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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경실련] 글로벌 시대의 사이버 '제국'과 '다중'

글로벌 시대의 사이버 '제국'과 '다중'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축소되는 지구는 현대 기술의 축복 덕이다". 이런 류의 주장은 기술의 패권적 쓰임새를 가리고, 소위 강대국들의 독단적 의사 결정을 쉽게 범지구화와 등치시킨다. 물론 범지구화를 방해하는 모든 것은 시류를 거스르는 반역에 해당한다. 미 뉴욕타임스에서 통뼈가 굵은 토마스 프리드먼은 지난 달 제노바의 주요 8개국 정상 모임에 항거했던 이들을 바로 이런 논리로 나무란다. 한마디로 기술의 진보성도 모르고 범지구화에 역행하는 '반(反)글로벌주의자'로 못박는다. 시위자들은 졸지에 하나되는 세계의 진보를 거역하는 과거 회귀론자들로 낙인찍힌다. 하지만 제노바의 시위 현장에서 '축소되는 세계'의 청사진은 오히려 지옥에 가까웠다. 미 로스엔젤레스 경찰국에서 파견된 교관들의 특별 훈련을 받고 첨단 기술로 무장한 제노바 경찰들이 전세계 시위대들을 향해 휘두르는 무력 진압과 유혈의 얼룩들은 글로벌화의 정체를 여지없이 폭로했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공동으로 펴낸 제국(Empire)을 보면, '제국'의 3대 통제력으로 폭탄, 화폐, 정보/기술(ether)을 든다. 역사적으로 폭탄을 통한 힘의 독점이나 화폐의 규제가 부분적으로만 그 힘을 행사해왔다면, 정보 기술의 영향력은 범지구적이다. 이는 모든 대안적 경로를 억압하고 자본의 힘 아래 전 지구사회를 복속시키는 가공할 힘이다. 어쨌거나 미국은 이미 이러한 제국의 세 가지 요건을 두루 갖춘 국가다. 두 저자의 재미있는 지적처럼, 미국은 워싱턴(폭탄), 뉴욕(화폐), 로스엔젤레스(정보 기술) 모두를 지니고 있다. 지구화가 미국화와 등치되는 이유에 대한 적절한 지적임에 틀림없다. 제국의 기획은 바깥이 없는 지구 영토의 구상이다. 외부가 없는 공간의 아이디어는 21세기 정보 패권을 노리는 미국의 아이디어와 일치한다. 미국의 글로벌 정보 초고속도로의 기획은 이와 맞닿아 있다. 익히 알려진대로 미국은 일찌감치 '서비스경제모델'을 도입하여, 경제의 정보화를 적극적으로 수행한 나라다. 1930년대에 안토니오 그람시가 옥중수고를 정리하면서 예견했던 '미국주의'의 상이 현재 미국이 갖고있는 정보 패권의 힘인지도 모른다. 그람시가 보았던 미국의 모습은, 유럽에 비해 청산할 과거의 기생적 유산들이 적어 자본 축적의 고도화를 빠르게 수행하고, 내부적으로 경제적 '구조'가 상부구조를 더욱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단순 합리화된 거대 부르주아 국가였다. 미국이 신경제론과 현실을 전세계에 강요하기까지 과거 공장시대의 본원적 축적이 현재에 이르는 바탕이 되었다는 얘기다. 작년 미국 상무부 보고에 따르면 정보기술 분야의 국가간 경쟁력에서 단연 1위는 미국이었다. 미국의 대외 경제정책 중 전자상거래는 대통령의 필수 과업이었다. 미국에게 정보와 정보망은 전세계의 주권과 국경을 빛으로 무너뜨려 세계시장을 도모하는 거대한 힘이다. 특히 미국이 지닌 정보 패권의 유지와 확대는 거대 자본에 의한 기술의 독점에서 비롯된다. 지난 수년간 사상 최대의 기록을 세우며 벌어지고 있는 정보통신기업들의 합종연횡과 정부의 탈규제 정책은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은 내부적으로는 고전적인 타자본 흡수를 통해 독점력을 배가하고, 국제적으로 지적 재산권 등의 국제적인 공인을 글로벌 외교나 협상 채널 등을 통해 강제하면서 성장했다. 이것이 미국이 앞장서 벌이는 글로벌화의 진면목이다. 물론 미국이 지닌 글로벌 하이테크 독점은 개발국가들에게 미국식 모델을 따르고 따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글로벌 동원의 합의 기제를 필요로 한다. 한국과 같이 '정보입국'의 꿈을 꾸는 나라들에 심어진 벤처기업의 신화는 신경제론을 강화하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미국식 자유주의 정신과 시장주의를 적절히 뒤섞어 정보경제를 자본주의의 미래로 추켜세우는 미국의 전략은 개발국들에게 쉽게 먹혀들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들 국가로의 새로운 정보모델 이식은 미국이 지닌 정보 독점력을 확장하는데 기여한다. 제국의 독점은 쉽게 '코드'의 독점으로 넘어간다. 기술적 코드의 독점은 기업간, 국가간 불균등을 영속화하는 수단이다. 일단 한 기업에 의한 코드의 독점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관련 코드들도 독점적 기술로 편입되고 깨기가 힘들어진다. 산업 시대의 자본 독점의 폐해에 비해 정보 독점이 더 심각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미국은 이러한 코드의 독점력을 움켜쥐고 전세계를 새로운 미국식 자본주의의 비전인 '신경제'로 끌어들인다. 이것이 과거 제국주의의 위상과 비교해 새롭게 달라진 제국이 가진 위험천만한 모습이다. 하지만 제국의 구상은 간단하지 않다. 제노바 시위대의 모습에서처럼 글로벌 제국에 대한 글로벌 '다중'(multitute)의 저항은 새로운 시대의 정치적 가능성을 열고 있다. 다종다양한 정치적 실천 집단들이 네트로 연결되어 '가상 연좌시위'(virtual sit-in)를 벌이고, 이를 현실의 오프라인 공간에서 분출시키는 범지구적 저항의 새로운 모습이 등장한다. 이들이 문제삼는 것은 범지구화 과정의 투명성과 민주화이다. '축소되는 세계'에서 더불어 같이 사는, 그리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삶의 조건을 요구한다. 인터넷, 위성, 이동통신 커뮤니케이션에 기반한 범지구적 가상공간은 제국의 기획에 쉽게 말려들기도 하지만, 전세계의 시민 단체들에게는 제약없는 연대와 활동의 힘을 가져다준다. 기술 세례의 명목으로 더욱 가속화되는 글로벌 불평등의 구조를 깨기 위한 국제적 연대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이다. 이제 저항의 국제적 연대는 물리적 공간과 가상의 온라인 공간에 걸쳐 펼쳐지는 제국의 탐욕에 대한 강력한 보루로 등장한다. 그럴수록 전세계에서 공동의 이슈를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글로벌 민주화의 강력한 요구가 그리 우울하지않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징후로 비친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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