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중앙대대학원신문] 현단계 한국사회의 대안문화

115호 [문화기획] IMF 시대의 문화 - ③`현단계 한국사회의 대안문화 주류를 치받는 대안문화, ‘다르게 행함’에서 비롯될 것 이광석/ 네트분석가 작년 말부터 시작된 금융 위기의 한파로 크게 타격받는 부분은 대중문화 영역이다. 한 연구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IMF이후 소비지출 가운데 가장 먼저 문화비에 대한 지출을 줄이겠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65% 이상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말은 곧 일반 서민들의 생활비 항목에서 문화는 늘 사치비용으로 남아있다는 말일 게다. 마찬가지로 LG, 대우,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들이 영상사업에서 손을 떼거나 투자 규모를 축소하고 있다. 경제기반이 흔들리는 차에 기업의 구조조정과 맞물려, 문화 영역을 군살로 취급하겠다는 것이 기업들의 반응이다. 그러고 보면 호·불황 여파에 따라 춤추는 대중문화의 숙명은 아직까지 문화가 대중의 것으로 전유되고 있지 못함을 반영한다. 더 근원적으로 따지자면, 이같은 대중문화의 휘청거리는 몸짓이란 철저히 시장 경제학의 원칙에 문화를 포섭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90년대 이후에 들어서야 대중들이 맘 편히 향유하던 문화 영역이, 애초부터 자본에 의한 ‘경제적 문화활동’ 혹은 ‘문화적 경제활동’으로 굳어졌던 것은 아니었던가를 되짚어보아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한술 더 떠 한국 경제와 동반 하락하는 최근의 대중문화산업의 침체 국면에 반발하여, 문화계 행정관료나 유관 유학파 출신들이 내놓은 ‘문화경제학’이란 아이디어다. 한마디로 문화를 확실하게 돈벌이로 만들어, 기업에겐 돈이 되고 대중에겐 양질의 문화적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논리이다. 그 동기는 시장경제 내에서 문화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의 상술적 테크닉에서 출발한다. 최초 이 용어를 사용하였던 존 러스킨(J.Ruskin)의 고민은 산업혁명기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 때문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의 보장을 위해 자본주의의 피비린내 나는 이윤 논리에 반하여 생산자들에게 문화적 가치를 향유할 권리를 외쳤던 것이다. 러스킨의 사고가 사회적 문화권을 주장한 것이었다면, 현재 국내에서 압도하는 이같은 아이디어는 경제적 문화권의 논리이다. 돈벌이로 전락한 문화 최근 문화경제학의 논리가 더욱 활개치는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IMF라는 심각한 외환 위기를 맞이하여 대중문화의 싹들이 잘려나가는 상황에서, 관료와 자본 공히 국가 경쟁력을 확대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아예 문화를 사업의 주요목표로 삼겠다는 의도이다. 1998년 문화관광부가 발행한 ‘통계로 보는 문화산업’이란 보고서를 보면, 문화산업 시장규모가 97년에 대략 16조 6천억원(추정치)에 이르고 있는데, 돈이 되어도 한참 되는 영역이란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90년대초 이후로 성장한 대중문화가 자생적이고 자율적 토양이 미처 정착되기도 전에 IMF의 한파에 넉다운되었다가, 이제는 완전한 경제 마인드의 수용을 강요받는 사정에 이르러 사망선고를 받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올 만하다. 물론 돈도 벌고, 문화도 향유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는 반론이 일 수 있으나, 문화는 시장의 성격과 자주 충돌한다. 수많은 소수들이 집합화된 형태가 대중이라면, 대중들의 취향이나 목소리가 다를 것이고 문화의 향유 근거들도 다양할 것이다. 문화 생산과 유통을 틀어쥐고 문화의 방향을 잡아나가는 일부 입심좋은 기호제작소들의 논리란 독점의 논리이다. 그들에 의해 독점된 문화가 현실의 대중을 현혹하다보면 방향은 산업적 통계치와 단일의 문화적 포맷으로 잡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문화적 대중은 스펙타클에 끌려다니는 불특정 다수의 집합적 군상이 아니다. 이제 한국사회에도 자생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문화를 생산하고 즐기는 마니아들과 소수문화집단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에게 문화경제학은 억압의 조건들이다. 그래서 문화에 대한 계몽주의적 대중관, 일의적 문화정책, 대중산업적 지향은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상정되어야 한다. 주변화되지 않는 대안 이른바 ‘대안’(alternative)은 주류를 흠모하거나 대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주류에 대당 관계로써 위치할 수 있는 힘도 없다. 대안은 현실의 주류와 맞먹는 ‘주류적 대안’이 목표도 아니며, 이미 ‘주류적 대안’이 되었을 때는 주류에 합류해 버리는 경향이 강하다. 대안이 대안 능력을 상실해버리면 ‘주변’이 된다. ‘주변’은 주류에 저항하기 보다 주류에 빌붙어 기생한다. 주변화되지 않는 대안은 주류의 장점을 익히나, 동일한 패턴과 규범에 따라 행동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안은 주류화와 주변화라는 양 극단의 불안정한 위치에 놓인다. 물론 추상적 대안과 달리 현실적 대안의 조건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 보통 주류를 그리워하는 대안문화는 소수적 목소리를 주류에 편입시켜 버린다. 이로써 대안의 위치는 주류의 파장만을 유연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주류에 대항하여 대안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위로부터의 독점/시장 권력(potestas)을 소수 문화집단들의 힘(potentia)의 집합된 발현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은 일반화되고 보편화된 문화라고 알려진 권력의 담론에 대해, 다양한 공간에서 소수적 주체들의 목소리를 담아 권력의 정보에 충돌시키는 커뮤니케이션 행위에 가깝다. 신좌파 미디어운동가이자 철학자였던 펠릭스 가따리(F.Guattari)는 이같은 대안실험의 가능성을 ‘분자혁명’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가따리는 권력에 맞서면서도 다양한 주변자들, 소수자를 중심으로 전자적 아고라(agora)를 구축함으로써, 개인들을 주류문화가 강압하는 ‘욕망 모델들’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단순히 과거 산업시대의 대규모 강제적 억압만으로는 이제 통제가 불충분하다. 단지 커다란 사회적 총체뿐만 아니라, 출생부터 자본주의적 욕망의 모델에 대중을 편입시키는 체제로 보았다. 이미 코드화 되어있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에, 그어진 선(line) 안에 대중을 가두어두는 것을 문제시하였다. 그래서 그는 권력의 담론이 강요하는 그어진 선 밖에서, 성립된 주체를 벗어나, 그리고 초코드적 의미작용에 반발하여 ‘무수히 다양한 분자적 욕망’ 에너지를 해방시키길 바란다. 그는 단수적이고 소수적인 욕망들을 다양성으로, 유동성으로, 시공간적 가변성과 창조성으로 드러내는 대안문화가 가능함을 주시했던 것이다. 한편 소수자들의 대안문화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기는 하지만, 지배문화에 대한 사회·문화적 정의는 여전히 유보된 채 남게 된다. 저항의 과정과 자생성의 분출로는 지배/주류 문화에 대한 타격은 어림없다. 지배/주류에 대한 교란과 소음만 있을 뿐이다. 저항과 대안의 지배적 주류화가 빗나간 전략이라면, 지배/주류에 대한 전국적 수준의 저항과 대안은 각 단위들의 연대와 네트워크화로 가능하다. 단위적 저항과 전국적 저항의 투쟁과 쟁점 모두는 중요하다. 이를테면 소수문화집단들의 전국적 저항의 예로는 그 투쟁의 결과들을 국가 문화정책에 투과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가따리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인습적인 형식과 장르 바깥에서 대안적 문화와 담론 양식을 지속적으로 제공함과 동시에, 이들의 연대를 통해 주류문화에 대한 도전과 이에 따른 정책적 입법화를 함께 도모해야 한다. 가따리가 문제시했던 단일화된 지배적 문화양식과 정책의 조건들은 아직도 살아 있다. 핵심적으로 변한 것은 대중의 환경이다. 인터넷의 보편화, 마니아들의 성장 등을 포함한 근본적인 사회·문화적 양식의 격변을 보여주는 징표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조건들은 시장/독점망에서 비어져 나오는 대안문화의 집합적 연대의 불꽃을 피우게 한다. 특히 네트는 기술적인 가능성과 함께 발·수신자 없는 발언의 가능성을 모두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발언에 대한 독점’뿐만 아니라 ‘기술수단에 대한 독점’의 탈주에 공히 가능성을 높게 두고 있다. 예컨대 주류문화에 대한 기술적 저항으로 시민운동진영에서의 캠코더를 이용한 다큐멘터리 제작, 소수문화 운동가들의 커뮤니티 라디오, 웹진 등의 전자출판,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독립 CD 제작, 컴퓨터 해커들의 사회적 해킹, 가상공동체들의 사이버 결사와 집회, 멕시코 사빠띠스따의 정보게릴라전, 노동자들의 정보교육운동 등이 다각도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정치실험들은 지배적 약호에 대한 저항 뿐만 아니라 기술적 수단을 소수문화집단들이 적극적으로 자기가치화하는 사례로 평가되어야만 한다. 처음부터 기술적 독점에 대한 저항을 통해 지배적 수사에 대한 독점 자체를 차단하여 주류에 거역하는 자발적인 대안문화를 발현시키는 운동은 수사적, 기술적 저항 모두를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저항의 형식 변화가 이루어진 데는 대안문화 형성에 있어서의 주체 변화가 이미 자리한다. 과거 한국사회에서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분출했던 문화투쟁은 노동자 문예운동을 필두로 하여, 비디오, 영화, 사진, 팩스, 판화, 벽화, 깃발 등의 다매체를 동원한 민예총과 대학서클, 예술가 집단 중심의 예술운동과 진보적 문화운동 등으로 표출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대안문화 구성체들은 재정의 열악함, 대중 기반의 취약성, 그리고 일괴암적인 체제 이행의 지향성만을 내다보고 진보적 가치와 대중적 가치를 분리하여 사고함으로써, 대중적 가치에 편입되거나 급진적 가치만을 부르짖으면서 근근히 유지하거나 사라지는 수모를 겪었다. 거시적, 일방향적, 계몽적, 단선적인 위로부터의 문화운동관이 문제였던 것이다. 노동자를 포함한 대중들은 계몽의 대상이었지 문화생산의 주체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리고 조직적 대의에 소수의 목소리를 스스로 감춰야 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혁명과 변혁을 얘기하지도 않으며, 그같은 감성과 대의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정세는 과거에 비해 한결 나아졌다. 사회화된 권력의 파장이 엄청날수록 물러날 곳 없는 문화 주체들의 갈등과 꿈틀거림이 격해지고 도도해지기 때문이다. 주류문화에 억압된 ‘욕망’을 탈주하려는 수많은 소수문화들이 자생하며 버팅긴다. 노동자를 포함한 학생, 여성, 동성애자, 빈민, 양아치, 삐끼, 청소년, 게임돌이, 소수 마니아 등등. 이들은 자신만의 문화적 포물선을 그리면서 주류의 지형에 흠집을 내고, 그 그어진 경계를 지워버린다. 주류에 대한 저항함수로서 소수문화 앞으로 지배적 문화는 소수집단들의 문화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 반대로 이들 소수문화들은 주류문화의 물신들을 골고루 먹어치운다. 일본의 닌텐도세대인 ‘오타쿠’처럼, 이들은 문화소비자이자 생산자이다. 주류를 먹고 사는 대안적 문화 형성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주류문화를 즐기다 주류에 포섭되는 경우를 쉬 볼 수 있다. 그러나 쉼없이 팽창하는 단수적 문화 행위자들은 기업문화의 폭격에 맞서 여기저기 참호를 구축하며, 문화 생산/소비자 관계 구조의 대안적이고 모범적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이젠 다르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다르게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경제적 논리에 문화적 가치가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도, 주류에 억압받는 소수 집단들의 욕망분출의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다. 결국 주변화하지 않는 대안문화의 구성여부는 소수집단들의 주류에 대한 저항함수로 보아야 하며, 수많은 욕망들을 생산하고 결집하는 데 달려 있다. [중앙대대학원 신문, 2003. 3]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