, 너무 일찍 가셨습니다. 안타까움이 되고 복받침이 됩니다. 저 또한 걸망을 내려놓고 가사장삼을 벗으면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슬픔이 차오르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스님께서 가시고 나니 스님이 크게 다가옵니다. 스님께서는, 성품이 순정하고 인정이 많으셨습니다. 허언을 할 줄 몰랐고 의리를 알았습니다. 이(理)와 사(事)의 모순으로 괴로울 때 보듬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일을 그치지 않은 스님은 우리의 맏형이었습니다.

스님 가시는 것을 보니 더 분명히 알겠습니다. 애당초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없음을. 그 건장한 체구를 전혀 아깝지 않다는 듯 부려놓고 가신 것처럼, 물거품 같은 세상, 아침의 이슬 같은 몸인 줄 알아 세월을 아껴 정진할 것입니다. 스님, 이제 홀가분하게 몸을 벗고 열반에 드셨으니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스님, 화합과 자비의 원력으로 다시 오십시오.

2005년 9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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