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9/26 01:08

창작

'일반이용자'의 창작이 늘어나면서, 그리고 그 창작이 당연히 '순수문화'쪽이 아니라 '장르문화'쪽에 치우치면서, 기존 장르문화의 분위기는 사그라들고(영화도 이 뒤를 따르게 될까? 아직 영화는 꽤나 자본집약적인 문화상품이라, 그리 손쉽게 창작의 자리를 내줄 것 같지는 않지만) 있다. 일반이용자의 창작이 장르문화로 치우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장르가 보다 손대기 쉬우니까. 그 와중에 장르창작자들의 생계문제, 저작권 문제, 매체문제가 이중 삼중으로 꼬이며 복잡해질 것은 슬프지만 자명한 얘기. 이 꼬인 과도기가, '강한 것만 살아남는다'는 식으로 흐르지는 않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연약한 많은 것들이 공존하기를 바라는 것이 문화다양성이라는 용어 아닌가. "에코토피아에서는 학문에서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희미하듯, 예술에서도 아마추어와 전문가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 에코토피아의 젊은이치고 악기 연주와 춤, 연극, 노래, 글쓰기, 조각, 그림, 비디오 영화제작 등등의 독창적인 예술활동에 몰두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작품 제작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을만큼 예술가로서 인정받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 에코토피아의 젊은 예술가들이 예술로 성공하지 못할 경우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뿐이다. 국가에서 받는 생활보조금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면서 계속 노력하거나, 직장을 얻어 생활하면서 취미활동으로 예술을 추구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기묘한 일이지만, 거의 모든 에코토피아 사람들이 예술활동을 탐욕스럽게 추구한다는 사실은 예술가로 성공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 누구나 다 예술가를 자처하기 때문에, 예술가라는 이름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든 탓이다. ... 이것은 창조적인 탁월함의 정도를 지나치게 민주적으로 위축시킨다. 예술이 누구나 다 하는 거라면, 피카소나 반 고흐가 더 이상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에코토피아/어니스트 칼렌바크)" + 하지만 고흐의 그림이 언제가 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는 점은 내가 아무리 그림을 그려도 변함이 없다. (고흐가 아니라 내가 안 좋아하는 화가를 예로 들었다면 이 소린 없었겠지만.) ++ '창조적인 탁월함'과 '민주적인 위축'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는 것이 좋을지는 모르겠다. 아마, 중세나 고대의 건축물을 지금 시대에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더 이상 그런 건축물을 현대는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민주적인 위축'이란 '다른 방식'이란 말이다. + 장르문화는 읽는 분들이 각자 기준하시길. 저두 편의상; 대강 만든 용어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