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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종합예술대학원 신문] 0과 1로 본 디지털 문화의 변증법

0과 1로 본 디지털 문화의 변증법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CyberMarx.org) 無와 1 수학자인 브라이언 로트먼(Brian Rotman)은 1987년에 쓴 {무의 의미작용: 0의 기호학}에 서 13세기부터 시작된 서구문화를 바라보며 현실에 대해 맺고있는 인간의 관계가 급격히 변 하게되는 세가지 발명을 들고 있다. 그는 '무의 기호'인 0의 사용, 경제적 등가교환을 위해 고안된 '가상' 지폐의 출현, 원근 재현에 있어 소멸점의 이용을 지적한다. 로트먼이 얘기한 이러한 '무'(nothing)의 지표들은 인간에 의해 구성될 상대적이고 인공적인 세계관의 출현을 예고한다. 하이데거는 '무'란 부정과 없음보다는 '존재'(being)의 근원을 설명하는 열린 자원이라고 본다. "무가 존재를 배회한다"는 샤르트르의 유명한 문구 또한 '무'의 생성적 가능태를 보고 있다. 물론 샤르트르는 한발 더 나아가 '무'는 존재를 배회할 뿐만 아니라 존재의 자유로움 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자유로움이 곧 '무'를 규정하는 힘이라 여긴다. 무는 말끔히 삭제된 상태를 뜻한다기 보다는 존재를 위해 무한히 열려있는 가능태에 가깝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로트먼이 제기한 인간이 고안한 무의 세가지 추상적 지표들은 인공적이고 상대적인 존재를 위해 무한하고 자유로운 가능성으로 '배회하는' 것들이다. 인간에 의해 비실제적인 것을 현 실화하는 조건인 셈이다. 현대에 이르러 다시 한번 무의 새롭고 강력한 지표가 등장했다. 0이란 무의 숫자에 1을 덧붙임으로써 만들어진 추상의 디지털 조합은 샤르트르가 얘기했던 존재를 위한 배회에 더 해, 자유로운 존재를 위한 혁명적 토대로 등장한다. 디지털은 가상의 존재를 통해 '무'의 자 유로움을 구체화한다. 이제까지 0의 발명이 현실 세계와 인간에 의한 추상적이고 가상적인 고안물 사이의 근본적 분리를 재촉했다면, 0과 1의 결합은 그 분리와 차이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현실과 인간에 의해 투사된 가상간의 경계 자체를 흐리 고 있다. 디지털 무로부터 존재론적 배양이 무수히 일어나고, 현실의 모사물들이 끊임없이 복제되고, 의식의 새로운 상상물들이 현실로 자리잡는다. 0 혹은 1 디지털 시대의 문화는 바로 0이란 가능태 더하기 1의 존재 형식을 가장 자유롭게 드러낼 때 빛을 발한다. 모든 디지털 인공물의 회귀적 단위인 0과 1을 가지고 은유적으로 놀아보면, 0은 디지털의 가능성을 담고 있고, 1은 0을 규정하는 현실적 권력으로 표현할 수 있다. 1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가능태로서의 0은 항상 1에 의해 조건화된다. 1을 배제한 채 디지털 0을 극한으로 밀고 올라가면, 디지털 현실은 이지러진다. 마찬가지 로 1의 논리로 0의 상상력을 억압하면 디지털의 가능성은 출구를 잃는다. 후자는 0의 무한 한 가능성을 외면하거나 용납하지 못하면 발생한다. 현실의 권력을 반영한 1을 극대화하면, 디지털 정보의 가능성을 과거의 잣대로 억압하는 경향이 발생한다. 거대 복제기계인 네트에 서 피어오르는 자생적이고 자율적인 정보공유의 흐름을 지적 재산권 등의 수단을 동원해 통 제하려는 자본의 욕구는 0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시도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0 과 1의 디지털 인공물은 김빠진 맥주처럼 생동감을 잃는다. 예술적 표현에 있어서도, 인간의 오감이 시대에 따라 변하면 그것을 담을 새 그릇도 같이 준비하기 마련이다. 디지털 매체의 다양한 표현 양식이 1의 오만과 권위로 천박함의 딱지를 달고 변방만을 전전한다면 그것 또 한 0의 압살에 해당한다. 디지털 예술의 정착도 시장주의에 입각한 주류와 비주류 구분에 놀아나도 똑같은 결과를 얻기는 마찬가지다. 1의 시장 논리에 위장된 가짜 0이 판치기 시작 하는 것이다. 한편, 1을 배제한 0의 무한은 '엽기'로 판명되거나 결국에는 1을 위협하기까지 한다. 소위 디지털 행위 예술가들의 몇몇 작업에서 그 극한적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호주 출신의 행 위예술가인 스텔락(Stelarc)은 이미 80년대부터 디지털과 합일되는 신체의 '소멸'을 위한 기 획으로 신체확장 실험을 꾸준히 지속해 왔다. 그의 실험의 최종 목표는 신체에 이식된 기계 가 신체의 명령에 종속되는 단계를 넘어서 기계가 신체의 리듬을 지배하고 하나되는 단계 다. 디지털 0으로만 채워진 극단의 모습은, 신세기 밀레니엄 여성으로 추앙받는 프랑스의 '카날 아트'(carnal art)의 대가 올랑(Orlan)에게서도 관찰된다. 수십차례의 성형 수술을 통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그녀의 신체 모델은, 비록 대상화된 외모의 가치를 부정하면서 다중적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한 작업의 의의를 갖지만 그 궁극적 목표는 스텔락과 마찬가지로 목적없는 신체 소멸관에 귀결한다. 0만을 위한 가능성의 집착은 역으로 그 가능성의 해체만을 부른다. 이들에게 존재하지 않 는 1의 현실적 측면은 정치적 기획의 상실이다. 디지털 기술을 코드화하는, 패권화하는, 그 리고 상품화하는 1의 권력 실체에 대한 의문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들에게 0의 천국은 물리적 신체의 디지털화를 위해서만 유용하다. 그래서, 1에 의해 조건화된 0의 사회적 구조 를 극단적 0의 실험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이들의 퍼포먼스에 충격을 먹은 관객들이 구토와 실신을 거듭하는 것은 그 카니발적 면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1이 빠진 0의 과다 주 입에서 생기는 현기증 때문이다. 0+1, 그리고 α 새로운 '무'의 현대적 지표인 0과 1이 초기 디지털 문화로 정착하는데는 이처럼 시장잡배 와 디지털 광신도들이 설치기 마련이다. 새로움과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디지털 '무'의 존재 는 문화계의 일부 광신도를 낳고, 이를 현실의 이윤과 권력에 종속시키려는 자본 건달들을 키운다. 그러나, 서서히 디지털 코드의 0과 1은 동전의 양면처럼 조화롭게 공생해야 한다는 관점이 늘고 있다. 사람들은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억눌리면 문제가 생긴다는 점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0의 새로움과 1의 현실성이 제대로 결합된 디지털 '존재'일수록 완성도가 높다는 당연한 상식을 조금씩 인정하는 것이다. 디지털 문화의 형성과 적용에 주체적으로 개입하는 움직임이 관찰된다. 크리티칼 아트 앙 상블(Critical Art Ensemble)의 기획도 그 중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다. 앙상블은 1986년 여섯 명이 모여 결성한 미디어 예술 창작집단이다. 그룹 내에서 각각은 자신이 지닌 독특한 능력들, 퍼포먼스, 북 아트, 그래픽 디자인, 컴퓨터 아트, 필름/비디오, 텍스트 아트, 사진, 그리고 저술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앙상블은 예술적 수단을 청중의 성향과 그 특수한 상황 에 맞춰 선택하고 창작 작업에 들어간다. 창작물을 만드는 매체 수단에 중심을 두기보다, 특 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맥락을 중시한다. 매체는 말하고자 의도한 토픽과 상황/맥락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유용하다. 장소에 있어서도 화랑, 박물관, 라디오, 텔레비전, 페스티발, 클 럽, 술집, 인터넷, 길거리 등 예술적 표현이 극대화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 이들은 단지 예술가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폭넓은 학제간 연구의 실험 집단과 같다. CAE 는 예술, 테크놀러지, 비판이론, 정치적 행동주의가 서로 삼투하는 접점을 찾고자 한다. 예술을 정해진 경계안에 가두는 행위는 폭넓은 지식 체계의 접근권을 스스로 막는 행위라 본다.이러한 운동을 수행하는 근거는 기본적으로 서구문화에 깊게 가로놓인 권위주의적 토대들을 드러내고 이에 도전하려는데 있다. 특히 앙상블은 저항 정신을 중심에 놓고 사고한다.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혁명처럼 일시에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환상도 거부한다. 현대 권력은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총체화된 힘이라고 본다. 이들에게 혁명은 죽은 아이디어다. 설사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일상화된 문화에 각인된 권력의 흔적들은 제거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앙상블이 취하는 저항은 영구적이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다양한 층위와 형태 들을 계속해서 뒤집고 조롱하고 비판하는 작업을 끝없이 벌여나갈 수밖에 없다. 차츰 권력 으로부터 벗어난 자율의 영역을 개척해서 세워나가는 것이 그들의 예술적 목표이다. 앙상블이 '무' 혹은 디지털 0의 가능성을 취하는 방식은 이렇듯 디지털 1의 조건을 고려하 면서 이루어진다. 예술적 시연에 있어서 거의 모든 매체들을 이용하는 것과 학제간 영역을 넘나드는 것은 0의 생성적 가능성이다. 매체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창작의 각종 장소들 또한 원하는 결과를 얻기위해 고려되는 선택 범주다. 다시 이들에게 0은 1로 현실적 의미를 얻는 다. 인터넷 시대의 저항 전술에 대한 그들의 기획 저술들과 실천의 고민을 통해 새롭게 변 화된 전자적 저항의 다양한 층위를 구체화하고 있다. 0의 극단을 타면서도 1의 현실감을 결 합하는 앙상블의 집단 창작 속에서 디지털 문화의 변증값, 알파가 엿보인다. 이제까지 디지 털 문화에서 0과 1의 관계는 서로 서먹서먹하거나 각기 평행선을 달렸다면, 이를 가로지르 는 방법을 앙상블과 같은 디지털 시대의 아방가르드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국예술종합학교 200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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