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
- 2008
-
-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
- 2008
-
- 국가state와 대중mass
- 2008
-
- 전뇌(電腦)코일(1)
- 2008
-
- 원더걸스와 소녀시대(9)
- 2008
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일본은 서양 철학의 수입에서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서점의 철학 코너를 놀라워 하면서 돌아 보다가 집어 든 책은 05년 런던대학에서 열린 연속 강연회 의 원고를 묶어 출판한 책, <<도래할 데리다>> 였다. 지젝, 바디우, 발리바르, 스피박 등 쟁쟁한 사람들의 원고로 가득한 이 책은 놀랍게도 영국보다 약 열흘 먼저 발매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지 않았을까 싶은데, 번역의 질이야 내가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 속도에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비도 오고, 돌아다니는 일에도 질려서 호텔에 틀어 박혀 발리바르의 글을 한글로 옮겨 가며 읽었는데, 헤겔과 구조주의 언어학과 데리다의 관계를 다룬 흥미로운 글이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본어에도 철학 개념에도 서툴기 때문에 그저 아리송할 뿐이었다). 일본에서 얼추 다 끝내서 조금 손본 다음 블로그에 올리려고 했으나, 같은 책의 자크 랑시에르의 글이 너무너무 재밌어서 랑시에르의 글을 먼저 옮기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랑시에르의 글은 민주주의를 둘러싼 다양한, 그리고 상충되는 입장들이 민주주의의 개념 속에 이미 들어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을 통해서 그의 글은, 한국에 빗대어 말하자면, 박정희의 '한국식 민주주의'가 성립 가능성,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혁명적 요구(주류 언론이 언제나 망각케 하려는 것이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혁명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요즘의 '과잉 민주주의'에 대한 '공허한' 걱정이나 법의 보편적 지배에 대한 긍정 속에서의 자유의 추구라는 역설 까지를 아우르고 있다(마지막 항목을 쓰면서 이글루스에 쓴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에 대한글에, '헌법이 설립하는 인권'을 얘기하며 날 선 리플을 달았던 사람을 떠올렸다. 의미심장하게도 그 사람의 아이디는 하루키의 소설에서 차용된 것이었고, 나는 하루키의 소설이 어떤 자유의 형식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고 있다).
내게 랑시에르의 글이 흥미로웠던 것은, 내가 저 위에 열거된 그 어느 것인가에 머물러 왔으며, 저 모두가 혼재된 상태에서 사고를 해 왔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에 대한 시덥잖은 농담 -20대에 맑스주의가 아닌 사람은 바보지만, 20대가 지나서도 맑스주의자인 사람은 더 바보다(이게 맞던가? 그보다 이게 농담이긴 한가??)-은 그 나름대로 핵심을 찔러서, 이 뒤엉킴을 겪는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님을 말해주는 것 같다. 농담이 말하고 있는 것은 맑스주의자가 되고, 안 되고가 결국 민주주의 속에서의 '사고思考'의 문제, 즉 사고가 곤궁에 부딪혔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20대가 지나서는 사고의 곤궁이 아니라 생활의 곤궁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좋은 글에 들어 가기 전에 사언이 너무 많았다. 비록 질은 썩 좋지는 않겠지만 내 번역이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하고, 나처럼 조금만 생각하려고 하면 머리가 아픈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번역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본어 문형 그대로 옮길 것이며(일본어 번역은 꽤 직역에 가까운 듯), 내가 원 저자가 다루는 철학 용어들은 물론이고, 그것에 대한 일본쪽 수입의 맥락도 잘 모르는 탓에(흑흑) 어지간하면 손 안 대고 그대로 옮기기로 했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명기하여 설명을 달 생각이고, 일본어판에서 역자가 첨부한 번역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명기하여 옮길 것이다. 번역은 딱히 계획은 없으니 시간이 나는대로 슬금슬금- 기회가 닿는대로 영어판이나 독어판(있으면)을 구해 수정할 생각이지만, 이곳 생활이 맘 먹은 대로 되질 않아서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 어쨌든 시작하자.
------------------------------------------------------------------------------------------------------------------------------
민주주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 Does democracy mean something?
자크 랑시에르 Jacques Ranciere
나는 데리다에게 바쳐진 연속강연에의 나의 개입에 대한 예비적 언명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데리다의 제자였거나 그의 사상의 전문가였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가 나의 교사였던 때-아주 옛날의 일이다-부터, 나에게는 그와 철학적인 문제를 논할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내가 그에게 표현할 경의는 그의 저작에 대한 주석이 아니다. 그를 기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90년대에 점점 그의 사고의 전경을 점하게 된 개념과 문제-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무엇이 의미되고 있는가-를 다루는 나 자신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란 무엇인가
데리다는 <<우애의 정치학The politics of friendship>>에서, 페리클레스의 것으로 여겨지고, 플라톤의 <<메넥세노스>>에서 부연되어 있는 잘 알려진 명제-'아테나이 인의 통치는, 이름은 민주주의이지만, 현실에서는 귀족제, 즉 다수자의 찬성을 얻은 최고로 뛰어난 자의 통치이다'(*주1)-에 주석을 다는 것에 의해, 이 쟁점을 전개한다. 데리다는 이 언명의 기묘함을 지적한다.(*주2) '민주주의적' 통치라는 수사 그 자체가, 이 형태의 통치에 두 개의 대립하는 이름이 부여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불리지만, 그러나 사실상 귀족제이다. 이 '그러나'를, 이름과 사물 사이의 이 이접離接을,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들은 그것을 수사修辭 상의, 또는 통치를 위한 허위라고 보거나, 이름과 '사물' 사이의 차이에 의해, 무언가 좀 더 근본적인 것이, 민주주의를 다른 어떤 형태의 통치와도 다른 무언가로 만드는 내적인 차이가 가리켜지고 있다고 상정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이 물음은, 데리다에 의한 민주주의의 아포리아적 구조의 탐구와, 내가 오히려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라고 부르기를 선호하는 것에 대한 나 자신의 탐구에 공통의 근거를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라는 것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이름과 현실을 다루는 현대의 두 가지 논쟁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첫 번째 논쟁은 중동에 민주주의를 전파하기 위한 미국의 군사작전에 관한 중요한 불일치를 품고 있다. 이라크의 선거와 레바논에서 일어난 반 시리아 저항운동 직후, <<이코노미스트>> 지의 표지에 '중동에서 민주주의가 시작'이라는 말이 춤을 췄다. 민주주의의 시작에 대한 자기-만족은, 이름과 현실 사이의 차이에 대한 두 갈래의 논증구조- '.....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는 시작된다' 또는 '민주주의는 시작되지만, 그러나 .....'-에 따라 정식화된 것이다.
'.....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는 시작된다'는 어떤 이상주의자들의 논의였다-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인민의 자기-통치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힘에 의해 다른 민족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언하면,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즉, 민주주의에 대한 실용주의적인pragmatic 견해를 취하여, 민주주의는 '인민의 권력'이라고 하는 유토피아적인 견해를 치워 버린다면, '민주주의는 시작된다'라고. 두 번째 논의는, 민주주의는 시작되지만, 그러나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는 것은 법의 지배, 자유로운 선거 등을 가져다 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선 혼란을, 민주주의적 생활의 혼돈을 가져다 주는 것을 의미한다. 도널드 럼스펠드가 사담이 실각한 후 일어난 약탈에 관해 말한 것처럼-우리들은 이라크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 것이며, 자유라는 것은 그런 종류의 일을 행할 가능성 또한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도 론과 그러나 론은 요컨대 일관된 논리인 셈이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기-통치의 목가 등이 아니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혼란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초대국의 병기에 의해 외부에서 야기되는 것이 가능하며, 또 아마도 야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초대국super power(=초권력)'은 절대적인 군사적 우위를 가진 나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민주주의에 의한 혼란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민주주의를 넓히기 위한 군사작전을 지지하는 논의는, 우리들에게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것에 대한, 지금만큼 열광적이지는 않았던 훨씬 오래된 논의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그런 논의는 30년 정도 전 삼극위원회(*일역주1)에서 행해진,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두 개의 주요한 논의를 끊임 없이 바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삼극위원회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몽상가들이 민주주의를 인민의 자기-통치와 동일시함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시작된다. 이런 몽상가들은 삼극위원회에서 비난된 '가치지향의 지식인'과 같은 종류의 등장인물이다. '가치지향의 지식인'은 '정책지향의 지식인'의 실용주의pragmatism에 대립하는 '적대적문화'를 조장하고 지도자와 권위에 도전하는 과잉의 민주주의적 활동을 촉진하고 있다고 비난받은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작되지만, 그러나 그것과 함께 혼란도 시작된다.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약탈에 대해 도날드 럼스펠드가 한 농담은 30년 전에 사무엘 헌팅턴이 행한 논의를 그대로 반복한 것처럼 들린다. 헌팅턴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정부에 압력을 가해 권위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개인이나 집단을 자기-지배와 연결된 규율과 희생의 필요성에 저항하게 하는, 그런 요구의 증대에 다다르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새로운 영토로 넓히기 위한 군사작전이, 현재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서 이해되고 있는 패러독스를 전경화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민주주의적 통치'라고 하는 것은 좋은 정책을 위협하는 과잉을 통제할 수 있는 통치형식을 의미한다. 이 과잉은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것으로써, 그 이름이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의 통치능력>>(*주3) 에 기술되어 있듯이 민주주의적 통치를 위협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생활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이 위협은 완전한 이중 구속double bind으로써 나타난다. 한편, 민주주의적 생활은 인민에 의한 '자기-통치'라는 이상주의적 관점의 실시를 의미한다. 그것은, 좋은 정책의 원리와 절차, 권위, 과학적 전문지식, 실용적인pragmatic 경험을 침식하는 정치활동의 과잉을 동반한다. 그 때문에, 좋은 민주주의는 정치적 과잉의 억제를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치활동의 억제는 요망과 요구를 증대시켜, 정치권위와 시민으로서의 행동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사적생활' 또는 '행복의 추구'에의 권력부여에 다다른다. 그 결과로서, '좋은 민주주의'란, 민주주의적 생활의 본질에 내재한 정치에의 참가와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이중의 과잉을 순치할 수 있는 통치형식을 의미한다. 현대의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즉,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인 생활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는 통치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며, 후자에 의해 억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라고.
-------------------------------------------------------------------------------------------------------------------------------------------
주1) Plato, Menexenus, 238c-238d
주2) Jacques Derrida, Polittics of Friendship (London: Verso, 1997), p93-113
일역주1) 삼극위원회: 1973년 10월에 미국, 일본, 유럽 세 지역의 민간조직으로서 발족. 상호의존의 심화라는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이해관계의 조정에 기울기 쉬운 정부간 관계를 보완하고, 더 넓은 시야에서 국제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75년에 도쿄와 교토에서 열린 연차총회에서는 중동평화 등과 함께 민주주의의 위기가 논의되었다. 본문에서 나오는 <<민주주의의 통치능력>>은 그 때 제출된 문서이며, 사무엘 헌팅턴, 미셸 크로졔, 죠지 와타누키 삼인이 각각 미국, 유럽, 일본의 민주주의 상황(정권담당자가 피치자의 요구에 얼마나 응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 피치자에게 얼만큼 정부의 권위와 정통성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보고했다.
주3) Michel Crozier, Samuel P. Huntington, Joji Watanuki, The Crisis of Democracy - Trilateral Commission Task Force Report n. 8(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75).
며칠 도쿄에 머물렀다.
도쿄는 서울보다 거리의 폭도 좁고, 건물의 높이도 낮아서 약간 아기자기한 느낌이 묻어나는 귀여운 도시였고, 다양한 스타일의 사람들이 많아서(일본 남자들은 다들 신기할 정도로 날씬해서 하나 같이 스키니를 입고 있었고, 소문으로만 듣던 코갸루가 아직도 거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무척 신기했다-_-;) 그냥 걸어다니기만 해도 그리 심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은 서울과 비슷한 또 하나의 대도시였고, 안타깝게도 대도시의 문화를 향유할 만한 금전적 여유가 없는 나에게는 더욱이 그다지 좋을리는 없는 곳이었다.
9월 초인데도 끔찍하게 덥고, 게다가 하루 종일 소나기가 오락가락 하고, 급기야는 태풍까지 찾아온 도쿄에서 유일하게 마음 편히 쉴 수 있었던 곳은 도쿄대학의 캠퍼스 뿐이었다. 오래된 역사를 보여 주는 듯, 곳곳에 아름드리 나무가 솟아 있는 캠퍼스는 울창하다는 느낌마저 주었고(아쉽게도 배터리가 없어서 사진은 찍지 못했다ㅠ.ㅠ), 게다가 개강 전인지 무척 한산했다. 그리고 캠퍼스 특유의 싼 커피와 샌드위치!
굳이 도쿄대학을 찾은 것은 일본의 옛 학생운동이 지금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하지만 캠퍼스 안의 게시판에는 어떤 흥미로운 게시물도 붙어 있지 않았고-하지만 한국과는 달리 기업의 홍보물도 붙어 있지 않아서 한결 보기 좋았다-, 야스다 강당도 굳게 문이 닫힌 채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그 무언가는 뜻 밖의 장소에서 마주칠 수 있었는데, 바로 캠퍼스의 서점이었다. 일본에서는 책이 더러워지지 않게-아니면 책 제목을 읽히지 않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종이를 접어 커버를 만들어 씌우는데, 서점에는 여러 종류의 책 싸는 종이가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우연히 점원이 내 손에 쥐어 준 종이가 바로 위의 사진. 한글어로 씌여진 문장을 읽었다면 짐작하겠지만, 저 위의 문자들은 모두 일본 헌법 제9조를 번역한 것이다(모두 13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전문은 다음과 같다.
(1)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국제평화를 진심으로 희망하며, 국제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국권(國權)의 발동(發動)에 의한 전쟁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를 포기한다.
(2)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그리고 그 외의 어떠한 전력(戰力)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交戰權)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북 커버를 만든 곳은 도쿄대학생협 평화프로젝트로 이들은 다음과 같이 발행의 이유를 적어 놓았다.
<전후의 식량난, 물자난을 협동의 힘으로 이겨내려고 만들어진 대학생협에는, 안심하고 공부하기 위해서는 평화가 필요하다는 이념이 지금도 숨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을 금지한 일본국 헌법 제9조는, 대학생협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찾아오는 여러 나라의 유학생들이 헌법 제9조를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을 바탕으로 이 북 커버가 만들어졌습니다. 13개국의 언어로 번역된 헌법 제9조 북 커버를, 활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짧은 문장이지만 간절한 마음이 전해 오는 듯 하여 마음이 움직였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에는 평화 헌법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하는 학생들도 있는 것이다. 고작 며칠, 그리고 몇 시간 머물 거면서 제법 큰 기대를 품었던 탓에,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마주침이었다.
일본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은 도쿄 대학의 캠퍼스와 북 커버와 아사히 맥주였다. 정말로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밋밋한 나날들이었다. 한편으로는 독일행 비행기의 경유 시간이 안 맞아 들어온 것이니 괜찮지 않나 싶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이미 늦은 거 며칠 더 늦으면 어떠냐는 생각을 뒤로 물리고, 어린 시절 일본게임이나 만화를 그렇게 좋아했음에도 지금껏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지 못한 일본에 간다는 생각에 부풀어 떠난 것인데 이건 좀 너무했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 억지로 몸을 일으켜도 밖에서 몇 시간 못 버티고 다시 들어와 버렸던 것을 보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관광객으로서 도쿄를 헤매고 다니는데, 내가 관광객임이 왜 그리 낯설고, 또 타지에서 관광객으로 머문다는 것은 어찌나 재미없게 느껴지는지, 내가 도쿄 대학에서 옛 흔적을 찾아 헤매거나 길에서 일본 공산당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사본 것은 어떻게든 관광객과는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기대해도 결국 여행이라는 과정 속에서 내가 관광객일 수밖에 없다면 내게는 여행이라는 게 별로 맞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댓글 목록
무한한 연습
관리 메뉴
본문
라임님이 올려 주는 글을 읽을 때마다(아,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온다던 랑시에르 한국어 번역본은 왜 안 나오는 것인지라는 생각만(^.^;). 잘 지내고 계시죠(^.^)?부가 정보
라임
관리 메뉴
본문
랑시에르를 무연님 덕에 알게 되어, 그의 글도 한 편 읽게 된 것이니 저도 무연님한테 고마워 해야 할 일이지요^^ 여행을 나온게 아니라 당분간 살러 나온 것이라서 외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생하고 있어요 흑.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