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사이버문화정치-6장] 네트의 시민운동가들: 전자프런티어재단(EFF)과 그 구성원

*제 1996년 책 <사이버 문화정치(문화과학)>의 디지털본을 유실하고, 다른 곳에서 이 문서만을 발견했습니다. 참고바람. 6장. 네트의 시민운동가들: 전자프런티어재단(EFF)과 그 구성원 1. 전자 결속의 희망 근대사회 이래로 시민사회의 영역은 공론장(public sphere)으로서 보다는, 어지 중간한 선에서 국가 권력과 대중을 화해시키거나 조율시키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국가 권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시민운동은 혁명이란 완벽한 체제 이탈을 막는 도구로 양성화시키는 측면이 강했고, 민중적 시각 에서 보자면 의회적, 합법적 틀거리 속에 그들의 주장이 이입될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시민운동은 여타 실천 지형에서의 역량에서 보다 그들 국가의 성격에 크게 좌우되며, 그 합 의 과정이야 어떻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가치가 그나마 유지되는 국가일수록 시민운동 영역과 쉽게 결합되는 측면이 강했다. 요컨대, 국가권력의 여하에 따라 시민권은 수축/팽창하거나 권력 의 경계 외곽으로 밀린다. 그들에게는 주로 정책적, 입법적, 행정적 현안에서의 여론화를 통한 법 안 수정 작업이 주목표가 되며, 운동의 전술은 대중매체 활용, 거리 시위, 팜플렛 배포, 피켓 동 원, 연구실 실험 등 다양하게 펼쳐진다. 그들은 물리적 폭력성을 응축한 도구들의 과격한 사용을 철저히 배격한다. 근대적 폭력 수단을 무장해제 시킴으로써, 시민운동은 체제 혹은 제도권에 대 한 영향력을, 그리고 보다 원활한 대중적 입지를 획득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한편 그들은 특 수한 지반성에 기초한 집단적인 주장을 통해 대중성을 확보한다. 이들은 이해에 기반하여 혹은 인구통계학적 변인에 따라 정체성을 구획 짓고, 자본/노동 대당관계에서의 근본적 모순만큼이나 스스로를 동등하게 취급하려 애쓰며, 자신의 가치를 옹호하고 변호한다. 이제는 이들 집단이 가 진 태생성과 함께 사안별, 이슈별 공동화가 오히려 대중에게 적극적인 소속 의식을 심어준다. 역 사적 맥락 하에서 보자면, 뭉뚱그려 좌파라 호명되던 일단의 그룹들은 시민운동권과의 연동이 가 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계층이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이 급진적 인자들은 종종 명분상의 이유로 제도권과 자연스레 공동 전선을 형성하거나 편입되는 경향이 있었다. 일부는 정치권력과 노선상의 부조응으로 인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길을 찾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시민운동권 내 부에서 자유주의적 좌파라고 불리길 바라는 엘리트 상층부가 개혁적 정당과 조우하는 경우는 다 반사이다. 정권의 측면에서 보아도 시민운동 진영을 합의와 동의의 기제로 끌어들이는 일은 중요 하며, 여론정치를 이끄는데 중요한 동력이 된다. 어쨌든 비합법적 수단을 통한 총체적인 전망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실천 방식의 변화를 꾀하는 시민운동권의 움직임을 읽어낼 필요는 있다. 과거와 달리 시민 계급·계층간 이동성에 의한 집단화는 더욱 극대화되는 추세이다. 네트의 디지털 정보가 패킷(packet)으로 쪼개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주소지를 찾아다니다 결국 하나의 정보로 합쳐지듯, 광통신에 떠다니는 각양각색의 정치적 주장과 논쟁의 경합('flame wars')은 살 아있는 유기체처럼 전자게시판에서, 뉴스그룹에서, 채팅공간에서 이합집산하며 꾸물꾸물 전자조 직을 구성한다. 물리적/물질적 공간이 주던 지역적 한계가, 전자공간의 네트워크적 속성으로 말 미암아 그 틈새를 메우고, 그 외연을 비트로 확장시킨다. 전자네트워크로 인해 전세계의 내노라 하는 NGO의 활동 폭이 더욱 커져가고 있다. 범지구적으로 집단과 집단, 조직과 조직의 연대와 연합의 활로가 새롭게 펼쳐지고 있다. 이제 권력과 자본이 새롭게 직면한 문제는 이같은 네트워 크형 조직들을 재흡수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나는 당연하게도 NGO 의 힘을 확장하는 비트적 공간이 바로 이 굳건한 현실에서의(on the ground) 투쟁을 대체하기 보다는, 현실의 투쟁을 가시화하고 이를 엮어낸다는데서 그 공간적 실천의 출발점을 두고자 한 다. 대항 집단들이 시도하는 아래로부터의 횡단적 연결이, 그 수위에서 '가상코뮨'(virtual commune)이나 '제 5 인터내셔널'(fifth international)의 붉은 기가 휘날리는 이상적 전망으로부터, 마을공동체의 신화에 사로잡힌 비트적 연장물, 즉 가상공동체라는 조금은 철부지한 영토관에 이 르기까지 다양하나, 이와 같은 미래적 전망은 실천 주체들이 가늠하는 구체적 현실과의 목적의식 적 결합 속에서만 가능하다. 어쨌거나 네트 문화정치의 미래 기획에 있어서 이 모든 동적인 움 직임들이 현재 정보"자본주의를 배회하는 유령"임에는 분명하다. 80년대 극소전자혁명에 의한 '비트뱅'(Bit-bang)의 파고가 좀 더 특이하게 네트행동주의 (net.activism)에 영향력을 발휘한 사례는, 자유주의적 시각의 변종들이 우글대는 미국에서 시작 되었다. 네트를 아직 개척되지 않은 미 서부에 비유하여, 이 공간에 대한 디지털적 해석과 새로 운 가치를 창출하려는 수많은 그룹들이 번창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특징적인 면모를 지닌 집단 은 단연 '전자프런티어재단'(EFF: Electronic Frontier Foundation)이다. 최근 네트의 정치, 사회, 문화적 가치 논쟁과 관련하여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으나, 보다 이들을 차별화하는 것들은 크게 정치적, 현실적 영향력과 그 구성원들의 엘리트적 명망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국내에서도 EFF의 활동에 대해서 간헐적인 언급이 있었으나, 이 단체의 출생 배경과 현실 활동,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면모에 대한 논의를 좀 더 장황하게 풀어갈 필요가 있다. 2. 사이버엘리트들에 의한 EFF 결성 60년대말 해커들은 순수한 정보욕에서 출발하여, 70년대 정보공유 정신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80년대 이후 대다수가 디지털자본으로의 병합이 이루어졌고, 그 주변에 디지털 지하세계의 탕아 들이 잠복하고 있는 형세였다. 이 문제아들의 정치적 성향에서 비롯된 사회적 해킹, 혹은 프리킹 으로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사례들이 급증함으로써, 특히 미국방성을 비롯한 정부기관, AT&T 등의 전화 회사, 물리학이나 핵개발 관련 연구소 등이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이런 상황 에서 해커에 대한 대대적 진압은 필수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 일명 '선데블 작 전'(Operation Sun Devil)이라 불리는 디지털 지하세계에 대한 대검거 작전이 수행되었다. 일반 적으로 네티즌에 대한 억압적 상황을 상시 검열과 불시 진압으로 가름해 본다면, 해커단속은 전 국적인 규모로써 후자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해커들은 이 사건을 통해 철없는 문제아에서, 현대문 명에 도전하는 사회의 불순세력으로 급상한다. 시크릿 서비스의 잇따른 해커들의 검거, 수색과 압수가 이루어졌고, 개중에는 부당하게 혐의를 받고 재판에 기소되는 해커들도 존재했다. 스털링 은 선데블작전의 공세로 자국내 상황이 '해커 히스테리'적 분위기였으며, 궁극적으로 미사법부와 디지털자본이 사이버공간에 내린 1차 경고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S279) 경고는 좀 더 강한 경 고와 폭력이 장차 동원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경고는 매카시의 마녀사냥만큼이나 정치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EFF는 이같은 해커사냥에 대응하여 만들어진 시민자유론자들의 단체이다. 예컨대 시크 릿 서비스가 검거 중 보여주었던, 컴퓨터장비와 데이터 압류, 출판 등의 표현물에 대한 제한, 부 당한 폭력 등에 맞서, 그들은 기금 모금, 법적 행동과 후원 등으로 정세를 반전시켰다. 이같은 정부의 독단적, 억압적, 비합의적 월권에 반응하여, 네티즌들을 보호하는데 사법적, 제도적 투쟁 을 거쳤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것이 EFF의 출생 배경이다. 그래서 EFF는 일명 '해커 변호재 단'(hacker defense fund)이라는 별칭도 얻게 된다. EFF의 초대 설립 멤버는 제리 버만(J. Berman), 마이크 고드윈(M. Godwin), 존 페리 바를로우(J. P. Barlow), 미첼 케이퍼(M. Kapor), 스튜워트 브랜드(S. Brand), 에스더 다이슨(E. Dyson), 존 길모어(J. Gilmore), 워즈 니악 등으로 구성되었다. 비영리, 비정파적 조직으로서 EFF는 기본적인 시민권 보호를 최우선으 로 삼고, 보다 나은 방식으로 사이버공간을 규제할 수 있는 법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부당하게 기소되는 해커를 변호하는 법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EFF는 1992년 이전에 미국시민 자유연맹(ACLU: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의 행동가였던 버만이 맡고 있는 워싱턴 사무 실에 추가로, 현재 법률고문인 고드윈을 고용하여 새로운 지부를 세움으로써 풀뿌리 행동주의자 들의 강력한 조직으로 진화한다. 어느 정도 EFF는 두 가지 행동주의적 접근을 수용하려고 노력 했다. 그 단체는 새로 세워진 캠브리지 지국 중심의 '풀뿌리 모델'(grassroots model)과 애초 워 싱턴 본부에서의 '로비 모델'(lobby model)이라는 두 가지 모두를 채택함으로써 정치 행동의 효 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1993년에 EFF는 대정부 로비활동, 법률작업 등으로 활 동 영역을 축소하고 캠브리지 사무실에서 철수한다. 1994년 미국내 절충적인 전화법안에 대한 지 지로 인해, EFF의 '로비 모델'은 행동주의자들에게 거센 비난을 받으면서, 재정 문제와 회원들의 사분 오열로 조직적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그 후 버만은 EFF를 떠나 민주주의/기술 센터(CDT: Center for Democracy and Technology)를 만들고, EFF는 미서해안의 베이 지역으로 이동하여, 다시금 풀뿌리적 기초를 고려한 효율적 행동주의 조직으로 거듭나게 되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 다. 문제는 그들이 일차적으로 프라이버시, 액세스, 자유 의사표현과 같은 실리콘 밸리의 디지 털 기업의 시각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후에서 살펴보겠지만 그들은 일종의 시장 지향 적 정치행동주의에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이 생각하는 자유롭 고 개방된 조건하에서의 사이버공간 구축만이 시장 체제와 어울릴 수 있다는 확신에 EFF도 동 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미국 의회내 민주당-실리콘 밸리-EFF의 삼박자의 구성은 국가-자본-시민의 3요소를 대표하는 21세기 정보초고속도로의 주체로 정리되고, 동시에 현실 미래적 비전으로 자리잡기 위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 어쨌든 EFF의 영향력 하에서 수많은 사이버 시민단체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자국내 EFF-오스틴 등과 국외의 EF-오스트렐리아, EF-캐나다, EF-아일랜드, EF-일본, EF-노르웨이, EF-스페인이 만들어졌고, 또 다른 비슷한 류 의 시민단체들, 즉 CDT와 그 소속단체인 CIEC(the Citizens' Internet Empowerment Coalition), VTW(Voters Telecommunication Watch), 원래는 NTE(Not the EFF)이라는 명칭을 지녔던 뉴욕의 SEA(Society for Electronic Access) 등이 생겨났다. 3. 자유방임의 전자프런티어 정치학 EFF는 그들의 활동을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고 있다. 첫째, 근본적인 시민권의 보장 을 위해 노력한다. 둘째, 네티즌의 권익을 대변한다. 셋째, 커뮤니티를 구축한다. 먼저 시민권과 관련한 그들의 활동은, 네트 범법자 재판에 대한 스폰서 역할, 법적 권리에 문제가 있는 회원에 게 자유로운 전화서비스 제공, 시민권과 관계하는 정보백서 발간 등으로 압축될 수 있다. 네티즌 의 권익은, 예컨대 '공통된 소통원칙'(common carriage principles)에 입각한 자유로운 의사 표현, 네티즌의 정보접근권 확보, 네티즌의 사생활 보장, 정보생산물의 자유로운 분배 등에 입각하여 정책적·사법적·기술적 수단을 동원하거나 이를 지지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커뮤니티의 구축 은 우선 풀뿌리 조직의 건설과 이에 대한 지원, 그들에 대한 법적·기술적 자문, 그리고 EFF의 다양한 매체전술, 기관 발행물을 통한 선전으로 구성된다. 그들의 매체 전략은 다양한 채널에 걸 쳐 있다. 그들의 가장 큰 소구 대상은 온라인 공동체들이다. 신생 혹은 기존 정보시민단체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확대하기 위한 작업으로, 그들은 기관지인 계간 <이펙터 EFFector>와 전자 뉴 스레터인 <이펙터 온라인 EFFector Online>을 발행하고 있다. EFF는 자신의 FTP, 고퍼, 웹 서 버를 운영하면서 전자도서관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엄청난 관련 문서들을 저장하여, 서치엔진 등을 통해 열람할 수 있게 해놓았다. 또한 유즈넷의 뉴스그룹(comp.org.eff.talk)과 함께 인터넷 포럼을 구성할 수 있게 하여, 웰(WELL), 컴퓨서브(CompuServe), 제니(GEnie), 워먼스 와이어(Women's Wire) 등의 네트워크에서 풀뿌리 활동가들의 논쟁장인 게시판을 운영하고 있다. 전자적 홍보와 구분하여 그들의 온라인 행동주의의 가능성은 전자메일 캠페인과 온라인 정치 조직화의 사업에 서 이루어진다. 한때 국내에서도 크게 알려지게 되어 큰 호응을 받았던 블루리본 캠페인, 그리고 FBI의 반테러법안에 반격하여 '사회적 책임을 생각하는 컴퓨터 전문가모임'(CPSR: Computer Professionals for Social Responsibility) 등의 시민단체들과 함께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외 쳤던 '골든키 캠페인'(Golden-Key Campaign)은 바로 이러한 네트 시민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써 평가할 수 있다. EFF는 사이버공간을 비적대적 방식으로, 그리고 약간은 질서 잡힌 개척지로 여기면서, 그들 자신이 컴퓨터 사용자와 법 집행자들간에 논리적 가교 역할을 한다고 자임한다. 그리고 이들은 상대적으로 제도권의 정당 정치에 입각하여 네트를 주목하지는 않는다. 정당 정치가 정부의 위계 구조를 반영한다면, 컴퓨터를 매개로 한 사이버행동주의는 어떠한 제도 정당이나, 위계구조, 기성 원칙을 위배한다. 사이버행동주의자들은 정교한 철학이나 강령을 구성하려 애쓰기보다는, 관성화 된 신념체계를 정보와 주장의 사이클로 대체하여 그에 걸맞는 네트망을 구축한다. 일반적으로 테 크노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경향성을 공유하고 있다. 60년대 히피의 변종들은 비합법적 해커들만 이 아니다. 산업시대의 잉여가치를 탈산업시대의 가치체계로 포섭하려고 실리콘 밸리에 들어가거 나, 혹은 합법적 시민운동 지형을 통해 구체적인 자유주의 정신을 선전하려는 일군도 있었다. EFF의 구성원들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같은 역사적 맥락은 EFF의 구성원들 의 면모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EFF의 마담격인 바를로우는 대단히 특이한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1980년대 후반에 공화당원으로 활동했으며, 한때 히피 록그룹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의 작사가이자 와이오밍주의 목축업자이기도 했다. 스털링에 따르면, "그는 시인과 같은 간 결하고 다채로운 문체를 소유했다. 그는 또한 저널리스트의 날카로움, 즉석에서의 기지, 그리고 개인적 매력으로 볼 수 있는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S235). 바를로우는 사이버공간을 디지털 추상공간의 은유에서 미서부 시대의 전자적 개척지로 표현함으로써, 네티즌들에게 그 공 간을 현실로 사고할 수 있게 하는 문필가적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사이버공간을 정착될 과정으 로서의 개척지며, 산업시대의 무분별하고 힘센 이주민들에게 네트의 원주민들이 위협받는 공간으 로 바라본다. 그가 보기에 수세기전부터 '산업시대의 정권'이 자행한 물질세계의 통치권은 사이버 공간에 통용되서는 안되는 '프런티어'이어야 한다. 그 곳은 질서, 권위, 통제 등의 물질공간의 속 성이 온존하고 확대되는 곳이 아니라, 사이버공간 자체의 불문법, 즉 계약, 관계, 사유 등으로 이 루어진 질서 잡힌 '마음의 문명'이 세워질 곳이다. 그리고 그에게 사이버공간의 정보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체험되는 '활동'(an activity)이며, 자유롭게 복제되고 변화하는 '생 명체'(a life form)이며, 소유라기 보다는 '관계'(a relationship)이다. 이같은 정보의 영상화된 조 합으로써 사이버공간은 과거의 권력/자본이 아직까지는 배제된, 희망의 설원으로 남아 있다. 한 편 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네트시민운동의 거물로 알려진 케이퍼도 현실에서의 사업가다운 기질 과 자유주의적 성향이 그의 바탕을 이룬다. 바를로우보다 케이퍼는 더욱 대단한 재력가다. 그는 EFF 설립 후에 미국내 상위 1-2%에 들 정도의 거부였고, 첫 해 약 25만 달러의 EFF 예산을 순 수한 사비로만 충당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S286) 앞서 EFF의 두 가지 모델 중 '로비모델'을 들었던 것처럼, 미국의 특수한 전통 하에서 EFF의 의회로비는 주요 법안처리와 관 련하여 중요한 실천 영역을 차지한다. EFF 노선 안에서 이 두 모델 중 어떤 쪽을 택해야할지 조 직내 진통을 겪기도 했지만, 만약 현실적으로 그들이 자금력과 지명도가 없었다면 EFF의 성장이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구성원들의 경제적 능력은 대외적 효과 면에서 정적인 상관 관계를 지녔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케이퍼는 비관료적 면모와 함께, 미국의 자유주의적 전통을 '제퍼슨 자유주의'(Jeffersonian Liberalism)로 표현하는데 앞장선다. 제퍼슨주 의의 핵심은 엘리트주의에서 평등주의로, 위계적 질서에서 탈중심화된 구조로 변화하는 개인주의 적 자유주의의 이상 실현이다. 그에게 사이버공간이 바로 이 제퍼슨주의를 발현할 토양이 된 다. 문제라면 전자공간에는 권력의 과도한 개입과 자본의 상업화가 자유주의를 억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볼 때 궁극적 장애물은 거대기업이며, 사적 기업들의 시민권 부식에 대한 정부의 감독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더불어 정부는 네티즌의 자유를 가로막아서도 안되며, 공익을 고려하는 선에서 최소로 개입하고, 조정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본다. 바를로우는 기술적 관점에서, 암호화 기술과 패킷전환 아키텍쳐가 결합되어 수많은 네티즌에게 퍼져나간다 면, 이같은 권력의 통제권은 상실될 것으로 예견한다. 즉 사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는 기술적 프로그램의 확보를 통해서 보편적 자유가 실현될 것이라 보고 있다. 요컨대, 네트 공간안에서 표 현의 자유, 암호화를 통한 사생활 보장, 비차별적 액세스권, 정당한 지적 재산권 설정, 거대자본/ 권력으로부터의 네티즌 보호 등등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 사회적 자유주의의 실천 대상들이다. 아직까지는 더 지켜보아야 할 상황이지만, EFF가 시민운동단체로서 성공한 요인은 크게 보 면, 보수화된 미국내 정서에서 그들의 자유론적 논지가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 일정 정 도 미행정부와 밀접한 공조 관계를 지닌다는 점, 미래적 전망에 있어서 EFF내 구성원들이 정보 사회론의 제도적 지형을 형성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엘리트들이라는 점, 재정상의 능력을 통해 시민운동의 난점을 뛰어넘었다는 점 등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4. 사이버공간의 독립선언? 하이퍼 미디어연구소의 바브룩은, 바를로우의 [사이버공간의 독립선언]을 '캘리포니아 이데올 로기'의 파산 선고라고 단정한다. 여기서 '이데올로기'의 발원지는 미서안의 실리콘 밸리이며, 그 연합전선은 신우익(클린턴/고어 행정부, 민주당, 기술관료 등)과 미서안의 하이테크기업들, 그리 고 시민운동 진영으로 짜여진다. 이들 가상계급 전선에게는 새로운 제퍼슨 민주주의의 부활에 대 한 약속이 내부의 결속을 유지했다. 그러나, 바브룩은 그들 사이에서 '이데올로기'적 모순, 즉 신 좌파인 EFF를 비롯한 사이버 시민운동단체들의 급진성, 그리고 신우익과 자본가들의 보수성 사 이에서 빚어진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전자의 자유 정신에 입각한 '사회적 자유주의'와 후자의 자유시장 원리에 입각한 '경제적 자유주의'가 '하이테크 제퍼슨 민주주의'라는 지주로 버티다, 결 국 후자의 승리로 끝나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연합을 끝장낸 정책적 현실물은 1995년의 전 기통신 개혁법안의 통과이다. 탈규제의 수사와 시장지상주의로 가득찬 이 법안은, "큰 것은 더욱 크게, 그리고 더욱 수직적으로 통합되도록 의도된" 기업논리의 대변자(by and for business) 구실 을 했다. 즉 급진/진보의 내용은 대중성으로 귀결되고, 급진적 히피 출신의 신좌파의 자유주의 전통이 우파적 시장경제의 이상에 압도당한다. 그래서 바브룩은 바를로우의 [선언]이 신좌파적 입지의 상실에 기초한 선언이라고 주장한다. 즉 우파와 좌파간의 동침을 가능하게 했던 신좌파적 자유정신이란 단서조항도, 시간이 진행함에 따라 우파적 상업화 논리의 헤게모니에 밀려, 결국 초현실의 지점, 즉 전자개척지의 목가적인 카우보이가 되기를 부르짖는 도피성 [선언]을 작성하 게 만들었다고 본다. 이제 그는 사이버공간의 '코요테'라 불린다. 바를로우는 "디지털 도시 안에 서 삶의 사회적 모순에 직면할 수 없게 된 가운데, 이제 전자 개척지에 사는 가상 카우보이들과 합류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고독하게 테크노 벌판을 어슬렁거리는 테크노히피가 된 것이다. 이러한 정황 하에서 그나마 현실에 개입하려 했던 좌파적 사이버히피들은 사이버공간의 변방에 내몰리고, 이미 그리고 점차 네트 홍보자들의 신화가 현실을 독점하게 된다. 미국의 히피적 전통 도 현실적으로는 사회성을 결여한 자유지상주의로, 신우익의 경제적 자유주의의 우세 논리로 귀 착된 것이다. 바브룩의 평가와 함께, BS 편집자인 조셉 로커드(J. Lockard)의 견해도 눈여겨볼 만하다. 로 커드는 바를로우가 '반사회적 단자론(monadism)'에 기반하고 있다고 본다. 즉 사회적 욕구와 인 간의 상호의존 보다는 사적인 전자 정보에 대한 보안망을 치는데 치중하는 행위는 고립과 특권 에 기반한 정서라고 말하면서, 이는 결국 반공동체적이고 자유방임적인 전자프런티어 정치의 고 립적 효과로 드러난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그의 [선언]에서 얘기하는 '테크노 개척정 신'(techno-frontierism)은 이른바 '추한' 역사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행동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다. 본인이 볼 때, 보통 디지털공간의 '개척지 은유'는 건설, 완성되어야 할 것으로 디지털공간을 바 라봄으로써, 현실적으로 곧장 자본주의적 식민화와 결합하는 경향이 강하다. 바를로우는 추상적 으로 테크노 개척지를 자유와 정신의 공간으로 논함으로써, 식민론자들에게 무력화되고 만다. 다 시 말해, 그는 공간을 현실/가상으로 이중화하여, 은유적 가상공간을 실제의 탈공간 영역으로 간 주함으로써, 가상공간을 현실 공간의 역학과 동떨어진 환상의 어떤 곳으로 놓고 있다. 이 부분이 그의 신좌파/히피적 자유주의의 속성에서 연유한 논리적 귀결인지도 모른다. EFF의 구성원들을 살펴보면, 앞서 보았듯이 정치적 근원에서 그들은 히피의 급진성을 거세하여 사회성이 결여된 자 유지상주의의 신좌파적 사고와, 정부와 하이테크 기업의 신우익적 행동 방식이 뒤섞인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결국은 그의 이상과 무관하게, 사이버공간의 미래 전망은 현실적으로 최소한의 정부권력/기업논리 개입론, 더 나아가 클린턴/고어 행정부의 구상에 입각한 '정보초고속도로'로 귀착되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미국내 네트 시민단체들은 복지, 환경, 국방, 과세 등의 정치적 문제를 등한시하 고, 일종의 기본권 운동으로 그 급이 격하된 측면이 강하다. 그리고 EFF의 사례를 통해 보았지 만, 시민단체의 이상이 정부와 자본의 논리에 말려드는 형세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보 여준 장점은, 미래 비전과 관련하여 시민단체가 적극적인 제도 개입을 할 수 있다는 것, 가상공 간의 시민 조직이 현실적으로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사안별로 대중의 실천력을 몰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오히려 시민단체들의 목적 의식적인 네트적 결합을 도모함에 있 어서 봉착하는 문제는, 특히 기술과 관련된 자금, 그리고 지속적 정보 흐름의 유지에 필요한 '학 습곡선'(learning curve)과 시간 등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문제점들은 단기적으로 현 시민단체들 을 괴롭힐 수 있는 난제이며, 일정 정도 인터넷이 범용화되면 풀릴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요 컨대, 변화되는 현실 지형에서 이제는 한 집단이 지닌 급진성의 추상화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 집단 속에서 모색하며 이루어내는 사안들의 관철이 전술적으로 더욱 중요해진다고 볼 때, 후 자에 가까운 EFF는 새로운 사이버 시민운동의 성공적 사례로써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