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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컴개발론에 밀린 공동체 삶
[한겨레]2000-12-22 05판 25면 1287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며칠전 진보적인 독립 출판업자들의 배급을 도맡아 해오고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아나키스트 출판사 편집인으로부터 전자우편이 날아왔다. 같은 주의 오클랜드로 이사를 가는데 일손도 필요하고 자금도 필요하다는 구원 요청이었다. 도서창고의 임대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 떠난다는 착잡한 편지였다.한 영세 출판사의 이런 반강제적인 퇴거는 이미 1997년부터 시작된 샌프란시스코의 닷컴 지역개발의 작은 피해 사례에 불과하다. 자유분방한 보헤미안들의 고향답게 이 지역은 많은 예술가.문인과 지역 문화운동가들이 상주하고, 지역공동체의 다양한 가치를 잘 유지해온 독특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제 미국내에서 가장 빠르게 닷컴 경제에 맞춰 지역적으로 재구조화를 겪고 있는 도시로 탈바꿈했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닷컴기업들로 인한 교통체증, 집값상승, 재개발붐 등은 대다수 지역주민들을 외지로 내몰았다. 아나키스트가 있었던 미션 지역은 예전에 노동자들과 중남미 이주민들이 밀집해 있던 곳이었으나, 이제는 400개 이상의 닷컴기업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 지역의 닷컴기업 유치와 개발은 예술인.비영리단체.지역인사들의 '저성장' 지지론으로 한때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올여름 지역단체들은 3만명이 넘는 시민의 청원을 받아 윌리 브라운 시장이 추진하는 닷컴개발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이른바 'L안'을 내놓았다. 이 안은 지난달초 시의 장단기 발전계획을 묻는 시민투표에 상정됐으나 아쉽게도 브라운 시장이 내논 닷컴개발안을 거부하는 데 실패했다. 개발 억제의 마지막 수단이었던 이 안은 닷컴 경제의 확대를 일부 지역에 묶어두고, 그외 지역은 비상업지구와 예술공간으로 보호하려는 심각한 문제제기로부터 출발했다.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 등 지역신문들은 닷컴개발론의 승리를 브라운 시장의 집요한 선거 전술의 결과로 보고 있다. 그는 L안을 반대하는 지역 텔레비전과 전단 등의 광고비로만 250만달러를 지출했다. 또한 제 삼자를 통해 이 안에 대한 무효 소송을 집요하게 이끌고, 자신의 개발정책에 반대한 한 공무원을 해고하는 등 저강도의 더러운 전술을 다양하게 구사했다.
이제 샌프란시스코에는 개발론자와 지역운동가 간에, 닷컴성장론과 전통적 가치 간에 가로지르기 힘든 선이 놓여 있다. 언제까지 여러 단체들이 치솟는 임대료를 지불하면서 도시에 계속 상주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한 도시가 지녔던 정치.사회.문화적인 미덕은 신종 닷커머들이 향유하는 여피 문화의 가치로 채워져가고 있다. 매서운 한겨울에 떠나야 하는 출판사의 뒷모습이 영 개운하지 않다.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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