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잉문학(도)가 궁금해지기 시작한 김에 짧게 단상을 적어둔다. 잉문학이란 '인문+잉여'학 혹은 '인문+과잉'학이라는 뜻이다. 파생어로 잉문학도라는 표현도 쓴다. 여기서 잉여는 surplus를 뜻하는데, 이 단어의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다. 먼저 잉여, 과잉, 초과, 여분이란 뜻과 함께 남은 것, 즉 잔여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찌질하다'는 내포도 지닌다. 이들은 주로 2천년대 중반에 출현했고, 연령대로는 20대를 주류로 다른 연령층을 포괄한다. 이들은 -- 딱히 바람직하지 않으나 굳이 분류하자면 '사회과학'이 아니라 -- 대중 '인문학' 출판시장 및 강의, 세미나의 주요 고객이다. 당연하지만 이들이 탁월한 '이론 수집가'이기 때문이다. 대중매체, 온라인매체, 출판사, 온라인서점, 온오프라인 모임, 비/제도권 단체들을 넘나들며 형성된 네트워크가 이들의 집이다. 특히나 이들은 주로 온라인 상에서 암약하며, 특히 블로그, 트위트, 페이스북을 통해 '네트워크 전쟁'을 벌이는 (준準) 키보드워리워와 댓글 놀이를 하는 '정치 덕후'와 '이론 덕후'로 구성된 누리꾼이다. 이들의 일부 진화형은 자신이 학습한 인문학, 주로 '진보적'이란 명칭이 붙은 이론을 활용하여 자칭 온라인 논객을 자임하면서 '인정투쟁'을 벌이고, 결과물을 책을 엮어내기도 한다. 이들은 논객으로서 비평활동과 이론활동을 동등하게 보고, 때로는 이를 단순히 실천이라고 여긴다. 이런 '자폐적' 활동을 이들은 이론적 실천이나 과학적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활동은 엄밀히 이야기하면 정치 및 문화 비평이나 유사sudo-과학적 실천 -- 예를 들어 유사-정신분석 비평 -- 에 불과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들은 이론적 개념을 현실로 직접 조작하는 개념 조작, 다시 말해 현실을 추상적 개념으로 조작하는 작업에 탁월하다. 이들이 유사-과학자인 이유는, 무엇보다 자신들만의 문제설정에서 비롯한 현실 착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붕 떠있거나, 자신의 게토에서만 무한한 놀이, 내가 주화입마走火入魔라고 부르는 행태를 벌인다. 이들은 이런 강렬한 인정에의 욕망과 현실참여에의 열망, 그리고 유사과학적 활동과 함께, 아마도 뜨금! 놀라겠지만 탈권위주의를 가장한 권위에의 종속과 욕망, 즉 명망가와의 동일시를 특징으로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주로 386을 공격하는 논법을 보이면서도, 주요 참조점으로 이론적 권위(자) -- 물론 이런 권위 주로 제1세계에서 매개 없이 '도래'한다 -- 와 함께, 그들이 공격하는 386을 포함한 이른바 '선생' 급들을 지표로 삼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권위에의 종속 이면에는 '아케데미안'으로 부유하는 현실의 반작용, 즉 소속에의 열망이 존재한다. 게다가 이런 권위주의를 조장하고 향유하는 자들도 문제일 것이다. 이들은 계층적으로 볼때, '강남좌파'를 포괄하기도 하지만, 주로 자발적, 비자발적 '루저'층에 속하는 경우가 많고, 정치적 지향은 주로 진보신당 지지파가 많지만 범진보적인 '촛불좌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탄생과 진화, 그리고 영향력은 찬양과 열광의 대상이 아니라 검토와 반성의 대상으로 보인다. 이상은 잉문학도에 대한 나의 '편견'일 뿐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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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출판업계의 연예인들 2
Tracked from 좌파실천 [2011/03/06 22:54] 삭제서평꾼들이 활개를 치고 서평이 책으로 나오는 걸 보면서 책이 상품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체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대부분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발리바르, 랑시에르, 바디우)이나 아감벤, 라깡, 지젝, 들뢰즈, 네그리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늘어놓는다. 그들보다 앞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주장을 팔아먹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유행이 한참 지난 모양이다. 스스로를 '좌파'나 '진보'라고 부르는 그들은 예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