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학교가 올해로 개교 70주년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까? 4월 부터 언론에도 종종 나오고 이것저것 행사들이 많은 듯 하다.

 

교 생각을 하다 보면 처음 입학 할 때가 종종 생각난다. 나는 음악을 좋아했던 소년이었고 친구들, 그리고 지인들과 소소하더라도 음악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진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나 였는데 당시 교제하던 여자친구에게 보다 좋은 남자친구가 되려고 갑자기 진학을 결심했다. '좋은 남자친구=대학생' 이라는, 지금 생각 해보면 어처구니 없는 생각 이지만 돌아보면 순수했던거 같아서 조금 황당하고 조금 귀엽기도 하다.

 

하튼 그래서 나는 단 2 주간 수험생 생활을 했고, 집 가까운 몇몇 대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나는 워낙 진학에 관심이 없었기에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같은, 사람들이 모두 알 정도의 학교가 아니면 나는 그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또한 당연히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학벌이 한 사람에게 어떤 의미로 작용 되는지 역시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친한 선생님들에게 "이런 이런 이런 학교 갈 수 있는데 어딜가야 할까요?" 라고 물어보았는데 지금 우리학교에 가라고 했다. 나는 단순하게 당시 집에서 버스로 30분 가량이면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 없이  선생님들의 말을 따라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를 선택했다. 만족스러웠다. 일찍 안일어 나도 된다는 사실이. 하지만 결과적으로 선생님의 말을 따른게 문제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과 정말로 각별한 2학년 때 선생님. 그들은 당시 소위 "진보적" 교사들이었다. 물론 그들은 절대 의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에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갈 대학을 정했다고 말했는데 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던거 같다. "데모만 하는거 아니냐?" 난 사실 그 때까지 집회나 시위를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뭐랄까.. 굳이 적당한 표현을 쓰자면 그냥 그런 것에 개념이 없었다. 내 세대에게 이미 그것의 풍경들은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운이 좋게(?) 고교시절 진보적 은사들과 내가 좋아했던 음악(RATM 이라든지), 영화(마이클 무어나 켄 로치, 그리고 정성일과 영화잡지 키노 라든지), 만화(박무직 이라든지)는 내 판단력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런 나는 우리학교에 입학했다.

 

것은 매우 기이한 광경이었다. 김대중 선생은 당시에 나에게 굉장히 긍정적 이미지였는데 학교에 붙어있는 벽보와 선배들이 적은 플랭카드에는 "정권분쇄", "김대중 퇴진", "노동해방", "통일" 등의 언표들이 도배되다시피 걸려있었고 그 때까지만 해도  "민가"라는 부류의 노래들을 캠퍼스 어디선가 누군가는 기타를 옆에 끼고 항상 부르고 있었다. 나는 철학과를 지망했음에도 고교시절 은사들의 권고로 현대 정치사, 근현대사 등의 과목을 수강했다. 강의 하는 교수라는 사람들의 눈은 번뜩였고 진실을 말하는 듯 했다. 군대를 다녀온 듯한 형들은 선생님인 교수들과도 주눅들지 않고 열띤 토론을 했다. 또한 수강생이 많지 않은 과목은 자장면을 먹으며 토론하기도 했고 마지막 저녁 수업에 흡연자들만 듣는 수업은 모두 저마다 담배를 입에 물고 토론하기도 했다.

 

PD써클 쪽의 선배들과 NL써클 쪽의 선배들 모두와 친했다. 사실 그 때는 두 써클의  형, 누나들이 하는  활동의 차이가 뭔지도 몰랐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친했다. 아마도 그 때까지는 음악이 제일 큰 관심사여서 그런 것도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학년이 올라가며 종교학에 더 흥미를 느껴서 종교학을 전공하기로 하였고 국제관계-정치학도 복수로 전공하기로 했다. 그렇게 학교생활을 하며 나는 학교에 대해 천천히 알게 되었다. 선배들이나 교수들은 확실히 우리학교를 자랑스러워 했다. 선배들은 학교 뿐만이 아니라 집회에 다녀오면 집회의 이야기 들도 해주었다. 교수들도 술자리를 함께할 때면 그런 것들을 이야기 하고는 했다. 특히 교수들은 대부분 서울대고려대 출신으로 우리학교가 자신들의 모교도 아니었는데 자신들이 학생시절 바라본 우리학교와 우리학교의 선배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는 했다. 역사와 상징성이라는 것들.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휴학사유는 남들이 다 하는  군입대...라기 보다는, 지난 3년 가까이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져서 학교에 대한 의욕도 떨어져 버린데 있었다. 소위 "찌질한" 이유였지만 뭐 어쩌겠는가..나는 휴학 후 2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했다. 스물 셋이라는 나이가 되서야 내가 군입대가 상당히 늦었다는걸 깨달았다. 나는 입대시기가 많이 늦은 걸 알고 군대를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을 수소문 했다. 한 친구가 동반입대를 하면 빨리 갈 수 있다기에 동반입대자를 찾았으나 씁쓸하게도 친구들은 모두 입대한 뒤였고 난 홀로 남아 있었다... 그러자 낙담한 나에게 다시 지인들은 해병대에 지원하면 빨리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난 해병이 되었다. 해병대는 입대 8일 전에 입대하게 된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정말로 무서운 곳이었다...

 

병 정도 되자 우리 연대에서 파병병력을 선발했다. 나는 여전히 분쟁이나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이러한 관심은 내가 밖에 있었으면 나를 반전시위로 뛰어들게 했겠지만 해병인 나에게는 파병으로 연결되었다. 원래 해병에 대한 동경이 있어서 해병대에 온것이 아니듯 파병은 나에게 명예나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곳을 단지 '보고' 싶었다. 이라크에 가서도 나와 동료들은 한국군 주둔지인 아르빌로 배치받지 않고 바그다드로 배치 받았다. 따라서 나는 많은 자극을 얻고 많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되돌아 올 수 있었다. 전역을 하고 바로 복학을 했다. 8학기, 4년 만이었다.

 

학 후에는 어떤 남자 아이든지  의욕이 넘치기 마련이다. 나는 독특한 군대경험으로 문제의식이 충만해져서 공부도, 운동도 모두 적극적으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학교에 돌아왔을 때 아이들이 입는 옷이 바뀐 것 처럼, 분위기는 많이 달랐다. 사실 내가 놀란 것은 세 가지인데 우선 첫째로 4년만에 등록금이 50%이상이 인상되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두번째로 학교와 학생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수들은 이제 많이 늙고 지쳐보였다는 것. 1, 2학년 시절에도 우리학교에서 계열을 구분하지 않고 스스로 사회에 대한 세미나를 하고 전략을 세우고, 현장에 뛰어드는 학생들이 굉장히 많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절대로 고립감이나 소외감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복학하고 소위 운동을 한다는 후배들은 고립되어 있어 보였고 때때로 학생들에 의해 "왜 그런걸 하나", "그렇게 난리를 쳐도 너희들이 하는게 뭐냐"는 식의 비난도 받았다. 4년은 무척 긴 시간이었을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걸까...

 

학한지 얼마되지 않아 총학생회에서 집부를 맡아 달라는 요청과  영자신문사에서 기자로 활동을 해달라는 요청을 동시에 받았다. 나는 영자신문사에서 활동하고 총학생회와 긴밀하게 협력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 이유는 영자신문사가 보다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총학생회는 길게 이어지는 등록금 투쟁으로 지치고 고립되어 있는게 분명했지만 존패의 위기에 놓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자신문사는 기자들이 턱없이 부족했고 일관된 학교 당국에 대한  비판 기사 덕택에 폐간 위기에 몰려 있었다. 총학생회의 교내 집회에는 정말 적은 학생들만 모였고 대부분의 학생은 힐끔힐끔 보고 지나갔다. 총학생회는 사실 어처구니 없는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며 학생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학생들은 무관심 했다. 총학생회의 방식은 투박하기는 했지만 순수했고 태도는 일관되었으며 책임감을 지니고 있었다.

 

는 졸업후 바로 동대학원에 진학했다. 분위기는 조금 더 바뀌었다. 최근 2년간 분위기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내가 졸업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영자신문은 더 이상 발행되지 않았다. (2) 지금 대부분의 교수들은 도전적인 연구 보다는 학교발전계획을 구상하던지 자기계발에 주력하던지 안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그리고 이제 총학생회는 외부 투쟁은 커녕 아무런 교내투쟁도 하지 않는다. (4) 이제 등록금은 내가 입학했을 때의 두 배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세부적으로도 관료제적 요소와 권위적 분위기가 심각하게 확산되었다. (5) 교내 채플은 필수과목인데 자거나, 핸드폰을 들여다 보면 결석처리가 된다는 말이 들린다. (6) 학교 홈페이지의 자유 게시판은 현재 등록중인 학생에게만공개되고 글을 작성할 권리가 주어진다. 외부인은 소통에서 배제된다. 오래된 이야기다. (7) 학보사 역시 외부 정세 비판도 학내 비판도 거의 하지 않는다. 편집회의를 주간 교수가 주도 한다고 한다.

 

 

선배들과 교수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자기 세대의 책임들을, 이상들을 실천했고 그것은 평가 이전에 특수한 결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 흔적은 법과 체제에 남아있다. 또한 후배들을 사랑한다. 진심으로.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시야와 능력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또한 학교의 개교 7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아직도 우리 학교는 특정시기 보였던 진보적 성향으로 인해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상징성을 인식하는 세대들이 아직 왕성하게 활동중이다.

 

지만 앞으로 "진보" 라는 언표를 통한 광고나 홍보는  절대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것을 보면 역겨움이 스쳐간다.명백한 거짓말이지 않은가..

 

 

 

 

Nirvana,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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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8 01:41 2010/05/08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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